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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79화 (179/181)

〈 179화 〉 Ending (2)

* * *

얼마만이더라, 이렇게 모두가 모인 것이. 정원에 한가득 놓인 탁자들을 바라보던 에반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리스를 떠나 로페나와 함께 사는 크리스도, 그리고 황제인 카이셀도 이쪽을 향해 몰래 오기로 했으니까.

벌써 몇 년 만에 만나는 건지, 에반은 카이셀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양꼬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 차리고 먹어요. 또 혼자서 그렇게 먹지 말고.”

“...하나 먹는 것도 안 됩니까? 이렇게 많은데.”

“안 돼요.”

음식을 살피던 아이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에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곤 작게 혀를 찼다.

예전 같았으면 단번에 허락해줄 텐데, 아무래도 이젠 마음이 식어버린 것일까.

자연스레 축 내려앉는 어깨에, 절로 어두워지는 표정을 본 아이린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다들 오기 전에 먼저 손대면 어떡해요. 이제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배고프단 말입니다. 어제 힘써서.”

“...내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가늘게 뜨인 눈으로 붉게 물든 뺨을 살포시 가린 아이린이 대꾸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능글맞아지는 에반을 상대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아이린은 그 시간 동안 나름대로의 해결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한 번 강하게 나가는 게 아닐까.

근데 또 생각해보니 고작 양꼬치 하나로 뭐라 하는 건 너무한 처사 같아서, 결국 속으로 끙 앓으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먹고 싶어요?”

“아니, 그냥 장난.”

“진짜, 바보에요?”

퍽, 하고 에반의 팔을 때린 아이린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진중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장난을 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지 않은가.

물론 그런 게 싫다고 묻는다면, 이런 것마저 에반의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25년이나 함께하지 않았던가. 에반을 처음 만나고, 결혼하고. 이제는 아이들이 훌쩍 자라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말이다.

물론 겉모습이 변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도 아이린은 여전히 에반을 사랑하고 있었다.

외모, 성격, 감정, 손짓. 그 모든 것 하나하나를. 시간에 무뎌지는 것이 감정이라 했건만,

아직도 방금 막 피어난 꽃처럼 생생한 그것에 입꼬리가 아주 살짝 당겨졌다.

에반에게 안겨 발을 동동 거리던 아이린은, 팔꿈치로 에반을 슬쩍 밀어내며 일하는 하녀에게 손짓했다.

아무래도 황제가 직접 오는 만큼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친구라고는 해도,

이런 걸 문제 삼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

예전 만큼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에반과 카이셀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직도 예전의 그 말투 그대로인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건지, 스칼렛과 만나면 항상 하는 푸념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둘은 그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서는 어딨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연무장, 씻고 오라고 했으니까 조금 뒤면 올 겁니다.”

“조금 깔끔하게 입혀요. 오늘은...리제도 오는 날이잖아요.”

리제라는 이름이 나왔음에도 두 사람의 표정엔 어떠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젠 레비의 보호자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레비가 어렸을 때부터 잘 따르기도 했을 뿐더러, 애초에 예전에 품었던 감정은 전부 깨끗하게 털어내지 않았던가.

마침 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서와 레비의 목소리라, 에반은 아이린의 슬쩍 보며 저 멀리를 향해 눈짓했다.

“아서 오고 있나 봐요? 난 아직 안 보여서.”“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수행이 부족하시다고, 이래서야 저 없으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럼 내 옆에 평생 있으면 되잖아요.”

“그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마스터인 자신이 에반이 보는 걸 어찌 전부 볼 수 있을까.

다만 희미하게 아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서,

에반과 아이린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다가가 둘이서 나란히 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생각해보니 레비가 아서에게 고백했던 것도 벌써 몇 년이었던가.

얼굴이 새빨개진 아서를 질질 끌고온 레비가 했던 말이란, 아직도 두 사람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일 중 하나였다.

“그 때 진짜 놀랐는데요. 그러니까...대련에서 진 쪽이 고백하기로 했다고 했었나요?”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아서가 당황한 이유도 웃겼고요.”

고백하기로 한 레비가 대뜸 입부터 맞추는 바람에,

갑작스레 처음을 뺏긴 아서는 완전히 리드를 빼앗긴 채 레비에게 질질 끌려 다닐 뿐이었다.

자신처럼 확 주도권을 가져올 거라 생각했건만, 레비라는 아이가 이리 무섭게 자랄 거란 건 에반의 예상 밖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걸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아들이 저리 쑥맥인 건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아서, 왜 아무 말도 안 해?”

“...아니, 꼭 손을 잡아야 하나 싶어서. 그...우리 이제 사귄지 겨우 한 달인데, 조금 빠르지 않아?”

빠른 게 아니냐니, 아서의 말에 코웃음을 친 레비는 그대로 아서에게 팔짱을 낀 채 몸을 꼭 붙였다.

자기가 몇 년을 기다렸는데 이게 빠르다니, 마음 같아선 더한 것도 하고 싶었지만.

고작해야 키스 한 번 했다고 정신줄을 놓은 걸 본 뒤로는 조금 진도를 조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아버님은 대범한 편이라 들었는데, 아서는 왜 자신을 이리 어려워하는 건지. 하지만 이런 점이 좋은 게 아니겠는가.

자기 말고는 여자 사람 친구라 할 만한 애들도 없었고,

평소 혼자 훈련하거나 자신과 있는 편이라 다른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팔에 말캉한 감촉이 닿을 때마다 홀로 헛숨을 삼키는 아서를 모르는 건지, 아까보다 더욱 몸을 꼭 붙인 레비를 보며 아이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날 닮지는 않았네요. 어째 레비라는 아이가 더 당신을 닮았는데요.”

“제가 저랬습니까? 저는 그래도 조금 천천히­”

“술 마신 사람 붙잡고 키스한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나 그때 술 안 마셨으면, 당신 한 몇달은 손만 잡고 있을 생각이었잖아요. 바보처럼.”

“그때 처음인 티 팍팍 냈던 게 누구인데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난 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술 없었어도 아서랑 로벨리아 낳고 다 했을 거란...윽.”

“하여간 못하는 말이 없어. 물론 내가 다 해줬겠지만...! 그걸 꼭 그런 식으로 얘기했어야 해요?”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린의 항변에 에반은 멋쩍게 웃어보였다. 물론 자신이 다 해줬을 거란 말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가.

마음 같아선 이대로 같이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저 멀리서 보이는 한 사람의 인영을 발견한 에반이 아이린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이렇게 갑자기 분위기 잡아도 뭐 안 해줄 건데요.”

“뭐 해달라는 게 아니라, 리제가 왔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빗겨간 두 사람과는 달리 이젠 원숙한 여인의 모습을 한 리제였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이제 둥글게 말아 위로 올렸고, 수녀복을 입은 모습이란 이제 꽤 잘 어울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참 주변을 서성거리던 리제는 이내 레비를 발견했는지 옅게 미소 지었다.

복잡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이윽고 마치 엄마와도 같은 푸근한 표정을 지은 채 레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레비!”

자신의 이름을 들은 레비는 한참 주변을 서성거리다 리제를 보곤 자리에서 펄쩍 뛰어 그대로 리제를 향해 뛰었다.

“엄마!”

이제는 엄마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며 품에 안겨선,

한참 동안 부둥켜안고 있던 둘이서 안부를 나누는 모습에 아서는 한 곳에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다가, 머뭇거리며 리제에게 다가간 아서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싱긋 웃어보였다.

이제는 제 연인의 어머니였으니, 처음 보았을 때처럼 당돌하게 바라보는 표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리제와 상견례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담스러워요?”

“아뇨, 그냥 감회가 새로워서 그런 것뿐입니다.”

사람의 앞일은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들다더니,

처음 기사가 되었을 때 자신이 리제와 상견례를 하는.

그것도 자식들의 부모로써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프지도 않은 허리를 두드리곤 이내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허리 아파요? 어제 내가 너무 심했나?”

물론 아이린은 그걸 정말 아픈 걸로 착각했지만, 그걸 장난 이란 걸 깨달은 아이린의 얼굴이 이윽고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등을 때린 아이린이 씩씩거리자, 화 풀라며 꼭 끌어안은 에반이 저 멀리 보이는 마차를 보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카이셀이 왔나 봅니다. 이제 슬슬 맞이하러 가죠.”

“왜요, 이젠 그냥 허벅지가 아프다고 그러죠.”

“장난이지 않습니까. 화 푸시죠.”

“...어떻게 사람이 점점 어려지는 거 같아요. 처음에는 훨씬 더 멋졌는데.”

“그래서, 지금 이런 제가 싫습니까?”

여전히 능글맞은 그 웃음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와서, 결국 화를 푼 아이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싫겠다고 말하겠는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이 맞아버려서, 마치 홀린 것처럼 사랑하게 된 남자를.

손을 슬쩍 내민 에반을 보곤 또 한참 웃다가, 결국 손을 깍지까지 낀 채 잡은 두 사람이 마차가 도착할 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교차하던 발걸음을 신경 쓰면서, 아예 발걸음까지 맞춘 채 또 웃음을 터트린다.

“이건 안 변하네요.”

“취미거든요. 걷는 박자 맞추는 거 말입니다.”

“여전히 사이가 좋군 그래, 잘 지냈나?”

마차에서 내린 카이셀은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린과 에반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시간이 지나 사이가 서먹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사이가 좋은 게 신기하지 않은가.

이렇게, 그 증거로 자신은 스칼렛과 따로 손도 잡지 않았으니 말이다.

“카이셀, 왜 나는 손 안 잡아줘요?”

“...우리도 여전히 사이가 좋긴 하지.”

아무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 카이셀은, 에반과 아이린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전했다.

이렇게 만나자마자 자연스레 생기는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지 않던가.

편하고, 즐겁고. 황궁에선 느낄 수 없는 분위기 였으니, 스칼렛또한 아이린에게 손을 휙휙 흔들며 밝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자네에게 보여줄 선물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선물 말씀이십니까?”

“대신 약속 하나 해주게. 이걸 보고 날 때리지 말고, 선전 포고 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무슨 꿍꿍이십니까?”

에반의 눈이 가늘게 뜨이자, 카이셀은 뒤따라 오던 마차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에반에게 장난 칠 때면 지었던 그 특유의 표정. 문득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뒤늦게 로벨리아를 떠올렸지만, 이미 그때는 한참 늦은 뒤였다.

“태자비 납시오. 어떤가?”

카일의 옆에 서 참 곱게도 입은 로벨리아였다. 화려한 것으로 잔뜩 치장한,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카일의 손을 꼭 붙잡은 로벨리아의 모습을 멍하니 보던 에반의 얼굴이 이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들떠있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빠르게 돌아간 머릿속에서 정리된 결론이란 오직 하나 뿐이라,

가만히 그걸 바라보던 에반이 이내 아주 조용히, 카이셀만이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전쟁하자는 겁니까?”

아마도 그 말을 내뱉은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리라고,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섬찟함에 카이셀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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