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내가, 당신이 바라는 내가 아니더라도.
파삭―
직접 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어디서 뭔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귓가에 들리자마자, 곧바로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저게 무슨…….”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고……?”
붉게 번진 게이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보고도 환상인가 싶었다. 아니면 게이트가 아니거나. 많지는 않지만, 스킬을 씀과 동시에 하늘을 물들이는 스킬도 있으니까. 그냥 다른 수작을 부린 건 아닐까.
믿을 수가 없어 모두가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신은 없었고, 기대는 언제나 박살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시스템이 울렸다.
【게이트가 열립니다!】
【근처에 있는 비각성자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길 권고합니다.】
【헌터들은 모두 속히 전투를 대비하세요!】
【‘화룡왕 드라키스’를 클리어한 반동으로 드라키스의 숙적이 이 세계로 손을 뻗습니다!】
【충격과 반동에 주의해 주십시오!】
“……뭐……. 으악―!”
“이…… 이게 무슨…!!”
알림음과 동시에 갑자기 미친 듯한 진동이 그들을 덮쳤다. 지진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진동이었다. 하늘까지 흔들리며 세상이 뒤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콰지직―!
“……!”
“모두, 방심하지 마!!”
땅이 갈라지고, 부서지며, 땅의 잔해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마치 게임에서나 볼 것 같은 풍경이었다. 우주 공간이라도 되는 건지 하나둘 떠오르는 땅의 잔해들에, 얼결에 헌터들 역시 갈기갈기 흩어지게 되었다.
“……저건.”
이윽고, 하늘이 산산조각이 났다. 마치 누군가 등장할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그걸 보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라키스가 끝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서지 않았다. 그 다음을 생각해야만 했으니까.
충분히 그들 선에서 드라키스를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졌던 건, 그가 SSS급으로서 본래 힘의 반의 반도 내지 못한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드라키스 이후에 올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는 드라키스 뒤에 등장하는 존재. 그 앞의 드라키스는 어디까지나 맛보기에 불과했다. 그러니 드라키스 정도는, 내 힘이 없어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드라키스가 이렇게 일찍 나타날 것도 물론 예상하지 못했지만,
“……돌아버리겠네.”
이다음에 찾아올 존재가 이렇게 바로 등장할 줄을 알았겠냐고.
콰직―!
갈라진 세계의 틈새를 비집고 손이 나타났다. 그 사이로, 보기만 해도 전의를 잃어버릴 것 같은 흉포한 눈동자가 보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드라키스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존재라고.
스토리상으로도 너무나 완벽하지 않은가. 드라키스가 봉인된 상태로 제힘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죽고, 그 뒤를 이어 ‘진짜’가 나타나는. 더불어, 드라키스의 용아병을 비롯한 잔챙이들은 아직 널린 상태였다. 그 병력까지 고스란히 저놈이 흡수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몬스터는 저보다 위에 있는 존재에게는 자동으로 고개를 숙이니.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전개가 흘러갈 수 있는가. 진짜 작가 놈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무슨 스토리를 이렇게 짜냐고. 내 눈앞에 작가가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장장 3시간 동안 퍼부어 줄 자신이 넘쳤다.
그렇게 분노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내게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 물론 내가 맞기도 전에 알아서 치워줄 걸 알았기에 더 그런 것도 있었다.
“……지호 씨―!”
콰직―!
“……!”
너 말고, 성위님이.
물론 의심은 어마어마하게 받겠지만 이미 완전히 망했는데 일코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어차피 다 같이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닌가. 이 상황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어 머릿속의 생각들도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일단 피해야 합니다.”
그런 내 속내를 알 리 없는 유지한이 나를 안고 그대로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다.
오로지 유지한에게만 집중하고 유지한만 집착적으로 파다 못해 이 파국을 만들어 낸 놈이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면.
“아아. 아주 세기의 영웅이셔. 일반인 먼저 챙기고. 아니, 헌터의 정석인가.”
……누가 보면 진짜 유지한 사랑하는 줄 알겠다.
사람이 뭐 저렇게 끈질겨. 생각지도 못한 히로인 후보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락으로 치달았다.
[어이. 어이. 뇌절 온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건 너무 가지 않았냐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열 내는 건 거기까지 하고 이제 돌아오라고 소리칩니다.]
‘……후우. 미안.’
성위님이 다급하게 소리치니 그제야 답 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조금 멈췄다. 내심 누군가 나를 말려 주길 원했나 보다. 그럼에도 차갑게 얼어붙은 분노를 도무지 풀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눈앞에 있는 저 새끼 때문인가.
“만족스러운가 보네.”
유지한이 훌륭한 헌터이자 영웅이라.
그 말을 곱씹으며 던진 비꼼이 가득한 내 목소리에 놈이 나를 바라보았다. 비꼬는 걸로 모자라 대뜸 반말까지 잔뜩 던졌음에도, 그런 것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래도 괜찮은 건지 놈은 나를 향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어. 마음에 들어. 그래야.”
네가 여기서 도망치지 않을 거 아냐.
악의가 가득 담긴,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그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와중에도 눈은 유지한만을 향하고 있으니 더더욱.
상대가 헛소리를 한다고 ‘헛……!’ 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인간이 유지한이지 않던가. 내가 생각하는 그는 그랬다. 그랬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정신 나간 사람에게 성격 좋게 대꾸하며 도망치는 인간은 되지 못했다.
“뭐. 그렇지. 그런데…… 넌 도망 안 가?”
너는 가야 할 텐데?
‘내 손에 죽기 싫으면.’
자신 있게 단언한다. 머리털 나고 이렇게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죽이고 싶다’라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드는 살인 충동. 오죽하면 ‘이놈을 죽이면 게이트 발현이 멈추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놈을 죽일 핑계를 만들기 위해.
실상 한번 열린 게이트는 그걸 여는 데 기여한 사람이 사망한다고 해서 게이트 발현이 멈추거나 할 리는 절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 놈을 죽여 버리고 싶어서.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 인간이 내가 죽여야 할 놈은 맞는 것 같았지만, 놈을 여기서 바로 죽여서는 안 됐다. 이미 간당간당한 인내심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이성의 끈은 놓지 않았기에, 여기서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
[“흐음. 드라키스가 패배했다, 라. 흥미롭구나…….”]
“윽―!!”
“……귀가…….”
“아니 머리가 울려…….”
“―!!”
나지막이 내려 울리는 음성. 심지어 고작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뇌를 강타해 울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심지어 나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매우 당황스러웠다.
[아. 이거에 내성을 주는 걸 까먹었네.]
‘아. 진언 보내지…… 진작 줬어야지. 그동안 뭐 했어―?’
그런 나를 보고서야,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 빌어먹을 성위님이 당황했는지 진언까지 보내며 변명을 했다. 그 진언 때문에 골이 배로 울리는 건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고.
저 모지리를 어디다 써 먹나 싶었다. 짜증이 왈칵 일었지만, 일단 성위님을 족치는 것보다 이 빌어먹을 뇌울림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뇌가 하도 울려대니 고막에도 이상이 생기는 것 같았다. 고막이 터질 것 같달까.
“이 미친…….”
본래라면 이 나이에 겪을 게 아닌, 이석증 비슷한 증상을 견디며 성위님을 비롯한 세상 모든 것에 쌍욕을 퍼부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짜증이 나서.
더욱 나를 화나게 하는 건 이렇게 오만 쌍욕을 내뱉고 있는 내 귀를 제 두 손으로 막아 주는, 빌어먹을 정도로 상냥한 이 남자였다. 귀를 막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기나 좀 신경 쓸 것이지.
1위인 내가 이럴 정도니 유지한은 오죽할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텐데. 아마 뇌수가 다 빠져나오는 느낌일 것이다. 네임드고 뭐고 할 것 없이 사이좋게 다 머리를 붙잡고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데도 그 와중에 저가 아니라 나를 신경 쓰고 있다니.
사랑이라기엔 정도가 넘쳤다.
“……너나…… 신경…… 써…….”
제발.
말 한마디 뱉기도 힘들었지만, 너무 속이 터지고 억울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발 너나 좀 신경 쓰라고. 나는 괜찮으니까.
어차피 나는 성위님이 알아서 챙겨 줄 것이다.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단 말이야.
말할 수도 없고, 밝힐 수도 없고, 그가 알 리도 없었지만, 그래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설령 내가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네가 사랑하는 여자라도, 이런 위급한 순간에는 제발. 내가 아닌 너를 조금이라도 챙기기를 간절히 바랐다.
전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억지로 하라고 시켜도 되지 않을 것이 뻔하니까.
그러니 제발 조금이라도. 사람이라면, 남보다 제 몸을 신경 쓰는 게 당연하니까. 원망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좀…!
그리고, 그런 나를 알아본 듯 그가 웃었다. 모든 걸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것처럼.
사랑에 눈먼 바보처럼,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네가, 더…… 중요해.”
“―!”
이런 순간에마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꽉 막힌 놈 때문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정말 빌어먹을 놈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화신에게 스킬을 적용합니다.】
【‘위대한 격에 맞서는 의지(SSS)’를 획득하셨습니다.】
【격으로 그대를 무릎 꿇릴 자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자신합니다.】
성위님이 힘을 써 준 뒤에야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천천히 손을 들어 내 귀에 있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심히 떼어내 유지한의 귀에 대 주었다.
“나는 이제 괜찮아.”
그 덕에 결심이 섰다.
이 남자는 언제나 나를 바꾸었고. 또 내가 하지 않을 짓을 하게 만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완전히 주어 버린 마음은 이제 돌릴 수 없었다.
【게이트의 등급을 측정 중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지호…….”
“이제 뒤로 빠져 있어.”
지한을 뒤에 두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멀쩡한 거지?”
“이렇게 깔짝거려대니 안 나올 수가 있나.”
모른 척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더라고.
“……뭐……?”
“그토록 원하는 것 같으니 바라는 대로 내가 놀아 주려고. 이제부터.”
아. 역시 일코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 * *
“윤지호! 뭐 하는 거야!!”
다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기 힘들어하는데, 여기서 제일 약할 것 같은 녀석이 가장 화끈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와. 저거 목청 보소.’
전혀 기대치 않았던, 현재 최고의 루키다운 제 동생의 모습에 누나로서 참 복잡한 심경이 들어 질끈 묶고 있던 머리를 풀었다.
“……으…… 윽…….”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앓는 소리에, 조금 전까지 저를 비웃던 녀석에게 한심한 시선을 보냈다. 저건 대체 뭐 하는 놈인지 없던 호기심이 생길 정도였다. 자기도 게이트의 여파로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한 주제에 이 자리는 왜 온 건가.
보통 스스로가 게이트의 원흉이면, 미리 대비를 해 놓거나, 아니면 저가 게이트 시발점인 만큼 그 여파에서는 멀쩡하지 않나? 적어도 그 전에 튀기라도 하던가. 대체 뭘 원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지한을 향한 순수한 원한이라고만 하기에는 벌인 일의 스케일이 너무나 컸고. 유지한을 괴롭히려면, 굳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하도 괴롭힘을 많이 당해서 쳐내느라 개고생한 인간이 나거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제 정말 일코 그만할 거냐고 묻습니다.]
‘자꾸 신경을 긁잖아.’
이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눈앞에 있는 저 새끼는 이미 나를 이보다 더 열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저기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어떻게든 나를 말리려고 다가오는 빌어먹을 주인공님은 불난 데 기름을 붓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나를 보고도 이상하다는 점을 느끼지도 못하는 건지.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나만을 향한 그 시선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했다.
“……후우.”
짜증과 분노로 머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의외로 뇌는 차가웠다. 정확히는, 이 와중에도 상황 파악은 너무 명확히 되어서 현타가 오는 느낌이었다.
해탈이랄까?
“……으…… 윽……!”
“……우…… 움직…… 이라고, 움직…… 여―!!”
상상조차 하지 못한 압박감에,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고 발악을 하지만 일어서지 못하는 헌터들.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끼에에에엑―!!
우오오오―!
그에 반해, 이 압박감으로 오히려 주인이 바뀐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사기가 오른 몬스터들. 고양감에 휩싸인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아직 제 주인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서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언제 놈들이 움직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몬스터의 본능은 파괴와 살육이었으니.
여기서 어떻게 나서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멀쩡한 거지?”
이름도 알고 싶지 않은 놈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보면 모르나. 애초에 이렇게 설친 게 나더러 나오라고 한 게 아니었나? 누가 봐도 이건 나를 도발하는 무대였다.
이래도 안 나와? 아. 안 나오면 나야 좋고.
인류의 영웅이라던 주제에 사람들이 몇이나 죽어나는지에는 조금도 관심 없나 보네.
그따위 도발을 하면서, 온 인류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속셈.
너희들의 최강자는, 너희들을 버렸다고.
아, 속이 너무 보여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평소라면 저런 개수작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나만을 바라보는 유지한이 너무 미련해 보였고.
“이렇게 깔짝거려대니 안 나올 수가 있나.”
“뭐……?”
그런 유지한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바라는 것 같으니, 그렇게 바라는 대로. 이제는 내가 놀아 주려고.”
아. 역시, 그때.
내게 뻗어지는 그 손을 향해 손을 뻗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걸 잡지 않았을지언정.
“거기서 그만.”
일단 보이는 저 징그러운 것부터 처리해야 했기에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세계의 지배자가, 세계를 침범하는 불청객을 향해 경고합니다.】
“더는 내 영역을 침범하지 마. 분수를 알아야지.”
마치 신이라도, 아니 성좌라도 된 것처럼 내 머릿속에 있는 말이 진언이 되어 내 목소리로 세계에 퍼져 나가는 것을 듣는 건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아주 대대적인 일코 해제 선언이었다.
[“윽……! 이 무슨……!”]
갑작스러운 진언에 게이트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놈이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거에 놀라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녀석이 부숴버린 틈을 세계가 자력으로 닫으려 한 탓일 것이었다. 아무리 놈이라도 지금의 상태에서 세계의 힘을 쉽게 뿌리칠 수는 없을 테니.
【세계의 지배자가, 세계의 틈을 닫을 것을 원합니다.】
【이 세계가 자신의 현 지배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입니다.】
내 의지대로 세계가 착실히 움직인다는 착한 알림음을 들으며, 나는 조금 무념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유지한 일코인데, 이렇게 날려 버리나. 이미 만천하에 드러난 거, 뭘 어쩌나 싶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세계가…… 틈이…….”
“닫히고 있어…….”
“이게 무슨…….”
세계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움직임으로서 게이트 너머의 놈은 힘을 멋대로 방출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야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진 이들이, 한결 편해진 호흡을 이어나가며 몸을 일으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계의 지배자?”
정확히는, 하늘과 함께…… 그들의 가장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나를.
뇌가 우동 사리로 되어 있는 게 아닌 이상, 세계의 지배자가 누굴 말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세계의 지배자가 너무나 지배자 같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어린 여자애라는 것과, 그런 나를 ‘무명’과 연결시키기가 힘들 뿐.
아니나 다를까, 유지한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내 정체에 대한 의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것을 알고 싶지 않았기에, 무심하게 유지한에게서 등을 돌렸다. 내가 유지한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완전히 저버리기도, 그렇다고 살갑게 ‘짜잔! 내가 그동안 당신을 도와줬던 무명이야! 당신보다 훨씬 강한, 월랭 1위!’라고 발랄하게 말할 용기도 없었으니까.
“……이게 무슨……. 세계가……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어―!”
마치 이미 시도라도 해봤던 것처럼, 이 사태의 주범인 놈이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하긴. 벌인 일을 보니 그가 무얼 하고자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세계를 움직여서,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었겠지.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은 일이라던가.
근데…… 이거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월드 랭킹 1위가 되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깨쳤던 능력이라 1위면 다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밀리언 놈을 돌아보니, 아닌 것 같았다. 전직 월드 랭킹 1위의 얼굴이 경악과 의문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성위가 준 것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고작 1위를 한다고 주어질 리 없지 않냐고, 단순히 1위가 아니라, 세계에 인정을 받은 이 세계의 최강자도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권한이라고. 내가 준 게 많긴 하지만 그래도 가진 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좀 알라고 타박합니다.]
‘아우. 잔소리 아재.’
[아재라니! 내가 아재라니! 너한테 이렇게 다 퍼 주고, 세계를 움직일 수도 있을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 준 나한테 아재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처절하게 외칩니다.]
으. 하여간. 주접은.
이제 완전히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어쨌든 성위님과의 수다는 이쯤에서 끝마치고, 관심 한 톨이라도 바라는 얼굴로 간절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놈에게, 매우 선심을 써 관심을 던져 주었다.
“세상에, 네가 안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안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
“그냥, 네가 강하지 않을 뿐이지.”
나보다 더.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것뿐이야.”
오로지 그뿐.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이걸 모를 정도로 세상을 헛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원래 이렇다는 건, 아무리 철이 안 든 녀석들도 쉽사리 깨닫는 것이었으니. 깨달아도 인정하기 싫어서 부정은 할지 몰라도.
“……하…… 하하……. 선택, 선택…….”
내 말이 뭐가 그리 우스웠던 것일까.
마치 넋이라도 나간 놈처럼(이미 나갔지만)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 직면한 인간처럼 분노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그럴 리가. 나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선택받은 우월한 존재란 말이지요.”
“…….”
저건 어디서 뽕을 맞은 거지.
심각한 중2병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침묵하자, 그새 중2병이 더욱 심해졌는지 놈이 광소와 함께 말했다.
“하하하하! 그래! 저 빌어먹을 놈이! 바꾸지 않았더라면!!”
그리 말하며 놈은 죽일 듯이 누구를 노려보았다.
바로 유지한을.
“…….”
유지한이 대체 무엇을 바꿨다는 건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처절하게 말해서 진짜 뭔가 있을 것 같은 말이긴 했지만, 허황된 소리였기에 그냥 미친놈의 개소리인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녀석이 광소를 흘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투명한 눈물이 눈에서, 보였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정말 뭐가 있는 것인지.
궁금증이 막 생기려고 하는데, 세계의 저항력을 버티던 존재가 괴성을 터뜨렸다.
[“괴물이 여기 있었군―! 아주 재밌어!!”]
“와. 듣는 괴물 서운한데.”
난 재미없거든. 너랑 놀 생각 1도 없음.
진언으로 한 것이 아님에도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놈이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오래간만에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났군―! 아주 즐거워. 꼭 마주하고 싶군.”]
“음. 불가능할걸.”
아마 세계가 녀석이 완전히 넘어오는 걸 완전히 막지는 못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세계가 이런 억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그가 예정에 없던 불리함을 떠안은 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었으니까. 제대로 시간을 들여서 입장을 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거면 충분했다.
“원티드. 들리나요.”
「“……네……. 네!”」
「“말씀하세요. 지호 씨.”」
“다들 내가 준 아이템 잘 소지하고 있죠?”
「“네? 물론…….”」
「“근데 그건 왜…….”」
“거기에 내가 ‘신의 자비’ 이란 보석을 넣어놨거든요.”
「“예……?”」
직접 상대할 생각 별로 없거든.
“사용법은 손에 쥐면 알 거예요. 그럼, 동서남북. 사방으로, 잘 움직일 수 있죠?”
「“……알겠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원티드 창고에 있던, 최고의 보물이다. 신의 권력을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봉인템.
원티드에게 짧게 명령을 내리자,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도 자신의 목적에 방해가 될 것임을 알아차린 놈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딜……! 이것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네크로맨서가 선언합니다.】
【네크로맨서가 시체들에게 명합니다.】
【시체들이 일어납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새끼!”
“네크로맨서일 줄이야!”
꽤 실력 좋은 네크로맨서인 듯, 그가 스킬을 씀과 동시에 이번 레이드로 죽은 사망자와 이 땅에 묻혔던 모든 시체들이 일어났다.
수천 구는 되는 시체였다.
썩은 내까지 아주 완벽한 걸 보니, 네크로맨서로는 톱이라고 해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보며 나는 웃었다.
“우와. 너도 군단이 특기야? 잘됐네.”
기쁘지 않을 수가. 나도 특기거든.
“……!”
기뻐하는 내 얼굴에 놈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며 나는 즐겁게 문을 열었다.
철컥―!
【‘이매망량의 문’을 개방합니다.】
【첫 완전 개방입니다.】
【‘이매망량’의 세계의 속한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뛰쳐나옵니다.】
【‘이매망량’에 속한 모든 존재는 당신의 명에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고대하는 제 주인의 부름에, 사기가 고양됩니다.】
【‘이매망량의 주인’께 경배를―!】
“자. 축제의 시간이다.”
그 선언과 동시에 모든 귀신, 요괴들의 군단이 문에서 빠져나와 제 주인의 명을 따라 가차 없이 마력을 개방했다.
“주인께서 명하시니―!!”
“놀아 보자고!”
“와아―!!”
그리고 상공에 유유히 떠서 그녀는 자신의 가신들이 시체들을 향해 나아가 그것들을 망설임 없이 부수는 것을 즐겁게 감상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그녀의 정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나랑 놀자고 한 거 아니었어?”
“…….”
“놀자고.”
원하는 대로 놀아 줄 테니.
【스테이터스 정보를 변경합니다.】
【월드 랭킹 정보 변동을 안내드립니다.】
【비공개 정보가 공개로 전환됩니다.】
【월드 랭킹 1위. ‘이매망량의 주인’ 무명 ― 윤지호 국적: 대한민국】
“……무명.”
월드 랭킹 1위.
세계의 지배자가, 비로소 세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 * *
모두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단 한 번의 손짓만으로 혼을 빼앗을 것 같은 수경이 발밑에 생겨났다. 투명한 물 위에 있는 것처럼, 고요히 자세를 유지하던 그녀가 발로 무심하게 반원을 그렸다.
그 순간, 원형의 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빛을 내뿜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오는 수천, 수만의 군단.
“드디어 저희를 불러 주시는군요.”
“명을―!”
“주인의 뜻대로, 무엇이든.”
“목숨을 바쳐 이루어 드릴 것입니다.”
군단은 호기롭게 뛰쳐나오자마자 제 주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자신들이 본래 해야 할 일이라는 듯.
그 앞에 선 그녀는 부담스럽지도 않은 것인지.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 축제의 시간이다.”
마치 태초부터, 그들의 왕이었던 것처럼.
주인의 미소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이들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필요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스켈레톤을 비롯한 남아 있던 용아병 무리들이 정리되어 나갔다.
“와…….”
“……미쳤어…….”
덕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헌터들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참, 여유로운 관람이었다.
분명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임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참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다시 인지시킨 것은, 이제는 아예 정체를 숨기고 살기를 포기한 듯 ‘그녀’가 정보를 손수 변경했음을 알리는 시스템 소리였다.
【월드 랭킹 1위. ‘이매망량의 주인’ 무명 ― 윤지호 국적: 대한민국】
‘이매망량의 문’과 그녀가 숨김없이 개방한 마력에서 대충 예상했지만, 예상한 것과 확인 사살을 당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지호 씨가…….”
“……와 씨…… 지렸다……. 힘숨찐 수준이 돌았는데…….”
“…….”
그 와중에 원티드는 더 패닉 상태였다. 고딩님이 필터링 없이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데도 그 누구도 타박하지 않고, 외려 공감을 하고 있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 있는 다른 인간들의 얼굴은 그렇게 익숙하지도 않고 그들과 대단한 친분도 없었으나, 원티드 길드원들은 매일매일 전장에서 살을 부대끼며 가족처럼 함께 살아온 동료들이었다. 지호 역시 그 ‘가족 같은 동료’에 포함되는, 원티드의 일원이었으니 그들이 받은 충격은 다른 사람들과 비할 수 없었다.
물론 원티드가 더욱 놀라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상황이 무척 놀랍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지만, 의외로 납득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 때문이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아무런 근거 없이. 항상 기상천외한 발상과 뛰어난 능력으로 그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줬던 윤지호니까. 그녀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문득 생각을 해 버렸다.
와. 이번에도 한 건 하셨구나. 이런 느낌이랄까?
그렇다 보니 기분이 매우 묘했지만 처음 경악했던 것에 비해 생각보다 일찍 다들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와 보니, 그제야 그들의 눈에 보였다.
“……길드장?”
“어이. 여보세요……?”
“뭐야. 이거 왜 고장 났어?”
“뭐? 벌써 고장 나면 안 돼. 앞으로 많이 써야 한다고!”
“와…… 진짜 너무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로 충격을 받은 건지, 뭘 느끼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절망과 충격을 전부 다 떠안고 있는 것 같은 길드장의 얼굴이.
지켜 주겠다고 매일같이 난리를 쳤으니 쪽팔려서 그런가. 그건 좀 그럴 만하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유지한은 분명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지만, ‘무명’과는 그 수준이 아득히 달랐다. 당장 4군단장과의 전투만 보아도 그녀와 지한의 격차는 상당했다. 그런 절대적인 존재를 지켜 주겠답시고 늘 자신 있게 나섰으니.
새삼, 윤지호가 유지한을 지켜 주겠다고 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 그들이 윤지호를 볼 때, 딱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누가 누굴 지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만은 예뻤기에 모르는 척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 다 자신이 있어서였네.’
그 자신감의 근거를 저리 보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 자신에게 저 정도 힘이 있었다면 세계도 거뜬히 지킬 수 있다고 오만하게 소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갑자기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구기며 유지한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러다 마치 무언가 굉장한 것이 떠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약속을…… 지켰어.”
“……약속……?”
무슨 약속……?
심각하고 절절해 보이는 분위기가 보는 이의 궁금증을 절로 자아냈지만, 물어도 자신들의 말이 들리기나 할지 의심스러운 상태였기에 그들은 더 캐묻지 않았다. 왠지 제정신일 때 묻는다 해도 제대로 된 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항상,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말해 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것도 자기 자신의 문제는 더더욱.
깔끔하게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니, 이제는 또 다른 골칫덩이가 눈에 보였다.
“흑흑……. 난 망했어…….”
“……대체 왜 망한 건데?”
“누나가 세계 킹정인데 옆에서 꿀 빨 생각에 신나야 하는 거 아냐……?”
친누나가 무려 세계의 지배자씩이나 되면 좋아하는 게 보통 아닌가.
인생이 꽃핀 것이나 다름없는데 정작 당사자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엎어져서 눈물을 흩뿌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원티드 멤버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조금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윤지호가 윤지우를 예뻐하는 건 원티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제 부모님보다 윤지우를 더 애정하는 윤지호가 매일 투덜대면서도 물심양면으로 윤지우를 챙겨 주는 걸 그동안 똑똑히 보았으니까.
‘……으악―! 이 새끼가! 뭐 하는 거야?!’
‘왜 너만 자! 나는 죽도록 훈련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면 당연히 굴러야지. 뭐 할 건데. 땀 냄새나. 안 떨어져!?’
‘흥. 땀 냄새에 한번 찌들어 봐라!’
정 싫다면 진작 떼어냈을 텐데, 지우가 옆을 비집고 들어올 때조차 지호는 밀어내려는 몸짓 한 번 보이지 않았다. 땀 냄새 풍기는 지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가장 찝찝할 게 분명한데도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소파에서 누나와 함께 잠들어 버리곤 했다. 그게 길드 내에서 볼 수 있었던 그들 남매의 일상이었다.
그걸 유지한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줄곧 보아왔던 이들이었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사이도 좋겠다, 누나도 세계 1등이겠다. 그대로 예쁨만 받으며 헌터로서의 입지를 착착 다져 나가면 될 것을,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러나 이윽고 튀어나온 윤지우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각성도 했으니 이제 내가 한 번쯤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
“이제는 진짜 털끝 하나 못 건드리잖아요.”
평생 윤지호에게 잡혀 살 운명이라니. 망했어.
본인은 매우 심각하게 말했지만, 듣는 이들은 매우 떨떠름해졌다.
“아니, 이미 잡혀……. 읍―!”
“쉿. 조용.”
“그러는 거 아니야. 고딩아.”
“어리다고 막 팩폭하는 거, 나쁜 거다.”
그래도 본인이 저렇게 심각해하니 그냥 어린애의 순수함이라고 생각해 조용히 묻어 두기로 했다.
그렇게 따지니 새삼 대단했다. 아무리 감추려고 애를 써도 저 엄청난 마력과 힘을 전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완벽하게 숨겼다. 아무도 그녀가 일반인인 것을 의심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녀에게서는 조금의 마력도, 능력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저런 거대한 힘을 가지고 그게 가능한가?
이 세계의 지배자로 인정받은 이가 얼마나 괴물인지가 그들에게 성큼 다가왔다.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게 살기 위해 완벽하게 정체를 숨겼던 괴물이 대체 왜 원티드를 들어왔던 것일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원티드에 있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았다. 보물을 숨기려면 다른 보물들 사이에 숨기라는 말처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작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말이 안 되는 전략이었다. 그간 수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지략을 펼친 그녀로서는 선택할 리 없는 한 수.
원티드는 소수 정예로 구성된 데다 멤버 전원이 네임드 헌터다. 물론 연구직을 비롯한 서포트들까지 네임드인 건 아니었지만, 원티드에 속한다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이 나라에서 원티드는 그런 존재였다. 그럼에도 이용당하고, 그래서 더 주목하는. 숨기에는 최악인 곳이었다.
사실 그녀는 어디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었어도 그 누구도 그녀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기운을 숨길 수 있는 한, 그녀가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아마 평생 들키지 않고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원티드에 둥지를 튼 것은…….
“……이번에도…… 내가 필요 없네…….”
“…….”
저 남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들 남의 연애 사정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말은 안 했지만, 눈치가 있는 멤버들이라면 전부 다 알고 있었다. 뭐. 서유라같이 유지한만 바라보면서도 이런 쪽으로 둔한 맹추는 모르겠지만.
‘지호 씨…… 지호 씨……!’
‘……응? 엄마. 깜짝이야. 누구 죽었어요?’
‘아…… 안 보여서요.’
‘하하. 누가 보면 내가 맨날 유지한 씨 옆에 붙어 있는 줄 알겠네. 아니, 맞나……?’
마치 어미 새를 찾든,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유지한과, 그런 유지한을 보면서도 불쾌해하기는커녕 사랑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에 손을 뻗는 그녀의 모든 행동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감돌았다.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처음에는 난생처음 보는 유지한의 모습에 당황했다. 유지한이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마 살아생전 처음일 것이라 자신했다. 그랬기에 모두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유지한의 감정을.
난생 처음 가진 날것의 감정을,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숨기려 노력하는 한편 불안을 떨치지 못해 늘 그 곁을 지키려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누가 모를 수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윤지호는 인기가 많았다.
아니, 인기가 많다 뿐일까. 그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명이 아니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랑스러운 외모에, 털털함. 시원스러운 성격과 화려한 언변. 그리고 능력도 뛰어난 그녀의 매력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원티드 내에서 남몰래 사랑을 꽃피우는 남자도 꽤 많았다. 윤지호란 벽 자체가 너무 높아 티 한 번 내지 못했을 뿐. 그들의 차마 드러내지 못한 풋사랑은, 유지한 때문에라도 말끔히 접히곤 했다. 윤지호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그만큼 유지한도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저. 점심 드셨습니까?’
‘무슨 데이트 신청하듯 말하지 말아 줄래요? 얼굴까지 붉히면서 하니까 진짜 그런 것 같잖아요.’
‘……아니…… 그…….’
‘풉. 밥 먹으러 가요. 유지한 씨.’
‘……네. 네―!’
온몸으로 유지한이 제게 있어 특별하다 외치는 윤지호의 미소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녀가 원티드에 둥지를 튼 것은, 분명 동생이 그 시발점이었을지 모르지만, 결단은 이 남자 때문일 것이라고 모두가 자신했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남자를 지켜 주고 싶어서.
“너무 보잘것없네. 나…….”
무서울 정도로 자신만 바라보는 이 맹목적인 남자를,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어서.
저런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사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유지한이니까. 예쁨 한 번, 별 것 아닌 시선 한 번 받겠다고 온 힘을 다해 애를 쓸, 유지한이니까.
“응. 일어나. 길드장. 우리 시킨 일 있잖아.”
분명 자신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뭐가 그리도 자신이 없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사실 윤지호 같은 여자를 좋아하면 평생 불안해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파이긴 했다. 무명이기 이전에, 그녀는 애초에 누군가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으니. 그녀는 홀로 완전한 존재였다.
그녀의 곁에 있으려면, 결점을 채워주는 게 아니라, 곁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그 말은 곧, 언제든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면 그대로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기도 했다.
웬만한 남자는 겁이 나서라도 덤비지 못할 것이었지만. 그 ‘웬만한 남자’에 속하지 않는 남자가 이 앞에 있었다.
생사가 갈리는 이 위급한 순간에도 사랑 때문에 넋이 나간 남자를 길드장이랍시고 어떻게든 일으키는데 옆에서는 또 다른 골칫덩이를 처리하느라 고전 중이었다.
“맞아요. 동생 군. 너도 좀 일어나고.”
“흑흑. 다들 내 마음을 몰라요.”
“누가 보면 누나가 널 죽이는 줄 알겠다. 사망 선고 받은 것처럼 그만 굴고 이제 그만 일어나지?”
“고작 사망 선고 수준이 아니거든요?!”
아이고. 자랑이다. 자기 누나가 세계 최강이라는 게 지구의 종말과 같은 수준인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윤지우의 모습을 보고 모두 코웃음을 쳤다.
무명인 게 드러나기 직전, 이 시스콤이 적들의 앞에 선 제 누나를 향해 소리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걱정을 한가득 담아 외치더니.
이래서 시스콤들은 상대를 하면 안 된다. 새삼 다시 한번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며, 윤지우를 수습해 각자 동서남북으로 찢어질 인원을 의논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그들을 급습한 인간들만 아니었다면.
“악―! 뭐……! ……밀리언?”
“……뭐? 악! 어떤 새…… 뭐야. 이 새끼 눈이 왜 맛이 갔어?”
회사원과 디올이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았다. 제 어깨를 부러뜨릴 기세로 쥐고 있는 밀리언과 눈이 마주친 회사원이나, 노이람에게 있는 힘껏 머리채를 잡힌 ‘바람의 마법사’ 디올은 심상치 않은 눈빛들에 반사적으로 주춤거렸다.
밀리언이고, 노이람이고, 얼굴이 완전히 흙빛이 된 데다 눈두덩이는 퀭하다 못해 움푹 패었다. 그 와중에 눈빛은 아주 강렬한 게,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눈깔이었다.
덕분에 머리채와 어깨를 잡힌 원한은 순식간에 전부 사라졌다. 원한이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좋으니 얼른 꺼져 주거나, 이 살기등등한 미친놈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원티드 길드원들도 회사원과 디올처럼 슬금슬금 발을 뺐다. 틈만 나면 자신들이라도 먼저 내빼려고. 저 둘을 희생양으로 던지고 지호가 맡긴 일 처리를 하러 가도 충분했으니까. 나중에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댈 핑계도 있으니 딱이었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밀리언은 회사원을, 그리고 노이람은 디올을 잡고 처절하게 외쳤다.
“나. 나 뭐 이상한 짓 안 했지?!”
“내. 내 얘기 뭐 들은 것 없나! 저분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한 거 없어!?!”
“…….”
아…….
그 처절한 외침에 모두가 두 사람이 이렇게 귀신 같은 몰골로 곧장 달려온 이유를 이해했다.
한 놈은 유지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살갑게 구는 척 빈정거리는 진상이었고, 다른 한 놈은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유지한뿐만 아니라 원티드 전체를 엿 먹이려고 혈안이던 진상 중의 최고 진상이었다.
전적이 있으니, 찔리지 않을 리가 있나.
더군다나 노이람은 윤지호라는 사람 자체에는 보자마자 호감이 생겼는지 선물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던가. 거대한 꽃다발을 안겨 주는 희대의 헛짓거리까지 하면서.
그러는 와중에도 한쪽에서는 유지한과 원티드에게 빅엿을 먹이기 위해 헛수작까지 부리며 병 주고 약 주고를 시전했으니 그가 저렇게 찔려하는 이유를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정체도 다 들통났으니 이 기회에 한번 밟아 볼까?’라고 지호가 생각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말이었다.
다른 한쪽은 빈정대기만 했을 뿐, 따로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어? 저분 어떤 눈치였어? 나 별로거나, 그렇다던 눈치 안 보였어?! 그래도 같은 길드라고 자주 봐 왔으니 조금이라도 알 거 아니야―!”
“아오. 이 진상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직접 물어봐!”
“미쳤어―!!”
“……왜?! 내가 윤지호냐? 장본인한테 직접 듣는 게 정확하지.”
“그, 그걸 물어볼 수 있을 리 없잖아―!”
“…….”
……자랑이다. 진짜.
누가 봐도 무명에게 홀딱 빠지다 못해, 사랑에까지 빠졌다는 게 문제였다. 마음을 준 여자에게가 자신의 이미지가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나쁘게 박히는 걸 바라는 머저리 같은 남자는 없을 터이니.
물론 제3 자가 보기에는…… 아주 꼴값이었다.
“어. 그래. 파이팅.”
회사원이 아주 떨떠름하게 밀리언을 응원했다.
“응. 노이람. 너도.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디올…… 디올아. 너 착하잖아! 같은 마법사 동지끼리……!”
“응. 네 연애 사정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 같다.”
그러게 처음부터 좀 잘하지 그랬니. 그렇게 막 살면 안 된다고 나는 누누이 말했거든. 다 네가 뿌린 씨앗이란다.
부처라고 일컬을 정도로 성격 좋은 헌터 중 하나인 디올이 매몰차게 노이람을 뿌리쳤다. 사감은 조금도 없는,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했을 뿐이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감 100%였다. 디올도 원티드였기에 노이람보다는 단연, 유지한 파였으니까.
물론 선택은 윤지호가 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은 아무튼 그랬다.
“이제 그만 붙들어요. 우리 시키신 일 하러 가야 돼요.”
그렇게 매정하게 그들을 뿌리치고, 세계의 왕이자, 그들의 실세가 내린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보석 가진 사람 누구누구지?”
“레쓰비랑 서유라 너랑, 이유나랑, 히키.”
“와. 구성 완벽하네. 그럼 저 넷 필두로 나눠 붙자. 상성 맞춰서.”
“그럼 내가 이쪽으로.”
“난 히키한테 붙을게.”
“회사원 넌…… 레쓰비.”
“뭐야. 난 왜 선택권 없어?”
회사원이 툴툴거렸지만, 합리적인 판단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순순히 레쓰비에게 붙었다. 레쓰비도 별말 하지 않았고. 그렇게 인원이 결정되고 그대로 찢어지려 하는데…….
“잠깐―!”
“나도 같이 가―!!”
어떻게든 뒤늦게라도 점수 좀 따 보려는 인간들의 처절한 발악이 추가됐다.
“……아. 귀찮게.”
* * *
“……아. 아니. 저기!”
“그렇게 가 버리면 어떡해. 이 노답 새끼들아―!!”
뒤도 안 돌아보고 홀연히 떠나는 법사 계열의 최강자와, 무명을 제외한 세계관 최강자의 모습에 카밀라가 목 뒤를 잡았다.
아무리 무명의 ‘이매망량의 군단’이 적들을 쓸어 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 군단은 무명의 편이었지,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무명에게 지은 죄나, 혹은 찔리는 게 많은 이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 당장 잡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지 어찌 아나―!”
“이리 무책임하게 가 버리다니……!”
그랬기에 그들은 아직 이 자리에 남아 있는 다른 랭커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 와중에 자기들이 아직도 윗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건지, 명령을 내리는 꼴이라니.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되나 싶었다. 솔직히 막말로, 무명의 군단이 적인 줄 알고 착각해서 저들까지 슬쩍 처리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태를 만들어 낸 이들이 초대한 건, 윤지호를 비롯한 참모들만이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 참모실에 있을 이유조차 없어 이 사태를 다른 곳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을 이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끌려왔다.
비 각성자이다 보니 헌터들에 비해 존재감이 흐리기도 했고, 겁이라도 집어먹었는지 뒤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서 그동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뿐. 그들은 윤지호와 참모들보다 먼저 이곳에 끌려온 상태였다.
고블린 한 마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헌터들의 등 뒤에 거머리처럼 붙어 당장 해치우라고 소리를 내지른 전적이 있기 때문에 다들 그들이 왔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져 그대로 잊혀서 그렇지.
어쨌든, 그건 그거고. 호들갑을 떨고 생색을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카밀라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냥 저것들을 다 죽일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진정되는 것 같았던 광기가 다시 밀려오는 것 같았지만, 저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동안 보여 준 태도를 보아, 윤지호. 아니, ‘무명’은 인간의 편이 아니었다. 유지한과, 자신의 사람들 편이었지.
다른 인간들은 나가서 죽든 말든, 그녀의 관심사 밖이었다. 아니 오히려 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동안의 행동으로 그녀는 그걸 증명했다. 한없이 매정하고 차갑지만 제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다정하기에 더욱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런 인간이었기에 그녀가 원티드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을지는 미지수였다.
하물며 ‘이매망량의 군단’은 인간이 아닌 괴물들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윤지호이지 다른 인간들이 아니었기에 상황에 따라 해치려 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에 하나 저 많은 수를 상대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그랬기에 카밀라도 두 사람을 붙잡을까 고민했던 것이다. 가장 귀중한 전력이었으니까.
와중에도 꼴사납게 입만 움직이며 다른 헌터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놈들은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사람이니 구하는 게 도리이기는 했다. 그래서 저 멀리, 원티드를 따라 달려가고 있는 바보 둘을 잡으러 가려 하는데, 이제는 카밀라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이가 된 성녀의 목소리가 그녀를 말렸다.
“……후. 내버려 두세요. 카밀라.”
“루치아. 안 말려도 되겠어?”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고, 카밀라가 다시 한번 물었다. 물론 성녀는 카밀라가 지켜줄 것이지만, 그래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에 둘은 있는 쪽이 더 좋았다.
하필, 전방위 방어와 공격이 특기인, 멀티들이었으니까.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꼭 필요할 때에만 없는 것들을 실컷 원망하는데, 그런 카밀라가 보이는 것인지 루치아, 말자는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을 끌고 와 봤자 순순히 따를 사람들도 아니고, 아직 여기 남아 있는 분들도 모두 훌륭하신 헌터인걸요.”
카밀라. 당신도 있고요.
성녀다운, 인자하면서 따뜻한.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안도를 심어 주는 말에 모두가 은연중에 품고 있던 불안을 날려 버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말자는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확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헌터는.
윤지호란 인간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굳이 살릴 필요도 없지만, 죽일 필요도 없다.
그동안 지호가 무명으로서 보여 준 모습은, 다 죽어도 전혀 상관없고,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주를 이루어 잔인해 보이는 면이 강하게 드러났지만, 친구인 말자는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제 친구는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증오심을 쉽게 품을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깔짝거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어떻게 그리 단언하십니까?”
“……친구거든요.”
이런 솔직한 이야기를 해 봤자 윤지호 이미지만 더 나빠질 것 같아, 말자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와 월드 랭킹 1위 윤지호가 친구라는 사실은 어차피 이제 다 알려질 사실이고, 안 알려질 거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전 세계에 까발릴 생각도 만만이었기에 거리낌은 없었다. 누구 밑에 들어가 굽히고 살 거면 조금이라도 강한 놈에게 굽히라지 않던가. 윤지호가 무명인 걸 알아차림과 동시에 철판 한 번 시원하게 깔고 그녀의 그늘에 들어갈 생각 만만이었다.
윤지호가 자신을 지켜주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기에 열심히 자신의 가치를 어필한 것도 있었다.
측근과의 이별은 천천히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그녀 스스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떨쳐냈다. 후폭풍은 꽤 클 것이다. 이 레이드가 끝나고 득달같이 달려와 난리를 칠 게 벌써 눈에 선했다. 윤지호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투성이였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막다른 곳에 이르러 있었다. 제 친구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자신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데, 왜일까. 말자는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래서 든든한 왕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인가 싶었다. 누구보다 강한 왕이 언제나 내 편에서 내 앞을 지켜줄 것이었으니.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로운?”
“쓸데없는 소리 하는군.”
유해한의 능글맞은 질문에 이로운은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렇게 유해한에게서 무심하게 등을 돌린 이로운은 제 길드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녹음은 4군단으로 찢어져 먼저 출발한 원티드 후방을 지원한다.”
단호하게 내려진 명령.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하고, 거부할 수 없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내린 명령이었다. 때문에 반사적으로 ‘오케이. 보스.’를 외치려던 이들이 뒤늦게 명령을 제대로 인지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정확히는 하나씩 이상행동을 보이며 제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네?”
“……진심이지, 보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잘못 들었나…….”
“레이드에서 제대로 활약도 못 해서 머리가 회까닥 돈 건가…….”
“우리 보스가 이럴 리 없는데……?”
반응 한번 요란했다. 뭐,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이로운이 유지한을 더럽게 싫어했던 탓에 녹음과 원티드가 앙숙이 된 것은 그에 따른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디 그냥 앙숙일 뿐인가. 물과 기름. 개와 고양이나 다름이 없었다.
산하 길드원들은 딱히 유지한에게 악감정이 없어도, 녹음은 절대적으로 이로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드였기에 자연스럽게 원티드와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원티드는 기본적으로 유지한을 아주 물고 빠는 길드이니 유지한에게 못되게 구는 모든 인간을 지독하게 싫어했고, 그 산하의 인간들도 덩달아 껄끄러워했으니 서로 피장파장이었다.
덕분에 녹음은 원티드에 친한 사람 하나 없었고, 그건 원티드도 마찬가지였다. 비 각성자 직원도 친하게 지내기 힘든 구조였다. 그런 관계를 거의 5년 동안 유지해 왔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만든 원흉이…… 뭐라고?
두 귀로 똑똑히 들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유해한 역시 이로운이 이런 결정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입을 떠억―! 벌렸다. 그런 길드원들의 반응을 훤히 보고 있음에도, 관심조차 없다는 듯 이로운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는 이들로 충분해. 그러니 저쪽으로 가는 게 실용적이지.”
“아까 혹시 어디 대가리 잘못 부딪혔어? 애가 맛이 갔나…….”
왜 이래?
친한 친구이자, ‘선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모토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유해한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로운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에 이로운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고 유해한의 손을 떼어 냈다.
“현실적으로 생각한 거다. 그리고, 네가 항상 누누이 말했지 않나.”
“……뭘?”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자에게는, 발을 핥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밉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헐.
유해한은 정말 순수히 말했다. 자신이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말이었지만, 그걸 여기서, 그 말 그대로 이행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고집불통 계의 특급 빌런. 이로운이. 그런 유해한을 보면서 이로운은 툭― 덧붙였다.
“뭐. 이미 그른 것 같지만.”
“…….”
“그래도 시늉이라도 해봐야지.”
그럼 조금이라도 돌아봐 줄지. 누가 알아.
그게 남자로서의 이로운인지, 아니면 녹음을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유해한은 굳이 묻지 않았다. 이미 이로운에게 기회는 200%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윤지호가 무명인 것은 정말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입이 떡 벌어지다 못해, 턱관절이 나가는 줄 알았다. 더불어, 파노라마처럼 그간 제가 윤지호에게 한 행적들을 떠올리고는 그대로 대가리를 땅에 박았다.
이 미친 새끼야. 어디 개길 데가 없어서 거기다 개기고 난리였냐…….
다른 건 몰라도 주제 파악만큼은 가장 잘 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는 유해한이었기에 그건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대가리를 굴렸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든 만회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로운을 돌아보았다. 과연 어떤 반응일지, 순수한 궁금증에.
‘…….’
돌아본 이로운은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놀랍도록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놀람도, 당혹도, 슬픔도, 미련도. 그 어떤 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이로운은 고요히 윤지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유해한은 깨달았다. 드디어 이로운이, 윤지호를 완벽히 포기했다는 것을. 이로운의 완벽한 패배였다.
처음부터 승기를 잡은 적도 없었지만, 저 완벽한 여자에게서 이로운은 조금의 틈도 잡지 못했다. 일부러 틈을 만들어 주고 들어오라고 허락을 받은, 유지한과 달리.
거기서부터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자. 우리 보스가 명하시니. 따라야지.”
“……부길마.”
“녹음. 모두 움직이도록.”
“예!”
제 보스의 명을 따라 몸을 움직이던 유해한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겨우 이 정도야? 너무 시시한데.”
어느새 그들의 왕이 다가와 등 뒤에 서 있었다.
“큭……. 괴물이시군요.”
“아니. 뭘 괴물씩이나. 명색이 월드 랭킹 1위인데.”
‘너 같은 별거 아닌 인간한테 발리면 쓰겠어?’라고 말하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해서,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었다.
처음 무명을 보며 느꼈던 그 감상 그대로였다.
“유해한! 뭐 해!”
아. 오래 쳐다보지 말아야겠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처럼.
“어. 지금 가.”
무심코 빠져 버릴지 모르니까.
* * *
“……무명.”
“왜?”
왜 이제 와 새삼 낯간지럽게 남의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누구의 입으로 제대로 듣는 것은 처음이라 오글거리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 진저리를 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무명’ 이름 단 지도 꽤 오래됐는데 왜 그렇게 갓 단 것처럼 징그러워하냐고 혀를 찹니다.]
‘닥쳐. 원흉!’
지가 저지른 일이면서 기억도 안 난다는 듯, 어른인 척 점잔 빼는 게 기가 막혔다.
‘무명’이라는 이 어이없고 이상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게 누구 탓인데!!
물론, 배운변태나 씹선비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명 중에서는 이상한 축에 속할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뭐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차라리 재치라도 있을 것이지. 이건 웃기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그냥 ‘엥? 이게 뭐지.’ 하는 이름이었다.
변경권 어디 없나. 억만금짜리라고 해도 구할 수만 있다면 성위님을 족치는 한이 있어도 뜯어낼 용의가 차고 넘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게 정말 있다면 진작 시스템을 족쳐서 네 손에 쥐여 줬겠지만, 네가 아무도 기억 안 해주면 좋겠다고 ‘이름없음’ 이런 거나 생각하다 ‘무명’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대로 확정 지은 시스템이 퍽이나 만들어 주겠다고, 쓸데없는 희망 얼른 곱게 접으라고 충언합니다.]
‘……어. 그래. 겁나 고맙다.’
저거 진짜 어떻게 못 패나?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앉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짱구를 굴려 봤자 물론 나오는 것은 없었지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뒤로하고, 밑을 바라보았다.
“아하하하하―!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하자고!”
“명령을 이행하는데 무슨 내기……!”
“많이 잡으면 그만큼 주인께 더 칭찬받을지 누가 아나!”
“……!!”
“그런고로. 나 먼저 간다!”
“어딜―!!”
아주 재미있게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첫나들이가 이리 화려하니 즐거울 만하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이들도 많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각성 후, ‘이매망량의 주인’ 타이틀을 달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들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온 데다, 그와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거 좋네.”
“……예?”
“주인님……?”
오히려, 모두 저리 즐거워하니 흥을 더 돋우어 주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제일 많은 공을 세운 애한테는…… 음…… 내 피를 맛보게 해 줄게.”
아주 조금이지만?
그 ‘맛만 본다는 게’ 손가락에 살짝 맺히는 핏방울 정도의 양을 의미한다는 건 나와의 연결을 통해 모두 알고 있을 텐데도, 그것만으로도 간절했던 건지 눈빛이 달라졌다.
“비켜! 죽여 버리기 전에!”
“내가 할 소리야!!”
어이쿠. 전쟁 났다.
새삼 저것들이 요괴는 요괴인가보다 실감이 났다. 내 앞에서는 요괴 특유의 잔인한 면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아 실감이 안 났는데, 이렇게 피에 환장하는 걸 보니 새삼 저것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물론 저것들이 환장하는 건 단순한 피가 아니라, 마력이 듬뿍 담긴 주인의 피였을 테지만.
“읏차.”
어쨌든 이렇게 간단하게 사기를 돋우자 더욱 빠른 속도로 처리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슬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세계가 어떻게 닫히는지 집중해야 했기에 가만히 좀 있었던 것인데, 꼴을 보니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았다.
>― 랭커 1번 채널에 입장합니다.
∥1∥무명: 원티드.
∥1∥무명: 신호 보낼 때까지 조용히, 눈에 띄지 말고 있을 것.
∥7∥스텔라: 네. 지호 씨.
∥1∥무명: 마력 가득 채워 넣고 대기만 해 줘요.
평생 쓰지도 않았던 랭커 창을 통해 저쪽이 눈치채지 않게 명령도 전해 놨겠다. 이제 좀이 쑤시는 몸을 움직일 차례였다.
【스킬: 도깨비불(S)을 발동합니다.】
【스킬: 사신의 낫(S)을 활성화합니다.】
오랜만에 꺼내는 사신의 낫을 팔에 끼고, 불로 아예 병신이 된 건지 미친놈처럼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놈을 향해 도깨비불을 피웠다. 어그로를 끈 덕인지, 넋이 나간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실망한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뭐야. 놀자며. 근데 벌써 포기하는 거야?”
재미없게.
일코 해제한 김에 실컷 놀아, 이 분노를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었던 나는 김이 팍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면 기껏 일코 해제한 보람이 없지 않은가. 억울해서라도, 오늘 꼭 화려하게 이 한 몸을 불살라야겠다. 각오를 다졌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어이, 그거 아니야. 꼭 그 한 몸 불사를 필요 없거든?! 누굴 죽이려고! 라고 기겁을 합니다.]
‘흥. 알 바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저기 저 쓰레기랑 같이, 평소에 두고 보자고 그냥 놔뒀던 놈들까지 싹 다 불사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화륵―!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도깨비불이 열의를 드러내는 것처럼 푸른 불을 더 크게 부풀렸다.
“……! 악―!”
그에 줄곧 정신줄을 놓고 있던 쓰레기가 화들짝 놀란 것은 덤이었다. 그런 놈의 앞으로 폴짝 내려가, 나는 친절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이힐을 신은 발로 놈의 손을 지르밟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왜. 고작 이 정도로 놀라면 쓰나. 하나로도 모자라,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재앙까지 불러온 놈이.”
“……큭―!”
“나랑 놀아 줘야지. 안 그래?”
벌써 뻗으면 재미없잖아.
싱그럽게 웃으며 놈을 재촉했다.
숨긴 것이 있다면 얼른 꺼내, 날 즐겁게 해 달라고.
내가 날뛸 수 있게 해 달라고.
“……아…… 하하…… 하하하하―!! 아하하하―!!!”
그런 내 나긋한 재촉에, 갑자기 놈이 진짜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이거 갔나?’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진짜 맛이 아예 가 버렸나. 뭐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먼저 포기하고 혼자서 영 가신 건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성위님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원래 맛이 간 놈은 피하는 게 상책인데, 지금이라도 그럴 생각 없냐고 진저리를 치며 묻습니다.]
‘……어, 갑자기 매우 그러고 싶어지는데.’
갑자기 불같이 날뛰고 싶던 용의가 팍― 식었다.
신나게 놀고 나발이고. 피를 나눈 망할 숙적과 내 애물단지 하나만 수습해서 돌아갈까. 심각하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참에. 놈이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하…… 이래서…… 그 새끼가……. 하하… 그래, 그런 거였어―!!”
저기서 말하는 ‘그 새끼’가 왠지 유지한인 거 같은데.
확신은 없었지만, 본능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들을 이유라고는 전혀 없던 저 헛소리가 때마침 귓가에 들렸던 것이겠지.
대체 유지한은 저놈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대충 예상이 가는 시나리오는, 저 쓰레기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그게 인류 도덕에 반하는 일이어서 유지한이 막아선 탓에 유지한이 그의 원한을 샀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그 정도가 딱 한계였다.
뭐, 크게 관심도 없지만.
“흥. 쓰레기에 손대는 취미는 없는데.”
“…….”
“나랑 안 놀 거야?”
손수 무릎까지 굽혀 높낮이를 맞춰 눈까지 맞춰 주며 물었다. 물론 저놈이랑 놀 의지는 이미 내핵 아래까지 사라진 후였지만, 그래도 상대해 주려 포기하지 않고 재촉하며, 녀석을 도발했다.
쓰레기를 상대하는 건 인생에서 제일 큰 감정 소모이자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유지한이 상대하게 하는 것보다 내 선에서 처리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실력 행사만 해도 되는 것이라면 유지한이 질 것 같지 않았지만, 저건 여러모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병이었다. 저 인간 하나만으로는 별 게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재앙을 인위적으로 불러올 정도의 능력자라면 어떤 변수가 언제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변수를, 아직 성장도 다 마치지 못한 유지한이 온전히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귀찮아도 내가 상대할 수밖에.
이런 속내를 나름대로 감추려고 노력하며 미소를 지어 주는데, 내 미소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놈이 말했다.
“하하. 당신도 놈에게 당한 피해자인데……. 그 사실도 모르다니. 그 의도대로 잡혀 있는 당신이 안타깝네요. 무명.”
“……?”
이건 또 무슨 고라니 우는 소리야. 이건 이제 미친 게 아니라 그냥 허언증 환자인가.
인생에서 누구에게 뭘 당해 본 역사가 딱히 없는 인간을, 호구한테 뒤통수 맞은 얼간이로 둔갑시키는 어휘 능력에 할 말을 잃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 저게 혹시 말로만 듣던 중2병이냐고 오소소 팔에 돋은 닭살들을 긁어내립니다.]
……성위님의 반응이 백번 이해가 갔다.
“……피해자?”
인생에 뒤통수란 걸 제대로 맞아본 적이 있기는 한가를 깊게 고민해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 나한테,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지한이?
들을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그러나 거기서 오히려 용기를 얻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너 죽고 나 죽자 심보인지 추진력을 얻은 듯, 눈앞의 미친놈은 급발진을 시도했다.
“아. 그럼. 설마 나, 아니 우리뿐만일까. 저 빌어먹을 놈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게―!!”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 그러니까, 내가?
이게 무슨 소리야. 진짜.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인간한테, 저게 지금 뭐라는 거니.
떫은 눈을 감추지 못하고 한심한 시선으로 놈을 내려다보자, 그런 나를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오히려 감정이 더욱 고양되는 듯, 그는 격한 광소를 터뜨렸다. 저놈은 복수보다 정신 병원이 먼저이지 않을까, 짜게 식은 눈으로 녀석을 보고 있다 아주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알아차렸다.
우연히 얻어걸린 것이지만, 그런 것치고는 사람을 열 받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진실이었다. 눈앞의 이를 계속 다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내 눈을 속일 수 있는 것이지?
나는 나 자신은 안 믿어도, 성위님이 내게 준 힘만큼은 믿는다. 사람은, 아니, 인격체는 때론 거짓말을 해도, 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심지어 어디 보통 힘인가. 무려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이다.
근데, 그 힘을 속였다고?
감정이 격양돼, 아주 순식간이지만, 미세하게 흐려지는 잔상과도 같은 현상이 눈에 들어온 게 기적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아. 그래. 네 인생이 병신 같긴 한가 보네.”
“뭐?”
놈은 내가 유지한한테 당한 피해자라고 열심히 열변을 토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내가 느꼈을 때, 이 새끼만큼 은밀하고 시원하게 내 뒤통수를 깐 인간은 없었다. 한번 살펴볼 때마다 뭔가가 계속 나오니 이쯤 되면 양파를 넘어 범죄였다.
“이렇게 뒤에 숨어서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는 재주라……. 어떤 의미로는 아주 대단해.”
“……!”
“그래서 더 병신 같고.”
내가.
처음부터 전부 속았다는 것에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신 나간 놈이 제게 보여 준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연극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의 정체와 목적을 알기 위해 이곳에 손수 끌려왔던 나를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이 남자에게 ‘진실’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은 진짜가 아닌, 놈의 분신에 불과하다. 무슨 짓을 어떻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실체가 따로 있는 놈의 분신이었다.
흔해 빠진, 마력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분신이었다면 내가 그 사실을 간파해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내 몸 안에 흐르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 남자의 모습은 마력 덩어리가 아니다. 아마 살아있는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직접 덧씌운 것이겠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리라. 그러함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냉혈한인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가 보여 준,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는 행동이나, 어리숙한 태도는 전부 거짓이라고. 어리숙한 성격이었을 이 몸의 실제 주인과 본체의 감정 동화가 미숙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괴리감이 있었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나 역시 완전히 속아 넘어갔던 것이겠지.
뭐든, 진짜와 가짜를 교묘하게 섞는 것만큼 상대를 완벽히 속일 수 있는 것은 없는 법이니. 누구라도 깜빡 속았을 것이다. 이 분신으로부터는 몸의 진짜 주인이 내뿜는 평범한 파장밖에 느껴지지 않으니, 대부분 일반인이라 치부하고 그냥 지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 치밀함과 대단함은 정말로 놀랍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 흥이 완전히 식었어.”
“……예?”
“다른 인간에게 존재 자체를 동화시켜서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줄이야. 흥미롭고 대단한데……. 결국은 쫄보 새끼라는 거잖아?”
굉장한 실력자이면 뭐 하는가.
뒤에 숨어서 앞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병신인데.
물론, 진정한 흑막이라면, 음지에 숨어 누구도 알 수 없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놈은 거기서도 논외였다. 아예 대놓고 내가 흑막이요. 라고 광고를 하면서 본체만 뒤에 숨긴 것이지 않은가.
졸렬하기 그지없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제 갖고 놀 생각은 버린 거냐고 묻습니다.]
‘찌꺼기랑 뭘 놀아.’
이미 깨져 버린 흥.
의욕도 식어 버렸다.
사신의 낫을 손에 쥐고 자세를 잡았다. 이제 공격할 것이라고 대놓고 광고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도 녀석의 반응은 없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긴 했지만, 그뿐.
망부석처럼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한 모습에, 확신했다. 저건 기억과 사고방식만 동화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결국 이용당하기만 한, 죄 없고 불쌍한 사람을 죽인다는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런 게 내게 있었다면, 나는 유지한을 그렇게 외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게이트 같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들 때문에 이미 매일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중 한 사람 더 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일까.
사실, 나는 처음부터 누군가를 죽이는 데 그렇게 갖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었다. 다만 쉽게 누구를 죽이지 않는 건, 그동안 교육받아 왔던 사회적인 도덕성과, 뒤에 이어질 귀찮음. 그리고 굳이 내 손을 더럽히기 싫다는 이유들 때문이었다.
내게 인간의 목숨이란 고작 그 정도였다. 솔직히 세상에는 죽어도 상관없는 인간이 너무도 많아 보였고.
어차피 눈앞의 이 남자는 죽이는 것밖에 해결 방법이 없었다. 보아하니 기억과 사고관이 완벽히 본체에게 동화되어, 이미 자기 자신의 존재도 잊은 듯했다. 아마 본체의 의지가 빠져나가면 빈껍데기만 남겠지.
내가 죽이나, 이놈을 내보내나. 결론은 같다는 것이다.
현실은 언제나 희망이 없듯.
스륵―
“아. 정말 왕답군요. 망설이지 않는 것마저,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네요.”
유지한이 죽자고 목을 맨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 말하며 놈은 무슨 솔로몬이 낸 질문을 풀어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걸 보며 나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
마지막까지 개소리라니.
어차피 본체는 따로 있어서 진짜 마지막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질긴 놈이었다.
“당신이 돌아서면 유지한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요?”
“아. 별로, 생각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어차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대충 맞장구를 쳐 줬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 정도로 길게 하는데, 하나도 안 받아주면 불쌍하지 않은가. 물론, 쟤가 아니라 곧 내가 치울 인간이.
이미 머리가 완전히 놈과 동화돼, 스스로의 존재 사실 자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인간에게, 그래도 조금이나마 좋은 기분으로 죽을 수 있게 해 줄 용의는 있었다. 결국 기분 내는 것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드물게 베푸는 친절이었다.
그런 내 배려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을 쓰레기가 허― 하고 웃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당연한 걸 묻는다.
이제는 듣고 있어 주는 것도 질리는 말에 낫을 높이 치켜들며, 마지막 답을 고했다.
“그럴 일이 없을 테니까.”
돌아서는 일이 언젠가 올지 모르지만, 그게 네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닐 테니.
【스킬: 얼음의 심장(S)이 활성화됩니다.】
촤락―!
툭―
대답과 동시에 낫이 목을 갈라,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목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윽고 머리가 그 옆에 턱― 떨어져 내렸다.
그 잘린 머리를 무심히 바라보는데…….
너무 잘 잘라서인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마력을 쥐어짰는지, 분리된 머리의 입이 움직였다.
“하하. 속단하지 마시지요. 당신도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세계를 뒤튼 그 빌어먹을 놈을.
“……?”
목이 잘리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하고 넘기려 했는데 마지막에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놈의 잔재는 사라지고, 육체를 지배하던 마력도 바뀌어서 내가 본 얼굴과는 전혀 다른 남자의 얼굴이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걸 보니, 다른 생각은 딱히 나지 않았다. 놈이 꺼낸 말도 금세 잊히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 평범한, 시체의 얼굴은.
[“이따위 것―! 이따위 것으로 날 완전히 막을 수 있을 거 같은가.”]
때마침 타이밍 좋게,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음성이 터졌다. 세계의 제어력이 한계가 다다른 것이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가 왔다. 세계가 먼저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가 강제로 개입하면 세계의 저항, 혹은 어떤 페널티가 있을지도 몰랐기에 지금까지 시간을 끈 것이었다.
“후딱 끝내고 집에나 갈까.”
【수백 개의 가면(S)이 발동합니다.】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시전자가 바라는 힘에 걸맞는 가면이 선정됩니다.】
【아득히 높은 하늘의 지배자이자, 천공의 여제. ‘스카이아’가 선정됩니다.】
【‘스카이아’의 가면을 씁니다.】
[‘하늘이 존재하는 땅에, 서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내 위에 있기를 허락하지 않았노니.’]
환한 빛과 함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 모습은, 완전 그냥 나와 같았다. 하얀 피부에 작고 호리호리한 체형. 내 그대로의 몸에 푸른 물빛 머메이드 드레스가 입혀졌다. 그리고 등 뒤에는 찬란하고도 투명한 색의 로브가 나타났으며.
그리고 주어지는, 머리 위의 왕관.
얼굴의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 머리도 검은색 그대로였다. 다만 눈만 푸른색으로 변했을 뿐. 변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매섭게 선언했다.
[‘나의 하늘에게, 천공의 여제로서 명한다.
그 어떤 적도 나의 하늘에 굴복할 수밖에 없으리니.
그대는 나의 하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천공의 여제 고유스킬. ‘천공의 선언(SS)’이 발동됩니다.】
쿠르르릉―!
[“큭―!”]
나의 명에 따라 하늘이 움직였다. 세계의 억제력에 힘을 합쳤다. 갑작스럽게 강해지는 세계의 억제력에 놈이 당황한 듯 소리를 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사신의 낫을 쥐었다.
【사신의 낫이 ‘스카이아’의 특성에 맞춰 변화합니다.】
【하늘을 가르는 낫. ‘천공의 낫’이 주인의 뜻을 기다립니다.】
검은 낫이 투명한 낫으로 변했다. 유리인지, 수정인지 아주 투명하고, 잡고 있어도 내 손이 보일 정도였다.
그 시리도록 찬란한 낫을 손에 쥐고, 도약해 일격을 날렸다.
촤아악―!
[“크아아아악―!”]
틈 사이로 피가 떨어져 내렸다. 명백히 공격이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원티드―!”
내 외침과 함께, 내 사인만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곧바로 행동에 움직였다.
【‘신의 자비’의 사용을 신에게 간청합니다.】
【‘신의 자비’를 사용하려면 4개의 조각이 모두 필요합니다.】
【4개의 조각을 전부 모았습니다.】
【신의 자비의 조각. 용기. 희생. 믿음. 정의의 인정을 받은 자가 시전해야 발동이 가능합니다.】
【조건이 모두 충족되셨습니다.】
【‘신의 자비(SSS)’가 발동합니다!】
“……!”
“이건…….”
알림음과 동시에 4개의 보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부서진 잔해들이 모여 금빛의 찬란한 결계가 만들어졌다.
이윽고 그 결계가 세계의 틈을 단단히 막았다. 그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자신이 힘을 써도 깨지지 않는 것을 보며 놈이 말했다.
[“이건……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놈의 말대로 잔재주였다. 저건 세계의 틈을 메꿔 놈을 못 나오게 할 수는 있지만, 평생을 그렇게 만들지는 못 한다.
아마 최장 한 달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디인가. 인류는 인류의 멸망을 무려 한 달이나 미룬 것이다.
저게 창고에, 그것도 전부 모여 있다니 그야말로 기적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저건 모으는 것만으로도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고, 저걸 사용하려면 시전자는 조건까지 충족시켜야 했다. 그래서 당시 소설에서는 불완전한 자비를 발동했었다. 심지어 이게 뭔지도 모르고 우연히 발동시킨 것에 불과했다.
[“시간 끌기밖에 되지 않거늘.”]
“아. 충분해.”
널 쓰러뜨릴 준비를 하기에는.
실패하면 망하면 되는 거다.
어차피 망할 거 도전이라도 완벽하게 해 보는 게 더 가능성 있지 않겠는가.
[“그래. 그럼 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준비를 해야겠군.”]
놈이 내 태도에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나도 지지 않고 화답했다.
“나도. 기다리지. ‘파우스트.’”
결국 타락해 버린 박사. 그에 인간의 형상도 잃어버린. 타락한 괴물.
[“……!!”]
자신의 정체를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감정의 동요를 막지 못한 듯 하늘이 흔들렸다.
물론 잠시였다.
[“직접 만날 날을 고대하겠다. 이 세계의 지배자여.”]
“나 역시.”
모든 건, 한 달 뒤에.
* * *
촤아악―!
파아아앗―!
“윽―!!”
무명이 선보인 단 한 번의 공격.
제대로 된 공격을 다른 이들 앞에 선보인 건 고작 일 회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위용을 실감하기엔 충분했다.
실감했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녀가 수많은 군단을 쏟아낼 때부터 아득히 강력한 존재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보여 준 것은 그 이상이었다. 세계가 요동치듯 땅이 흔들리며 어마어마한 압력이 그들을 덮쳤다.
“꽉…… 잡아―!”
힘이 약한 이들은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기 부지기수.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서 어떻게든 그 압력을 버텨내는데,
“원티드―!”
그사이 익숙한 마력이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늘이…….”
“……틈이…… 메꿔지고 있어.”
무명이 나서고 상황이 반전되긴 했지만, 그 등장만으로도 모두를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던 틈이었다. 틈뿐일까. 틈 안에서 튀어나오는 놈은 손조차 나오지 않고, 눈 한쪽만 겨우 보여 주고 있었음에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저 손 하나라도 이 세계에 닿게 된다면. 이들 중 누구라도, 아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헌터가 달라붙어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드러나는 압도적인 존재감. 허탈하게,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수…… 숨이…….’
‘……뭐야……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드라키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마력을 푼 것도, 위압감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선 한 번을 맞췄을 뿐이다.
그 별거 아닌 행위를 통해 느껴지는 존재감은 그 자체로 드라키스를 상회하고 있었다. 드라키스의 앞에서는 그래도 서 있을 수 있었던 이들조차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무너졌다.
덕분에 모두 벼락처럼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재앙이 아니었다.
드라키스 때도 분명 그렇게 여겼건만, 마치 드라키스는 그저 입가심일 뿐이었다는 듯, 수준 자체가 달랐다. 그가 숨만 내쉬어도, 인류는 그대로 끝장일 것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절대, 자신들이 약하거나 한 게 아니었다.
그런 존재를 손쉽게 막아낸,
‘후딱 끝내고 집에나 갈까.’
그녀가 괴물일 뿐이었다.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는 상대의 앞에서.
우리 중 가장 작고, 가장 가녀린 몸으로.
하나 누구보다 자유롭고 여유롭게.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의 앞에 서서.
오히려 귀찮은 것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가볍게 내뱉는 말. 미쳤다고도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니, 명백히 제정신이 아닌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왕에 걸맞았다. 그런 행동이었음에도, 오직 그녀이기에 모든 행동이 정당해 보였으니까.
말도 안 되는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만큼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였다. 자신을 뽐내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자유롭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그녀가 왕인 것이다.
그런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그 힘에 걸맞은 지성과 위엄.
모든 걸 갖추고 있었기에.
[“직접 만날 날을 고대하겠다. 이 세계의 지배자여.”]
“나 역시.”
그가 물러났다.
결계의 힘이 다할, 세계의 억제력도 그를 막지 못할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후우.”
아무것도 결판난 것이 없음에도, 그들은 일단 안도했다.
살았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존재로부터.
그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털썩―
풀썩―
“어?”
“다리가…….”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장과 위압감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던 이들이 긴장이 풀린 듯 하나둘씩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젠장.”
자신들의 약함을 그 순간 뼈저리게 깨달은 듯, 모두의 표정이 분함과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그 나지막한 소리에 무명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차갑고 무딘 시선. 동정심은커녕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시선이었다.
그 무감각한 눈이 자신들을 내려 본 순간 모두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그들은 벌레와 같은 급이라는 걸.
그녀에게 인간이란 종족 자체는 자신과 동족이란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나선 이유가 인간 때문이라거나,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라거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님을 모두가 알아차렸다.
꿀꺽―
숨 막히는 정적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도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서. 그녀가 누군지 모를 때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내키는 대로 행동했지만 눈앞에 있는 건 명실상부한 월드 랭킹 1위. 이 세계의 지배자였다.
마력을 드러낸 것도, 위엄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녀의 존재감 하나에도 숨 하나 쉽게 내쉴 수 없었다. 유지한과는 비교도 안 되는 태도였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도 크게 관심이 없는 듯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짧디짧은 무심한 인사. 그럼에도 그녀의 군단은 즉각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제 주인에게 깊은 충심을 보였다.
“주인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돌아가서 대기하도록.”
“존의.”
파앗―
짧은 명령과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빛이 터지며, 처음 군단이 나왔던 문과 같은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다는 듯 모든 군단이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솨아아아―!
탁―!
스르륵…….
군단이 모두 들어가자 문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군단을 보내고, 손에 쥐고 있던 낫을 없앤 후,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또각. 또각.
투명한 유리구두가 내는 소리가 정적 사이로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단연. 원티드였다. 원티드에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고 지켜보는데. 난데없이 첫 마디가 터졌다.
“와. 누나. 양아치야…….”
그녀의 피 같은 혈육 메이트였다.
* * *
‘아. 좆망…….’
겉으로는 ‘스카이아’의 성격과 스킬 ‘얼음의 심장’ 덕에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온갖 쌍욕을 다 하고 있었다.
일단 급한 불을 껐다. 급한 불을 끄고 돌아보니 남은 건, 빌어먹을 일코 해제의 뒤처리였다.
사실 언론이고, 인류고 나발이고 다 상관없었다. 고작 그딴 것들이 어떤 난리를 치든, 타격을 입지 않을 자신은 넘쳤다.
문제는…….
‘유지한한테는 티라도 조금 낼 걸 그랬나…….’
바로 유지한이었다.
늘 나를 지켜준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아무 말 안 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일코를 해도, 그래도 나도 나름대로 강하다고 어필이라도 해 놓을걸. 각성자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각성하기 전에도 나름 검도도 하고, 제 몸 하나는 거뜬히 지키고 남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할아버지 피셜이었지만.
‘이, 괴물 손녀야. 그 실력을 왜 애꿎은 동생 패는 데만 쓰고 있어―!’
‘아. 굳이 귀찮게 뭐하러! 윤지우 잡을 때 외에는 애초에 쓸 데도 별로 없거든?!’
아아. 할아버지.
역시 연륜은 다르구나.
진작 말 들을걸…….
이제 고인이 된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속으로 피눈물을 줄줄 흘렸다.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배운 검도다 보니, 그냥 호신용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호신용으로 쓸 일도 없다 보니, 보통은 윤지우를 훈육할 때만 썼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할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대회라도 나가서 우승이라도 좀 따고, 이름값이라도 좀 날렸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하찮은 일반인이에요~’로 인식되지 않았을 텐데……!
외양이 이렇다 보니 실력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 다들 저를 약하디약한 소녀로 본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살아온 나날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커밍아웃을 하니 핑계 댈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아서, 답지 않게 그것이 후회가 되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네 동생이 맨날 너 쥐어 팬다고 그렇게 홍보하고 다녔는데 그래도 좀 알지 않겠냐고 어쭙잖게 위로를 던집니다.]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 보다 못한 성위님이 안 하느니만 못한 위로를 던졌다.
사실 얼핏 들으면 아주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얼뜨기 윤지우와 다르게 나는 우리 남매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남들이 보기에, 우리는 평범한 남매 같으면서 달랐고, 다른 남매들에 비해 우애가 깊은 편이었다. 믿을 수 없는 부모를 대신해 서로를 의지하며 자랐기에. 나와 윤지우에게 부모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친구와 같았다.
엄마는 영원한 마이웨이 소녀이길 원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여전히 한결같이 사랑했기에 우리보다 엄마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필요한 것이 주어지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다소 특이한 집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어린애였지만, 나보다 백 배는 감수성이 풍부한 남동생은 늘 불안한 얼굴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 다리에 매달렸다.
맹목적인 강아지처럼.
‘야. 떨어져.’
‘나도.’
‘……?’
‘……나도 같이 가.’
이제야 밝히지만, 어릴 때 윤지우는 정말 환상적인 귀여움을 자랑했다. 지금도 어딜 내놔도 반반한 얼굴이지만, 그때는 더했다. 치명적인 마약 급으로.
물론 내게는 혈육이었기에 그 귀여움이 반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도 윤지우는 예뻤다.
그 얼굴로 절박하게 내 다리에 매달리니. 어처구니없게도, 결국에는 항상 져 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괜한 얼빠가 아니었다. 윤지우가 내가 얼빠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다. 내 고질적인 문제의 1등 수혜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
어쨌든, 그러다 보니 내가 윤지우를 보살펴 준 만큼, 윤지우도 내게는 감히 대들지 못했다는 게 사실이긴 했다. 그러니 남들 눈에는 내가 윤지우를 보살펴 주는 만큼 윤지우도 내게 맹목적이기에 윤지우가 애초에 덤빌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처맞는 걸로 보였겠지. 그렇게 생각하기에 딱 좋은 남매지간이었을 것이다.
실상은, 이미 몇 번 열심히 처맞고 개길 생각을 안 하게 된 것이지만. 아니, 상식적으로 혈기왕성한 남자애가 누나와의 우애가 아무리 깊다고 한들 반항 한 번 안 하겠냐고!
이미 윤지우가 열심히 열변을 토했지만, 믿지 않았다. 아무도.
역시 생긴 게 문제인가.
이제는 믿겠지만.
스륵―
“……흡―!”
속은 망연자실하게, 겉은 무심하게 몸을 돌려 등 뒤에 있던 인간들을 내려다보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내가 뭐 지들을 죽이기라도 하나.
물론 내가 그간 생각했던 것보다 아득히 높은 존재였으니, 저 반응은 바람직하긴 하다. 유지한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반응이었으면 오히려 저런 반응을 하게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줬을 거다.
나는 유지한처럼 호구짓을 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필요하다면 공포정치까지 할 생각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를 귀찮게 한다면.
‘……흠.’
그래도 막상 저 반응을 보니 살짝 찝찝하긴 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그런가. 당연히 어느 정도는 위압감을 느끼길 바랐지만, 알아서 머리를 조아려대니 참 기분이 묘했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덤비면 그 빌미로 몇은 치울 생각이었는데…….’
누가 알았으면 기겁을 했을 계획이 폐기되어서 그랬던 걸지도.
잔인하다 못해 비난을 받을 만한 계획이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인간은 눈으로, 몸으로 직접 체험하지 않는 한. 말로 해서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빌어먹을 종족이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주제 파악 못 하는 동물이 인간이라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적극 동감하는 류였다.
이미 그런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와서.
또각― 또각―
“…….”
내가 걷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나는 더욱 당당히 걸었다. 저들의 기분을 맞춰 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내 사람에게는 약해질 수도 있겠지만, 저들에게는 조금의 틈이라도 보일 생각 없었다. 아주 작은 허점이라도 보이는 순간, 그대로 내가 물어뜯길 테니까.
또각또각.
걸으면서도 긴장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도 사람인데 긴장이 되지 않을 리가.
다만, 물론 내게 꽂힌 수많은 시선들 때문은 아니었다. 고작 내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할 이들의 시선이 무슨 상관일까.
그런 의미로 철판을 단단히 깐 내 강심장은 완벽했다.
그래. 그런 건 완벽했다.
탁―
“…….”
그런데 왜 당신에 한해서는 완벽은커녕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것인지.
늘 나를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넋이 나간 시선으로. 그러나 올곧게 나를 향하고 있는 시선에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아,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그에게 건넬 말 같은 건 처음부터 생각해 두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할 만한 말이 없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이럴 때는 스킬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얼음의 심장’이 없었더라면.
수백 개의 가면으로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인생에 길이 남을 흑역사 하나를 제대로 썼을 테니까. 겉으로라도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 그거라도 어디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말 다행히도 누군가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대화의 창구를 열어 주었다.
“와. 누나. 양아치야…….”
아아. 역시 피가 이어진 호적 메이트가 최고였다.
* * *
“이건 지 구해 준 누나한테.”
사랑한다. 동생아.
겉으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심으로 우러나는 감동을 속으로 삼켰다. 의도 같은 건 1도 하지 않았겠지만, 덕분에 무명으로서가 아닌 윤지호로서 말머리를 틀 수 있게 되었다.
“아. 구해주긴 뭘 구해줘!”
“뭐야. 다시 죽여 줘?”
뭐. 그리 어려운 거라고.
스륵―
이미 집어넣었던 낫까지 다시 꺼내 들며, 원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고 리얼하게 묻자, 놈이 기겁을 하면서 황급히 내 손에서 낫을 뺏었다.
“이게 아니라! 아직 안 끝났잖아!”
“유예 기간 만든 것만으로 다행이란 생각은 안 드냐?”
“구라 즐. 그냥 네가 끝냈을 수도 있잖아!”
……이게 진짜. 내가 무슨 고질라냐.
이건 가끔 진짜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할 때가 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네 동생. 언제 이렇게 눈치가 좋아졌냐며.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시치미를 뗐다.
그래야 했다.
“저게 그렇게 쉽게 끝낼 괴물로 보이냐. 이건 왜 아직도 머릿속이 꽃밭이야.”
물론 혹여라도 정말로 잘못될까, 아무도 모르게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지켜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원티드에 있으니 적당히 인생의 쓴맛과 더러운 맛을 좀 알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저 머리는 왜 아직도 눈치 없이 태평하기만 하던 학창 시절에서 벗어난 것 같지가 않을까.
정하나 말대로 내 과보호가 심해서 정말 그런 건가.
그렇지만 나름대로 쓴맛도 좀 보여 주고, 그럭저럭 잘 키웠다고 생각하는데.
유지한에게 과보호가 심한 건 킹정이었지만, 그건 유지한 한정이라고 생각했다. 최애 패시브가 적용되는 데다, 워낙 유지한이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도 모르게 자꾸 봐 주게 되었으니까.
내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그렇다 치고.
제 누나가 동생의 성장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짜 안 된다고?”
너도?
월랭 1위가 안 되면 대체 누가 되겠냐고.
윤지우가 진짜 안 되는 거냐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그에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물론 되는 건 맞았지만 100% 되는 건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무척이나 힘든 상대긴 했지만, 파우스트 자체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했다.
문제는 그놈이었다.
분신으로 나를,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고. 저 파우스트를 불러낸 놈. 그놈이 파우스트로 무엇을 저지를지,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확답을 하기 어려웠다.
에둘러, 결계라는 수를 쓴 것도 그 탓이었다. 헌터들도 조금 전의 레이드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입맛이 쓰기는 했지만, 일단은 모든 것을 보류할 때였다.
그렇게 납득을 하며 내린 결정이기는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파우스트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혼돈의 카오스가 되어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파우스트.’
원래라면 소설의 최 후반부.
전개상 절정 부분에서 나올 보스몹이었다. 최종 보스 바로 직전, 내가 읽은 내용 중 가장 마지막에서야 간신히 등장하는 녀석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그조차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 심지어는 유지한이 막 파우스트 레이드에 나서서 파우스트 앞에 섰을 때까지밖에 보지 못했다.
그 뒤는 전혀 모른다.
그야, 이 소설은……. 완결이 아니었으니까.
절정까지만 해도 거의 200화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하루를 꼬박 새워서 읽어도 다 읽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죽자고 아침 8시부터 날밤을 새워 가며 200화에 달하는 분량을 다 읽은 내가 대단한 것이었다. 소설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제정신 아닌 놈들도 그 정도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어쨌든, 그 덕에 나도 파우스트의 공략법을 알지 못했다.
‘……빌어먹을.’
남모르게 손끝이 떨려왔다.
물론 자잘한 던전까지 공략법을 기억하고 있지 않아, 알아서 해결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것들이 중요치 않으며 그렇게까지 강력하지 않은 던전이기 때문이었다. 소설에 나오지 않은 게이트에 휘말리는 건, 내가 소설과 다른 전개를 만들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기꺼이 감수했다.
하지만 이건 절대 바뀔 리 없는 메인 에피소드였다. 소설의 전개를 바꿨다고 해도 겪을 수밖에 없는, 전 세계적인 범위로 펼쳐지는 메인 이벤트.
드라키스와 마찬가지로. 다행히 드라키스는 공략법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나마 쉽게 끝났다. 그 벌로, 파우스트가 이렇게 일찍 등장한 것일까.
현재 헌터들의 전투력은 소설에서 묘사될 당시와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았고, 드라키스도 억지로 난이도를 낮춰 간신히 클리어 하였으니. 이 정도 수준으로 파우스트는 도저히 무리였다.
소설에서 파우스트는 잔재주라는 게 통하지 않는 보스였다.
그는 본래 인간이었다, 악마가 그를 타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걷고 만 존재. 악마가 유혹을 그렇게 했음에도 굳건하기만 했던 존재는, 굳건했던 만큼 타락할 때조차 얄팍하게 타락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한 위대한 학자. 신에게 영혼을 구원받아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않았지만, 스스로 그 구원을 거부하고 타락해 버린 자.
그만큼 지금까지 상대한 보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설픈 잔재주가 통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고, 아마 내가 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쉬운 싸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물론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럴지인데. 내가 없어도 그들이 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까?
단언할 수 있었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인간에게 그렇게까지 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도 인간인데.’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바로 ‘얼음의 심장’의 부작용일까?
이제야, 이 스킬의 무서움이 좀 폐부로 와닿았다.
아무리 내가 원래 썅년이라고 해도, 세계가 망할지도 모르는 중대한 위기에서까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할 위인은 되지 못했다. 친구에게, 내 사람에게 항상 져주고 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 그나마 내 사람을 향한 감정은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힘이 강해졌기 때문인가. ‘얼음의 심장’의 부작용에 가속도가 붙은 것 같았다.
‘……젠장.’
이젠 나 역시도, 함부로 힘을 남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생겨나고 말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뭐, 그게 그렇게 큰 문제냐고. 네 사람들에 대한 마음만 안 변하면 됐지. 뭐. 라고 심드렁하게 말합니다.]
뭐. 그건 그래. 난 원래 이런 썅년이니 사실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깐 이것저것 핑계를 대고 싶었던 것뿐이다.
“윤지호. 누나야……?”
넋 나간 듯한 얼굴로도, 여전히 내게서 시선은 떼지 못나는 저 머저리 같은 남자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회피해 보려고.
“자신은 못해.”
물론 못하지.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그래도 혈육의 정이라고, 백색의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했고?
무엇보다 싸움에 있어서는 원래 확신 따위를 하면 안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피 같은 혈육 메이트라서 그런지, 평소에는 약에 쓰려고 해도 눈치가 없으면서 이럴 때는 눈치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거짓말이지?”
“……야. 뭘 그렇게 확신해. 그리고, 솔직히. 안 붙어 보고 그걸 어떻게 아냐?”
맞는 말로 반박을 해대니, 할 말은 딱히 없지만 심증은 매우 많은 얼굴로, 빌어먹을 혈육 메이트가 가자미 눈을 하고 날 심문했다.
“귀찮은 건 아니고?”
“…….”
아. 저런 귀여운 놈 같으니라고.
진짜 저 귀여운 조동아리를 콱― 꿰매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글루건으로 용접하거나.
진짜 쓸데없이 솔직해서는, 내 본심을 마구 찔러댔다. 내가 답하지 않고, 미간을 구기며 시선을 피하자 제 생각에 확신을 더한 듯 윤지우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와. 진짜 원래도 그런 면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잖아. 진짜 미……!”
“지우 군. 잠깐.”
그리고 아주 보란 듯 비난을 하려 입을 터는데, 어느새 일을 마치고 일행에 합류한 유라가 윤지우의 입을 막았다.
“…….”
지긋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그냥 랭커는 아니었다. 서유라뿐만 아니라, 저기 주저앉아 있는 머저리 같은 남자를 제외하고 전부 눈치를 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본인들도 능력을 사용하는 헌터고, 힘이 강한 랭커이니 모를 수가 없는 문제이긴 했다.
힘이 강할수록, 제약과 부작용이 강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나와 시선을 마주한 서유라가 물어왔다.
“……이게, 지호 씨의 딜레마인가요?”
그 물음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수록. 나는 인간으로서의 감성적인 감정이 점점 말소되죠.”
“……!”
어찌 보면, 내가 월드 랭킹 1위가 되고, 세계의 지배자라는 타이틀을 얻으면서 발생하는 당연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은 누구보다 냉철하고, 감정이 없어야 하니까. 인간이 보기에 더없이 잔인하고 인간 같아 보이지 않더라도.
꽈악―
“……?”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내 옷자락을 꽉 잡는 힘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자, 그런 사실은 전혀 몰랐던 윤지우가 어린애같이 불안한 얼굴로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하긴. 헌터로서는 이제 시작인 윤지우가 알 리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페널티를 느낄 정도로 전투를 겪어 본 적도 없고. 이렇게 보니 내가 좀 과보호를 하긴 했나 싶었다.
타악―!
“악―!”
“어이구. 이건 진짜 언제 클까.”
【수백 개의 가면을 해제합니다.】
【‘스카이아’의 가면을 벗습니다.】
솨아아아―
“걱정하지 마. 설령 진짜 감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
“너에 대한 건 잊어버리지 않을 자신 있으니까.”
설마 태어나서부터 줄곧 함께한, 너에 대한 것까지 내가 잊어버릴까.
너를 잊지 않을 자신은 넘쳤다. 너에게 내가 1순위인 것처럼. 나 역시 그러할 테니까.
너보다 더 우선할 그 어떤 것도 지금까지 찾지 못했고. 그 단순한 사실만큼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너 원래 구라 더럽게 잘 치자나.”
한두 번 구라를 치냐.
스킬까지 해제해, 원래의 모습으로 한 단호한 말에 그래도 좀 안심이 된 듯. 놈이 맞은 이마를 연신 문지르며 투덜댔다.
투덜거리는 입은 그 얼굴과 완전히 반대로였지만, 이마를 문지르며 볼을 조금 발그레 붉히는 모습이, 7살 때랑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갈 뻔했지만, 필사의 의지로 꾹 참았다. 지금 여기서 빵 터졌다가는 저 진상이 얼마나 떽떽거릴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동생 놈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드디어. 가장 마주하기 힘든 사람을 마주할 시간이 왔다.
또각― 또각―
누구보다 마주하기 힘든 사람이었기에, 가는 걸음이 빠르지는 않았다. 천천히, 하지만 힘주어. 어떻게든 당당하게 걸었다.
걷는 걸음에 조금의 망설임이라도 보인다면, 분명.
내게 한없이 약하기만 한 당신이 상처 입을 테니까.
탁―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해 있기 때문인지, 걷는 소리도. 멈추는 소리까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세상 모든 것이 내게 집중된 느낌이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그런 것을 싫어하는, 그저 평범함을 바라는 내가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서 더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이 세계는 내가 주인공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런 복잡하고도 떨떠름한 기분으로, 무릎을 굽혀 유지한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일부러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많이 놀랐어요?”
“…….”
애써 용기를 내 물은 것인데도, 여전히 유지한은 넋 나간 사람 같은 얼굴로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 걸까.
그에, 괜히 더 조바심이 나. 더 입을 놀렸다.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
“당신은 내가 지켜준다고.”
그러게. 말할 때 믿을 것이지.
허풍 같은 건 내 인생에 없다는 걸 나름대로 그동안 행동으로 증명해 준 것 같은데, 한결같이 안 믿는 이놈도 참 어지간했다. 뭐, 그냥 우스갯소리로 여겼는지도 모르고. 이런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물론 이 모든 걸 포괄하는 의미로 말했던 나는 얼굴에 당당히 철판을 깔았다.
나는 이미 옛날부터 계속 말해 줬다고.
‘무명’으로서도. ‘윤지호’로서도.
“나를 넘어서겠다고 했잖아요.”
내 왕좌를 가져가겠다고 선언한 분인데, 잘 챙겨 줘야지. 얼른 넘겨주고 싶어 죽겠거든.
뒷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이야기라 생략했다. 그렇게 말하며 유지한 앞에서 짓궂게 미소를 짓고 있자, 그제야 유지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 하…… 하하.”
허탈한 웃음소리였다.
마치 우는 것만 같은.
“처음부터…… 다……. 당신을 이길 수는 없었는데……. 왜 몰랐을까요…….”
“…….”
모든 것을 놓아 버린 것 같은, 절망 어린 목소리에 억지로 피워냈던 미소가 단번에 자취를 감췄다.
“……지켜 준다고……. 당신을 넘겼다고 아등바등하는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유지한.”
“알아. 네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다는 거.”
“…….”
어쭈. 이제는 아주 대놓고 말을 놨다.
물론 조금 전에 내가 먼저 놓긴 했지만.
“하지만, 어떤 면에서든…… 네게 도움을 줄 수도…… 이길 수도 없으면…….”
“…….”
이제 유지한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는 듯.
그런 유지한에게, 어떤 말도. 행동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유지한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지한이 결국 참고 참았던 마음을 터뜨렸다.
“나는…… 무엇으로 내 쓸모를 증명해야 돼?”
“……왜 네가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하러 내게 그걸 증명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유지한이 웃었다.
“……하하…… 거짓말.”
“……유지한.”
모든 걸 잃어버린, 절박한 사람처럼.
그가 웃으며, 울었다.
“쓸모라도 증명하지 않으면…… 나는 네게 그 무엇도 줄 수가 없는데……. 오히려 네가 기피할 것들만 잔뜩인 인간인데…….”
“…….”
“이런 나를 곁에 있게 해 주지 않을 거잖아.”
“…….”
“……너는 망설임 없이 나를 버릴 거잖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인가.
상상도 못 했던 마음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유지한에 관한 내 감정을 제외한다면. 전부 유지한의 말대로였으니까. 유지한이 이렇게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더불어 나에 관한 것도.
그 말대로였다.
만약 감정이 없었다면, 나는 유지한 자체를 마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죽어라 피했을 것이고, 시선 한 번 맞추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유지한이 가진 조건과 존재감은, 내가 기피하기 딱 좋았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내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눈물을 보였다.
“이런데…… 내가…… 어떻게……. 증명이라도 해야…….”
그 나름대로 살아나갈 방도를 강구했던 것이다.
내 곁에 있고 싶어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언젠가 유지한이 홀로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떠나갈 예정이었던 나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
이게 그 나름대로의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런 남자의 마음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자신의 쓸모라도 증명하고 싶었던 절박한 남자에게.
말없이 그저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휙―!
“……!”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뒤집혔다. 나를 이끄는 강한 힘에 당황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그저 끌려갔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상태였기에 자연스럽게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옷이 더러워지고, 무릎이 쓸렸다. 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촉―
“……!!”
곧바로 입술에 닿는 따뜻한 촉감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흡―!!”
“……대박…….”
갑작스러운 일에 나와 마찬가지로 기겁을 하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입이 떨어지고. 이런 대박 사고를 친 남자의 입이 열렸다.
“……사랑해.”
그동안 내가 그토록 피해 오고, 또 막아 왔던, 그의 마음이었다. 참고 참았던 마음을 토하는 한 남자의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 고백을 들으며, 나는 혼이 빠질 것 같았다. 아니, 머리에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달까.
이런 상황인데, 순간 바람 빠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세상에. 고백하면서 우는 놈은 또 처음 봤다. 이렇게 울며 절망적으로 절절하게 하는 고백 역시.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게 너무나 유지한다워서.
스윽―
“……?”
“울지 마. 유지한.”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이 나여서,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또 인정하지 못했던 감정에 결국 패배하고 싶어지고 말았다.
“……네가 울면…….”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고백에 대한 답을 들은 것도 아닌데, 마치 답을 들은 것처럼. 그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그의 눈이 커졌다.
덥썩―!
그런 남자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꽉 끌어안아, 내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품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소리 없는 눈물이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그 눈물마저 끌어안아 줄 뿐.
토닥토닥―
“아이구. 내 팔자야…….”
결국 완벽하게 잡혀 버리고 말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잡히면 안 되는 남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