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 탈출기? (3/6)

좆 됐다, 라고 레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납치된 지 어언 보름하고도 일주 더. 적어도 자신을 걱정할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 거지 같은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지? 매일매일 고민에 고민을 거듭 중이다. 평소 단순하게 살기가 모토인 자신이 몇 날 며칠을 고심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깡통 같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자신을 납치한 장본인에게 당당하게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했는데 티브이 선전으로만 보던 최신형 핸드폰을 개통해와서 지랑 권영재의 번호만 입력된 걸 턱 주고 사라졌다.

그래 그것까지는 좋다. 이제는 통화음질도 구려서 버벅대는 낡고 후진 폰보다야 인터넷 빠르고 통화음질도 죽이는 최신형 폰이 훨씬 나으니까. 문제는 그걸 요구해서 받아내면 뭐 하는가. 저엉말 안타깝게도 호기로이 핸드폰을 요구한 당사자는 빈 깡통 인터라 기억하는 핸드폰 번호 따위 하나도 없다. 요즘 같은 스마트 시대에 핸드폰 번호를 외울 필요가 있겠냐마는. 어쨌든 그나마 자신의 번호는 당연히 기억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이 가지도 않고 뚝- 끊기는 이상 현상이 발견되었다.

“에휴… 꺼졌나… 하긴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010 7…8? 9? 79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 쓰읍… 뭐더라 땡구 번호가… 7879? 7979? 8282?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비상 연락처 하나는 기억해 두는 건데.

자신의 하찮은 기억력에 스스로 자조하던 레시는,

“아!”

좋은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번쩍 치켜떴다. 대충 기억나는 대로 갈겼던 핸드폰 번호를 싹 지우고 114에 전화를 걸었다. 동네 단골 슈퍼 전화번호를 얻을 셈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친절한 안내 멘트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제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뚝 끊겨버렸다.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이 와장창 부서졌다.

“왜 안 되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레시가 112 119등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어보다가 포기하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화도 안 되는 전화기라니 깡통이나 다름없었다.

“흐음…”

혹시나 권영재씨와 개변태싸이코에게만 전화를 걸 수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 괘씸한데… 연락처에 남겨진 두 사람의 번호를 보며 전화를 걸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레시는 얼마 가지 않아 에라 모르겠다- 중얼거리며 권영재라고 적힌 번호를 눌러 통화를 걸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이런 씨부랄.”

왜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받는 건데, 왜 이쪽은 연결이 되는 거냐고!

황당함에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자 한동안 말이 없던 권영재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알이 필요하십니까? 보스를 보내드리겠,

“뭔 미친 개소리야! 끊어!”

돌았나 진짜! 권영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딱 자른 레시가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본인이 걸어놓고 본인이 화를 내며 끊어버리는 아주 황당한 상황이었다. 꺼진 핸드폰을 붙잡은 그는 씨근덕거리며 으으으, 몸서리를 쳤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열받는다.

이건 진짜 뭐 하는 미친놈이지? 뭐? 불알이 필요하십니까? 보스를 보내드려? 하여간에 정상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젠장할!

여기 있는 인간들은 대체 머리에 뭐가 든 것일까. 레시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핸드폰으로 턱 끝을 톡톡 쳐댔다.

하, 참 나…. 그나저나 권영재씨한테는 된다 이 말이지? 그럼 색골한테도 되는 건가? 흠…

고민하던 그는 결국 확인차 통화 버튼을 눌러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쳐다보기도 싫은 이름이 떡하니 적혀있어 굉장히 꺼려졌으나 확인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 지가 이따구로 저장해 놓은 건가? 아님 권영재씨가? 뭐가 어찌 됐든… 존나 징그러워. 으우, 인상을 찡그린 채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아빠 쪽♡] 따위의 아주 징그러운 이름이 떴다. 으웩, 소름 돋아! 소리를 지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니 단조로운 신호음이 두어 번 정도 흐른 후에 나른한 음성이 들려온다.

-세상에… 핸드폰 사주자마자 아빠한테 애교 부리려 전화한 거야?

“지랄하네.”

한 마디를 남긴 레시가 질색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가차 없이 눌렀다. 애초에 이건 확인 전화일 뿐이다, 망할 놈아.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겉보기엔 삐까뻔쩍한 최신형 핸드폰은 이것저것 다 되면서 전화만큼은 아주 보수적인 망할 폰이었던 것이다. 도대체가 핸드폰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전화 걸기는 오로지 개미친색골변태새끼와 권영재씨에게만 가능하다. 이건 최첨단 시대의 폐해인가… 장점인가…

멍하니 동물의 왕국이 나오고 있는 티브이 화면을 초점 없이 보고 있자 띠링, 소리와 함께 핸드폰 화면이 밝아진다. 레시의 눈동자가 스르륵 핸드폰으로 내려갔다.

  

아빠 보고 싶어서 전화했구나. 조금만 기다려.
일 열심히 해서 오늘 조기 퇴근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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