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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77화 (177/181)

〈 177화 〉 외전) 몽중화 (10)

* * *

모든 것은 늘 갑작스레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놀라운 일이든, 상상치도 못한 일이든, 아니면 이미 어느 정도 마음속으로 담아두고 있던 일이든.

“좋아해.”

교차하는 회전목마 사이에서 수현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아이린은 제 귀에서 웅웅거리며 울리는 목소리가 거짓말인줄 알았다.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 얘기에 순간이나마 어두워진 분위기였다.

회전목마의 불빛이 꺼지며 순간 놀란 그 사이에 들려온 목소리란,

아이린의 상념을 깨부숴 단숨에 현실 속으로 되돌려놓기에 충분했다.

“...네?”

암전된 세상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보인 것은 삐걱거리며 다시 회전하는 놀이기구의 불빛이었다.

별빛처럼, 이 어두컴컴한 놀이공원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건 오로지 이 회전목마 뿐이었다.

움직이는 목마가 교차해 마침내 맞닿았을 때, 아이린의 옆에서 움직이는 목마로 갈아탄 수현은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었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저 생각나는대로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 고백을 받아준다면 좋았고, 거절한다면...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집에 가서 혼자 몇 번 울고 끝낼 일이었다. 미련이야 남겠지만,

싫다는 사람을 붙잡아 다시 고백할 용기는 아직 수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방금...뭘 들었죠?”

“정말 못 들었습니까?”

“방금은 그렇게 말 안 했잖아요! 그으, 편하게 얘기한다면서요.”

“다 들었으면서.”

거기까지 들었으면, 그 다음으로 한 말까지 전부 들었을 게 뻔하지 않은가.

수현이 작게 눈살을 찌푸리자, 그런 수현의 눈치를 힐끔 살피던 아이린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아한다는 그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애초에 지금 그 대답을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싫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고, 지금 당장 그 고백을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면.

그것에 대해선 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린의 침묵이 길어지자,

한차례 숨을 길게 들이마신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멈춰버린 회전목마 아래로 가볍게 착지했다.

대답을 기다리고 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리 되니 조금 실망스러운 기색은 감추지 못할 듯 했다.

“...미안해­”

“괜찮습니다.”

차라리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상태에서 그리 말했다면 어땠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거란 이미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침울해진 수현의 안색에 놀란 것은 오히려 아이린 쪽이었다.

생각할 게 많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전부였건만, 혹시 거절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게 아닐까.

그런 마음에 손을 들어 어깨를 잡으려다가, 결국 홀로 떠나는 수현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아마 잠깐 다녀오는 걸 거예요. 제가 준비하는 것도 많잖아요.”

아이린이 한국으로 떠나며 생각했던 건, 한국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란 것이었다.

어차피 평소 존경하던 사람 한 명 보고 올 뿐이었고, 개인적인 만남에 불과하니 일주일 정도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일주일, 그 시간 중 고작해야 하루가 남았다는 사실에 아이린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옆에는 창문 밖을 바라보는 수현이 있었지만, 이곳에 막 왔을 때와는 달리 칙칙하고 차가운 분위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하자면...아마도 자신 때문이리라.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단지 대화 좀 나누다가 끝날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이 마주한 수현은 훨씬 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매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이성으로 보이는 것을 자신보고 어찌하란 말인가.

생각한 거보다 더 세련된 사람이었고, 생각한 것보다도 매너 있는 사람이었고, 생각보다도 더...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외모로부터 비롯된 것을 전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외모보다도 마음이 가는 것은 그 사람 자체인 터라, 마음 같아선 이 곳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을 따름이었다.

‘...이제 와서 뭐라고 해.’

아까 그 좋아한다는 말이 귓가에 아른 거렸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지금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이전에 답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 뿐이었다. 괜히 그 상황에서 고민을 한 건지, 차라리 받아준 다음에 고민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당장 내일 떠나는 자신이 고백을 받아준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린.”

“...왜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 알고 있습니까?”

수현의 말에 정신을 차린 아이린은 그제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힐끔 움직인 눈동자는 무감한 표정의 수현에게 향했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을 텐데, 처음 이쪽으로 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표정에 덩달아 아이린 또한 몸을 움츠렸다.

연락...아마도 제게 하지 않으리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한국으로 올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계속 연락을 이어가고 싶었다.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운 게 너무 많았지만,

아까의 고백에 대답을 못 했다는 것 때문에 차마 수현을 계속 볼 염치가 없었다.

어두운 도로, 가로등만이 반짝 켜진 곳을 하염없이 달려가다가, 입술을 작게 깨문 아이린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 말이 있어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수현의 시선은 계속해서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뺨에 닿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 창문에 투명하게 비쳤다.

과연 이 말에 반응해줄 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숨기는 것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으로 아이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요. 4시 비행기고요. 배웅...안 해줘도 되요. 그냥 해본 말이니까.”

“...왜 이제 말합니까?”

문득 옆을 돌아본 아이린은 수현의 표정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아까와는 달리 마치 화가 난 것만 같은 표정이라, 턱 하고 막힌 말문에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계속...여기 있는 게 아니었던 겁니까?”

“그냥 잠시 왔던 것뿐이에요. 말했잖아요, 당신 보러 왔다고.”

“그럼 나 보러 여기 남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훅 치고 들어오는 것에는 여전히 적응할 수가 없어서, 훅 붉어진 귀를 매만진 아이린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단 말인가. 미국에 돌아가서 준비하는 건 연주회였다.

이전에 수현과 합주를 부탁한 것도 있긴 했지만, 그건 이번에 하는 것 이후에 열리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중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지만, 이대로 끝나버린 뒤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없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아까 들었던 고백에 대한 소심한 대답이었다. 수현의 입술이 움찔 떨렸지만,

그런 아이린을 지그시 보다가 이내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기분이 반전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방금 아이린이 한 말에 어이가 없고, 또 당황했을 뿐.

답을 듣지 못했으면 나중에 들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시간이 필요한 게 전부라 믿었건만,

이제는 당장 내일 떠난다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하게 웃은 수현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내일 가는 겁니까.”

힘없는 목소리였다. 아이린이 수현을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듣는,

힘이 빠지다 못 해 모든 생기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목소리였지만.

아이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말에 긍정하는 것뿐이었다.

흘러가는 어둠 속에서, 그렇게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아닙니다.”

“아니기는, 아까부터 얼굴이 퀭해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평소와는 달리 훨씬 어둡고 힘이 없어 이는 수현의 얼굴을 본 크리스가 투덜거렸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침부터 온통 무언가를 끙끙 앓고만 있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크리스로써는 그저 눈살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생각해보니 항상 연락하던 아이린도 보이지 않고, 지금 시간이면 함께 있어야할 수현은 오늘 따라 자신이 있는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수현을 빤히 쳐다보던 크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이린이 미국으로 간다던데, 자넨 안 가보나?”

“......”

아무말도 하지 않는 수현의 태도란, 크리스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요 며칠 친하게 지내던 두 사람, 밥도 먹고 술도 먹었다고 했으니.

마음 맞는 남녀가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마음을 품게 되겠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입을 열자, 수현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차인 거냐?”

“안 차였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상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수현이 고개를 숙이자,

재밌다는 듯 웃던 크리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수현의 머리를 툭 하고 건드렸다.

크리스도 아이린이 수현의 고백을 거부했으리라곤 생각 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 미국으로 떠나는 것 때문에 대답을 망설였을 뿐, 분명 속으로는 신나게 소리치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가진 내성적인 성격을 이제야 조금 고쳤을 뿐,

이런 상황에서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 하는 건 아이린의 특성이었다.

“가보게. 오늘은 자네 대신 다른 사람 부를 테니까.”

“어딜 갑니까.”

“공항으로 안 갈 건가? 아마 지금 못 가면, 4시 전까지 도착 못 할 텐데.”

[소개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오늘 4시 비행기 타고 가요.]

지금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란 것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신이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그러다가 생각한 건, 언젠가 수진이 제게 했던 말이었다.

­이제 행복해도 되잖아.

분명 현실에서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새하얀 병실에 누워있던 동생의 얼굴은 창백했다.

순식간에 바뀐 장소는 어렸을 때 함께 갔던 동산의 커다란 나무 옆이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별이 되어가는 동생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이란 것이었다.

크리스의 손을 떼어낸 수현이 멍하니 일어서자, 피식 웃은 크리스가 등을 탁 치며 떠밀었다.

“짐은 챙겼나?”

“예, 사실은...”

무언가를 찾던 수현은 아침에 홀린 듯이 챙겨왔던 캐리어를 자연스럽게 꺼내들었다. 헛웃음을 흘리는 크리스를 잠시 보다가, 이내 옅게 미소지은 수현이 입을 열었다.

“미리 챙겨왔거든요.”

어쩌면 처음부터 이리 될 것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가슴이 조금 후련해진 탓인지,

아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인 수현은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 그대로 달렸다.

돌돌거리며 움직이는 캐리어의 바퀴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늘 차분한 수현이 그리 뛰는 것에 놀라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이 이야기의 끝을 조금이나마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전부였으니까.

[13:43]

시간을 확인하던 아이린은 텅 빈 공항을 조금 쓸쓸한 눈빛으로 훑었다.

가족을 배웅하는 사람도 있었고, 껴안은 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연인 또한 있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자신이 배웅을 기대하는 것이 퍽 우습긴 했지만,

곧 있으면 출발하는 이 시간까지 오지 않는 한 사람을 생각하자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안 오네.”

오지 말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정말 안 올 줄은 모르지 않았던가.

모르는 척 한 번 와서 얼굴이라도 비춰졌으면 그것으로 좋았을 텐데.

쓰게 웃다가, 자신의 업보라 생각하며 차가운 뺨을 한 차례 짝 두드렸다.

몇 분 뒤면 비행기에 탑승해야 했다. 사실은 지금쯤 탑승해서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았지만, 수현이 올지도 모른다는 걸 핑계로 이렇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저 곧 출발해요.]

[잘 있어요.]

끝까지 지워지지 않는 숫자 1에 눈을 감는다. 야속하게도 흐르는 시간에 이제는 정말 비행기로 가야 해서,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저 멀리서 달려오는 누군가에게 홀린 것처럼 시선을 빼앗겼다.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한 모습이었다. 한 번도 뛴 적 없던 사람이 자신을 향해 뛰면서,

늘상 보여줬던 깔끔했던 외관이 잔뜩 흐트러진 채였다. 잠을 자지 못한 건지 퀭한 눈밑이 보였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여기까지 오는 데 쭉 달린 것만 같았다.

막힌 말문에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하다가, 겨우내 흘린 목소리란 당황 섞인 한 마디였다.

“수현 씨...?”

헉헉 거리며 한참동안 숨을 들이쉰 수현은 아이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 가지 못 하도록, 비행기가 출발하는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 그렇게 아이린의 어깨를 하염없이 붙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 이제 가봐야 하는­”

“가라고 한 적 없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나 오늘 미국 간다고 말 했잖아요. 배웅하러 온 건 고마운데, 저 이제 비행기에 타야 하잖아요.”

“아직 대답도 못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보내줍니까?”

헐떡이는 숨을 다잡으며, 비로소 그 말을 내뱉은 수현이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고백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좋다면 좋다고, 싫다면 싫다고.

시원하게 그 대답을 듣고 싶어서, 한참 동안 마주한 시선 속에 아이린의 뺨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이렇게 찾아와선, 그런 대답을 달라고 하면...

생각을 이어가다가, 고개를 푹 숙인 아이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대답을 피하고 싶진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수현에게 할 수 있는 말.

고민은 길지 않았고, 다시 수현과 눈을 마주친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좋아해요, 수현 씨. 마음 같아선 같이 떠나고 싶어요. 그런데, 수현 씨는 여기에 동생이 남아있다고 했잖아요. 어제 그런 얘기까지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같이 가자고 말...읍?"

턱에 닿은 손가락이 아이린의 고개를 들어, 그대로 닿은 입술이 순식간에 포개어졌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드는 와중에, 아이린은 지금 서로의 입술이 닿았음을 깨닫곤 작게 신음을 흘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키스, 민트향이 가득한 입 안에서 혀가 얽히고, 이내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서로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푸하."

"...나, 나 처음이었는데요."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그,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서...?"

이미 비행기가 출발했다는 건 안중에도 없는 터라, 멍하니 되물은 아이린의 질문에 수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 답할 이유란 오직 하나 뿐이지 않은가.

"좋아하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그 질문에, 아이린은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몽롱한 기분이었다. 수현도 아이린도, 마치 꿈속을 노니는 기분이었다.

꿈 속에서 피어난 꽃을 직접 마주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 몽환적인 기분과 감상 사이에서. 수현은 천천히 감겨 있던 눈을 떴다.

#

"...그런 꿈을 꿨다는 거죠?"

"우스운 얘기죠."

현대에 대한 얘기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전에 세계수에서 그런 것을 보았다는 설명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태초부터 있던 존재였으니, 범인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 않겠는가.

다만 즐거운 것은 꿈에서 에반과 자신이 그런 사이였다는 점이었다.

"다른 여자 생각은 안 하나봐요?"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아이린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할 리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아이린의 말에 대답한 에반은 가만히 상념에 빠진 채 턱을 괴었다.

동생, 그리고 그 현대적인 배경.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살던 세계와 똑같지 않은가.

허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것을 그렸는지, 아니면 아이린의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인지.

이어지던 생각을 털어낸 에반은 작게 미소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은 지금 행복했다.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으니, 아무리 아름다운 꿈이라 해도 결국 꿈일 뿐이었다.

다만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몽중화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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