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작년까지만 해도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썰렁하던 벤티악 저택에는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객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벤티악 가문의 가신이나 타리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슬라르한이 직접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슬라르한의 응접실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인 롤랑 백작은 무덤덤한 얼굴로 찾아와 살갑게 안부를 묻다가 황제 쪽의 동태를 이야기해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황후와 황비들, 그리고 황손들에게까지 복수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벤티악 공작을 밀어줄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그분은 의심이 많죠.”
“그걸 저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슬라르한과 롤랑 백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황제의 강박적인 의심은 황족 방계들의 오랜 고통의 원인이었다.
“아마 벤티악 공작의 목줄을 쥐고자 할 겁니다. 공작의 약점을 찾아내려 하겠죠. 이미 오래전에 벤티악 공작 저나 영지의 레제 성 내에 첩자를 풀어뒀겠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황제 폐하 본인의 안녕을 위해 약점을 찾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건 단지 의심 때문에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겠죠. 늘 주변을 조심하십시오.”
“혹시 폐하로부터 뭔가 들으신 얘기가 있습니까?”
“종종 지나가는 말처럼 벤티악 공작 저 내의 사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만, 저희가 공작을 돕기로 했다는 걸 아신 뒤로는 말씀을 아끼시더군요. 전에 듣던 바로는 공작을 꽤 가까운 곳에서 살펴보는 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슬라르한의 뇌리에 몇몇 이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그가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의심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지만, 그들을 믿고자 하는 이 마음마저 그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고모부님. 혹시 제 미욱한 시야를 넓혀줄 조언이 더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허허허,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하지만 굳이 이 중늙은이의 체면을 세워주시겠다니 한마디만 더 얹겠습니다. 현재 컬리넌 후작가와 멜바란 후작가를 포섭한 덕분에 여러 세력이 벤티악 공작께로 모이고 있습니다만, 그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건 벤티악 공작 본인이십니다. 사냥 대회에서 제일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뭔가 더 큰 이벤트가 필요합니다.”
슬라르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봄의 사냥 대회 이후 숨 고르기라도 하듯 황제 후보들이 잠잠했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수면 아래에서는 피아의 구분 없이 수많은 사인과 계산이 오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슬라르한 쪽에 많은 세력이 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을 붙드는 건 고작 해 봐야 호기심이나 인정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고 마음이 돌아서면 떠날 수 있었다.
그 세력들을 불러 모아온 컬리넌 후작과 엘란츠에게 미안해서라도 슬라르한은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줘야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건을 일으킨답시고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고모부님의 말씀,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다음에 저희 저택에 또 놀러 오십시오. 마그렛이 아주 기뻐할 겁니다.”
“초대는 언제나 기쁘게 받겠습니다.”
롤랑 백작은 차 한 잔을 비우고는 금방 일어났다. 슬라르한보다 더 바쁜 사람이니 오래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를 배웅하고 돌아선 슬라르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시간은 조금의 유예도 없이 흘러가고 상황은 그의 의지와 다르게 하루하루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데, 정작 그는 요새 정신을 빼놓고 사는 것 같았다.
그게 다 그의 맹랑한 노예 아이 때문이었다.
일리에가 저에게 엔시아와의 결혼을 생각해 보라던 얘기가 왜 서운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고, 일리에가 베델과 함께 식사하며 그에게 연고까지 바르게 한 것이 왜 불쾌한지 알 수 없었다.
돌고 돌아 겨우 도착한 답이 ‘일리에는 내 소유니까.’였는데, 그 문장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수치스러워 감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응석이란 말인가.
“하아…….”
“한숨 쉬지 마세요. 운이 달아난다고요.”
“……일리에?”
방금까지 떠올렸던 소녀가 복도의 모퉁이에서 고개를 쏙 내밀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냐?”
“궁금해서요. 롤랑 백작님이 뭐라고 하세요?”
“네가 알 거 없다.”
“……제가 차 한 잔 우려 드릴까요?”
롤랑 백작과의 대화 내용을 캐려는 수작인 줄 뻔히 알면서도 슬라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일리에가 우려주는 차나 한잔 마시면서 날카로워진 신경을 누그러트리고 싶었다.
마침 집사도, 타리크도 바빠서 그들의 티타임을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차 우리는 법은 어디서 배운…… 아, 기억 안 난다고 했던가?”
“네. 맛은 괜찮으신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황궁에서 대접받는 차 같다. 황궁에 가서 차를 마시면 이런 비슷한 맛이 나거든.”
일리에는 속이 뜨끔했다.
황궁과 일반 귀족 저택의 차 우리는 방식이 다를 줄은 몰랐는데 낭패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황궁에서 차 우리는 법을 배웠을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인님, 요새 한숨이 느셨어요. 고민되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내가 한숨 쉬는 걸 언제 봤기에?”
“최근 여러 번 봤는걸요.”
“날 봤으면서 인사도 안 했단 말이군.”
“바빠 보이셨어요. 옆에 다른 사람들도 많았고…… 그분들은 노예가 공작님께 직접 인사 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실걸요?”
벤티악의 가신들과 함께 있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슬라르한은 문득, 오랜 시간 함께 해왔던 그들보다 일리에와 이렇게 둘이 있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일리에는 안부를 묻던 게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는 듯 캐물었다.
슬라르한은 다시 한숨과 섞어 피식 웃다가 말했다.
“별일 아니다. 아직은 다들 슬라르한 벤티악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
“아아, 그런 거라면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한 일리에의 말투에 슬라르한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안 그래도 주인님이 한가해지시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조만간 시험에 들 일이 생길 겁니다.”
“시험……?”
“네. 몇 개의 과제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가 올 텐데, 그때 반드시 가장 오래 묵은 것을 선택하세요. 그게 주인님의 운을 트이게 해줄 겁니다.”
슬라르한은 찻잔을 든 채 일리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무지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 그 점술인지 뭔지 하는 그건가?”
“저의 소소한 재능이지요.”
“하……! 그런데 왜 하필 제일 오래 묵은 걸 선택해야 하는 거지?”
“어…… 그…… 아, 맞아! 기, 깊고 오래된 것일수록 벤티악 가문과 상성이 맞거든요!”
슬라르한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핀잔을 주려는데 문득 벤티악 영지가 제국 초창기부터 개발된 지역이라는 것, 벤티악 저택을 지을 때 쓰인 나무가 수령이 많은 노송이었다는 것, 아버지가 고대 시가를 좋아했고 어머니가 고고학을 좋아했다는 것 등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렇죠? 제가 꽤 영험하다니까요?”
“제 입으로 영험하다는 점쟁이치고 믿을 만한 이가 없다고 들었는데.”
“에이, 솔직히 주인님도 제가 좀 용하다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렇죠?”
“뻔뻔한 사기꾼 기질로만 따지자면 점쟁이 중에 네가 최고인 것 같기는 하다.”
슬라르한의 대꾸에 일리에가 낄낄댔다.
일리에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방금까지 답답했던 기분이 확 풀어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여태 혼자 속으로만 꿍해 있던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베델과는…… 언제 그렇게 친해졌지?”
“어? 저희 친한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일리에는 부인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덕분에 슬라르한의 입맛만 더 씁쓸해졌다.
“그냥…… 어디서 얘길 들었다.”
“아…… 이게 친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베델 님이 저를 많이 챙겨주세요. 그분이 좀 착한 것 같아요. 벤티악 성에서 저한테 옷을 빌려주기도 하셨고, 수도로 올라올 때도 간간이 챙겨주셨고, 저택에 와서 제가 얻어맞을 때도 유일하게 도와주셨던 분이니까요.”
슬라르한은 그제야 일리에가 하인들에게 폭행당할 때 저와 타리크를 부르러 달려왔던 베델을 기억해냈다.
일리에의 목숨만 살려놓고 방치해 둔 자신과는 달리, 베델은 성과 저택의 모두가 노예인 일리에를 핍박할 때 유일하게 그녀를 감쌌다.
일도 빠릿빠릿하고 머리도 똑똑한 데다 눈치도 빨라서 꽤 아끼는 하인이었는데, 그가 심성까지 고울 줄은 몰랐다.
베델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일리에가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해도 당연한 일 같았다.
친절하고 잘생긴 데다 전도유망한 청년이 곁에서 잘 챙겨준다는데, 흔들리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베델이 꽤 괜찮은 녀석이지. 아직 미혼인 것 같던데…….”
“그런 것 같더라고요. 이제야 스물두 살이니까 결혼하기 조금 이르기도 하고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아니, 잠깐. 스물둘인 베델은 결혼하기 이른 나이라면서, 스물셋인 나한테는 컬리넌 후작가에 팔려 가라고 한 거냐?”
“언제 팔려 가라고 그랬습니까? 결혼 동맹을 권한 것뿐인데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지.”
“그게 그렇게 서운하셨을 줄은 몰랐네요. 아무래도 주인님은 컬리넌 영애 취향이 아니신가 봐요. 그럼 역시 청순하고 보호 본능 자극하는 타입……?”
“너는 진짜……! 아니, 됐다. 차나 한잔 더 따라라.”
슬라르한은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는 일리에 앞으로 찻잔을 밀어놓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취향 문제가 아니었는데 취향 운운하며 사람을 바보처럼 만드는 일리에가 괘씸했다. 물론 그렇다고 일리에를 벌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굳이, 정말로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아마도 태양 같은 사람일 것이다.
온몸에서 뿜어지는 생기와 밝은 기운으로 그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까지 지워주는, 그런 사람.
왠지 어렴풋이 떠오를 것도 같은, 밝은 웃음소리와 장난기 어린 눈매의, 닿지 않을 사람.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젓던 슬라르한이 쪼르르, 찻물 따르는 소리에 다시 일리에를 바라보았다.
차를 따르는 일리에 위로 햇빛이 비쳐 소녀의 뺨이 말갛게 빛나고 까만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섬세하게 나풀거렸다.
뜬금없이, 일리에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에.”
“네?”
의미 없이 부른 목소리에도 일리에는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별이 박혀 있는 것 같은 눈동자가 저를 직시하자 슬라르한의 가슴이 또 한 번 크게 일렁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방금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서둘러 지우며 슬라르한은 아직 뜨거운 차를 급하게 들이켰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리에에게 입 맞추고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 * *
툭.
황제는 비스듬히 앉은 채 책상 위로 종이 한 장을 내던졌다.
그가 방금 내던진 종이 아래로 열 장에 가까운 종이가 쌓여 있었다.
“지긋지긋하군.”
“급한 일들만 추린 것입니다.”
“저들은 다 급하다고 하겠지.”
“하지만 몇몇 건들은 상소가 올라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내 몸이 여러 개라도 된다더냐? 어떻게 한 번에 이 모든 걸 다…… 아니, 잠깐.”
짜증으로 구겨졌던 황제의 미간이 매끈하게 펴졌다.
“그래! 내 분신들을 보내어 처리하게 하면 되겠구나.”
“예? 분신…… 이라니요?”
“황제가 될 자라면 이 정도의 문제는 해결할 줄 알아야겠지. 황제 후보들을 불러들여라.”
그제야 황제의 뜻을 알아차린 대신이 뜨악해했지만, 황제는 번복하기는커녕 오히려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다.
제 손을 안 대고도 코 풀 수 있는 방법을 두고 이제껏 왜 매일 골머리를 썩였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는 골치 아픈 상소나 구제 요청 건들 중 자기가 손대기 제일 귀찮은 것을 고르고 골랐다.
황제 후보가 넷으로 줄어든 게 지금만큼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황제의 부름을 받아 급하게 모인 황제 후보들 앞에 네 개의 과제를 던져놓았다.
“황제란 제국의 어려움을 돌볼 줄 알아야 하는 법. 너희에게 황제의 영광스러운 의무를 맛볼 기회를 주마. 여기, 네 개의 과제가 있다. 각자 하나씩 맡아 해결해 보도록 하여라. 이 역시 너희의 능력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황제는 마치 큰 은혜라도 베풀듯이 말했지만, 그가 이제 제 의무마저 등한시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내민 과제는 모두 골치가 아픈 것들이었다.
첫 번째는 수도 내의 불법 노예 격투장을 근절해 달라는 상소였다.
거기서 큰돈을 잃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올라오기 시작한 상소였는데, 격투장 운영자들이 사방팔방 얼마나 뇌물을 뿌리고 다녔는지, 아직 그 꼬리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두 번째는 수도 내 빈민가에 발생한 괴질 문제였다.
병이 빈민가에서만 퍼지기는 했지만, 병에 걸린 이들의 몰골이 끔찍해 공포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황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그 병의 원인은 물론이고 치료법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도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귀족 저택만 골라 보석이 도난당하고 있었는데, 도난당한 보석들이 암시장에조차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
피해자 중에는 고위 귀족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자신이 도난당한 보석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하길 꺼리면서도 얼른 도둑을 잡아달라고 불만만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네 번째는 수도 북서쪽 위르스 산의 이상 현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위르스 산 근처에서 지반이 울린다는 제보가 빗발쳤는데 황실에서 몇 번이나 조사단을 파견하고서도 아직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위급하지는 않았지만 황실에서 몇 년째 허탕을 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자, 하나씩 골라 보려무나.”
황제는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반듯이 펴져 있는 네 장의 종이와 네 명의 후보를 둘러보았다.
후보들의 표정에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저는 빈민가의 괴질 문제를 해결해 보겠습니다. 가진 것 없고 힘든 사람들이 이유 모를 병에 시달린다니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모두가 서로 눈치만 보는 사이, 엘로르가 잽싸게 과제 하나를 선점했다.
“엘로르! 네 마음씨가 천사같이 곱구나. 부디 엘룬의 가호가 너와 함께하기를 기도하마.”
황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얼른 고르지 않으면 제일 골치 아픈 문제를 떠맡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다음 손을 든 것은 아이리스였다.
“저는 평소 노예 근절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첫 번째 과제를 해결해 보겠습니다.”
“오, 그래, 아이리스. 너는 언제나 탐구하는 성격이었지. 평소 관심 두던 문제를 해결해 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그럼 그 문제는 너에게 맡기도록 하마.”
세 번째로 손을 든 사람은 라반이었다.
“그럼 저는…… 도난 사건 쪽을 맡겠습니다. 귀족가만 골라 도난이 일어나고 있다니 그 배후가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맞는 말이다, 라반. 게다가 도난당한 보석이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지. 반역자들의 자금이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일을 잘 해결하여 많은 이들을 안심시켜 주거라.”
그리고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슬라르한은 딱 한 장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위르스 산에는 제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오, 슬라르한. 어려운 문제를 선택했구나. 하지만 나는 네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황제의 말도 그다지 비아냥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문제를 선택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몇 개의 과제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가 올 텐데, 그때 반드시 가장 오래 묵은 것을 선택하세요.”
정말 신기하게도 일리에의 예언이 맞아 들었다.
황제가 과제 운운했을 때부터 슬라르한의 팔뚝에는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그는 과제 내용을 들을 때 저도 모르게 제일 해묵은 것을 따졌고, 위르스 산의 이상 현상에 몇 년이나 조사단을 파견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과제를 선택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은 위르스 산 문제만큼은 떠맡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라반이 체통도 잊고 허둥거리며 손을 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 황궁과 가장 멀다는 것, 그리고 위르스 산 문제에 신경 쓰는 귀족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았다.
고생해서 문제를 해결해 봤자 귀족들로 이루어진 ‘황위 후보자 평가 위원회’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할 테니까.
황제와의 접견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이리스가 슬라르한의 팔뚝을 툭툭 쳤다.
“조금만 서두르지 그랬어요? 이런 건 속도가 생명이라고요.”
안 됐다는 듯 눈썹을 내려트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정말로 염려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슬라르한도 잘 알고 있었다.
염려를 받아야 할 입장도 아니었으니 그다지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멍하니 있다가 하마터면 가장 원하던 과제를 놓칠 뻔했군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응? 가장 원하던 과제였다고요?”
“위르스 산이 그렇게 경치가 좋다던데 기대되는군요. 과제도 해결하고, 휴양도 하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으음…… 그렇겠네요.”
아이리스는 비웃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엘로르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위르스 산 문제가 가장 원하던 과제였다고? 허세 부리나? 이건 전생에 릴리에트도 몇 달이나 골치를 썩였던 건데…….’
전생에 슬라르한은 아이리스가 고른 노예 격투장 문제를 맡아 해결했고, 아이리스는 도난 사건을 맡았으며, 렌셔는 이번에 나오지 않은 길드 간 알력 문제를 처리했다.
그리고 가장 골치 아팠던 위르스 산 문제는 릴리에트가 맡았다.
릴리에트는 위르스 산 문제로 몇 달이나 수도 북서쪽과 황궁을 오가며 시간을 낭비했다.
결국 그게 큰 수확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엘로르는 릴리에트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 것인지 몰랐기에 이번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크게 점수를 딸 수 있을 ‘괴질 사건’을 만들어 심어둔 것이었다.
‘슬라르한은 문제를 과소평가하고 있어. 클리드를 곁에 두었던 릴리에트도 몇 달이나 걸린 문제니까, 아마 슬라르한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할 거야. 게다가 이 시기에 몇 달이나 사교계 활동을 빠지게 되면 타격이 크다고.’
골치 아픈 경쟁자인 슬라르한이 뒤처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엘로르는 이번 과제에서 자신이 크게 앞서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이제 곧 가을인데 위르스 산이라니요. 하필이면 그런 문제를 황위 후보에게 맡기다니…….”
타리크는 다 끝난 이야기를 갖고 투덜대길 멈추지 않았다.
가을은 수확과 풍요의 계절, 그리고 뜨거운 여름 동안 시들했던 사교계가 활기를 띠는 계절이었다.
영지에 내려가 있으면 겨울은 그저 버텨야 할 계절일 뿐이지만, 수도에서는 가장 화려한 파티가 벌어지는 계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사교계에서 신비롭게만 여겨지는 슬라르한은 이번 가을, 겨울에 사교계에서 영역을 넓혀야 했다.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가는 데만도 사흘이 걸리는 위르스 산이라니…… 타리크는 가슴을 퍽퍽 쳐대야 할 만큼 속이 상했다.
그러나 타리크를 진짜로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뒤통수를 맞은 거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서도 태평한 제 주군이었다.
“위르스 산도 아름답다고 하고, 달로팡 마을의 밀 맥주와 흰 소시지도 유명하다고 하더군. 오랜만에 여행이라도 간다고 생각하게.”
“그걸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니, 각하께서는 참 마음도 넓으십니다.”
전혀 위기 의식 없어 보이는 슬라르한이 책 한 권을 일리에에게 넘기자 일리에가 냉큼 받아들며 그의 짐 가방에 챙겨 넣었다.
차마 슬라르한을 타박할 수 없었던 타리크의 눈에는 곁에서 생글생글 웃는 일리에가 더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거죠! 제가 보아하니 주인님 주변으로 행운이 모이고 있어요.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모르는 소리 하지 좀 마라! 철딱서니 없기는. 이게 그렇게 실실댈 일인 줄 알아!”
버럭 화낸 타리크에게 답한 사람은 슬라르한이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군, 타리크.”
“그, 그건 아닙니다.”
“어떤 문제를 맡든 그게 잘 해결될 거라는 보장은 없네. 반대로, 어떤 문제를 맡든 그게 실패할 거라는 보장도 없지. 그러니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 낫지 않겠나?”
맞는 말이었지만 그 대상이 나빴다.
위르스 산이라니, 이건 황실에서도 몇 년째 해결하지 못해 골머리 썩는 일 아닌가.
시도 때도 없이 지반이 울려서 그곳 사람들은 위르스 산 아래 봉인되어 있던 고대 드래곤이 깨어나는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어쨌든 땅속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확인하려면 거기까지 땅을 파고 내려가야 한다.
그만큼 땅을 파려면 인력이나 물자도 어마어마하게 들 테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렇게 힘을 쏟아부어도 원인 지점까지 땅을 팔 수나 있는지 의문이었고, 그렇게 해서 원인을 알아낸다 해도 그걸 과연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타리크는 이런 사실을 모를 사람도 아닌 슬라르한이 왜 저렇게 낙천적인지 궁금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격려해 줘야 할 만큼 최악을 가정하던 사람이었는데…….
“주인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니 타리크 님도 기분 푸세요. 그나저나 내일 점심은 야외에서 먹겠네요. 야외에서 먹으면 똑같은 빵이라도 훨씬 맛있는데.”
타리크는 먹을 생각부터 하고 있는 일리에를 가늘어진 눈매로 쳐다보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각하께서 변하신 건 저 녀석이 온 다음부터야.’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곁에 둘 때부터 걱정스럽더니 결국 이 꼴이 났다.
언제나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제 주인을 오염시킨 주범 같아서, 타리크는 일리에가 영 탐탁지 않았다.
물론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딛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아이라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일리에가 슬라르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냉정하게 따져야 할 문제였다.
“내일은 날씨도 좋을 것 같으니 네 말대로 소풍이라도 나간 것 같겠구나.”
“주인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주방에서 흰 빵이랑 햄하고 치즈랑 꿀이랑 과일을 싸주신대요. 아, 생각만 해도 침 나온다…….”
“평소 먹는 게 부실한 건가? 주방에서 음식으로 차별하는 거라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먹는 거 생각하면 침 나오잖아요. 주인님은 안 그러세요? 매일 먹는 거라도 배고플 때 생각하면 침 나오는데…….”
“식욕이 돈다는 건 건강하다는 뜻이지. 다행이구나.”
타리크는 일리에의 바보 같은 말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슬라르한이 낯설었다.
그의 주군은 이렇지 않았는데…… 이렇지 않았단 말이다…….
“저는 이만 제 짐을 챙기러 가보겠습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속이 터지겠군요.”
결국 타리크는 싸울 의지를 잃고 방에서 나가 버렸고 일리에는 슬라르한과 둘만 남게 되어서야 헤헤거리던 웃음을 가라앉혔다.
“그나저나, 엘로르 전하께서 빈민가의 괴질을 구제하기로 하셨다고요?”
“그래. 그것도 꽤 골치 아플 것 같던데 제일 처음 손을 들어 청하더군.”
일리에는 그 과제 자체가 클리드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전생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과제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정말로 클리드가 계획한 거라면…….
‘죽여 버릴까, 진짜?’
엘로르를 띄우기 위해 안 그래도 하루하루 사는 게 힘겨운 빈민가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면, 그는 정말 천벌을 받아 마땅했다.
괴질 자체만으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얼굴을 비롯해 온몸에 두드러기나 수포가 생기는 병증 때문에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마저 하지 못하게 됐다.
구걸을 하려고 해도 그렇게 끔찍한 몰골로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엘로르 전하는 아마 잘 해결하실 것 같네요.”
“그걸 어떻게…… 설마, 엘로르 전하의 앞날까지 점치는 거냐?”
“그냥 감이 그래요. 엘로르 전하께서 노리던 일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일리에의 얼굴에서 불쾌감을 읽은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턱을 가볍게 잡고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다른 후보 신경 쓰지 마라. 넌 나에게만 집중해.”
“……예?”
“네 능력을 다른 놈들을 위해서 쓰지 말라고.”
“언제는 돌팔이 취급하셨으면서…….”
“돌팔이 능력이라도 날 위해 써야지. 넌 내 노예니까.”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짙은 호박색 눈동자에, 일리에는 호박 안에 갇힌 곤충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전생에는 이 눈과 이렇게나 가까이 마주할 일이 없었다.
몇 번 눈싸움하듯 서로 쳐다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의 눈동자가 이토록 아름다운 줄 몰랐다.
호박색, 짙은 황금색, 농밀한 꿀 색, 붉은빛 도는 달 색…….
어떻게 생각해도 황홀하게만 느껴지는 색깔이었다.
“너를 모욕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내 말은, 괜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야. 혹시라도 기분이 상했다면…….”
아무 말 없는 일리에를 보고 혹시 ‘노예’라는 표현에 상처받은 것일까 봐 슬라르한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일리에가 어정쩡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주인님께서 저를 노예 이상으로 취급해 주신다는 건 잘 알고 있고, 언제나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슬라르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노예 이상으로 취급…….’
분명 노예 ‘이상으로’ 취급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치 당신이 나를 ‘노예로 취급’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책은 이거 한 권이면 될까요? 다른 건 더 넣으실 거 없으세요?”
“아…… 이것도 한 권 넣어라.”
퍼뜩 정신을 차린 슬라르한은 위르스 산 근처에 머물며 밤에 읽을 책을 한 권 더 골랐다.
일리에의 처우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각 후보들이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는 황실 수사대와 근위병들을 데리고 노예 격투장에 대한 소문을 뒤쫓았고, 라반은 보석을 도난당했다는 귀족들과 일대일로 면담하며 도난 규모와 당시 상황을 파악했다.
그들은 그 조사만으로도 시간을 꽤 보내게 될 터였다.
그러나 엘로르의 접근은 조금 달랐다.
“전하.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역학 조사부터 할 거라고 믿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클리드는 음식과 깨끗한 이불을 준비시킨 뒤 엘로르에게 물었다.
“으으…… 거기, 냄새가 역하다던데…….”
“냄새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도 과히 아름답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엘로르가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전하만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화사하고 친근한 것만으로는 황제감처럼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 과제야말로 전하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 주는, 예를 들자면…… 성녀? 그래요, 그게 좋겠군요. 전하께서는 성녀가 되시는 겁니다.”
클리드의 설득에 엘로르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클리드에게 괴질을 일으킬 수 있는 독약을 내보이며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궁에 앉아 해독제만 적절할 때에 풀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클리드의 의견이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독약을 건네준 ‘그 사람’ 역시 클리드의 계획에 찬성했고 말이다.
“고생스러우시겠지만 앞으로 며칠간은 빈민가에서 최대한 아름다운 표정을 유지해 주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진짜 천사가 됐다고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빈민들이 아무리 칭송해 봤자 그게 귀족들에게 먹히기나 할까요?”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바로 제가 할 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랜만에 보는 클리드의 완벽한 미소가 기꺼워 엘로르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황궁에서는 빈민가에 배급할 음식과 물건들을 실은 커다란 수레와 함께 엘로르가 행차에 나섰다.
빈민가에 다가갈수록 풍겨오는 역한 냄새에 엘로르는 당장이라도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녀의 속내를 빤히 알고 있다는 듯 클리드가 작은 아티팩트가 달린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후각을 마비시키는 주문이 걸린 아티팩트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으시지요?”
아티팩트가 몸에 닿자마자 들이쉬는 공기는 무취에 가까워졌다.
거기에 놀란 엘로르는 짐짓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있으면 미리 주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아까부터 얼마나 초조했는데…….”
“유지 시간이 일곱 시간밖에 되지 않아서요. 그리고 이런 물건이 있더라도 전하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일이니까요.”
사실은 엘로르가 알아서 뭔가를 준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늦게 준 것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질 독약을 들고 왔을 때, 클리드는 엘로르가 흑마법사에게서 그 약을 구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래서 빈민가의 악취에 대해 잔뜩 겁을 주면 거기에 대비할 물건 역시 흑마법사를 통해 구하지 않을까 싶어 주변에 사람까지 심어두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아니라 독만 취급하는 곳에서 구한 건가?’
어느 쪽이 됐건 변수로 취급해야 할 문제였다.
이게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면 앞으로의 노선에 혼란이 생길 것을 대비해 엘로르에게 그 참모를 소개해 달라고 설득해야 했다.
어차피 엘로르와 저 사이의 계약서는 확고했고, 어떤 참모가 됐든 엘로르를 황제로 만드는 데 힘쓸 사람이라면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엘로르가 알아서 계획한 일이라면 그녀에 대한 평가를 바꿔야 했다.
겉으로는 별생각 없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고단수쯤으로…….
그건 다른 참모가 있는 쪽보다 조금 더 위험한 가정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마차가 멈추며 호위 기사가 도착을 알리자 클리드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전하께서 잘만 해주신다면, 조만간 수도 내에 전하가 성녀라는 소문이 돌게 될 겁니다.”
“알았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엘로르는 며칠 동안 연습했던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이끌고 온 사람들은 빈민가에 당도하자마자 굶주린 주민들에게 먹을 것부터 나눠주었다.
괴질 자체도 괴로웠지만 괴질 때문에 오랫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굶주렸던 사람들은 먹을 것에 더 환호했다.
“얼마나 괴로웠니. 빵은 충분히 있으니 차례차례 받아가렴.”
엘로르가 동정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헐벗은 아이들에게 직접 빵을 건넸다.
그런 그녀의 외양은 성녀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얗고 장식 없는 면 드레스에 작은 금붙이 하나 없이 머릿수건만 두른 모습은 그녀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휼의 천사처럼 보이게 했다.
게다가 빈민들은 제국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엘로르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 시각적인 충격은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 천사라 믿게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빈민가에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람들은 그녀를 황녀님이 아니라 성녀님이라 부르며 그녀를 향해 성호를 긋고 기도했다.
그쯤 되자 엘로르는 빈민가 근처의 신전에 가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신전에 기부도 두둑이 하자 그녀가 얼마나 신실하고 고결한지 칭송하는 이야기가 신전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배우지 못한 빈민가 사람들에게는 신관들의 말이 절대적이었고, 그들은 모두 엘로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나타난 성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엘로르가 기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괴질이 점차 낫기 시작한 것은 그 믿음에 기름을 부어 광신도들을 양산했다.
독을 탔던 우물에 때맞춰 해독제를 탄 것뿐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사람들로서는 모든 게 엘로르 덕분인 것만 같았다.
“성녀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엘룬께서 보내신 천사다!”
심지어 엘로르가 빵을 나눠주던 손에서 치유의 빛이 새어 나온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사람들이 출몰하고, 그녀가 괴질뿐만 아니라 다른 불치병 환자까지 고쳤다는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빈민가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점차 수도 내의 평민 거리, 부유층 거리로 퍼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계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거 들으셨어요? 엘로르 전하가 엘라헤 경전 20사도 편에 나오는 에밀라 성녀의 현신이래요.”
“예에? 설마요…….”
“하지만 에밀라 성녀가 했던 방식대로 빈민가의 괴질을 낫게 했다잖아요! 전하께서 축복을 내리신 빵을 먹은 사람들이 며칠 뒤에 괴질에서 다 나았대요. 손에서 무슨 빛도 새어 나왔다던데요?”
“정말이에요?”
“네. 직접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네요.”
신비한 일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었다.
엘로르는 ‘제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요. 다만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펴 달라고 엘룬께 열심히 기도를 올렸을 뿐이에요.’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그게 오히려 소문을 증폭시켰다.
“엘룬께서 전하의 기도에 응답하셨대요!”
“여태 그다지 신실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의외네요.”
“이번 일로 뭔가 각성하신 것 같더라고요. 왜, 경전에도 그런 얘기가 나오잖아요.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거나 각성해서 성인의 길로 접어드는…….”
“하긴, 날 때부터 성인이었다는 얘기는 드물죠. 엘로르 전하가 천사의 모습과 닮기도 했어요.”
과제를 금방 해결한 데다 성녀라는 이미지도 차근차근 구축해 나가는 엘로르는 이번 시험의 승자가 자신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조사 결과도 수합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리스나 라반은 물론이고, 위르스 산으로 떠난 뒤 아무 소식 없는 슬라르한보다 훨씬 앞서게 된 것이 분명했다.
클리드와도 자축하며 샴페인을 한잔하고 돌아온 엘로르는 이번 일의 일등 공신에게 밀서를 썼다.
-자네가 준 독약과 해독제는 아주 유용하게 잘 썼네. 얼른 자네가 내 곁에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대가는 섭섭지 않게 내어줄 테니, 최대한 빨리 수도로 와주길 바라.
추신. 이게 자네의 결심을 도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엄청난 시간 회귀의 흑마법을 경험했다네. 자네가 내 곁에 와준다면 그 이야기도 상세히 해주지.
그녀는 메시지를 쓴 종이를 작게 접어 책상 위에 놓인 두꺼비 모양 도자기 장식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후 두꺼비 안에서 빛이 잠깐 새어 나오더니 잠잠해졌다.
그녀의 편지는 무사히 저쪽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 * *
우르르릉.
또 땅이 울렸다.
슬라르한 일행을 안내하던 인부들이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위르스 산 중턱에 올라오는 사이 벌써 세 번째 벌어지는 일이었다.
“정말 이상하긴 하네요. 위르스 산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진동인 데다, 땅속 깊은 곳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예요.”
기사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진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뻔했다. 산에 오르기 전 마을 사람들이 했던 얘기가 진짜인 것 같다는 소리일 터였다.
“에이, 설마, 이 아래 드래곤이 있다는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말이야, 좀 이상하긴 하잖아!”
위르스 산 아래의 달로팡 마을에서는 위르스 산 지하 깊은 곳에 드래곤이 봉인되어 있고, 그 봉인이 깨어질 때가 도래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꽤 오래전부터 확고한 것 같았지만 제국에서 드래곤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드래곤은 전설과 신화 속의 동물일 뿐, 그것의 실재를 증명할 증거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울리는 지반은 그런 허황한 믿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기이한 것이었다.
“아직 조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면밀히 조사하도록.”
기사들이 수군대자 슬라르한이 그들의 동요를 저지했다.
파랗게 젊은 가주가 저보다 나이 많은 기사들을 단 한마디로 다잡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난 기사놈들이랑 싸우고 구르고 깨지면서 겨우 인정받았는데…….’
기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더욱 악착같이 훈련했던 전생을 떠올리며 일리에는 혀를 내둘렀다.
물론 성별이 통솔력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남자라고 해서 기사들이 잘 따르는 것이었다면 3황자인 타리스도 기사들을 잘 다뤄야 했다.
그러나 아이리스의 기에 눌려 목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했던 타리스는 기사들 사이에서 은근히 무시당하곤 했다.
그에 비하자면 릴리에트가 차라리 나았다.
황녀가 뭣도 모르면서 검을 들고 설친다고 뒷말하던 기사들도 릴리에트가 직접 검을 들고 위험 속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본 뒤로는 점차 그녀를 인정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그런 보여주기식 행동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따르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런 걸 카리스마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저런 건 타고나는 거겠지? 역시, 신이 선택한 인간답구만.’
일리에는 멋있게 장성한 자식 보는 것처럼 뿌듯한 얼굴로 슬라르한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을 둘러보는 슬라르한의 옆얼굴도 근사했다.
콧대며 턱선이며 어찌나 단단하고 곧게 뻗었는지, 가능하다면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플래티넘 블론드의 아름다움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돌아보는 호박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눈을 한참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일리에는 슬라르한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서야 자신이 그와 한참이나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나?”
“아, 네! 더할 나위 없이 괜찮습니다!”
슬라르한은 주변 기사들의 눈치 때문에 일리에에게 다가가지는 못하고 흘끔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알아챈 타리크만 혼자 한숨을 내쉬었을 뿐, 다른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리에는 더 이상 슬라르한에게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이 산에 온 목적을 다시 곱씹었다.
‘위르스 산 문제를 해결하면 황제도 관련 이권 정도는 내어줄 거야. 당장은 돈이 좀 나가겠지만 내후년 초에는 몇 곱절로 불어나 돌아올 테니까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전생에 위르스 산 문제를 과제로 받았던 일리에는 몇 달이나 이 산에서 야영을 하며 원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고생도 그런 개고생이 없었다.
진동이 아무래도 지하의 아주 깊지 않은 지점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기에 그 지점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문제는 땅을 파는 지점을 선정하는 일이었다.
진동은 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으니 어느 한 지점을 잡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결국 땅을 조금 파기는 했지만 그다지 깊게 파지 않고 문제는 해결됐다.
정말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다.
‘그런데 거기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좀 가물가물하단 말이지.’
대략적인 위치는 기억이 났지만 전생에서도 앗, 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정확한 지점이 어딘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일리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안내자들의 걸음이 멈췄다.
“저희는 여기까지밖에 안내해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안쪽으로 더 가면 진동이 점점 더 강해지는데, 사람들 말로는 거기서 드래곤이 내뿜은 불길이 터져 나올 거라고 합니다. 부디, 공작 각하의 무사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들은 약속했던 곳까지 안내를 마치자 수고비를 받고는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금방이라도 드래곤이 기지개를 켤 것 같았던 모양이다.
“두 사람씩 조를 나눠 조사하도록 하겠다. 돌아보면서 보통의 산과 다른 점은 없는지, 대지의 진동 외에 이상한 현상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상관없다.”
“예!”
슬라르한은 데리고 온 기사들을 둘씩 짝지은 다음 지도를 보며 몇 군데로 흩어지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짝으로는 일리에를 선택했다.
당연히 타리크가 잔뜩 힘준 눈으로 슬라르한을 타박했지만 슬라르한의 논리는 간단했다.
“각 조의 평균 전력을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게 됐다. 내가 저 녀석과 한 조가 되어야 평균 전력에 맞지 않겠나.”
“차라리 제가 저 녀석과 한 조가…….”
“일리에가 자네와 한 조가 됐다간 자네 눈치를 보느라 사고가 날 걸세.”
타리크의 서슬 퍼런 눈빛에 일리에가 찔끔 놀라며 슬그머니 한 발 뒤로 물러나려다 돌부리에 걸려 휘청했다.
슬라르한이 재빨리 일리에를 낚아챘고 타리크는 슬라르한의 말대로 될 확률이 아주 높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더라도 해가 저 산꼭대기와 같은 선상에 올 때까지는 이 자리로 반드시 돌아와라. 만약 사고가 났다면 여기 오기 전에 지급한 신호탄을 하늘로 쏘도록. 신호탄이 터지면 주변 조는 조사를 멈추고 곧바로 지원하러 가고.”
슬라르한의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총 열두 개의 조는 위르스 산 곳곳으로 흩어졌다.
지반이 울리는 것만 아니라면 위험한 짐승도 거의 없고 산세가 험하지도 않아서 위급 상황이 발생할 일은 적었다.
일리에는 기사들이 멀리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주변에 산새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자 지도를 살피는 슬라르한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느 쪽으로 가시게요?”
“으음…… 이쪽이 어떨까 싶은데…….”
슬라르한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자 일리에가 저도 보자며 폴짝폴짝 뛰다가 지도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지도를 냉큼 줍더니 아까 슬라르한이 가리킨 곳보다 조금 아래쪽을 짚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 말씀이시죠? 저도 여기가 왠지 괜찮을 것 같았는데! 역시 주인님이랑은 뭔가가 통하는 것 같다니까요?”
“아니, 내가 말한 곳은…….”
“여기 맞잖아요! 아까 분명히 봤는걸요. 자자, 얼른 출발해요, 주인님.”
일리에가 슬라르한의 팔을 잡아끌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슬라르한이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팔을 잡은 일리에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기로 했다.
자신이 선택한 곳이든 일리에가 선택한 곳이든 다 살펴보기는 해야 하는 지역이었으니, 어딜 먼저 가든 상관없었으니까.
‘그리고 이 녀석은 또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으니…….’
이제는 일일이 의심하기도 지쳤고, 일리에의 말을 들어 잘못된 적도 없었기에 그냥 일리에가 우기면 우기는 대로 따라주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나저나 드래곤이 잠들었다는 산치고는 참 평화롭고 좋네요.”
우거진 이파리 사이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며 반짝였다.
잠에서 깬 산새들이 지저귀고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으며 아침 식사 중이던 사슴이 놀란 얼굴을 하다가 멀리 뛰어가 버렸다.
뱀이 튀어나오지 않는지 잘 살펴야 했지만 두꺼운 부츠를 신고 있어서 뱀에 물릴 걱정은 크게 없었다.
과제만 아니었더라면 산행 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산길이었다.
“너는 정말로 이 산 아래 드래곤이 자고 있을 것 같으냐?”
“으음…… 주인님은 어떠신데요?”
“웃기는 소리지.”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전설 속의 드래곤 중에서도 땅속에 파묻혀 있던 놈은 한 마리도 없다고요. 봉인당했다는 드래곤도 없고요.”
전생에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드래곤 관련한 책은 다 뒤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나중에는 드래곤 그림만 봐도 토할 것 같을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뒤졌지만 산 아래 묻힌 게 드래곤이리라는 단서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드래곤 얘기를 많이 아는가 보군.”
“솔직히 매력적인 이야기이긴 하잖아요. 하지만 실존했던 생물도 아닌 것 같아요. 책마다 묘사하는 게 전부 달라서…….”
일리에가 드래곤에 대한 책은 언제 그렇게 읽은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슬라르한은 익숙한 태도로 그 생각을 지웠다.
그보다는 일리에와 둘이 공기 맑은 산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을 즐기는 게 더 중요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황위니 과제니 그딴 것은 다 집어치우고, 일리에와 야영이나 하면서 놀다 가고 싶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놀아본 적은 없는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슬라르한이 그런 생각에 빠진 와중에도 일리에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곳을 찾아 계속 두리번거렸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초조하게 기억과 딱 들어맞는 풍경을 찾는데 저 멀리 눈에 익은 너럭바위 하나가 보였다.
마치 쉬어가라는 듯 평평하고 널찍한 너럭바위 주변으로는 키가 큰 나무들이 서서 그늘을 드리웠고,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찾았다!’
전생에는 저 바위 위에 앉아 클리드와 회의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저 너머로 미끄러져서 운 좋게 찾은 거였지.’
바위 뒤쪽으로는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자세한 지형을 알기 어려웠지만, 사실은 그 너머에 있는 계곡 쪽으로 가파르게 비탈져 있었다.
전생의 릴리에트는 바위 위에 앉아 길어지는 조사를 짜증 내다가 숲 안쪽에 있는 산딸기를 보고 무심코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지며 계곡 쪽으로 넘어갔고 우연히 이 산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게 지름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빙 돌아 계곡으로 가는 편이 낫겠지? 그런데 뭐라고 꼬드겨서 얘를 거기까지 데려가야 하냐…….’
일리에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일단 너럭바위까지 슬라르한을 데려가기로 했다.
“저기, 주인님. 다리가 좀 아픈데 저기서 잠깐만 쉬면 안 될까요? 마침 넓적하니, 앉아서 쉬기 좋은 모양인데요?”
슬라르한은 다행히 일리에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일리에는 전생에서처럼 바위 위로 올라가 대자로 뻗어 누웠다.
노예가 주인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누우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슬라르한이 저를 혼낼 것 같지는 않았다.
슬라르한은 오히려 일리에의 생각보다 한술 더 떠서, 지나치게 편히 드러누운 일리에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다가 자기도 드러누워 버렸다.
비천한 루벨파스트 출신 노예와 고귀한 황실 핏줄인 공작이 나란히 드러누운 모습이라니, 누군가 본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두 사람은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나란히 드러누워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솨아아, 하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때때로 산새 소리, 날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올 뿐,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평화롭네요.”
“그렇구나.”
“이러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어떻게?”
“버릇없이 굴려는 건 아닌데요…… 저도 노예가 아니고, 주인님도 공작님이 아니고, 그냥 이 자연의 일부일 뿐인 것 같아서…… 왠지 속이 간질거려요.”
일리에는 제 명치 부근을 문지르며 실실 웃었다.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전생에 칼을 겨눴던 상대와 이런 호젓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는 게…….
“일리에.”
“네, 주인님.”
“이상한 소리라는 건 안다만…… 여긴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말인데…….”
“네.”
“내 이름만 한 번 불러봐.”
“네?”
“벌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내 이름만 한 번 불러봐.”
일리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슬라르한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일리에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역시 고개만 돌려 일리에를 쳐다보았다.
“어서.”
“……슬, 라르……한…….”
“좀 더 자연스럽게. 아는 사람 부르듯이. 애칭으로 불러도 좋아.”
“……명령이신 거죠?”
“그래, 그렇다고 치자.”
일리에는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으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전생의 그를 부르듯이 불렀다.
“르한.”
“…….”
“르한!”
그의 목울대가 꿀꺽, 하는 소리를 내며 오르내렸다.
“일리에. 너 혹시…… 나랑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가?”
“예?”
일리에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슬라르한이 전생을 알고 있을 리 없는데, 그리고 이번 생에서는 릴리에트라는 인간도 없고 저와 만난 적이 있을 리 없는데,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저야, 뭐, 기억이 없으니까요.”
“글쎄. 정말로 기억이 없을까.”
탄력 있는 입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일리에는 턱 아래까지 긴장감이 치밀어올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만 누워 있으려니 좀 춥네요. 산이 확실히 저 아랫마을보다 기온이 낮은 것 같아요.”
팔뚝에도 소름이 돋아 일리에는 제 거짓말이 참 그럴듯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 주제를 바꾸려는 일리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슬라르한은 여전한 눈빛으로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리에는 빠져나갈 구멍 없는 촘촘한 그물이 다가오는 것만 같아서 괜히 주위를 살피다가 너럭바위 뒤쪽 숲속에서 산딸기가 조랑조랑 열려 있는 걸 보았다.
“어? 산딸기다! 주인님, 산딸기 드실래요?”
일리에는 슬라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쪽으로 폴짝 넘어가서는 조심조심 산딸기 덤불을 향해 나아갔다.
전생에 한 번 당해봤으니 이번에는 진짜 조심해서 딸기를 딸 생각이었다.
“일리에. 일리에, 돌아와! 거기 수풀이 너무 우거져서 위험……!”
“으앗!”
슬라르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일리에의 발이 아래쪽으로 쑥 미끄러지며 그녀의 몸이 푹 꺼졌다.
키 큰 수풀 너머로는 경사가 극심한 비탈이었다.
“일리에!”
“으아아악!”
일리에는 비탈 곳곳에 튀어나온 돌부리나 나무 둥치에 채이고 쓸리며 미끄러지면서 전생의 기억을 완벽히 떠올렸다.
‘제기랄, 전생에도 딱 이랬는데!’
바보 같은 짓을 두 번째 하고 있는 게 제일 수치스러웠다.
* * *
허둥거리던 일리에가 순식간에 수풀 아래로 미끄러져 사라지자 슬라르한 역시 벌떡 일어나 일리에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가갔다.
그가 주의를 줬던 대로 수풀이 키가 커서 잘 안 보였을 뿐, 수풀 뒤로는 경사 심한 비탈길이 저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리에!”
일리에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저 멀리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미끄러지는 소리만 아스라이 들릴 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슬라르한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일리에가 미끄러진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정신없이 내려가면서도 일리에의 몸이 쓸고 지나간 길에 툭툭 불거진 나무뿌리와 돌부리 같은 것에 시선이 갔다.
저기에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지 속이 바싹 탔다.
일리에가 미끄러져 내려가며 내던 소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비탈길이 끝나는 곳이 단차가 꽤 나는 낭떠러지라면 일리에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제기랄! 그까짓 위화감이 뭐라고!’
또 이상한 위화감을 느껴 일리에를 압박했던 게 문제였다.
그녀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 도대체 왜 그랬는지…….
슬라르한은 생각보다 긴 비탈을 내려가며 내내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다 마법이 발동한 느낌이 들었다.
“일리에!”
그는 일리에의 이름을 외치며 거의 날듯이 뛰어갔다. 다행히 비탈은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과 자연스럽게 만나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접점에서, 바닥에 엎어진 일리에가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슬라르한은 일리에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뒤집어 품에 안았다.
몸 앞판 전체가 흙과 낙엽, 잔가지로 더러워진 건 둘째치고 곳곳이 쓸리고 채인 상처로 가득했다.
치명상은 없었지만 맨살이 드러난 손과 팔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고, 옷으로 가려진 부분도 심하게 긁힌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검대에 매달린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제 손을 그으려는 순간, 일리에가 작은 칼을 쥔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안…… 돼요…….”
“일리에? 정신이 드나?”
“크읏…… 흐아…… 네, 저는…… 괜찮으니까, 상처 내지 마세요.”
“괜찮긴!”
“이 정도는, 정말로, 괜찮아요…….”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손목을 놓지 않으며 몇 번이고 괜찮다고만 했다.
사실 일리에는 지금 아픈 것보다는 창피한 것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그녀의 ‘제발 방금 일어난 일은 모르는 척 넘어가자.’라는 무언의 요청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그녀의 상의를 살짝 들춰보았다.
앞판으로 미끄러지면서 셔츠도 바지에서 빠져나온 데다 군데군데 찢어지기까지 했다.
일리에의 말처럼 제발 아무렇지 않기를 바라며 셔츠를 명치 부근까지 올려보았지만, 일리에의 하얀 배는 푸르딩딩한 멍과 크고 작은 찰과상으로 울긋불긋했다.
슬라르한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제 손날 부분을 칼로 그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네 녀석의 괜찮다는 말은 앞으로 절대 믿지 않기로 했다.”
일리에는 제 입술 위로 들이댄 슬라르한의 손을 어쩔 수 없이 할짝할짝 핥았다.
쪽쪽 빠는 것보다야 덜 민망하겠거니 했는데 배어나는 피를 핥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빠는 것보다 더 민망해져서 결국은 입술을 대고 빨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주 다치는 거지? 혹시 네가 쓰는 점술의 대가가 이런 건가?”
“에, 예?”
갑자기 무슨 소린가 하고 일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다치는 꼴을 너무 많이 보는 게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너…… 설마, 흑마법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예에? 제 주제에 무슨 흑마법입니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랍니까?”
“흑마법의 대가는 대체로 생명력이다. 큰일의 대가는 누군가의 목숨이거나 영혼일 때도 있지만, 너처럼 자잘한 행운을 만드는 건 이 정도 다치는 것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겠지.”
일리에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제 배의 상처를 흘끗 내려다보다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저도 제가 다친 게 그런 대단한 이유였으면 덜 쪽팔렸을 것 같은데요, 이건 그냥 제가 덜렁대서 다친 겁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다친 적이 있었거든요. 어떻게 이런 멍청한 짓을 두 번이나 할 수 있는지 저도 황당하네요.”
“그런 거면 오히려 다행이다. 앞으로도 어떤 유혹이 있든 흑마법에는 절대 손대면 안 된다. 알았나?”
슬라르한은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는 녀석이 ‘예전에도’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게 웃겼지만, 그걸 꼬투리 잡아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아까도 그러다가 일리에가 다친 거니까.
그 속내를 모르는 일리에는 성숙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저를 걱정해 주는 슬라르한의 모습에 속이 더 간질거렸다.
이렇게 괜찮은 놈인 줄 알았으면 전생에도 친하게 지냈을 텐데…….
하긴, 릴리에트가 슬라르한을 중용하려고 했어도 클리드가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일리에는 통증이 좀 가시자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마침 슬라르한의 상처도 작아져 피도 거의 나지 않았다.
슬라르한이 또 한 번 더 상처를 내려고 했지만 일리에가 간신히 말렸다.
“진짜 이제 괜찮습니다. 이거 보세요. 상처도 다 아물었잖아요. 멍도 조금밖에 안 남았고요. 더러운 것만 좀 씻으면 될 것 같아요.”
슬라르한은 몇 개 남은 멍 자국도 영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았지만 일리에가 거의 빌 듯이 사정하자 작은 칼을 다시 검대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일리에를 번쩍 안아 들고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슬라르한에게 달랑 안겼을 때는 당황한 일리에였지만 그가 계곡물로 다가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이 좀 이상하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그를 이 계곡물 쪽으로 유인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제, 제가 씻을게요.”
아무리 어린애 같은 일리에더라도 열일곱 살이나 된 소녀의 몸을 슬라르한이 씻겨줄 수는 없었기에 슬라르한도 아무 소리 않고 그녀를 물가에 내려주었다.
일리에는 흙이 가득 들어찬 신발을 벗어 탈탈 털고 셔츠 자락도 펄럭이며 안에 가득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러다 발을 삐끗하지만 않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방금 덜렁여서 큰일 날 뻔한 녀석이 도무지 조심할 줄을 모르는군.”
일리에가 바위틈으로 고꾸라지려는 것을 간신히 낚아챈 슬라르한은 아야야, 하며 발목을 문지르는 일리에 옆에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그러고는 일리에의 발목을 쥔 채 계곡물을 떠다 발 위에 끼얹었다.
“제, 제가 할게요, 제가……!”
“넌 제발 가만히만 있어라.”
슬라르한이 혀를 차며 일리에의 발목을 더 강하게 쥐었다.
그녀의 발목에 매달린 발찌에는 붉은 아티팩트가 두 개만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나, 아까 느꼈던 마법 파동은 이 아티팩트가 발동하는 느낌이었다. 즉, 이 아티팩트가 없었으면 일리에는 방금 치명상을 입거나 죽었을 거라는 소리였다.
날이 춥지도 않은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다치는 것 자체를 막는 아티팩트를 구해야 하나……?”
“네?”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또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일리에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문득 깨달았다.
“여기 물이…… 꽤 따뜻한데……?”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일리에는 그가 드디어 수온에 대해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 반응이 너무 작위적이었나 싶어 조금 눈치를 보는데 슬라르한은 수온이 높다는 것 자체에 정신이 팔려 일리에의 표정을 잘 살피지 못했다.
“보통 이런 계곡의 물은 아주 차갑기 마련인데 여긴 오히려 따뜻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드래곤이 내뿜은 불길이 지하수를 데운 걸까요?”
일리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지만 슬라르한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일리에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다.
“어, 주, 주인님. 얼른 뭔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너부터 씻기고.”
“저는 괜찮은…….”
“네 괜찮다는 말은 안 믿겠다고 아까 얘기했을 텐데.”
그러고는 태연하게 다른 쪽 발목을 쥐고 흙으로 더러워진 발을 씻기는 게 아닌가.
일리에는 제 발가락 사이까지 꼼꼼히 씻기는 슬라르한의 손길에 민망해 죽을 것만 같았다.
“저,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아직 애지.”
“제 나이에 결혼하는 애들도 많은데요. 솔직히 제가 루벨파스트에서 왔을 당시에는 너무 말라서 어려 보였겠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고요. 주인님께서는 저를 너무 어리게만 보시는 경향이 있으세요.”
슬라르한은 뜬금없는 반항에 일리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흙이며 자잘한 나무껍질 같은 걸 잔뜩 묻힌 얼굴로 다 컸다고 빽빽대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일리에의 말대로, 마냥 어린아이처럼만 볼 수도 없었다.
일리에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 어린아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의뭉스러웠다.
외양도 마찬가지였다.
바싹 마른 채 두 눈만 커다랗던 첫인상과 비교하면 그녀는 허물을 벗는 나비처럼 날이 갈수록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슬라르한은 물기 묻은 손으로 일리에의 뺨을 닦으며 말했다.
“나한테 어른 취급받아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의 엄지손가락 끝이 일리에의 입술 주변을 쓸었다.
거기에도 흙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일리에의 목덜미로는 열이 확 올랐다.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정작 슬라르한은 계곡물에 손을 담가 흙을 씻어낸 뒤 다시 일리에의 얼굴을 닦아줄 뿐이었다. 어린아이 얼굴 씻기듯, 딱 그렇게…….
그 뒤로 얼마간, 슬라르한은 일리에를 씻기고, 일리에는 뺨만 발갛게 익힌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앉아 있었다.
땅이 다시 구르릉, 하고 울리지 않았더라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을 것이다.
“따, 땅이 울리는 게…… 계곡물이 따뜻한 거랑 연관이 있을까요?”
일리에의 질문에 슬라르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계곡물이 흘러나오는 수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으로 가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둘은 일리에의 발이 다 마르자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계곡물이 시작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람은 큰 바위 아래 숨겨진 작은 구멍 몇 군데에서 물이 졸졸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슬라르한은 흘러나오는 물에 손을 대보고 아까부터 생각하던 가설에 확신을 더했다.
“이 산 아래 묻혀 있는 건 드래곤이 아니라 온천인 모양이다.”
“온천이요? 온천이면, 땅에서 따뜻한 물이 솟는다는 그거 말씀이신가요?”
“그래. 제대로만 터진다면 이 일대가 유명한 요양지가 될 거다.”
“어…… 그거, 좋은 거 맞죠?”
“문제는, 어딜 터트려야 할지 모른다는 거지.”
일리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이미 자신이 향해야 할 방향 쪽을 보고 있었다.
‘저 위쪽 어딘가였는데…….’
전생에서는 자신이 뒤돌고 있는 사이 어느 다혈질 기사가 바닥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다가 운 좋게 온천이 터졌었다. 그래서 일리에도 그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정 안되면 그때 그놈처럼 이 일대를 다 파보면 되겠지.’
일리에는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바위 아래를 살펴보다가 은근슬쩍 바위 위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함부로 뛰지 마라. 또 다칠라.”
그의 염려 어린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일리에는 혼자 빙긋 웃으며 온천이 터졌던 그 주변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 타이밍 좋게도 지반이 또 울렸다. 이번엔 일리에가 느끼기에도 바로 제 발아래라는 느낌이 들었다.
“주, 주인님! 여기! 여기가 좀 이상해요.”
그 말에 슬라르한도 재빨리 일리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역시 제 발밑으로 뭔가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진동을 느꼈다.
“일리에. 저쪽으로 물러서 있어.”
“어…… 이쯤이면 될까요?”
“아니. 더 멀리. 절대 가까이 오지 마라.”
일리에는 그의 말대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물러섰다.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되는 곳에 이르러서야 검을 뽑아 들고 바닥에 힘껏 꽂았다.
그리고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은 채 자신의 오러를 검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부터 일렁이는 기운이 번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 힘은 곧 검신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얼마나 오러를 쏟아부었을까, 잠잠해졌던 바닥이 다시 구구궁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울리다가 사라질 진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진이라도 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지반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올랐다.
“우와……!”
전생에는 물줄기가 터지는 순간을 보지 못했던 터라 일리에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슬라르한이 오러를 밀어 넣길 멈추지 않은 탓에 물줄기는 두 군데에서 더 터져 나왔다.
그제야 슬라르한은 검을 뽑고 품 안에 있던 신호탄을 하늘로 쏘았다.
조만간 다른 조가 이쪽으로 오면 이 일대를 더 조사한 뒤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하하하!”
슬라르한의 속을 늘 수런거리게 만드는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에가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기껏 말려놓은 몸이 금방 따끈한 물로 젖어 들었고 까만 머리칼이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었다.
“물이 엄청 따뜻해요! 우와, 기분 좋아!”
슬라르한은 일리에를 향해 걸어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또 일리에 덕분에 문제를 해결했어.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정작 그의 행운 부적이나 다름없는 일리에는 따뜻한 물이 신기하다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온천수는 슬라르한의 머리 위로도 떨어져 그를 적셨다.
피할 새도 없이 젖어 들고 말았다.
“일리에.”
“네?”
쏴아아, 떨어지는 물방울 사이로 맑게 젖은 일리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모든 게 슬라르한의 망막에 세세하게 새겨졌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물줄기와 일리에의 해말간 얼굴에 산란하는 찬연한 빛, 투명한 물방울 같은 회색 눈동자와 촉촉하게 젖은 붉은 입술.
아름다운 일리에.
아름다워서 슬픈 일리에.
아름답고 슬퍼서 죽도록 갖고 싶은 일리에.
“주인님? 저 부르지 않으셨어요?”
일리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방금 떠오른 생각이 너무 말도 안 돼서…….
* * *
슬라르한이 위르스 산에서 온천을 찾아냈다는 소식에 황제는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수도권 내의 온천은 황실의 독점 사업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쁜 황제와는 달리 다른 후보들과 황후, 황비들은 미간을 구겼다.
위르스 산으로 떠나 몇 달간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슬라르한이 3주도 되지 않아 수도로 돌아온 데다 황제의 환영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황실과 제국의 근심이었던 위르스 산 문제를 이토록 통쾌하게 해결하다니, 기쁘기 이를 데 없구나. 네가 해낼 줄 알았다, 슬라르한.”
“황제 폐하의 은덕이십니다.”
“하하하! 정녕 충신이로고. 충신에게는 그 공에 맞는 상을 내려야 하는 법.”
황제는 흐뭇한 마음이 되어 곁에 서 있던 대신에게 종이와 잉크, 펜을 가져오도록 했다.
“위르스 산 온천을 찾아낸 것은 전적으로 슬라르한 벤티악 공작의 공이다. 그러니 위르스 온천 개발 사업의 참여를 허락하며, 벤티악 공작은 황실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사업 참여자가 될 것이다. 개발비 지분은 3할, 수익 지분은 4할로 조정한다. 아울러, 온천의 이름을 명명할 권리를 벤티악 공작에게 주겠다.”
주변에 선 모두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켜는 사이, 황제 옆의 대신은 종이 위에 부지런히 펜을 놀려 약식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황제는 곧바로 하단에 사인을 하고 황제의 인장을 찍었다.
모든 게 다 작성된 계약서는 슬라르한의 앞으로 왔다.
벤티악 공작가에 처음으로 허락되는 사업 참여였다.
심지어 개발비는 3할만 부담하고 수익은 4할을 돌려받을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
하지만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남들한테도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사실 황족들은 자기가 직접 뭔가 하지 않아도 황실 주체의 개발 사업에 참여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런 일을, 슬라르한은 자신이 직접 온천을 찾아내고 나서야 허락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씁쓸한 기분에 매몰될 시간도 없었다.
개발 자금을 차출하면서 조금 어려움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무조건 투자해야 했다.
‘일리에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일리에가 없었더라면 해결하는 데 몇 달이 걸렸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치 우연에 우연을 중첩시키며 온천의 수원으로 슬라르한을 인도하던 일리에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우울하고 복잡한 감정을 빠르게 털어버린 슬라르한은 펜을 들어 과감하게 사인했다.
제가 한 짓을 모르는 게 아니라 황제도 슬라르한이 불쾌해하는지 자세히 살폈지만, 그가 머뭇거림 없이 사인하자 더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로써 슬라르한은 두 번째로 과제를 해결한 후보가 되었구나. 잘했다, 슬라르한. 앞으로도 기대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슬라르한은 황제를 길게 칭송하지 않고 짧게 대답한 뒤 물러나왔다.
‘온천 이름은 일리에에게 지으라고 해야겠군. 그 녀석이 찾아낸 거나 다름없으니까.’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어떤 이름을 지을지 기대가 되어 미소 지었지만, 주변 사람들 눈에는 그게 황위를 향한 자신감을 드러낸 미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교계에 무수한 소문과 화제를 만들어냈다.
“불운의 아이콘이라던 벤티악 공작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롤랑 백작 부인이 어떤 분인데 아무 확신도 없이 벤티악 공작 쪽에 붙었겠어요? 뭔가 있는 게 분명해요!”
“유명한 주술사 말로는, 벤티악 공작가에 파랑새가 날아들었대요.”
“파랑새라뇨?”
“행운길이 트였다는 소리죠! 이제라도 벤티악 공작 쪽에 줄을 대야 하는 걸까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슬라르한이 한 말은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슬라르한의 서사를 만들어내었다.
“그 전도유망하던 아이르델 벤티악 공작이 죽고, 내실 없이 크기만 한 공작가를 물려받았을 때의 나이가 고작 스물두 살이었죠. 그 나이에 공작가를 휘어잡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실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하고는 달랐다니까요. 열세 살에 이미 3개 국어를 마스터하고 열여섯 살에 벤티악 기사단을 호령했다더군요. 황제 폐하가 견제할 만도 했지요.”
“어이구, 그뿐이랍니까?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때를 기다린 모습만 봐도 보통이 아니잖습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눈이 뒤집혀서 황실을 치려다 자멸했을 겁니다.”
“하긴, 그렇죠. 원수라 할 수 있는 황제 폐하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런 얘기들을 몰래 귀담아듣고 있던 마그렛은 부채 뒤에서 생긋 웃었다.
슬라르한이 위르스 산에서 어쩌다 온천의 수원을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이 일이 슬라르한에게 엄청난 전환점이 될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자, 이제부터는 수다스러운 고모의 진가를 보여줄 차례지.”
그녀는 너그럽고 인자한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운 채 말 많은 부인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아마 머지않아 사교계는 슬라르한의 이야기로 들썩일 터였다.
* * *
슬라르한이 주목받게 된 최근의 상황은 엘로르에게 굉장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뭐야! 내 얘기는 고작 열흘밖에 안 갔잖아!”
빠르게 과제를 해결하고 성녀라는 이미지까지 얻은 엘로르였지만 그녀에 대한 화제는 사교계에서 열흘을 가지 않았다.
엘로르는 언제나 칭송받던 사람이었지만 슬라르한은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무서운 기세로 황좌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늘 뻔한 이야기와 영웅서사시 같은 이야기, 둘 중 어느 쪽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는가.
클리드는 ‘그래도 크게 손해 본 것은 없다.’라며 엘로르를 달랬지만 엘로르가 초조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설마…… 릴리에트의 운이 벤티악 공작에게로 간 건가……?’
전생에 사냥 대회의 1등을 한 것도, 위르스 산의 문제를 해결한 것도 릴리에트였다.
그래서 릴리에트만 없으면 자신이 1등을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전생에는 늘 우울한 기운만 흘리던 슬라르한이 갑자기 릴리에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심지어 릴리에트보다 결과가 더 좋았다.
사냥 대회 때 잡은 사냥감의 수도 더 많았고, 위르스 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린 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었다.
마치 누가 그를 도와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짜증 나.”
엘로르는 릴리에트의 방식을 인정할 수 없었다.
릴리에트는 사냥 대회도 자신이 직접 참여했고, 위르스 산도 자신이 직접 뒤졌다. 미래에 벌어질 작은 전쟁에서는 적장의 목을 베는 공까지 세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엘로르가 볼 때 황녀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천박한 짓일 뿐이었고, 황녀라면 황녀답게 품위 있고 고아한 모습을 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클리드를 손에 넣기만 하면 릴리에트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거라고 믿었는데…….
“전하. 전하의 새로운 시녀가 될 해리엇 아일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초조하게 손끝을 깨물고 있던 엘로르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뭐? 어서, 어서 안으로 들여라!”
엘로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새로운 우군을 기다렸다.
그녀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밤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한, 평범한 인상의 젊은 여인이었다.
“어서 오시게, 아일 영애.”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전하. 해리엇 아일입니다. 해리엇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래, 해리엇. 정말 반갑네. 내, 자네를 오래 기다렸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쪽의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느라 귀한 분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신 만큼, 반드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엘로르는 기쁜 미소로 새로운 시녀를 맞아들였다.
방금까지 초조하고 불안했던 기분이 어느새 뭉근하게 누그러졌다.
클리드에 이어 해리엇까지 손에 넣었으니, 이젠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 *
“예? 온천 이름을, 제가요?”
“그래. 네가 찾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 아니, 저는 그냥 덜렁대다가 산길을 구른 것밖에는 한 게 없는걸요.”
“그게 바로 네가 나에게 준 행운이겠지.”
슬라르한이 온천을 찾은 것을 두고 자신의 공이라고 해줄 줄은 몰랐던 일리에는 조금 얼떨떨했다.
“당황스럽겠지만 한번 천천히 생각해 봐.”
“……굳이 제게 지으라고 하신다면.”
“음?”
“시야르드 온천……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민하는 시간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이름에 슬라르한도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 그냥 말씀드려 본 거예요…… 마음에 안 드시면 주인님께서 적당히 만들어주세요. 저는 작명에는 재능이 없어서…….”
사실 전생에도 온천의 이름은 시야르드 온천이었다.
자신이 발견했으니 제 중간 이름을 넣어 짓겠다고 했고, 마침 ‘시야르드’가 시황제의 아명이라서 황제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일리에가 시야르드라는 이름을 써달라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한 적 없게 되어버린 전생의 자신을, 그 어리석고 불쌍한 반쪽 황제를 기리는 의미에서였다.
일리에는 애써 밝게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슬라르한이 보기에는 어딘지 씁쓸한 미소였다.
슬라르한은 이것 역시 깊이 캐물으면 안 될 일리에의 비밀 중 하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야르드’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시야르드…… 시야르드 온천…… 괜찮을 것 같구나. 왠지 낯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 아마…… 시황제 폐하의 아명(兒名)이라서 그럴 겁니다.”
“시황제의 아명이라고? 넌 도대체 그런 걸 어디서 배운 거냐?”
“그야 당연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책! 책에서 봤지요. 하하!”
시황제의 아명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은 황족들뿐이었다.
일리에는 실수할 뻔한 주둥이를 찰싹찰싹 때리고 싶었다.
물론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슬라르한은 시황제의 아명까지 알고 있는 노예가 신기해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일리에가 그 이름에 관심을 가질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시황제의 아명을 이름으로 가진 이를…… 알고 있었나?”
순간적인 추측으로 물었는데 일리에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 아뇨. 그냥 떠오른 겁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거짓말.
슬라르한은 제 눈을 피하며 거짓말하는 일리에를 가만히 살폈다.
늘 밝던 일리에의 얼굴에 흐릿한 그림자가 진 것 같았다.
‘남잔가?’
시황제는 남자였으니, 그의 아명이라면 남자아이에게 붙였을 법했다. 일리에의 아버지 이름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일리에가 숨기고 있는 과거의 그 언젠가, 일리에는 시야르드라는 이름의 소년에게 강렬한 감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황실의 온천에 그 이름을 붙이려들 만큼 강렬한 감정을 말이다.
슬라르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저는 진짜 괜찮으니까,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이름을 붙이셔도…….”
“아니, 괜찮다. 그저…… 언젠가 네가 나를 완전히 믿게 된다면, 그 ‘시야르드’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일리에는 말문이 막힌 채 슬라르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시야르드’가 일리에가 알던 누군가의 이름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노을빛에 물든 호수의 표면처럼 잔잔하고 차분하기만 했다.
네 과거를 억지로 캐묻지 않겠다는 의미, 네가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 네 거짓말을 모르는 척하겠다는 의미, 나는 너를 믿는다는 의미가 전부 포함된, 가슴 벅차도록 신뢰와 애정을 담은 눈빛이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집무실을 나오면서 쿵쿵 울리는 가슴 한복판을 자꾸 문질러댔다.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온천수를 맞으며 저를 바라보던 슬라르한의 눈빛도 아직 다 잊지 못했는데, 그는 또 저에게 잠 못 이룰 밤을 선사하고 있었다.
‘아주 그냥 눈빛만으로도 여자 여럿 녹이겠네. 저 정도면 범죄 아닌가? 매력 무단투기범, 뭐, 이런 거.’
일리에는 괜히 농담처럼 투덜대며 머리를 털어냈다.
저 혼자 이렇게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건 왠지 불공평하게 느껴져서 심술까지 나는 것 같았다.
* * *
그러나 일리에는 비록 스스로는 모를지언정 슬라르한의 불면증에 일조하고 있었다.
일리에가 나간 문을 한참 쳐다보던 슬라르한은 어제 타리크가 보고했던 내용을 곱씹었다.
“정보 길드원들이 그 사막 주변 마을들을 싹 다 돌았는데도 그 녀석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답니다. 이 정도라면 사막 주변 마을 출신은 확실히 아니라는 거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일리에의 과거가 궁금하다고 해서 제국 전역에 사람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의 움직임이라면 황제든 다른 후보들이든 눈치를 챌 것이고, 일리에가 그의 약점이라 생각한 누군가는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울 수도 있었다.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다니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를 한다고 비웃었겠지만 일리에에 관해서는 슬라르한도 차라리 비이성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이야기 쪽을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가 주인님께 행운을 가져다드릴 테니까요.”
제게 건당으로 계산해서 몸값을 제해 달라던 일리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점술에도 재능이 있고 주인님께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다던 그 말이 맹랑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녀의 말을 허투루 넘긴 게 없었는지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최근에 조금씩 신경에 거슬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저는, 언젠가는 자유민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제 몸값만큼 일한 뒤에는 노예 증서를 태우고 저를 풀어주십시오.”
일리에가 슬라르한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대가.
언젠가 자유민이 되어 그의 곁에서 떠나 훨훨 날아가 버리겠다는 그녀의 소원 말이다.
그녀의 몸값을 4천5백만 페르소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120만 페르소를 갚았다.
그것도 사냥 대회 때의 조언과 아버지의 유품을 찾은 건에 대한 계산만 한 것으로, 마그렛에게 말을 걸라고 했던 조언이나 엘란츠를 포섭하라고 했던 조언의 값은 아직 계산하지도 않았다.
이번 온천을 찾게 된 건으로는 얼마를 요구할까. 아무리 못해도 온천 개발로 얻을 이득의 1할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이라면 일리에가 몸값을 다 갚는 것도 먼 미래의 얘기만은 아니었다.
‘일리에 녀석, 보나 마나 뻔뻔하게 값을 부르겠지? 일단 2백만 페르소 정도만 하자고 해보고, 녀석이 징징대면 최대 3백만 페르소까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슬라르한은 저 자신이 우스워서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천하의 벤티악 공작이 값을 깎을 생각을 하고 있다니,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쩨쩨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값 변제가 끝나는 순간 저 예쁜 파랑새는 미련 없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허해져서, 일리에의 몸값에 대해서는 자꾸 장사치처럼 흥정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돈을 주고 그 아이의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일이 쉬울 텐데.’
슬라르한은 창밖으로 날아가는 철새 떼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카시르 영식.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리드는 엘로르를 방문했다가 낯선 시녀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짙은 밤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한, 평범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나이대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얼굴이었는데, 어리게 보자면 20대 초반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많게 보자면 40대 초반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끄러운 머리칼, 매끈하게 뽀얀 피부, 주름 없이 탱탱한 입술을 보자면 젊은 사람일 것이 분명했지만 지나치게 능숙해 보이는 태도나 생각을 가늠하기 어려운 눈빛은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노인의 것 같았다.
“클리드! 오시는 데 수고 많으셨어요.”
“전하를 뵈러 오는 길인데 수고로울 리가요.”
반갑게 맞이하는 엘로르를 따라 그녀의 응접실에 앉은 클리드는 차를 준비하러 가는 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엘로르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시녀로군요. 새로 들이셨습니까?”
“아, 클리드는 처음이겠네요. 해리엇 아일 양이에요. 얼마 전에 제 시녀가 되었답니다.”
“아일이라면, 아마 키스톤 백작가의 가신이었던…….”
“맞아요! 역시 클리드의 기억력은 대단하네요. 키스톤 백작가의 가신이었던 아일 남작의 딸이랍니다.”
“그쪽과는 어떻게 연이 닿으셨습니까?”
“으음…… 저번에 르부이에 백작 부인이 연 뱃놀이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참 차분하고 영리한 아가씨 같은데 집안이 어려워서 변변한 드레스도 없는 모양이더라고요. 그게 안타까워서 몇 마디 섞었는데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서 제가 먼저 시녀 자리를 제안했지요.”
“그러십니까.”
클리드는 좋은 일을 했다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정이 안돼 보여서 시녀로 들였다고? 그 엘로르 델 솔렌이? 말도 안 되지. 아무래도 조사해봐야겠군.’
엘로르가 충동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충동적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그것은 저런 차분한 타입이 아니라 그녀에게 아부 잘하고 재미있는 일을 잘 물고 오는 영애였을 것이다.
고작 사정이 좀 안 좋아 보인다고 시녀 자리를 제안할 만큼 그녀가 박애주의자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엘로르가 최근 성녀 연기에 몰입하느라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벌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범상치 않아 보이는 시녀의 눈빛을 떠올려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능숙하게 숨긴 클리드는 엘로르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빈민가의 괴질을 치료하면서 만든 성녀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강화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교계는 벤티악 공작 얘기로 시끄러워졌지만 그것 역시 일시적인 일입니다. 아이리스 전하께서 노예 격투장 문제를 해결하면 그 얘기로 시끄러울 것이고, 라반 전하께서 도난 사건을 해결하셔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기야 하겠죠.”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아이리스가 불법 노예 격투장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가고 있어서 사교계에서는 그 얘기가 슬슬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빈민가를 중심으로 해서 평민들 사이에서는 전하의 인지도 아주 높아졌습니다. 다른 후보들이 귀족들의 문제를 해결한 것에 반해 전하께서는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빈민이나 평민들의 지지가 황위를 차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
“그들이 직접적인 결정권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귀족들은 전체 인구의 1할도 안 되는걸요. 나머지 9할 이상의 사람들이 칭송하는 후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엘로르는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빈민가처럼 더러운 곳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기만큼 힘든 곳으로 일정을 잡지는 않겠습니다. 우선은 가볍게 고아원부터 가죠.”
클리드는 수도의 고아원 몇 군데를 미리 수배해 일정을 잡아둔 상태였다.
엘로르가 방문하는 날에는 고아원에서 제일 귀여운 아이들을 깨끗하게 꾸며놓고 아름다운 엘로르와 함께 하는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함께 간 귀족 부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엘로르에 대한 이야기를 사교계에 퍼트릴 것이다.
클리드의 계획을 한참 듣던 엘로르는 천사로 추앙받을 생각에 조금 들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계속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클리드. 이런 얘기 하는 거 싫어하는 줄은 알지만, 저는 벤티악 공작 쪽이 너무 신경 쓰여요.”
하지만 이번에도 쓸데없이 신경 쓰지 말고 자기를 믿어달라고 할 줄 알았던 클리드가 진중하게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저도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벤티악 공작 곁에 누가 붙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단 말이죠.”
“그, 그렇죠?”
“컬리넌 후작 영애나 멜바란 후작 영식이 그쪽에 가담한 건 사실입니다만, 그들을 참모로 쓰고 있다기엔 서로 만나는 횟수가 너무 적어요.”
“흥! 엔시아 그 여자는 참모로 쓸 만한 머리가 못 돼요!”
거기에는 이견을 갖고 있는 클리드였지만 괜히 엘로르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수긍했다.
어쨌든 슬라르한의 기세가 전과 전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었고, 그게 이 경쟁에 점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제가 벤티악 공작저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클리드가요? 벤티악 공작이 클리드를 만나줄까요?”
“무슨 소릴 하러 왔는지 궁금해서라도 만나줄 겁니다. 일단 벤티악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뭔가 건질 만한 정보가 있겠죠.”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클리드.”
“전하를 위해서라도 제 목숨은 귀하게 여길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클리드는 엘로르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로르는 그의 섬세한 입술이 자신의 손등에 닿는 느낌을 만끽하다가 아쉬운 얼굴로 클리드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클리드가 나가고 나자 엘로르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감시자는 제대로 붙여놨겠지?”
“네. 제 몸 색을 주변 색과 똑같이 바꾸는 녀석이니 쉽게 들키지는 않을 겁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클리드가 라리에트와 만나는 것만은 철저히 감시해야 하니까…….”
엘로르의 입매가 굳었다.
아직도 라리에트와 클리드가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충격이 가시질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해리엇은 클리드의 어깨에 붙어 그가 누굴 만나고 어떤 얘길 하는지 알려줄 감시자를 만들어내 주었고, 그것만으로 엘로르는 비싼 값을 치르고 해리엇을 데려온 데 대해 만족하고 있었다.
“내 처소 주변에 이상한 것이 들러붙어 있지는 않던가?”
“아니요. 깨끗했습니다. 마법사들이 마석을 이용해 건 주술 정도는 제 눈에 안 보일 리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나도 후보 중에 마법사를 부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전생과 달라지는 일들이 생겨서 영 불안하더라고. 자네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덕분에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해졌어.”
“위대한 마법의 체험자 곁을 지킬 수 있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해리엇의 갈색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아일 남작가의 맏딸이라는 해리엇 아일은 사실 3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아일 남작 부부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해리엇 아일은 3년 전, 제 앞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호위 기사를 시켜 노파 하나를 옆으로 밀쳤다.
노파가 크게 넘어지며 곡소리를 냈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프라이드가 높았던 그녀로서는 죽을 날을 받아놓은 거지 따위, 알 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 노파에게 인정을 베풀었어야 했다.
그 노파는 제 영혼을 담을 그릇을 찾아 희생자를 물색하던 흑마법사 카제야 히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체를 다루는 것이 주특기인 7 서클의 고위 흑마법사였고, 그녀는 자신의 남은 마력을 다 쏟아부어 해리엇과 자신의 영혼을 뒤바꾸었다.
갑자기 다 죽어가는 노파의 몸에 빙의한 해리엇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일 남작가로 찾아가 자신이 바로 진짜 해리엇이라고 악을 쓰며 호소했지만 그녀가 노파에게 그랬듯 가차 없이 내쳐졌다.
그뿐만 아니라 거지 노파가 제 딸의 이름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아일 남작은 사람을 시켜 그녀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영혼 뒤바꾸기에 성공한 뒤 정양하며 얌전히 지내던 카제야는 작년 여름, 자신이 만들어낸 흑마법 추종 종교인 루트 교 고위급 사제로부터 귀가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2황녀 전하께서 흑마법사를 찾으십니다. 대가는 1억 페르소. 어떻습니까?”
흑마법사도 돈이 필요했다.
태생적인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마법사 본인이 가진 마력은 한 번 쓰고 나서 도로 채우는 데 오래 걸려서 마법을 마음껏 쓰려면 마석을 구입해야 했다.
그 마석의 값은 웬만한 보석값을 능가했고, 순도가 높을수록 가격이 수직 상승했다.
게다가 흑마법을 사용할 경우에는 누군가를 생명력을 대가로 바쳐야 했고, 그 목숨을 사는 데도 돈이 들었다.
마구 죽여도 상관없는 노예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쪽에 붙었겠지만, 제국에 아직 그 정도로 대범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어쩔까 고민하며 적당히 관계를 다지던 중, 황녀 전하께서 아주 흥미로운 미끼를 드리웠다.
-나는 엄청난 시간 회귀의 흑마법을 경험했다네. 자네가 내 곁에 와준다면 그 이야기도 상세히 해주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족속으로서는 물지 않을 수 없는 미끼였다.
그리고 직접 엘로르를 만나고 나서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난 18년 후의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했어. 그리고 미래를 바꿔보려 하고 있지.”
처음에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에 닿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로르가 묘사하는 당시의 상황을 듣던 해리엇은 그녀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법진과 주술 모두, 마법을 모르는 보통 사람이 지어낼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로르가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경험한 마법이 완전한 흑마법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엘로르는 그 당시 흑마법사를 수배했다고 했지만, 그녀가 묘사한 내용을 들어보면 흑마법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어떤 마법이었든 간에 어마어마한 능력자가 일으킨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했지만 말이다.
자신보다 더 강력한 마법사가 일으킨 놀라운 마법.
그것은 2백 년 넘게 살면서 웬만한 것에는 지루해져 버린 흑마법사를 뒤흔들었다.
카제야는 회귀 마법의 비밀을 알게 될 때까지는 엘로르의 곁에 붙어 있기로 했다.
시간 회귀의 마법이 쉬울 리 없겠지만, 그 원리라도 알게 된다면 짜릿한 지적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왔었어. 둘 다 로브로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어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중년 여자 하나와 젊은 남자 하나. 남자는 체격이 좋았고 여자는 글쎄, 나보다 조금 큰 정도? 하지만 마법을 주관하는 쪽은 여자였어. 남자는 제자 같았는데, 그래도 보통 사람 같지는 않았고.”
그것만 가지고는 마법사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미래의 일이니 더더욱.
하지만 시간을 되돌아온 사람 곁에 붙어 있다 보면 분명 그들의 꼬리를 잡을만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방금 클리드의 등에 붙여 보낸 작은 키메라가 재미있는 정보를 가져와 주기를, 엘로르뿐만 아니라 카제야도 소망했다.
* * *
클리드의 예상대로 슬라르한은 그의 방문 요청을 허락했다.
시간에 맞춰 벤티악 공작 저에 방문한 클리드는 깐깐한 얼굴의 노집사가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 걸었다.
아직 더위가 다 사그라지지 않은 시기인데도 벤티악 공작 저는 어딘지 서늘한 느낌이 났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 바깥에서는 기사들이 한창 훈련 중이라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매미 울음소리와 뒤섞여 귀를 때렸다.
“시끄러우시지요? 죄송합니다. 응접실로 들어가시면 조금 나을 겁니다.”
집사는 클리드가 창가에 멈춰선 이유가 쇳소리 때문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그의 시선이 박힌 곳은 연무장의 구석, 혼자 연습용 허수아비를 때리는 소녀의 근처였다.
“저건 분명, 사냥 대회 때의 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타리크가 이름 알려주기를 꺼리던 바로 그 노예 소녀였다.
아니, 소녀라고 하기엔 꽤 여자 태가 나는 계집애였다.
‘나이는 열여섯, 열일곱쯤? 벤티악 공작이 올해 스물셋이니까, 뭐…… 관심을 가질 만도 하지.’
노예 소녀는 다른 기사들 못지않은 몸놀림으로 열심히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을 봐주던 상급 기사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조언을 던져주는 것을 보니, 나름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카시르 영식?”
“아! 죄송합니다. 제가 검을 잡지 않다 보니, 기사들의 훈련 장면에는 늘 시선을 빼앗겨서요.”
“하하하, 확실히 기사들의 훈련 모습은 멋있지요.”
“그런데 저기 끄트머리에서 훈련하는 사람들은 정식 기사가 아닌가 보죠?”
“누구…… 아! 아마 견습 기사들일 겁니다.”
“저 사람은 암만 봐도 여자 같은데요.”
“아…… 저 아이는 공작 각하의 심부름꾼을 하는 아이입니다.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훈련을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벤티악 공작께서도 참 철저하시군요.”
“저희 가주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그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지요.”
슬라르한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클리드가 슬라르한을 칭찬하니 집사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은근슬쩍 자랑했다.
그 얘기를 가만히 들으면서 클리드는 노예 소녀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상당히 지친 것 같았지만 그녀는 검을 놓지 않고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허수아비를 때렸다.
곁에서 훈련하던 견습 기사 둘이 그 모습을 보더니 혀를 내두르며 내키지 않는 태도로 다시 검을 쥐었다. 노예에게 지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고, 그녀는 허둥지둥 주변을 정리하고 후다닥 저택 쪽으로 달려왔다.
“저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요?”
“예? 누구요?”
“저 노예 아이 말입니다.”
“아, 일리에 말씀이시군요.”
“일리에?”
“예. 그러고 보면 저 아이도 각하께 목숨을 빚졌지요.”
“그래요? 그건 또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군요.”
“하하하, 그건 각하께 여쭤보십시오. 저도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그래도 벤티악 가의 집사랍시고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않았다. 클리드는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안내한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응접실을 구경하고 있자니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기 싸움 때문에 이 정도 기다리게 할 거라고는 예상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클리드 카시르 경.”
“아, 오셨습니까, 벤티악 공작.”
클리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슬라르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같은 금발이라도 슬라르한의 차가워 보이는 플래티넘 블론드와는 달리 클리드의 부드러운 밀색 머리칼은 그의 이미지를 한결 따뜻하고 다정해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클리드 카시르라는 사람이 절대 만만치 않은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엘로르의 참모가 되기 전에도 이미 수도에서는 유명한 천재였으니까.
클리드는 그저 책만 파는 천재 부류는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언제나 자신의 실질적인 이득을 위해 굴러갔다. 그랬으니 황위 후보의 참모까지 된 것일 터였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변명도 없는 사과에 클리드도 가볍게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응접실의 문이 달칵 열리더니, 일리에가 찻잔과 티 포트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서둘러 땀을 씻고 왔는지 아직 머리칼이 젖어 있었다.
쟁반 위만 내려다보며 두 사람의 테이블 가까이 온 일리에는 조심스럽게 손님과 슬라르한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고 손님의 찻잔에 찻물을 따르려는 순간이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일리에라고 했던가요?”
일리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었다.
일리에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빙긋 웃으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클리드가 앉아 있었다.
“크…….”
클리드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일리에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재빨리 붙들고 고개를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클리드의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일인데 어쩔 수 없이 손이 가늘게 떨렸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들어 클리드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릴리…… 네가 잠만 자고 있으니 좀 지루해. 일어나서 나한테 욕이라도 쏘아붙여 봐. 응?”
식물인간이 된 자신의 곁에서 조롱하듯 속삭이던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일리에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왜 나한테 그랬냐고, 나는 결국 너를 황제로 만들어준 사람 아니었느냐고, 작은 자비라도 베풀어 차라리 죽이지 그랬느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래봤자 지금의 클리드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찻잔의 8부까지 찻물을 따르고 슬라르한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을 쳐다보는 슬라르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곧이어 은은한 그의 체향도…….
그러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자신의 곁에 슬라르한이 있다는 게 마음이 놓였다. 그라면 자신을 잡아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일리에는 침을 꼴깍 삼키며 슬라르한의 찻잔에도 찻물을 부었다.
평소보다 딱딱한 손놀림이었지만 아까처럼 덜덜 떨리지는 않았다.
간신히 차를 다 따른 일리에가 그들로부터 세 걸음쯤 떨어져 고개를 조아리고 설 때까지도 클리드의 시선은 집요하게 일리에를 뒤쫓고 있었다.
“보내주신 편지만 봐서는 오늘 방문하신 목적을 잘 모르겠던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슬라르한은 일리에에 대한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클리드도 보통은 아니라서, 그런 슬라르한의 행동에서 불쾌함을 읽어내고는 빙긋 웃었다.
“뭐, 간단합니다. 저희와 연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 황위는 따놓은 당상일 텐데요.”
“엘로르 전하께서 저를 지지해 주시겠다니, 반가운 소식이군요.”
“하하하! 공작께서 농담을 즐기시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모르실 수밖에요. 저는 농담을 즐기지 않으니까요.”
슬라르한의 시선이 꽤나 차가웠지만 클리드는 넉살 좋게 받아쳤다.
“저는 공작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애초에 황위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잖습니까. 남들은 다들 황제 폐하를 두려워해 숨죽였을 뿐이라고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공작께서는 진심으로 이런 권력 놀음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권력 놀음’에는 관심이 없는 게 맞습니다. 저는 권력을 가지고 놀음이나 하자고 황제가 되려는 게 아니니까요.”
“말장난은 그만두시죠. 솔직히 벤티악 공작가에서 진짜 황위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리고 이 제국을 어찌해 보려고 하셨다면, 진작에 들고 일어났어야 합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죠. 하지만 아이르델 벤티악 공께서 죽음까지 불사하며 수도와 거리를 두셨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르델까지 거론하자 슬라르한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지만 클리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의 보좌는 권력이라는 늪의 한가운데 솟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앉고서도 고결함을 끝까지 지켜내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벤티악 공작 본인은 어떨지 몰라도,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깨끗할수록 더 더럽혀지는 게 바로 그 자리입니다.”
마치 슬라르한을 염려한다는 투였지만 클리드의 눈빛에는 미처 다 감추지 못한 조소가 어려있었다.
“그럼 엘로르 전하는 권력의 더러운 놀음 한가운데 던져져도 괜찮다는 소립니까?”
“하하하!”
슬라르한의 반박에 클리드가 또 시원스레 웃어젖혔다.
그러고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속삭였다.
“엘로르 전하를 가련히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분은 그 진흙탕 한가운데서 태어난 분입니다. 벤티악 공작과는 다르죠. 그래서 능히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저는.”
기분 나쁠 정도로 솔직한 태도였다.
“벤티악 공작께서 용단을 내리셔서 엘로르 전하께 힘을 보태주신다면, 벤티악 공작의 부와 명예, 권력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가신들의 처우까지 적극적으로 개선해드리겠습니다. 공작께서는 오히려 그쪽이 마음 편하실 겁니다.”
“마음이 편하다, 라…….”
슬라르한은 차를 마시며 클리드를 보고 손을 떨던 일리에를 떠올렸다.
일리에가 언제 클리드를 만난 적이 있어서 저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냥 대회 때 엘로르와 클리드가 천막에 들렀었다는 타리크의 말을 기억해냈다.
그때 클리드가 일리에의 이름을 계속 물었다던가.
기분이 나빴다.
슬쩍슬쩍 이쪽을 넘보는 그 태도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제안하는 내용도 그랬다. 누굴 바보로 아는 건지, 어린애에게 사탕을 주며 꼬이듯 얄팍한 수로 유혹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참으로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입니다만…….”
슬라르한이 시선이 딴 데를 보는 척하면서 일리에에게 가 닿았다.
일리에는 ‘절대 안 된다.’라고 소리 없이 외치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자신이 클리드에게 넘어갈까 봐 조마조마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짓던 슬라르한이 다시 냉랭한 시선을 클리드에게 보냈다.
“지금은 저도 책임지고 있는 목숨이 많아서요. 저 하나 마음 편히 놀고먹자고 제게 운명을 건 사람들을 내팽개칠 수는 없잖습니까.”
“조금 이기적으로 사시는 것도…….”
“설마 저를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파렴치한으로 보시는 것도 아닐 테고.”
슬라르한이 선수 치자 클리드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클리드가 진심으로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뭐, 거절하실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물어보신 이유가 뭡니까.”
“밑져야 본전이잖습니까.”
지극히 가벼운 태도에 슬라르한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정말 밑져도 본전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를 상대로?”
둘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이런 인간이었다니…… 실망이군.’
슬라르한은 클리드에 대한 생각을 전면 수정했다.
클리드와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클리드 카시르라는 인물에 대해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건너 건너 알게 되는 소문 같은 것도 있었고, 연회 때 몇 번 스치기도 했다.
여태 그를 나쁘게 여겨본 적은 없었다. 아니, 저뿐만 아니라 클리드 카시르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눈에 띄는 미남에 사람의 혼을 빼놓는 언변, 사근사근한 성격과 규범집에서 튀어 나온 듯한 예의범절까지, 그는 사람들이 바라는 미청년 귀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무례한 도발을 자행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적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도발해서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는 것은 귀족 회의에서도, 사교계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같잖은 도발로 치부하고 무시했을 그 태도가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언제 또 이랬던 적이 있던가……? 낯설지 않은 상황인데…….’
언젠가부터 잦아진 기시감이 또 슬라르한에게 찾아들었다.
희한한 감각이었다. 분명 언젠가 겪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슬라르한이 클리드를 살피며 기억을 뒤지는 사이 클리드의 시선은 일리에에게로 향했다.
노예치고는 꽤나 좋은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소녀는 짧게 자른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슬라르한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봤다가 순간적으로 미간을 파삭 구기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노예가 대귀족을 보고 저런 태도라니, 놀라울 정도였다. 살짝 숙인 고개마저 어딘지 뻣뻣해 보일 정도였다.
‘벤티악 공작이 어지간히도 오냐오냐해 주는 모양이지? 꽤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너무 건방진데? 아니면 주인에게 너무 충성스러운 거거나…….’
대화를 옆에서 들었으니 자신이 슬라르한에게 그다지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것이다.
확실히, 처음 자신을 보고 잔뜩 긴장했던 기색은 사라지고, 희미하게 반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게 조금 재미있었다.
저렇게 겁 없는 노예는 처음이었다.
일부러 슬라르한 쪽에 고정한 시선이나 앙다문 입술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그는 찻잔에 남은 차를 마시고 작별 인사를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희는 앞으로도 경쟁자로 남겠군요. 아쉽네요.”
슬라르한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일어났다.
“전혀 아쉬워 보이지는 않…… 잠시만요.”
슬라르한은 멈칫하다가 클리드의 앞을 막아섰다. 아주 이질적인 어떤 것이 그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예? 갑자기 왜…….”
“아, 여기, 벌레가 붙어서…….”
슬라르한은 클리드의 어깨에 붙어 있던 작은 벌레를 손으로 털어낸 뒤 발로 밟았다.
언뜻 보면 노린재처럼 보이는 벌레였지만, 사실 그건 벌레가 아니었다. 벌레는 적어도 살아 있는 생물이니까.
“감사합니다. 날벌레가 많은 시기라 어디서 붙어왔나 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갑자기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다지 개의치 않는 클리드의 태도로 보아 클리드 역시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키메라라니, 도대체 누가……!’
키메라는 두 개체 이상의 생물을 서로 합쳐놓은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상태에서 서로 합쳐놓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주로 죽은 것들을 합친 뒤 마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슬라르한은 키메라에 대해 알고 있던 데다 마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체질 때문에 그 작은 키메라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아마 키메라가 뭔지도 모를 터였다.
클리드에게 붙어 있던 것은 작은, 그러나 몸통에 비해 눈이 비정상적으로 큰 곤충 키메라였다.
그건 아무리 봐도 감시용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 클리드를 감시하려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이리스, 라반, 황제, 카시르 후작, 그리고…… 엘로르.’
그중 클리드와 접촉할 만한 사람은 카시르 후작과 엘로르였고, 카시르 후작이 키메라를 만들 수 있는 마법사와 접촉한다면 클리드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클리드를 참모로 두고 있는 엘로르였다.
겉으로는 클리드에게 상당한 애정과 신뢰를 가진 것 같은 그 사람 말이다.
‘이 자가 저택에 들어온 이후 어딜 돌아봤는지 확인해야겠군.’
그 생각에 닿은 순간 슬라르한은 제 뒤에 일리에가 서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클리드는 여기 온 이후 계속 일리에를 쳐다보며 관심을 드러냈다.
엘로르가 그 장면을 봤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찜찜했다.
“일리에. 먼저 내려가서 손님의 마차를 준비시켜라.”
“넵!”
아까부터 클리드의 시선이 영 껄끄러웠던 일리에는 부리나케 응접실을 나갔고, 슬라르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클리드는 그가 일리에에게 향하는 자신의 시선을 가로막았다고 여겼다. 그것도 같잖은 벌레 핑계를 대면서까지 말이다.
클리드는 슬라르한을 한 번 더 떠보기로 했다.
“노예가 참 싹싹하네요.”
“그렇습니까.”
“네. 혹시 저 아이를 제게 파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사신 가격의 두 배를 쳐 드리겠습니다.”
내내 냉랭하고 건조했던 슬라르한의 두 눈에서 순간적으로 불꽃이 튀긴 것 같았다.
“거절하죠.”
“그건 왜죠? 아……! 혹시, 공작의 특별한 노예인가요?”
‘특별한’이라는 부분에서 클리드의 눈매가 야릇하게 휘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왜 굳이 제 노예를 사려고 하시는 겁니까?”
“뭐, 젊은 여자 노예를 사려는 이유야 빤하지 않습니까? 꽤 취향이라서요.”
그러자 슬라르한의 얼굴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었다.
“카시르 영식. 저 아이는 이제 고작 열일곱 살입니다. 아직 어린아이를 두고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좀 파렴치하지 않습니까?”
“예? 하…… 하하! 이건 좀 충격적이군요.”
“충격……?”
슬라르한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클리드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놀랐다는 투였다.
“하하, 열일곱이면 이제 곧 성인식을 치를 나이 아닙니까?”
“그 말은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뜻이죠.”
“이런…… 벤티악 영지에만 계시다 보니 공작께서 뭘 좀 모르시나 봅니다. 여성의 나이 열일곱 살이면 이 나라에서는 결혼도 하고 애도 낳는답니다. 성인식을 치렀는지의 여부는 아무 상관 없지요.”
“하지만…….”
“열일곱이 뭡니까, 평민들은 열넷, 열다섯의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데요. 저도 중늙은이가 열다섯 살짜리 소녀와 결혼하는 건 좀 파렴치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열일곱 살짜리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파렴치하다는 소릴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좀 놀랐습니다.”
조롱하는 어투였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거기에 화가 나기보다는 어떤 사실 하나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슬라르한 역시 다른 이들이 열일곱 이하의 어린 신부를 맞아들이는 것에 대해 여태 별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거기다 대고 클리드는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는 남들보다 한발 앞서 걷는 것을 좋아할 뿐입니다. 저 나이대의 아가씨들은 눈 깜짝할 새에 피어나거든요. 다 피길 기다리고만 있다가는 누군가 먼저 채 가버리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 왜 위르스 산에서 본 일리에의 젖은 얼굴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저는 제 밑에 있던 사람을 정적에게 넘겨줄 정도로 바보가 아니라서요.”
슬라르한이 딱딱하게 답했다. 그의 턱이 굳어진 걸 보면서도 클리드는 전혀 물러나는 기색 없이 얄미운 소리를 해댔다.
“고작 노예일 뿐인 소녀에게 꽤 많은 걸 알려주셨나 보죠?”
“사람은 따로 알려주지 않아도 많은 것을 보고 듣는 존재 아닙니까. 제가 엘로르 전하의 시녀를 달라면 주시겠습니까?”
“으음…… 시녀와 동급인 노예라…… 흥미롭군요. 뭐, 어쨌든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혹시 생각이 바뀌시면 연락 주십시오.”
물러나는 것처럼 사람 속을 긁어놓은 클리드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1층 로비를 향해 내려갔다.
주변의 사용인들 모두가 슬라르한의 언짢은 기분을 다 눈치챌 정도였지만 클리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오늘 온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깥에는 클리드가 타고 온 카시르 가문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일리에가 서 있었다.
슬라르한의 성질을 돋우는 데 재미가 들린 클리드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는 생각으로 일리에를 향해 웃었다.
“일리에라고 했던가? 노예라지?”
“……네.”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들어서 네 주인께 너를 팔아주십사 부탁드렸다만, 네 주인께서는 싫다고 하시는구나. 나중에라도 네 주인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해보자꾸나.”
그것은 일리에가 제 주인을 원망하게 하려는 수작질이었다.
거절당해 본 적 없는 남자의 자신감으로 벌인 짓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리에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왜요?”
“……응?”
“저는 벤티악 공작가에 있는 게 좋은데요. 저는 제 주인님의 마음이 바뀌지 않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클리드는 물론 슬라르한과 주변에 서 있던 집사와 하인들 역시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일리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일리에의 삐딱한 행동은 오히려 클리드의 흥미를 더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내가 너를 산다면 예쁜 옷을 입히고 내 침실에 두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 말을 일리에의 격한 반감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
일리에는 파삭 구겨진 미간을 움찔대면서도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저는 저를 노리개로 쓰려는 주인님보다 검술 훈련 시켜주시는 주인님이 훨씬 좋은데요.”
“이런…… 여자한테 차인 적은 없는데, 벤티악 가의 노예에게 차일 줄이야.”
“솔직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저희 주인님이 더 잘생기셨죠. 아, 뭐, 이건 너무 버릇없는 것 같으니까,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으로 정정하겠습니다.”
“푸흡!”
클리드는 노예에게 조롱당한 사람답지 않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히려 슬라르한이 뻣뻣하게 굳은 모양새였다.
“공작께서 아랫사람들을 얼마나 잘 교육시키는지 확실히 알겠군요. 덕분에, 오랜만에 유쾌했습니다.”
클리드는 뚱한 표정의 일리에를 한 번 더 뜯어보다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멀어지는 클리드의 마차 꽁무니에다 대고 일리에는 이를 바득 갈았다.
전생에 왜 저따위 녀석에게 넘어갔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리에.”
일리에는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아, 네, 주인님.”
“카시르 영식을 알고 있나?”
“아, 아뇨! 저기…… 사냥 대회 때…… 한 번 뵌 적은 있습니다.”
슬라르한은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멀뚱멀뚱 저를 쳐다보는 일리에를 질책했다.
“클리드 카시르는 엘로르 전하의 참모이자 카시르 후작가의 차남이고 엘로르 전하가 아니더라도 한 자리 차지할 만한 인물이다. 노예인 네가 함부로 입을 놀려도 되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
“평소에는 알아서 잘하더니, 방금은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카시르 영식이 웃고 넘어가서 다행이었지, 만약 너를 처벌해 달라고 했다면 나도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실망이구나, 일리에.”
일리에가 움찔했다. ‘실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이 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불퉁한 어투로 말대답을 했다.
“하지만 자꾸 저를 들먹이면서 주인님을 모욕하려고 하잖아요. 그 사람이 차라리 타리크 님을 달라고 했더라면 다들 웃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벤티악 가에서 제일 천한 저를 가지고 주인님을 자극하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저는 그게 화가 났습니다.”
그 말에는 슬라르한 뒤에 있던 집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오랜 세월 황제 때문에 핍박받던 가문이라, 가문 내의 모든 가신들이 이런 식의 멸시에 예민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엄한 얼굴을 하고 질책했다.
“누가 너더러 나 대신 분노하라고 했나! 노예에게 분노할 권리가 있는 줄 아느냐?”
숨이 막히듯, 일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노예였다. 알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건방지게 나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슬라르한에게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만큼, 많이 아팠다.
“지금부터 일주일간 네 방에서 근신해라. 검술 훈련도 금지다.”
“네…… 죄송합니다.”
일리에는 슬라르한에게 사죄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늘 생기발랄하던 노예의 어깨가 축 처지자 평소 일리에의 존재를 껄끄럽게 느끼던 집사가 보기에도 좀 안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딴에는 각하를 위한답시고 나선 것인데, 처벌이 조금 과한 것이 아닐까요.”
“아니, 과하지 않아. 일리에는 당분간 저쪽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아.”
“예? 저쪽…… 이요?”
“그런 게 있네. 다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함구하도록. 소문이 돌면 이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될 줄 알아.”
저희 쪽으로 휘어지는 슬라르한의 냉랭한 시선에, 근처에서 눈치만 보던 하인들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의 입을 단속한 슬라르한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다가 일리에의 방이 있는 2층 복도 끄트머리 쪽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일리에가 많이 섭섭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다 확인해 보지 못한 저택 내 어딘가에서 상대의 눈과 귀가 될 키메라가 이 모습을 다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정도 했으니 그냥 지나갈 법도 하지만…… 일단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숨겨놓고 저쪽의 움직임을 파악해 봐야겠어.’
그리고 키메라가 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길을 돌리는 순간, 그제야 ‘솔직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저희 주인님이 더 잘생기셨죠.’ 하던 말의 후폭풍이 몰려들었다.
슬라르한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화끈거렸다.
‘맹랑한 녀석 같으니. 이번 일로 말조심하는 법도 배우면 좋겠군.’
괜히 일리에를 탓하면서도 슬라르한은 계속 피식거리며 웃었다.
<3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