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벨파스트의 노예 1권
1장
“저거 아직도 저러고 있어? 대단하다, 진짜.”
“보통 독종이 아니네. 저런 녀석일수록 한번 굴복하면 아주 충성스러워지는데 말이야.”
졸부처럼 온갖 금붙이를 몸에 주렁주렁 두른 사내 둘이서 낄낄거리다가 자리를 떴다.
일리에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떠 그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런 놈들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해.’
일리에는 케이지 앞을 지나는 인간들을 살폈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아까부터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는 없을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일리에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때 마침, 잘 훈련된 기사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후드 망토를 쓴 남자를 호위하며 걸어오는 게 눈에 띄었다.
그들의 행색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일리에는 두 사람의 몸에 밴 태도로 그들이 귀족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노예시장이나 기웃거리는 주제에 고귀한 척하기는.’
분명 자존심도 셀 테니, 거지만도 못해 보일 자신이 건드리거나 모욕한다면 참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좋아. 날 끝내 버릴 수 있는 영광을 네놈에게 주마.’
일리에는 오락가락하는 정신 상태로 그렇게 혼자 뇌까리며 실실 웃었다.
다행히 그들은 그녀의 케이지 쪽으로 상당히 가깝게 다가왔다.
일리에는 가만히 기회를 노리다가 그들이 케이지 앞을 지나려는 순간 밖으로 손을 뻗어 뒤따라가던 남자의 망토 자락을 콱 움켜쥐었다.
텅-!
망토를 잡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걸 알아채지 못한 그가 그냥 걸음을 옮겼기에 일리에의 앙상한 팔이 쇠창살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야!”
일리에는 그가 못 듣고 지나가 버릴까 봐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창살에 부딪힌 팔에 멍이 들 게 분명했지만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라서 멍 하나 더 늘었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다.
“노예 매매는 죄악이다, 이 썩은 귀족 새끼들아!”
목이 쉬어서 생각했던 것만큼 큰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검을 꺼내어 자신을 벨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딘지 놀란 것처럼 자신의 가슴 부근을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미친 노예인가 봅니다. 그냥 가시죠.”
호위하던 기사가 그를 데리고 가버릴 것처럼 말했다.
일리에는 다급해져서 망토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왜, 도망가려고? 내가 무서우냐?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알려줘서? 썩은 놈들! 겁쟁이!”
일리에는 그를 도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분노한 그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자신을 찔러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바라는 게 뭐지?”
불쾌도, 당황도, 그렇다고 동정도 깃들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막을 닮은 그의 눈동자는 다 죽어가는 노예의 독기 어린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바라는 거? 왜? 내가 네놈의 적선이라도 바랄까 봐? 차라리 죽여라! 아, 겁쟁이라 노예 하나 죽일 용기도 없나?”
순간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하면 그의 손에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분노한 그는 그녀를 거기 매어놓은 노예상에게도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잘하면 일리에를 벤 검이 노예상의 뱃가죽을 뚫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오늘 노예상에게 엿을 먹이고 죽겠다는 일리에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하아…… 주, 죽여…….”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던 모양이다.
굳은 몸을 갑자기 움직인 것도 모자라 힘을 주고 소리를 지르니 금세 눈앞이 노래졌다.
결국, 남자가 망토를 잡아 빼기 전에 일리에의 손에서 먼저 힘이 빠졌다.
그녀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간절히 그를 올려다보며 빌었다.
“죽이라고……!”
* * *
지도에는 없지만 모두가 다 아는 땅, 루벨파스트.
그곳은 노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최고라고 칭하는 곳이었다. 파르디나스 제국의 곳곳에서 노예를 팔았지만, 그 어느 곳도 감히 루벨파스트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루벨파스트의 노예는 그 어느 곳의 노예보다 완벽하게 굴복했고, 만에 하나 팔려간 노예가 말썽을 일으킨다면 그 노예를 팔았던 노예상이 친절하게도 다시 고분고분하게 ‘고쳐’주었다.
하지만 거기서 노예로 팔리는 이들에게는 산 채로 지옥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일리에도 자신이 살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말이다.
‘왜 하필 노예야! 그것도 왜 하필 루벨파스트야!’
루벨파스트에 들어온 지 반년쯤 된 일리에는 매일 신을 원망했다.
일리에는, 믿기지 않겠지만,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겠지만, 이 거대한 제국 파르디나스의 황제였다.
황제로 죽은 뒤 17년 전쯤의 과거로 돌아와 웬 노예 소녀의 몸에 빙의해 깨어났다는 게 좀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일리에가 또다시 이 개떡 같은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데 금붙이를 여기저기 두르고 배가 불룩 나온 사내 하나가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야, 이제 그만하고 인(印) 새기자, 응? 그것만 새기면 이 개고생 안 해도 된다니까? 노예로 사는 게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야야,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자유민들도 죽도록 일해서 벌어먹는 건 마찬가진데, 차라리 집 걱정, 밥 걱정 안 해도 되는 노예 쪽이 훨씬 마음 편하지. 어휴, 꾸미면 예쁠 애가 왜 사서 고생이야?”
일리에는 다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를 향해 간신히 몇 마디를 짓씹어 뱉었다.
“사람이 좀 분위기 잡고 과거 회상할 때는 안 건드리면 안 되냐?”
그 말에 노예상이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과거는 기억도 안 난다면서 뭘 회상한다고 지랄…… 아, 그래! 과거 싹 정리하고 마음을 바꿔 먹겠다는 거지? 좋은 자세야. 인 딱 새기고 예쁘게 꾸민 다음에 좋은 주인님 만나서 호강하며 살자.”
노예상은 허구한 날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늘어놓아 가며 그녀에게 노예의 인을 새기지 못해 안달이었다.
“내가 미쳤냐? 인을 새기게?”
일리에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노예상의 제안을 거절했다.
인을 새긴 노예는 값이 더 비쌌지만, 인을 새기는 것만큼은 노예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노예의 인이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 짐승’이라는 뜻이었다. 짐승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짐승보다 더 천한 존재라는 표식이다.
그러니 죽어도 인을 새길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이런 꼴이라지만, 황제였던 자가 노예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
황제인 영혼을 갖고 노예로 산다는 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꺼져, 이 돼지야.”
그녀로서는 뒤룩뒤룩 살찐 노예상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이 순간만이 루벨파스트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자신이 언제 굴복하는지 내기가 벌어진 모양인데 노예상 놈이 이기게 해줄 마음은 없었다.
노예상은 거기서 진짜로 질 위기인지, 그동안 잘 참던 태도를 집어던지고 버럭 화를 냈다.
“이 독한 년! 오늘이야말로 네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걸 똑똑히 알게 해주마.”
그리고 그는 일리에의 목에 개 목걸이를 채우고 새장처럼 생긴 케이지에 집어넣은 뒤 루벨파스트 광장 한복판에 구경거리로 전시해 두었다.
오늘따라 주변이 깨끗하고 사람들이 분주했다.
‘아…… 오늘이 노예시장이 열리는 날이었구나……!’
보름에 한 번씩 열리는 노예시장은 노예상들도 기다리는 날이겠지만 그녀 역시도 애타게 기다렸던 날이다. 노예상을 엿 먹이는 것과 동시에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일리에가 짐승 같은 꼴로 창살 안에 갇혀 가쁜 숨을 내쉬었지만 루벨파스트의 인간들은 그런 그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개장 준비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걸리기 조금 전, 천박하게 분장한 싸구려 악단이 쿵짝쿵짝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노예상들은 조금 더 뜸을 들이다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파르디나스 최고의 노예시장, 루벨파스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철컹, 하고 문이 열리는 동시에 광대 하나가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손님들을 환영했다.
개장 전부터 출입구 밖에서 기다리던 많은 수의 사람들은 그들을 환영하는 요란한 음악 소리 사이를 비집고 노예시장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널찍한 광장 한가운데 호사스러운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노상 음식점과 음료 가판대가 화려한 차양을 펴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이 노예시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왔다면 마치 대도시에 있는 광장 같은 분위기에 데이트 장소로 딱 좋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의 다른 점은 광장 주변으로 쇠창살 케이지가 늘어서 있고, 그 안에 자신을 사달라고 아양 떠는 노예들이 갇혀 있다는 것이다.
노예를 사기 위해 이 시장이 열리는 날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노예를 선점하기 위해 경쟁이라도 하듯 달려가 케이지 안을 살폈다.
인기 있는 노예들은 경매 방식으로 팔렸지만, 그렇지 못한 노예들은 가격표를 매단 채 자신을 사달라고 구걸해야 했다.
“나으리! 절 사주세요! 잘할게요. 정말 성실히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여기! 여길 봐주세요!”
노예로 철저히 교육된 이들은 철창 바깥에서 자신을 품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애타게 자신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빌었다.
팔리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노예의 가격은 낮아졌고, 더 열악한 환경의 일터에 팔려갈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노예들의 유용성을 따져보다가 노예상과 흥정을 이어갔다.
한두 시간쯤이 더 지났을까, 어느덧 노예 구매를 마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그제야 여유를 즐기며 차양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아 목을 축이거나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 광장을 지나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이 일리에를 발견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건 뭐지?”
“저기 뭐라고 쓰여 있군.”
그녀를 가둔 새장에는 노예상이 써 붙여둔 안내문이 있었다.
-아직 자신이 짐승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노예입니다. 고객 여러분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노예상도 이 바닥을 오래 구른 인간이라 그런지, 변태들을 자극할 만한 문장을 잘도 뽑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한눈에 보기에도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놈들이 입술을 핥으며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성별의 구분도 할 수 없을 만큼 말라비틀어진 어린 노예조차 유희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일리에에게 음란한 욕설을 지껄이며 웅크려 있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지팡이 끝으로 쿡쿡 찔렀다.
케이지를 발로 차고 ‘짖어봐! 짖어봐!’ 하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리에가 몸을 단단히 웅크린 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이내 흥미가 식었는지 마지막으로 침을 탁 뱉고는 멀어져 갔다.
일리에가 역겹기 그지없는 인사들 틈 저 너머의, 자세가 꼿꼿하고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사내 둘을 발견한 건 그때쯤이었다.
‘좋아. 날 끝내 버릴 수 있는 영광을 네놈에게 주마.’
다 죽어가면서도 도도하게 혼자 이죽거리던 일리에는 제 케이지 근처를 지나는 남자의 망토 자락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노예 매매는 죄악이다, 이 귀족 새끼들아!”
자신의 망토 끝자락을 쥐고 저를 죽이라는 어린 노예를 내려다보던 젊은 남자는 무시하고 가자는 동행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골치 아픈 노예의 케이지 근처에 척 보기에도 지체 높은 듯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본 노예상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이신지…….”
그러자 후드 쓴 젊은 남자를 호위하던 검은 머리칼의 까무잡잡한 사내가 불쾌한 듯 상인을 쳐다보며 나무랐다.
“그쪽의 노예인가? 루벨파스트의 노예는 고분고분하다던데, 이건 도대체 뭔가? 감히 귀족을 붙잡고 욕을 해?”
“예에? 이, 이놈이 그랬단 말입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직 노예의 인을 새기지 않은 놈이라 성질을 좀 죽여놓으려고 꺼내뒀습죠. 설마하니 그런 짓을 할 줄은……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저희 쪽에서 노예를 사시면 값은 섭섭하지 않게 깎아드리겠습니다.”
노예상은 두 사람 앞에서 굽실대면서도 노예를 팔아먹기 위한 멘트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기절해서 케이지 바닥에 널브러진 노예를 계속 내려다보고 있던 젊은 남자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이 노예를 사도록 하지.”
“……예?”
“예? 진심이십니까?”
호위 기사는 물론이고 노예상까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지만 젊은 남자는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값을 치르게.”
“하, 하지만……!”
노예상은 노예를 사라는 남자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녀석은 아직 노예의 인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성깔이 어찌나 지랄맞은지, 저도 노예상 15년 만에 이런 독종은 처음 봤습니다요. 솔직히 노예상으로서 별로 추천해 드리지는 않습니다.”
호위 기사는 노예상의 천박한 화려함이 신경에 거슬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를 양심 있는 노예상이라고 치켜세우며 다시 한번 젊은 남자를 설득했다.
“각, 아니, 주인님. 노예상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노예로 쓸 수 없는 수준일 겁니다.”
“저 정도 독하면 뭘 시키든 쓸 만하겠지.”
“그러다가 도망가면 어떡합니까.”
“도망? 나한테서?”
미소 한 자락 보이지 않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에는 어이없다는 듯한 투가 역력했다.
한숨을 쉬던 기사는 결국 노예상에게 값을 묻고는 돈주머니를 던졌다.
노예상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어차피 이 계집은 이렇게 버티다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 죽기 전에 싼값으로나마 넘기는 편이 나을 터였다.
노예상이 온갖 오물에 더러워진 노예를 씻겨서 데려오고 나서야 젊은 남자는 노예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예가 소년이 아니라 소녀였다는 것과 산송장 같은 그 몸이 상처와 멍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도.
물론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의 표정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가 주고 간 목걸이가 이 노예 앞에서 격렬할 정도로 반응했던 것과 노예가 저더러 겁쟁이라고 꾸짖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게다가 타오르는 듯했던 그 눈!
인간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면서도 그 꼿꼿한 자존심이라니…….
“찬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길래 곧 죽을 것 같아 영양제 한 병을 먹이긴 했습니다만, 만약 돌아가시는 길에 죽어버려도 환불이나 교환은 어렵습니다. 정말로 구매하시겠습니까?”
혹시나 높으신 귀족이 도로 와서 난리를 칠까 봐 노예상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하지만 젊은 남자는 노예를 자신의 마차에 실으란 소리만 하고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황제의 영혼을 지닌 노예 소녀 일리에가 루벨파스트를 떠났다.
* * *
일리에는 몇 날 며칠을 열에 들뜨며 앓았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제기랄!’
자존심 때문에 고통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눈에서는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고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울면서 끙끙거릴 때마다 입 안에 뭔가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물고문을 하는 줄 알고 버둥댔지만, 몇 번의 경험 끝에 일리에는 그것이 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온몸을 두드려 대는 것 같던 통증이 이토록 빨리 완화될 리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일리에는 화들짝 놀라듯 눈을 떴다.
“허억!”
번쩍 뜬 눈동자에 하얀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시렸다.
방금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꿈의 잔상이 빠르게 흩어지자 어두운 색 나무로 촘촘히 짜인, 차분한 인상의 천장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니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과 흰 천을 씌워둔 의자, 테이블, 조각상 같은 것들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 하나만이 흰 천에 덮이지 않은 채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창고……?’
언뜻 보기에는 안 쓰는 물건들을 보관 중인 귀족 저의 창고 방 같았다. 환기 중인지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물건들 위에 씌운 흰 천이 간간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요함이었다.
그러나 일리에는 곧바로 위화감을 느꼈다.
안 쓰는 물건에 흰 천을 덮어 보관하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이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물건 아까운 줄 모르고 막 쓰다 버리는 노예상 놈들이 아니라.
게다가 제가 누워 있는 침대 역시, 오래된 것 같기는 했지만 깔끔하고 질이 좋았다. 그리고 루벨파스트에서는 노예를 절대 침대에 눕히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리에는 자신이 왜 여기 누워 있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이상하네…… 분명 귀족 하나를 도발했던 것까지는 기억나. 만약 그 도발이 성공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고, 실패했다면 더러운 노예 감옥에 도로 갇혔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 어느 쪽도 아니란 말이야.’
일리에는 일단 몸을 일으켜 보기로 하고 팔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아윽!”
통증이 상당히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움직여 보니 온몸의 관절과 근육이 또다시 아파왔다. 물론 의식을 잃기 전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아직 다 회복됐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후덕하게 보이는 중년 부인이 들어왔다.
“어머!”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는 일리에를 보더니 작게 소리 지르며 침대 쪽으로 달려왔다.
“세상에! 깨어났구나!”
안도보다는 놀라움이 더 많이 섞인 감탄에서, 일리에는 그녀가 자신의 회복에 대해 비관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가. 지금 내가 보이니?”
‘아가’라는 호칭이 영 거슬렸지만 일리에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말도 할 수 있겠어?”
“네.”
역시나 그녀가 기쁜 듯 미소 지었다.
“내 이름은 아이샤 애들러란다. 다들 애들러 부인이라고 부르지. 네 이름은 뭐니?”
“……일리에.”
“일리에? 예쁜 이름이로구나.”
일리에란 이름은 그녀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눈을 떠보니 막 루벨파스트에 넘겨진 노예 신세였는데, 노예 증서에 나이와 출신 지역은 적혀 있었지만 그 외의 정보는 전부 공란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는 노예상의 질문에 무심코 전생에서 쓰던 ‘릴리에트’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자신이 죽은 지 17년 전의 과거.
황궁에는 그 이름을 쓰는 황녀가 따로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예가 황녀와 같은 이름을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전생 내내 싫어하던 그 이름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말타기와 활쏘기, 검술과 달리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가녀리고 섬세한 이미지의 제 이름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릴리에트(Lilliette)라는 이름의 가운데 철자만 뽑아 일리에(Illie)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 다급하게 만든 이름치고는 꽤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어쩌다 루벨파스트에 들어가게 되었니?”
“그게…… 기억이 잘 안 나, 요.”
“응? 기억이 안 난다고?”
“아마, 독 향을 너무 많이 맡아서 기억을 잃어버렸나 보, 봐요. 아니면 머리를 잘못 맞아서 잊어버린 건지도…….”
자꾸 하대하던 말버릇이 튀어나와 혀가 꼬였지만, 일리에는 최대한 동정심을 살 만한 변명을 덧붙여 가며 기억 잃은 노예 소녀를 연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상 좋은 애들러 부인은 입을 틀어막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생이 많았구나. 세상에, 그놈들은 어떻게 인간이 되어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니.”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그러게나 말이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가까스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뒤 여기가 어딘지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깨어났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탄탄하고 커다란 체격의 잘생긴 청년이 들어왔다. 그러자 일리에의 곁에 앉아 있던 부인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그는 부인의 인사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천 덮인 의자 위에 앉았다.
일리에가 깨어난 줄 모르고 들어온 사람치고는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하긴, 그가 무슨 짓을 했어도 지금의 일리에보다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어버렸으니까.
‘세상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플래티넘 블론드, 장식적으로 보일 만큼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 볕에 그을렸으면서도 매끄럽고 탄탄한 피부와 기사인 것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단단한 육체…….
그렇다. 아무리 죽었다가 깨어났다지만 저런 외모를 잊을 수는 없었다.
‘슬라르한 벤티악이잖아……!’
그는 전생에 일리에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다.
황족인 아이르델 벤티악 공작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불운의 아이콘이었고, 많은 영애들의 마음을 빼앗아간 사교계의 인기인이자 어떤 여인하고도 엮이지 않아 수도승 소리를 듣던 남자.
“루벨파스트에서보다는 좀 봐줄 만하군. 건방진 성격도 여전한 것 같고.”
비아냥인지 뭔지 모를 말에 일리에는 곧 대충의 사정을 파악했다.
‘내가 망토를 붙들었던 그 귀족이 이놈이었어……? 그리고 이놈은 나를 죽이지 않고 사 온 거고……?’
황당한 일이었다.
전생이었다면 절대 한 방에 있을 수도 없는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리에가 아니라 슬라르한이 일어나 뛰쳐나갔을…….
‘전생의 슬라르한이 이 상황을 본다면 놀라서 까무러치겠군. 제일 싫어하는 여자를 돈까지 주며 살려내다니.’
물론 슬라르한에게서는 예의에 벗어나는 말 한마디 들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찔러 죽일 것 같던 그 눈빛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했다.
릴리에트 황녀로 살 때는 거기다 대고 생글생글 웃어주며 그의 속을 더 긁어놨지만, 지금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루벨파스트에서 빠져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하필이면 이놈의 노예라고? 제기랄…….’
다시 한번 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쨌거나 건지게 된 목숨, 또 죽겠다고 나서기에는 상황이 애매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저 녀석의 마음에 들어야겠지.’
그래서 그녀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앞에 엎드리기 위해 비척비척 침대 밖으로 내려갔다. 노예 주제에 언제까지고 주인의 앞에서 편하게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뭐 하는 거지?”
그의 차가운 질문에 일리에는 서둘렀다. 아직 온몸이 다 아팠지만,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간신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는데, 직접 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스스로가 비굴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쯤이면 만족하냐?’
그녀는 삐죽거리는 입술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아예 바닥에 처박았다. 그러나 머리 위로 떨어진 말은 예상 밖이었다.
“다시 한번 묻지. 뭐 하는 거냐?”
그 질문에 일리에는 당황했다.
‘뭐 하는 거긴? 아랫것이 바닥에 납죽 엎드리는 거 처음 봐? 도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아니면 혹시…… 너무 비굴해 보여서 싫은가?’
그녀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서서히 상체를 올리고 얌전히 무릎을 꿇어앉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 녀석,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귀가 먹었다거나.”
“아, 아니요. 아까는 제 질문에 대답을 잘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이러지?”
점차 싸늘해지는 목소리에 목 뒤의 솜털이 삐죽 섰다. 겨우 살 만할 정도로 통증이 가라앉았는데 또 죽도록 얻어맞기는 싫었다. 일리에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주인님…… 앞에서는 누워 있어도 안 되고, 눈을 마주쳐도 안 되고, 분부를 내리실 때까지 몸을 낮추고 있어야 한다고 들어서요. 저를 사신 분…… 맞으시지요?”
그랬더니 슬라르한이 한쪽 눈썹을 까닥이며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노예상 말로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던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슬라르한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끌어오는 사이 애들러 부인이 그의 곁에 가서 뭔가를 묻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그나마 익숙했던 사람이 사라지자 일리에는 더욱 긴장했다.
“이름.”
“……일리에입니다.”
이름을 듣고도 그는 아무 감흥 없이 그녀를 내려보다가 연초를 꺼내 태우기 시작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는 일리에의 눈빛이 조금 몽롱해졌다.
‘아, 한 모금만 빨아봤으면…….’
긴장해서 그런지 연초 한 모금이 더욱 절실했다.
그녀도 전생에는 나름 애연가였다. 보통 여성 귀족들처럼 길고 화려한 담뱃대에 끼워서 피우는 게 아니라 남자들처럼 연초만 손가락에 끼워 피운다고 얼마나 험담을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도 성깔이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던 터라, 그녀는 끝까지 흡연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열아홉 살 때부터 맛을 들인 이래 가장 자주 즐겼던 건 독한 카라반 산 연초였다. 독하지만 향이 참 좋았다.
환취(幻臭)처럼 느껴지는 피 냄새를 잊게 해줄 만큼 카라반 산 연초의 향은 진했고 그 덕분에 연초 안에 들어 있던 독을 눈치채지 못한 채 신나게 빨아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당기던 연초가 갑자기 맛없어 보였다.
‘이 녀석도 일찍부터 연초를 태웠구만. 야, 연초 끊어라. 폐병으로 각혈하면서 죽고 싶지 않으면. 아니면 또 모르지, 나처럼 연초 안에 든 독을 빨다가 뒈질지도.’
일리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그는 연초의 반을 태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깊게 빨아들인 숨을 길게 내뿜고는 입을 열었다.
“죽여달라고 했던가?”
살아가려고 마음먹었던 터라 저런 질문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지금 와서 꼬리를 말 수는 없었다.
일리에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무표정을 가장한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도 죽고 싶은가?”
다행히 슬라르한도 일리에를 진짜 죽이려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일리에는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걸 추천하지는 않겠다. 아무리 멀리 도망치더라도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예?”
“간단히 죽여 버릴 수도 있고.”
“어떻게, 요?”
“너한테 내 피를 먹여놨거든.”
“예?”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고 묻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전혀 그답지 않게 허무맹랑했다.
‘자기가 무슨 드래곤이야? 마법사야? 고작 피를 먹였다고 그런 게 가능하겠냐? 내가 어리고 순진해 보인다고 이게 사기를 치네?’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 엿보인 모양인지 슬라르한이 조소를 띤 목소리로 물었다.
“왜? 도망칠 생각이 있나 보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냥,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요.”
“상식……? 상식이라…….”
일리에는 그가 왜 ‘상식’이라는 단어를 곱씹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해 괜히 도망칠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 잠깐 경고만 해둘까?”
일리에가 미간을 찌푸리고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금빛을 띠며 반짝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리에는 심장이 꽉 쥐여 짜이는 듯한 통증에 숨이 턱 막혔다.
“커헉!”
눈앞이 노래지나 싶더니 그녀는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뙤약볕 아래의 지렁이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고, 가슴께가 터질 듯 아프고, 눈알이 빠질 것 같고, 뒷골이 당겼다. 또 생리적인 눈물이 터져 나와 눈앞을 흐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통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허억, 허억, 허억!”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괜히 시험해 볼 생각 말고,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들고 다니지도 마라.”
“흐윽, 아, 알겠……습니다.”
거친 숨과 함께 대답을 내뱉으면서 일리에는 속으로 온갖 욕을 짓씹었다.
‘꼭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보여줬어야 했냐? 내가 꿈지럭대는 꼴을 보니 기분이 좋디? 아, 자존심 상해. 물론 저놈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생에서는 인마, 네가 아니라 내가 황제였다고!’
하지만 아프고 짜증 나고 자존심 상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능력에 대해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심장에 통증을 느낀 순간 그의 모친이 사비 족 출신이었다는 것과 자신이 약이라고 받아먹은 액체가 피 맛이었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악의 추종자이자 마족이라고 탄압받곤 하는 사비 족의 피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워낙에 베일에 싸인 일족이라 그 정확한 내용은 알 길이 없었지만, 오늘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해졌다.
그들은 자신의 피를 먹인 개체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피가 대단한 치료제라는 것.
“네가 도망치지만 않으면 별문제 없을 일이다. 일단은 몸을 추스르는 데 최선을 다하고, 건강해지면 그때부터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된다. 물어볼 게 있나?”
일리에는 바들거리는 몸을 겨우 바로 세웠다.
“주인님의 이름, 아니,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슬라르한 벤티악.”
그가 슬라르한 벤티악이라는 사실이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한 번은 물어야 했다.
“그럼, 여기는 어딥니까?”
“파르디나스 제국 동북쪽의 영지 벤티악, 그리고 벤티악의 영주성인 레제 성이지.”
수도가 아니라는 사실에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수도라면, 바로 지척에 제 원수나 다름없는 전남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태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당장 달려가 죽이려 들었을지도…….
“더 물을 건 없나?”
슬라르한이 슬슬 일어설 것처럼 물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에 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일어날 많은 일까지 알고 있는 일리에로서는 더 궁금한 것이 없었다.
다만, 해야 할 말은 있었다. 사람은 자고로 은혜와 원한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이니까.
“저를…… 지옥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쎄. 인사를 하기엔 좀 이르지. 내가 더한 지옥을 선사할지 어떻게 알겠나.”
“아뇨.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일리에는 유난히 충성스러웠던 벤티악 기사단과 슬라르한의 수하들을 기억했다.
아랫것들에게 그런 충성심을 끌어낸 주인이었으니, 아마 루벨파스트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을 막 굴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리에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그가 머금었던 연기를 내뱉으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긴장이 조금 풀어지며 점점 정신이 멍해져 가던 일리에는 그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슬라르한이 피우는 연초의 향을 기억해 냈다.
“……아발론 산 약연(藥煙)을 피우십니까?”
“어떻게 알았지?”
“아발론 산 약연은 심신 안정 효과가 좋지만 오래 피우면 두통이 심해집니다. 그것보다는 피델로 산 약연이 나을 겁니다. 효과는 조금 떨어져도 부작용이 거의 없으니까요.”
카라반 산 연초를 가장 즐겼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연초를 태우는 게 취미였던 터라 내심 ‘옜다, 감사히 생각하고 새겨들어.’ 하는 기분으로 던진 조언이었다.
그런데 일리에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재미있군.”
순간 일리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재미있는 얘기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뭐, 연초의 세계가 참…… 방대하고 재미있기는 하지요. 그런데 주인님…… 제가 좀…… 어지러워서…….”
마침 타이밍 좋게도 일리에의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마음 편히 기절했다.
방금까지 저와 이야기를 나누던 노예 소녀의 몸이 옆으로 픽 쓰러졌는데도 슬라르한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상한 건 노예 소녀가 했던 말들이었다.
“내가 더한 지옥을 선사할지 어떻게 알겠나.”
“아뇨.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 루벨파스트보다 더한 지옥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듯한 대답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제 좁은 식견으로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 눈빛에는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이의 권태감과 피로감이 엿보였다. 아직 열다섯 살이나 됐을까 싶은 아이의 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하긴, 루벨파스트보다 더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루벨파스트 놈들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지, 저 조그만 여자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놓듯 패놨더랬다.
그뿐이랴, 영양실조도 심각한 상태였고 불결한 곳에서 생활한 탓인지 자잘한 상처들이 지독한 냄새를 피우며 곪아가고 있었다.
그를 붙들어 죽여달라고 같잖은 도발을 하지 않았어도 아마 오래지 않아 죽었을 터였다.
제 피를 먹이지 않고는 살리기 어려울 것 같기에 어쩔 수 없이 피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인을 새기지 않은 노예라 개 목줄을 걸어두려던 뜻도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치료한 후에야 일리에의 생김새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짧게 잘린 검은 머리칼과 희끄무레하니 핏기 없는 피부, 메마른 입술, 거기다 살집이라곤 하나도 없이 팔다리만 길쭉한 몸은 일리에의 성별을 모호해 보이게 만들었다.
의사가 눈꺼풀을 까뒤집어 확인한 눈동자도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잿빛이었다.
그러나 텅 비어 보인다고 여겼던 눈동자는 아이가 맹랑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동안 점점 생기가 들어차는 것 같더니 청량하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슬라르한은 다시 연초를 빨아들이려다 멈칫하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귀족적인 단어를 지껄이고, 귀족이나 아니면 사서 피울 수도 없는 연초의 종류를 냄새만 맡고도 아는 노예라…….’
슬라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노예 소녀 쪽으로 걸어가 그 앙상한 몸을 안아 올렸다. 황당할 정도로 가벼운 무게였다.
겉보기로는 너무나 약하고 볼품없는 노예였지만 슬라르한은 차라리 죽이라던 소녀의 독기 품은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침대 위에 소녀를 누이고 이불을 턱 아래까지 덮어주었다.
그때 이 노예 소녀를 돌봐주라고 붙였던 하녀, 애들러 부인이 물이 든 작은 대야와 수건을 갖고 들어왔다.
“아이구, 또 기절했나 보네. 그냥 두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옮겨도 되는데.”
노예 소녀의 몸은 너무 가벼워서 나이 지긋한 부인도 별 어려움 없이 안아 옮길 수 있었다.
“이 녀석, 식사는?”
“채소와 보리를 넣고 끓인 물을 먹이고 있었지요.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부드러운 수프를 먹여도 될 것 같습니다.”
“열은 좀 떨어졌나?”
“많이 좋아졌어요. 주인님을 뵙고 좀 무리한 모양이니 오늘 밤에는 다시 오를지도 모르지만, 곧 좋아질 겁니다.”
“회복이 너무 더디군. 약을 좀 더 먹여놔.”
“아유, 처음 왔을 때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 이것도 빨리 낫고 있는 거지요. 도대체 어디서 난 약이랍니까? 아무리 봐도 굉장히 비싼 약 같은데요.”
“글쎄. 그게 약일지, 독일지…….”
고작 노예에게 제 피까지 먹여 살려놓기는 했지만, 그 사실만으로 저 노예가 자신에게 충성하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물론 비범한 아이이기는 했다.
어린 계집애가 그 지독한 루벨파스트에서도 반년이나 굴하지 않았고, 심지어 노예로 사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죽기를 택했다.
그 정도의 기백은 벤티악의 기사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세상 모든 게 다 무서워야 할 상황에서도 왠지 태연한 구석이 있었다.
아까 바닥에 엎드리는 모양새를 봐도 그렇다. 그건 절대 복종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게 이 세상의 법칙이라니까 따르기는 합니다만, 제 뜻은 아니에요.’ 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어머니의 마력이 깃든 목걸이가 왜 이 아이에게 반응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
“이 아이 말로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던데요. 독 향을 너무 많이 맡아서 잊어버린 것 같다고요. 아직 어린데, 불쌍하기도 하지.”
슬라르한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는 아이가 아발론 산 약연이며 피델로 산 약연을 어떻게 알까.
슬라르한은 애들러 부인이 젖은 수건으로 일리에를 닦아주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집사가 문밖에 서 있었다.
“황제 폐하의 친서입니다. 갑작스럽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탐탁지 않은 기색을 띤 목소리로 고하며 황실에서 온 편지를 슬라르한에게 건넸다.
화려한 인장이 찍힌 편지 봉투를 뜯어 그 안에 들어 있던 달랑 한 장짜리 편지를 펴보니 예상외의 내용이 온갖 고상한 어휘로 쓰여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하겠다는군.”
“예? 이제까지는 시신을 찾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개소리하기도 지겨워졌나 보지.”
파르디나스의 17대 황제 노아크 레니에 솔렌.
선대 벤티악 공작의 친형이기도 한 그는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열등감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자라는 내내 저보다 우수한 동생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황태자가 되고 황제에 등극한 다음에도 늘 동생들을 의심하고 견제하고 시기했다.
그런 탄압에도 꿋꿋이 버티던 아이르델 벤티악 전 공작은, 제국 서남부의 분쟁 지역을 시찰하고 오라는 의심스러운 명령에도 군말 없이 따랐다가 결국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누구에게 죽었는지조차 황실에서는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깨끗하게 잘린 아이르델의 목만 보내왔을 뿐이다.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시신을 수습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더니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는 소리가 돌아왔다.
벤티악 가문에서 직접 해당 지역을 조사하겠다고 해도 별별 핑계를 다 대가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랬던 황실에서 방금 나머지 시신을 인도하겠다는 서한이 온 것이다.
“이 정도면 나보고 반란을 일으켜 달라는 거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벤티악 가문을 반역자로 만든 뒤 파르디나스 역사서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계획인지도 모릅니다.”
“계획 자체는 참 그럴듯하군.”
슬라르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다가 손에 잡은 편지를 다시 한번 훑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지?”
“얼마 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황제에게 어떤 큰일이 있었던 것 같답니다. 그 후안무치하던 사람이 갑자기 텅 비어버린 것처럼 보인다나요?”
“그 인간이……?”
“예. 얼마 전에 가벼운 감기로 잠깐 앓아누웠었다는데, 그 이후부터 그런답니다. 그래서 그게 감기가 아니라 불치병의 전조 증상이 아니었겠냐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죽기 전에 속죄라도 하려는 건가?”
“정확한 내용은 사람을 시켜 더 알아보겠습니다.”
슬라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다시 집사에게 넘겼다.
집무실로 향하는 슬라르한의 뒤를 따르던 집사는 슬라르한이 들렀다 나온 방문을 흘끗 뒤돌아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예 아이는…… 살아날 것 같습니까?”
조심했다지만 목소리에는 옅은 불만이 묻어 있었다.
그도 냉혈한은 아니니 다 죽어가는 어린 노예에게 동정심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까짓 노예에게 창고 방이나마 성 안의 방을 내어주며 간호하게 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노예를 사 온 것부터 슬라르한답지 않은 일이었다. 벤티악 가문에서는 노예를 쓰지 않았으니까.
그가 타리크를 대동하고 루벨파스트에 갔던 것도 혹시나 아이르델과 함께 떠났던 가문의 기사 중 노예로 넘겨진 이가 없는지 확인하려던 것이었지, 노예를 사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래도 집사는 노예를 데려온 슬라르한에게 잔소리 한마디 얹지 않았다.
슬라르한은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아이르델 벤티악 공작을 넘어서는 남자였다.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도 고작 반년 사이에 벤티악을 완전히 장악했고, 아이르델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완벽히 업무를 처리했다.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니 아마 그 나름의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살겠지. 그런 독종이 쉽게 죽을 리가.”
“보통 아이는 아니겠지요. 해봐야 열네다섯 살 정도의 계집아이가 루벨파스트에서 반년을 버티다니…….”
“녀석이 다 나을 때까지 저 방을 쓰게 해.”
집사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더럽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노예를 성 안의 방에 데려다 놔서 영 신경 쓰이던 참이었지만, 그나마 창고 방이라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고 방이라고 해서 노예에게 줄 만한 방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른 사용인들도 별채나 1층의 사용인 전용 구역을 사용하는데 그깟 노예가 2층에 있는 방에서 지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사가 무엇에 불만을 품고 있는지 짐작하면서도 슬라르한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집사가 한숨 대신 인사를 하고 나가자 집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사실 슬라르한이 신경 쓰는 것은 어린 노예 그 자체가 아니었다.
물론 흥미로운 존재였지만 지금 그가 처한 상황에서 그 정도의 흥미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르델의 죽음으로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벤티악 가문과 연관된 모든 이들의 운명 아래 칼이 들어온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르델의 시신을 돌려주겠다는 것조차도 함정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남은 벤티악 가문의 핏줄마저 말살하려는지도.
얼마나 더한 충성심을 보여야, 얼마나 더 반역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야 황제가 이 미친 탄압을 그만둘까.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작은 의외성에라도 희망을 걸어보는 수밖에.
‘어머니의 힘이 저 아이를 지목한 이유가 있겠지.’
그는 놀라운 마력을 지녔던 어머니가 떠나기 전 남긴 목걸이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목걸이가, 저 아이 앞에서 바르르 떨렸었다. 잘못 느꼈나 싶어 손을 갖다 댔지만 펜던트는 심장이 뛰는 것처럼 툭툭 튀어 올랐다.
어머니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힘이 저에게 손해될 일을 제안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슬라르한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일리에를 산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마력은 지금 저에게 가장 모자란 것을 가르쳐 줄 심산으로 그 아이를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죽여라!”
죽이라면서도 그 누구보다 생생히 살아 있는 눈을 하던 그 아이.
슬라르한은 무겁게 가라앉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매끈한 유리창에는 의무감과 책임감밖에 남지 않은 무감각한 그의 눈동자가 비쳤다.
스산한 고독이 짙어졌다.
* * *
일리에가 정신을 차린 건 그날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눈을 떠보니 사방이 어둑어둑했지만, 방 안에 촛불이 켜져 있어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리에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슬라르한이 날 루벨파스트에서 사 왔고, 여긴 벤티악 영지고, 어쨌든 날 살려주겠다는 거지? 내가 슬라르한에게 목숨을 구제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나저나 그가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으니까 지금은 스물두 살이겠네.’
가만히 자신과 슬라르한의 나이를 따져보던 일리에는 뭔가 속이 싸한 느낌이 들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 잠깐! 그렇다면 바로 내년에 황제가 후계 발표를 한다는 거잖아!’
일리에는 자신이 루벨파스트에서 고초를 겪느라 머리가 좀 멍청해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내년 봄 대축연(大祝宴)에서 황제는 후계와 관련된 발표를 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황태자 혹은 황태녀로 책봉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문제였다.
황실과 귀족 사회를 뒤흔든 그 발표 때문에 황녀 릴리에트의 운명 역시 통째로 뒤바뀌었다.
모든 영광과 절망의 시작이자 식물인간이 되어 10년간 누워 있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되돌리고 싶었던 사건이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지금 이 시점으로 회귀한 건가? 하지만 왜 노예의 몸으로……?’
이번 생에서 눈 뜬 이후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의 이유에 대해 고민해 봤지만 여태 납득할 만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황제의 발표 때문이었다면…….
등줄기가 다 오싹했다.
죽지도 못하고 10년간 후회했던 일을 또 반복한다는 건가?
아니, 지금의 그녀는 노예 일리에니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럼 뭐지?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으로 돌아온 거지? 그 선언이 아니고서야 지금 이 시점이 중요할 리가 없잖아!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 다 떠나서, 왜 내가 이 빌어먹을 삶을 다시 살아야 하는 거냐고!’
억울함과 좌절감 때문에 또 숨이 턱턱 막히는데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애들러 부인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함께 풍기는 것이, 저녁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다.
“일어났구나, 일리에. 깨워야 하나 했는데…… 몸은 좀 어떠니? 아이구, 아직 안색이 창백하네.”
“아, 아닙니다. 힘은 좀 없지만, 또 기절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나마 다행이구나. 얼른 밥 먹자. 식사를 잘해야 몸도 빨리 낫지. 여태 채소랑 곡식을 넣어 끓인 물 같은 것밖에 먹일 수가 없었거든.”
애들러 부인은 일리에가 침대 헤드에 기대앉게 한 뒤 침대용 테이블에 뽀얗고 묽은 수프를 올려주었다.
약해진 소화 기능을 염려한 탓인지 건더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냄새만큼은 군침이 돌 정도로 향기로웠다.
일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쥐고 수프를 퍼먹기 시작했다.
그건 순수한 생존본능이었다.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의지가 방금까지 복잡하게 얽혔던 머릿속을 싹 정리해 준 것 같았다.
‘그래…… 어쨌든 일단은 살아야지, 별수 있나.’
어쩌면 신은 그녀가 10년 동안 절절히 후회하고 원망하던 일을 바로잡길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그 방법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살아야, 그리고 기력을 회복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옥의 땅 루벨파스트도 버틴 일리에가 이겨내지 못할 리 없었다.
그 뒤로 일리에는 몸이 낫는 것에만 집중했다. 잘 들어가지 않더라도, 심지어 결국 토하더라도 제 몫으로 나온 식사를 꾸역꾸역 다 비워냈다.
식사 후에는 방 안을 걸어 다니며 운동을 했다.
군마를 타고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르던 자신이 고작 이 방 안을 돌아다니는 걸 ‘운동’이라고 칭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지금 그녀의 몸뚱이는 그것마저도 버거운 상태였다.
하지만 일리에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꾸준히 움직였다.
덕분에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바들거리던 몸에는 점점 살이 오르고 힘이 생겼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슬라르한이 나타난 건 한 달쯤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회복에 애쓴다더니 꽤 사람다워졌군.”
“르, 아니, 주인님.”
일리에는 전생에 그를 부르던 애칭, ‘르한’을 무심결에 입에 올릴 뻔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르한.’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정중하게 ‘예, 릴리에트 전하.’라고 답했다.
‘릴리’라고 불러도 된다며 깐족대 봤지만, 그는 늘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너무나 쉽게 거리를 좁혀오는 것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생과 비교해서 말이지만.
“그래도 더 찌워야겠어. 약은 잘 챙겨 먹고 있겠지?”
“늘 감사히 챙겨 먹고는 있습니다만, 귀한 약을 너무 많이 내어주시는 게 아닌지요. 이젠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약이라는 건 그의 피였다.
그 약으로 인해 슬라르한의 권속처럼 살아야 한다는 건 불쾌했지만, 그게 죽을 사람도 살리는 명약이라는 데는 이견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공작’인 그의 몸에서 뽑아낸 피였으니까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귀한 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다 나은 자신에게 그런 귀한 약을 또 챙겨주겠다는 게 일리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귀한 물자일수록 효율을 따지며 써야 하는 것 아니던가. 그녀가 전생에 배우기로는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리에의 염려가 우습게 들렸던 모양이다.
“왜? 무서운가? 무서우면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될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그건 피고…… 피를 그렇게 짜냈는데 몸이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쥐가 고양이 걱정하고 있군.”
자신의 진지한 충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슬라르한을 보면서 일리에는 속으로 ‘네가 언제까지나 젊을 것 같냐?’라며 비아냥거렸다. 물론 표정만큼은 고분고분했지만 말이다.
의자에 걸터앉은 슬라르한은 일리에를 위아래로 살펴보다가 물었다.
“열네 살이라고 했던가?”
“열여섯 살입니다.”
“……뭐?”
그 대답에 슬라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네가 지금 열여섯 살일 리가 없다.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저도 제 나이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노예 증서에 열여섯 살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잘 팔리는 게 노예인데, 노예상들이 일부러 부풀려 놨을 리가요.”
“열여섯이라니…….”
일리에도 그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제 몸은 열여섯 살로 봐주기 힘들었다. 아마 몸의 주인은 루벨파스트에 넘어가기 전에도 잘 먹고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2년만 있으면 성년이라는 말인데, 누가 널 보고 그리 생각하겠나.”
“제가 보기에도 그렇긴 합니다만, 어쩌겠습니까. 나이가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건 그렇다만.”
일리에는 쇠꼬챙이처럼 바싹 마른 손목을 민망한 듯 쓸다가 가을빛이 드리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벤티악은 동북쪽에 있는 지역이었다. 겨울이 길었고, 여름은 짧았다. 수도의 봄꽃이 지기 시작해야 들판에 꽃이 피고, 남부에서 막바지 여름을 즐길 때쯤이면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는 너른 영지.
그런 영지의 짧은 여름이 끝나고, 지금은 나뭇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주인님.”
여전히 일리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슬라르한은 그 질문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무심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892년 9월 18일.”
일리에는 ‘9월 18일이라…….’라며 몇 번이나 날짜를 곱씹었다.
황제는 내년 3월 15일 대축연에서 후계 관련 선언을 한다. 그때까지 더 건강해져야 했다.
뭐가 됐든 그 선언이 자신에게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 같았다. 슬라르한에게 의탁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아마, 전생과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해야 할 수도 있었다.
“노예상에게 잡히기 전엔 어떻게 살아왔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일리에는 퍼뜩 놀랐지만 곧바로 어수룩한 표정을 지어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 루벨파스트의 독 향 때문에 기억을 잃었다던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귀족이었을 가능성은 없나?”
속이 뜨끔했다. 하지만 일리에는 어깨를 으쓱하며 양 손바닥을 펴 보였다.
“설마 제가 귀족이었겠습니까? 이렇게 볼품없는데요.”
“글쎄…….”
표정이 없어서 도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일리에를 살피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일리에는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게 노예나 평민은 따라할 수도 없는, 전형적인 귀족의 자세라는 것도 몰랐다.
“정말 특이해. 정말로…….”
일리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슬라르한 때문에 살짝 소름 돋았다.
‘그렇게 노려보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나, 황제까지 했던 여자야! 전쟁터까지 다녀왔는데 이 정도쯤이야.’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일리에는 자신이 긴장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자 슬라르한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몸 상태가 좋아 보이니, 산책이나 하지. 따라와.”
벤티악에 온 뒤로 이 방에서만 지냈던 일리에는 독방에서 나오는 죄수의 심정으로 냉큼 그의 뒤를 따랐다. 방 문턱을 넘는 게 국경을 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흘끔흘끔 주변을 살피니 슬라르한을 발견한 사용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일리에는 자신이 슬라르한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보좌관 타리크와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크! 이거 진짜 적응 안 되네.’
회귀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지만, 일리에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렸다.
황제였다는 자존심 하나로 루벨파스트에서 버텼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벤티악에 와서는 슬라르한이나 애들러 부인이 그녀의 행동을 타박한 적이 없어서 여태 무감했고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노예의 존재에 태연할 수는 없었다.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사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타리크만 해도 노예의 존재 자체를 불쾌해했다.
그가 딱히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전생의 타리크 디넬을 떠올려 보자면, 그는 입담이 거칠지만 올바르고 충성스러우며 아랫사람들을 잘 챙기는 기사였다. 심지어 제국에 몇 없는 스피어 마스터이기도 했고.
그는 그저 노예의 존재 자체가 신성모독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올바른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르디나스 제국에서 노예란 필요악이 되었고, 이 제국 자체를 바꿀 수는 없으니 차라리 눈앞의 노예를 치우고픈 것이리라.
어쨌든 그는 일리에와 슬라르한을 보자마자 뒤를 따랐고 일리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그녀를 슬쩍 노려보았다.
볕에 그을린 근육질의 거구가 짙은 눈썹을 찌푸리자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뭐! 내가 뭐!’
자신이 성 안에서 치료받고 있는 것도, 이렇게 방에서 나온 것도 다 슬라르한의 명령일 뿐인데 왜 저에게 눈을 부라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리에는 심통이 나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제 뒤에서 묘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슬라르한은 성의 후문 쪽으로 가더니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일리에는 부르르 떨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늦여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사막 근처의 루벨파스트에서 지냈던 데다 몸도 성치 않은 일리에는 그 바람 사이에 스며든 찬 기운을 민감하게 느꼈다.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골치 아프겠다 싶어 일리에가 제 팔뚝을 문지르는데 갑자기 슬라르한이 몸을 돌리더니 자기가 걸치고 있던 얇은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툭 얹었다.
일리에는 너무 놀라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굳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제 할 일을 하던 하인들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타리크가 그 눈치를 좀 살피는 것 같더니 앞으로 나섰다.
“각하. 차라리 제 옷을 내어주겠습니다.”
“자네의……?”
슬라르한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타리크는 그제야 자신이 겉옷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런…… 그럼, 하인을 시켜 옷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뭐 하러?”
“하지만…….”
슬라르한은 별생각 없는 것 같았지만 일리에는 타리크의 염려를 충분히 이해했다.
슬라르한은 ‘누군가 추워한다. 그러니 뭔가 따뜻한 걸 둘러줘야 한다. 아, 이거면 되겠군.’이라는 단순한 사고 과정을 거쳐 자신의 재킷을 내어줬겠지만, 그의 보좌관인 타리크로서는 제 주군의 명예나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일리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벨파스트 출신의 노예가 공작을 따라 돌아다니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심지어 공작 각하의 겉옷까지 둘렀더라, 하는 소문이 돌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랐다. 이미 늦은 건지도 모르지만.
“이분 말씀이 맞습니다. 노예에게 공작 각하의 옷이라니, 지나칩니다.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일리에는 서둘러 재킷을 벗은 다음 조심스럽게 슬라르한에게 건네며 허리를 굽혔다.
마지막으로 언뜻 스친 타리크의 표정이 ‘정신은 제대로 박혔군.’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슬라르한이었다.
“도대체 뭐가 이리 복잡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주인님.”
“그럼 내가 묻지. 공작이 노예에게 옷을 내어준 것과 노예가 감히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큰 죄냐?”
“그, 그건…….”
일리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 슬라르한을 욕했다.
이건 갑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가 공작에게 ‘네가 잘못했지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행히 타리크가 재빨리 그녀를 편들었다.
“각하. 이 노예로서는 부담스러울 일입니다. 일반 하인도 아니고 노예가 공작 각하의 옷을 두르고 돌아다녔다가는 내일부터 이 노예를 모르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노예가 각하의 총애를 얻었다고 여기고 시기하는 이가 생길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의 얘기가 먹혔는지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건네는 재킷을 집어 들었고, 그사이 눈치 빠른 하인 하나가 달려와 그녀에게 제 겉옷을 걸쳐주었다.
“어, 저기…….”
“내 이름은 베델이야. 옷은 나중에 돌려줘도 돼.”
그는 작게 속삭이다가 눈을 찡긋하고는 빠르게 멀어져갔다.
슬라르한 또래로 보이는 하인이었는데 이렇게나 눈치가 빠른 것을 보니 앞으로 출세할 것 같았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슬라르한은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저 멀리 연무장이 보일 때부터 일리에는 조금 흥분했다.
귀를 때리는 금속성 파공음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검을 쥐고 마음껏 날뛰고 싶었다. 검을 못 잡은 게 도대체 몇 년인지…….
일리에가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던 슬라르한이 무심하게 말했다.
“벤티악 기사단이 훈련하는 연무장이다. 내일부터는 여기서 체력 훈련을 하도록.”
파격적인 명령이었다. 노예가 기사단의 연무장에서 체력 훈련을 하다니, 말도 안 된다.
타리크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눈이 커졌다.
“각하.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은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 녀석이 잘못 날아온 돌에 맞을 수도 있고…….”
일리에를 생각해 주는 것 같은 뉘앙스였지만 노예 따위가 기사들의 신성한 연무장에 발을 들인다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그렇군. 그럼 기사단 훈련이 끝난 오후 5시 이후에만 이용해라.”
일리에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타리크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타리크도 더는 반발하지 못하고 어금니만 꽉 깨물 뿐이었다.
아까 재킷을 걸쳐준 일도 그렇고 연무장 일도 그렇고, 슬라르한이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사람을 달리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일리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망을 치려고 해도, 슬라르한과 거래를 하려고 해도 몸이 건강해야 가능한 일이니까 체력 훈련은 꼭 필요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슬라르한 네 녀석을 철저히 이용해 주지!’
일리에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다부진 다짐을 되뇌었다.
* * *
황후와 황후 소생의 자녀들이 사는 제이드 궁에서 가장 까다로운 주인을 고르라면 아마 3황녀 엘로르 델 솔렌일 것이다.
황후 라비엔느는 대귀족의 여식답게 자존심이 강하고 근엄했지만 작은 일 하나하나에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다.
1황자 렌셔와 2황녀 루리아 역시 요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3황녀 엘로르는 전혀 달랐다.
어릴 때부터 미모를 칭송받으며 자라난 황실 제일의 꽃은 언제나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자 했다.
그게 이해될 정도로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매끄럽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선명하고 깨끗한 금발이었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섬세한 속눈썹 아래서 영롱하게 빛났다.
홍조 어린 뺨은 모공 하나 보이지 않았고, 순진해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흘리는 미소는 요염했다.
화려하고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으며 과시하기를 좋아하고 염문을 흩뿌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거기다 자신의 든든한 배경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이기도 하고, 과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그랬던 그녀가 반년 전쯤부터 갑자기 이상해졌다.
전날 늦게까지 파티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엘로르는, 정오가 넘어서야 눈을 뜨던 평소와는 달리 오전 10시쯤에 눈을 번쩍 뜨더니 이상한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여긴…… 내 방……?”
“네, 전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어제 조금 과음하신 듯하여 걱정했…….”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야?”
“예……? 그야, 892년 1월 5일이지요.”
“892년 1월? 892년이면…… 그래…… 18년 전이구나…….”
“전하,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혹시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 아니, 신경 쓸 것 없다. 당장 도서관에 가서 황실 계보도나 빌려와.”
“예? 갑자기 황실 계보도는 왜…….”
“가져오라면 가져와!”
“죄, 죄송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시녀가 바람처럼 달려가 황실 계보도를 가져오자 엘로르는 미친 사람처럼 페이지를 넘겨 현 황실의 계보도를 확인했다.
“없어……! 진짜로 없어!”
“전하, 도대체 무엇이…….”
“릴리에트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릴……리에트요? 글쎄요…… 저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만. 다른 시녀들에게 한번 물어볼까요?”
“아니야, 네가 모른다면 됐어.”
오랫동안 엘로르 곁에서 시녀로 있던 브리에는 엘로르가 그처럼 기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정말 다행이라는 듯, 혹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미소였다.
그 후로 엘로르는 어딘지 변했다.
성격이 까다롭긴 했지만 저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단순한 것에 가깝던 그녀가 두 황비나 이복 형제자매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정치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을 풀어 어떤 정보를 찾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제 또래 모임을 줄이는 대신 힘 있는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했고,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였던 황제에게 꼬박꼬박 문안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으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명령들을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 또한 엘로르의 흔한 변덕 중 하나이리라고, 아마 곧 지나갈 바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엘로르는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앞으로 반년…… 아버님이 후계 관련 발표를 하기 전까지 최대한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해.’
나이 든 부인들 틈에 끼어 좋아하지도 않는 시를 낭송하다 돌아온 엘로르는 짙은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며 다시 한번 날짜를 되짚었다.
황제는 반년 뒤, 몇 명의 후보를 지정해 ‘황위 경쟁’을 시키겠다는 발표를 한다.
전생의 엘로르는 귀찮아서 포기한 일이었지만, 그건 크나큰 실수였다.
‘이번에는 내가 반드시 클리드와 황위를 차지할 거야.’
실패한 인생을 처절히 후회하며 악마에게 영혼을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18년이란 시간을 되돌렸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황위 경쟁이 벌어지기 전이고, 무엇보다 릴리에트가 없다.
릴리에트가 존재하지 않는 과거로 보내 달라는 자신의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가 긴 잠에 빠진 것 같았는데 눈을 떠보니 18년 전이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악마에게 영혼을 주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했지만,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빠져나온 데다 목표를 이루지 못할 리도 없으니 굉장히 이득을 본 기분이었다.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후계 관련 발표 전이었기에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여러 가지를 준비할 여유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제 동복 오라비 렌셔에게 환각제를 먹여 요양을 보낸 것?
‘어차피 루리아 언니는 후계자 자리에 관심 없어. 그러니 어머니도 나를 밀어주실 수밖에 없겠지. 애초에 렌셔를 후계자로 민다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전생에서도 렌셔는 전혀 미덥지 않았다.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황후 소생의 장자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그 ‘핏줄’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인망이 있든가, 지혜롭기라도 해야 했는데 그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황태자 자리를 빼앗겼다고 불평이나 해댈 뿐,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게다가 저를 위해 애쓴 동복동생을 내팽개치기나 하고 말이야.’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 얄미운 릴리에트가 클리드 덕분에 황제가 되고 릴리에트를 괴롭혔던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렌셔는 저를 도와주지 않았다.
“네가 유독 릴리에트를 못살게 군 건 사실이잖아! 너 때문에 우리까지 밉보이면 어쩔 거냐?”
그따위 소리를 늘어놓으며 모질게 제 손을 뿌리쳤더랬다.
그 인간이 황제가 되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황제가 되었더라도 자신을 위해 애쓴 동생에게 그만한 보상을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전생이야 어쨌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이번 생이지. 난 미래를 다 알고 있으니, 클리드도, 황좌도 전부 차지할 수 있어.’
그 생각만 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클리드 카시르.
카시르 후작가의 차남이자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천재이며 유명 오페라 남자 가수들마저 기죽일 만큼 잘생긴 외모의 완벽한 남자.
그리고 황제가 될 남자.
전생의 엘로르는 절망의 늪 앞에 다다라서야 자신의 계산이 전부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를 차지했어야만 했다.
방심한 탓에 그를 놓친 전생을 떠올리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분노가 차올랐다.
‘내 인생이 그따위로 끝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클리드.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아.’
엘로르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꽉 조인 옷을 벗으며 백장미 향유를 목욕물에 듬뿍 풀어놓으라고 일렀다.
웬만한 귀족도 자주 쓰지 못하는 비싸고 귀한 향유였지만, 조만간 만날 클리드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 * *
“으, 추워.”
일리에는 습관적으로 춥다고 말하면서도 연무장 주변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체력 훈련을 시작한 지도 벌써 3주가 지났다.
그사이에도 꽤 건강해져서, 이제는 쉬지 않고 세 바퀴쯤은 달릴 수 있었다.
하얀 입김을 뿜으며 달리는 동안, 일리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 고민은 전생의 일을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클리드 카시르, 그 개새끼! 잘근잘근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클리드 카시르. 그게 일리에의 남편, 아니, 전남편의 이름이었다.
클리드는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데다가 얼굴까지 잘생겨서 어디서건 인기가 많았다. 그 남자 때문에 속을 끓인 영애가 한둘이 아니었던 터라 집안의 후계자인 제 형보다 훨씬 유명했다.
그랬던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그가 아무리 뛰어나도 카시르 후작위를 잇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카시르 후작가는 아주 보수적인 가풍을 유지하는 집안이었고, 차남이었던 그는 제 형이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한 무슨 짓을 해도 작위를 이을 수 없었다.
그는 거기에 불만을 품었고, 마침 그때 황제가 획기적인 선언을 했다.
“황자와 황녀, 그리고 조카들 중 가장 능력 있는 이를 다음 대 황제로 세우겠노라!”
저 자신밖에 몰라 황태자 책봉을 미룬 것으로만 보였던 황제가, 아예 제 자식들과 조카들에게 똑같이 기회를 준 것이다.
좋게 보면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진보적인 선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한 일이었다. 그토록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인간이 제 자식과 조카들을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특히 그동안 자신의 형제들과 조카들을 괴롭힌 전적을 떠올려 보자면 의심이 앞서게 되는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황제가 그런 선언을 한 이유가 암암리에 소문났다.
“황제 폐하가 선천적인 불임이시래요, 글쎄.”
“그, 그럼, 황손 전하들은……?”
“전부 다 다른 남자의 자식이라는 거죠.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조카들이 폐하와 더 가까운 혈연이라는 거고요.”
“그래서 그런 발표를 하셨구먼!”
세기의 스캔들이었다. 파르디나스 역사상 이런 막장 족보가 또 있었을까.
황후와 황비들은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결백한 것치고는 황제의 조카들이 황태자위 후보가 된 것에 대해 누구도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다.
어쨌든 클리드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황녀 중 하나를 황제로 만든 뒤 그녀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내가 당첨된 거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으면…….’
일리에는 그것부터가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당시의 클리드는 그 시커먼 속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친절하고 다정했다. 게다가 참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두뇌로 릴리에트에게 유리한 판을 깔아주었고, 릴리에트는 그의 계획을 멋들어지게 성공시키며 승승장구했다. 두 사람은 더없이 잘 어울리는 파트너였다.
“황제 후보 평가 위원회의 공정한 심사 결과를 나 역시 받아들이는 바, 4황녀 릴리에트 시야르드 솔렌을 황태녀로 선언한다.”
황태녀로 선언되던 그 순간은 얼마나 기뻤던가. 그동안의 고생이 일시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기뻤던 건 황위 후계로 지목된 일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만, 이제는 이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전하. 당신과 함께해 온 그 나날들 내내, 사랑해 왔습니다.”
황태녀가 된 저에게 이제야 마음을 전한다며 로맨틱한 고백을 했던 클리드.
고생을 함께해 왔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그를 사랑했으니까.
세상 모든 걸 다 얻었다고 생각했다.
릴리에트 솔렌에게 허락된 행복이 그렇게 클 리 없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황제의 관을 1년도 채 이고 있을 수 없었다. 즉위 후 점점 쇠약해지다가 어느 날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으니까.
그게 자연적인 질병이었다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식물인간이 된 게 독 때문이고, 독 넣은 연초를 건넨 사람이 남편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일리에가 이를 바득 갈았다.
심지어 그 독은 몇 년이나 클리드를 짝사랑한 동시에 릴리에트를 경멸해 마지않던 이복언니 엘로르가 바친 것이었다.
엘로르는 그 대가로 클리드의 정부가 되어 살아갈 수 있었다.
지독한 희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나쁜 새끼. 내가 저를 황제로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는데, 그랬으면 최소한의 자비라도 베풀어 한 번에 고통 없이 죽게나 해줄 것이지.’
그녀의 잔인하고 영악한 남편은 자신의 기반을 닦기 위해 10년이나 아내를 식물인간 상태로 놔두고 자신이 황제의 권한을 대신 휘둘렀다.
10년.
말이 10년이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채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는 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참모이자 사랑스러운 남편이었던 이의 역겨운 고해성사를 매일 밤 들으면서도 그에게 침 한번 뱉을 수 없었던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자신은 황녀 릴리에트가 아니라 슬라르한에게 목숨을 저당 잡힌 노예 일리에였으니까.
‘이번에는 절대로 네 맘대로 되지 않을 거야, 클리드.’
일리에의 눈동자는 10년 동안이나 타고 남은 재처럼 건조하고 싸늘했다.
클리드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클리드의 모든 계략을 알고 난 뒤, 맨 처음에는 당연히 온몸을 태워 버릴 듯한 분노를 느꼈다. 분노가 지나가자 절망에 가까운 자책감이 뒤따랐고, 그것마저 지겨워지자 억울함이, 자기연민이, 혐오가, 망상이, 포기가 차례차례 그 자리를 채웠다.
온갖 감정을 불사르던 10년은 오래전에 지나갔고, 이제는 다 타버린 재밖에 남지 않았다.
벌어진 적 없는 일이 되어버린 그 기억의 대가를 지금의 클리드에게서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게 전생을 정리해 가기 시작하자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산 사람이 슬라르한이라는 것을 본 순간부터 이 결론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슬라르한을 황제로 만들어야 해.’
그녀가 처한 모든 상황이 그 길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전생을 온전히 기억한 채 노예로 회귀해 슬라르한에게 거두어지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슬라르한은 전생에 가장 이상적인 황제감으로 평가받던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황위를 가로챈 게 분명해. 그걸 내 손으로 돌려놓으라고 엘룬께서 내게 벌을 내리신 거야.’
어쩌면 슬라르한이 황제가 될 때까지 이 빌어먹을 회귀와 빙의가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사절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이번에 성공해야 해!’
평안한 삶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죽음의 안식까지 빼앗기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일리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에서 슬라르한을 황제로 만든 뒤, 적당히 살다 제대로 된 죽음을 맞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아주 중요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어떻게 슬라르한이 내 말을 따르게 하냐고…….’
한숨이 나왔다.
슬라르한은 대 벤티악 공작이고, 자신은 루벨파스트 출신 노예다.
노예가 공작에게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둔다?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얻어맞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묻는다면 답할 말이 궁했다.
일리에가 고민하느라 달리기도 포기하고 설렁설렁 걷고 있는데 연무장과 맞닿은 정원의 벤치에 두 하녀가 앉아 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 쳐다보는데 소리 지른 하녀는 제 곁의 하녀에게 그게 정말이냐고 자꾸 확인하고 있었고, 맞은편의 하녀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에 든 찻잔 안을 살피며 말했다.
“지금 저 찻잎이 서 있잖아. 네 기도가 엘룬께 닿았다는 뜻이야. 그리고 바닥에 같은 방향으로 누운 찻잎 세 개는 너에게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 뜻이고, 반대 방향으로 누운 찻잎이 하나 있으니 네가 그 기회 중 하나는 이미 썼다는 거야.”
“어머, 어머! 맞아! 내가 얼마 전에 루카스랑 마주쳤는데 인사도 못 하고 지나왔거든.”
“하지만 앞으로 두 번의 기회가 더 있으니까, 분발해!”
“진짜? 고마워! 내일 아침 주방 정리는 내가 할게!”
그들은 잡담을 더 나누다가 일리에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언짢은 표정으로 일어나 저택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일리에는 그들이 참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래! 점쟁이다! 그거면 말도 안 되는 소릴 해도 대충 우길 수 있잖아!’
일리에는 혼자 씩 웃으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슬라르한을 황제로 만들고 클리드를 저지하며 자신은 돈도 벌, 아주 그럴듯한 계획을.
* * *
“이제 좀 사람 같아 보이는군. 키도 좀 큰 것 같고…….”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자신을 앞뒤로 돌려세우며 얼마나 살이 붙었는지 확인하는 슬라르한을 보고 일리에는 속으로 좀 웃었다. 어린애를 통통하게 살찌워 잡아먹으려는 마녀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호들갑이란 말인가.
일리에는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하다가 작정했던 말을 꺼냈다.
“저, 저기,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건조한 목소리에서는 그 어떠한 기대감이나 의문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님께서는 저를 얼마에 사셨습니까?”
“갑자기 네 몸값이 왜 궁금해졌지?”
슬라르한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계획을 생각할 때는 잘 될 것만 같았는데 막상 말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건방지다고 맞을 수도 있었고,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서 본 것 같아서 일리에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언젠가는 자유민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제 몸값만큼 일한 뒤에는 노예 증서를 태우고 저를 풀어주십시오.”
목소리가 좀 떨리기는 했지만 용감한 황녀 릴리에트다운 기백이 넘쳤다고, 일리에는 자평했다.
그러나 슬라르한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드물게도 피식 웃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바, 반드시 각하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노예가 주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좀 많이, 보통 노예하고는 다르게 도움이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자신만만하군그래.”
그러고는 침묵이 이어졌다.
슬라르한은 뭔가를 깊게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의외로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몸값은 5백만 페르소였다. 다 죽어가고 있었던 데다가 인도 새기지 않은 노예라 싸게 샀지.”
일리에는 순간적으로 조금 안심했다. 전생 기준으로는 그다지 많은 돈도 아니었다. 적당한 드레스 서너 벌 정도 살 만한 돈이었으니까.
그 정도면 쉽게 갚을 수 있겠다고 여긴 순간이었다.
“그런 너를 살리기 위해 내 피를 두 병 넘게 먹였으니까, 그 값까지 치면 4천5백만 페르소쯤 되려나?”
“……예?”
“그리고 보통 노예의 일당은 5백 페르소 정도로 치지.”
일리에는 너무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물론 나는 자비로운 주인이니 하루 일당을 두 배로 쳐주겠다. 1년에 일하는 날을 300일로 잡고…… 그럼 네가 네 몸값을 다 갚으려면 한 150년쯤 걸리겠군.”
“예에?”
“혹시 평생 충성하겠다는 맹세였는데 내가 눈치도 없이 못 알아들은 건가?”
“아니…… 일당이 1천 페르소라니요? 빵이나 사 먹을 수 있는 돈이랍니까?”
순간 슬라르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앞서 말했지만, 그것도 꽤 잘 쳐준 건데. 제국에서 노예의 노동력은 거의 무상으로 처리하니까.”
“아니, 그래도…… 1천 페르소는 너무한 것 같은데…….”
“재미있군.”
일리에는 그가 하는 ‘재미있다.’라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나도 재미없었으니까.
어쨌든 여기서 협상을 끝낼 수는 없었다.
“일의 종류가 달라져도 일당은 똑같은 겁니까?”
“글쎄. 예를 들자면?”
“그러니까, 뭐, 주인님께 아주 큰 이익을 안겨 드리는 일이라거나…….”
“흐음. 하긴, 바닥 쓰는 일과 그런 일이 동급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겠지.”
“그렇죠?”
“네가 바닥 쓰는 일보다 얼마나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슬라르한은 냉소적으로 여기는 것 같았지만 일리에는 희망의 빛줄기가 발치를 비추는 것 같았다.
“상상도 못 하실 대단한 일을 해드릴 테니, 건당으로 계산해 주십시오!”
“뭐?”
슬라르한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생글거리며 금액까지 지정했다.
“건당 10만 페르소에서 5백만 페르소 사이로 책정해 주십시오! 반드시 그 값어치 있는 일을 해드릴 테니까요. 그래서 제 몸값을 다 털어내면 절 면천해 주십시오. 밖에 나가서 살 돈도 좀…… 주시고요.”
일리에의 말에 슬라르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조소에 가까운 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일리에는 분명 그의 희고 가지런한 이가 입술 사이로 드러난 걸 목격했다.
그 목석같은 슬라르한 벤티악이 웃다니, 희귀한 장면이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 잘 웃는 사람인데 전생의 그와 자신의 관계가 서로 웃지 못할 관계였을 뿐인지도 모르고.
“네가 도대체 무슨 수로?”
“저한테 좀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특별한 능력?”
“어, 그러니까…… 행운을 점친다거나, 불운을 감지한다거나, 예지몽을 꾼다거나, 그런 거요.”
“나더러 네 돌팔이 점술을 믿으라는 거냐?”
“돌팔이라뇨? 아직 확인도 안 해보셨으면서…….”
슬라르한이 아예 헛소리 취급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앞으로도 재미있게만 여겨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일리에는 그저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지만, 슬라르한은 버릇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의 힘이 가리킨 아이가 전혀 노예답지 않은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점술가라…….
이게 과연 우연일까 싶었다.
“네 제안을 고려해 보려면 네가 나에게 어떤 일을 해줄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앞으로 저를 곁에 좀 두고 써주십시오. 제가 주인님께 행운을 가져다 드릴 테니까요.”
‘행운’이라는 단어에 슬라르한이 움찔했다.
‘불운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신에게 정말로 행운의 파랑새가 날아든 것일까.
“좋아. 기대하지.”
1차 협상 타결이었다.
* * *
수도의 사교계에는 ‘제국 제일’이라고 꼽는 몇 가지가 있었다.
꽃으로는 한여름에 피는 로사 레지나, 보석상으로는 ‘디아망’, 의상실로는 ‘마담 에스텔’이었고, 사람으로 따지자면 미녀로는 엘로르 황녀와 컬리넌 후작 영애, 교양과 품위로는 달튼 백작 부인, 소식통으로는 아틀렌 자작 부인과 롤랑 백작 부인이었다.
제국 제일의 기사는 페이스 백작, 제국 제일의 사업가는 슬로언 백작, 제국 제일의 외교관은 애버릿 자작…….
“그리고 제국 제일의 천재와 제국 제일의 미남을 고르라면 당연히 우리 클리드지.”
카시르 후작 부인은 오늘 다녀온 모임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아들 칭찬을 다시 입에 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시래도요.”
클리드는 오늘도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자신이 그런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두 살 때 글자를 읽기 시작했고, 다섯 살 때 기하학의 기초 이론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열세 살 때는 이미 제국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아무런 어려움 없이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건국 이래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게다가 한때 수도 제일의 미녀라고 소문났던 어머니를 둔 덕에 외모 역시 남들의 호감을 차고 넘치도록 살 만했다.
부드러운 밀밭 색 머리칼과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 날카로운 콧대와 섬세한 입술은 천사 같던 어린 시절 그대로 자란 듯했다.
“과찬이 아니지. 너는 우리 카시르 후작가의 자랑이다, 자랑! 허허허!”
밖에서는 과묵한 카시르 후작마저 제 처와 아들 앞에서는 한없이 팔불출이 되었다.
그러나 클리드는 부모의 애정이 영 미덥지가 않았다.
‘그래봤자 작위는 형님한테 물려주실 거면서…….’
`
그랬다. 카시르 후작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건 차남인 클리드였지만, 후계자는 그의 형 막시밀리언이었다.
후계자의 장자 우선 법칙이 없어지는 추세인데도 보수적인 카시르 후작가에서는 무조건 장자 상속을 고집했다.
형제들끼리 후계 다툼이 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였다.
‘후계 다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아서겠지.’
기존에 작위를 이어온 사람들이 다 장자였으니 자신이 후계를 이은 명분을 갈아엎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클리드로서는 당연히 이런 가풍이 불만스러웠다.
왜 제국 제일의 인재인 자신이 저보다 한참 못한 형을 가주로 모셔야 한단 말인가. 그건 가문 전체적으로 봐도 손해였다.
그의 형 막시밀리언은 여러모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머리도 평범, 얼굴도 평범, 하는 짓도 평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저와 자주 비교를 당해왔다.
차라리 형이 거기에 상처받아서 동생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라도 했다면 형을 조금이나마 존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그때마다 허허허, 하고 웃어넘기는 바보였다.
‘아니면 겁쟁이, 그도 아니라면 비겁자겠지.’
이미 후계자로 정해졌으니 더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클리드는 그게 혐오스러웠다.
발전이 없는 인간이라니, 그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원석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아, 다들 여기 계셨군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외출에서 돌아온 막시밀리언이 응접실로 들어서며 인사했다.
“오, 맥스! 널 빼고 우리끼리만 차 마시는 게 미안했는데 잘됐구나. 어서 와 앉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막시밀리언은 자연스럽게 가주의 바로 옆에 앉았다. 클리드는 절대 앉을 수 없는 자리였다.
“어딜 갔다 오는 것이냐.”
“아스토르 백작 영식과 함께 루이빌 백작 영식을 방문했습니다. 루이빌 영식이 가문의 에메랄드 광산 사업을 돕기로 해서 저희에게 자문을 구했거든요.”
“오! 그 댁 후계자도 드디어 후계 수업을 시작했구나.”
“네. 아직 어린 친구라 좀 불안했던 모양입니다만, 아스토르 영식과 함께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고 잘 달래고 왔습니다.”
“잘했다, 잘했어. 후계자들끼리 미리미리 인맥을 만들어둬야 나중에 네가 작위를 잇게 됐을 때도 도움을 받는 거다.”
카시르 후작은 크게 흡족해하며 껄껄 웃었다. 그때 클리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루이빌 백작가의 에메랄드 광산이라면 이제 매장량이 얼마 안 남았을 텐데요. 아무리 어린 후계자라지만 시험 삼아 다뤄보도록 하는 사업치고는 너무 작은데, 루비 광산 쪽을 요구하라고 제안해 보세요. 그 정도는 되어야 루이빌 백작 영식도 후계자로서의 체면이 살죠.”
클리드는 루이빌 백작가의 후계자 역시 제 형만큼 못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에게 루비 광산을 넘겼다가는 말아먹을 것 같으니까 말아먹어도 상관없는 에메랄드 광산을 맡긴 게 뻔했다.
클리드가 그걸 몰라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이런 식으로라도 무능한 그들을 비아냥대고 싶었을 뿐이다.
“하하! 그렇기야 하지만, 그 댁에서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리고 루이빌 영식이라면 곧 루비 광산 일도 맡아볼 수 있을 거야.”
막시밀리언은 클리드의 조롱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순한 미소만 지었다.
클리드는 그것도 꼴 보기 싫었다.
차라리 ‘네놈이 뭘 안다고 그러냐.’라며 화라도 냈다면 온갖 지식과 화려한 언변으로 잘근잘근 짓밟아 줄 수 있을 텐데, 그의 형은 늘 이런 식으로 회피하기 바빴다.
‘하긴, 날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다시 생각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빌어먹을 ‘장자 우선 상속 주의’는 없어져야만 한다.
그는 죽어도 저 머저리 같은 형에게 고개 숙이며 살 수 없었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나을 일이었다.
‘나야말로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절대 자작 따위로 살지는 않겠어. 형을 없애 버려서라도…….’
클리드는 형에게 ‘하긴, 그렇겠죠.’라며 해사하게 웃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날카롭게 칼을 갈았다.
* * *
벤티악 성에 아이르델의 목 아랫부분 시신이 도착한 건 11월 초입이었다.
반드시 나머지 시체까지 찾고 장례식을 올리겠다는 슬라르한의 의지 때문에 방부 처리되어 보관됐던 아이르델의 머리는 드디어 나머지 시신과 한 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동안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던 황실의 변명이 믿기지 않게도 목 아래의 시신 역시 방부 처리되어 있었다.
여름에 서남쪽 분쟁지역의 산야에 버려졌던 시체라면 아직도 이렇게 멀쩡할 리 없건만.
‘지독하네. 아무리 그래도 동복동생인데 이렇게까지…….’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단지 저보다 더 뛰어나고, 저보다 더 인기 있고, 언제 반역자가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죽이다니.
일리에는 전생의 제 아비이자 이 커다란 제국의 황제인 그 사람을 다시 한번 ‘열등한 폭군’이라고 생각했다.
제 아버지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슬라르한의 호박색 눈동자는 무심해 보였지만,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처럼 강인한 그의 등은 어둡고 진득한 슬픔을 흘리고 있었다.
제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는 공개적으로 복수를 다짐할 수조차 없었다.
그 대상이 황제라서, 복수를 천명하는 순간 반역자가 되는 거라서, 바로 그게 황제가 원하는 일이라서…….
“타리크. 곧바로 장례식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타리크는 일리에에게 종종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을 보내고는 했지만 슬라르한에게는 상당히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슬라르한도 그를 신뢰하는지, 겨우 찾은 아이르델의 시신을 타리크에게 맡겼다.
그리고 허례허식 없는 벤티악의 성격대로 장례식은 소박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 엘룬이시여, 여기 낡고 지친 영혼이 엘룬의 품으로 돌아가나이다. 언제나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돌보았고 가족에게 사랑으로 임했으며 스스로에게는 엄격했던 아이르델 벤티악은 일생 신실한 엘룬의 자녀로 최선을 다했나이다. 부디 그가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벤티악 영지의 신전에서 온 신관이 서글픈 얼굴로 기도하자 벤티악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까맣게 몰려든 영지민들 중에서도 눈가를 훔치는 사람이 보였다.
그러니 죽은 아이르델이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돌보았다는 신관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신관이 한참 더 망자의 영면을 기원하는 동안 일리에는 신관 옆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슬라르한을 흘끗거렸다.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고 슬라르한 역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섰을 뿐이었지만, 일리에는 그 풍경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황제의 동생이라면 평생 떵떵거리며 살아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였다.
그런데 아이르델은 어떻게 죽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도 못했고 시체도 겨우 돌려받았으며 황족 그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아이르델의 시신을 가져온 자가 황제를 대리한다고 했던가.
‘이런 줄 알았으면 나라도 조문을 보냈을 텐데.’
황제는 ‘벤티악 공작가에서 조촐한 장례식을 원했으니, 괜히 가거나 뭘 보내서 슬픈 사람들의 일을 더 늘리지 말라.’라고 했다.
그래서 전생의 릴리에트도 그런 줄로만 알고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나중에 황궁에서 만났을 때 짧게 위로의 말을 전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이런 장례식을 치르고 올라온 줄 알았다면 그 정도로 가볍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황실도 초상집 분위기 되겠네.’
얼마 뒤면 황제가 황후와 황비들을 모아두고 대축연에서 발표할 내용을 미리 알려줄 시기였다.
그때 황후와 황비들은 황제가 불임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황제가 제 자식들이든 조카들이든 서로 싸우다 죽어버리길 바란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랬으니 얼마 뒤의 황후궁과 황비궁은 이 장례식장보다 우중충해졌으면 우중충해졌지, 절대 밝은 분위기가 될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자신밖에 모르던 황제가 제 동생이나 조카들에게 애정을 품었을 리는 만무했다.
아이르델의 죽음에 대한 사과 역시 끝끝내 없었다.
그래서 처음 슬라르한이 황궁에 왔을 때, 릴리에트는 그의 얼굴에서 반항심이나 울분 같은 것을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고요했다. 표면이 잔잔한, 깊고 검은 호수 같았달까.
그래서 그가 별 감정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대적하기 어렵겠다고 여겼고.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그 감정을 억누르는 데 익숙한 사람일 뿐이었다.
“이제 마지막 길을 떠나는 아이르델 벤티악을 위해 모두 작별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멍하니 전생의 슬라르한을 떠올리던 일리에는 보조 신관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때 마침 얼다 만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기도를 올리려던 사람들도 잠깐 멈칫하더니 회한에 찬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마 다들 아이르델의 영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을 것이다.
짧은 묵념이 끝나고 벤티악 가의 충성스러운 신하들과 성에서 오래 일한 가신들이 차례로 관 위에 야생화를 던지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직 꽃이 있는 시기라 다행이야.”
“그러게. 한겨울이었다면 전나무 가지나 꺾어 던져야 했을지도 모르지. 그건 너무…… 너무 슬프잖아.”
초라한 야생화 한두 송이를 쥔 영지민 몇몇이 코를 훌쩍이며 속삭였다.
꽃을 던진 이들은 그 앞에 묵묵히 선 슬라르한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거나 고개를 조아리며 위로를 건넸다.
물론 슬라르한의 표정은 마치 그 무엇도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수 없다는 듯이 단단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내내 아이르델의 관 위에 박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라면 그의 슬픔 또한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짧은 위로의 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내 구덩이 위로 흙을 덮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어서 빨리 끝내야 했다.
처억, 처억, 젖은 흙 떨어지는 소리가 일리에의 귀에도 스산하게 들렸다.
다들 마찬가지인지, 모두 입을 다문 채 점점 메워지고 있는 구덩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일리에의 등줄기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타고 흘렀다. 황실에서 아이르델의 장례식을 노리고 군사를 보내거나 자객을 보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려니 또 잠잠했다.
‘분명 들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일리에는 잠시 후 그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너였냐.”
근처 수풀 사이에서 까맣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생김새가 정말 예뻤지만 비에 젖어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리 와, 야옹아.”
겨울철에 얼어 죽는 동물이 한둘은 아니겠지만, 길을 배회하는 개나 고양이는 추위에 더욱 취약할 터였다.
장례식이 열리는 중이라 더 그랬는지 몰라도, 일리에는 왠지 누군가 더 죽는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게 고작 고양이 한 마리의 일이더라도 말이다.
솔직히, 선뜻 다가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까만 고양이는 일리에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달려와 쪼그리고 있는 그녀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곧 네 다리를 몸 아래 숨기고 앉아 계속 떨면서 고르릉거렸다.
고양이의 발바닥이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이렇게나 사람을 잘 따르는 걸 보면 분명 주인이 있는 고양이일 텐데.’
주인을 찾아주면 좋겠지만 고양이에게는 주인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장례식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이, 너! 거기서 뭘 하는 거냐!”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하인 중 하나가 일리에를 향해 윽박질렀다.
안 그래도 벤티악 공작이 묘하게 싸고도는 노예의 소문은 이미 벤티악 성내에 쫘악 퍼진 상태였다.
제국에서 가장 천하다는 루벨파스트 출신 계집애가 성 안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좋은 음식을 먹으며 체력 훈련이나 하고 있으니, 하인들 눈에는 얼마나 밉살맞아 보였을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듣지 않아도 빤했지만, 뭐가 됐든 일리에는 그들에게 ‘이방인’이자 ‘굴러온 돌’일 뿐이었다.
거기다 노예의 인이 없으니 분명 도망칠 꿍꿍이도 품고 있다고 여길 터였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여기 고양이가 있어서요.”
“그래서?”
“고양이가 얼어 죽을 것 같아서 잠깐만 안아주려고…….”
“노예 주제에 어딜 네 멋대로 돌아다녀? 이게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대지를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는 있었지만 하인의 목소리는 꽤 멀리까지 퍼졌다.
어쩌면 그는 타리크가 눈치채 줬으면 하고 목소리를 돋웠는지 모른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저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있는 이 노예를 벌했으면 싶어서.
일리에는 잠깐 고민했다.
‘그냥 몇 대 맞고 아예 드러누울까? 아니면 고양이를 내던지고 고개를 조아려야 하나?’
그러나 그녀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슬라르한이 이쪽의 소란을 금세 눈치채고 다가왔다.
“거기. 무슨 소란이냐?”
하인 역시 슬라르한이 직접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심하게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아, 그, 그게, 이 노예가, 무, 무단이탈을 해서…….”
일리에는 대열에서 고작 서너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벗어났을 뿐이었다.
심지어 대열도 많이 흐트러져서, 대열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무단이탈’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꺼낸 것을 보면 하인은 일리에를 해코지하려고 꽤 오랫동안 별러온 모양이었다.
하인의 고자질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슬라르한이 일리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리에는 그때까지도 무릎에 까만 고양이를 얹은 상태였다. 빵 덩어리 모양으로 앉아 가르릉거리는 고양이를 내려놓기란 참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
“……고양이?”
“이 고양이가 주변을 배회하고 있어서…… 혹시라도 추위에 얼어 죽을까 봐서요…….”
슬라르한의 시선이 아주 잠깐 고양이를 스쳤다가 다시 일리에의 얼굴로 향했다.
괜히 초조해진 일리에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고양이도 장례식에 조문을 온 것 같은데, 선대 공작 각하께서도 이 작은 고양이가 얼어 죽기를 바라시지는 않을 겁니다. 장례식도 거의 끝났던 터라 잠깐만 안아주려고 했습니다. 사람을 잘 따르는 것을 보니 누군가 키우던 고양이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주인을 찾아줘야…….”
“벤티악에서는 아무도 검은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예?”
“검은 고양이는 재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예에? 그저 털 색깔이 검을 뿐인데 그게 무슨…….”
“그러게.”
일리에는 그가 어쩌라는 것인지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슬라르한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그러니 너라도 데려가서 기르던지.”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그 정도로 놀랐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대신 고양이 먹이는 네가 알아서 구해라.”
“네! 그, 그러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안 그래도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던 차였다. 아직은 애들러 부인 말고는 아무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고, 노예 주제에 다른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양이라도 기르면 벤티악에서의 노예 생활이 한결 즐거워질 것 같았다.
이렇게 되니 일리에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하인이 좀 고마워졌다.
지금 보니 표정도 똥 씹은 것 같은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