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3/32)

3장

“세상에, 클리드! 라리에트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에요. 코흘리개 어린애를 데리고 뭘 하시려고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엘로르가 까르르 웃었다.

클리드는 엘로르에 대한 생각을 수정했다.

엘로르는 그저 노는 것이나 좋아하고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 여자가 아니었다.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는 앞으로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엘로르가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안 그래도 어떻게 접근하나 했는데, 이렇게 나와주니 좀 얼떨떨하군.’

클리드는 순간적으로 느꼈던 껄끄러움을 무시하고 마음 편하게 엘로르의 손을 잡기로 했다.

“이것이 정말 저를 떠보시려는 말씀이 아니라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말씀이시겠죠?”

엘로르는 이번에도 역시 그의 속내를 금방 파악하고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 손짓해 종이와 펜 등을 가져오게 했다.

시녀가 가져온 종이에는 이미 계약서가 작성되어 있었다.

“계약 조건은 간단해요. 당신과 내가 황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파트너가 되는 거죠. 당신은 지혜를 빌려주세요. 나는 당신의 체스 말이 되어 최선을 다할게요. 내가 황태녀가 되면 곧바로 당신과 결혼하고, 내가 황제가 된 뒤에는 적당한 이유를 핑계 대고 점점 당신을 대리로 내세울 거예요. 그리고 모두가 당신의 통치에 익숙해질 무렵, 당신에게 그 자리를 양위하겠어요.”

“……완벽하군요.”

“하나만 더 약속해줘요. 계약에 의한 결혼이라 하더라도 난 내 남편이 다른 여자를 끼고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나 역시 당신 이외의 남자를 곁에 두지 않을 테니까.”

엘로르의 녹안이 반짝거렸다. 어딘지 수줍은 듯, 혹은, 기대를 품은 듯.

클리드는 엘로르가 저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뻔뻔한 태도를 가장하고 먼저 제안을 해왔지만, 그 기저에는 분명 애정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건 클리드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전하처럼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는데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요.”

“……그럴까요?”

엘로르의 대답이 순간 싸늘해졌지만 이내 방긋 웃는 얼굴로 가려져 클리드는 그 작은 이상 신호를 놓치고 말았다.

계약서를 찬찬히 읽어보고 맨 아래 자신의 사인까지 적어 넣은 클리드는 자신 몫의 계약서를 품에 잘 집어넣은 후 시녀가 다시 따라준 차를 마셨다.

생각지 않게 일이 너무 쉬워졌지만, 사실 진짜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제 후보들의 첫 시험대는…….”

“아마 한 달 뒤에 있을 사냥 대회겠죠.”

“이런, 전하께는 굳이 제가 없어도 되겠는걸요.”

“말 끊어서 미안해요. 토라지지 말고 얼른 더 얘기해 줘요. 그날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드디어 클리드를 손에 넣은 엘로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 * *

“무슨 일이든 사람들이 제일 인상 깊게 느끼는 것은 맨 처음과 맨 마지막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이번 황위 경쟁의 첫 무대인 사냥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전생의 클리드는 일리에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대축연 며칠 뒤 은밀히 찾아와 릴리에트를 황제로 만들어주겠노라고 속삭인 또 며칠 뒤의 이야기였다.

모두가 인정하는 제국 제일의 천재가 제 발로 다가와 참모가 되어주겠다고 하니, 자신이 대단한 행운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릴리에트는 고작해야 갓 열일곱 살이 된 소녀였으니까.

그의 멋진 외모와 설득력 있는 언변은 릴리에트의 경계심을 순식간에 허물고 말았다.

‘그 자식이 예상했던 그대로였겠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부츠의 끈을 매는 손길에 힘이 실렸다.

그런 비열한 인간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황제가 될 수 없었던 걸까 생각해봤지만, 아마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막판에 클리드까지 고전하게 한 슬라르한을 생각하면…….

‘하지만 그 대단했던 슬라르한에게도 행운이 좀 필요하다고.’

모두가 이상적인 황제감이라 손꼽고, 마지막에는 무섭도록 릴리에트를 추격해 온 슬라르한이지만, 초반에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꽤 고생했다.

그랬던 그가 제대로 주목받게 된 것은 릴리에트 덕분이었다.

황제의 오랜 탄압을 받아온 벤티악 가문의 후계자에게 아무도 손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아직 분별없이 날뛰던 릴리에트가 슬라르한의 손을 이끌고 빛으로 인도했달까.

하지만 이번 생에는 릴리에트라는 황녀가 없으니, 일리에가 다른 방법으로 그를 눈에 띄게 만들어줘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내가 도와주는 건 마찬가지네? 넌 진짜 나한테 감사해야 해, 르한.’

일리에는 혼자 속으로 낄낄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 후보 경쟁의 첫 시험대라는 사냥 대회에서 릴리에트는 1등을 했었다.

특히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대리로 내보낸 다른 황녀들과는 달리 직접 사냥에 참가해 1등을 했다는 게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게 다 꼼수였지.’

아무리 릴리에트가 활과 검을 잘 썼다고는 해도 소드 마스터에 가까운 기사들만큼 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야 겨우 하급 기사들과 검을 겨룰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클리드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낸 묘안이 바로 동물에게 진정 효과를 나타내는 분말을 살포하는 것이었다.

사람에게도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아서, 그 분말을 흡입한 다른 기사들 역시 몸이 조금 무거워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것 역시 클리드가 노린 부분이었다.

“약간 컨디션이 안 좋다 싶을 정도일 겁니다. 자신이 무슨 약에 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예요. 당연히 평소보다 실력이 떨어지겠지요.”

남들의 컨디션을 저조하게 만들고, 제 앞에 있는 동물들을 느리게 만들어놓은 뒤, 각성제를 미리 먹은 릴리에트가 호쾌하게 사냥감을 쏘아 맞히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먼저 그의 아이디어를 빼앗아 써먹을 생각이었다.

클리드가 이번에도 그 방법을 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똑같은 수법을 쓰더라도 다른 기사들보다야 슬라르한이 훨씬 많이 잡을 것이다.

“좋아! 가자, 녹스!”

일리에는 녹스를 데리고 저택 뒤편으로 펼쳐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동물 진정제는 몇 가지 말린 허브와 특정 약초의 진액을 말려 만든 가루를 한데 섞어야 했다.

약초의 진액은 열심히 채취해 봤자 얼마 나오지 않았기에, 한 달 뒤에 있을 사냥 대회를 위해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오늘따라 밖에 나가고 싶은지 계속 창문을 열려고 시도하던 녹스는 숲에 오니 저 혼자 여기 펄쩍, 저기 펄쩍 뛰어다녔다.

“멀리 가면 안 돼!”

녹스는 정말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일리에 주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땅을 파거나 곤충을 쫓거나 잡초를 뜯어 먹어보거나 하며 놀았다.

일리에는 풀숲을 헤치며 줄기가 쭉쭉 솟아나기 시작한 허브를 뿌리까지 캐어 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캤을까, 갑자기 녹스가 야옹거리기 시작했다.

“응? 왜 그래, 녹스?”

녹스는 빨간 열매가 달린 가시덤불 근처에서 그 열매를 따지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이거? 이게 먹고 싶은 거야?”

시험 삼아 열매 하나를 따서 녹스의 코앞에 갖다 댔더니 녹스는 앵두만 한 빨간 열매를 아작아작 씹다가 퉤 뱉었다. 보기에는 맛있어 보였는데 제 취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 잠깐…….”

녹스는 그사이 팔랑거리는 나비를 쫓아 다른 쪽으로 뛰어갔지만, 일리에는 녹스가 씹다 뱉은 열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반투명한 과육 안에 든 빨간 씨.

‘이거, 아무리 봐도 그거 같은데.’

진정제가 있으면 각성제도 있는 법.

전생에 클리드는 일리에에게 꼭 저렇게 생긴 빨간 씨앗을 주며 집중이 흐트러질 때마다 하나씩 씹어 먹으라고 했었다.

저걸 먹고 나면 심장이 약간 빠르게 뛰면서 정신이 또렷해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혹시 정신이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게 아닌지 조사해 봤지만, 과량을 복용하지만 않으면 딱히 문제도 없었다.

그 후로 일리에는 일하다가 피곤해질 때마다 이 씨앗을 찾아 씹곤 했다.

혹시 생김새만 비슷하고 전혀 다른 씨앗일 수도 있어서 일리에는 빨간 씨앗을 빼내 깨물어보았다.

‘딱 그거잖아!’

맛도 똑같았고, 가슴이 서서히 빨리 뛰는 증상도 똑같았다. 또렷해지는 정신 역시도.

클리드는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약이라며 돈도 꽤 많이 뜯어갔었는데 숲만 조금 뒤져도 찾을 수 있는 열매의 씨앗이었다니.

“망할 사기꾼 자식!”

일리에는 클리드를 향한 온갖 욕설을 짓씹으며 가시덤불에 달린 빨간 열매를 땄다. 덤불의 크기에 비해 열매의 개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슬라르한이 쓰기에는 충분한 양일 터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채집치고는 아주 수확이 좋다며 뿌듯해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 누구냐!”

“예? 저, 일리에입니다!”

“그게 누군지 내가 알 게 뭐야!”

“벤티악 공작 각하의 심부름꾼입니다.”

‘공작의 심부름꾼’이라는 말에, 멀리서 험악하게 소리를 질러대던 사내가 일리에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아, 소문의 그 노예구만.”

“아, 하하! 네, 아마도…….”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냐? 도망치려고 했지?”

“그럴 리가요! 자유시간이라서 약초 좀 캐고 있었습니다. 타리크 님께도 허락을 받았습니다.”

일리에는 타리크에게서 받은 허가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인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허가증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일리에를 살피는 것 같았다.

“딱히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면 뭐, 기술이 좋은가?”

“예?”

“하룻밤에 얼마 받냐?”

“예? 하룻밤에 뭘 얼마를 받아요?”

“노예들이 몸 팔아서 용돈 벌이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얼마냐? 공작님이 아끼신다는 계집이라니, 나도 맛이나 좀 보게.”

일리에는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는 혀로 아랫입술을 핥으며 바지춤을 붙잡고 있었다.

“뭐? 이 미친놈이!”

마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사내의 더러운 수작에,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욕부터 내뱉었다.

“노예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욕설이야? 단단히 버릇을 고쳐줘야겠구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내가 일리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일리에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낚아채고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어헉! 쿨럭! 아이고, 이년이!”

“이년이고, 저년이고, 지금 어디서 더러운 눈깔을 부라려? 딸만 한 여자애한테 그게 할 소리냐?”

일리에가 쥔 나무 막대기가 하인의 몸을 마구잡이로 두들겨댔다. 그게 검이었으면 하인은 다져놓은 고깃덩이가 됐을 것이다.

“으아악! 사람 살려! 노예가 사람을 친다! 사람 살려!”

사내의 비명에 멀리서 몇몇 인영이 더 나타났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미쳤나?”

일리에는 다른 하인들이 저에게 달려들 때까지도 바닥에 넘어진 그 하인을 때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우악스럽게 잡아떼어내는 하인들의 힘을 일리에 혼자 이겨낼 수는 없었다.

일리에는 하인들에게 몇 대나 맞고 저택으로 질질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일리에는 약초를 채집한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일리에를 저택 뒤쪽 공터까지 끌고 와 바닥에 패대기친 하인들은 일리에에게 침을 뱉으며 발길질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일리에를 고깝게 보던 하녀들까지 덩달아 가세해 일리에를 쥐어뜯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려온 베델이 그들을 떼어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애를 때려요?”

“저리 비켜! 이 건방진 노예년, 한번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그만둬요!”

베델이 사내들로부터 일리에를 지키려고 했지만, 흥분한 하인들은 베델에게까지 주먹질을 해가며 쫓아냈다.

누군가에게 맞고 바닥에 뒹굴던 베델은 벌떡 일어나 기사들의 연무장 쪽으로 내달렸다.

이 시간이면 슬라르한과 타리크가 대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일리에가 구타당하는 공터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타리크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서늘한 표정의 슬라르한도 서 있었다.

“아이고, 디넬 자작님!”

“헉! 주, 주인님까지!”

베델이 제발 좀 와서 말려달라기에 오기는 했지만, 타리크와 슬라르한은 하인들끼리 그저 시비가 좀 붙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모두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바닥에 널브러진 이가 다른 하인들보다 조그만 체구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두 사람 모두의 시선이 흉흉해졌다.

“벤티악 저택 사용인들 수준이 이 정도였나?”

싸늘한 슬라르한의 목소리에 주위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곁에 선 타리크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주동자처럼 보이는 이에게 턱짓하며 명령했다.

“무슨 일인지 상세하게 고해라.”

“그, 이, 이 노예가 저를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그래서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주려고…….”

‘노예’라는 단어에 멈칫한 슬라르한은 타리크가 말릴 새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이 저택에서도 노예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쓰러진 노예 쪽으로 걸어가 사람들의 침과 흙으로 더러워진 작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 모습에, 일리에를 구타하는 데 손을 보탰던 이들이 슬그머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타리크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일리에.”

“끄으, 아야야, 아파…….”

언뜻 건조하게 들리는 슬라르한의 목소리에 일리에가 신음을 흘렸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일리에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네가 저 하인을 때린 게 사실이냐?”

“예…….”

일리에의 순순한 대답에 하인들의 얼굴은 눈에 띄게 편해졌다.

그러나 일리에는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슬라르한 벤티악을 잘 알았다.

이 남자는 결벽적일 만큼 이런 범죄를 역겨워했다. 그러니 낱낱이 일러바칠 생각이었다.

“왜 그랬지?”

“저보고 몸을 팔라고 해서요.”

“……뭐?”

“공작님이 아끼신다는 노예, 자기도 한번 맛봐야겠다던데요. 거절했더니 저한테 달려들길래, 바닥에 있던 나뭇가지를 들어 때렸습니다.”

“달려들어……? 겁탈하려 했다는 말이냐?”

“몸을 팔라던 인간이 달려들어 할 짓이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인님. 노예는 겁탈당해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제가…… 잘못한 겁니까?”

슬라르한의 고개가 서서히 그 하인 쪽으로 돌아갔다.

“자네. 이 아이가 몇 살로 보이나.”

슬라르한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아, 뭐, 한 열……여섯쯤…….”

“그래, 그쯤 됐다. 올해 막 열일곱이 됐지. 크게 앓았던 탓에 몸이 아직도 회복 중이고. 그런데 자네는 몇 살이지?”

“마, 마흔둘입니다.”

“마흔둘? 제 딸만 한 어린애를 겁탈하려 들었군그래. 그게 인간이 할 짓인가?”

그 말에 하인이 억울하다는 듯 변명했다.

“저, 저는 그저, 용돈 벌이를 제안했을 뿐입니다! 노예들이 그런 식으로 용돈 벌이를 한다는 건 유명한 얘깁니다. 그런데 욕을 하길래…….”

“그래서 겁탈하려 들었다는 말인가?”

타리크는 슬라르한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하인은 곧 이 저택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슬라르한은 곁에 짐승을 키우지 않으니까.

“각하. 사용인들은 제가 확실히 교육해 놓겠습니다.”

“굳이 일 두 번 할 것 없네, 타리크. 내가 직접 말하지. 집사는 어디 있나! 당장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을 집합시켜!”

방금까지 조용한 것에 가깝던 슬라르한의 목소리가 저택을 쩌렁쩌렁 울렸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슬라르한이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노 어린 슬라르한의 목소리에 저택의 집사와 하녀장이 부리나케 뛰어 내려왔고, 저택의 모든 사용인이 저택의 홀에 모여 벌벌 떨었다.

핀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조용한 홀에 슬라르한의 싸늘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벤티악 성과 벤티악 저택 내에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따위 저급한 범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이 폭행 사건의 주범은 당장 내쫓고, 폭행에 가담한 인물들은 가담 정도에 따라 회초리질 후 석 달간 급여의 30%를 깎아라. 그게 싫다면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도록. 물론 추천장은 써줄 수 없다. 이따위 더러운 범죄를 저지르고도 벤티악의 이름을 팔아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일리에의 폭행에 가담했던 하인과 하녀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지만 슬라르한은 처벌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분노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 벤티악 저택의 모든 이들은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보통 아끼는 게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곁에서 지켜본 베델의 눈빛은 미묘하게 빛났다.

* * *

한바탕 저택을 뒤집어엎은 슬라르한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뒤따르던 타리크가 주변을 흘끗 둘러본 뒤 조용히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가 보기에도 슬라르한은 전에 없이 불쾌해 보였다.

하지만 이건 어느 정도 슬라르한이 초래한 일이기도 했다. 이미 주인에게 몸을 내어준 노예란 얼마나 쉽고 만만해 보였겠는가.

차라리 그가 일리에를 제 침실에서라도 안았더라면 아무도 그녀를 건드릴 생각 따위는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연무장의 더러운 창고 안에서 몰래 안았다는 것은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단순한 욕구 해소용으로나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슬라르한에게도 그런 욕구가 있었다는 게 무엇보다 놀라운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타리크는 한숨을 푹 내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만, 각하께서도 아랫것들에게 오해의 여지를 주셨습니다.”

“오해의 여지?”

“거의 매일 저녁, 연무장 창고에서 그 아이를 만나고 계시지요?”

“알고 있었나?”

“그럼 그걸 언제까지 비밀로 하시려고 했습니까?”

“그건…… 자네가 불편하게 생각할까 봐 그랬네.”

타리크는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당연히 불편하다. 공작이나 되는 제 주군이 하필이면 노예 계집애를 품다니.

하지만 이대로는 슬라르한의 위신만 더 떨어질 뿐이었다.

“그 아이를 생각하신다면 차라리 좀, 공식적인 장소에서 하십시오.”

“공식적인 장소?”

“예. 왜 하필 창고입니까? 누가 봐도 이상하잖습니까. 그런 데서 각하와 그 아이가 함께한다는 소문이 들리니까 다들 그 노예 아이를 하찮게 여기게 된 겁니다. 아니, 그 아이는 둘째치고서라도, 각하의 체통을 생각하셔야지요.”

“으음…… 내 딴에는 자네나 다른 기사들의 기분도 배려한답시고 그랬던 건데, 그게 문제가 됐었군. 알았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네.”

슬라르한이 왜 ‘기사’들과 자신만 콕 집어 배려한다는 건지 좀 의아했지만 타리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타리크를 내보낸 슬라르한은 타리크에게 연무장 사용을 허락(?)받았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일리에의 방으로 향했다.

창고 뒤편의 작은 공터에서 검술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확실히 좀 이상해 보이긴 했을 것이다.

그게 왜 일리에를 하찮게 여길 거리가 되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사이, 일리에는 말수가 적은 하녀의 도움으로 몸을 씻고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 후 슬라르한이 들어서자 하녀는 조용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몸은 좀 어떠냐.”

인사치레로 묻기는 했으나 한눈에 보기에도 일리에의 팔다리에는 울긋불긋한 멍과 생채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일리에도 슬라르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손으로 팔의 상처를 가렸다.

“괘,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대답은 오히려 슬라르한의 한숨을 불러올 뿐이었다.

“등을 좀 봐도 되겠나?”

“등이요?”

“상처만 확인하겠다.”

“예, 뭐…….”

일리에의 허락을 받은 슬라르한은 조심스럽게 일리에의 셔츠를 들어 그녀의 등을 확인했다.

피가 맺힌 상처는 없었지만, 하인들이 발길질해 댄 자국과 하녀들이 꼬집은 자국이 시커멓게 멍으로 남아 있었다.

“이래서는 똑바로 누워서 잘 수도 없겠군.”

“이 정도는 금방 낫습니다.”

“쯧.”

그의 혀 차는 소리에 일리에의 어깨가 움찔 튀었지만, 슬라르한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겨우 사람 구실을 하게 살려놨더니, 또 루벨파스트에서 데려왔을 때처럼 멍투성이가 되었다.

그게 왠지 굉장히 화가 났다.

이 맹랑한 꼬마는 주인을 안심시킨답시고 금방 낫는다는 소리나 하고 있지만, 이 정도 상처는 아무리 빨리 나아도 보름 이상은 갈 터였다. 멍이 다 없어지려면 한 달까지도 갈 테고.

그는 옆에 놓인 세숫대야에서 손을 깨끗이 씻더니 작은 칼을 꺼내 왼손 집게손가락에 작게 상처를 내어 일리에의 입술 앞에 갖다 댔다.

“빨아.”

“……예?”

“피. 빨라고.”

“아, 아니, 아닙니다! 주, 주인님의 피를 또 마실 정도의 상처는 아닌…….”

“흘러내린다.”

아닌 게 아니라 상처에서 몽글 솟아오른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리에는 당황해서 슬라르한의 집게손가락을 입에 텁 물었고, 그 순간 슬라르한의 어깨가 경직했다.

“아, 아프세요? 그러니까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프지 않다. 좀 더 빨아.”

일리에는 결국 슬라르한을 못 이기고 그의 집게손가락 끝을 쪽쪽 빨았다.

상처가 작아 피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일리에의 상처도 목숨에 지장이 있을 만큼 심한 게 아니었기에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요.”

“……그렇군.”

슬라르한의 피를 빤 그 잠깐 사이에 일리에의 몸에 있던 멍이 거의 다 사라졌다.

‘진짜 놀랍기는 하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황제가 슬라르한의 피를 다 짜내려고 할지도 모르겠어. 사비 족도 죄다 잡아들이겠지.’

일리에가 제 몸을 살피며 놀라워하는 사이, 슬라르한은 점점 작아지는 집게손가락의 상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일리에가 빨기 편할 것 같아서 집게손가락을 내민 것뿐인데, 그게 일리에의 입 안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은 굉장히 이상했다.

따뜻하고, 축축하고, 말랑말랑하고, 꿈틀거리고…….

사람의 입 안이니 당연한 감촉인데도 명치 안쪽이 지끈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하긴, 타인이 내 몸을 빠는데 이상한 게 당연하지.’

슬라르한은 집게손가락에서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게 좀 아쉽다고 느꼈다.

아까의 그 이상한 기분을 기억할 만한 흔적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지만, 왠지 또 느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프세요?”

일리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슬라르한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당분간은 훈련을 쉬고 다음 주부터는 연무장에서 검술을 봐주마.”

“예? 기, 기사님들이 싫어하실 텐데요.”

“타리크가 차라리 공식적인 장소를 이용하라고 하더군. 창고 뒤편에서 널 가르쳤던 게 잘못 소문난 모양이다. 타리크가 저택 기사단장보다 윗선이니까, 그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그런가요? 의외네요. 타리크 님은 절대 제가 연무장 못 쓰게 하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당분간은 푹 쉬어라.”

“네. 저기…… 오늘, 감사했습니다.”

“내가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탓이지. 네가 고생했다.”

그렇게, 모두의 오해가 기묘하게 아귀 맞아 들어간 밤이 저물었다.

그리고 며칠 뒤 오후, 타리크는 연무장 한가운데서 일리에와 대련하며 검술을 봐주고 있는 슬라르한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졸도할 뻔했다.

“가, 각하!”

“음? 무슨 일인가?”

“이,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노예를 각하께서 직접 가르치시다니요! 게다가 연무장에서……!”

“뭐? 자네가 그래도 된다며?”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저번에. 일리에를 창고 뒤에서 가르친 게 그날 일의 원인이라고 했잖나. 차라리 공식적인 장소에서 하라며.”

이미 연무장 주변에서 경악하고 있던 기사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타리크를 쳐다보았다.

설마 꼬장꼬장한 타리크가 정말 이걸 허락했는지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의아하긴 슬라르한도 마찬가지였다.

타리크가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고, 벌써 지난주 일을 잊어버릴 만한 나이도 아닌데 제가 한 말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구니 말이다.

“자, 잠깐만…… 그럼, 각하께서 창고에서 이 노예와 하시던 일이…….”

“정확히 말하면 창고가 아니라 창고 뒤편 공터에서 이 녀석의 검술을 좀 봐줬네. 꽤 재능이 있고, 앞으로 이 녀석도 제 한 몸 지킬 능력은 필요할 테니까.”

“검술……이라고요…….”

당황과 경악에 물든 타리크의 얼굴을 본 일리에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이 슬라르한의 여자라는 소문이 났는지도.

“주인님…… 아무래도 그게, 요상한 소문으로 와전된 것 같은데요.”

“요상한……?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그……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도 참 민망합니다만, 저기, 주, 주인님께서 저랑…… 창고 안에서 뭐, 그, 거시기한…….”

일리에가 민망함 때문에 목덜미를 자꾸 쓸며 간신히 말을 이어가는 동안, 슬라르한도 드디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그리고 그는 무시무시한 눈길로 타리크를 노려보았다.

“타리크! 나를 도대체 뭐로 보고 그런 상상을 한 건가? 내가 이 꼬맹이를 데리고 뭘 어째? 그럼, 나더러 공식적인 장소에서 하라던 게……! 타리크 디넬!!”

슬라르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목에 핏대가 섰다.

그제야 타리크 외의 기사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오해했는지 깨달았다.

“아, 아니, 그게…… 각하께서 저 아이를 창고에서 데리고 나오는 걸 목격했다는 녀석들이 있어서…… 심지어 저 아이는 울고 있었다고 했고요.”

“세상에! 그런 추잡한 짓을 하리라고 여겨질 정도로 내 신망이 땅에 떨어졌단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각하.”

타리크도, 주변 기사들도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생각해 보면 참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황실의 피를 이은 대 벤티악 공작이 무엇이 아쉬워 볼품도 없는 노예 계집애를 안는단 말인가. 그것도 어둡고 더러운 창고 안에서!

하지만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왠지 억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슬라르한이 저 노예 아이를 이상하리만치 아낀 것은 사실 아닌가.

그게 너무 의아하고 별스러운 일이라서, 말도 안 되는 헛소문조차 믿어버리게 될 정도였다.

슬라르한이 분노에 찬 숨을 간신히 가라앉힐 즈음, 타리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저 아이의 검술이라면 기사단의 종기사 하나를 시켜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이 아이의 수준은 종기사를 뛰어넘네. 중급 기사 정도를 붙여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아이를 가르치겠다고 나설 중급 기사는 없을 게 아닌가.”

“예? 종기사 수준을 넘는다고요?”

“자네가 한 번 대련해 보겠나?”

슬라르한의 제안에 타리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떨떠름하기는 일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슬라르한은 절대 사감 없이 검술만 봐주었지만, 타리크의 지도에는 왠지 사심이 잔뜩 담겨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일리에 앞에서 슬라르한이 건네준 목검을 쥐고 선 타리크는 제 앞의 쥐새끼처럼 작은 계집애를 보고 심하게 회의를 느꼈다. 이런 무지렁이와 대련하려고 수련한 검이 아닌데…….

“일리에가 선공해. 시작!”

타리크가 어떤 혼란을 느끼는지 관심도 없는 슬라르한은 이내 대련 시작을 알렸고, 타리크도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검을 고쳐 잡았다.

전쟁에서는 애먼 화살로도 사람이 죽는다. 그러니 쥐새끼 앞이라 하더라도 넋 놓고 있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마주 선 일리에의 눈빛을 본 순간, 타리크는 자신이 마주한 것이 고작 쥐새끼는 아님을 깨달았다.

‘허어, 이것 봐라?’

일리에의 잿빛 눈동자에는 이제껏 실실대던 웃음기도 없었고, 겁먹은 기색도 없었다.

분명 타리크를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의 눈동자는 진지하게 그의 약점을 찾고 있었다.

‘자세도 좋고, 눈빛도 좋아. 초심자 주제에 나한테 질 생각은 조금도 없어. 아! 이게 각하께서 말씀하시던 이 녀석의 기세라는 건가.’

기사들에게는 기세가 정말 중요했다.

하지만 일리에의 기세는 여태 타리크가 봐왔던 일반 기사들의 그것과는 어딘지 달랐다.

일리에의 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 같은 게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려한 빛을 내며 일렁이는 뜨거운 열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생의 에너지 같은 것 말이다.

도무지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물러서지 않는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타리크의 심장이 두근댔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대감과 흥분감이었다.

“와라, 꼬맹아.”

“대련 중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뒤끝 없으신 거 맞죠?”

“건방진 소릴 하는군.”

그리고 그 순간 일리에가 타리크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다!’

물론 스피어 마스터인 그의 눈에는 움직임이 빤히 보였지만, 저 정도의 속도는 웬만한 하급 기사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

따악!

타리크의 옆을 스쳐 지나갔던 일리에가 그대로 그의 오른쪽 허벅지 뒤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금세 타리크의 검에 막혔다.

하지만 일리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휙 몸을 돌려 다시 그의 왼쪽 옆구리를 노렸다.

타리크도 곧바로 공격해 들어올 줄은 몰랐는지 검으로 막지는 못하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상대가 몸을 피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기회였다. 일리에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둘렀다.

목, 가슴, 왼쪽 정강이, 배, 오른 어깨, 막히고, 다시 목, 왼팔, 오른 허벅지…….

쉴 새 없는 공격과 방어에 주변에 섰던 기사들의 자세마저 서서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슬라르한이 제 노예를 귀여워해서 띄워주는 건 줄 알았더니, 정말 저 노예 계집애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으앗!”

“손목 힘이 아니라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버텨!”

타리크의 검을 막은 채 버티는 일리에를 향해 타리크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으으윽!”

일리에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둘의 체격 차이는 어른과 아이 수준이라서 어떻게 봐도 일리에가 곧 질 게 뻔한 싸움이었다.

그래도 타리크를 상대로 이 정도나 버텼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박수나 좀 쳐줄 요량으로 손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일리에가 옆으로 구르며 타리크의 얼굴을 향해 모래를 뿌렸다.

“이얍!”

“너 이 녀석!”

하지만 종기사가 됐던 아홉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의 지금까지, 타리크 역시 온갖 싸움을 다 겪어본 기사였다. 그 정도 얕은 수에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물론 일리에도 그가 호락호락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노린 것은 거리 벌리기였다.

‘전생의 타리크 디넬한테 딱 하나, 약점이 있었는데 말이지.’

일리에는 모래를 뿌린 비겁한 행위 때문에 타리크가 버럭 소리 지른 순간, 화들짝 놀라며 바들바들 떨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무뚝뚝하게 기사도나 달달 외운 인간이라 그런지, 의외로 여자가 우는 거에 약했단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매섭게 목검을 내리치려던 타리크가 멈칫했다.

늘 맹랑하고 건방지던 노예가 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물까지 글썽인 게 놀랍고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어린’ ‘여자’를 상대로 이렇게 몰아붙인 게 자신이 고수해 온 기사도에 위배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빈틈을 노렸던 일리에는 곧바로 자신의 목검을 그의 목에 겨누며 가냘픈 표정을 싹 지웠다.

“제가 이겼네요, 타리크 님.”

“너, 비겁하게!”

일리에는 당황과 분노로 얼룩진 타리크에게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목이 잘린 다음 비겁하다고 비난해 봐야 아무 소용 없지 않을까요?”

타리크의 얼굴이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

박수를 치려던 기사들은 입을 쩍 벌린 채 타리크와 일리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타리크에게 지금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이제 곧 저 노예는 타리크를 능멸한 죄로 얻어터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리에는 검을 거두며 엄청난 죄라도 지은 것처럼 눈썹을 잔뜩 내려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댔다.

“죄송합니다, 타리크 님. 제가 이런 것밖에 배워먹질 못해서…… 비겁하다고 혼내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은 조금도 죄송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리크가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타리크는 이런 약점 때문에 다시는 창을 들지 못하게 됐으니까.

‘뭐, 찌른 게 나이긴 했지만.’

그때도 타리크는 검을 들고 설치는 4황녀 릴리에트를 우습게 여겼다.

그리고 서로 죽이라고 등 떠밀려 나간 북부 카스틸로 잔당 퇴치 작전에서 저에게 어깨를 찔렸다.

평소에 그가 ‘클리드의 꼭두각시’라고 비아냥대던 황녀의 눈물 어린 눈동자에 머뭇거려서…….

적이었을 땐 편하게 이용한 약점이었지만, 이번엔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번 생에서는 같은 편인 만큼, 타리크 네놈이 그 약점을 얼른 깨달아줘야 해.’

릴리에트라는 황녀가 존재하지 않는 이번 생에서, 클리드가 선택할 황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엘로르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때쯤의 엘로르는 클리드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니 그의 접근을 절대 거부하지 않을 테고.

엘로르가 직접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 눈부신 미모에도 타리크가 냉정함을 잃지 않도록 미리 교육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노예의 존재에 과민한 타리크이니, 건방진 노예 계집에게 이런 식으로 당할 뻔했다는 기억을 쉽게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

“멋진 대련이었네.”

옆에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슬라르한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정체되어 있던 공기를 흔들었다.

그가 박수 치기 시작하자 곁에서 구경하던 기사들도 마지못해 손뼉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타리크의 심기가 불편해질까 봐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타리크는 아까 일리에의 속삭임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진지한 얼굴이 되어 바로 섰다.

그리고 앞에 선 일리에에게 가볍게 고개 숙였다.

벤티악 가문 내 최고의 기사가 일개 노예 계집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가르침은 절대로 잊지 않으마.”

“……어디까지나 주인님을 위한 거니까요.”

“당연하지.”

그리고 타리크가 고개를 돌려 슬라르한에게 말했다.

“말씀대로 보통 수준은 넘는 실력이군요. 차라리 기사들 훈련 시간에 같이 훈련을 받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제안에 구경하던 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에?’ 하며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요새 훈련이 좀 느슨해진 경향이 있더군요. 다들 이 녀석보다 뒤떨어지기는 죽기보다 싫을 테니, 아마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기사나 병사들이 이 녀석을 괴롭힐 여지는 없나?”

그러자 타리크가 황당해하고 있는 기사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낮게 으름장을 놨다.

“그런 놈이 있다면, 글쎄요, 저와 각하의 명령에 불복한 것으로 간주하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기로 하죠.”

기사들은 타리크가 노예 아이에게 진 불똥이 왜 저희에게 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타리크와 슬라르한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덕분에 일리에는 다음날부터 하급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슬라르한의 뒤를 따라가던 타리크가 툭 내뱉었다.

“저 녀석…… 뒤를 좀 캐볼까요?”

“자네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가 보지?”

“전부터 그렇긴 했습니다만, 신경줄이 굵은 것과 검술을 저 정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귀족 출신이 아닐까 싶더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귀족들이나 알 법한 지식도 그렇고, 검술 실력도 그렇고…… 대놓고 다 드러내는 걸 보면 첩자나 암살자 같지는 않습니다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군요.”

거기에는 슬라르한도 동의했다. 일리에는 정말이지 겪으면 겪을수록 신기했다.

그 속이 투명하게 다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존재라니…….

“본인이 과거를 숨기고 싶은 건지, 정말 기억을 잃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루벨파스트 이전의 기억이 없다던데…… 혹시 모르니까 정보 길드를 수배해 봐.”

“알겠습니다.”

타리크까지 일리에의 어떤 면을 인정하는 것 같아 슬라르한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왜 자신이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다.

‘노리개 취급을 한 것도 아니면 도대체 뭐냔 말이야…….’

연무장 근처에서 바닥을 비질하는 척하고 있었던 베델은 멀어져 가는 슬라르한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태 슬라르한 벤티악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는 늘 귀족과 선량한 인간의 상식선에서 움직였다.

낭비하는 시간 없이 살았고, 술, 여자, 도박, 변태적인 취미 같은 것은 그게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쓸데없이 튀는 짓을 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베델이었다면 한 달도 못 가 갑갑하다고 뛰쳐나올 삶이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모범적이고 지루하게 살던 슬라르한이, 저 노예를 데리고 온 다음부터 뭔가 좀 바뀌었다.

‘설마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리에를 데리고 온 다음부터였어.’

일리에가 조금만 더 예쁘거나 참했다면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리에의 밝은 성격이 좋아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꽃 같은 귀족 영애들에게 익숙할 슬라르한의 눈에 찰 것 같지는 않은 외모였다.

물론 못생긴 건 아니었다.

인상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잘 뜯어보면 못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슬라르한도 귀족인 이상 귀족들의 평균과 비슷한 기준을 갖고 있을 테고, 그 기준에 부합하기에는 좀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물론 외모보다는 내면을 중시한다는 사람도 있기는 했으나, 베델은 사내들의 그 말만큼은 절대 믿지 않았다.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뒷골목에서 자라고,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볼 수 있는 정보 길드를 운영하면서 생긴 몇 가지 고정관념 중 하나였다.

남자들 앞에서 젊은 여자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첫 질문이 ‘예뻐?’가 아닌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슬라르한의 분위기가 변한 이유를 눈치채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일리에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한 뒤로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벤티악 성에서도, 수도의 저택에서도 일리에는 꾸준히 슬라르한의 노리개나 정부가 아닌지 의심받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남녀 관계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슬라르한이 창고에서 노예를 건드렸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게 아니라 검술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도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엄청나게 뛰어난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왜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가르치냐고.’

그냥 심심풀이일까? 아니면 저 노예 소녀에게 뭔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베델은 창고에 목검을 갖다 놓고 주변 기사들에게 굽실대며 나오는 일리에를 곁눈질하며 몇 가지 가정을 더 곱씹어보았다.

하지만 어떤 가정도 명쾌하게 설명되지는 않았다.

‘아직은 둘의 관계를 섣불리 판단할 때가 아니야. 좀 더 지켜보자.’

베델은 자신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일리에에게 마주 웃어 보이면서도 차갑게 눈을 빛냈다.

* * *

롤랑 백작은 50대의 키 크고 마른 사내였다.

책에나 파묻혀 살던 그는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 황녀 마그렛과 결혼했고, 형제나 방계의 큰 반대 없이 가문의 작위를 이었다.

머리숱만큼이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온화한 편이긴 했으나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아주 드물었다.

얼핏 보면 눈에 띄지도 않는 소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와 30년이나 같이 살고 있는 마그렛은 그가 절대 실패하는 쪽에 걸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주 현명했고 시류를 잘 읽었으며 굉장히 신중했다.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보기에 슬라르한은 어때요?”

마그렛이 며칠간이나 묵혀뒀던 질문을 꺼냈다.

대축연 이래 귀족 사회의 화두는 단연 ‘어느 줄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직 황제 후보들의 능력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으니 다들 눈치만 살피는 중이지만, 조만간 사냥 대회가 끝나고 나면 서서히 움직임이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마그렛은 그보다 일찍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슬라르한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선택지였다. 그가 황제가 되지 못하더라도 양아들로 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롤랑 백작은 역시나 신중했다.

“벤티악 공작은 여러모로 훌륭한 사람이죠.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기사이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명석하다고 소문도 자자했고. 게다가 아주 남자답게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여러모로 이상적인 황제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당신 생각도 그렇죠?”

“하지만 그를 지지할 것인지는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합니다.”

“네? 왜요?”

롤랑 백작은 예나 지금이나 순진하고 귀여운 제 아내를 보며 조금 웃었다.

그녀가 슬라르한에게 마음이 기운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슬라르한은 절대 그들에게 기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슬라르한을 지지하길 주저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벤티악 공작에게는 제왕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두 가지가 아주 부족하거든요.”

“부족한 것? 그게 뭔데요?”

“운과 기세. 그게 부족합니다.”

“네? 뭐예요, 그게? 고작 운이 좀 없다고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마그렛. 능력이 출중한 것만 가지고는 소국의 왕조차 될 수 없습니다. 운과 기세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사람이 모여들고, 그래야 힘이 생깁니다. 사실 그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 정도란 말이에요?”

“네. 사실 저는 바로 그 운과 기세가 없었기에 벤티악 공작가가 그만큼이나 기울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게 있었다면 일찍이 황좌를 차지하고도 남았겠죠.”

마그렛이 흐음, 하고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슬라르한에게도 운이 생기려는 것 같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우리 광산에서 특별한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건 극비잖아요. 그런데도 슬라르한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먼저 다가왔어요. 심지어 그날은 내가 가장 눈에 띄지 않을 날이었는데 말이에요. 아마 우연이겠죠. 그리고 그게 바로 운이라는 거 아니겠어요?”

롤랑 백작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은 그 자체로 굉장한 재산이었다. 광산에서 캐낸 다이아몬드의 품질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말, 광산 일을 맡아보는 가신이 급서를 보내어 롤랑 백작의 방문을 요청했다. 다이아몬드 광산 깊은 곳에서 더 놀라운 무언가가 발견된 것이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것을 확인한 롤랑 백작은 마법 스크롤까지 써가며 관계자들의 입을 단속했다.

이 사실을 아는 외부인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슬라르한은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게다가 그동안 교류도 거의 없었던 마그렛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정말로 ‘운’일까? 아니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우연’일까.

“당신 말씀도 일리가 있군요. 어디 한번 지켜보도록 하죠.”

롤랑 백작의 머릿속에서는 슬라르한 벤티악이라는 선택지가 어제보다 조금 더 밝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 *

사냥 대회가 다가왔다.

그동안 일리에는 체력 훈련과 검술 연습을 하는 틈틈이 약초를 채집해 부지런히 동물용 진정제와 말에게 먹일 각성제를 만들었다.

인간용 각성제와는 달리 말에게 먹일 동물용 각성제는 진정제 분말 약간에 말놀래기 풀이라는 잡초 가루를 섞는 것으로 간단히 만들 수 있었다.

발굽이 있는 동물에게만 통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어차피 사냥 대회 때는 슬라르한과 그가 모는 말만 제정신을 차리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진정제의 양이었다. 전생에는 클리드가 하인들을 풀어 진정제로 쓸 약초를 채집했기에 꽤 많은 양을 만들 수 있었지만, 일리에 혼자 만드는 양은 아무래도 그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일찌감치 만들기 시작했는데도 이것밖에 안 되네.’

분말 한 톨도 아까워 탈탈 털었지만 화살촉에 끼울 진정제 분말 주머니를 열 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슬라르한이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할 거야.’

전생의 그는 아쉽게도 짐승 한 마리 잡지 못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활쏘기에도 능하니, 제대로 기회만 주어진다면 사냥 대회의 1등을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다.

“팔찌도 완성! 이 정도면 슬라르한이 사냥 대회를 아주 그냥 씹어 삼키겠지. 이건 몇 페르소를 쳐달라고 할까?”

녹스에게 물었지만 녹스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제 몸단장에만 열을 올렸다.

“각성제 씨앗을 찾는 데는 녹스, 네 역할이 컸으니까, 슬라르한이 이 일을 비싸게 쳐주면 그날 수프에 있는 고기는 다 너 줄게.”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녹스는 그저 크게 하품을 할 뿐이었지만, 일리에는 제 머리 위로 금화가 짤랑짤랑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사냥 대회의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날, 모든 귀족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사냥 대회가 열렸다.

황실 마법사가 예언한 대로 날씨 역시 쾌청했다.

사냥 대회가 열리는 황실 소유의 티그리스 숲에는 오늘을 위해 이미 여러 마리의 짐승이 풀려 있었고, 숲 초입의 너른 잔디밭에는 새벽부터 하인들이 설치해 놓은 차양이며 천막이 늘어섰다.

늦잠을 자는 게 미덕인 줄 아는 귀족들도 이날만큼은 아침 일찍부터 단장하고 티그리스 숲의 행사장으로 속속 몰려왔다.

벤티악 공작가의 천막은 다른 가문의 천막과는 달리 레이스 식탁보도, 화병도, 리본도 보이지 않았다.

한가운데 투박한 테이블이 놓이고 그 주변에 의자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하녀와 하인들이 잔뜩 따라붙지도 않았다. 슬라르한, 호위로 따라나선 타리크와 네 명의 기사, 그리고 시중을 들 베델과 일리에가 전부였다.

사실 일리에도 자기가 이 자리까지 따라오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오늘 아침에 진정제 주머니와 각성제를 넘겨주고 넌지시 힌트만 줄 생각이었는데, 일리에가 ‘드디어 사냥 대회네요.’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슬라르한이 ‘따라와도 좋다.’라며 데리고 와버린 것이었다.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슬라르한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근히 고집이 세단 말이지…….’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등에다 대고 입을 삐죽거렸다.

황실 사냥터라고 노예를 데려오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은 이미 노예를 부리는 데 익숙했고, 잘생기거나 예쁜 노예를 장식품처럼 데리고 다니는 귀족들도 있었다.

일리에가 꺼렸던 것은 사냥 대회에 가면 전생의 원수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내가 과연 그것들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10년이나 불태워 이제는 재밖에 남지 않은 감정이라지만, 솔직히 다시 그 얼굴을 마주하고도 노예 소녀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일리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은 자신의 감정보다 슬라르한의 승리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귀족들이 화창한 봄 날씨를 만끽하며 다과를 즐기는 동안, 슬라르한은 자신의 장비를 확인하고 가죽 갑옷을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일리에는 주변을 정리하는 척하며 가만히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베델이 자리를 비우고, 타리크와 다른 기사들이 주변을 확인하려고 잠깐 나간 순간 슬라르한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이거 받으세요.”

일리에가 열심히 만든 것들을 슬라르한에게 내밀자 그가 이게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에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했다.

“이 동그란 주머니 안에는 동물 진정제 가루가 들어있습니다. 이걸 화살촉에 끼우고 동물들이 많은 일대의 나무 위쪽으로 쏘세요. 그럼 주머니가 터지면서 진정제 가루가 주변으로 흩날릴 테고, 주변 동물들이 조금 느려질 겁니다. 그때를 놓치지 말고 사냥하세요. 이건 말에게 미리 먹일 각성제입니다. 주인님의 말까지 느려지면 안 되니까요.”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제 손바닥에 내려놓는 주머니를 바라보며 일리에의 빠른 설명을 듣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난 거냐?”

“제가 만들었습니다.”

“네가……?”

“네. 진짜 잠잘 시간까지 줄여가며 한 달 동안 열심히 만든 거니까 제 정성을 봐서라도 써주시면 안 될까요?”

슬라르한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니 의심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그의 의심을 모르는 척하며 사냥터 쪽을 살피다가 슬라르한의 귀에다 대고 또 속삭였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절대 믿지 마세요. 주인님 귀에까지 들리는 말에는 다 의도가 담겼을 테니까요.”

일리에를 바라보는 슬라르한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너무 건방져 보였나 싶어 일리에는 헤헤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주인님께서 어련히 잘 대처하시겠지만요.”

“어떤 종류의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나?”

“어? 하, 한번 점을 봐 드릴까요? 자아, 보자, 보자, 우리 주인님께 다가올 사특한 술수가 있나, 없나……?”

일리에는 자신이 점점 사기꾼을 넘어 사이비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두 손으로 슬라르한의 얼굴 주변을 허우적대길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에게 뻗칠 마수를 걷어낼 수만 있다면 제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흐음…… 주인님. 말씀드리기 대단히 죄송하지만, 아마……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가족?”

슬라르한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들은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일리에의 얘기가 이번에도 들어맞을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부모를 미끼 삼는다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알았다. 기억해 두지.”

슬라르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황제가 행차할 시간이 되었는지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슬라르한이 몸을 일으켜 천막을 나서려고 하자 일리에는 퍼뜩 생각난 것처럼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또 뭐냐?”

“명주실로 엮어 만든 팔찐데요, 여기 이 빨간 씨앗들 보이시죠? 피곤하시거나 집중이 흐트러지실 때 하나씩 뽑아 씹어 드십시오. 정신이 맑아질 거예요.”

슬라르한은 제 손에 쥐어진 조잡한 실 팔찌를 가만히 뜯어보았다.

색실도 없어서 표백도 하지 않은 명주실을 쓴 것 같았다.

솜씨도 엉성하고 군데군데 손때가 묻기도 해서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일리에도 민망했는지 뺨을 긁적이며 웅얼댔다.

“최선을 다해 만들기는 했는데, 제가 이런 쪽은 영 젬병이라서…….”

슬라르한은 그 팔찌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일리에에게 건넸다.

일리에는 그가 거절하는 줄 알고 실망할 뻔했지만 슬라르한은 불쑥 제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내가 직접 매듭짓기는 힘들 것 같군.”

“아! 그, 그러네요! 잠시만요!”

일리에는 그의 왼쪽 손목에 실 팔찌를 두르고 끄트머리를 단단히 매듭지었다.

막상 채우고 보니 슬라르한의 두껍고 단단한 손목이나 그가 두른 고급 옷감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오, 오늘만 쓰고 버리세요. 그냥 비상약이다, 생각하시고…… 아 참, 제가 보니까 숲 오른편에 사냥감이 많을 것 같네요. 동물들의 기운이 느껴져요.”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슬라르한의 시선에 일리에가 민망해질 즈음, 곧 황제가 도착했다는 팡파르 소리가 울렸다.

진득하던 슬라르한의 시선도 요란한 팡파르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쉬고 있어라.”

짧은 인사를 남긴 슬라르한은 검과 활을 챙기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기사들이 모두 다 정렬하자 드디어 등장한 황제는 찬란한 봄 햇살에 저 혼자 번쩍거렸다.

그는 허리를 깊게 숙여 예를 올리는 귀족들에게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연단에 올라가 간단한 축사를 읊었다.

일리에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황제 폐하가 저렇게 생겼었지…… 잊고 있었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지만 그리웠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남보다 못한 사이였으니까.

사실 황후와 황비들이 외도를 저지른 데에는 황제의 책임도 일부 있었다.

저 자신만을 사랑하고 연민하던 황제는 미식이나 유흥, 권력 놀음은 좋아했지만, 여자는 그다지 찾지 않았다.

심지어 제 황후와 황비들에게 가는 날조차 드물었다.

그러니 남편에 대한 정이 생길 수 없었다.

게다가 황제와 동침할 날도 적은데 황손이 들어서지 않으니 다들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몰래 애인을 만들었다.

초반에는 황제와 닮은 사람을 찾는 노력이라도 했지만, 나중에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하나, 둘씩 아비 모를 황손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손들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적통 황태자라고 여겼던 1황자 렌셔가 특히 심했다던가.

일리에가 잠깐 회상에 젖는 사이, 출발하기 위해 말 곁에 정렬한 기사들에게 아가씨들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사냥 대회의 무운을 비는 손수건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아마 저 아가씨들도 오늘만을 기다리며 몇 날 며칠 손수건에 수만 놓았을 것이다.

‘슬라르한 녀석은 몇 개나 받고 올까?’

일리에는 그 무뚝뚝한 슬라르한이 영애들의 손수건을 어떤 표정으로 받을까 상상하며 혼자 실실 웃었다.

그러나 일리에의 기대와는 다르게 슬라르한은 저에게 내밀어진 손수건을 전부 거절하고 있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답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손수건을 받기만 해달라는 영애들에게 슬라르한은 야멸찰 정도로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미신을 믿지도 않았고, 말을 타고 다니다가 흘릴지도 모르는 것을 따로 챙기고 싶지도 않았으며 어린 영애들에게 괜히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리는데 문득 제 손목에 달린 팔찌가 눈에 띄었다.

“최선을 다해 만들기는 했는데, 제가 이런 쪽은 젬병이라서…….”

늘 뻔뻔한 녀석이라 제 어설픈 솜씨를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다.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의외였고.

요새 기사들의 훈련 시간에 참여하느라 시간도 없고 꽤 지쳤을 텐데 그 진정제 주머니며 이 팔찌는 언제 만들었을까.

팔찌를 만드는 데 쓴 명주실은 또 얼마나 굽실대 가며 얻었을까.

아, 그러고 보니 일리에가 하인들에게 폭행당했던 날, 그녀가 끝까지 끌어안고 있던 가방에 잡풀 같은 게 잔뜩 들어 있었다. 그게 오늘의 물건들을 만드는 데 쓰인 약초였을까.

왜 그런 생고생을 해가며 누가 시키지도 않은 물건들을 만들었을까.

‘특이한 녀석이야.’

무운이나 승리를 기원한다는 손수건의 효험은 전혀 믿지 않았지만, 각성제 역할을 한다는 열매가 달린 팔찌는 그래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꾸 보다 보니 팔찌가 꽤 귀여운 것 같기도 했고.

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분주한 영애들 사이로 붉은 머리칼의 매력적인 아가씨가 나타났다.

분명 아까 다른 영애들이 손수건을 건넸다가 거절당한 걸 봤을 텐데도 그녀는 슬라르한을 향해 당당하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검을 장식하는 데 쓰는 매듭이었는데 붉은 비단실을 아낌없이 써서 술이 아주 풍성하니 화려했다.

“무운이 깃들기를 기원할게요, 각하.”

“컬리넌 후작 영애시군요.”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엔시아 컬리넌이었다.

컬리넌 후작가의 야심만만한 고명딸이자 ‘여름 장미’라는 별명을 가진 화려한 미모의 영애.

하지만 슬라르한은 그녀의 선물도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선물은 모두 거절하고 있습니다.”

“왜요?”

“다 받아드릴 수가 없으니, 차라리 모두 거절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아니죠. 아무나 다 받아줄 수 없으니 더더욱 잘 가려서 받으셔야 하는 거죠.”

그녀는 슬라르한의 허락도 얻지 않고 자신이 만든 매듭의 고리를 벌려 슬라르한의 검 손잡이에 걸었다.

“컬리넌 후작가의 것은 받아두시는 게 좋아요, 각하. 답례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엔시아는 요염한 미소를 생긋 지어 보인 뒤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 떠났다.

그녀가 왜 저렇게 당당한지는 그녀의 성(姓)을 떠올리면 알 수 있었다.

컬리넌 후작가.

중도파 귀족들의 수장인 만큼 황위 싸움에서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 모든 후보가 눈독 들이는 가문이기도 할 테고.

‘힘을 빌리고 싶다면 어디 한번 재롱을 부려보라는 소리군.’

벤티악 공작가가 일반적인 공작가답기만 했어도 이런 건방진 제안을 받았을 리 없었다.

후작가의 위신에도 못 미칠 만큼 허물어진 벤티악의 이름이 서러웠다.

“타리크!”

슬라르한이 부르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리크가 다가왔다.

“자네 검을 주게.”

“예? 각하의 검은 어쩌시고요?”

슬라르한은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검을 풀어 그에게 건넨 뒤 타리크의 투박한 철검을 받았다.

새로 검을 찬 슬라르한은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투박한 명주실 팔찌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최고급 비단실로 만든 찰랑거리고 화려한 술 장식보다 이 손때 묻은 팔찌 쪽이 훨씬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는 불쾌한 마음을 떨치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황제가 연단에 다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용맹한 기사들이여, 준비되었는가? 그럼, 사냥 대회의 개막을 선언한다!”

황제가 커다란 금빛 깃발을 휘두르며 이벤트의 시작을 알렸다.

말에 탄 기사들은 일제히 ‘우어어!’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좋은 자리를 뺏길세라 서둘러 숲으로 달려갔다.

슬라르한도 가볍게 말의 배를 차며 숲속으로 진입했다.

바깥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숲속은 어딘지 고요했다.

‘귀찮긴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다지 열심히 할 생각은 들지 않던 사냥 대회였다.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귀족들 앞에서 광대가 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리에가 팔찌를 손목에 채워준 순간부터 조금 해볼 만한 기분이 들었다.

‘그 녀석은 몸집도 크지 않으니 여우 한 마리 정도면 털가죽 조끼를 만들 수 있겠지.’

사냥감의 가죽을 벗겨 일리에에게 작은 선물을 해줄 상상을 했더니 기분이 훨씬 더 좋아졌다.

그래서 의욕을 갖고 일리에가 말한 대로 숲의 오른쪽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벤티악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사내가 슬라르한을 부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누군지 먼저 밝혀라.”

“저는…… 전 벤티악 공작 각하 암살단의 일원이었습니다.”

낯모를 사내의 놀라운 고백에 슬라르한이 곧바로 말고삐를 잡아 세웠다.

“방금…… 뭐라고 했나?”

“죄송합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각하. 하지만 저희도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간 것입니다. 제국의 그 누구도 아이르델 벤티악 각하를 해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슬라르한의 숨이 거칠어지고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황제가 벌인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버지를 직접 죽인 일원을 이렇게 빨리 눈앞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목이라도 베어달라고 온 건가?”

“그렇게 해서라도 용서를 빌고 싶지만, 제가 여기서 죽는다면 아마…… 각하께 일이 불리하게 돌아갈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암살단의 존재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럼 날 조롱하려고 불렀나?”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지는 못하겠지만, 아이르델 각하의 유품이라도 전해드리기 위해 각하를 찾아뵌 겁니다.”

“유품……?”

“저희가 아이르델 각하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그분의 유품 몇 가지를 황제 폐하 몰래 빼돌렸습니다. 이 숲의 북쪽으로 쭉 가시면 커다란 떡갈나무가 보일 겁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가시면 작은 동굴이 있습니다. 그 안에 큰 돌덩이가 있을 텐데, 그 아래 숨겨놓았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물론입니다. 공작 부인의 초상화가 든 로켓과 벤티악 공작임을 나타내는 브로치, 작은 주머니칼과 손수건입니다.”

그가 말한 물건들은 분명 아버지가 시찰을 떠날 때 몸에 지녔던 것들이며 돌려받은 시신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도 제 파트너에 의해 감시받는 중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서둘러 멀리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 게 꼭,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아버지의 유품이라니……!’

특히 어머니의 초상화가 든 로켓은 아버지가 씻을 때 빼고는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물건이었다.

그것 없이 아버지를 묻어드려야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가.

그 유품을 찾을 수만 있다면 사냥 대회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슬라르한은 숲의 북쪽으로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막 박차를 가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절대 믿지 마세요. 주인님 귀에까지 들리는 말에는 다 의도가 담겼을 테니까요.”

일리에의 목소리가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이야기가 아마 ‘가족’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했던가.

‘설마…….’

슬라르한은 말의 몸통을 꽉 조인 허벅지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만약 아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사냥 대회가 끝나고 동굴을 뒤져도 될 일이었다.

정말로 그들이 자신을 위해 숨겨둔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반대로 거짓이라면……?

슬라르한은 있지도 않은 물건을 찾아 뒤지며 사냥도 실패하고 더 극렬한 분노와 죄책감에 몸을 떨다 오늘 하루를 보낼 터였다.

어쩌면 거기에 ‘현’ 벤티악 공작 암살단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자신이 왜 정체도 모를 남자의 말을 덥석 믿으려고 했는지 의아했다.

‘일리에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난 곧바로 북쪽으로 향했을 테지.’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촘촘한 덫을 펼쳐놓고 저를 불러들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리에는 아주 작은 조언으로 저를 간신히 구해내고 있는 것 같았고.

물론 북쪽 동굴 어딘가에 아버지의 유품이 진짜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찾아가는 게 지금이어서는 안 되었다.

이 행사가 끝나고 하인들이 사냥감을 회수하러 다닐 때, 그때 타리크와 기사들을 보내봐야 할 것 같았다.

“그 녀석, 예지력이 있기는 한 모양이군.”

북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대던 슬라르한은 혼란을 갈무리한 얼굴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를 태운 말이 향한 쪽은 일리에의 조언대로 숲의 오른쪽이었다.

벌써 여기저기서 사냥에 성공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슬라르한도 활에 살을 걸고 시위를 당겨 그대로 쏘았다.

도망치려던 여우 한 마리가 캥,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한 발. 이번엔 토끼였다.

순식간에 두 마리를 잡은 슬라르한은 오른편 숲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짐승들을 여기에만 풀어놓은 건가 싶을 정도로 사냥감이 많았다.

일리에의 예상대로 그는 훌륭한 사수이기도 했기에, 그가 쏘는 족족 사슴이며 여우가 픽픽 쓰러졌다.

그런데 순간, 어딘지 이상한 여우 한 마리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보통 짐승이라면 사람을 보고 도망가기 바쁠 텐데, 그 여우는 잠에서 덜 깬 듯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슬라르한은 일단 그 여우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쪽인가……?’

그는 여우가 걸어 나온 쪽을 향해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평소에는 빠릿빠릿 반응하던 말의 고개가 왠지 천천히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 역시도 눈이 뻑뻑해지며 힘이 조금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웬 기사 하나가 신나게 활을 쏘며 짐승을 잡는 게 보였다.

그가 쏘는 방향에 있는 짐승들은 하나같이 아까 그 여우처럼 행동이 느렸다.

‘일리에가 설명한 약의 효과와 똑같잖아……?’

진정제 가루를 주변에 퍼트린 후 행동이 느려진 동물을 잡으라던 일리에의 당부가 머릿속에 생생했다.

슬라르한은 주머니에서 동물용 각성제라던 주머니를 찾아 말에게 먹이고, 저 역시도 팔찌에 있는 빨간 씨앗 하나를 꺼내 씹었다.

씨앗은 새콤한 맛을 내며 목구멍으로 넘어갔고, 잠시 후, 아까 느꼈던 피로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신기하군. 그러고 보니 일리에는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슬라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에에게 꼼수를 듣기는 했지만 그걸 직접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겁하게 꼼수까지 쓰면서 1등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쪽이 미리 판을 깔아준 걸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활의 시위를 당겨 연속으로 화살을 쏘았다.

진정제를 주변에 푼 기사가 활을 쏘는 속도는 슬라르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덕분에 주변 사냥감의 대부분을 슬라르한이 잡게 되었다.

그 기사는 뭔가 억울했던지 버럭 화를 냈다.

“이, 이러는 게 어딨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제가 다 잡은 사냥감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아직 화살이 박히기 전이었네만.”

“아니, 그러니까, 이 근처의 사냥감은 다 제 거란 말입니다!”

“재미있는 얘길 하는군. 미리 이름표라도 붙여놨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문제없겠군. 그렇지?”

기사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말을 돌려 다른 쪽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거리를 두고 그를 몰래 뒤쫓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일리에가 만들어준 것과 똑같은 모양의 것을 화살촉에 끼우고 근처 나무의 위쪽으로 쏘아 흰 가루를 주변에 퍼트렸다.

‘어느 가문의 기사지?’

슬라르한은 아까 그가 잡았던 동물 사체에 다가가 화살 깃을 확인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사체에 박힌 화살의 깃을 보고 사냥감의 주인을 확인했다. 참가한 모든 가문의 깃이 서로 다 달랐기 때문이다.

슬라르한은 황위 후보들의 깃만큼은 다 외운 상태였다.

‘분홍색 거위 깃털이라…… 분명 엘로르 전하의 기사인 것 같은데…….’

황위 후보 중 남자들은 자신이 직접 사냥에 참가했지만 황녀들은 다 자신의 호위 기사를 대리로 내보냈다.

그리고 이 크고 화려한 분홍색 거위 깃털은 착각의 여지 없이 3황녀 엘로르의 것이었다.

그는 다시 말에 올라타 엘로르의 기사를 뒤쫓았다.

슬라르한은 저쪽의 비밀을 알고, 저쪽은 슬라르한이 눈치챘다는 걸 모를 테니 꽤 편안하고 즐거운 사냥이 될 것 같았다.

* * *

기사들이 숲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숲 초입의 너른 잔디밭에는 우아한 현악기의 선율이 흐르고 맛있는 냄새가 떠다녔다.

벤티악 가문의 천막에도 황실에서 내린 음식이 도착했다.

갓 구운 빵과 촉촉하게 구워진 닭고기, 콩포트, 포도주 같은 것들이었다.

“어이, 꼬맹이. 너도 좀 먹어라.”

“감사합니다. 그런데 베델 님은 어디 가셨나요? 식사하셔야 할 텐데…….”

“그 녀석은 아는 하인들과 인사 좀 나누고 오겠다고 나갔다. 아마 밖에서 먹겠지. 오늘 여기서 굶는 놈은 없을 테니까.”

“아, 그렇구나. 그럼 잘 먹겠습니다.”

연무장에서의 대련 이후로 타리크는 미묘하게 친절해졌다.

오늘 타리크와 함께 온 기사 중 한 명도 훈련 때 얼굴을 익힌 사람이라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기사들이 노예와 같은 테이블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리에는 작은 접시에다 빵과 닭고기, 콩포트를 조금 받아다가 그들과 조금 떨어진 바닥에 앉아 야금야금 먹었다.

이 사냥 대회의 기억은 일리에에게도 생생했다.

전생에서 슬라르한은 이 사냥 대회에서 꼴등을 했다. 소드 마스터란 사람이 단 한 마리의 사냥감도 잡지 못한 것이다.

그건 일부러 안 잡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릴리에트는 그가 왜 빈손으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있었다.

‘진짜 나쁘잖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를 아버지 유품이라는 미끼로 꼬여내 죽이려 하다니.’

릴리에트는 클리드가 준 진정제 분말을 펑펑 터트리며 신나게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슬라르한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당시에는 슬라르한을 꼬여낸 핑계가 아이르델의 유품이었던 것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황위 후보자 한 명을 복면 쓴 여러 명이 공격하고 있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야! 너희들 뭐야!”

릴리에트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꽥 소리 질렀다.

지원군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 암살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슬라르한은 그 틈을 타 몇 명에게 더 부상을 입혔다.

릴리에트도 슬라르한에게 덤벼들려는 암살자를 공격해 쫓아냈다.

사실 그때도 암살자들의 수가 더 많아 그들이 마음먹고 덤벼들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빠르게 철수했다.

슬라르한이 그들을 뒤쫓지 않기에 릴리에트도 더 나서지는 않았다.

“괜찮습니까, 벤티악 공작?”

“……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리에트 전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쟤네들은 정체가 뭐예요?”

“이 근처에 제 아버지의 유품이 숨겨져 있다고 해서 왔더니, 아버지의 유품 대신 저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는 의외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욕보셨네요. 사냥 대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얼른 잡으세요.”

“……먼저 가보십시오, 전하.”

“혹시 어디 다쳤어요?”

“아닙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더 이상의 참견을 거부한다는 듯 시선을 피하는 그에게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릴리에트는 돌아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슬라르한이 당한 일은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의 사냥 대회 축하연에 가서야 그 일의 배후가 황후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클리드가 알려준 것이었다.

축하연에서는 슬라르한이 한 마리도 잡지 않은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황제는 슬라르한이 이번 사냥 대회를 전혀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며 언짢아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그저 ‘죄송합니다.’라고만 할 뿐이었다.

릴리에트는 그가 죽을 뻔하고도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그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뜸 소리쳤다.

“이상하네요. 아까 분명 사냥하는 모습을 봤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화살이 아니라 검으로 잡고 계셨구나! 죽인 다음에라도 화살을 꽂아놓지 그러셨어요, 벤티악 공작!”

뜬금없는 소리에 다들 릴리에트를 뒤돌아보았다.

사냥 대회에서 예상치 못하게 1등을 차지한 황녀가 왜 슬라르한을 두둔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릴리에트는 슬라르한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저 그가 아무런 죄도 없이 집중적으로 공격당하는 게 아주 부당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슬라르한이 검으로 사냥을 하고 있었다고? 뭘 잡고 있었기에 활이 아닌 검을 썼느냐? 사냥터 안에는 작은 짐승만 풀어놓으라 일렀거늘.”

황제가 예의 그 음험한 눈초리로 슬라르한과 릴리에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슬라르한도 놀랐는지 릴리에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암사슴보다야 좀 컸죠, 아마? 대략 열 마리 정도가 공작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던데. 몇 마리 죽였잖아요? 맞죠?”

릴리에트의 폭로에 연회장은 술렁거렸다. 사냥터 안에는 무리 지어 다니는 동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라르한이 작게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다.

괜히 나섰나 싶었지만 그래도 입 다물고 있는 게 능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입 다물고 있으면 다른 누군가는 저 좋을 대로 누명을 만들어 씌울 게 분명했다.

“릴리에트. 네가 벤티악 공작이 공격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말이냐?”

“네. 제가 가세했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도망가 버리더라고요. 혹시 그중에 내가 아는 얼굴이라도 있었나? 숲의 꽤 깊은 안쪽이었는데, 아직 놈들의 시체를 찾았다는 보고는 없었나 보죠?”

릴리에트의 시선이 황후에게 향했다. 황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황제도, 귀족들도 릴리에트가 말한 ‘짐승’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위험했구나, 슬라르한. 배후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느냐?”

“별일 아니었습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킨 듯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일이 더 커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흐음,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면 이 이상 묻지 않으마.”

애초에 황제 후보들의 생사에 그다지 관심 없던 황제는 그런 식으로 간단히 일을 덮었다.

대신, 열 명이나 되는 암살자에 맞서고도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 슬라르한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다가가지도 않던 사람들이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 그에게 몰려가 괜찮냐고 묻는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어쨌든 덕분에 모두가 슬슬 피하던 슬라르한은 사냥 대회 꼴등을 하고도 주목받을 수 있었다.

‘설마 이번에도 그쪽으로 간 건 아니겠지?’

어차피 소드 마스터니까 그따위 시정잡배 같은 놈들쯤이야 쉽게 없애 버리겠지만, 문제는 정신적 타격이었다.

전생에서도 슬라르한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놈들을 다 죽여 버릴 수도 있었고 짧은 시간 안에도 얼마든지 사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후벼 파인 탓인지,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활에 손도 대지 않고 돌아왔더랬다.

‘걱정 마라, 슬라르한. 그 유품은 이 누님이 알아서 다 찾아다 줄 테니까.’

암살자들이 미끼로 쓴 ‘아이르델의 유품’은 실재했다. 그게 있는 곳이 저 숲속의 동굴이 아닐 뿐이지.

일리에가 혼자 그 유품을 빼돌릴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어디선가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고마워요, 클리드.”

접시 바닥에 묻은 콩포트를 빵으로 닦아 먹고 있던 일리에의 손이 우뚝 멎었다.

갑자기 심장이 쿵쿵, 하는 소리를 울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천만에요.”

뒤이어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일리에의 고개가 천천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꺾였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정말이지, 저 목소리들을 잊을 수는 없었다.

“클리드…… 엘로르…….”

일리에의 손이 벌벌 떨렸다.

클리드는 엘로르의 손을 잡아주며 그녀의 산책을 돕고 있었다.

여자가 직접 활을 쏘거나 검을 휘두르는 걸 아주 경멸하는 엘로르는 호위 기사를 대리로 내보낸 뒤, 자신의 아름다움, 그리고 제 곁에 있는 클리드를 뽐내며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중이었다.

산책을 빙자한 홍보 활동에 가깝달까. 겸사겸사 경쟁자들도 염탐하고 말이다.

“어머! 여기는 벤티악 공작가의 천막인가?”

“예, 그렇습니다, 전하.”

황녀의 등장에 벤티악 가의 기사들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안주인이 없는 가문이라지만, 이건 너무 삭막하지 않아요? 내가 꽃이라도 좀 보내줄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어차피 저희는 꽃도 볼 줄 모르는 사내들입니다. 아마 꽃들도 전하의 천막 안에 있는 걸 더 좋아할 겁니다.”

타리크의 겸양에 엘로르가 까르르 웃었다.

외모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긴, 남자들밖에 없어서…… 어머! 저 애는 여자애 같은데요?”

엘로르의 손끝이 일리에를 향했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일리에의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눈치챈 타리크는 노예 아이가 황녀의 등장에 어지간히도 놀랐구나 싶어 일리에 대신 답했다.

“저 아이는 노예입니다. 노예 계집애 보라고 꽃을 두는 것도 낭비지요.”

“그것도 그런가? 그런데 벤티악 공작이 여자 노예를 다 데리고 다니네요? 예쁜가 보죠?”

“아닙니다. 그저 잡일이나 시키려고 데려온 아이입니다.”

타리크가 부정했으나 그 무뚝뚝한 슬라르한이 노예 계집애를 데리고 온 게 놀라웠던 모양인지 엘로르는 오히려 한 발 더 다가왔다.

“얘! 일어나서 고개를 들어보련?”

10여 년 만에 마주한 엘로르의 목소리에, 일리에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로 심장이 요동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허튼짓을 벌였다가는 모든 걸 다 망치게 될 터였다.

일리에는 간신히 엘로르에게 대답했다.

“저, 저, 저는, 노, 노예일 뿐입니다. 화, 황녀 전하를, 직접, 뵈, 뵐 수는 없스, 없습니다.”

호흡이 격해져, 일부러 의도한 게 아닌 데도 두려움에 떠는 노예처럼 말이 더듬대듯 튀어나왔다.

“어머, 불쌍하게도 잔뜩 겁먹었네. 내가 직접 허락한 거니 괜찮단다. 얼른 일어나.”

이건 명령이었다.

여기서 엘로르의 심기를 상하게 하면 그녀의 패악이 더 심해진다는 걸 일리에는 알고 있었다.

일리에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천천히 무릎을 세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생에서는 릴리에트가 엘로르보다 키가 컸는데, 이번 생에는 제대로 먹지 못한 과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몸의 원래 크기가 이런지, 엘로르보다 조금 작았다.

일리에는 고개를 들고도 눈을 내리깔았다.

노예가 황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보다는 엘로르의 얼굴을 보고 이성을 잃을까 봐서였다.

“흐음…… 뭐랄까, 먼지를 뭉쳐놓은 것 같이 생긴 아이네?”

순간 되묻고 싶어지는 표현이었다.

사람더러 ‘먼지를 뭉친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건 도대체 저 작은 머리통의 어느 구석에서 나온 걸까.

그때, 그녀의 곁에 있던 클리드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말렸다.

“엘로르 전하. 전하 앞에서야 먼지 같습니다만, 보통 사람들 기준으로는 이 정도면 꽤 귀엽게 생긴 겁니다.”

“그런가? 그래도 벤티악 공작 정도면 좀 더 예쁜 노예를 데리고 다녀도 될 텐데. 벤티악 가에 그 정도 돈은 있잖아요. 그렇죠?”

엘로르의 무례한 질문에도 타리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어차피 노예인데 얼굴을 따져 무엇합니까. 잡일을 하는 데는 이보다 못나도 상관없는 것을요.”

“흐흥. 벤티악 공작이 침실로 들이는 아이는 아니라는 뜻이죠? 알았어요, 알았어.”

타리크의 속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긁어놨는지 엘로르는 가볍게 몸을 돌려 천막을 빠져나갔다.

일리에는 엘로르가 제 앞을 떠났는데도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경직되어 있었다. 심장이 여전히 무섭도록 뛰고 있었다.

‘다 끝났어. 이제 괜찮아.’

일리에는 스스로를 달랬지만 그것은 아직 이른 안심이었다. 클리드가 뒤를 돌며 일리에를 다시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 뭐지?”

갑작스러운 클리드의 질문에 일리에는 순간적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아……!”

10년 넘게 보지 못했지만 한시도 잊은 적 없는 그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속에서 뭔가가 울컥 솟구칠 것만 같았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노인지, 회한인지, 원망인지…….

일리에가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는 사이, 그의 밀색 머리칼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가벼이 흩날렸고 머리칼에 스친 속눈썹이 깜빡였다.

클리드의 저런 섬세한 아름다움을 사랑했었다.

결마다 향기가 밴 듯한 머리칼, 미소를 머금은 듯한 속눈썹, 뭔가를 더 말할 것처럼 살짝 벌어졌다가 다물리던 입술 같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

그에게 자신은 그저 이용할 가치가 있는 멍청한 계집에 불과했고, 자신의 사랑은 그저 조롱의 대상일 뿐이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일리에는 이를 꽉 무느라 입술을 뗄 수조차 없었다.

그때 나선 게 타리크였다.

“그것을 왜 카시르 영식께서 궁금해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왠지 눈이 가는 아이라서요. 혹시 모르잖습니까? 제가 벤티악 공작께 저 아이를 팔라고 할지.”

“벤티악 공작 저 내의 일을 아는 아이를, 공작께서 함부로 파실 것 같습니까?”

“노예가 공작 저 내의 일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요?”

“천재라 불리시는 카시르 영식이라면 저 아이를 데려다 어떻게 써먹을지 모를 일이지요.”

노예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고 타리크는 뾰족하게 대응하니, 결국 클리드도 더 실랑이하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가볍게 물어본 건데 너무 정색하시니 더 궁금해지네요. 어쨌든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죠.”

클리드는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천막에서 나갔다.

그 뒷모습에 이를 갈던 타리크가 일리에를 흘끗 쳐다보더니 꿍얼댔다.

“저 빗자루같이 생긴 계집애한테 눈이 가긴 뭘 눈이 가? 어떻게 하면 들쑤셔 볼까 하고 괜히 수작 부리는 거지!”

일리에는 투덜거리는 타리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곧장 천막 뒤쪽 출입구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풀숲에 엎드려 아까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우웩! 하아, 하아, 윽, 우욱!”

위가 다 쥐여 짜이는 것 같았고 눈물이 솟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너는…… 날……!’

없어진 미래였다. 존재하지 않는 과거였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서 더 억울했다.

없던 일이 될 거라면 이 감정도 다 같이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왜 저 혼자 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일리에가 끅끅대며 우는데 천막 안에서 그 꼴을 쳐다보던 타리크가 무심히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겁 없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사람 따지나 보지? 그런데 어쩌냐? 우리 각하께서는 저런 인간들이랑 싸우셔야 하는데. 각하의 적은 우리의 적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일리에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간신히 일어섰다.

‘타리크의 말이 맞아. 싸워야 할 적을 앞에 두고 매번 속이나 게워낼 수는 없지.’

일리에는 여전히 수런거리는 제 마음을 꽉 내리눌렀다. 혼자만 아는 전생의 기억 때문에 이번 생마저 망칠 수는 없었다.

꽉 쥔 주먹이 여전히 잘게 떨렸지만, 일리에는 크게 심호흡하고 말끔한 얼굴로 돌아섰다.

“어휴, 진짜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타리크 님, 음식 남은 것 좀 더 있습니까?”

바들바들 떨며 속이나 게워내던 일리에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뻔뻔한 얼굴을 들이밀자 타리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일리에의 그릇에 빵과 고기를 얹어주었다.

* *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로구나, 베델.”

황제가 머무는 곳에 장막이 드리우고 그곳에 베델이 나타났다.

인사를 올리는 베델이나 그를 맞이하는 황제나 서로 익숙한 듯 보였다.

“그동안 연락이 오지 않길래 조금 걱정했단다.”

“송구합니다. 벤티악 영지와 저택을 오가느라 정보를 모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저런…… 슬라르한이 널 꽤 부려먹는 모양이지?”

“덕분에 신뢰를 얻었으니 시간 낭비는 아니었습니다.”

“역시, 수도 제일가는 정보 길드의 수장답구나. 그 조심성 많은 녀석의 신뢰를 얻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넉넉히 머금었다.

“그래, 내 훌륭한 조카께서는 요새 어찌 지내고 계신가?”

“황제 폐하의 후계 발표 이전이나 이후나 큰 변화는 없습니다. 황위에는 정말로 큰 욕심이 없는 듯한데 주변의 기대와 가신들의 안위를 위해 떠맡는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곧 죽어도 깨끗한 척하는 건 여전하구나.”

황제는 돈과 권력, 여자와 향응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동생 아이르델을 떠올렸다.

자신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쾌락을, 그는 참으로 쉽게 놓아버렸다.

형님이 그토록 믿지 못하시겠다면 공작위도 필요 없다고 하길래 일부러 작위는 그냥 놔두고 나머지를 무너트렸다.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사업에 일부러 배제하고, 영지를 야금야금 빼앗고, 사교계에서 고립시키고…….

그러나 아이르델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 더 큰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는 그게 더 속이 뒤집혔다.

청명한 하늘처럼 맑고 새파란 아이르델의 눈동자에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몰골이 비치는 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 싫었다.

그래서 더 추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이르델이 정말로 깨끗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하지만 벤티악은 대를 이어 황제의 추저분한 내면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이르델 놈의 장례식 때는 어땠느냐? 반역을 다짐했을 법도 한데.”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갔습니다. 그날 오후에 비도 쏟아져서 장례식도 금방 끝났고, 가신들도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돌아갔습니다. 따로 서신을 주고받은 적도 없습니다.”

“허허…… 내가 제 아비를 죽인 게 분명한데 검 한 자루 들고 쳐들어올 배짱도 없다더냐? 배알도 없는 녀석 같으니.”

황제가 킬킬대며 웃고는 옆에 있던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살면서 저지른 온갖 악행에 대해 후회한 적 없지만, 아이르델을 죽인 것은 후회스러웠다.

황손들이 다 제 자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보니,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은 아이르델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동생 제릭이 있기는 했지만 태어난 배도 다른 그놈은 믿을 수 없었다.

아이르델이 있었다면 그에게 차기 황제 자리를 주고 저를 기만한 황후와 황비, 그리고 아비 모를 새끼들을 전부 죽이라고 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나 아들을 미끼로 삼기만 했다면 말이다.

아이르델이라면 제 분수를 알고 끝까지 형님을 알아 모셨을 텐데…….

아쉽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슬라르한이 가장 나은 대안이었다.

슬라르한은 제 아비를 닮아 아무리 괴롭혀도 황실에 반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녀석이니, 그 녀석을 후계자로 만들어놓고 나머지 황손들을 다 치워 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다만, 그렇게 되기 전에 슬라르한의 확실한 약점 하나는 쥐고 있어야 했다.

그걸 찾는 게 베델에게 맡긴 임무였다.

“그럼 슬라르한 놈 말고, 그놈 주변에는 별다른 일 없느냐?”

황제의 질문에 베델은 순간 일리에를 떠올렸다.

그 노예가 오고 난 후 벤티악의 분위기가 조금 변한 듯한 느낌도 들었고, 슬라르한은 볼품없는 그 노예에게 과한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슬라르한의 주변에서 벌어진 변화라고는 그 노예 하나밖에 없었다.

“갑자기 노예 계집애 하나를 들여 꽤 귀여워하는 것 같긴 합니다만.”

“호오, 침노를 들인 겐가?”

“그건 아니었습니다. 죽어가는 걸 불쌍한 마음에 사 왔다고 합니다.”

“슬라르한 놈의 약점이 될 만한가?”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마 곧 사그라질 관심인 듯합니다.”

황제가 실망한 듯 혀를 찼다. 정부도 아닌 노예쯤은 그다지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달리 찾는 계집도 없더냐?”

“동침하는 여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새로 참석하는 모임이나 연회는?”

“없습니다.”

“술이나 도박도?”

“술은 식사 때 마시는 포도주 한 잔 정도가 전부이고, 도박은커녕 심심풀이 카드놀이조차 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그럼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산다더냐?”

“……제가 벤티악 가에 들어가 살펴본 지난 1년 내내, 저 역시 그게 궁금했습니다.”

사실 최근의 슬라르한을 보면 일리에를 데리고 노는 게 유일한 취미인 것 같기는 했지만, 역시나 대단치 않은 일일 터였다.

“알았다.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게 앞으로도 조심하고, 다른 건 다 좋으니 그 녀석의 약점 하나만 찾거라. 알았느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곁에 있던 시종에게 시켜 금덩어리가 든 주머니를 베델에게 건넸고, 그걸 품에 넣은 베델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황제의 천막에서 물러나왔다.

‘저 영감탱이도 갈 때가 다 됐는지 구린내가 풀풀 나네.’

베델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는 수도 내 모든 정보 길드를 장악한 <황금 갈퀴>의 수장이었다.

그런 그를 정보원으로 쓰려면 의뢰인이 적어도 황족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베델은 황제의 의뢰를 받아들인 걸 후회하고 있었다. 황제를 만날 때마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그 영감이 역겨웠기 때문이다.

‘끝까지 저렇게 이기적으로 살다 뒈지겠지. 그러고도 저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은 조금도 받지 않겠지. 운 좋게 황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을 뿐이면서.’

저 인간 하나의 실정으로 쉽게 무너져 버릴 파르디나스가 아니었지만, 태평성대에도 위태롭던 빈민가는 현 황제가 황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직격탄을 맞았다.

베델의 여동생은 쓰레기통을 뒤지다 맞아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거리에서 구걸하다 귀족의 마차에 치여 죽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도 언젠가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인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처음엔 부모를 원망했고, 그다음엔 귀족들을 원망했으며, 나중에는 황제를 원망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이 현실의 책임자를 가리는 일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누굴 원망하고 무슨 짓을 해봐도 이 나라는 바뀌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당장 자신의 손에 쥐는 돈이 더 중요해졌다.

세상에 믿을 것은 돈밖에 없었고,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오든 돈은 다 똑같은 돈이었다.

그랬기에 원수 같았던 황제의 의뢰도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은 좀 후회 중이지만.

‘아냐, 쓸데없는 생각 말자. 돈만 잘 주면 됐지, 뭐. 난 그거면 돼.’

어차피 이 세상에 억울한 죽음은 너무도 많았고, 그건 그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푸른 피의 고귀한 의무를 따지는 건 그 고지식한 벤티악 가문에서나 할 일이었다.

베델은 끊임없는 탄압에도 올곧기만 했던 벤티악 가문을 비웃다가 슬그머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 역시 벤티악 가문이었지만 말이다.

* * *

커다란 뿔피리 소리와 함께 사냥이 끝났다.

숲속에 들어갔던 참가자들이 아쉬운 얼굴을 하며 돌아 나왔고,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사냥감을 수거하러 숲으로 들어갔다.

일리에는 목을 쭉 빼며 슬라르한의 모습을 찾았다.

그의 플래티넘 블론드는 어디서나 눈에 띄어서, 일리에는 금방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많이 잡았나? 많이 잡았겠지? 그래, 내가 한 달 동안 그 고생을 해가면서 진정제 가루 주머니까지 만들어줬는데 당연히 많이 잡았겠지!’

그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유품을 찾으러 갈까 봐 조금 걱정했지만, 이 시간에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나오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슬라르한이 다른 이들에게 뒤처졌을 리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글쎄…… 수고랄 게 그다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슬라르한은 활과 화살통을 타리크에게 건네며 일리에를 흘낏 쳐다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두 눈을 반짝거리며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장 일리에를 찾는 대신 타리크를 데리고 잠깐 천막 밖으로 나가 속삭였다.

“기사 셋을 데리고 숲 안쪽으로 들어가서 큰 떡갈나무를 찾아. 그 떡갈나무 오른편으로 작은 동굴이 있고, 그 동굴 안의 바위 아래 아버지의 유품을 숨겨놨다고 하더군.”

“……예? 누가요?”

“아버지를 살해한 암살단의 일원이었다는 자가.”

타리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걸, 살려두셨습니까?”

“죽이면? 황제가 암살단의 존재를 인정할 것 같은가? 어쩌면 내가 그를 죽일 것을 바라고 주변에 사람을 심어뒀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자의 말을 믿을 수는 있는 겁니까?”

“믿을 수 없으니 바로 찾아가지 않은 거야. 하인들이 사냥감을 수거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지금 바로 찾아보게.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냥 돌아오고.”

“알겠습니다.”

타리크는 천막을 지킬 기사 하나만을 남겨두고 빠르게 티그리스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천막 안으로 들어온 슬라르한을 보면서 일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말대로, 아버지를 운운하며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방금 타리크를 보냈으니 그놈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조만간 알 수 있겠지.”

“아…… 기사님들을 보내셨어요? 굳이 그럴…….”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던 일리에가 합, 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하려던 말을 대충 눈치챘다.

‘일리에는 동굴 안에 아버지의 유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로군.’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그의 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내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생글거리며 물었다.

“사냥은, 어떠셨어요? 많이 잡으셨어요? 제가 드린 물건, 효과 좋았죠? 이번 일은 최소 20만 페르소는 쳐주셔야 해요.”

슬라르한의 미간에 자리하던 의심이 설핏 흐려졌다.

일리에가 구석에 앉아 그 계산을 하며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진 탓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진정제 주머니를 꺼내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건넨 개수 그대로였다.

“어……? 안 쓰셨어요?”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엘로르 전하의 기사가 이것과 똑같은 물건을 쓰고 있더군. 그 뒤를 따라가면서 사냥을 한 덕분에 네가 준 것은 쓸 필요가 없었지.”

“네? 아하하하하! 3황녀 전하의 기사가 엄청 당황했겠네요? 쌤통이다!”

쾌활한 웃음소리가 슬라르한의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씻어 내려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리에가 오늘 말한 모든 것을 그저 행운이나 우연의 일치로 묻어둘 수는 없었다.

“그 방법을 어떻게 알고 있었지? 엘로르 전하 쪽이 그 방법을 쓸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나?”

일리에는 살짝 긴장했지만,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준비한 핑계를 읊었다.

“3황녀 전하께서도 그 방법을 알고 계신 줄은 몰랐죠.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일리에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진정제를 떠올린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동물용 진정제나 항 진정제 만드는 법은 제 머릿속에 있는데 그걸 썼던 기억은 잘 나지 않고요, 제가 쓸 약초를 캐러 숲에 들어갔다가 진정제로 쓰이는 허브를 보고 퍼뜩 떠오른 겁니다.”

“그렇다기엔 진정제 분말이 들어간 주머니의 모양도 똑같고, 사용하는 방법도 똑같더군.”

“혹시 제가 살았던 마을에서의 사냥법 아니었을까요? 황녀 전하 쪽에도 이 얘기를 아는 사람이 있었나 보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까지 갸웃거리는 일리에를 보며 슬라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잔망스러운 노예 아이는 자신의 비밀을 쉽게 가르쳐 줄 것 같지 않았다.

때리거나 고문한다면 토설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로는 자신의 지혜를 나눠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온갖 상처로 뒤덮였던 아이를 또 상처투성이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첩자 같지는 않은데…….’

지금이야 일리에의 존재 때문에 주변에 알려지긴 했지만, 그가 루벨파스트에 들렀을 때만 해도 그 일정은 극비였다.

만약 누군가가 제 경로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루벨파스트의 어느 쪽을 돌아볼 줄 알고 그 만남을 계획한단 말인가.

게다가 일리에는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피를 먹이지 않았다면 절대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보낸 첩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히 연이 닿은 아이라고 하기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를 너무 많이 아는 것 같단 말이지.’

정말로 이 아이가 점쟁이라고 믿게 될 정도로 말이다.

아니, 사실은 아들 혼자만 두고 떠나기가 두려웠던 아버지가 보내준 행운의 천사가 아닐까 싶었다.

아버지의 사망을 알게 된 후, 혹시라도 아버지와 같이 떠났던 가문의 기사들이 흘러 들어갔을까 봐 확인차 들렀던 루벨파스트에서 일리에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어머니의 목걸이가 반응했으니 어쩌면 어머니가 보내준 요정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목걸이가 팔딱거리며 뛰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그 당시를 떠올리던 슬라르한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목걸이가 반응하지 않았더라도 일리에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겠지.’

귀족의 망토 끝자락을 아득바득 붙잡고 저를 죽이라며 악을 쓰는 노예라니…….

노예로서 사느니 인간으로서 죽겠다는 그 태도가, 슬라르한에게는 너무도 처절한 구조 요청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제가 만든 건 그다지 쓸모가 없었던 거네요? 에이, 아쉬워라…….”

한 달간 열심히 만든 진정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일리에가 정말로 아쉬운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는 슬라르한도 미안해졌다.

제 한 몸 챙기며 사는 것도 빡빡할 아이가 주인을 위해 한 달이나 밤잠 줄여가며 만든 것이라는데, 그 기대를 저버렸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쓸 수 있겠지. 오늘 일당은 네 말대로 20만 페르소로 쳐주마.”

“어? 정말요? 하, 하지만…… 제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도움이 되었다. 네가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면 앞뒤 생각 없이 낯 모르는 사내의 말만 듣고 사냥 대회를 포기했겠지. 게다가 네가 이 진정제 살포법을 알려줬기에 엘로르 전하의 기사가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있었던 거니까.”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실망에 찼던 일리에의 얼굴에는 금세 장난기 어린 미소가 담뿍 피어올랐다.

까만 머리카락과 잿빛 눈동자는 무채색이었지만, 일리에가 만들어내는 표정은 언제나 총천연색의 감정과 생의 에너지가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특히, 저렇게 웃을 때마다 휘어지는 눈매와 통통하게 머금어지는 양 뺨과 한껏 당겨진 입꼬리와 가지런히 드러나는 치아가…….

‘그러고 보니 살이 좀 올랐나? 이제 좀 여자아이 같아 보이는군.’

살이 붙기가 무섭게 검술 훈련을 한 터라 일리에의 몸에는 여태 곡선이랄 게 없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도드라졌던 쇄골 위로 얇으나마 살이 덮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쇄골이 드러나도록 목을 드러냈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기도 했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셔츠 단추가 떨어졌나?”

“예? 아, 아니요. 저번에 침방에서 보내준 새 옷인데…….”

“그럼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이제 곧 저녁이라 금방 서늘해진다.”

“저기 계신 귀족 아가씨들은 어깨까지 다 드러냈는걸요? 그럼 저분들은 폐렴이라도 걸리려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일리에는 슬라르한에게 진심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처음 만났던 날의 제 몰골이 끔찍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렇게까지 저를 약골로 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한술 더 떴다.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되면 노예들에게도 좋은 음식이 내려질 거다. 고기가 모자라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잘 먹어둬. 살을 좀 더 찌우는 게 좋을 것 같다.”

“주인님은 꼭 저를 살찌워서 잡아 잡수시려는 것 같아요. 맨날 살찌우라고만 하시니.”

“그래서 일부러 안 찌우는 거냐?”

“설마요.”

농담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슬라르한의 표정을 보며 일리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남자가 누군가의 연인이나 남편이 된다면 그 상대도 꽤나 골치 아플 것 같았다.

고작 노예에게도 이렇게나 신경 쓰는데, 사랑하는 여인 정도가 되면 어떻겠는가.

일리에는 미래의 그 누군가를 위해 행운을 빌어주었다.

<2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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