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내가 있는 세계에서.
한편, 그 시각. 누구도 알 수 없는 지한의 상황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이미 지금의 세계에는 희미해졌을 과거의 끈 하나로 지한의 성위도 보지 못하는 깊은 심연을 보다니. 얼마나 많은 개연성과 대가를 치러야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을 정도다.
【경고: 침범할 수 없는 영혼의 영역을 침범 중입니다.】
【심연을 엿보는 대가에 유의하십시오.】
【운명의 영역은 간섭이 불가능한, 가능해서는 안 되는 금역입니다.】
【속히 멈춰 주십시오!】
【분에 넘치는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이 날카롭게 경고를 날려 주‘셨’다. 아주 상냥하게도.
결국 그래 봤자, 찌꺼기와도 같은 주제에.
아. 원래 너도 상냥하긴 했지.
그렇게 자조하면서도 그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안 돼―!!’
그래. 당연하지. 너는 아직 내게 지킬 것이 남아 있지 않나. 겨우 여기서 멈춰선 안 됐다.
‘어떤 것도 감수할 겁니다. 이 세계엔 ……것이 없으니까.’
철컥―
때문에 그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물리적으로 힘을 써 지한이 자신의 기억을 잠그는 것을 도왔다.
정말 나약하기 그지없는 넌 분명 완벽하게 잠그지 못할 것이 뻔했으니까.
[……오만하고 안타까운 자여.]
어쩌다, 이딴 놈을 골랐는지.
뭐, 사실 도긴개긴이었지만.
‘……당신이 갖고 싶어.’
결국 같은 이유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으니까.
스스로가 미쳤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미쳐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러니 너는 결코 이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
‘절대로. 알려선 안 돼.’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절대로 이 사실을, 조금도 용납해 주지 않는, 고결함 그 자체니까.
결코, 용서해 주지 않을 거다. 모든 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그런 여자니까.
쿨럭―!
“……쯧. 가지가지 하는군.”
도를 넘은 개연성을 대가로 치러서인지, 목에서부터 피가 터져 나왔다.
숨만 쉬어도 다른 성위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개연성과 힘을 쓸 수 있는 그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계가 정해 놓은 틀을 헤집어 운명을 건드는 것은 궤를 달리 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 또한 큰 타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일의 대가가 잠시간, 수 초간의 고통뿐이라면 참으로 싼 대가였지만, 그렇다고 그게 고통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통증은 금세 사라졌을 터임이 분명함에도 아직도 여파가 남아 있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털썩 소파에 몸을 눕혔다.
“아. 저런 머저리 같은 놈 때문에 이딴 짓까지 해야 하다니.”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제 화신을 위해서라면 모를까, 저딴 놈에게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하다니.
매시간 매 순간 제 화신을 보기도 아까운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 신세가 이렇게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백번이라도 똑같이 하겠지만…….
[별님. 또 어디 갔어?]
[삐질 일이 또 있던가…….]
[똥별님아. 나와 봐. 치킨 사 줄게.]
“누가 보면 치킨에 환장하는 줄 알겠네.”
중요한 건 치킨이 아니라는 걸, 이 둔한 여자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예뻐 죽겠다. 진짜.”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이매망량’이 미소 지었다.
* * *
기껏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온 지한은 현재 매우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환자분?”
“……아. 예?”
“제 얘기 듣고 계시죠?”
“……물론이죠.”
물론, 안 듣고 있다. 들을 턱이 없었다.
그야, 기껏 살아서 돌아왔더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가 보이는 관심이…….
끼융―
“아이 예뻐라. 하람아, 물면 안 되는 거 알지?”
꺄앙―!
“꺄앗. 하람이가 최고야.”
……나는?
나도 열심히 (말을 지지리도 잘 안 듣긴)했는데…….
누구 씨께서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낑낑거리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제 품 안에서 재롱이란 재롱은 다 피우고 있는 개냥이(?)를 물고 빨고 있는 지호를 보며 지우는 생각했다.
“병원에 동물 데려와도 되나……?”
지극히 현실적인 의문에, 지한이 구세주를 보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얼른 저 요망한 짐승색히를 치워 주……!!
차마 두 눈 뜨고는 뱉지 못할 소리를 하는 것 같은 눈이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그간 말 안 들은 벌이라도 주듯, 쓰러졌을 때만 해도 그렇게 열심히 자리를 지켰으면서 이제 볼 장 다 본 건지 관심은커녕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지우의 질문에도 안 되는 거면 나가면 그만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지호가 진짜 나갈까 무서운 듯 담당의가 먼저 선수 쳐 실드를 시전했다.
“VIP님이 못할 게 어디 있나요. 문제없습니다.”
한 번 VIP는 영원한 VIP. 저희 병원은 언제나 VIP를 최고의 서비스로 모십니다.
아예 마케팅 문구까지 읊으며 실드를 치는 담당의의 모습에 지한과 지우는 할 말을 잃었다.
‘VIP는 길드장님일 텐데 왜 윤지호가…….’
정작 저기 있는 VIP 환자를 두고 이쪽을 VIP라 칭하는 담당의의 패기를 보고 윤지우는 답을 포기했다.
그리고 저기 넋 나간 이 병실의 진짜 주인을 잠시 바라보다 쓱―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모른 척하는 게 최고였다.
지한이 나라 잃은 얼굴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눈을 보내와 마음이 따끔거리긴 했지만 윤지호에게 단련된 심장 2N년 차. 아슬아슬하게 넘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벌컥, 탕―!!
그때. 타이밍 좋게 문이 벌컥 열렸다.
“유지한!!”
당신은 나의 구세주―!
지우가 감격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남자가 지한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가 진짜!”
“아저씨! 그거 환자! 환자라고! 우리 평화롭게 대화하자, 응?”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원티드잖아?! 이거 왜 이러실까?”
“사람은 대화를 해야지. 맨날 밥 먹듯이 얘기하시는 거잖습니까. 회사원 씨. 그러니까 그거 내려놔요.”
바람처럼 달려온 회사원이 지한의 멱살을 틀어쥠과 동시에, 고딩님과 레쓰비, 정요한이 다닥다닥 회사원의 양팔과 몸통에 붙어 그를 뜯어말렸다.
평소에는 정작 ‘씹선비’라는 이명을 가진 누구씨보다 100배 고지식한 선비 그 자체였지만, 한번 빡 돌면 ‘폭검’보다 더 막 나가는 헌터가 바로 이 양반이었으니까.
물론 그가 이렇게 막 나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예를 들어, 호구같이 다 당하기만 하던 길드장이 결국 버티다 못해 쓰러졌다든가.
“이 병신 같은 게 진짜-!!”
물론 백번 옳으신 말씀이지만, ‘그거’ 그래 봬도 길드장인데…….
그것과 더불어 국내 랭킹 2위의 최상위 네임드이기도 하다는 말은 하려다 뺐다. 여기 있는 그 누구에게도 그런 사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신입인 윤지우조차, 첫날에 확실히 알았다.
이곳, 원티드의 있는 인물은 모두, 제 피붙이를 포함해 아무도…….
“왜 말려. 더 하라 해. 저건 좀 맞아야 정신 차려.”
“하긴. 우리 길드장은 좀 혼날 필요가 많이 있어. 그냥 그 팔 놔줘.”
“말 한번 잘했다. 저거 이참에 반 죽여서 한 반년은 침대에 눕혀 놓을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선배.”
유지한을 ‘국민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유지한과 함께 원티드를 창립하고 지금까지 함께한 그들은 그럴 수 있지만, 그럼 윤지호는 대체 왜 그럴까. 생각했지만 지우는 곧 생각을 포기했다.
윤지호는 원래부터 별종이었으니까.
애초에 사춘기 때도 그 흔한 남돌 하나 좋아하지도 않던 윤지호라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비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야속한 윤지호는 누군가를 영웅시한다는 것 자체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었고.
“저기, 실장님. 그거…….”
윤지우가 실없이 생각하는데, 갑자기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윤지호의 개냥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운을 떼어 놓고 말을 끝마치지 않아, 지호는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듯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뻔한 질문에 답할 생각이 없는 윤지호를 보며 윤지우가 저것의 한심함을 알라는 듯 이미 아까 자신이 들었던 황당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길 가다 주운 개냥이래요.”
이미 보자마자 기겁하며 던진 물음에 돌아왔던 노답 답변을 들려주자, 질문의 주인, 소환술사 장예슬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평범한 고양이는 아닌 거 같은데요?”
“딱 봐도 그래 보여요.”
이미 딱 보자마자 윤지우를 비롯해 모두가 눈치챈 사실이었다.
세상 어떤 고양이가 저런 외양으로 신비로움을 뿜어내는가. 미미하지만 마력 같은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미미한 마력일지라도 느낌이 선한 걸로 봐서는 나쁜 존재는 아닌 듯싶었고, 윤지호에게 호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확실히 보였기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윤지호가 저렇게 좋아하고 있었으니, 떼어 놓기도 뭐 했고.
끼아앙―
“우리 하람이. 졸리면 자도 돼.”
꺄앙―!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말고. 어디 가지도 않을 테니까.”
너무나 부드럽고 자애로운 목소리와 토닥이는 손길에 안심한 듯 스르르 잠에 빠져드는, 저 어린 생명체가 윤지호에게 위해를 가할 리 없었으니까.
야생의 동물이, 그것도 마력을 가진 동물이 저렇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환술사인 장예슬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이 바로 동물들을 테이밍하는 테이머의 정점이었으니 모를 리가.
다만, 장예슬이 보기에 문제는…….
“저거, 백호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이번 대 신수, 백호의 계약자가 보기에 저건 아무리 봐도 백호의 아해라는 것이었다.
“뭐?!”
“저게?!”
“……지호 씨!!”
당연히 지금까지 태평하던 사람들이 뒤집어졌다.
아직까지 지한의 멱살을 잡고 있던 회사원은 너무 놀라 손을 놓아 버리기까지 했다. 지한은 멱살이 풀린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넋이 나갔다.
그냥 마력을 가진 동물도 문제긴 했지만,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수는, 그것도 백호는 얘기가 차원이 달랐다.
윤지호 역시 그 사실은 몰랐던 듯 잠깐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다시 어린 백호를 바라보다 단단히 고쳐 안았다.
그런 것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그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선뜻 아무도 행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피붙이에게는 얘기가 달랐다.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윤지호! 그거 내놔!!”
지우 역시 제가 위험한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제 피붙이, 그것도 제 누나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질 수 있으면 온갖 지랄을 할 수 있는 시스콤이었다. 윤지우는 득달같이 제 누나가 안고 있는 생물체를 뺏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막 손을 뻗어 어린 백호를 잡으려 함과 동시에 제 누나의 말 한마디에 가로막혔다.
아무것도 안 했다.
단지 말 한마디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지우는 거짓말처럼 팔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죽는다.”
저 살벌한 눈은 ‘찐’이었으니까.
“윤지호. 방금 한 말 못 들었어? 그거 개냥이 아니야. 신수라고!”
“어쩌라고.”
그게 뭐.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대답에 윤지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거 외에 설명이 뭐가 더 필요한데 이 망할 누나야!!”
어렸을 때로 돌아간 듯한 제 동생의 처절한 외침에도 누나는 매정하게 답했다.
“필요해.”
“아 놔. 윤지호 진짜.”
너 진짜 미쳤냐고, 윤지우가 온몸으로 표현하자, 외려 보란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지호가 말했다.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야. 윤지우.”
“…….”
“내가 언제 내 거 뺏기는 거 봤어?”
“…….”
그 미친 패기에 윤지우는 물론,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생각했다.
아니. 그럴 리가.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자신감에서 그 답이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그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윤지우가 머리를 쥐어뜯자, 지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도리어 되물었다.
“이건 내 거야. 근데 네가 왜 간섭하고 난리인데?”
위압감이 넘쳐나는 선언에 모두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지호에게서 저 생물을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그중 윤지우는 소름 끼치도록 그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제 것이라고 무엇을 명명하는 것 자체가 별로 없는 윤지호는, 제 입 밖으로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앗기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하며 그 모습을 보아 온 윤지우는 힘 빠진 목소리로 예슬을 향해 물었다.
“저거 문제가 많이 될까요……?”
이미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냥 테이밍 수준이었다면 센터에서 좀 시끄럽게 굴긴 해도 계약을 했다면 우리가 나서면 그래도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신수의 아해는, 알다시피 종족 자체에서 문제가…….”
“아아.”
윤지우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듯 귀를 막아 버렸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이들이 지우의 등을 다독였다.
“일단 센터 쪽 동향 좀 알아보고…….”
“이전 사례도 찾아봐야겠군요.”
“예슬이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영민한 이들답게 패닉에 빠져 있는 대신 일단 해야 할 일을 먼저 찾기 시작했다.
“그럼 전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전 빨리 나가 봐야겠어요.”
“동생 군. 일단 물이라도 마시러 가자. 최민현. 도와.”
“알았어요.”
순식간에 병실에 많던 인원들이 쭉 빠지자, 계속 지호의 눈치를 보느라 말 한번 제대로 걸어 보지 못했던 지한이 천천히 지호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지호 씨.”
“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지호가 지한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답했다.
여전히 저는 쳐다도 보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지한은 저 백호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먼저 사랑에 빠진 자가 진 것이라는 국룰에 맞게 여유가 없는 지한은, 지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며 지호의 무릎 위에 조심히 두 손을 올리고 항복을 선언했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답이었지만, 그래도 그제야 오롯이 자신을 향한 시선이 돌아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지한이 말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합니다.”
사죄의 말을 뱉으면서도 지한은 조금 기뻤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줬다는 사실에.
사랑에 허우적거리는 남자의 마음은 참 소박하고 절절했다.
“됐어. 어차피 당신 앞으로도, 알면서도 그럴 거잖아.”
그러니, 그따위 말 필요 없다며 지호가 하람을 꼭 안았다. 너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다는 듯.
고작 동물일 뿐이지만, 그마저 이길 자신이 없는 남자는 다급해졌다.
“다신, 안 그럴게요. 잘못했으니까…….”
제발 나 좀 봐줘요.
울 듯 애원하며 제 무릎에 고개를 묻는 남자를 당해 낼 자가 누가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세상에서 가장 유지한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는 여자는 결국 이번에도 져 주고 말았다.
“…….”
슥슥―
“당신한테 이렇게 약해서는 안 되는데, 큰일이네요.”
말려들기 싫은데, 말려들고 싶어질 것 같잖아.
어쩔 수 없다는 말투와 매우 안타깝다는 그 목소리에 상처받을 만도 했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는 오히려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그야…….
슥슥―
쓰다듬는 손길에는 어찌할 수 없는 다정함과 애정이 묻어났으니까.
“……노력할게요.”
당신의 마음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그래서―
“부디. 제발. 그래 줘요.”
당신의 미소를 가질 수 있도록.
언제나 그랬듯, 결국 져 주고 마는지라 사뿐히 항복을 선언하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멍청한 얼굴로 헤실거리는 주인공님이 보였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해피 바이러스는 전염이 되는 것인지 입가에는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번졌다.
예쁜 건 어쩔 수 없으니 말이다.
슥슥―
하지만 무슨 아이러니인지, 입가에 미소를 그리는 동안 반대로 머릿속은 차가워졌다.
주인공님이 쓰러진 후로는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어서, 당장 자신의 상태와 주인공님의 몸 상태에만 집중하다 보니, 현실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예 눈을 가린 것처럼.
주인공님이 깨어났을 때도, 뒤늦은 서운함과 짜증이 몰려와서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하는 사실을.
‘……실수였어.’
자신의 개입으로 이미 틀어진 전개. 그러니 소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거라 여겼다. 제가 바꿔 놓은 것이 워낙 많았고, 사이즈도 컸으니까.
그래서 더 일부러 요란하게 움직인 것도 있었다. 원작 따위 나올 새도 없이 휘몰아쳤고, 그건 완벽하게 성공했다. 자잘한 내용까진 분명 1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전개의 큰 틀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본의 아니게 초장부터 개판을 쳤겠다. 거리낄 것도 없이 아주 막장으로 만들었다.
결국 소설의 후반까지 줄기차게 당하기만 하는 원티드를 파업시켜 여론을 등에 업고 정부를 압박하고, 지한의 레이드를 막았다.
이번 게이트 역시 원 테마는 ‘나태왕의 개척점’.
마왕의 등장을 처음으로 암시하는 에피소드였다.
막말로 온갖 클리셰 소스를 짬뽕한 소설이라 마왕은 물론, 별 식상한 것들이 더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것이었다.
발로 본 독자도 기억할 메인 테마였으니 당연했다. 첫 복선에, 주인공이 다치는 것도 바로 이 이유였고.
그 과정에서, 원작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지한에게 닥칠 몇 개의 시련들이 깡그리 뭉개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태왕의 개척점’ 역시 클리어 한 건 나고, 나태왕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종료되었으니, 원작은 초장부터 완벽히 박살이 났다. 그러니 유지한은 여기서 원작처럼 마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야 함이 맞았다.
그간 여러모로 엄청 혹사를 당해 비리비리한 몸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단순한 체력의 문제지 마력은 그리 쉽게 망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지한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스킬의 리바운드. 그동안 혹사당한 몸이 버티질 못하면서 치러야 할 리바운드가 마력으로 향했다.
결국, 원작처럼 마력에 상처가 난 것이었다. 지금 지한이 꽂고 있는 링거와 진행 중인 치료 역시 모두 마력 회복을 위한 것들이었다.
즉, 상황은 달라졌어도 최종적으로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듯, 운명이 나를 비웃는 것처럼.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님이 뭘 그리 심각히 고민하고 있냐며, 저거는 좀 다쳐도 열심히 사랑받아서 걱정 없다고 사심을 가득 담아 비꼽니다.]
반면 이런 내 마음을 씨알만큼도 알 리 없는 성위님은 무엇이 그리 아니꼬우신지, 툴툴거리기만 하셨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내 모든 생각을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미친 거짓말쟁이가 또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호 씨?”
새삼 깨달은 사실에 저도 모르게 엉망이 된 기분이 표정에 드러난 듯, 지한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러왔다.
해맑고, 맑게 나를 올려다보는 두 눈에, 나는 작게 신에게 기도했다.
“응. 왜요?”
부디…… 당신이 다치지 않길.
내가, 당신을 지켜 줄 수 있기를.
* * *
내가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건, 다들 사라지고, 이제 슬슬 집에나 가 볼까 하던 차에 난입한 여울림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성과를 자랑했을 때였다.
『원티드는 여전히 묵묵부답. 전국민 가시방석… 앞으로의 국가 안보는?』
『국회, ‘유지한 헌터의 회복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국회와 센터의 엇갈리는 행보. 현재 센터는 미지급된 원티드의 정산을 처리 중.』
『청와대, ‘국가의 안전은 앞으로도 문제없을 것.’』
『유지한이 없는 대한민국. 과연?』
『국회의사당에 ‘원티드의 마음을 돌려라’ 집단 시위.』
“와우. 이게 다 뭐임?”
“안 보고 있을 줄 알았다.”
여울림의 비꼼에도 넋을 놓고 있을 정도로 현 상황은 완벽한 난장판이었다.
서로 아주 치고 박고 싸우고, 거기에 관객들의 반응 역시 과열돼 제가 벌여 놓았던 거 이상의 개판이 펼쳐져, 아주 판타스틱했다.
지한이 쓰러지고 사이좋게 멘붕이 와 여론 같은 건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이런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입이 아주 찢어지게 웃고 있자, 그런 나를 보며 여울림이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로 혀를 찼다.
“네가 벌려 놓은 일이 아주 곱빼기 곱빼기가 돼서 너희 쪽이 무슨 말을 해도 다 오케이일 분위기야. 아주 횡재했어.”
“그러게. 일단 정산부터 받고 나무늘보 흉내나 좀 내야겠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자니 잠시 우울한 생각 같은 건 잊힐 정도로 절로 신바람이 났다.
뭘 해도 거지 같은 놈들의 엿을 먹이는 일인데, 그것만큼 짜릿한 일이 어디 있는가.
행복한 기분으로 사악한 구상을 가감 없이 짜내고 있는데, 여울림이 이런 내 기분에 제대로 초를 쳤다.
“갑자기 나타나신 1위님이 팍팍 힘을 불어넣어 주셔서, 버프 제대로 받았겠다. 날뛸 일만 남았네. 나도 그동안 장전해 둔 총알 빵빵 날려야지~”
여태껏 날리고 싶어도 날리지 못했던 총알을 이제야 마음껏 써먹을 수 있게 됐다고 신나하는 여울림의 말에도 나는 거기에 순순히 동조할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1위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한이 눈을 뜨기 전까지 인터넷은 물론, 뭐 하나 제대로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여울림이 도리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야. 진짜 이것도 몰라?”
“뭔데? 나 인터넷 아예 안 봤어.”
누구 씨께서 꼬라지가 좀 그러셔서.
근거를 대듯 가자미눈을 하고 당사자를 흘깃하자, 그 시선에 누구 씨께서는 양심에 찔리기는 한 듯 몸을 움찔했고,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긴 여울림은 그런 그를 보며 쿨하게 인정했다.
“인정. 그럴 만했네.”
“감사.”
“아니. 왜…….”
뭔가 억울해 보이는 누구 씨는 가볍게 묵살하고, 여울림이 무언가를 검색하는 듯하더니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이번 게이트 안에 들어갔던 헌터 스트리머가 생방으로 게이트 중계를 했거든. 유명한 미친놈이어서 그런지 겁도 없이 있는 대로 다 생중계를 했는데, 거기 1위 얼굴이 아주 따악―! 게다가 하는 짓도 매우 대단하셔서, 지금 인기 만발이야.”
팬클럽도 벌써 생겼다고 하던데?
무시무시한 소리에 손이 덜덜 떨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한 티를 냈다간 의심을 살 게 뻔했기에 간신히 태연을 가장하고, 휴대폰을 받았다.
그렇게 확인한 영상에는…….
「“해충을 제거하는 거죠.”」
「“당신이 굽히고 살았다 해서 나까지 그래야 할 이유를 말해 봐. 나에게 당신이 살고 있는, 그 벌레보다 못한 것 같은 삶을 강요할 거라면 그에 따른 제대로 된 근거를 대.”」
“…….”
변신했어도 게이트에서 자신이 한 행동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지만, 기억하는 것과 이렇게 직접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지금 너 같은 눈을 한 개가 좋아.”」
“……와우.”
“끝내주지?”
“……응. 너무 끝내준다.”
국어책 읽는 말투로 떨떠름하게 동조하며 속으로 미친 듯이 내적 비명을 질러댔다.
ㅅㅂ. 내 흑역사!!
진심으로 거짓말 안 하고 인생의 모든 수치가 몰려드는 것 같았다.
내 손발 어쩔 거냐고 결국 있는 대로 몸을 비틀어대고 있자, 여울림이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오글거리는 건 참 조금도 못 참아요.”
이걸 어떻게 참아―!!
영상의 주인공이 내적 비명을 질렀다.
“뀨웅―?”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은 하람이가 무릎에서 고개를 들어 갸웃거리는 치명적 귀여움을 발산했다. 덕분에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황급히 하람이를 끌어안았다.
“뀨융―”
꾹. 꾸욱― 할짝―
“너 없음 어떻게 사니.”
내 힐링템.
수치사로 마감할 것 같은 인생을 하람이가 구제해 주었다.
하람이의 숨 막히는 귀여움에 간신히 수치사는 피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정서를 진정시키기 위해 열심히 하람이를 쓰다듬었다.
그런 나를 보며 오글거려서 펴지지 않는 손을 펴기 위해 하람이를 쓰다듬는 줄 아는 몰상식한 여울림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야. 그렇게 쓰다듬다 애 닳겠다.”
“안 닳아. 날 뭐로 보는 거야.”
그렇게까진 쓰다듬을 수도 없거든?
하람이에게는 쬐끔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람이가 원한다 해도 천성적인 귀차니즘으로 그렇게까지는 해 줄 수가 없었다. 버티다 버티다 아마, ‘미안.’ 하고 뻗을 거다.
그리고 여울림이 더더욱 괘씸한 이유는, 그런 나를 알면서 저런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다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야, 근데, 팬클럽은 둘째치고, 그러면 여론은 꽤 좋겠네?”
“정답. 일단 그동안 쌓인 고름 짜내는 소리나 다름없어서 윗분들이나 지랄염병이지, 여론은 좋은 편이야. 일단 첫 등장부터 저렇게 화려한 데다, 무려 월랭 1위시잖아. 월랭 1위 따 시킨다고 지랄 염병 떨어 봤자 뒈지기밖에 더 하겠어?”
“……와.”
여울림의 화려한 언변에 지한이 존경인지 황당함인지 구별 가지 않는 감탄사를 쏟아 냈지만 듣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는 우리나라 대빵도 아니고 이 세계 대빵인데, 게이트도 거의 손가락 까딱이는 수준으로 클리어했잖아. 맘만 먹으면 나라 하나 지우는 건 일도 아니겠던데 뭐. 멍청해도 죽기는 싫은 것들이 알아서 비위 맞추려고 하는 판국이야.”
뭐, 잃을 게 많은 놈들은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고 있지만 말이야.
덕분에 우리 일은 누워서 떡 먹기가 되었으니 얼른 너도 닥치고 찬양이나 하라는 여울림의 말에 떨떠름하게 동조하며 나는 다시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이 영상을 찍은 놈이 누구인지 대강 알 거 같았다.
내가 구해 주었던…… 나를 보고 천사님이라고 했던 귀요미.
그 얼굴을 찬찬히 그리며 다짐했다.
넌 걸리면 죽었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님이 그러니까 얼굴에 홀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며, 거 보라며 혀를 끌끌 찹니다.]
그러니까…….
‘날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지―!’
철판 열 개는 깔아 둔 것 같은 뻔뻔함에 성위님이 어이가 털린 듯 넋 나간 목소리로 삿대질을 했다.
[뭐, 뭐 어디 저런 맹랑한 화신이 다 있느냐며, 화신의 뻔뻔함에 ‘이매망량’님이 뒷목을 잡습니다.]
여기. 네 화신.
뻔뻔스레 응수하며 성위를 뒷목 잡게 하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음. 그럼 미지급 정산금은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굴러들어 올 테니 어디 놀부처럼 늦장이나 부려 볼까.”
“다른 건 더 안 해?”
“이미 싹 다 준비해 놨지.”
날 뭐로 보고.
남 엿 먹이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내 위명이 우는 소리였다.
여울림을 처음 부를 때부터 이미 모든 준비는 싹 다 끝내 놓은 후였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띠리링―
“윤지호, 전화.”
“아. 드디어 왔네.”
그리고, 드디어 준비한 것이 빛을 발할 때가 왔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뭐야. 누구길…… 미친?”
“자. 넌 할 일 하러 가. 여울림.”
“당장 간다! 아, 사랑해!”
“어. 나도 사랑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과정으로 얻게 됐지만, 어쨌든 내 손에 들어온 기회.
아니, 내 흑역사를 깔고 만들어 낸 만큼 난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응. 결정했지?”
「“답 알고 묻지 마. 나쁜 년아.”」
“새삼.”
얼빠진 저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 * *
『법무법인 ‘명운.’ 원티드와 전속계약 체결.』
『태풍의 헌터 업계. 이 속에서 ‘명운’은 ‘원티드’와 손을 잡았다.』
『헌터 협회 및 국회 초긴장. ‘명운’을 얻은 원티드의 행보에 집중하라.』
― 명운이 어디길래 저럼?
― 윗댓 우리나라 사람 아닌가봄. 명운을 모르다니.
― ㄴㄴ. 고딩이나 법률 쪽 모르면 충분히 모를 수 있음.
― 고작 6명밖에 없는 법무법인이지만, 승률 100프로의 미친 천재들의 집단임. 사건도 골라받아서 부자들도 쉽게 의뢰 못넣음.
└ 그니까 법조계 원티드란거지?
└ ㅇㅇ. 플러스로 6명 전부 헌터임.
└ 크으. 머리도 끝내주게 좋은데 능력까지. 다 가진 재수없는 놈들이군.
└ 맞는데, 힘없는 사람 도와주는 걸로도 유명함.
― 와. 원티드랑 명운이라니. 합치면 시너지 무엇. 대한민국에서 건드는 놈은 미친놈.
└ 원래 원티드만 있을때도 건들면 미친놈이었음. 다 착한 거 이용해서 멍청하게 지금까지 건드려댄거지.
└ 참다 참다 안참겠다니까 왜 안참냐고 떼쓰는 우리나라 정부 클라스 쥑임.
└ 그전에 참은 원티드 존경함. 나같음 벌써 다 죽였음.
“역시 윤지호는 난 년이야.”
계약 체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실검으로 올리는 추진력에, 명운의 대표이자, 어찌어찌 인연을 이어 나가고 있는 지호의 악연. 공주인 대표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나는 태연스레 시치미를 뗐다.
“내가 안 했거든?”
“구라 즐.”
저건 나이를 대체 어디로 먹은 걸까.
백만 년 전에나 썼을 반사를 들으며 순간 나는, 내가 나이를 이렇게나 먹은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희멀건 놈이 시대를 못 따라가는 꼰대가 되어 버린 건지 의문이 들었다.
뭐, 사실 그의 존재 자체로도 충분히 놀랍긴 했다.
내가 아는 모든 인간들이 모두 이 세계에 똑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건 확인했지만, 직업은 다 조금씩 바뀌었다. 헌터 세계와 일반 세계는 직업군부터 차이가 날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나는 그동안 되도록, 내 핸드폰 속에 들어 있는 나름 화려한 인맥들을 섣불리 꺼내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 만나게 되더라도 확실하게 신상을 확인하거나 과거의 친분을 들먹인 다음, 슬쩍 현재의 상태를 캐냈다.
원래도 먼저 연락도 잘 안 하고, 누가 뭐 하는지 딱히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하는 제멋대로의 사회성을 자랑했기에 아무도 위화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이 녀석은 당연히 못 느낄 만했다. 연락뿐 아니라 못 본 지 꽤나 오래됐으니까.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알고서 찾아온 게 아니라, 헌터계에 큰 반감을 가지고, 열성적이고, 지랄맞아 정치인도 건들기 싫어하는 진상들이 누구냐 묻자 바로 나오는 ‘명운’이라는 이름에 찾아가 보니 거기 대표가 이놈일 뿐이었다.
‘윤지호……?’
바로 나를 알아본 놈을 보고도, 나는 이놈이 정말 내가 아는 그놈인지 의심했다.
얼굴은 분명 내가 아는 그 녀석이지만,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지 세계가 달라서 그런 건지, 내가 아는 공주인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 정도로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다. 얼굴은 분명 익숙했지만 내가 아는 공주인은 저런 표정을,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공적인 용무로 만난 사람에게,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공주님?’
‘야―!! 언제 적 소리야!!!’
반응은 직방이었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진짜 여장하면 여자같이 보일 정도로 미소년인 놈은, 가냘픈 외모와 반비례하듯 매우 마초적인 상남자였다. 그러다 보니 저렇게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체면이고 뭐고 지랄발광을 해댔다.
그게 너무나 재밌어서 내가 유독 그렇게 많이 부르긴 했지만. 아까의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할 정도로 순식간에 내가 아는 공주인으로 바뀌는 매직에, 내가 너무 괴롭혔나 조금 반성했다.
물론 반성만.
‘공주님. 즉위한 거야?’
이제 그럼 여왕님인가?
살짝 던져 주자, 득달같이 찌를 문 놈이 옆에 앉은 비서가 말리는데도 아주 난리를 쳤다.
‘대. 대표님, 지, 고정하세요!’
‘이 기집애는 나이 먹어도 변하는 게 없어―! 사람 속 뒤집는 데는 아주 A++이야!! 이걸 진짜 다른 놈들처럼 굴릴 수도 없고. 아오!!’
허. 굴릴 수나 있고?
모르고 하는 말이겠지만, 월랭 1위 앞에서 하는 말이 너무나 가관이어서 세계 최강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엄청난 진실을 모르는 모지리는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찔려 길길이 날뛰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어디서 저런 재밌는 걸 알게 되었냐 즐겁게 묻습니다.]
분란을 사랑하는 성위님 역시 팝콘까지 까며 제대로 관람 모드를 취하고 물을 정도로 재밌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굳이 전남친 친구라는 것을 알려 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해 답해 주진 않았다.
어쨌든 알고 보니 ‘명운’의 대표인 지인 덕분에 일은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직원들이랑도 상의해 봐야 하고.’
요런 문제 때문에 바로 오케이는 못 받았지만.
그래도 처음 제안한 뒤로 게이트 터지고, 야단법석이었는데도 체결 성사까지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매우 이례적인 속도긴 했다.
뭐, 대충 이유는 예상이 가긴 했지만.
“우리 길드 대빵이 나라에도 큰일을 하시고, 이번 계약 성사에도 큰 공헌을 해 주신 거지.”
나름 우스갯소리로 산뜻하게 돌려 말하자, 이 세상 최고의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공주인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지금 병원 신세 지고 있는, 천성이 헌신인 인간한테 그러고 싶냐?”
그 소리에 나는 진심으로 정색했다.
“그 말이 더 개소리인 거 알고는 하는 거지?”
“뭐? 뭔 소리…….”
“유지한은―!!”
“……!”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야.”
세상에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 어디 있어.
너라면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고,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얼굴로 공주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무엇을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공주인이 쉽사리 수그러들며 사과를 해 왔다.
“미안.”
“…….”
“잘못했어. 진짜야.”
정말 알고 반성하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미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누구 씨’와 다르게, 이유도 모르면서 나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미안하다 하는 누구 씨와는 정반대로. 공주인은 미안하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는 마초 놈이었기에 그냥 이번만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됐고. 여울림이 작정하고 신나서 판을 깔아 줬으니 우리도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좋지. 일단 내용증명부터 싹 보낼까?”
녀석이 관심 갈 만한 주제로 화제를 전환하자, 잽싸게 미끼를 문 공주인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즉각 대꾸했다.
역시 법조계 불나방다운 태도였다.
딱 이런 놈을 원하긴 했지만, 그게 하필이면 또 너무 잘 아는 놈이라 인생에 조금 현타가 올 것 같긴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구라즐이라며 귀를 후빕니다.]
[이런 놈들 없으면 인생 드럽게 재미없다며 찡얼거릴 내 화신이 무슨 소리냐고. 입에 침이나 바르라고, ‘이매망량’ 님이 하품을 찢어지게 합니다.]
아 놔. 이놈의 성위님은 나를 얼마나 봤다고……
나를 너무 잘 안다. 젠장.
“내용증명은 동시다발로 보내야 효과 만점인 거 알지?”
그래야 기사도 연달아서 빵빵빵 터질 거고.
하나는 너무 소스가 약하지. 재미가 없어.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철석같이 알아들은 공주인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며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뭐 하러 해. 미쳤어?”
나는 그렇게 찔끔찔끔 일하지 않음.
미친 대범함에 참다 참다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놈의 비서가 ‘저게 진짜 미쳤나.’라는 얼굴로 놈을 바라봤지만, 나는 그러함에서 우리가 진짜 ‘찐친’임을 느꼈다.
비서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차마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대범함에 가슴이 설레 버렸으니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내가 고백했다.
“저기 있잖아. 나 꼭 내용증명 보내고 싶은 곳 있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수줍게 고백하자 공주인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물었다.
“어디?”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물음에 나는 설레는 얼굴로 평생의 버킷리스트를 읊었다.
“청와대.”
* * *
“……대표님.”
모든 계약을 마무리하고, 할 일과 필요한 자료를 챙기고 원티드를 나온 공주인의 비서이자 명운의 실세인 김한울이 갈팡질팡한 얼굴로 제 상사를 불렀다.
불안과 초조를 감추지 못한 채,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까 윤지호의 충격적인 선언 때문인 듯했다.
그런 제 부하의 불안한 심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공주인이 신나게 계획을 짜고 있다 방해를 받아 귀찮은 듯 무심히 대꾸했다.
“왜.”
“……야. 이 새끼야!”
무심한 대꾸에 결국 폭발한 한울이 공주인의 멱살을 잡았다.
“케켁. 지. 진정하시게. 친구여.”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공주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멱살을 틀어쥔 손을 다급히 치고 그를 말렸다.
일단 우리 평화롭게 대화로 해결하자며.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정도 만류에 넘어가기에는 김한울은 공주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폼으로 이놈과 4년을 지낸 게 아니었으니까.
“양아치 새끼야. 너 그러고 토낄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민간인이 헌터를 협박했다.
아주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공주인이 그렇게 저 꼴리는 대로 일을 벌리고 다녔는데도 ‘명운’이 망하지 않은 건, 공주인의 능력이 뛰어난 탓도 분명 있었지만, 그가 밖으로 나도는 동안 김한울이 명운의 중심을 잡고 지탱했기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더더욱 공주인은 김한울에게 철저한 약자였다.
때문에 힘으로라면 진작 빠져나오고도 남았지만, 공주인은 자신의 나약함을 주장하며 공손히 멱살을 잡힌 채로 자신을 낮추었다.
“친구님. 어찌 제가 하늘 같은 친구님께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지랄 마.”
하지만 전적이 워낙 화려해 넘어가지 못했다.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부은 듯 한울이 입에 칼을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그 여자분 좋아하기라도 해?! 아니, 아주 죽이 척척 맞더만! 친구 전여친이라며 미친놈아! 와. 진짜 살다 살다 청와대에 내용증명 보낸다는 신박한 소리도 처음 들어 보는데, 심지어 원티드야! 다른 곳에서 보냈으면 개소리라고 싹 씹을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절대 씹지 못할 원티드라고! 그리고 지금 조X일보 원티드가 잡은 거 아니야? 아주 앞장서서 줄줄이 옹호 기사 터뜨리더만. 그럼 이거 진짜 순식간에 개판 되는데 그걸 좋다고……!!”
“…….”
공주인은 순간 한울이 랩을 하는 줄 알았다.
너무나 속사포로 달달 뱉어 대는데, 심지어 딕션이 토씨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것이, 서바이벌 오디션만 나가도 당장 대박이 날 인재였다.
매우 심각한 얘기들이었지만, 그 와중에 공주인은 자신이 윤지호를 귀찮아서 그냥 ‘친구 전여친’으로만 소개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놀랐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거니와, 어떤 말로도 윤지호를 정의하는 건 매우 어려웠지만, 저 정도로 끝내면 진짜 사기였다.
친구 전여친은 맞지만, 매우 대단한 그 친구 새끼보다 한 수 위인 게 윤지호였으니.
그들이 헤어질 때, ‘야. 차일 만했네.’라고 시원스럽게 말해 친구와 절교 직전까지 갔으면서도 딱히 그 반응에 개의치 않았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윤지호에 한해서는 한없이 약자이고 개새끼인 제 친구는, 자신이 윤지호와 연결되어 있는 한, 절대 자신과 인연을 끊을 리 없었으니까.
“저기 친구야.”
“뭐. 왜!”
뭐, 이야기가 잠시 딴 얘기로 새긴 했지만, 결론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안 해도 돼. 이번 일은 그냥 잭 팟이라고. 우린 그냥 주워 먹기만 하면 돼.”
“야! 그게 말처럼 쉽냐. 아무리 원티드라지만……!!”
“아니, 원티드가 아니라 윤지호라서 되는 거야.”
“……뭐?”
지금 이 상황의 절대 ‘갑’은 윤지호였다.
윤지호가 조금이라도 원한다면, 아니, 윤지호가 별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녀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들이 오로지 윤지호를 위해 움직일 테니까.
“원티드는 그동안 충분히 반격을 할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천성적으로 딱 빨대 꽂히기 좋은 사람들만 모였잖아.”
“알지. 그래서 다들 속 터진다 하면서도 뭐라 못…….”
“근데 그런 곳에 제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건 곧 죽어도 못 보는 녀석이 들어가서 실세가 되었지.”
“고작 그뿐이잖아.”
“고작이라니. 그 녀석이 들어가자마자 조X일보가 바로 원티드의 손을 들어 줬어. 조X일보가 어느 파에 속했는지 몰라?”
“……재성―!”
“정답!”
그제야 한울이 깨달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걸 확인한 주인은 막힘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간 원티드가 그런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도 단 한 번도 편을 들어 주지 않던 재성 그룹이 드디어 원티드. 제 자식인 유지한의 편을 들어 줬어.”
“아―!”
“물론 그전에 윤지호가 만들어 낸 이슈나 이 계약,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할 일까지. 모두 블러핑이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정부도 그냥 쉬쉬하며 넘어갈 수 없을 거야. 근거도 확실하고 심지어 이제 재성까지 가세했으니 승산은 차고 넘치지.”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쪽에서 시늉이라도 해 준 이상, 이미 승리는 결정 났어.
공주인은 자신했다.
재계 1, 2위를 다투는 재성까지 끼어 있는 데다, 그동안 원티드가 당했던 수모들은 정부와 센터의 멍청함의 대가인지, 아니면 이래도 원티드가 덤비지 못할 거라는 안일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덕택에 그 모든 착취의 증거며, 정황이 넘치도록 많이 있었다.
그걸 놓칠 윤지호도 아니었고.
모든 자료가 다 준비된 이런 상황에서 질 자신이, 공주인에게는 없었다.
윤지호는 더더욱 마찬가지일 것이고.
공주인이 자신 있게 지금 이 판에 뛰어든 이유도 그것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처럼 보이지만, 질 싸움에는 발조차 안 담그는 윤지호가 자신 있게 벌이는 일이었다. 절대로 질 리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그저 이 재미난 판에 숟가락을 얹고 신나게 헤엄치기만 하면 됐다.
“그래도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아무리 우리가 이런 거에 환장한다 해도 이 판은 너무 커.”
만에 하나 실패하면 우리도 위험하다고. 신중한 남자가 차분하게 불확실성을 언급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공주인은 여전히 그런 가능성은 1할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능성 있어 보이니 줄곧 눈치만 보던 ‘유예’도 이 판에 낄 거고, ‘녹음’도 아마 이번 일에는 적극적일 거야.”
“뭔 개소리야. 이로운이? 그 예쁜 쓰레기가 누굴, 그것도 유지한의 편을 들어 준다고?”
해가 서쪽에 뜨는 일이 빠를 것이라 김한울이 제 손목을 걸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맹목적이기까지 한 한울의 말에 공주인은 새삼 위대한 제 친구의 성질머리에 감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야. 그러게, 본 성격 다 내놓고 살 필요는 없지 않니…….
나중에 진짜 들키면 어쩌려 그러는지. 뭐 이미 헤어졌으니 상관없나.
아직도 분명 미련이 철철 넘칠 멍청한 제 친구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공주인은 한울의 의심을 잠재웠다.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무슨 근거로……?”
근거야 당연…….
“윤지호가 있으니까.”
이로운은 여전히 윤지호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 * *
「“넌 진짜 찐 미친년이야.”」
“칭찬 감사.”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냐. 천재다. 네가 최초 아냐?”」
“설마.”
여태 정부에게 당한 게 설마 우리뿐이겠어? 분명 시도한 사람은 많았을 거라 나는 자신했다.
다만.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원티드. 곳곳이 도착한 내용증명.』
『입을 연 원티드가 지목하는 곳들은…….』
『최종적으로 청와대까지. 원티드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길드 ‘유예’ 원티드의 의사, 존중해야 마땅해.』
『대한민국 정부는 언제까지 ‘원티드’에게만 의지하며 가혹한 짐을 지울 것인가. ‘배운변태’와의 전격 인터뷰!』
『길드장의 입원으로 속속들이 입국하는 ‘원티드’. 이대로 정부를 등지나.』
『‘원티드’가 해외로 망명할 가능성은? 그동안 원티드에게 가해진 불합리함을 보아 전문가들 입 모아 60% 이상이라는 견해를 내놓아…….』
『각국 헤드헌터들이 속속들이 입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원티드’?』
이렇게까지 공론화할 힘이 없었을 뿐.
“이야. 나라 잘 돌아간다.”
아주 멋짐.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스스럼없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자, 전화 너머의 여울림 역시 같은 생각인 듯 악동처럼 웃었다.
「“아. 요즘처럼 신나는 날이 없어. 이제 슬슬 반응 올 거야. 센터는 먼저 움직일 거고.”」
“그럼 슬슬 차지혁이 오겠네.”
「“오. 그 차지혁? 아직 고백 안 했지?”」
“하겠냐? 그 멍청이가?”
그 와중에 또 아주 멍청하진 않아서 차일 것을 뻔히 알아 더 입을 떼지 못하는 등신을 떠올리며 혀를 차자, 매우 동감하는 여울림이 ‘그럼 그렇지’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하나 한동안 더 신나게 놀겠네.”」
“냅둬. 걔도 청춘을 즐길 자격이 있어.”
「“너나 놀아, 너나. 제발.”」
입에 거미줄 치겠다며, 제발 너는 놀기라도 좀 하라는 팩폭에 그대로 당했다.
아니. 그런 거 좀 안 해도 잘 살거든?! 오히려 연애하면, 마! 감정만 소모하고, 신경 쓰고! 얼마나 피곤한데!
나름 필사적으로 변명을 지어내고 있는데, 성위님이 어김없이 초를 쳤다.
[당신의 계약성이 ‘이매망량’ 님이 응. 솔로의 발악 잘 봤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추하다고 제 화신을 만류합니다.]
‘망할 똥별 새끼…….’
눈앞에 있다면 개의치 않고 가운뎃손가락을 날려 주었을 텐데……!
지금 현재 내 앞에 보이지 않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성위가 막 약 올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라고 애써 주문을 외며, 씹었다.
“괜찮아. 지금 다른 놈들이랑 열심히 썸 타는 중인걸.”
「“뭔 개솔…… 아하?”」
엄청난 은유법을 이해하지 못해 뭔 개소리냐고 하려던 녀석은 그래도 괜히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곧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나는 심드렁하게 맞장구를 쳤다.
“너무 재밌고 예뻐서 당분간은 연애 안 해도 될 듯.”
「“인정. 이런 상대면 신나게 썸만 즐겨도 됨. 나도 그럴 거거든.”」
겁나 짜릿하고 설레 뒈지겠음.
짜릿하다는 말을 할 때 동시에 타다다닥― 소리가 들리는 게, 기사를 쓰면서 저 혼자 좋아 뒤집어지고 있는 듯했다.
물론 매우 바람직한 행동이었기에 나는 기꺼이 옹호해주었다.
“실검은 이미 띄워 놨고, 청와대 답변 나오면 바로 또 불 좀 지를까? 이번엔 뭐 하지?”
음, 해외 망명 신청이나, 헤드헌터들과 미팅 정도나 할까?
숨 쉬듯이 튀어나오는 특종 거리들에 여울림이 신나게 웃어 젖히며 소리쳤다.
「“꺄아~! 윤지호.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오냐.”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제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쾅―!
“엄마야―!!”
느닷없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예상도 못 한 침입자에 깜짝 놀라 절로 몸이 튕겨 올라갔다.
더불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힘찬 소리에 전화 너머 여울림이 소리쳤다.
「“뭐야. 뭔데?! 무슨 일이야!! 드디어 누가 너 죽이겠다고 쳐들어오기라도 했어?!”」
벌여 놓은 짓들이 하도 많았기에, 매우 신빙성 있는 가정이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상황 못지않게 매우 박력 있는 등장이긴 했지만.
“뭐야. 대……! 정하나?”
네가 왜 여기 있어?
문을 박차고 들어온 상대가 누군지 깨닫자마자 온갖 황당함이 밀려왔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전화 너머의 여울림 역시 내 말을 듣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뭐? 정하나? 그 기집애가 왜, 거길 와?”」
뭐 하러?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의문에 나 역시 생각했다.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해. 그전에,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무리 원티드가 호구 같아도, 나름대로 강한 길드인 데다 폐쇄적인 집단이었기에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는 꽤나 어려웠다.
철통같은 경비도 그렇고, 애초에 시스템상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여러 관문을 지나쳐야 했으니까.
신원을 확인하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들어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저렇게 아무나 쉽게 문을 박차고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거다.
“와. 윤지호. 어떻게 이럴 수 있음?”
……뭘?
제 사무실로 무단침입한 양아치의 말에 얼빠진 얼굴로 생각했다.
분명 눈만 마주치면 훤히 읽히는 생각일 터인데도, 나는 쳐다도 보지 않은 정하나가 사무실을 쭉 둘러보며 감탄을 했다.
그 모습에 더 어이가 없었다.
볼 게 뭐가 있다고?
제가 뭐 대단하게 꾸며 놓은 것도 아니고, 볼 거야 책상에 있는 종이 더미뿐인데, 뭘 보며 감탄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물었다.
“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거야?”
“네가 사고 친 양, 그리고 앞으로 사고 칠 양에 대해 1차로 놀랍고. 네 사무실이 유지한 사무실보다 더 본래의 용도로 쓰이는 것에 2차로 놀라는 중.”
……아하.
유라 왈, 아무리 못나고 호구 같아도 길드장이라면 길드장답게 사무실에라도 가오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길드장 사무실은, 여타 웬만한 대기업 못지않은 크기와 기품을 자랑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무실을 무슨 펜트하우스처럼 만들어 놨다.
하지만 그런 유라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사무실을 사무실답게 쓸 생각이 없는 누구 씨 덕에, 그곳은 그냥 모델하우스 같이 되어 버렸다.
용도에 맞게 사용하기는커녕 사용감도 없는 그곳은 지금도 주인 없이 전시 중이었다.
그런 곳이 현재 열심히 업무 중인 곳과 비교가 될 리가.
아니 근데 이놈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센터 연구원이 길드장 사무실에 갈 일이 어디 있다고?
타당한 의문을 품고 정하나를 바라보자, 정하나가 의외로 질질 끌지 않고 깔끔하게 답해 주었다.
“차지혁이랑 가 본 적 있으니까.”
“아이고. 불굴의 사랑이다. 진짜.”
차지혁이 왜 온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대강 보였고, 그래도 공적인 일일 터인데, 딱히 용건이 없을 정하나를 데리고 가다니. 그것도 그 고지식한 차지혁이.
대단한 참사랑이다.
차지혁이 같이 가자 한다고 따라간 이년도 마찬가지고.
“그냥 사귀어.”
제발. 보는 사람까지 애달프게 하지 말고.
처음에나 재밌었지. 그게 1년, 2년, 시간이 흐를수록 이제는 재미는커녕 제발 그만 좀 했으면 싶었다. 맨날 다른 누군가를 핑계로 서로를 보러 오는 연인 따위, 지켜보기 정말 짜증 났다.
한 3년쯤 지나고 나서부터는 두 사람을 볼 때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이 소리를 해댔음에도 정하나는 질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꼿꼿하기만 했다.
“그 멍청이가 정의의 용사 짓 때려치우면.”
어. 그거 왠지 매우 공감이 가는걸?
단호하게 터져 나오는 진심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일었다. 내가 정하나도 아닌데, 저 말에 너무 공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정의의 용사 짓 좀 때려치우면 안 되나, 싶은 마음을 먹게 만드는 인간이 바로 제 대빵이라서.
아. 그렇게 생각하니 급 짜증이 났다.
정의의 용사 짓 최고봉을 옆에 둔 내 앞에서 저건 뭐라는 건가. 호랑이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그 말 좀 우리 대빵한테 먼저 해라.”
단박에 정의의 용사 원톱을 들먹이자, 곧바로 그 위대함을 깨달은 정하나가 겸허하게 제 발언을 수정했다.
“아. 미안. 그 위대하신 분을 잊고 있었네. 그럼 그분 다음으로 잘하는 놈으로.”
“좋아. 타협.”
깔끔하게 타협을 마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정하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여기 왜 옴?”
“너만 여기서 이렇게 재미 보다니. 참을 수 없음.”
……누가 보면 진짜 놀기만 한 줄 알겠네!!
이 원티드에 들어오고 나서 있었던 파란만장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자 가슴속에서 울컥 치밀어올랐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요즘만큼 이렇게 파란만장한 적이 없었다. 마음고생도 마찬가지고.
그 노고를 싹 다 재미로 치환한 친구라는 년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저거 머리채를 그냥 잡을까? 한번 잡는 것 정도는 문제가 안 될 거 같은데…….
진심으로 잡았다간 한 번에 머리를 뽑을 수 있는 월랭 1위가 진지하게 고민에 휩싸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사람은 머리발이 전부인데, 그거 몽땅 뽑을 생각이냐고. 나름 친구이니 진정하라며 살살 달래 옵니다.]
성위님 덕에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며, 꾹꾹 참고 있는데 뭣도 모르는 녀석이 제대로 폭탄을 던졌다.
“나도 여기 취직시켜 줘.”
“……뭐?!”
얘가 뭐라는 거지?!
헌터계를 움직이는 기술력의 센터, 그리고 그 지략가들 중에서도 탑클래스인 연구원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네임드에 들어가는 연구가가 스카웃을 요구했다.
아니 왜 여기 와서 취직 자리를 찾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하나 정도 스펙이면 그냥 다른 대기업 같은 데에서, 얼굴만 들이밀어도 억대 연봉 그냥 부르며 돈다발을 흔들 텐데 왜 굳이 여기 와서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인가.
“야. 갈 거면 재성을 가지. 왜 여길 와?”
“너 있잖아.”
내가 금딱지냐?!
무심코 태클이 튀어나갈 것 같았지만, 정하나의 눈이 너무나 진지해서 쏙 들어갔다.
하는 말은 어이가 없지만, 눈은 너무나 진지하고 간절해 보여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눈치챘다. 정하나가 왜 센터를 떠나 여길 오고 싶어하는지.
처음 정하나가 수많은 대기업의 러브콜을 거부하고 센터 소속이 되었을 때와 같은 이유일 것이 뻔했다.
“……월급 많이 못 줘.”
“센터도 많이 못 받아. 그리고 넌 관심 없어서 모르겠지만, 원티드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기술력을 가진 단체 중 하나야.”
“응?”
취업하자마자 게이트나 휘말리고, 쓰러진 길드장 케어하고, 정부 엿 먹이느라 그런 쪽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소설 설정으로 보긴 한 것 같다. 관심 없어서 제대로 기억도 안 나지만.
그런 나를 보며 어떻게 실장까지 달고 앉아 있으면서 진짜로 그렇게 하나도 모를 수 있냐는 듯 연구오덕이 극혐의 눈빛을 보냈다.
“공간술사랑 연금술사 원탑이 다 원티드잖아.”
……그게 왜?
그거랑 기술력의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없는 과알못은 그냥 더 캐묻지도 말고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 자리 내줄게. 내일부터?”
“콜.”
“그래. 계약서는 내일 쓰자. 잘 부탁해. 정하나 박사.”
시원스럽게 손을 내밀자, 쾌재를 부르며 내 손을 맞잡은 정하나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 맘대로 놀아도 되지?”
정하나의 ‘논다’는 말은 ‘내가 연구하고 싶은 거 한다.’라는 걸 찰떡같이 알아들은 나는 딜을 걸었다.
“전에 나 줬던 회복 포션 무한 공급.”
“콜.”
그렇게 유지한의 절망템을 무한대로 손에 넣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전 국민이 기다리던 ‘청와대’의 답변은?!』
『드디어 입을 연 청와대. 문재호 대통령, ‘이 사안은 청와대와 무관한 사안으로 판단.’』
『‘이 사안은 청와대가 아니라, 비리에 연루된 것으로 판단된 국회의원 다수의 문제로 밝혀져… 엄밀히 수사로 밝혀낼 것.’』
『청와대가 토스한 작은 공. 국회의 상황은?』
『국회의사당에 들이닥친 특검!』
“이야. 제대로 한 건 했다, 윤지호?”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로 도배된 인터넷과 실검을 보며 정하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고건 산뜻하게 흘리고, 나 역시 꽤나 놀란 얼굴로 기사들을 확인했다.
“토스할 줄은 알았지만, 꽤 세게 나왔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빠른 시간 안에 특검을 조직해서 움직일 줄은 몰랐다.
검찰 직원들이 줄줄이 서류 박스를 들고 가는 사진들과 몇몇 제법 굵은 뼈들의 고개 숙인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나름 짜릿하긴 했다.
꿩 먹고 알 먹고인 것 같기도 하고.
작성해 놓은 데스노트의 일부들이 알아서 쓸려 나가는 걸 보며 손 안 대고 코 푼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산뜻해졌다. 그런 나를 보며 정하나 역시 신난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나름 시민을 생각하신다는 대통령이시다잖아.”
세상 다시 없을 개소리에,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것치고 제 측근들 다 챙겨 주는 것도 모자라서 자기 배도 잘 불리고, 세금만 펑펑 쓰잖아.”
“우리나라가 그렇지 뭐.”
뭐 언제는 안 그랬나.
어떤 세계든 한결같은 우리나라의 모습에 남몰래 혀를 찼다.
참 이런 것까진 안 똑같아도 되는데, 어쩜 그리 복붙한 듯 똑같은지 모르겠다.
불운한 현실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헐. 대박. 윤지호. 이거 봐 봐.”
정하나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곤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나를 재촉했다.
대체 뭔데 그러나 하고 정하나의 폰을 보는데…….
“……헐. 미쳤네.”
진짜 세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원티드는 지금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나라를 망치려 하는 겁니다!”」
「“그냥 여태까지 해 왔듯 침묵을 지켰으면 모두가 평화로웠을 테고, 국민들 역시 이렇게 안전에 불안을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원티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들, 이렇게 갑자기 정부를 향해 칼을 들이밀며, 헌터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죠.”」
「“유지한 헌터가 병상에 있다 한들, 헌터라면 누구나 국민을 보호할 책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속히 유지한 헌터는 복귀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다 한들 국민을 위해서라면! 일어서야죠”」
도무지 들어 줄 수가 없는 개소리의 향연에, 모두가 폰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뭐 꺼낼 말이 없었다.
오죽하면, 지한까지 아무 말 없이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유지한?”
오히려 너무 조용하게 있으니 불안해 유라가 조심히 지한을 불렀음에도 그의 시선은 폰을 떠날 줄을 몰랐다.
너무 몰입해서 보는 건 아닌지 걱정된 유라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리쳤다.
“유지한―!!”
“어. 어?!”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란 지한이 튀어올랐다.
그 틈에 민현이 휴대폰을 슥삭― 갈취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등 뒤에 숨기며 지한에게 충고를 던졌다.
“환자가 이런 거 보면 정신 건강에 해롭습니다.”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지요. 아무렴.
방금 전까지 넋 놓고 같이 보고 있던 인간이 말은 참 잘했다.
유라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유지한과 함께한 날이 어언 N년. 호구 같은 유지한의 곁에서 단련한 뻔뻔함은 고작 이 정도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진심은 저기 어디 구석에 처박아 두고 민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그럼. 넌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인데. 이런 심신 미약이나 조장하는 죄악 같은 건 가까이하는 거 아냐. 너 계속 보다가 회복 포션 또 먹는다?”
그 지옥을 또 맛보고 싶어? 라며 으름장을 놓는 것까지 잊지 않는 모습을 보며 민현은 존경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 상황에서도 어느 하나 놓치지 않다니!
자신은 아직 많이 부족하단 것을 깨달은 민현이 더욱더 갈고닦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그래도 나름 길드장이라고, 보고 겸 확인을 받으러 온 요한이 그 모습을 보며 짜게 식은 눈으로 흘겼다.
물론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요한의 짠 눈은, 그 말도 안 되는 유지한을 감당하고 있으면서 천성까지 착해 빠진 모지리들의 모습이 매우 안타까웠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모지리 중 한 명인 요한이 이쯤이면 되었다고 그들을 뒤로 밀어내며, 자신의 차례를 주장했다.
물론 가만히 비켜 줄 인간들이 아니었기에 결국 소리 없는 자리싸움으로 뒤바뀐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한이 물었다.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됐지?”
왜 이리 과열됐냐고.
병실에 갇혀 있는 동안 주치의의 권고대로 매스미디어와 담을 쌓고 있던 지한의 눈에는, 길드원들의 반응이나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급발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반면, 열심히 밖을 나다니며, 폰을 한시도 쉬지 않는 불굴의 한국인답게 열심히 이슈들을 접했던 이들은 재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쟤 정말 아무것도 모르냐고.
일단 저 망할 개소리 영상을 보려면 자동적으로 왜 이리되었는지 시작점을 먼저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친절한 유X브 알고리즘에 의하여.
그리고 저 영상만 봐도 처음에 분명하게 나온다. 원티드의 내용증명은 말 같지도 않은, 정부에 대한 도전장. 나라에 대한 역심이라고.
근데 영상을 봤으면서 어떻게 아직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지?
그들은 불꽃 같은 아이 컨택으로 대화를 나누며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이 개 같은 영상을 발견한 건 민현이었고, 지한이 함께 보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막 저 문제의 내용이 끝난 후라는 것을. 즉, 유지한은 아직 사태를 모른다.
상황을 파악하고 세 사람은 잠시 고민에 휩싸였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 그냥 말해 줘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저 녀석은 매우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중증 환자였고, 굳이 아직 회복 중인 환자한테 지금 당장 알 필요 없는 폭탄까지 던져 주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냥 폭탄도 아니고, 결국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폭탄이라 더더욱.
물론 어찌 보면 이 상황은 위대한 분께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모든 전권을 다 넘긴 호구 덕이니 누굴 탓하겠냐. 라고 요한은 생각했지만 그런 팩폭은 현명하게 조용히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유라 및 길드원들에게 지옥의 주둥이 소리를 듣기는 해도 그 정도의 눈치는 아직 남아 있었다. 해서 요한은 고심 끝에 그냥 딱 한 마디만 했다.
“윤 실장님 소맷자락을 잡고 매달린 건 길드장님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일입니다.”
“……뭔 소리야.”
있는 눈치도 휘발된 것 같은 소리였지만, 결론적으로 그곳에 있던 그 누구보다 눈치 좋은 촉새의 대답이었다.
* * *
한편, ‘유지한 인생의 최고 잘한 일’은 정하나가 귀찮게 굴까 봐 숨겨 놓았던 하람이를 품에 안고 우아하게 쓰다듬으며, 원티드를 야단법석으로 만든 문제의 그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원티드는 지금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나라를 망치려 하는 겁니다!”」
“하. 지랄하네.”
사상 유례없는 개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본인 자기소개를 이렇게 하고 있는 건가?
심지어 저 말을 꺼내는 X신은 제 데스노트 1장에 있는 놈 중 하나였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돈독이 오른 걸로 매우 유명한, 3선 국회의원.
온 국민이 욕하던 저딴 놈이 결국 3선이 됐다는 사실에서 우리나라는 이미 희망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놈이 지금 이 세계에서도 역시 똑같은 놈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데스노트에 이름을 올려 놓긴 했지만 이렇게 똥을 뿌릴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정말 세월이 흘러도 인간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고 혀를 끌끌 차며, 쓰레기의 더러운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고 충언했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이런 거 들어 봤자 귀만 썩지 뭐 하겠는가.
“진짜 할 짓 없나 보다.”
아니, 마지막 발악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좋게 넘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발악이 처절할수록 응징의 맛은 짜릿하다지 않는가.
너무 짜릿해서 불쾌하기까지 했지만, 그냥 그렇게 치려 했다. 앞선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생각했건만, 그 생각을 가뿐히 지르밟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냥 여태까지 해 왔듯 침묵을 지켰으면 모두가 평화로웠을 테고, 국민들 역시 이렇게 안전에 불안을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원티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들, 이렇게 갑자기 정부를 향해 칼을 들이밀며, 헌터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죠.”」
“……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얌전히 피나 빨아 먹히지 왜 기어 나와서 잘 살며 배 불리고 있는 나를 들쑤시냐 이거지?
저런 개소리를 저따위로 당당하게 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국회의원의 다른 말이 약장수. 철판 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직업이라지만, 그 뻔뻔함도 정도가 있었다.
약장수도 상도는 있었다.
「“유지한 헌터가 병상에 있다 한들, 헌터라면 누구나 국민을 보호할 책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속히 유지한 헌터는 복귀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다 한들 국민을 위해서라면! 일어서야죠.”」
병자까지 끌어내 쥐어짜 내려 하지는 않는단 말이다.
더 화가 나는 건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유지한보다 더 강한 자가 있음을 충분히 드러냈다는 거다.
만약 이들이 정당하게 강자의 의무를 내세우려 했다면 그건 병자인 유지한이 아닌 내게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내 얘기는 한 글자도 꺼내지 않고 유지한만 내세우는 이유가 뭐겠는가.
나는 건들기 무섭고, 그동안 만만했던 유지한이나 짜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호구 같다 한들 나 다음의 강자인데, 심지어 그동안 줄곧 대한민국 최강자로 자리 잡고 있었건만, 취급이 참으로 대단했다.
“정말 대단하셔. 유지한.”
대체 저것들을 어떻게 견디며 사셨대.
인생은 한방이다. 가 신조일 정도로 급발진의 대명사 중 한 명인 나로서는 정말 이해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게 버젓이 방송되고 있는 우리나라도 참, 잘 돌아갔다.
이제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유지한을 돌려 까면서 그보다 더 높은 랭커인 내 존재감을 덮고, 동시에 그 밑에 있는 모든 헌터를 깔보려는 저 심리가 정말 역겨웠다.
뭐. 보통의 헌터들이었으면 배알이 꼴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테니까.
정치적 권력도 그렇지만, 여론전까지 시작되는 순간 국민까지 포함된 절대다수를 이길 사람은 없었으니, 불합리해도 참는 수밖에.
단순하고 무식한 심리는 때로는 너무나 무서운 무기였다.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저걸 사용하는 저들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저들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
【라이브러리를 불러옵니다.】
【수백 개의 가면(일부)를 발동합니다.】
【가면을 쓴 인물의 일부 능력만을 발동합니다.】
【‘망자의 왕, 염라’를 택하셨습니다.】
【‘염라’의 스킬, 망자의 서가 채택됩니다.】
뀨우―?
주저 없이 스킬을 발동시키자,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하람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람이의 귀여움에 그래도 미친 듯한 화가 조금 누그러져 최대한 다정하게 어린 백호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괜찮아. 네 생각보다 더, 나는 무지 대단한 인간이거든.”
그럼. 어린 너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조차 그렇게 와닿지 않지만, 적어도 세계 1위는, 저들이 저렇게 깔볼 만큼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그래. 고작 네깟 게.
그것만으로도 대죄였다.
【‘망자의 왕, 염라’가 왕의 고유 권한으로 망자의 서를 기록합니다.】
【‘염라’가 죄인에게 선언합니다.】
망자의 왕이 차갑게 선언했다.
“망자의 왕으로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은 그대의 영혼에 고하노니.”
절대 쉬운 죽음 따위는 주지 않으리라.
그대에게 그런 죽음은 너무나 큰 사치일지니.
* * *
국회의원 한민국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히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뭐, 굳이 본인이 생각하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그는 성공하다 못해 꽃길만 걸어 온 인생이긴 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집안. 그 덕에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 나름 열심히 공부하긴 했지만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특권을 이용해 서울대에 들어가 교수까지 마치고, 물 흐르듯이 국회로 입성. 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루트였다.
거기에 물타기까지 잘해 뒤로는 미친 듯 뒷돈을 긁어모으면서 청렴한 이미지로 3선을 연임하고 있었고, 딸 역시 쥐뿔도 자격이 되지 않지만 무난히 서울대로 보냈다.
자신감은 이미 차오를 대로 차 있었고, 콧대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되는 남자였다. 그가 그렇게 굴어도 나날이 그의 입지는 커져만 가고 있었으니까.
그 자신감으로 이번에도 그는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겁은 조금도 먹지 않았다. 겁먹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자신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것을.
힘은 세지만, 결국 힘만 센 버러지일 뿐이었다.
보라.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의 힘도 못 쓰고 휘둘리기만 했던 버러지를. 힘이 있으면 뭐 하는가. 고작 그 정도 그릇밖에 안 되는 것을.
그는 나름 안타깝기까지 했다. 그 힘이 자신에게 있었다면…… 좀 더 유익하게 써 주었을 것을.
「“원티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들, 이렇게 갑자기 정부를 향해 칼을 들이밀며, 헌터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죠.”」
그래서 그는 그리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아무것도 못 할 것임을 아니까.
그리고, 결국 제 앞에 닥친 일이 가장 중요한 머저리들이 아닌 척 제게 손을 들어줄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헌터는 강한 힘을 가진 만큼 약한 자를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힘을 얻었다면 마땅히 옳은 일에 그 힘을 써야 합니다. 어찌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대의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그랬기에 그는 더없이 진중하게 입을 열면서도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 일을 통해 얻게 될 대가로 무엇을 할지 매우 신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아마, 이변이 없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행복한 고민이었다.
【‘망자의 왕, 염라’가 왕의 고유 권한으로 망자의 서를 기록합니다.】
【‘염라’가 죄인에게 선언합니다.】
그래. 이변이 없었더라면.
“‘망자의 왕으로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은 그대의 영혼에 고하노니.’”
“뭐. 뭐야?!”
갑자기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위압적인 선언에 짓눌리듯 한민국은 털썩―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이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설마 자신에게만 일어난 일인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뭐야. 방금 그건?!”
“다들 들은 거야?!”
“방송에도 나간 건가?!”
“미쳤어? 이거 생방이라고!!”
혼란으로 범벅되어 있는 촬영 현장을 보며, 한민국은 자신에게만 이 목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라는 데 약간 안도했다. 그럼 적어도 상황을 해명할 수 있으니까. 자신만 들었더라면 그저 미친 인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잠깐의 안도는 금세 절망으로 탈바꿈했다.
“아니에요. 이거 사람들 머릿속에 전부 다 들린 것 같아요!!”
“뭐?! 누가 이런 일을……!”
“신이 아닌 이상 그럴 리……!”
마치, 너 따위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단말마처럼 튀어나오는 비명에 모두의 머리에는 순간 한 인물이 떠올랐다.
한민국도 마찬가지로 그 인물을 떠올렸지만, 부정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고작, 고작 헌터 주제에. 그럴 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고작 헌터면서, 우리에게 휘둘려지고 이용당해야 할 헌터면서―!!
하지만 그런 발악이 무색하게, 더없이 무감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인은 죄인의 죄를 어찌 갚겠는가. 그전에 죄인은 죄를 인정하긴 하는가.’”
“무슨……!!”
한민국이 발끈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청렴한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더럽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다들 하지 않는가. 적어도 제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 정도도 안 하면 바보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까, 딱 그 정도만 청렴하게 살지 않았을 뿐이다. 죄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쓰레기처럼 살진 않았단 말이……
“‘죄인의 죄명을 펼쳐라.’”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는 한민국의 눈앞에, 자비 없는 목소리와 함께 그가 살면서 지어 온 죄목이 두루마리처럼 주르륵 펼쳐졌다.
“‘사기, 횡령, 강간, 미성년자 성매매, 미성년자 강간 후 살해……. 눈이 썩을 것 같군.’”
“……무슨―! 나는 맹세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
제 눈앞에 나타난 죄목들이 다른 이들에게도 보일까, 가슴이 철렁한 한민국이 처절하게 자신의 죄목을 부정했다.
부정하면서도 덜컹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내뱉은 죄목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 뒤로 몇 배는 될 것 같은 길이의 죄목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만약 이게 다 밝혀지면 그는 끝장이었다.
그냥 말로 읊은 것 정도는 아직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다. 저와 비슷한 자들이 만들어 온 대한민국은 이런 죄에는 매우 자비로웠으니까.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각하지 못했다. 새로 이 세계의 왕의 자리의 오른 자는 그런 대한민국의 권력자들과 다르게…… 자비롭지 않다는 것을.
“컥―! 커억―!!”
갑자기 피가 입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스스로가 토해 냈음에도 제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한민국은 두 눈에 비치는 새빨간 피를 믿을 수 없었다.
당혹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로 멍하니 제가 쏟은 피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세계의 왕은 으레 모든 왕이 그렇듯 냉철하게 선언했다.
“‘쓰레기답군.’”
대체 무엇이……?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잖아!!’
한민국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횡령은 국회의원이라면 당연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성관계에 대해서는 제가 극히 평범한 취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제 주변에는 매우 흔했다.
그 정도 위치에 올라간 기득권이 평범한 관계에 만족할 리 없지 않은가.
자신의 취향 역시 어느 지인의 소개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다만 비운은, 관계를 맺던 망할 년이 고작 목 조금 졸랐다고 그대로 죽어 버린 것뿐.
제 돈 주고 샀는데도 이런 꼴을 당하다니.
제 손으로 이룬 첫 살인에 대한 감상은 돈을 날린 불쾌감과 억울함뿐이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라는 귀찮음 약간과.
하지만 그것도 금방 처리되었다. 아이돌 연습생 같은 널리고 널린 년들을 세상에서 지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해 왔기에, 그 길을 따르면 일 처리는 너무나 금방이었다.
그렇게 지워 버린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지나 버린 일을 이제 와 들춰내며 죄를 논하는가.
“어째서, 어째서 나만!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어! 나는 죄라고 할 정도로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해―!!”
포장 따윈 조금도 되지 않는 처절한 외침에 좌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어이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의 처절함에 할 말을 잃은 건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미쳤나 봐.”
모든 이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한마디였다.
그리고 아마 그건 심판을 내리는 이 역시 마찬가지인 듯, 어디선가 헛웃음 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 착각이 아주 틀린 것만도 아닌 게,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 혀를 쉽게 놀린 탓이라고 하지.’”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답변에 한민국이 서둘러 반문하려 했지만, 반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망자의 왕이자, 이매망량의 주인이 판결을 선고합니다.】
왕의 심판이 내려졌으니까.
“아아아악―!!!”
이윽고 내려진 판결에 스튜디오가 지옥으로 물들었다.
“꺄악―!!!”
“누…눈이……!!”
설마 진짜로 이런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고는 믿지 못해 반신반의했던 이들이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와 함께 모두의 눈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미쳤어―!”
미쳤다고 외치며 현실을 부정하는 이부터, 몸이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
“의사, 아니… 힐러……!!”
당장 눈앞의 사태를 해결해 보려고 발악을 하는 이.
“방송부터 꺼!”
“꺼지지가 않아요!!”
“……이것조차? 말도 안 돼!”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 아수라장 가운데서 고고한 이는 오로지, 심판을 내리는 왕뿐이었다.
“……내 눈―! 내 눈!!”
“꺄아아악!!”
안구가 사라져 까맣게 된 한민국의 눈을 발견하고 여성 스탭이 비명을 질렀다.
남자 스탭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모두가 혐오스러워하는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몰골이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내 손으로 너를 죽일 수 있게 되었어―!”]
[“지옥보다 못한 쓰레기. 너도 나와 같은, 우리와 같은 꼴을 봐야지!”]
[“이런 기회를 주신 나의, 우리의 왕께 영원한 광영을!”]
허공에서 나타난, 한민국에게 원한이 있는 수많은 원혼들이 그의 신체를 부여잡으며 왕을 찬양했다. 수도 어찌나 많은지,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해하고 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뜯어 먹을 듯 한민국을 온통 감쌌다.
“커컥―!”
이윽고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고, 그게 한민국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커컥―!”」
한민국이 숨이 넘어가며 털썩 쓰러지는 것을 화면 너머로 보면서 내 감상은…….
놀랍게도 아무런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소하다든가, 넌 그럴 만하다든가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끝났다고 여겨지는 것뿐이었다.
스스로도 무섭다 느낄 정도로.
【심판이 종결되었습니다.】
【스킬을 해제합니다.】
그리고 스킬 종료의 안내음이 들리자마자 벼락같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지금, 스킬 ‘얼음의 심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그러니까, 지금 이 무감정은 스킬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내 본연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 순간, 난생처음 실감했다. 스킬의 부작용이란 것을.
끼야옹―
순간 놀람을 감추지 못한 건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마력을 방출했던 것인지 품 안에서 하람이가 오들오들 떨며 자신을 봐 달라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감정을 갈무리했다.
너무 안일했다. 설마 이렇게 자연스럽게 감정이 말소될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에 위화감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 자체가 더 공포였다. 스스로도 그랬는데 직접 그런 나를 보고 있던 하람이는 오죽했을까.
“하람이, 무서웠니?”
하람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묻자, 하람이가 사람 말 대신 울음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미야옹―
말도 할 수 있음에도 굳이 울음소리로 답한 건 요 녀석 나름의 애교였을까.
무서웠던 것이 분명하건만, 덜덜 떨면서도 내 무릎을 떠나지 않는 녀석을 보며 나는 어떤 누군가를 떠올렸다.
“예쁜 내 하람이…….”
하람이처럼, 당신도 그럴까? 내가 누군지 알게 되어도?
아마 당신은 그럴 것 같긴 하다.
그런 사람이니까.
* * *
“아. 윤지호. 망할 년.”
누군가 작성해 준 종이를 들고,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리며 공주인이 윤지호를 씹었다. 왜 이딴 거만 자신에게 맡기냐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해탈할 지경에 이른 한울은 주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대꾸했다.
“욕해도 늦었어요.”
이런 걸로 구시렁거릴 거면 계약을 하지 말든가. 어차피 법인의 할 일 중 하나인데 뭘 저러는지.
심지어 본인이 제일 신나 하는 일이면서 왜 이렇게 욕지거리를 하는지 한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또 지랄병 도졌나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한울을 보며 주인은 깨달았다. 저건 이걸 안 봤다는 것을.
“야. 너 이거 안 봤지.”
“오늘 온 거잖아.”
이 기자회견장도 오늘 잡고. 회견 잡느라고 발바닥 땀 나도록 뛰어다녔는데 볼 시간이 있었겠냐고.
어차피 연설은 대표가 할 거라 딱히 내용은 신경 쓰지 않았던 한울이 예사롭게 대꾸했다. 내용은 대충 뻔했으니 그리 궁금해하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한울을 보며 주인은 한숨을 쉬며 제가 들고 있는 입장문을 한울에게로 넘겼다.
“읽어 봐.”
“엥? 뭐 하러…….”
어차피 별로 도움도 안 될 텐데 뭘 읽어 보라는 건지. 이미 판을 다 짜 놓은 한울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대표가 주니 받긴 받았다.
정말 한 톨도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한 못난 부하를 보며 공주인은 덤덤히 힌트를 주었다. 사실 충격 완화 작용 좀 하라고 알려 주는 것이지만.
범인의 사고로 윤지호를 감당하기에는 심장에 너무 많은 무리가 갔다.
“윤지호의 위대함을 깨달으라고.”
어쭙잖은 마음으로 윤지호를 상대하다가는 제대로 이용당한다. 그걸 알지만 본능이 편승하라 해서 기꺼이 뛰어든 공주인은, 제가 뛰어들었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누군가와 이 기분을 공유하고 싶었다.
희생양은 당연히…….
“……와. 미쳤―!”
한울이 입장문을 보며 기함했다. 지금 이걸 1위가 난리를 친 바로 다음 날 내겠다는 것에서 윤지호가 얼마나 난년인지를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에요?”
한울이 입장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그에 공주인은 무슨 그런 징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답했다.
“대학교 때도 걔 별명이 마녀였는데 무슨 소리야.”
마녀한테 인간성을 기대한 거야?
별 개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얼굴로 공주인이 한울을 힐난하며 입장문을 빼앗았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
“그럼 나 이제 다녀올게.”
“……건투를 빕니다.”
“이미 다 차려 놓은 상에 숟가락만 얹는 건데 뭐.”
이 정도도 못 하면 쪽팔려서 윤지호 보겠냐며 공주인은 언제 구시렁댔냐는 듯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먹잇감들을 한번 쭉 훑어 주며 당당하게 새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원티드 법무 대리인 명운의 대표, 공주인입니다.”
* * *
「“국내의 여러 비리들과 그동안 저희 원티드가 감내했던 어둠, 그 덕에 많은 헌터들이 더 빛을 보지 못한 점 모두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 어찌 되었든 저희 원티드가 일조했음은 변함이 없지요. 하여 저희는 더 이상 안주하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공주인 대표. 원티드는 그동안 정부의 의뢰만 받고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예. 맞습니다. 시작은 강압적이었긴 했지만 어쨌든 원티드가 고인 물을 더 썩게 만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예. 앞으로 저희 원티드는 민간 기업의 의뢰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포문을 열고자 합니다. 국내 기업이 아닌 다국적 글로벌 기업으로써, 국민 여러분들과 더불어 세계와 소통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동안 원티드가 무리하게 받아 왔던 의뢰들은 등급에 맞는 헌터들에게로 공평히 돌아갈 것이며, 또한 앞으로 더 성장하게 될 이 나라의 미래의 헌터들을 위해, 재난 시에 오는 긴급 의뢰 외에 원티드는 그 어떤 정부 의뢰에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주인 대표. 그건……!!”」
「“원티드는 언제나, 앞으로 성장해 나갈 헌터 여러분들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여러분의 평안한 앞날을 응원하고 기원합니다.”」
기자들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패닉으로 만든 폭탄선언에, 휴가지에서 돌아온 원티드 헌터 전원도 마찬가지로 한자리에 모여 영상을 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오늘부터 내 워너비는 윤 실장님.”
“인생은 유지한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윤지호처럼 살아야 해.”
다시 한번 깨닫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모두가 주저 없이 제 존경하는 인물 1순위를 바꾸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지한은 침대에 머리를 박은 채 침음을 흘렸다.
“아우…….”
제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모든 것이 끝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런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순응할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모두들 그런 지한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축제를 벌였다.
“케이크 사자!”
“아니. 호텔을 빌리자. 오늘은 기념일로 삼아야 해!”
“좋은 생각이군. 이런 건 제대로 한탕 해야지!!”
그 축제판 사이에서 이 축제를 벌이게 만든 장본인이 활기찬 얼굴로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오. 다들 여기 모여 있었네요?!”
“구세주가 오셨다!”
“마이 갓! 우리의 여신! 선샤인!!”
“사랑합니다. 실장님!”
찬양을 넘어 사랑 고백까지 오가는 광란의 현장을 보며 현실 피붙이인 윤지우는 매우 짠 눈으로 길드장과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 두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지, 지호는 하람이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마음껏 찬양을 즐겼다.
“아주 바람직한 반응들인데요? 아, 좋은 소식 하나 더 있어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인텔리의 이미지는 다 내다 버린 듯, 가장 먼저 서류를 집어 던지며 춤을 추고 있던 요한이 물었다. 살다 살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기에 이 이상은 생각지도 않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지호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요한을 바라보며 답했다.
“센터 측에서 낼름해 갔던 돈은 정황상 보아 내일쯤 반환될 것 같아서, 그건 운영비랑 저어기 자기 사비 털어서 월급 줬던 분 통장으로 들어갈 거구요. 방금 기자회견 하자마자 온갖 의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요. 최저 의뢰비가 무려 100억이에요! 여러분 모두 월급 왕창 올려 줄 수 있다고요!!”
정작 제 월급은 안 오를 텐데도, 헌터들의 월급은 두 배로 뻥튀기해 온 윤지호가 환하게 웃자 그들은 맹세했다.
자신이 섬겨야 할 인간은 이분이라고.
“와아―!! 실장님이 최고예요! 그럼 앞으로의 연구비에 쓸 자금이…….”
“나도 새 장비를…….”
“찜해 놨던 경매 물품부터 질러야지.”
다들 꿈에 부풀어 앞으로의 장대한 계획을 펼쳐 댔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광경을 보며 지한은 새삼 생각했다. 왜 자신은 저들에게 저런 얼굴을 줄 생각을 하지 못했었나, 하고.
그런 지한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어느새 그의 옆으로 온 지호가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보기 좋은 광경이죠?”
“……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자신은 절대 만들지 못했던 광경이라고 질투를 할 만큼 지한은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만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기만 한 호구였지.
그런 호구를 보며 지호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앞으로 많이 있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니까.
자신만만한 그 말에 지한은 절로 퍼지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불현듯 어떤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당신을 지켜 줄게.’
처음으로 제게 열등감이라는 것을 알게 만든 자가 제게 한 말이.
내용도 전혀 다르고, 말한 사람도 전혀 다른데 왜 그게 생각났을까. 지한도 이해할 수 없어 순간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지호가 걱정스럽게 지한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어서…….”
“다른 생각이요?”
“무명이……”
그 사람이 제게 한 말은 그녀가 알지 못할 터인데도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 나가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알려 줘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지호는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뭔가 오묘한 미소로 물었다.
“이번 사건 때문에요? 우리가 덕을 많이 보긴 했죠.”
“…….”
“무서웠나요?”
‘……?’
지한은 질문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서웠냐니?
일반인이라면 잔인한 처사에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헌터였다. 잔인한 처사라고는 생각했어도 공포 같은 건 딱히 느끼지 않았다.
공포보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태도에.
그뿐이었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제가 그렇게 약한 모습만 보였나?
지한은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너무 약하게만 굴었나 생각하며 지호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요. 그저…… 확실히 저와 다르다는 걸 느꼈죠.”
덤덤한 대답에 하람이를 머리에서 내리던 지호의 손이 한순간 움찔했다. 물론 아주 한순간이었기에 그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유유히 하람이를 품에 안은 지호가 마치 화제를 돌리듯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당연하죠. 다른 사람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고 너스레를 떨며 지호는 하람이를 안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이상했지만 너무나 미묘해 아무도 그 미세한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도 눈치채질 못했다. 지호가 어떤 다짐을 하는지.
“아. 맞아. 이제 퇴원해도 된대요. 주치의 선생님이.”
“정말입니까?”
“네. 이제 정말 다른 세상을 느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원티드는 새로운 발걸음을 딛게 되었다.
* * *
큰일이 일단락되고, 내가 바로 한 건 바로 이사였다.
“어. 이건 여기 놔 주시고. 저건…… 저기 놔 주세요.”
“알겠습니다.”
뭐 최소한의 것은 갖춰져 있어서 출근하자마자 이쪽 집에서 생활하긴 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가구가 많이 부족했다. 사야지 사야지 생각은 했지만 워낙 일이 많이 터져서 이제야 사서 집에 채워 넣는 판이었다.
월급도 화끈하게 들어왔으니 지르는 건 시원하게 했다. 더불어 집에 있던 짐들도 엄마 얼굴 보기 전에 싹 뺐다.
‘와. 누나는…… 진짜…….’
그런 나를 보며 윤지우가 감탄 아닌 감탄사를 날렸지만 뭐 저런 걸로 저러는지, 어깨를 으쓱해 주고 말았다. 정말 얘는 간이 너무 콩알만 했다.
“아가씨! 소파는 옆으로 치울까?”
“아. 침대 두려면……. 네, 그렇게 해 주세요!”
한창 이삿짐 정리로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옆집 문이 달칵― 열렸다.
아, 시끄러워서 그런가? 이사는 사실 건물 전체에 하루 민폐를 끼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당연하긴 했다.
사과도 하고 오늘 이사 왔다고 인사도 할 겸 고개를 돌리는데…….
“……어? 유지한 씨?”
보여서는 안 될 인간이 눈에 보였다. 믿을 수가 없어 보란 듯이 눈을 비비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수줍게 말했다.
“오늘 이사로군요.”
아니, 이 양반아. 그게 문제냐. 넋 나간 정신이 다시 가출할 것 같은 기분을 체험하면서 간신히 입을 여는데……
“어떻게 여기…….”
“제 집이니까요……?”
겨우 잡아 놓은 정신을 가출시키는 대답에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망할. 이런 얘기는 안 해 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