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런!
“으엉? 집…?”
돌아온 대답을 들은 순간 레시의 머릿속이 혼돈해졌다. ‘집’이라는 단어에 갑작스러운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느껴진 것이다. 자신은 방금 집에서 나왔는데 갑자기 찾아온 오랜 친우가 집에 가잔다. 굉장히 이질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한참 비어있던 머릿속은 '집'에 대한 정체성 혼동이 휘몰아쳤다. 누워서 과자나 와작거리며 티브이를 보느라 졸려서 두뇌 회전이 느린 것도 한몫했다.
집? 나는 이미 집인데? 나 방금 집에서 나왔잖아. 아, 근데 내 집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살고 있으면 집이 아닌가? 물론 예전 집도 있긴 해. 그것도 진짜 내 집이 아니라 아부지 집이었지만… 집이라, 지금 땡구 녀석이 가자고 하는 집이 어디 집일까. 땡구 집? 우리 집? 아니 예전 집? 아니면 자주 가던 구멍가게? 놀이터? 길거리? 집, 집 집, 짚? 집? 짙? 짘? 아, 집이 뭐더라? 집… 집! 아 그래 집!
“집…!”
불현듯 근 며칠 동안 잊고 있었던 얼룩덜룩한 집이 떠올랐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반지하에다가 낡아빠진 가구만 몇 개 덜렁 있는 곳. 사람이 참 우스운 동물인 게, 예전엔 괜찮고 나름 살만했다고 했던 집을 지금 떠올려 보자 웬만큼 억척스럽지 않으면 살기 힘든 집이었다. 누구든 환경 따라간다더니 풍족한 생활에 제대로 푹 젖어버린 듯했다.
후지고 꼬질꼬질한 집이었어도 제가 나고 자란 곳이다. 그러니까 그립지 않은 건 아닌데… 뭐라 해야 할까, 너무 안락한 생활에 잠식당했다고 해야 하나… 아버지도 도망간 마당에 그 집이 멀쩡히 있을 리도 없고.
물론 예전에 살던 집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땡구가 말하는 그 집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나 싶은 의구심과 호기심이 함께 들었다. 비록 단칸방에 반지하였지만 인생 일대기가 묻어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보잘것없이 태어나 보잘것없이 자랐고, 보잘것없이 팔려왔어도 어쨌건 어릴 적 나름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어서 그런가, 옅지만 향수까지 느껴진다.
‘집에 가자.’는 의미 파악을 한참이나 한 레시는 매우 때늦은 대답을 던졌다. 약간 주저하는 말투였다.
“근데 거기 이미 팔렸을 텐데… 분명 우리 아부지가 나랑 집이랑 같이 팔아버렸다고 했으니까… 이젠 그곳에 가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걸. 아니면 빈 채로 그대로 있으려나.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긴 하네….”
지금의 안락한 생활도 편하지만 향수도 느껴져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가감정이 찾아왔다. 아부지는 원체 집에 잘 안 들어와 혼자인 게 익숙했다. 혼자여도 지하 단칸방 집은 좁았으나 공허는 크기만 했다. 그때는 그게 외로움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단 몇 주간이었어도, 틈만 나면 싸우는(물론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것에 가깝지만) 견원지간이어도 ‘함께’라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아 보이던 레시는 실은 누구보다 온기가 필요했던 걸 본인 스스로도 몰랐다.
얼굴을 보면 짜증을 내고, 몸을 더듬으면 성깔을 부리고, 가끔 함께 박스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면서 함께 사는 정을 배웠다. 매일 일을 끝마치면 생전 보지 못했던 맛있는 과자 하나씩을 들고 귀가하는 커다란 괭이에게 벌써 정을 줘버린 걸까. 오늘은 놀라겠지, 하며 숨어있다 각종 방향에서 튀어나와 놀래주는 것도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처음엔 복수심으로 인해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지금은 어쩌면 자신도 쪼오금 즐기고 있을 지도 몰랐다. 쿠왕!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우다다 달려들면 어느 날은 모른 척하다 일부러 놀라는 척을 하기도, 단숨에 몸을 끌어안아 박스에 데려가 골골송을 부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삼시 세끼도 기가 막히게 챙겨준다. 아침, 점심은 직원이 차려준 음식을 혼자 먹었고 저녁 식사는 늘 함께했다. 저녁은 항상 홀로 라면으로 때우거나 아예 먹지 않았던 것과는 아주 큰 차이였다.
괭이 새끼는 첫날에 봤던 것만큼 아주 강압적인 놈도 아니었다. 말을 하면 경청해 주고 자신의 판단하에 괜찮다고 하는 건 모두 들어주고 해주는 편이다. 가끔 그걸 빌미로 대가를 원하는 파렴치한이긴 한데, 어쨌든 지금의 상황이 나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막무가내처럼 굴면서 또 말과 부탁은 잘 들어주는 놈,이라고 다소 이상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겠다. 굶을 걱정과 돈 걱정 없이 매일 맛있는 것을 먹고 소소한 대화와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꽤 재밌고 돈 많은 괭이 새끼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격이었다. 처음 시작은 나빴을지라도 현재의 관계는 나름대로 좋은 편이라고 레시는 생각했다.
그렇게 이제는 ‘함께’가 익숙해지다 보니 예전 반지하 단칸방은 아무도 없어 쓸쓸하고 적막한 곳이라 괜스레 꺼려졌다. 아부지도 없고 자신을 맞아줄 생명체가 하나도 없다. 그건 향수 냄새로 가려봐도 변하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의 자취였고, 짙게 배어 사라지지 않는 악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걱정인 건 아무래도 함께,를 채워주는 커다란 덩치의 골골송을 부르는 괭이 새끼 아닐까.
“아… 갑자기 말도 없이 나갔다 오면 지랄할 것 같은데…”
지랄이 아니라 걱정이려나. 제가 없어지면 분명 지랄을 하든 걱정을 하든 둘 중에 하나는 할 거다. 최근에는 같이 놀이터에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에 재미 들였는지 레시가 오늘은 피곤하니 가지 말자 해도 본인 스스로가 가기를 자처한다. 뭘 하고 어딜 가던 늘 함께라 혼자서 나가본 적은 없다. 혼자 나갔다 온다는 말만 하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입술을 물고 빨고 일부러 보이는 모든 부위에 입질을 해대서, 옷을 입어도 나가기 민망한 상태라 나갈 수가 없었다. 가령 아주 짓궂게도 목덜미라던가, 차마 어떻게도 가릴 수 없는 눈 밑, 이마, 손등, 발목 등등 아주 이지 가지로 표식을 남겨놓는다. 그게 피에타의 원초적이고 완곡한 거절 의사였다.
하여간 야만적인 놈.
울고불고 간지럽다고 하지 말라고 밀어봐도 막무가내다. 사람을 쪽쪽 빨아놓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박스 안으로 끌고 가 빈틈없이 끌어안은 뒤, 골골송을 부르는 위협적인 덩치가 생각나자 절로 환멸의 눈빛이 쏟아져 나왔다. 정은 정이고 질색은 질색이다. 그렇게 잔뜩 빨림 당한 채 넋과 힘이 빠져 안겨있으면 꼭 허리 쪽으로 딱딱한 무엇인가가 짓눌러왔다. 그것이 아주 흉측하고 커다란 좆방망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레시는 필사적으로 그 느낌을 모른척했다. 피에타가 일부러 몸을 더 바싹 붙여 일부러 발기한 성기를 문지르면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이상한 콧노래를 불러 딴청을 피우는 걸로 상황을 모면했다. 참으로 귀엽기 짝이 없는 모른 척이었다. 그나마 무식하고 징그러운 좆으로 좆질이라도 안 해서 다행이지. 온몸 곳곳을 빨아대면서 밑에까지 쑤셨으면 지금 이렇게 눈뜰 힘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문을 열어주지도 못하겠지.
레시도 남자였기에 한 번 섹스의 맛을 본 이상 가끔 성욕이 차오르기도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찾아오는 발정기 때는 혼자 집 문을 걸어 잠근 채 열에 달떠 며칠 내리를 앓아야 했다. 사실 발정기 억제 약이 있긴 한데, 싸구려는 몸에 듣지 않고 비싼 약은 돈이 없어 사 먹지 못했다. 하여튼 모든 생명체가 발정기에만 떡을 치는 건 아니니 평소에도 가끔 성기를 쥐어잡고 싶은 경우도 당연히 있다. 물론 첫 관계가 앞이 아닌 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앞을 흔들며 한 손으로는 뒤쪽을 더듬대는 건 사나이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있는가. 뒤쪽이 근질거려서 미칠 지경인데. 어설픈 손놀림 덕분에 뒤쪽은 혼자만의 힘으로 절정에 도달하기엔 어려웠다. 구멍 안쪽의 간들간들하고 묘한 가려움을 지워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단연 하나다. 맨 처음 뒤를 뚫은 놈에게 부탁하는 것. 레시는 단순한 성정이었으며 그만큼 생각이 일차원 적이다.
어차피 지도 내게 성욕을 푸는데 나도 지에게 풀면 쌤쌤 아니냔 말이다.
꽤나 발칙한 생각을 머금어도 피에타에게 부탁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그놈이 매우 변태라 어떻게 돌변해 달려들지 몰라서, 두 번째는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다는 이유가 컸다. 몰아치는 고통 속에 아주 작은 쾌락의 꽃이 싹을 틔우긴 했는데 가끔씩 발기한 좆의 실루엣을 볼 때나 몸에 닿아 느껴질 때, 그걸 다시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피에타도 그걸 아는지 가끔 손가락으로 집요하게 밑을 헤집거나 까슬까슬한 가시 혀로 빨아대는 것 말고 좆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해소되지 않은 성욕은 몇 십분이 지나면 사그라들었다.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이번엔 자신이 그를 따먹을 생각이었다.
‘말이라도 해놓고 나갔다 와야겠어…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어차피 집은 없어져서 돌아가도 거기서 지내지는 못할 거야. 핸드폰도 안에 있을 텐데. 갑자기 사라지면 역시 놀랄… 려나? 얼마 전 유리창 깼을 때 표정은 안 그랬어도 엄청 놀란 것 같았단 말이야.’
뭐 어쨌든, 고민의 기로에 서 있는 레시를 바라보던 땡구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품에 안겨 있는 레서 판다를 집요하게 살피던 그의 눈빛이 복잡해져 시시각각 변모되었다. 차가웠다가 싸늘하기도 하고, 따뜻함을 품었다가 시든 꽃처럼 시무룩해지기도 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눈동자에 곧 촉촉한 물기가 찾아왔다. 불쌍하게 내려간 눈꼬리 끝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힌다. 순식간에 변한 표정은 마치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웠다.
“땡구가 레시 집에 놀러 갔는데… 그런데 레시가 없었어.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말도 없이 레시가 사라져 버려서… 엄청나게 찾아다녔어. 땡구가 얼마나 놀랐는지 레시는 정말 정말 하나도 모를 거야…”
숱이 많은 눈썹을 팔자로 축 늘어트리며 낑낑거린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마구 떨려서 그의 심정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이랴, 소중한 걸 품에 안은 듯 레시를 둥가 둥가 흔들어 주다가 주황색 머리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다. 그제야 제가 어떤 자세로 있는지 상기한 레시가 질색하며 가까이 다가온 가슴팍을 팔꿈치로 밀어냈다.
“얌마 그래도 이 자세는 좀… 건장한 사내새끼가 수치스럽게 이렇게 다닐 순 없잖냐.”
“어쩔 수 없어. 레시는 느린걸…. 이런 위험한 곳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해…. 레시는 바보야 아무것도 몰라….”
이 자식이 누가 누구보고 느리대. 그리고 바보?! 나름 초등교육이랑 중등 교육까지도 배웠거든! 중등 교육은 중간에 그만뒀지만… 어쨌든!
땡구의 대답은 쓸데없는 레시의 승부욕과 자존심을 건드렸다. 태어나 느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레시의 표정이 냅다 구겨졌다. 정작 어릴 적 느릿하던 게 누군데. 하도 느려서 업고 다닌 기억도 있다. 올챙이 개구리일 적 시절 기억 못 한다더니… 나사 하나가 이미 빠져있는데 자신이 돌봐주지 못 한 사이 두 개나 빠져버린 게 틀림없다.
땡구는 가끔 훈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 말이다.
“뭐래는 거냐 너 나한테 달리기 지던 거 기억 안 나? 그래서 어? 내가 맨날 너 넘어진 거 일으켜 주고, 업어 주고. 내가 아주 널 업어 키웠지 업어 키웠어.”
기억은 나세요? 그러면서 똑똑 땡구의 머리에 노크를 해댄다. 애정 어린 건 아니어도 먼저 닿아오는 손길이 좋은지 미소를 짓자 뭐가 좋냐는 타박이 돌아온다.
“…으응, 응 맞아. 레시가 하는 말이 맞아… 그래서 땡구 은혜 갚으러 왔어.”
“아, 그 은혜 갚는 까마귀인가. 그거 흉내 내는 거냐?”
“까치인데…”
“까치나 까마귀나. 생긴 건 비슷하잖아.”
“안 비슷해…”
이게 다 컸다고 꼬박꼬박 말대꾸는. 하는 말마다 토를 다는 오랜 친우를 향해 중지를 들어 눈앞으로 엿을 휘저은 레시가 투덜거렸다.
“말대꾸하지 말고 내려주기나 해. 내가 발이 없어 뭐가 없어.”
눈으로 엿을 거하게 먹은 땡구가 꿍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다. 이 표정은 필시 부정의 의미다. 레시는 오늘따라 말을 듣지 않는 땡구 덕분에 골치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
“어쭈 멍멍이, 대답 안 하지.”
“……싫어어. 레시 내가 안고 갈 거야…”
한참을 늦게 대답한 것도 모자라 말꼬리를 늘인다. 고집을 부리거나 하기 싫은 일을 거절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릴 적부터 봐 왔던 땡구의 습관을 알고 있는 레시가 말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아 됐다.’ 중얼거리며 몸을 크게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아니 이 자식 힘이 왜 이렇게 세?! 분명 약골이었는데?!’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어째 몸이 더 옥죄어 온다. 게다가 땡구는 일말의 미동도 없어 외려 스스로 힘만 빼는 꼴이었다. 그래도 이딴 자세로는 절대로 가기 싫다.
사나이가 존심이 있지, 공주님 안기 자세? 죽어도 싫다!
차라리 본인이 이 덩치 큰 멍멍이를 안고 간다면 모를까, 품에 안긴 꼬락서니가 꼭 연약한 약자를 안은 자세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이거 안 놓지…?”
끄응… 앓는 소리가 나오고 목덜미에 핏대가 설 때까지 가슴팍을 밀어봤지만 밀리 키는커녕, 밀도 높은 딱딱한 근육만 피부로 전해진다. 하도 어릴 때부터 봐서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실감도 나지 않았다. 툭하면 넘어지고, 툭하면 울고, 툭하면 비실거리던 게 이제는 다 커서 힘도 부리고 고집도 부릴 줄 안다.
버둥거리는 레시가 하는 양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땡구가 순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 레시의 발버둥은 작은 꽃잎이 팔랑이는 수준이었다.
“뭐해?”
“뭐 하긴! 내려가려고 하는 거잖아!”
“근데 꼭 가슴을 만져야 하는 거야?”
가슴팍을 꾸욱 누른 손을 내려다보는 땡구의 귓가가 벌게져 있었다. 왼쪽 심장에 닿아있는 손바닥의 감촉이 좋아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시의 행동을 억압했다.
“오늘은 레시가 땡깡부려도 안 들어 줄 거야.”
“뭐?”
“레시… 내 품에서 꼬물거리니까 따뜻하고 귀여워…”
레시가 표정을 구기며 경악했다.
으악, 씨발 소름 돋아! 꼬물거린다고 내가?! 그게 귀엽다고?! 내가?! 살다 살다 이 바보 똥개 멍청이한테 별말을 다 들어 보네.
몸이고 자존심이고 한껏 구겨진 기분이다. 멋있다, 잘생겼다, 늠름하다 소리나 백번 천 번 들어봤지. 귀엽고 깜찍하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들어본 적은 거의 없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뭔 개소리… 으악!!!”
말을 끝맺을 시간도 없었다. 땡구의 몸이 전광석화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던 레시가 몸이 펄럭이자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땡구가 향한 곳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구였다. 육중한 몸이 쿵, 쿵 계단을 건너 뛰어 평지로 착지하며 엄청난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사고 회로가 정지되었다. 일단 지금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하나였다.
“너무 빨라! 빠르다고!!”
몸이 붕 뜨면서 심장도 함께 뛰었다가, 쿵 착지하면서 심장도 바닥에 떨어지는 소름 끼치고 기묘한 감각이 레시를 뒤흔들었다. 태어나 놀이 기구라는 걸 타본 적은 없지만 티브이로 본 적은 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이런 느낌일까? 바이킹을 탈 때? 뭐가 되었든 이 기묘하고 이상한 감각이 절대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계단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여유롭게 레시의 얼굴을 슬쩍 내려다 본 땡구가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질끈 감은 눈과 목덜미를 감은 팔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평소 자신은 멋지고 용맹한 사나이라고 외치고 다녔던 게 무색할 만큼 귀여웠다. 그가 참지 못하고 품에 안겨있는 레시에게 질문했다.
“레시 무서워?”
“너 원래 이렇게 안 빨랐잖아! 지금 이거 뭔데!”
“아… 그땐 그랬는데… 이젠 안 그래 헤헤….”
“으악! 느낌이 이상해! 심장이 쿵덕쿵덕 거려!!!”
땡구는 커다란 남자를 공주님 자세로 안고 가는데도 불구하고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다. 심지어 숨조차도 차지 않는 듯 호흡마저 고르다.
‘아니 황구 믹스견 새끼가 이렇게 빠른 종인가?!’
제 모지란 친구 땡구가 이렇게 날쌔게 움직인 적은 처음이라 혼란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78층 높이의 비상계단을 훌쩍 훌쩍 뛰어넘으며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뛰어난 종족의 수인 같았다. 평소 느릿느릿하고 순박하게 웃던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몸짓만큼은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다 붙인 느낌이라 인지 부조화가 존나 쎄게 찾아왔다.
어쨌든 자신은 속도를 이기지 못해 팔랑이고 있고, 자칫했다가는 떨어질 위기기에 목덜미를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한참을 품에 안겨 있으니 계단을 펄쩍펄쩍 뛰어 내려오던 땡구가 드디어 움직임을 멈췄다.
“아 속 울렁거려…”
심장이 하도 위아래로 떨어졌다 올라갔다 난리를 떨어서 속이 다 저며졌다. 78층의 고층을 빛의 속도로 내려왔다. 재보지는 않았는데 얼핏 엘리베이터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감았던 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자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눈과 마주했다. 싱긋, 미소를 지어준다.
“레시.”
“으,응…?”
무언가 불안함이 감지되었다. 땡구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침묵을 유지하다 눈앞에 있는 커다란 유리창의 문을 옆으로 열어젖혔다. 순간 휘이잉- 바람이 세차게 들어와 레시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얼마 전 있었던 유리창 사건이 떠올라 목뒤가 섬찟해졌다.
“자,잠깐만… 여기 몇, 층이야…?”
“4층.”
“근데 창문을 왜…”
“뛰어내릴 거야, 꽉 잡아.”
“아, 안돼! 안돼! 나 고소공포증 있어! 알잖냐!”
급박해지는 말소리에 땡구는 별말 없이 싱긋 웃어줄 뿐이었다.
“응, 그러니까 꽉 잡으라는 거야 레시.”
“야!!”
“쉿, 조용히.”
사람들 몰려오겠어. 평소 어눌했던 말투와는 달리 또박또박한 말소리였다. 어릴 적 머리를 다친 후로 조금 모자라진 땡구가 2층도, 3층도 아닌 무려 4층에서 뛰어내리려 한다. 이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새 수인, 하늘다람쥐 주인, 뛰어난 육체와 타고난 운동 신경을 가진 고양잇과 수인이라던가 하여튼 몇몇의 수인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높은 높이에서 뛰어내리면 최소 하반신 아작이다. 계단을 쉽게 뛰어내려 왔어도 그 높이와 이 높이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레시는 속으로 나사 두 개가 아니라 열댓 개는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덜렁이는 다리에 박차를 가해 마구 발버둥 쳤다.
“형님 말 듣자! 땡구야! 여기서 뛰어내리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안 다칠 거야.”
네 머리로는 그게 가능하지만 상상은 현실과 다르다고! 이 똥 멍청한 멍멍이 새끼야! 황구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살 수 있을 것 같냐!
“난 비명행사 하기 싫다고!!”
“행사 아니고 횡사.”
“지금 그게 문제냐!”
아아악! 내적으로 비명을 외치던 것도 잠시, 창문 밖을 슬 내다본 땡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짜로 뛰어내릴 심산인가 보다. 마음이 급해진 레시는 버둥거리는 걸 멈추고 진정 작전으로 가기 위해 최대한 호흡을 골랐다.
“때,땡구야 일단 진정해… 형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고 즐거운 건 알겠는데 이건 아니야! 이건 아주아주 위험한 행동이야, 무척이나 위험해! 너 몸 박살 나. 듣고 있냐? 어?”
그러나 듣는 둥 마는 둥 창틀로 발 한 짝이 올라갔다. 오싹한 바람이 계속해서 레시를 뒷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온몸에 칠흑보다 더 새카만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쿵, 쿵, 쿵, 쿵 일정 심박수를 넘어 과하게 쿵쾅거린다. 뛰어내리기 전 마지막 인사를 위해 레시를 내려다본 땡구가 천진하게 웃었다.
“눈 꼬옥 감아.”
아아악!! 비명이 나오기도 전에 눈이 뒤집어졌다. 심장이 크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시야가 암전 되었다.
◊
“…”
엘리베이터에서 오를 때만 해도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던 피에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미소를 띠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 말도 못 붙일 만큼 시리고 서늘했다. 날카로운 눈과 굳어진 입매는 감정의 동요를 표했다. 지이잉- 소리가 나며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불과 한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찾아온 변화였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태연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복도로 나왔다. 지나치게 고요한 복도는 평소와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예민한 후각을 자극하는 낯선 냄새.
피에타의 한쪽 눈썹이 발작처럼 꿈틀거렸다. 느른한 숨이 잇새로 새어 나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눈에 띌 정도로 살벌한 기백이 그의 전신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일자로 좁아든 눈동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하 두 명을 낮게 응시했다. 고른 숨소리라던가 유혈 흔적은 없는 것 보아 단순히 잠에 든 상태다. 복도는 마치 두 사람의 안방인 양 잠든 얼굴들은 몹시나 평온했다.
“파자마 파티나 하라고 월급 줘 가면서 세워둔 거 아닌데… 재미있군.”
널브러져 있는 수하 두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피고용인 두 명이 아주 태평하게 입까지 벌리고 거나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자신을 놀래주려고 숨은 채 드릉대는 고양된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감이 기민한 그는 레시가 두꺼운 현관문 너머에 없다는 사실을 감각 하나로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이 순간 레시의 기척이 없음을 지각했다. 차마 촌각을 재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핸드폰을 볼 시간도 없었다. 최근에 잇따라 터지는 사건 사고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웬 야생 늑대 새끼가 vip실을 또다시 범람해 한바탕 뒤집어 놓은 것도 모자라, 겁대가리 없이 공금횡령을 하고 달아난 쥐새끼도 잡아야 했다. 덕분에 핸드폰을 들여다볼 새도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거나, 뒹굴뒹굴거리거나, 잠을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안일하게 업무처리에 몰두했다.
‘오늘따라 많이 보고 싶더라니… 하하…’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현관문 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그의 발치에 무언가 채였다. 슬쩍 서늘한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자 먹다 남은 대나무 과자가 떨어져 있는 게 보인다. 그의 턱 근육이 선명하게 불거졌다. 은회색 빛 눈동자가 느른하게 천장을 향했다.
“하…”
감정이 실려 무거워진 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까슬한 혀가 입천장을 쓸고 볼 옆을 스윽 훑는다.
별안간 문이 열렸을 때는 홀로 흘러가고 있는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과 소파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핸드폰 하나가 전부였다. 이미 레시가 안에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피에타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았다. 작아진 눈동자는 레시의 흔적을 찾아 배고픈 뱀처럼 곳곳을 기어 다녔다.
남겨진 자취는 레시 스스로 나간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게다가 밖에 서 있는 수하 두 명은 수면제로 인해 잠들어 있는 상태고, 평소 근검절약, 깔끔이 몸에 배어 있는 레시가 과자를 떨어트리고 TV를 켜놓은 채 나갔을 리 없었다. 역시나 결정적인 건 현관문 앞에 떨어져 있던 초록색 과자였다. 여러 정황들을 봐서 답은 하나다. 어떻게 여기를 나갔건 자의가 아닌 타의라는 것.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낸 피에타가 곧장 권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보스.
“오늘 내가 출근한 시각부터 호텔 전 cctv 확인해. 폐쇄 회로, 카지노 vip구역까지 전부 싹 다. 하나도 빠짐없이.”
제 보스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권영재가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하아…”
어떤 겁대가리 상실한 개새끼가 내 귀염둥이를 훔쳐 갔을까…
쥐고 있던 핸드폰의 전면 유리가 빠자작- 소리와 함께 손안에서 처참하게 금이 갔다.
◊
“…”
맑고 투명했던 남자의 감색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잠이 든 레시의 몸에서 낯선 향이 짙게 배어있었다. 고양잇과 특유의 체향이 레시의 전신을 다 뒤덮고도 남아 아주 진동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그는 레시를 씻길 요량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우선 욕조에 물을 따뜻한 물을 받아 향이 좋은 입욕제를 푼 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레시에게 새로 입힐 옷을 골랐다.
하얀 면 티 하나와 편한 잠옷 바지를 찾은 그는 조심스럽게 레시가 자고 있을 방문을 열어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고 어디서나 나오는 이불 걷어차기 잠버릇을 화려하게 선보인 채 레시는 잠에 들어있었다. 대자로 뻗은 모양새가 기절했다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잘 자고 있는 레시를 확인한 그는 최대한 기척을 숨겨 몸을 움직였다. 갈아입힐 옷을 침대 옆 탁상에 올려두고 잠에 든 레시의 몸을 가볍게 안아들었다. 입을 벌린 채 곯아떨어진 얼굴은 십몇 년을 봐도 하찮고 귀여웠다. 그새 부스스하게 뻗친 결 나쁜 머리카락이 까치집을 지었다.
축 늘어진 몸을 욕실로 데려가 품에 안고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옷을 벗겼다.
어릴 적 자주 같이 목욕탕에 간다거나, 땀이 뻘뻘 흐를 정도로 한바탕 뛰어놀고 난 다음에 레시의 집이나 자신의 집에서 같이 씻고는 했으니 부끄러울 건 없다. 다만 몸에 밴 고양잇과 놈의 체향이 그의 심기를 검게 갉았다.
다행히 널따란 욕실은 입욕제의 향긋한 꽃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코를 찌르던 역겨운 냄새가 그나마 중화되었다. 레시가 입고 있는 옷은 벗겨서 태워버릴 작정이었다. 불결한 냄새 때문에 자꾸만 미간이 찌푸려졌다.
순박하고 멍청했던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차갑기만 한 날카로운 남자의 얼굴에 격분이 묻어났다. 그리고 감정의 격렬한 파동이 인건, 레시의 옷을 벗기고 난 후였다.
온 전신이 마치 피부병이라도 걸린 것 마냥 처참했다. 영역 표시처럼 울혈 자국을 여러 군데 새겨져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울긋불긋한 자국이 이곳저곳 분포되어 있었는데 특히나 열받는 건 가슴 부분과 아랫배, 허벅지 안쪽 살들이었다. 레시의 피부가 하얀 편은 아니었다만 자국이 피멍처럼 검붉어서 매우 외설적이어서 눈길을 붙잡는다.
‘가당치도 않은 고양이 새끼가…’
바득, 다시 한번 이가 살벌하게 갈렸다. 자신이 사라진 레시를 찾는 사이 엄한 놈에게 잡혀 이런 짓 저런 짓을 당했을 걸 생각하니 소름 끼치도록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은 극도로 노하게 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한 느낌과 함께 차분해지는 기 현상을 겪는다. 남자가 지금 딱 그랬다. 그러나 따뜻한 물에 레시를 넣고 목욕 스펀지로 몸을 닦아주는 손길만큼은 몹시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그는 레시의 몸에서 제가 쓰는 바디샤워 향과 샴푸 향이 날 수 있도록 아주 꼼꼼히 씻겼다. 그 와중에도 레시는 깨는 기색 없이 잘도 잤다.
‘아주 뻗으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니까…’
고양이 냄새가 어느 정도 씻겨나간 몸을 닦아주고 큰 타월에 둘러 침실로 돌아온 그가 레시를 뒤에서 끌어안은 상태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고급 드라이어는 별다른 소음 없이 바람을 내어 머리카락을 단시간에 말려주었다. 따뜻한 바람이 기분 좋은 건지 흐음-거리던 레시가 앞으로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었다. 잠든 숨소리도 더욱 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거두지 않고서 휘청이는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신경 썼다.
혹여나 감기에 걸릴 성싶어 마지막까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준 남자가 레시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뽀송뽀송해진 얼굴이 귀여워 손으로 살짝 꼬집어 보았다. 이대로 몇 시간이고 자는 얼굴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레시가 일어나면 먹일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느리게 돌아오는 몸의 감각을 느낀 레시가 코를 찡긋거렸다. 감칠맛 나는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일깨운 것이다.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향기가 좋아서 본능적으로 이불을 한껏 끌어안고 입을 쩝쩝댄다. 낮잠을 푹 잤더니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오늘 저녁은 뭘 준비해 놨을까, 꽤 오랜 시간 잔 것 같은데 슬슬 왕변태싸이코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레시는 당장 일어나서 오늘 저녁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잠기운이 쉬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함을 감지한 건 약 10분 여가 더 흐른 뒤였다. 분명 뒹굴고 있는 침대는 푹신하고 좋았으나 제가 평소에 사용하던 느낌이 아니었다. 게다가 베개의 솜도 다르고 침구와 방 안에서 나는 향기도 달랐다.
‘아 맞다, 나 집 나왔지.’
순간 레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낮잠을 꽤 오랜 시간 잤다고 생각했는데 침실엔 불이 꺼져 있어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직 건재했다. 레시의 몽롱한 눈이 휙,휙 천장과 벽 낯선 가구들을 훑었다.
“뭐야… 여기가 어디냐…”
제가 알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낯선 풍경이었다. 예전에 제가 살던 집도 아니고, 제가 살던 집 근처에 있던 땡구 집의 낡은 풍경도 아니었다. 피에타의 집만큼이나 세련되고 높은 천장이 레시의 의문을 증폭시켰다.
‘땡구 자식이 집에 가자고 날 다짜고짜 들고 4층에서 뛰어내렸… 미친 그 자식 멀쩡한가?! 여기 혹시 병원?!’
나른했던 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빼꼼 열렸다.
“일어났어? 레시!”
해사한 웃음으로 앞치마를 매고 있는 땡구가 보인다. 이게 진짜 무슨 상황이지? 여긴 대체 어디고 쟤는 왜 앞치마를 매고 있지? 내 머리가 아무리 깡통이라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고… 이런 건… 레시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땡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어나 놓고도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천진한 얼굴이 미소를 걸치고 헤헤거렸다.
“몽유병이야?”
“…아니.”
“그럼 왜 아무 말이 없어?”
“여기 어디냐… 나 지금 너무 머리가 복잡하거든…”
“으응, 일단 나와서 밥부터 먹을래?”
밥? 밥… 레시가 좀비처럼 밥을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문이 열리고 널따란 거실을 지나자 레시의 의문은 더욱더 커져갔다. 여기 진짜 어디지? 존나 고급져 보이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땡구 녀석 집일 리는 없고… 혹시 무단으로 들어온 거 아닌가? 온갖 걱정이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널따란 거실을 지나 널따란 다이닝 룸이 나왔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식탁 위에는 온갖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중엔 레시가 가장 좋아하는 대나무 찜이 중앙에 있었고 주위로 산해진미가 포진했다. 의문들이 뒤쫓으니 선뜻 앉지를 못 하고 의자 근처에서 서성였다. 혹여나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마음대로 무전취식을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런 레시를 눈치챈 땡구가 직접 의자를 꺼내어 어깨를 눌러 앉혀주었다.
“자,잠깐…”
“걱정 말고 얼르은- 땡구가 레시 기운 차리라고 요리했어!”
주춤,주춤거리며 의자에 착석하자 이번엔 의자를 안쪽으로 넣어 에스코트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진 음식들 덕분에 침이 꼴깍 넘어갔으나 쉬이 손대지 못했다. 반대편에 마주 보고 앉은 땡구를 향해 설명을 요하는 눈길을 보내자 특유의 멍청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게에… 사실은…”
“사실은 뭐. 너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닌 거냐. 여기 멋대로 막 들어온 건 아니지? 너 임마! 이거 범죄야!”
의심의 눈초리에 땡구가 한껏 기다란 팔을 휘저었다.
“아,아니야! 아니야! 범죄 아니야!”
거짓말인지 아닌지 가늠하려 레시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더 해보라는 뜻으로 턱을 위로 까딱인다.
“여기는 땡구의 친구 집이야!”
그 한마디에 의심이 사그라들기는커녕 되려 대폭 증가되었다. 저 말고는 친구의 친 자도 없는 애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디서 친구를 구했냔 말이다. 그리고 빈민촌에서 사는 사람들이 돈 많은 친구를 만나기란 어렵다. 부촌에 사는 사람들은 빈민촌 사람들을 거지 취급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레시가 엄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나 말고 친구가 어디 있어. 거짓말하면 못 써. 바른대로 말 안 해?”
추궁하는 표정이 점차 험악해지자 땡구가 눈을 불안하게 여러 번 깜빡이며 몸을 구겼다.
“땡구도 있어… 친구…”
“어허. 똑바로 말 안 하실까.”
레시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솔직한 성정인 만큼, 남들도 제게 솔직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애초에 거짓말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깨먹는 몹시 멍청한 짓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땡구는 안절부절 죄인처럼 두 허벅지에 손을 가지런히 모아놓고 레시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뭔가 있긴 있구만.’
땡구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레시는 재촉하지 않고 팔짱을 끼며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땡구는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였기 때문에 나쁜 일에 대해 훈계하면 금방 교화되었다. 땡구에게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레시가 요 녀석이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혼내주어야 하나 고민할 즈음이었다.
“친구 집은 아니야… 근데 레시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야. 자세히 말 못 하는데에… 이건 진짜야…”
“진짜? 정말? 하늘을 걸고?”
“응… 응… 정말이야.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어.”
말투는 떨리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혼자서 거짓말의 유무를 유추하던 레시가 곧 한숨을 푹 쉬었다. 팔짱을 풀자 축 늘어져 낑낑대던 땡구가 눈을 깜빡였다. 눈치로 봐서는 제 말을 믿어주는 듯 경계가 풀어진 표정이었다. 어깨를 쭈그리고 있던 땡구가 대나무 찜을 레시의 쪽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얼른 먹어 봐. 레시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해 봤어.”
“…잠깐, 그리고 하나 더.”
숟가락을 들려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조금이나마 펴졌던 어깨가 다시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어 있었다.
“너 거기 어떻게 찾아왔어?”
순수한 궁금증에서 온 질문은 어떤 이에게 날카로운 질문이 되기도 한다. 살짝 굳어진 입매를 애써 끌어올린 땡구가 이번만큼은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으응, 레시 냄새 따라… 냄새 따라서 갔어.”
후각은 개과들이 유난히 발달되어 있다. 나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고, 애초에 땡구에게는 의심이란 싹이 틔어날 수가 없었다. 변명거리도 되지 못하는 가짜를 듣고도 레시는 그렇구나,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계속해서 캐물으면 어떤 말을 해야 하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땡구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위험한 행동을 한 타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무리 형님이 보고 싶었어도 그렇지. 위험하게 4층에서 뛰어내리면 어떡해. 다친 곳 없어?”
말투는 까칠했으나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눈동자가 땡구의 몸 곳곳을 살피기도 했다. 걱정을 한 몸에 받은 땡구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다쳤어! 아픈 곳 하나도 없어! 다음부터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 않을게!”
“말로만?”
“진짜야!”
“믿는다.”
알겠어! 레시의 말이라면 다 좋은 땡구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땡구가 가자는 집으로 오긴 했는데 이곳이 누구의 집인지는 모른다는 촌극이 벌어졌다. 뭐 모자란 놈이니까, 가볍게 치부하며 숟가락을 들려던 레시가 아- 탄성을 내더니 땡구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수저를 들려던 땡구는 또다시 손을 허공에서 멈추고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핸드폰 좀 빌려줘. 나 그래도 나갔다 온다고 말은 해야 해서. 연락해 줘야 할 곳이 있거든.”
“…누구한테 말을 하는데?”
“있어. 상또라이 하나.”
차마 순진한 멍멍이 앞에서 좆 흉측한 개변태 괭이 놈이라고 할 수는 없어 최대한 말을 순화시켰다. 레시의 말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하던 땡구가 말없이 표정을 굳혔다. 다행히 레시는 음식을 살피느라 땡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땡구 핸드폰 잃어버렸어.”
그 한마디에 음식에 붙박혀 있던 눈이 땡구에게로 향했다.
“뭐?! 또 어디서 잃어버렸어! 누군한테 뜯긴 거 아니야?!”
열화와 같이 성을 낸다. 종종 모자란 놈이라고 땡구를 건드는 못된 양아치 같은 놈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그냥 잃어버렸어. 그러니까 일단 먹자.”
땡구가 그제야 숟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레시를 향해 웃었다.
◊
이른 새벽부터 불청객이 찾아왔다. 초인종을 누른 상대는 아주 고아하게 웃으며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빠르게 찾아올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어차피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찾아오면 정면돌파할 생각이었기에 남자는 별다른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레시는 어제 저녁을 먹인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하루만 자고 가라고 꼬셔서 2층에 재워놓은 상태다. 남자가 찾아올 걸 미리 알았기에 조용한 곳에 재워 놓은 것이다.
새벽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거실에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어두운 적막 아래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피에타는 새벽에 불쑥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차림새로 여유롭게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먼저 찾아온 사람치고는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지 않는다. 그는 그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만 띤 채 땡구를 정확히 응시했다. 불필요한 적막이 짜증 나 땡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른 새벽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통성명은 필요하지 않은 관계였다. 두 사람은 안면이 있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이였다. 이 도시에서 내로라하는 큰 기업들끼리는 모를 수가 없는 얼굴들이었다.
“잃어버린 내 아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어제부터 미아가 됐는지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동굴같이 깊은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낮게 울렸다. 손님이랍시고 내어준 차는 따뜻한 커피였다. 그러나 피에타는 성의를 무시하듯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두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날카로운 기세가 멀쩡한 허공을 찢었다.
“신사적으로 굴때 얌전히 내놓는 게 좋을 겁니다. 땡구, 아아- 아니지 디온 씨.”
태평하게 늘어진 말꼬리는 그 속에 선득 한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디온이 숨겼던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레시와 동네 사람들 외에 불린 적 없는 이름이 엄한 곳에서 튀어나오자 심장이 우지끈거렸다. 싸움꾼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그가 최대한 화를 일축하며 짓씹듯 내뱉었다.
“걘 원래부터 내 거였어. 13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거였다고.”
“순진한 척 모자란척하면서 옆을 빙빙 돌더니, 머리도 돌아버린 건가…”
나른한 음성을 머금은 그가 픽, 비소를 지었다. 그의 도발은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디온에게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디온이 손가락을 우득거렸다. 약점을 찔린 어린 짐승은 자그마한 도발에도 이빨을 드러냈다. 단정했던 손끝이 굵어지고 기다란 발톱이 갈고리처럼 휘어졌다.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 재수 없는 회색 눈깔을 파먹어줄까?”
“식인 하는 악취미가 있으신가 본데, 그런 더럽고 추악한 집안에 우리 아들을 맡길 순 없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봐. cctv 조작하고, 시스템 다운하면 못 찾을 줄 알았어? 하여간 개과들은 멍청해서 안 된다니까…”
뒤이어 이어진 말은 더 이상 땡구의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본성 숨기면서 살면 피곤하지 않아? 레시는 널 아주 불쌍하고 가엽고 멍청한 개로 알고 있던데… 온몸이 피처럼 붉은 늑대를 말이야. 응?”
“…”
“신분도 나이도 속였다,라… 도무지 말이야. 진실인 게 하나도 없잖아요?”
피에타는 여전히 처음 앉았던 자세 그대로 흔들림 하나 없었다. 거친 숨소리가 기저에 깔렸다. 마주친 눈빛은 팽팽해 누구 하나 피하지 않는다. 피에타의 눈빛이 견고하고 정제된 느낌이었다면 디온의 눈빛은 정제되지 않은 거친 날짐승의 느낌이었다. 이미 우위를 선점한 피에타는 귓가로 희미하게 들리는 레시의 숨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그의 심기를 살살 건드렸다.
“아예 애초부터 나처럼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지 그랬어. 왜 그런 멍청이 코스프레 하면서 옆에 있었을까… 사실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닌가? 네가 전력을 다해도 레시는 널 친구로밖에 보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그 웃기지도 않는 바보 멍청이 행세를 하며 옆에 붙어있으려던 거였잖아. 무려 10년이나 넘게.”
어금니가 바득, 갈렸다. 살벌한 잇소리와 흥분해 거칠어진 숨소리는 강인해 보였으나 심적으로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이제껏 참아왔던 소유욕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걘 처음부터 내 거였어. 몇 년을 공들였는지 당신 같은 사람은 모르겠지.”
“그래서 모든 걸 속인 거니. 나이부터 이름… 신분… 모든 걸 말이야. 차라리 빚을 갚아주고 인생을 저당 잡으면 모를까…”
“레시는 자존심이 강해, 그래서 누군가를 돕는 건 좋아해도 도움을 받는 건 탐탁지 않아 하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빚을 갚아주면 어땠을까? 마냥 좋아하기보다는 화를 냈을 거야. 어쩌면 배신감에 내 곁을 떠났을 지도 모르지. 돈은 갚겠다면서. 그게 무서워서 피한 거… 그래, 맞아. 그래서 그게 뭐. 13년째 내 옆에 있어주잖아.”
멍청하고 미련한 개새끼가 따로 없군. 격양된 말투로 쏟아내는 이야기를 들어주던 피에타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여 미소 지었다.
“어쩌나… 도움을 받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그쪽 외사랑 상대가 나에게는 도움을 요하는데.”
“적당히 나불거려. 고양이 새끼야.”
“그 탁월한 연기 실력으로 얼마나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딱 올해까지만 그럴 생각이었어. 내년엔 말할 생각이었다고.”
“레시 옆에서는 멍청한 척, 일부러 거지 같은 옷을 입고 본가로 돌아갈 때는 슈트로 갈아입었을 네 모습을 생각하니… 짠하네.”
“…”
“늑대 새끼가 개 흉내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고 레시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2층을 한 번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레시를 데리고 갈 것만 같던 피에타가 태연하게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신이야말로,”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이겨먹고 싶어 씩씩거리는 것이 다 느껴진다. 피에타가 눈을 나른하게 치켜떴다. 이래서 애새끼들 상대가 싫은 건데.
꼭 애새끼들이 제 분을 못 이겨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는 것도 모르고 지껄이며 혼자 씩씩거리지.
“레시 앞에서 고양이 새끼인 척하는 건 아니고?”
별 타격감이 없는 공격이었다. 태연하게 손목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한 피에타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온했다.
“이른 시간에 찾아온 건 미안하군. 레시가 자고 있는 것 같으니 지금은 그냥 돌아가지. 레시가 널 친구로 생각하기에 소란 없이 가는 거야. 적당히 놀아주다 오늘 안으로 돌려보내.”
“내가 왜 그래야 해?”
“나보다 레시를 훨씬 오래 봐왔는데도 모르는 건가? 레시가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
“…”
“네가 스스로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입으로 네 정체를 까발려도 상관없는 거라면 그렇게 해. 어차피 네 정체가 까발려지든 말든 레시는 내 거니까.”
의미 없는 소유권 주장은 그쯤 해두라고.
서릿발처럼 낮고 섬뜩한 목소리였다. 피에타가 쥐고 흔드는 것은 땡구이자 디온의 치명적이고 아픈 약점이었다.
불청객이 떠난 후의 거실은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피에타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서 흥분을 가라앉히던 디온이 레시가 잠들어 있을 2층으로 향했다.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는 와중에도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이지를 흩트렸다. 방으로 돌아온 디온의 표정이 서늘했다. 그는 침대 맡에 앉아 대자로 뻗어 자는 레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에는 욕망이 드글드글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지려고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레시의 모든 것을 고양이 새끼가 앗아갔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동이 트고 아침이 조금 지나고 날 때까지도 디온은 미동도 없이 자세를 유지한 채로 레시를 응시했다.
평소 잠이 많은 레시이기 때문에 깨우지 않으면 점심이 다 되어가서야 겨우 눈을 떴다. 그 즈음에야 마음을 가라앉힌 디온이 옆을 차지하고 누울 수 있었다. 커다란 침대는 장정 둘이 누워도 남을 만큼 널따랬다. 묵직한 무게감이 옆자리를 파지하자 대자로 뻗어자던 몸이 꾸물꾸물 기어 품을 파고들었다. 잠결에 본능적으로 온기를 따라온 레시가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웅얼거렸다.
“배고파… 아빠 밥….”
레시는 백지장처럼 단순하고, 그만큼 검은 글자가 쉽게 새겨졌다. 침대 위에서만 ‘아빠’라고 부르라는 피에타의 말이 무의식중에 심어져 있었다. 실제로 그는 침대 밖에서는 야, 너, 당신, 변태, 자식, 놈 등 각종 부적절한 언어로 그를 지칭하며 불렀다. 잠꼬대 형식으로 새어 나온 말을 들은 디온의 인내심이 유리처럼 깨졌다. 그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이미 몇 시간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투와 욕망에 잃어가던 이성을 겨우 붙잡은 상태였다. 아슬아슬했던 끈이 툭- 하고 끊어짐과 함께 성마른 몸짓으로 레시의 위에 올라탄 그가 무방비한 양 팔목을 아프게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통각에 레시의 미간이 여트막이 찌푸려졌다. 살짝 벌어졌던 입은 우물우물 닫혔다가 힘없이 벙긋거렸다.
“으음… 놔아… 아파… 왜 또 아침부터 지랄인데…”
정말이지, 사람 돌아버리게 하는 데 뭐 있다.
하얀 면 티가 휙, 위로 뒤집어졌다. 하도 물고 빨아 잇자국이 가득한 퉁퉁 부은 유두와 가슴이 보인다.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이 바득 들어갔다. 극도로 화가 난 목소리가 레시에게로 내려앉았다.
“여기, 그 새끼가 빨아줬어?”
“응…?”
비몽사몽 한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한다. 미비했던 안광이 차차이 선명해졌다. 자신을 찍어누른 상대가 피에타가 아니라 땡구인 것을 확인한 레시가 다시 부스스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잠에 취해 뚝, 뚝 끊긴다. 지금의 상황을 땡구의 장난 정도로 치부한 모양이었다.
“뭐야. 땡구… 였냐. 형님 졸려… 조금만 더 자다가, 라면 끓…여 먹자… 그리고 손목 놔… 아파 뒈지겠네…”
그러나 땡구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다. 크게 하품을 한 레시는 팔뚝을 놓으라는 듯 손목을 앞뒤로 까딱였다.
“레시… 레시…”
무언가 이상하다. 자신의 몸을 누르고 올라탄 땡구의 목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가래가 끓는 것처럼 탁해진 목소리가 귓가로 내려앉자 레시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멀쩡했던 페로몬에 짙은 음욕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자느라 둔해졌던 감각이 트이기 시작했다.
눈을 치켜뜨고 얼굴을 바라보자 붉게 물든 얼굴로 저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는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이따금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레시가 팔목을 비틀며 잠긴 목을 억지로 쥐어 짜냈다. 평온했던 표정은 걱정으로 번져 있었다.
“발정기, 발정기야? 발정기 왔어?! 약은!”
흑심으로 물든 저를 전혀 의심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디온은 이런 레시의 순진무구한 점을 참 좋아했다.
“야 괜찮은 거냐! 말 좀 해봐!”
“나, 나 안 괜찮아 레시… 레시이…”
디온이 고개를 숙여 레시의 어깨라인에 코를 박았다. 망할 좆같은 고양이 냄새가 미미하게 남아있었다. 습관처럼 이를 악문 디온은 몸을 비트는 레시를 체중으로 눌러 억압했다. 커다란 가슴에 힘이 들어가며 꿈틀거렸다.
“윽, 무거워! 너 제정신 아니야 얌마! 일단 나와 봐! 응? 약 없으면 사 올게! 안 그러면 너 이러다 실수해!”
흐읍, 숨을 들이켜자 피에타의 손길에 익숙해진 몸이 잘게 떨리며 반응했다. 흣, 가벼운 신음이 튀어나온다. 디온의 안광이 희번덕거렸다. 팔목을 쥔 손에 무지막지한 힘이 들어갔다. 레시의 튼튼한 팔목도 부러트릴 만큼 거센 힘이었다.
“으윽! 야! 땡구야! 땡구! 아파!”
“나 실수할래… 실수할 거야… 나도 너 가질 거야… 레시는 원래 내 거였잖아…”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고양되어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레시가 몸을 비틀며 외쳤다.
“야 나 좀 봐봐! 땡구!”
다급한 목소리가 디온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깨에 박았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이 마주친다. 눈깔이 맛이 간 상태다. 이 광기의 혼탁을 아는 레시가 경악하며 버둥거렸다.
“레시는 땡구 친구잖아. 그러니까 땡구 도와줘야 해…!”
“씨발 이건 아니지 임마! 니가 친구 나밖에 없는 거 아는데 친구한테 성욕 푸는 또라이가 어딨어! 정신 안 차릴래!”
“그 고양이 새끼한테도,”
대줬잖아. 뒤이어 나오려던 말을 꾹 삼키고서 고개를 치켜든 디온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에 입술이라도 닿을까, 레시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모습이 디온을 자극하는 줄도 모른 채 정신을 차리라느니, 발정기가 와서 그런 거라느니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만 찍찍 질러댄다.
“실수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어!”
그러나 고요 속의 외침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디온은 입을 맞추기를 포기하고 곧바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숨이 살갗에 닿아 여리게 퍼졌다. 츄웁, 살을 빨아올리는 묘한 감각, 순간 레시의 동공이 좁아들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발정기도 제대로 조절 못 하는 모자란 애를 이대로 놔두면 거하게 사고를 칠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내가 되겠지.
레시가 이를 악물고 팔을 빼내어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옆통수를 얻어맞은 디온이 으릉, 짐승의 소리를 내며 부들거리는 팔목을 거칠게 쥐어잡았다.
“아!”
날이 선 눈빛과 말투는 모가 되어 디온을 향했다. 벌써 여러 차례 경고를 날렸고, 이번이 마지막 경고였다. 이번 경고까지 듣지 않으면 이 미친 똥강아지를 바닥에 팽개치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패버릴 예정이었다.
“마지막 경고야. 너 나랑 친구 계속하고 싶으면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거야.”
“…친구, 친구, 친구…”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천진하게 웃었다. 디온의 대답은 없었다. 아래로 내려온 입술이 어깨를 질척하게 빨았다. 깨끗하던 피부가 불긋 달아오른다.
친구의 밑에 깔려 목덜미나 빨리고 있다니. 씨부랄 내 인생 참 스펙터클하다. 원래 미친놈이 힘이 세다는 건 피에타를 통해 알게 외었는데, 이 위급한 상황을 통해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숨과 입술의 기묘한 감각은 소름처럼 퍼져 나갔다. 닿아오는 체온이 뜨거웠지만 결코 따뜻하지는 않다. 욕망의 아지랑이가 레시를 덮쳐왔다. 순간적으로 목덜미나 뺨을 쪽쪽 빨아댄 후 눈을 맞추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주던 피에타가 떠올랐다. 왜 이런 상황에 그 재수 없도록 잘 난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저를 찾으러 와주지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바람도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친구에게 뒤를 따일 끔찍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습윤한 숨이 가슴 쪽으로 옮겨졌다.
“윽…!”
뾰족한 코끝으로 통통한 유두를 꾸욱 누른 디온이 말캉한 감촉을 느끼며 신음했다. 당장에 유두와 유륜을 한꺼번에 머금고 젖이 나올 때까지 빨고 싶은 욕망이 뇌를 지배했다.
그래… 레시를 임신시키면 어쩔 수 없이 나랑 평생 살아주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약하니까 우리 아이에겐 더 약할 거야… 임신하면 그 고양이 새끼한테 돌아가지 못하겠지… 임신 시켜버리자…
“하아… 레시… 아기… 우리 아기 가지기 하자… 나 레시한테 넣을래. 내 거…”
“이 미친 새끼가! 넌 씨발 정신 차리면 뒈졌…”
쾅--!
그 순간이었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방문이 부서지고 크르릉, 천둥이 울리는 듯한 목울림이 들렸다. 방문이 부서진 잔해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쳤다. 레시를 탐할 생각에 돌아버려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디온이 살벌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부서진 문짝을 노려보았다.
레시의 눈이 점차 커졌다.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의 강렬하고 매서운 페로몬이 전신을 짓눌렀다.
그르릉…
잔해가 가라앉을 즈음, 장대한 흑호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싸한 공기가 내려앉고 강한 기운이 기저부터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저리도 큰 육식 동물을 처음 마주하는지라 뒷골이 싸하고 심장이 폭격을 맞은 듯 크게 요동친다. 포식자보다는 피식자의 입장에서 산처럼 큰 호랑이는 처음 목격했다. 아니, 태어나서 호랑이 수인 자체가 처음이었다. 압도하는 기운, 마주친 눈동자는 너무도 깊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폐부를 찌르는 페로몬에 숨이 옥죄어 왔다. 흑호가 발 한 짝을 침실로 들이며 눈을 느른하게 깜빡였다. 레시의 얼굴보다도 더 커다란 발이 바닥을 내딛자 강렬한 울림이 느껴졌다.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던 레시가 얼간이처럼 넋이 빠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
“호,호,호,호랑… 호랑이다! 으악! 호랑이! 호랑이야!!”
씨발 우린 잡아먹히고 말 거야! 뒈질 거라고!
정신이 원초적인 두려움으로 휘몰아쳤다. 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에게 쪼는 건 생리적인 현상이다. 불안함에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사리 물었다. 수인인지 짐승인지는 모르겠으나 저와 땡구는 죽을 목숨이다.
“안녕 아들. 하도 안 오길래 친히 모시러 왔어.”
그런데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 잠시나마 저를 찾으로 와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피에타였다. 레시의 몸이 속절없이 덜덜 떨렸다. 감겼던 눈이 번쩍 떠지고 익숙한 목소리를 내는 호랑이에게로 향했다.
위협적인 눈매, 기골이 장대한 몸체,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 매끈하게 윤기가 흐르는 기품 있는 검은색 털 위로 검회색의 호랑이 무늬가 언뜻 비쳤다. 검은색 짐승이 레시의 위에 올라타 있는 다른 짐승을 향해 공격성을 겨눈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 상황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건 레시, 저 혼자뿐이었다. 겁먹고 쫄 줄 알았던 땡구는 외려 위협적으로 호랑이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멋대로 갈라진 목소리가 불쑥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갔다.
“아니 당신 호, 호, 호호호랑이였어? 그것도 흑호…”
디온의 밑에 깔려 놀란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뜬 레시를 바라보는 은회색 빛 안광이 번뜩였다. 흑호가 디온의 목을 깨물어 죽일 심산으로 달려드려고 하자 레시가 극구 만류했다.
“잠깐 잠깐 잠깐!! 얘는 아주 작은 멍멍이라고! 당신 이빨로 물면 아작나!”
“멍멍이… 멍멍이라… 하하.”
사람일 때보다 더 울림과 여운이 깊이 남는 낮은 목소리였다. 땡구의 표정이 단단히 빗나갔다. 곧 윗입술이 들리며 살벌한 윗 송곳니가 드러난다. 십삼 년간 보지 못했던 모습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주둥이가 길어지고 몸이 털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침을 삼켰을 즈음엔 자신을 억누르는 게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된 후였다. 팔목을 누르던 손가락이 날카로운 발톱이 되어 찍어 눌렀다.
“아니, 잠까,잠깐만… 늑…대?”
땡구가 강아지의 모습이 아닌 늑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거 설마 개꿀잼 몰카인가? 땡구가 늑대라고?? 왜???
굉장히 현실성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피에타의 종족이야 어련히 고양이과겠거니, 했지만 덩치가 산만한 흑호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끽해야 시골 똥강아지인 줄 알았던 오랜 친구 땡구는 야생성이 살아있는 늑대였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건… 이건 몰카야… 그렇지?”
그렇잖아… 제발 그렇다고 해줘… 멍하니 탄식하고 있자 늑대가 커다랗게 포효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몸이 그대로 얼어버린다고 했다. 머릿속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으르릉, 낮은 목울림이 레시에게로 내려앉았다. 먹이를 사냥하듯 날 선 눈빛이 여유로운 흑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두 짐승이 뒤엉키는 건 삽시간이었다. 서로를 죽일 듯 엉켜든 짐승들의 목울림에 레시가 이불을 끌어올린 채 벌벌 떨었다. 하나도 정리되는 게 없다. 육식 동물의 거친 싸움에 기가 납작하게 눌린 레시가 끼긱거리며 이불보를 꾸욱 쥐었다. 동물의 왕국에서나 보던 맹수들이 살벌한 기운을 내지르며 서로에게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어 달려들고 있었다. 사실은 자신을 지금 꿈속이고 황당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다소 바보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당장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커다란 포효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린 레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더 큰 싸움이 되고 결국 누구 하나가 크게 다치거나 죽어나갈 것이다. 짐승의 덩치로는 단연 흑호가 압승이었으나 붉은 늑대의 기강 또한 만만치 않았다. 흑호에게 크게 입질하며 달려드는 모습은 제가 평소에 알던 순박하고 모자란 땡구가 아니었다. 눈빛에 드러난 생경한 살기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어떤 욕망이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이불 보를 꽉 쥔 레시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둘 다 그만!!!!!!”
커다란 목청이 쨍쨍하게 울리며 두 사람을 휘어잡았다. 마른하늘에 천둥이 내려친 것처럼 울창한 사자후였다.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에 얽혀있던 짐승들의 행동이 멈췄다.
그리하여 팔자에도 없는 삼자대면을 하게 되었다.
흑호와 붉은 늑대였던 짐승들이 이지를 찾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실 테이블을 두고 디온과 마주 본 레시가 이를 악물며 화를 삭였다. 혼자 안고 싶었지만 굳이 굳이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능글능글 미소 짓고 있는 피에타를 한 번 노려봐 주고, 앞에서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땡구를 보았다. 지랄맞을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었다. 레시가 피에타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땡구 앞에서 아들이니 뭐니 헛소리하면 죽는다 진짜.”
“응응 안 할게.”
그리고 이미 네가 자고 있을 때 이미 해서 욕심 없어. 뒷말을 삼킨 피에타가 한쪽 눈을 접어 찡긋 윙크를 보낸다. 수요 없는 공급에 레시가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속이 느글거리는 기분이었다.
“레시… 미,미안해… 잠깐 돌았었나 봐…”
다 들켜놓고도 순직한 척하기는. 피에타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불쌍하고 가여운 멍멍이를 연기 중인 디온을 응시했다. 레시가 숨을 크게 터트렸다. 놀란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한참을 입을 벙긋거리던 레시가 겨우겨우 질문을 뱉어냈다.
“너, 너… 늑대였어…?”
“…응.”
“왜 말을 아니… 왜 거짓말했어? 내가 강아지 수인이냐고 물어봤을 때 그렇다고 했잖아…”
“…작고 연약한 척하면… 네가 나한테 관심 주고 신경 써 주니까… 넌 작고 약한 것들에게 물러서…”
돌아오는 대답에 누군가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친듯한 얼얼한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배신감이 들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고 여린 강아지라 알고 있었고, 그에 맞게 지켜주려 노력했던 게 사실은 우습지도 않은 기행이었던 것이다. 레서 판다가 먹이사슬 한참 위의 늑대를 지키다니, 말도 안 되잖은가.
하-, 헛웃음이 터져 나오자 반사적으로 디온은 쭈글해졌다. 오랜 기간 쌓아왔던 거짓말을 무너트려야 할 때가 왔다.
“그러니까… 난 지금까지 작은 믹스견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믹스견도 아니고 품종견도 아닌 데다… 심지어 늑대였다고…? 붉은 늑대? 그 멸종 위기 종?”
땡구가 말없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돌아버리겠네… 그것도 모자라… 모자란 척 연기했고… 사실은 잘나가는 기업의 차남이다…?”
“응, 네…”
“이름은 디온이고… 나를 무려 10년이나 속였다… 이야… 이거 웬만한 막장인 동물의 왕국도 이렇지는 않겠는데… 명함도 못 내밀겠어…”
극대노를 한 목소리 끝이 떨렸다. 움켜쥔 주먹에 거친 힘이 빙빙 맴돌았다. 지금 때리면 적어도 이빨 두어 대는 날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피에타가 샐쭉 웃으며 레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자기야 정확히 말하자면 13년.”
“아저씨는 입 꼬매기 전에 다물자.”
깐족거리는 주둥이를 한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앞에 있는 저 죄인을 추궁하는 게 우선이었다. 대신 어깨를 튕겨 머리를 떼어내는 걸로 마무리하며 레시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로 표현 못 할 배신감 덕분에 이마에 힘줄이 빡, 솟았다.
“진짜… 너를 어떻게 해야 하지… 죽여 팰 수도 없고…”
안 그래도 처박힌 고개가 땅바닥까지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디온, 13년 만에 처음들은 이름. 이제는 불러달라고 해도 어색해서 못 부를 낯선 이름이었다. 혼란하다 못해 분노가 치민 레시를 차분한 눈으로 응시하던 피에타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채 주황빛 까치집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정리해 주었다.
“아 쫌!”
“왜애, 나 가만히 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지금 머리 복잡해 뒈지겠다고! 머리 만지지 마!
“그러니까 원래 이름은 디온이고… 아, 아까 말했구나… 아니 씨발 본 이름이랑 땡구랑 너무 멀잖아…”
“…”
“게다가 사실은 나보다 형이라… 그것도 세 살이나……”
“응… 미안합니다…”
이것저것 알게 된 사실 중에 또 하나 충격적인 건 자신보다 형님이었다는 거다. 나이도 많은 게 어린애 속여먹으면 좋냐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했어? 사실은 배우야? 내가 동물의 왕국밖에 안 보니까 모른다고 생각하고…”
“배우…는 아니야… 그냥 아버지 회사에서 일 배우고 있어…”
“저기요. 이 양반아, 저는 오늘 땡구가 아닌 디온 씨는 처음 뵙거든요? 존댓말 써주시죠.”
“네…”
배우보다 더 메소드 연기야. 와… 정말 감쪽같이 사람을 속일 수가 있네… 뭐, 땡구 시절에 가끔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도 했고… 그건 뭐 그냥 발정 나서 집 나간 줄 알았지… 뭐 이것저것 조합해 보면 꽤 이상한 부분이 굉장히 많긴 했다. 다만 모자란 놈이라 그러려니 했던 부분들이었다.
“디온… 디온…”
몇 번을 불러봐도 입에 감기지 않는다. 땡구라는 이름이 입에도 착착 감기고 잘 어울렸는데. 땡구는 사실 애칭 같은 것이었다. 처음 땡구를 만난 날, 레시는 이름을 물었다가 우물쭈물 한참을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고 직접 별명을 붙여주었다. 별명이 입에 착착 달라붙어 그 뒤로 이름을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디온 또한 알려줄 기미가 없었기 때문에 디온은 13년째 레시와 레시의 동네에서 명칭 땡구로 불렸다. 잘나가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땡구라는 시골 똥개 이름을 붙여준 이 사실이 얼마나 황당하고 시트콤 같은 일인가.
레시는 머릿속이 뒈지게 복잡해 한참을 이마만 부여잡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오늘은 그냥 갈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으응? 네? 아니 벌써?! 요…?”
“여기 더 있어봤자 머리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아. 생각 정리 좀 하고 연락할게.”
“잠깐만요, 잠깐만…”
애처로운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레시는 그의 말을 철저히 무시한 채 현관 쪽으로 발을 돌린다. 뒤이어 일어난 피에타가 얌전히 뒤를 따랐다. 소파에서 일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쪼르르 나온 디온은 안절부절 주인 잃은 똥개처럼 보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는 레시를 확인한 피에타가 고개를 돌려 입을 벙긋거렸다.
“내가 이럴 거라고 했지? 레시는 내 거야.”
유치한 싸움을 걸어오는 그를 단단히 무시하고 디온이 가까이 다가왔다.
“레시 나 놀러 가면 받아줄 거야? 응? 같이 놀이터도 가자… 아가들 보고 싶어.”
“이런 어쩌나, 아가들은 내가 이미 몸으로 다 매수해놨는데.”
“뭐…?”
“이상하게 좀 말하지 마. 그냥 애들하고 몸으로 놀아줘서 애들이 이 아저씨 엄청 좋아해. 어쨌든 연락 할게, 그동안은… 너도 생각 정리 좀 하고. 발정기도 잘 해결해라.”
아직도 땡구가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속여온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 기분이 익숙해지려면… 땡구가 아닌 디온에게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예전에 함께 했던 시간들이 사라지거나 거짓된 건 아니었다. 땡구는, 아니 디온은 자신과 함께할 때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제 인생의 한 페이지에 그려져 있는 사람을 내치기는 쉽지는 않다. 아주 철저하게 속인 건 괘씸하지만 딱히 크게 화나지는 않는다. 아니 처음엔 화나기는 했는데 생각해 보니 갈수록 그저 어안만 벙벙해졌다.
만약 범죄 가담을 위해, 아니면 자신에게 사기를 치기 위해, 그것도 아니라 정체가 아주 나쁜 놈이었다면 배신감이 컸을 것이나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사실은 부잣집 도련님이라니. 외려 걱정 한숨을 덜게 되었다.
복잡한 심경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자연스럽게 몸을 붙여온 피에타가 어깨를 끌어안아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는다. 레시가 익숙한 체향에 파묻혀 긴장했던 몸을 늘어트렸다. 제 옆의 괭이 새끼가 흑호였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자신과 13년 친구였던 땡구는 모지리도 아니었고 실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하하, 끝없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런저런 것들이 겹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흑호… 흑호라… 내가 고양이 둥지에 들어간 게 아니라 호랑이 굴에 들어갔구나…”
끽해야 표범, 살쾡이, 스라소니 정도인 줄 알았지… 그렇게 거대한 범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씨발…
아까까지만 해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던 호랑이는 어디 가고 피에타는 칭찬을 바라듯 레시의 뺨을 부여잡아 입술을 비볐다.
“아, 뭐야!”
“칭찬해 줘 자기야.”
“뭘…”
“나 아까 땡구인지 칠팔이인지 놈 앞에서 아들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도 잘 참았고, 키스하고 고추 들이밀고 싶은 거 잘 참았잖아. 응? 안 그러니. 그리고…”
이 미친놈 변태 놈이 진짜 돌았나…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구만…
“아들 친구가 아니었으면 찢어 죽였어. 이 점은 칭찬 살만하지 않아?”
흠칫, 레시의 어깨가 떨렸다. 뒤따라 붙은 말투에 생경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곧장 턱을 쥐어 잡은 피에타가 입술을 겹쳐온다. 뜨겁고 촉촉하고 물컹한 것이 뒤덮어왔다. 까슬한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양옆으로 스윽, 슥 훑으면 자연스러운 신음과 함께 틈이 벌어졌다. 가시 돋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달라붙어 느리게 문질러졌다. 여린 점막을 자극하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레시에게 입을 맞추면서도 그의 눈은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어깨 위의 자국과 목덜미의 자국을 집착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허리께가 찌릿해지는 이상한 감각에 덜덜 떨리는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밀어내자 피에타가 쉬이 밀려나 주었다.
“혀 빼애… 이상,이상해…”
“아직도 내 혀에 적응 못 했어?”
“이상하단 말이야! 그리고 앞에 사,사,람도 있는데…!”
백미러로 흥미 없이 전방을 주시하는 눈동자가 보인다. 권영재의 눈치를 보는 레시가 귀여워 피에타가 픽, 웃었다.
“그래서 얼른 익숙해지라고 몸 구석구석 핥아줬잖아. 응? 아들. 권영재는 신경 쓰지 마, 쟤 로봇이거든.”
“……구라지?”
“그럼. 쟤가 두 마디 이상 하는 거 봤어?”
“아니….”
“쟤 등 뒤에 충전기 꽂는 충전 단자도 있어.”
진지하게 말하자 레시가 두 눈을 여러 번 끔뻑였다. 진짜 로봇인가? 표정 변화도 없고 말수도 적고…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돌연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순간 정말 로봇인가?라고 생각했던 제가 바보였다. 언제나 저를 놀려먹으려고 하는 피에타를 향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또 헛소리…! 웁!”
입이 재차 막혔다. 파도처럼 밀려들어온 두터운 혓바닥이 얼어버린 레시의 혓덩이와 부드럽게 섞였다. 피에타는 집요한 편이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아주 느릿하게 상대를 파고들었다. 혀밑의 여린 곳을 파고든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가 혀뿌리를 푹푹 찔렀다. 침샘에서 침이 줄줄 새어 나와 입안에 가득 고였다.
“흐읍…”
뜨거운 숨이 느껴지고 아랫배가 뭉근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어, 찌릿해지고 오싹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복잡했던 생각들이 혀놀림 한 번에 희석되었다. 까슬까슬한 혀는 목덜미를 지나 단단하고 옹골진 쇄골을 느리게 훑고, 보드라운 입술을 겹쳐 쪽쪽 빨았다. 느른한 숨을 뱉은 피에타가 입술에 가벼운 버드 키스를 올리고 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리 올라와.”
“싫어…”
“진짜? 정말 싫니?”
“그래!”
“그래 그럼. 아, 도망간 판다 잡느라 힘들었으니까 잠이나 좀 자야겠다.”
그렇게 말하고선 턱을 쥐었던 손을 놓고 몸을 바르게 정자세로 취했다. 곧 태평하게 잠든 척하는 모습을 보던 레시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꾸물꾸물 피에타에게로 올라탄다.
“나 진짜 많이 참았어. 원래는 바로 찢어 죽이려던 것도 참았고, 그 개새끼 앞에서 네 보지에 자지 쑤시고 싶은 것도 참았어.”
“저질스러운 소리는…”
마주 보고 올라타자 기다란 기럭지 덕분에 천장에 목이 불편하게 꺾였다. 두툼한 가슴팍이 언뜻 비치는 하얀 면 티를 보는 피에타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한 팔로는 허리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면 티 위로 볼록 솟은 유두를 지분거리자 옅은 신음이 돌아온다.
“흐,읏!”
“차에서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나 상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칭찬도 해줘야지.”
“상은 내가 뭘 줄지 정하는 건데, 흐…! 왜 그쪽이 정해?”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겹쳐 온다. 하여간 불리하면 입부터 막고 본다. 티를 들어 올려 퉁퉁한 유두를 쮸웁 빨았다. 도톰한 살덩이가 입안으로 딸려들어온다. 자근자근 딱딱한 치아로 갉작이니 허리가 흠칫 떨렸다. 확실히, 땡구 아니 디온과 닿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랫배가 서서히 열기로 휩싸이는 걸 느끼던 레시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입 밖으로 뱉었다.
“근데… 나 어떻게 찾아왔대.”
“왜? 안 찾아가면 영원히 가출하려고 했니?”
번들번들한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일부러 괴롭히던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와 레시를 바라보자 붉어진 얼굴이 보인다.
“아니… 그냥… 우리 아부지는 내가 며칠 집에 안 들어가도 찾기는커녕 있는 돈 뒤져서 도박하러 나가느라 바빴거든. 내가 아부지를 찾았으면 찾았지. 아부지가 나 찾은 적은 없어서… 아 있긴 있다. 돈 필요할 때는 기가 막히게 전화해.”
주절 주절 늘어놓는 레시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피에타는 이것이 투정 비스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고요하게 말을 들어주던 피에타가 가슴팍 위로 올라가 있던 면 티를 큰 손으로 잡아 내려 주었다. 옷자락을 정리해 준 뒤, 나름의 위로랍시고 뺨과 눈에 입을 맞췄다.
“읏, 그리고 맨날 집에 와서 술만 먹고 다시 나가고…”
쪽,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친다.
“나한테 말도 안 걸고…”
쪽, 이번엔 뺨이다.
“간지러워… 하지 마…”
제 얼굴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느낌은 괜스레 옆구리 부근을 간질였다. 포근한 품안에서 본인도 모르게 옛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던 레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입에서 나온 말은 역시나,
“그리고 나 죽순… 죽순 먹고 싶어.”
먹을 거다.
“죽순…”
레시의 말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에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렸다.
“응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죽순…”
“우후죽순?”
피에타의 강렬한 한마디에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입꼬리를 씰룩일 때부터 뭔가를 하겠다는 걸 어렴풋이 예상했는데 이런 지나가는 똥파리만도 못한 개그라니…
레시는 긴장이 풀려 몰려오는 졸음도 꾹 참은 채 환멸의 표정을 지었다.
“당신… 진심이야…?”
“왜? 안 웃기니?”
“…어. 존나 안 웃겨. 정색하게 돼.”
괜스레 성질이 난 피에타가 외려 더 싱글싱글 눈을 다 접어가며 웃더니 운전석을 발로 퍽, 발길질했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권영재는 눈을 앞에 붙박은 채 정말 로봇처럼 미동도 없었다. 레시가 피에타를 향해 핀잔을 날렸다.
“왜 괜한 성질을 엄한 사람한테 부려!”
그러나 피에타는 무시하고 운전석 너머의 권영재에게 굳이 말을 붙였다.
“영재야- 재미없니.”
“예.”
“싱거운 자식. 너는 대답 좀 두 마디로 하는 연습해. 사회생활 좆도 모르는 새끼야.”
어휴 성깔 봐라…
“나름 준비한 건데… 아무도 웃어주지 않으니 슬프잖아… 그러니까 아들, 우리 아이를 우후죽순 낳아보자.”
“헛소리하지 마.”
지가 낳을 것도 아니면서… 토닥토닥 품에 안긴 몸을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두드려 주며 혼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혼자 개그를 쳐놓고 혼자 샐샐 웃는 걸 보니 왕변태인건 확실하다.
쨌든 사라진 걸 안 피에타가 눈이 돌아 기상천외한 짓을 저지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는 개뿔.
“뭐냐.”
“으응 앉아 아들. 마취 크림은 내가 발라줄게.”
피에타가 환히 웃으며 레시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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