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벨파스트의 노예 4권
1장
클리드의 예상대로 모든 황제 후보들이 일리에의 존재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슬라르한도, 일리에도 이렇게 될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라리에트에게 가기 전에 이미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놓은 상태였다.
당시 이야기를 전해 들은 타리크가 크게 걱정하긴 했지만, 그 역시도 더 이상 일리에를 ‘아무 쓸모 없는 노예 계집애’ 취급하지 않았다.
그가 일리에를 어떻게 생각하든, 일리에 덕분에 많은 일이 잘 풀린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그 모든 게 일리에가 점술에 재주가 있어서라고 믿고 있었지만 말이다.
“정말 조심해야 할 겁니다. 각하를 공격하고 싶은 상대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으로 보일 테니까 말이죠. 게다가 건방진 녀석이라 꼬투리 잡히기도 쉬울 겁니다.”
슬라르한의 집무실에 서 있는 일리에를 흘끗 쳐다보던 타리크가 불만처럼 중얼댔다.
죄도 없는 아이가 단지 만만해 보인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암살당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일리에에 대해서는 왠지 다정해지지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일리에 역시도 고운 말로 되돌려 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타리크 님이야말로 조심하셔야 할 것 같던데요. 중요한 시기에 구설수에 오르…….”
“이 녀석이 진짜!”
순식간에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타리크가 금방이라도 일리에에게 달려들 듯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일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죽거렸다.
“타리크 님, 의외로 손이 빠르시네요. 아니, 어느 틈에 그 도도한 영애를…….”
“한마디만 더하면 내 명예를 걸고 널 가만두지 않겠다.”
“없는 소릴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시고 그래요? 더 수상하게…….”
이를 부득 갈던 타리크가 ‘쟤 좀 어떻게 해보라.’라는 눈빛으로 슬라르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슬라르한도 재미있었는지 쿡쿡대고 있었다.
“나도 사실 묻고 싶었는데…… 혹시 진짜 둘이 그런 관계인가?”
“아니, 각하까지 왜 그러십니까! 각하께서 컬리넌 영애를 끝까지 모른 척하시니까 제가 이 한 몸 바쳐 컬리넌 후작가와의 관계가 금 가지 않게 만든 건데요!”
“누가 들으면 자네가 몸을 더럽히기라도 한 줄 알겠군.”
“불쌍한 컬리넌 영애. 자기와 춤춘 남자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일리에까지 끼어들어 비아냥대자 타리크는 목 뒤를 잡으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저한테는 과분하다 못해 넘치는 영애 아닙니까. 이런 눈총 받을 걸 알면서도 춤 신청을 한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자네한테 큰 짐을 지웠군. 미안하네.”
“아니, 뭐…… 짐이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하는데 별것 아닌 소문쯤이야.”
타리크는 진심이었다. 그는 자기가 무슨 소문에 휩쓸리든 그게 슬라르한을 위한 거라면 기꺼이 감수할 사람이었다.
“잠깐 이야기가 샜지만, 이 녀석한테는 앞으로 무슨 일을 시키시려는 겁니까?”
“라리에트 전하를 우리 쪽으로 포섭할 거야. 일단은.”
“거참…… 라리에트 전하는 어쩌다 저런 녀석이 마음에 드셨는지, 원…….”
타리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일리에 덕분에 라반이 클로이덴 백작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을 저지했다.
“아직 어린 라리에트 전하를 보호하는 이미지라면 좀 더 신뢰감이 생길 겁니다. 라리에트 전하 자체는 그다지 소득이라고 볼 수 없지만, 이미지 싸움도 중요하니…….”
제 동생을 얕보는 듯한 소리에 일리에의 미간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라리에트 전하는 대단한 분이 될 겁니다.”
“뭐? 그게 말이 되냐. 친모와 오라비한테도 대단치 않게 여겨지는데.”
“그거야 다이애나 황비님과 라반 전하께서 보석을 못 알아보신 거고요.”
“보석?”
“네! 두고 보세요.”
일리에는 시원스레 대답하며 빙긋 웃었다.
라리에트에게 앞으로 알려줄 정보는 많았지만 정보가 갑자기 넘쳐나면 라리에트도 당황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르네 백작 부인의 문학 살롱에 관한 것만 몇 가지 알려주었다.
에블린 아르네 백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유명한 문학 애호가였다.
그녀 스스로도 필명을 지어서 글을 쓰고 있었지만, 그녀가 여는 독서 토론회나 신작 발표회가 훨씬 더 유명했다.
일리에는 그 살롱에서 라리에트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이번 살롱이 중요한 것은 베르트 융커라는 외국 작가와 거대 출판사의 사장이자 유명 시인이기도 한 체라프 자작이 참석할 거라는 점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보다는 조금 일찍 만나는 거지만, 두 사람 다 라리에트가 특별하다는 걸 알아볼 거야.’
그렇게만 되면 라리에트는 전생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도 있었다. 일리에는 라리에트가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 * *
베델에게 있어 황궁이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온갖 것이 다 쓸데없이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정작 그 주인 된 자는 이 건축물의 아름다움조차 감당하지 못할 만큼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
“베델. 최근에 내가 아주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다…….”
“예, 폐하.”
“슬라르한이 평민 계집을 제 심부름꾼으로 삼아 데리고 다닌다더구나. 심지어 황궁에까지 데려왔다고 하던데…….”
황제는 슬라르한이 황궁에 계집 심부름꾼을 데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베델을 불러들인 참이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내가 왜 그걸 네 입이 아닌 다른 이의 입으로 들어야 했던 건지 이해되지 않더구나. 설마 나를 배신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설명해 보거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황제를 앞에 두고도 베델은 일리에에 대해 세세히 보고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황제의 태도가 짜증 났을뿐더러, 저 혐오스러운 인간 때문에 자신에게 흥미로운 인간 하나가 죽어버리는 걸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공작이 노예 아이 하나를 조금 귀여워한다고요.”
“그때는 별것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아이가 정말로 중요한 존재였다면 이미 예전에 알려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는 말은, 최근에야 슬라르한의 총애를 받게 됐다는 말이냐?”
“사실 총애를 받는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눈속임일 테니까요.”
“눈속임이라……?”
황제의 매서운 눈초리가 슬쩍 풀어지자 베델은 속으로 빙긋 웃었다.
의심 많은 인간에게는 오히려 사기 치기가 쉽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리 있느냐.’라고 치부할 문제도 그들은 ‘혹시, 어쩌면…….’이라며 가능성을 부풀리기 때문이다.
“벤티악 공작 혼자 라리에트 전하를 찾아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경쟁자들은 두 사람 사이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며 공격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실제 관계가 무엇이든 말이죠.”
“흐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여자 심부름꾼을 대신 남겨두고 자신은 재빨리 자리를 떴단 말입니다. 아마 그 여자 심부름꾼은 벤티악 공작의 말을 전달하고 라리에트 전하의 답신을 벤티악 공작에게 전하는 정도의 일을 할 뿐일 겁니다. 평민인 여자를 심부름꾼으로 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거라니?”
“여자이기에 라리에트 전하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지요. 그리고 평민이기에 일이 틀어질 경우 죽여 없애 버리기도 쉽습니다. 심지어 그 아이, 부모도 없는 천애 고아입니다. 갑자기 죽어도 누구 하나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겠지요.”
“호오…… 그래, 그렇구나.”
황제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베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게다가 뜬금없이 등장한 평민 계집 심부름꾼의 존재에 다른 황제 후보들의 관심이 그 아이에게로 쏠렸습니다. 벤티악 공작은 이 틈을 타 진짜 필요한 일을 하고 있지요. 진짜 똑똑한 사람 아닙니까? 그의 곁을 늘 살피던 저마저도 허를 찔렸을 정도니까요.”
“벤티악 녀석들이 원래 그렇다. 얌전한 척, 순진한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음흉한 짓거리를 벌이지.”
황제가 갑자기 이를 바득 갈면서 베델의 뜻에 동조했다. 아직도 아이르델이 저 모르게 권력을 쥐려 했다고 믿고픈 모양이었다.
베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황공하다는 듯 눈썹을 내려트렸다.
“아마 앞으로도 그 심부름꾼 아이가 전면에 나설 겁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현명하고 지혜로우신 황제 폐하께서는 그 아이가 아닌, 그 아이의 화제성 뒤에 숨어 움직일 벤티악 공작을 주시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역시 베델이구나. 남들은 다 변변치 않은 그 평민 계집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너만은 진실을 꿰뚫고 있었어!”
“다 황제 폐하께 벤티악 공작가의 진실을 배웠던 덕분입니다.”
적시에 터트린 아부에 황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베델의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놈의 가면에 속지 말고 앞으로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라. 이상한 일이 있으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분이 한껏 좋아진 황제는 베델에게 넉넉한 금화를 내리고 일리에에 대한 관심을 껐다. 황궁에서 돌아 나오던 베델은 다른 황족들의 동태 역시 황제와 다를 바 없으리라 생각했다.
‘지금쯤 다른 황족들의 동태 조사도 끝났겠지?’
그는 곧바로 황금 갈퀴 길드의 사무실로 향했다.
“어이! 오랜만이야, 길드장.”
사무실에 들어서자 벤티악 저택에 위장 취업한 그를 대신해 길드를 관리하고 있는 2인자 리키가 반쯤 비꼬듯 인사해 왔다. 물론 베델은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고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그리 심술이 났어?”
“고객도 아니고 길드장이 맡긴 일 때문에 정보원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키는 베델이 무엇 때문에 사무실에 들렀는지 안다는 것처럼 자료를 주섬주섬 모아 베델 앞에 내려놓았다.
“엘로르 황녀 쪽은 잠잠한데 말이야, 아이리스 황녀랑 라반 황자 쪽에서는 의심스러운 낌새가 느껴져. 특히 라반 황자.”
“그러시겠지. 라리에트 황녀나 벤티악 공작을 죽일 수는 없을 테니 일리에라도 죽이고 싶겠지.”
황족들 중에 일리에 쪽에 위해를 가할 낌새가 보이는 이가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정보원들을 풀어두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라반 쪽에서는 적극적으로 일리에를 죽이려고 이를 가는 모양이었다.
‘벤티악 공작에게 일러둬야겠군.’
베델은 편지지를 꺼내 들고 짧은 편지를 썼다. 아직 일리에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이 완전히 다 채워지지 않았으니, 그녀가 벌써 죽어서는 곤란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제 살롱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온화한 표정의 에블린 아르네 백작 부인이 다소 긴장한 라리에트를 다정하게 맞이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을 텐데 받아주어 감사합니다, 부인.”
“천만에요. 모시게 되어 영광이란 말씀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랍니다. 전하께서 참석하고 싶다고 알려주셨을 때는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일반 귀족 영애가 소개도 없이 갑자기 살롱에 참석하고 싶다고 알려왔다면 무례한 일이었겠지만, 최근 다시 황제 후보로 나서겠다고 선언한 막내 황녀의 첫 나들이 장소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녀로서도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이번 일로 그녀의 살롱은 한층 더 유명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라리에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르네 부인이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았다.
전부터 문학 살롱에 꼭 나와 보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싫어해서 포기했었다.
고대 시어 연구회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어머니는 거기에서 뭘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단독 황제 후보로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은 여러모로 잘한 일이었다. 라리에트는 난생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을 누리는 중이었다.
“자, 우선 오늘 참석하신 분들의 자기소개를 하고, 자신의 신작이나 집필 중인 작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네 부인은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살롱을 이끌어 나갔다.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남자에 귀족이었지만, 성별이나 지위, 국적이나 재산을 가지고 비교하거나 잘난 척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작위나 지위보다는 출판하거나 발표한 작품을 자신의 타이틀로 삼았고, 그중에는 라리에트가 감명 깊게 읽은 작품들도 꽤 많았다.
특히 얼마 전 충격을 받을 정도로 인상 깊었던 작품 <랑게르 여행기>의 저자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고명하신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작년에 <랑게르 여행기>란 소설을 발표한 베르트 융커라고 합니다. 피델로에서 온 터라 억양이 좀 다를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예상외로 꽤 젊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기른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정확한 나이대나 인상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보다 더 유명한 작가들도 몇 명 참석했지만 라리에트는 왠지 베르트에 대한 관심을 거두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와는 자리도 꽤 멀었고 사담을 나누는 분위기도 아니라 라리에트는 베르트와 눈인사 정도만 나누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루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경하던 작가들의 작품 뒷얘기와 최근의 관심사, 고뇌 등을 들을 수 있어 신기하고도 즐거웠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타이밍을 맞췄는지 때마침 새로운 차와 다과가 나왔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라면 흥이 오르는 법이었다.
“창가의 새를 쫓아버리지 마오, 그대여. 내 그리움일지니. 울기라도 하거든 가엾게 여겨주오, 내 영혼의 주인이여.”
누군가가 즉흥시를 읊자 와아, 하는 감탄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경쟁이라도 하듯 다른 이가 운을 띄웠고, 곁에 있던 그의 동료가 다음 소절을 이었다.
그들의 차례가 끝나자 다음 사람이, 또 그다음 사람이 짧게나마 봄을 주제로 한 즉흥시를 읊었다.
라리에트 바로 옆 사람이 일부러 오페라 배우처럼 과장된 어조로 사랑 노래를 부르자 다들 신난 듯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웃음기를 머금은 아르네 부인의 시선이 라리에트에게 향했다.
“아, 전하께서는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라리에트가 즉흥시 릴레이에 당황하고 있을까 봐 작게 소곤거렸다.
아마 평소 같았다면 라리에트도 미소로 답하며 조용하게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일리에가 했던 말이 지난 한 달간 내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다.
“겸양은 미덕이라고 배우셨겠지만, 그건 전하를 위한 조언이 아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라면, 겸양 따위는 집어던지세요. 잘하는 거 아껴뒀다가 얻다 쓰시려고요? 기회는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아요.”
품위와 교양이 넘치는 어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건 라리에트가 지금껏 들어온 그 어떤 조언보다 울림이 있었다.
라리에트는 자신이 당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 믿는 아르네 부인 앞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다시 자리에 앉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긴장됐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긴장이 아니라 흥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라, 봄이여. 얼음 녹아 흐르는 물 따라. 아름다운 것들을 뒤로하고, 너는 가거라. 흘러가야 살아나는 것들이 있다. 흘러 흘러 다시 어는 겨울이 오더라도, 봄이여, 눈 녹아 부는 바람 따라 너는 용감하게 나아가거라. 나도 네 뒤를 따르리라.”
라리에트가 시 낭송을 마치자 살롱이 열리는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다른 시인이나 작가들이 읊었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라리에트는 자신의 시가 너무 아마추어 같아서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거라고 생각하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잠시 후, 베르트가 짝짝짝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다들 정신이라도 차린 듯 열렬히 환호하고 박수 치기 시작했다. 라리에트의 얼굴은 더 빨개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라리에트는 자신이 황녀이기에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제 체면을 세워주는 거라고 믿었다.
제국에서 제일 큰 출판사를 가진 출판인이자 그 자신도 시인인 체라프 자작이 다가오기 전에는 말이다.
“아까 시는 정말 잘 들었습니다. 즉흥시 발표를 즐기시나 봅니다.”
“아, 아니요. 사실은, 처음이에요. 아마 금방 알아채셨겠지만요.”
“예에? 처음이시라고요? 어허허! 우리 막내 황녀님의 첫 즉흥시 발표를 듣는 영광을 누리다니, 제가 참으로 운이 좋군요.”
“제가 체라프 자작의 시를 듣는 영광을 누린 거지요. 아니, 지금 이 자리가 저에게는 꿈만 같아요.”
라리에트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는 체라프 자작의 눈동자에 잠시 연민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문학계 바닥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엄청난 보석의 원석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직 그 누구도 이 원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혹시…… 습작해 놓으신 시가 있습니까?”
“취미 삼아, 조금…… 어설프지만 시를 읽고 쓰는 걸 좋아해서요.”
체라프 자작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전하. 시집을 출간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제, 제가요?”
“예. 신분 노출이 꺼려지실 테니 필명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냥 묻어두기에는 아까운 재능 같아서요.”
“정말인가요? 제가…… 재능이 있어 보이나요?”
“물론이죠!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되셨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라리에트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댔다.
“그 자리에서 용기를 내신다면 분명, 귀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실 거예요.”
일리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살대는 것만 같았다.
“그럼…… 조만간 궁으로 초대해서 제 습작을 보여드릴게요. 그때도 같은 생각이시라면, 저도 출간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오늘부터 잠은 다 잔 것 같군요. 전하의 초대장을 기다리느라 제 목이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라리에트는 체라프 자작과의 이야기를 마친 후 두근대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잠시 발코니로 나왔다.
가슴에 손을 올리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펄떡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유시간이 끝나기 전에 이 흥분이 좀 가라앉아야 할 텐데, 하며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혼자가 되길 기다린 사람은 또 있었다.
“아까의 그 시는, 일종의 다짐인가요? 혹은, 선전포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베르트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옅은 밤색의 결 좋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텁수룩한 수염 때문에 그가 띤 미소가 조소인지 냉소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봄바람 같은 미소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선전포고씩이나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죠.”
“글쎄요.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우아한 방식의 선전포고라고 느꼈습니다만.”
“아마 제 처지를 알게 되신다면 저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시지 못할 거예요. 황제 후보로 다시 나서겠다고는 했지만, 사실 저한테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제 치부나 다름없는 얘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러나 라리에트의 소심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베르트가 눈썹을 삐딱하게 기울였다.
“제 얘기를 오해하셨군요.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마주하고 계신 싸움이 황위 쟁탈전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모친의 힘마저 빌릴 수 없는 막내 황녀님이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라리에트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뽀얀 뺨에 꽃물 들인 듯 부끄러움이 번져갔다.
베르트는 상대의 당혹감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기에, 뾰족하게 들렸을 법했던 제 말을 서둘러 변명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전하 자체로 존재하는 게 전하께는 전쟁 같겠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표현이 불경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융커 경의 말씀을 오해했네요.”
둘은 잠시 어색하게 흠흠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라리에트 역시 베르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저기…… <랑게르 여행기>는 정말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 책을 읽으셨습니까?”
“네. 가상의 여행기인데도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한지, 밤을 새워가며 읽었어요.”
“하하! 황녀님께서 읽어주실 줄 알았다면 퇴고를 좀 더 열심히 했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아니, 거의 확신하고는 있지만, 그중 몇몇 에피소드는 직접 경험하신 것이겠죠?”
“흐음…… 대답은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책의 재미를 위해서요.”
베르트가 눈을 찡긋하며 의뭉스럽게 답했고, 라리에트는 피어나는 꽃처럼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황궁이라는 거대한 새장에 갇혀 살아온 데다, 그 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누군가에게 팔려 가는 것뿐임을 깨닫고 절망하던 그녀에게 <랑게르 여행기>는 잠도 못 이룰 정도로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너무나 박진감 있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이라 아마 일부는 이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겠거니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놀라웠다.
예를 들어 악어의 아가리에서 살아 나온 이야기라든가 배가 난파되어 표류한 이야기, 제국의 반대편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보고 들은 신기한 이야기들…….
라리에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랑게르 여행기> 안에서는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만 얘기해 주세요. 널빤지 하나를 붙잡고 닷새나 표류했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거죠?”
“네. 닷새는 아니었고 사흘이었죠.”
“……진짜 표류를 했었다는 말씀이세요?”
“사방에 물 천지인데도 마실 수가 없으니, 정말 죽겠더군요.”
순간 커다래진 라리에트의 녹안을 보며 베르트가 유쾌하게 웃었다.
“살아남았으니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솔직히 그때는 죽어버리는 게 나을 듯한 고통이었죠. 그래도 힘내서 살길 잘한 것 같습니다. 제 주제에 이렇게 제국의 황녀님도 뵙고 있으니 말입니다.”
“뭘 하든 살아남는 게 중요하죠!”
“맞습니다. 살아남는 게 중요하죠.”
베르트는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라리에트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꼭 생과 사의 기로가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포기하는 게 차라리 편할 상황은 의외로 빈번하게 찾아온다.
그때, 더 괴롭지만 끝까지 자신을 붙들고 있을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베르트 자신도 오래 산 것은 아니었지만, 그 짧은 인생 안에서도 포기가 차라리 편할 상황을 너무나 많이 겪었다. 그랬기에 포기하지 않는 인간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라리에트는 아주 흥미로웠다.
나약하다고만 생각했던 어린 황녀가 이제까지의 잔잔한 삶을 거부하고 연약한 두 발로 서려는 모습에 괜히 오지랖 넓게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베르트의 작품 얘기, 라리에트가 다니는 고대 시어 연구회 얘기, 오늘 나왔던 타 작가의 신작이나 시 얘기 등을 즐겁게 나누었다.
어느새 그들 사이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다음번 살롱에도 참석하십니까?”
“아, 아마도요. 별일이 없다면…….”
“그때는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그 말에 라리에트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유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연초를 태우거나 화장실에 갔던 사람들이 다시 응접실로 돌아와 제자리에 앉았다.
라리에트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도 베르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할 수 있었는데 라리에트로서는 그 감각 자체가 굉장히 신기했다.
베르트와 함께 응접실로 돌아가던 라리에트는 문득, 일리에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용기를 낸다면 귀중한 인연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인연‘들’을…….
라리에트의 시선이 베르트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인연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슬쩍 돌아보는 베르트의 시선과 마주친 라리에트는 작은 들꽃 같은 미소를 건넸다. 그의 시선에도 포근한 미소가 깃들었음을, 라리에트는 확신했다.
그리고 살롱이 끝난 뒤, 라리에트는 그 자리에서 알게 된 문인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며 마차에 올랐다.
그녀의 마지막 시선은 베르트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라리에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라리에트가 탄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뒤꽁무니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베르트는 사람들이 거의 다 자리를 뜬 그곳에 서서 중얼거렸다.
“이제야 파르디나스에 관심이 생기는군그래.”
그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젊은 문학평론가가 나직이 물었다.
“조사를 좀 해볼까요?”
“응. 내가 저 어여쁜 시인을 도와드릴 방법 좀 찾아봐.”
“너무 깊이 관여하지는 마십시오. 국왕 폐하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언제 아버지 눈치 보며 산 적 있나? 자네도 이제 포기해.”
문학평론가로 분한 보좌관의 한숨을 들으면서도 베르트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 *
“찌르기!”
“하앗!”
“베기!”
“하압!”
벤티악 공작 저의 연무장에서는 오늘도 기사들의 기합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락부락 덩치 좋은 사내들 틈에 낀 늘씬한 체형의 인영에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든 검이 상급 기사들도 탐낼 만한 물건일 경우에는 더더욱.
한 차례의 검술 연습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아까부터 일리에 쪽을 흘끔대던 기사 몇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크흠! 흠!”
“어? 안녕하세요, 베리 경.”
등 뒤에서 들린 헛기침 소리에 일리에는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와 함께 다가온 기사들이 아까부터 자신의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뭐냐…… 너도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기사님들처럼 되려면 한참 멀었죠.”
“하하하!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이룰 수도 있겠지. 으흠…… 그런데 말이다…….”
“네, 기사님.”
그는 자칫 자신이 탐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머뭇대다가 아무래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넌지시 물었다.
“그 검은, 각하께서 하사하신 거라며?”
“네. 황공하게도 말이죠.”
일리에의 검에 대해서는 그녀가 아이르델의 유품을 되찾아온 데 대한 대가로 하사받은 거라고 알려진 상태였다.
일리에가 유품을 어떻게 찾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밀에 붙였기에 거기에 대한 의문들은 많았지만 다들 함부로 묻지는 못했다.
어쨌든 덕분에, 이제야 다들 일리에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보통 계집애가 아니었다는 둥, 알고 보면 몇 사람 모가지쯤은 간단히 그어버릴 수 있는 살수일 거라는 둥,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각하가 아꼈을 리 없다는 둥 말이다.
덕분에 슬라르한의 여자라는 소문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리에에게는 그건 그거대로 좀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그거…… 페크리냐 강철이지?”
“네, 그렇다나 봐요. 엄청 단단하다는데 굉장히 가벼워서 저도 휘두를 수 있는 거죠.”
“야,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될까?”
페크리냐 강철 검은 경매장에서나 살 수 있는 물건이기에 실물로는 처음 보는 이들도 꽤 많았다. 돈만 있다고 해서 다 살 수 있는 검도 아니었고, 애초에 물량 자체가 워낙 적은 검이기도 했다.
전생에 릴리에트의 병사들도 그녀의 페크리냐 강철검을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었다. 늘씬한 황녀가 가볍게 휘둘러 대니 신기할 법도 했다.
벤티악 공작가의 기사들의 태도 또한 그들과 별다를 것이 없었기에 일리에는 빙긋 웃으며 허락했다.
“우와! 진짜 가볍네!”
“야, 여기 날 선 것 좀 봐. 살짝만 그어도 썰리겠는데?”
“날이 시퍼러네, 시퍼레.”
“와…… 검 이름이 새겨져 있어. 바……사르……?”
검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귀하고 좋은 검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신기함과 부러움이 반반씩 섞인 눈빛으로 바사르를 앞뒤로 살펴보았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무심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검을 남의 손에 들려주는 검사가 어디 있나?”
“앗, 가, 각하!”
어느새 다가온 슬라르한이 어딘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을 구경하고 있던 기사들은 재빨리 일리에에게 검을 돌려주고 민망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일리에는 과거에 기사들과의 사이가 어쨌든 그들을 볼 때마다 전생의 제 병사들이 생각나서 자꾸 정이 갔다.
그들이 남의 검을 만진다는 게 무례한 짓임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여태 무시하던 일리에에게 저자세로 나갈 정도로 검이 궁금했던 것이고, 그만큼 검을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른 분들도 페크리냐 강철 검에 대한 정보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어디에서 페크리냐 강철 검과 맞부딪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대답은 또 잘해…….”
슬라르한이 구시렁댄 소리를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았지만, 유일하게 알아들은 일리에만은 뿌루퉁한 그의 모습이 귀여워 내심 웃었다.
한 입 거리를 앞에 둔 포식자 같기만 하던 예전과는 정말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와.”
자세한 설명도 없이 따라오라는 말조차 설레는 것을 보면 중증인 것 같다고 일리에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다른 볼일도 없는 그가 아무래도 저를 데리러 굳이 연무장까지 내려온 것 같았으니 설렐 만도 하다고 변명 같은 생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일리에를 자신의 집무실까지 데리고 온 슬라르한은 라리에트에게서 온 편지를 일리에에게 건네주었다.
“내 앞으로 오긴 했지만 내 편지는 아닌 것 같더군.”
일리에는 편지를 냉큼 받고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편지지를 펴 보았다.
-……얼마 전에는 에블린 아르네 백작 부인이 여는 문학 살롱에 참석했었습니다. 거기에서 뜻밖에도 시집 출간 제의를 받았어요. ……재미있게 읽은 <랑게르 여행기>의 저자 베르트 융커 경도 만나 뵐 수 있었는데 그분과의 대화도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뵙기로…….
별것 아닌 근황을 전하는 내용이었지만 일리에가 궁금해하던 것들에 대한 대답은 다 나와 있었다.
‘아, 다행이다!’
라리에트는 다행히 체라프 자작이나 베르트와 잘 만난 것 같았다.
전생에도 꽤 깊은 인연들이었으니 이번에도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라리에트 전하께서 네 조언대로 움직이신 모양이구나.”
“수동적으로 움직이신 게 아니에요. 라리에트 전하께서는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더 나아가신 겁니다.”
“그래, 그래. 누가 보면 네가 진짜 라리에트 전하의 언니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 말에 일리에는 씁쓸하게 웃었다.
진짜 라리에트의 언니였을 때 더 잘 보듬어줬어야 했다. 이렇게 조금만 다독여 주면 용기를 낼 수 있는 아이였는데, 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 아이를 내버려 뒀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방치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면 라리에트가 알아서 저를 위해 움직여줄 것임을, 자신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독한 위선이자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일리에는 라리에트가 사별한 뒤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처절하게 후회했다.
식물인간인 자신은 그녀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데, 라리에트는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할 처지였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꼭 라리에트가 스스로 강해질 기회를 주고 싶었다.
“뭐가 됐든 네 예상대로 흘러간 것 같은데, 그다음은 어쩔 생각이냐?”
“올 한 해 동안은 라리에트 전하께서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을 도와드리면 좋겠습니다. 대단하게 도와드릴 것도 없을 겁니다. 다른 후보의 공격을 막아주기만 하면 될 거예요.”
“그러다가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리에트 전하는 그럴 분이 아니세요. 아마 다이애나 황비님과 라반 전하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조건을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주인님께 은혜를 갚을 겁니다.”
“조건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자기 힘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냐?”
“네. 반드시요.”
슬라르한의 눈동자가 봄 햇살에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새카만 동공 안에 무슨 생각을 숨겨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리에도 제 말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처럼 들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자신이 내밀 수 있는 증거는 이루어지지 않을 미래에 있어서 그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미래를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슬라르한이 자신을 믿어주어야만 했다.
그게 슬라르한 앞에서 점술 타령을 할 때마다 조마조마한 부분이었다. 그가 믿어주지 않으면 다시 오지 말아야 할 미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
그런 일리에의 애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라르한이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안 될 이유가 수십 가지 떠오르는데, 왜 네 말을 거절하기가 이리도 힘들까…….”
“주인님께서 현명하시기 때문이죠!”
“네 뻔뻔함을 논하는 건 이제 지쳤다.”
슬라르한은 피식 웃고는 일리에의 뺨을 손끝으로 톡 쳤다.
고작 1년 사이에 일리에의 뺨은 어린애의 것에서 여인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젖살은 완전히 빠지고 매일 훈련을 하느라 주근깨도 늘었지만, 매끈하고 아주 건강해 보였다.
이렇게 건강하게, 즐겁게만 지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일리에를 향한 관심이 예상보다 과열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약 한 달 전부터 간간이 오는 익명의 편지가 그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수도 내의 A급 정보 길드 세 군데에 ‘벤티악 공작의 심부름꾼’에 관한 조사 의뢰가 다섯 건 추가 접수되었으며 건당 평균 의뢰 비용은 2백만 페르소.
-2황비 궁에서 벤티악 가 심부름꾼 암살 의뢰 1건.
-벤티악 저택 주변 감시 의뢰 7건: 이 중 4건은 심부름꾼의 동태만 보고 요청.
단지 그뿐인 편지였다.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편지를 보낸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정보에 따른 돈을 요구했다면 사기꾼이라고 치부했을 텐데, 편지를 보낸 이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일리에를 향한 관심과 위협이 이 정도인 것을 알아두라는 듯한 정보였다. 덕분에 일리에에게로 향하려던 음험한 무리를 몇이나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앞으로 더 위험한 곳으로 발을 들일 터였다.
2황비와 라반은 슬라르한에게 향할 수 없는 분노를 일리에에게 풀려는 모양이었고, 최근 아이리스와 엘로르의 행보도 심상치 않았다. 그 둘 역시 일리에의 뒷조사를 의뢰했을 거라는 데 슬라르한은 자신의 오른 손목도 걸 수 있었다.
“라리에트 전하께 마음 쓰이는 건 이해한다만, 언제나 네 안전을 최우선에 두어라. 그분은 황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넌…….”
“주인님께서 지켜주실 거잖아요.”
맹랑하게 끼어든 일리에 때문에 슬라르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일리에의 뻔뻔함에 대해서는 더 논의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지만, 이럴 때는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 아니에요?”
말문이 막힌 슬라르한 앞에서 일리에가 능청스레 되물었다.
슬라르한은 황당해하느라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래…… 내가 널, 지켜주기는 하겠다만.”
“그렇죠?”
일리에가 또 헤헤거리며 웃었다.
슬라르한은 생글거리는 그 얼굴이 예뻐서, 언제 이렇게나 예뻐졌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라도 의식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일리에를 바라보고만 있을 것 같았다.
* * *
“재미있군. 재미있어…….”
방에서 책장을 넘기던 카제야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킬킬거렸다.
얼마 전 벤티악 공작가에 묻어뒀던 아티팩트가 파괴되며 상대방 마력의 파장을 전달해 주었다.
그것은 불쾌하고 낯익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원수나 다름없는 마법사, ‘마노’의 힘과 어딘지 비슷했달까.
슬라르한이 마력을 쓸 줄 안다면 그것은 사비 족의 피 덕분일 테고, 그래서 찾아보게 된 사비 족 관련 서적에서 그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원수의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노 그년이 사비 족이었던 거야!’
어쩌면 슬라르한의 사비 족 모친이 마노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자식을 죽이는 것만큼 효과적인 복수가 또 없을 테니까. 자식이 아니면 어때? 그년의 일족을 죽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슬라르한을 죽이는 것이 정체도, 행방도 모를 숙적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자 카제야는 모든 게 다 즐거워졌다.
카제야가 정체 모를 마법사 마노와 맞부딪친 건 4년 전쯤의 어느 날이었다.
그전까지는 두려운 것 없이 내키는 대로 살던 카제야는 곤충에 이어 짐승을 이용한 키메라 제작까지 드디어 성공해 기쁨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짐승은 물론 큰 짐승들을 접붙이는 데까지 성공한 카제야는 인간 시체를 결합해 보기 위해 시체를 파헤치고 다녔다.
하지만 산야에 파묻힌 인간의 시체는 연구에 쓰지 못할 정도로 부패한 게 대부분이었다.
‘시체가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지.’
카제야에게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죄다 똑같은 가치를 지니는 목숨이었다.
그녀는 넉넉한 연구 자원을 얻기 위해 마을 하나에 전염병을 퍼트렸다. 의원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으니 한 달 정도면 사람이 죽기에 딱 적당했다.
그녀는 그 한 달 동안 자신의 연구실에 처박혀 인간 시체 결합에 관한 연구를 더 진행했다.
그리고 갓 파묻힌 시체들을 수거하기 위해 그 작은 마을에 다시 방문한 카제야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시체는커녕 마을 사람들 모두 건강하게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자신이 전염병을 퍼트리면서 뭔가 실수를 했나 싶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의 계획을 방해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노 님! 와서 이것 좀 드세요!”
“마노 님! 우리 애가 열이 좀 나는데, 아직 병이 덜 나은 게 아닐까요?”
“마노 님. 계속 우리 마을에 계셔주세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을 내려트린 아름다운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카제야는 그녀가 전염병을 막은 마법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쯧. 기다린 게 아깝긴 하지만, 마을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른 마을에 찾아가 또 전염병을 풀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또 그 마노라는 여자가 찾아와 전염병을 막았다.
두 달이라는 시간을 허공에 날린 카제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노라는 마법사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간단한 짐을 챙긴 마노가 인적이 드문 숲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마을의 전염병이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 몰래 떠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숲 깊은 곳까지 들어가길 기다리던 카제야는 그녀를 향해 살해 저주를 날렸다.
그러나 그때를 기다린 것은 카제야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나를 죽이려 했나요?”
200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었던 살해 저주가 마노의 손짓 한 번에 허무하게 파훼되었다.
“뭐야…… 너, 넌 누구야!”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 없어요. 나도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고요.”
“그래, 네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내 연구를 방해하는 건 봐줄 수가 없거든.”
“어쩌죠? 사악한 흑마법 연구를 그냥 놔둘 수는 없는데…….”
“네가 뭔데!”
“내가 누구라서가 아니라, 모든 동물들은 제 종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랍니다.”
그게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코웃음을 치던 카제야가 다시 고문 저주를 날렸고, 마노는 순간적으로 커다란 반사면을 만들어 카제야의 저주를 그녀에게 다시 되돌려 주었다.
저에게 되돌아오는 저주를 공중에 흩어버린 카제야가 빠르게 마노를 향해 달려가며 마력으로 만들어낸 검으로 그녀의 몸을 찔렀지만, 방금까지 무방비하게 서 있던 마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망할!”
200년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분노와 무력감이 카제야를 옥죄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만이 특별하다고 믿었나요?”
사라진 마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카제야는 제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순간, 카제야의 등 한복판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커헉!”
카제야는 피를 토하며 맞은편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방금 마노가 내뿜은 힘의 파장이 보통 마법사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 그녀가 저보다 한참 높은 레벨의 마법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마력을 모아둔 마력핵이 손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제야는 마노가 저를 향해 자박자박 다가오는 것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도 죽는 게 두렵죠? 그러니 제 껍데기도 아닌 것을 뒤집어쓴 채 운명을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죠. 그런 사람이 왜 남의 목숨은 그다지도 쉽게 생각하나요?”
“난, 난 달라! 죽으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거라고!”
“다르지 않아요. 어린 자식을 두고 가는 부모의 심정은 당신이 죽어서 겪을 고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아요.”
“웃기지 마! 우린 그들과 달라. 너도 알잖아. 너는 죽을 운명인 그들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녔지. 그건 그 버러지 같은 인간들은 갖지 못한 힘이잖아. 그들이 아닌 나야말로 너와 같은 종족이라고. 그러니까 넌 나를 살려야지!”
“당신이나 나나 인간이에요. 그 대전제를 절대 잊어서는 안 돼요. 그걸 잊는 순간 우리는 악마나 다름없어지니까.”
마노는 엄정한 얼굴로 카제야를 끝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카제야가 마노와 말을 섞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잠시 시간을 번 카제야는 남은 마력을 끌어올려 마노를 공격하는 동시에 가까운 마을로 자신의 몸을 이동시켰다.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올린 카제야는 몸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고통에 까무룩 정신을 잃었지만, 그녀가 이동한 마을의 주민들이 길가에 쓰러진 노파를 지극정성으로 치료해 준 덕분에 그녀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상대에게 타격 한 번 주지 못하고 졌다는 사실은 카제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대로 마노를 잊고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카제야는 해리엇의 몸을 탈취한 뒤로 암암리에 마노의 흔적을 뒤쫓고 있었다.
하지만 3년 전까지는 희미하게나마 쫓을 수 있었던 마노의 흔적이, 2년 전쯤부터 갑자기 사라졌다.
처음엔 죽은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토록 강한 마법사가 죽을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랬는데 벤티악 공작의 힘에서 마노의 냄새가 난단 말이지.’
사랑보다 더 강렬한 복수심을 잊지 않고 있던 카제야에게 그것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카제야는 시체 썩는 냄새 자욱한 제 연구실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엊그제 완성한 키메라 세 마리가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자신들을 가둔 철창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둘 달린 늑대, 뿔 사슴의 머리가 달린 말, 그리고 여기저기 기운 자국 가득한 인간이었다.
“네년에게 이 역작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오호호호!”
카제야는 허옇게 까뒤집은 눈을 하고 침을 흘리며 우리 안을 어슬렁대는 인간 시체 조합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었다.
엘로르 덕분에 이 지루한 인생에도 이제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 * *
황위를 향한 경쟁도 중반부로 들어섰다.
각 후보들은 세력을 형성하는 동시에 제국의 골치 아픈 일들을 해결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선택한 분야는 외가 쪽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건축, 토목 쪽이었다.
작년에는 다행히 수도 주변으로 큰 재난이 닥치지 않았지만, 노후화된 시설이 몇몇 곳에서 문제가 되었다.
아이리스는 ‘파르디나스의 발전을 이끌 사람은 아이리스 황녀뿐!’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몇몇 마을의 물레방아와 다리, 목책 등을 수리해주었다.
그런 토목 사업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인부가 필요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그녀가 노린 이들은 그런 힘없는 백성들이 아니었다.
토목 사업에는 인부 외에도 필연적으로 많은 부자재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법이고, 기간 시설이 튼튼해지면 해당 지역의 생산성도 올라간다. 거기에 발을 걸치고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원래 돈이 많은 부류였다.
“다른 후보들은 대의명분이나 내세우겠지만 전하께서는 직접적인 이익을 약속하고 계시니, 귀족들의 표는 분명 전하께 몰릴 것입니다.”
아이리스의 참모들은 그녀의 낙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이 누군가의 독주를 두고 볼 리 없었다.
“제국 파르디나스에 엘룬의 가호가 함께 하니, 이것은 전부 성녀 엘로르 님의 영향입니다. 엘로르 황녀님께서 황제가 되셔야만 이 나라의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성녀로 이미지를 완전히 굳힌 엘로르는 신전을 장악했다.
아무리 돈을 밝히는 귀족들이라지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종교였다.
그들이 한 달에 두 번씩 신전에 가서 기도를 드릴 때마다 신관들에게 엘로르의 얘기를 듣는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마음 너그러운 부인들은 평민들을 위한 교육이나 의료 지원 사업에 나선 엘로르를 칭찬하며 아이리스는 돈만 밝힌다는 둥, 남자들만 대변한다는 둥 험담을 해댔다. 물론 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클리드와 엘로르가 포섭한 부인들이었지만 말이다.
한편, 라리에트라는 패까지 잃은 라반은 원로원 쪽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황제가 된다면 원로원의 힘을 더 키우겠습니다. 파르디나스의 부흥을 이끈 분들인데 이렇게 무시당하셔서는 안 되지요!”
젊은 세대로부터 뒷방 늙은이 정도로나 취급받던 노귀족들에게 라반의 호소는 꽤 잘 들어 먹혔다. 아울러 이제 곧 원로원 위원으로 입후보할 장년층 귀족들도 라반의 약속에 관심을 보였다.
라반과 다이애나 황비로부터 독립한 라리에트는 황위 경쟁과는 상관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체라프 자작이나 베르트 융커, 아르네 백작 부인을 비롯한 문인들과 문학 애호가들의 출입이 잦았다.
다들 그런 라리에트를 의아해했으나 그렇다고 딱히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라리에트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손들이 나름대로 귀족들의 면면을 공략하고 있을 때, 슬라르한은 의외의 임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아말 족 소탕은 제가 이어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제국 서남부의 변경 지역 테르소에서 소수 민족인 아말 족이 또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아이르델은 테르소 시찰을 나섰다가 아말 족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황제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아말 족은 그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테르소 지역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황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영지에 자신의 군사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아들이 아비의 원수를 갚으러 가겠다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오, 슬라르한. 충성스럽고도 효심이 지극하구나.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허락하마.”
황제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출정을 허락했다.
드디어 아버지가 죽은 곳을 조사할 수 있게 된 슬라르한은 서늘하게 단단한 얼굴로 황궁을 나섰다.
그의 뒤에서 어금니를 꽉 문 채 말을 아꼈던 타리크는 황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울분을 터트렸다.
“허락? 허어락? 이게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저는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자네가 잊었나 본데, 벤티악 가문은 원래 숨 쉬는 것도 허락받고 쉬어야 했네. 이 정도면 황제 폐하께서도 대단히 너그러워지신 거지.”
“으아아악!”
타리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타리크만큼 분하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살 만해진 현실을 확인한 것 같아 감회가 새로울 지경이었다.
“분통을 터트릴 여유가 있다면 아말 족 토벌 준비에나 더 힘을 쏟게. 아말 족도 토벌하고 아버지의 죽음도 비밀리에 조사해야 하니 신경 써야 할 게 많을 거야.”
“그렇죠. 아이르델 님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려야죠.”
두 남자는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의지를 품에 숨기고 돌아와 아말 족 토벌대를 꾸리기 시작했다.
테르소 영주에게는 황궁에서 연락을 주기로 했으니 슬라르한은 벤티악 기사단을 이끌고 테르소 지역으로 출발만 하면 되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슬라르한이 테르소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일리에는 부리나케 달려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넌 아직 적들과 맞서 싸울 실력이 못 돼.”
“다른 하급 기사들도 출정하잖아요. 상급 기사님도 제가 하급 기사들 정도는 충분히 때려잡을 실력이라고 인정해 주셨는걸요?”
“그래도 안 돼. 위험해.”
이유를 대지도 않고 위험하다고만 하는 슬라르한을 보며 일리에는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위험한 게 문제라면 여기 남았을 때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만들어주면 된다.
“제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는데…….”
일리에의 불안감 어린 목소리에 아니나 다를까, 슬라르한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주인님도 안 계시고 기사단도 다 빠져나간 저택에 있는 저를 죽이기는 훨씬 쉽겠죠?”
“그건…….”
“차라리 주인님을 따라가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은데…….”
역시 그 핑계는 슬라르한의 속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갔다.
그는 뭔가를 한참 고민하다가 정말 내키지 않는 얼굴로 당부했다.
“따라가되, 절대 테르소 성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거다. 알았나?”
“에이, 그러면 또 저더러 주인님의 정부네 뭐네 뒷말이 나온다고요. 다른 기사님들도 다 같이 참여하는 일은 저도 하고요, 정예 부대만 나가는 일에서는 빠지겠습니다. 그 정도면 되겠죠?”
눈썹을 까딱이며 설득하는 일리에에게 슬라르한은 뭐라고 잔소리를 퍼부으려다가 말았다. 일리에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자신이 너무 일리에를 싸고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안 그래도 일리에를 두고 가는 것을 놓고 고민하기는 했다.
일리에 말처럼 암살자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데다 아말 족 토벌이 몇 달이나 걸릴지 모르는데, 그사이 일리에를 안 보고 지내는 게 불안했다. 기분도 울적해질 것 같았고, 이전 같은 불운이 또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이미 일리에는 안 보이면 불안한 수준의 부적이 되고 말았다.
“놀러 가는 게 아니니 절대 위험한 짓은 하면 안 된다.”
“네. 그래도 혹시 또 모르죠. 이번에도 저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길지…….”
일리에는 생글생글 웃었다.
테르소의 아말 족 토벌이야말로 반드시 자신이 따라가야만 했다. 전생에 자신이 적장의 목을 베었던 전장이 바로 테르소였으니까.
험준한 아르테즈 산 곳곳에 숨어 있던 아말 족이 바람처럼 나타나 공격하고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을, 일리에는 이미 한 번 겪어봤다. 그들의 본진을 찾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모른다.
자신은 그때 이미 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큰 타격이 없었지만, 오로지 벤티악 기사단만을 끌고 가는 슬라르한이 그만큼의 희생을 치른다면 아이리스나 엘로르만 좋은 일 해주는 꼴이었다.
‘이번에도 이 누님만 믿으라고.’
일리에는 자신 덕분에 병사들을 지키고 승리도 거둘 슬라르한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껏 뿌듯해했다.
* * *
“잘 지내셨습니까, 전하.”
“어서 오세요, 융커 경.”
라리에트가 반갑게 베르트를 맞았다.
아르네 부인의 문학 살롱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은 만나고 있었다.
베르트는 황궁에 올 때도 덥수룩한 수염을 정리하지 않았고 언제나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소매 끝이 조금 해진 갈색 재킷과 무릎이 살짝 튀어나온 갈색 바지, 깨끗하게 빨기는 했지만 왠지 좀 누레 보이는 셔츠와 앞코가 꽤 상한 검은 구두…….
사실 그런 차림의 사내가 황녀의 방에 들락거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황궁 예법을 따르는 절도 있는 태도 덕분인지, 아무도 그가 귀족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가 베르트 융커라는 사실을 알면 누구도 그의 행색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 <랑게르 여행기>는 작년 하반기에 출간되어 엄청난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였으니, 그가 돈이 없어 옷을 못 사 입는 것은 아닐 테니까.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표정이 밝으시네요.”
“네? 제가요? 어…… 그런가……?”
라리에트는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베르트와는 벌써 여러 번 만나왔지만, 지금도 라리에트는 베르트와 함께 있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고,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려서 아쉬울 지경이었으니까.
다만, 자신의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아 자꾸 신경이 쓰였다. 방금도 바보같이 웃고 있었던 모양이고…….
그러나 베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글 얘기로 넘어갔다.
“체라프 자작님의 출판사에서 조만간 시집을 내신다고 하셨지요?”
“네. 자작께서 제 습작을 좋게 봐주셔서요.”
약속대로 황궁을 방문해 라리에트의 습작을 확인한 체라프 자작은 당장 계약을 맺자며 흥분했다.
솔직히 라리에트는 자신의 시가 그 정도로 좋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했기에 ‘릴리’라는 필명을 써서 출간하기로 했다.
“시집이 출간되면 전하께 초판 사인본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네? 무, 물론이죠!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런데 정말 보잘것없는 글이라 융커 경께서 보신다고 생각하니 너무 부끄럽네요.”
“전하께서는 조금 더 뻔뻔해지셔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요.”
베르트의 조언에 라리에트는 무심코 일리에를 떠올렸다.
“……더 제멋대로 굴어도 되는걸요. 꿈속의 언니였다면 얼마든지 그러라고 했을 거예요.”
일리에도 저에게 더 제멋대로 굴라고 했었다. 편지로도 늘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고, 자신만 생각하라고 했다. ‘이 정도는 좀 위험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기적으로 굴어야 겨우 손해 안 보고 살 거라고 말이다.
“그런 얘기를 몇 번 듣기는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으음……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라리에트는 베르트가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이야기였는지, 묘하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라리에트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혹시 황제가 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베르트의 질문에 라리에트가 화들짝 놀랐다.
“네? 아, 아니요! 없어요. 저는, 그러니까, 이건 겸양이 아니라, 저는 정말로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요. 지금 상황에서 제가 황제가 될 확률이 희박하기도 하거니와, 된다고 하더라도 신경쇠약에 걸리거나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 거예요.”
“현명하시군요.”
베르트는 진심으로 라리에트가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다.
여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바로는, 그녀는 황족으로 사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베르트, 그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 말이다.
“황제가 될 생각이 없으시다면, 황위 발표가 날 때까지 해야 할 일이 꽤 많으실 텐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리에트도 베르트가 더 이상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유들유들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지 날카로웠다.
라리에트는 침을 꼴깍 삼켰다. 누군가는 저보고 어리석다고 할지 모르지만, 자신은 베르트를 믿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유를 사랑하고 불평등한 제약을 혐오하며 다른 이들의 자유 역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라리에트는 일리에에 이어 베르트에 대한 자신의 감도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융커 경을 믿고 드리는 말씀인데요.”
“절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를 떠날 거예요. 황위 발표가 나기 전에 외국에 자리를 잡아두고 싶어요. 더 이상은 누군가의 소모품이나 꼭두각시로 살고 싶지 않거든요.”
베르트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외국에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하고 사실 건지가 중요하지요.”
“계속 글을 쓰고 싶어요. 앞으로는 소설도 써보고 싶고요, 다른 문학 작품도 많이 접해보고 싶어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시집을 내도 좋을 것 같고, 희곡을 써보고 싶기도 해요.”
“희곡에도 관심이 있으셨군요.”
“제가 쓴 글로 사람들이 직접 연극을 한다면 너무 신날 것 같아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라리에트의 조그만 입술에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베르트는 자신이 라리에트의 무엇이 되고 싶은 건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유명한 작가로 자라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와 함께 피델로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피델로요? 아……! 피델로 출신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물론 거기라고 낙원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제가 전하의 꿈을 지원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라리에트는 큰 두 눈만 깜빡였다.
라리에트가 곧바로 반응하지 않자 베르트는 왠지 조금 초조해졌다. 이런 천재를 황실에서 썩게 해서는 안 되었다.
“피델로는 파르디나스보다는 작지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국빈 자격으로 건너가신다면 피델로 왕실 도서관을 이용하실 수도 있고요. 왕립 대학의 문학부 교수진도 쟁쟁합니다.”
“하지만…….”
“살 곳이라든가 생활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정도는 전하의 격에 맞게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 아뇨, 그런 말씀이 아니라…….”
라리에트는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베르트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보다 먼저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다.
“왜 저를 도와주신다는 건가요? 저를 도와주셔도 제가 융커 경께 드릴 수 있는 게…… 그다지 없는데요.”
베르트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역시도 얼마 전부터 고민하던 부분이었으니까.
보좌관에게 라리에트에 대한 자료를 받아 읽는 내내 미간의 주름이 펴지질 않았다.
올해 열여섯 살이 된, 아직 소녀티도 다 벗지 못한 어린 황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기가 죽어 살았다.
여자에게 무조건 얌전하고 예쁜 인형이 되길 강요하는 몇몇 나라에서나 볼 법한, 그런 성장 과정이었다.
하지만 소심하고 나약해 보이는 이 황녀는 은근히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녀가 ‘여자답지 못한’ 모임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2황비의 억압 하에서도 ‘고대 시어 연구회’에 나가 활발히 활동한 걸 보면 말이다.
게다가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어머니와 오라비를 막기 위해 기습적으로 입장을 번복하고 다시 황위 후보로 나서기까지!
처음에는 흥미였고, 그다음에는 동정이었지만 종국에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녀를 돕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소녀가 눈부신 날개를 펼쳐 훨훨 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라리에트는 금싸라기 같은 시어를 흩뿌려 남루한 인간 세계를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오랜 일탈조차 이 소녀의 성장을 돕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심스러우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저는 일말의 삿된 마음도 없습니다. 전하를 통해 이득을 볼 생각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전하의 능력을 펼치시기를 바라고, 단지 그걸 돕고 싶을 뿐입니다. 증명이 필요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시험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하는 겁니다. 저는 원래 하고 싶은 걸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라서요.”
베르트의 빈약한 변명에 라리에트가 눈을 서너 번 깜빡이다가 서서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네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도 있는 거겠네요.”
“그렇다고 전하를 가벼이 여긴다는 게 아니라…….”
“저는…… 그런 개념 자체를 생각해 보지 못해서요.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그래서 여태 여길 벗어나지 못한 건가 봐요.”
그건 라리에트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일깨워 주는 개념이었다.
‘이게 제멋대로 살라는 말의 원래 뜻인지도 몰라.’
라리에트는 난생처음으로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일에 뛰어들기로 했다.
이유 없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남자의 손을 잡고, 이유 없이 피델로에 가서, 이유 없이 저 하고 싶은 일을 해버리기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융커 경.”
라리에트의 만면에 피어난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 * *
파르디나스 서남부 변경에 위치한 테르소는 10년 전쯤부터 국경 지역의 산맥에 자리 잡은 아말 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벤티악 공작에 우호적이었던 전 영주가 다스릴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영지가 피폐해지지는 않았는데, 전 영주가 숙청당하고 황제파인 새 영주가 들어서자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황제는 이것이 전 영주의 실정에 따른 것이라며 10년도 더 전의 인연을 꼬투리 잡아 그 책임을 아이르델에게 물었다. 그 때문에 아이르델이 뜬금없이 테르소 지역 시찰을 나가야 했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황궁에서 받은 서류상으로는 이 부근이 전 공작 각하께서 기습당하신 곳입니다.”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던 기사 하나가 침통한 목소리로 고했다.
테르소에 진입하는 경계 부근의 ‘랑깃 숲’이었다.
나무가 울창하긴 했지만 말을 달리지 못할 만큼 빽빽한 건 아니었고, 암살자가 완벽하게 몸을 숨길 만큼 덤불이 우거진 것도 아니었다.
“개소리!”
타리크가 버럭 소리쳤다.
“아이르델 님이 여기서 기습을 당하실 만큼 부주의한 분이셨던가? 7년 전 칼로크 계곡에서의 교전 때도 그 시커먼 숲 안에 매복했던 놈들을 다 찾아낸 분이신데? 황실에서 아이르델 님에 대한 조사가 부족했던 모양이야.”
타리크의 비아냥에 다른 기사들 역시 분노에 찬 얼굴로 이를 갈았다.
아무리 ‘월급 기사’라느니 ‘받는 돈만큼만 충성한다.’라느니 무시당하는 직업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이 벤티악 공작가에 갖는 충성심은 다른 가문 기사들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벤티악 공작가는 그들을 진짜 기사로 만들어주었고 무엇이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인지 알려주었다.
그들에게 종신 고용을 약속하고, 황제에게 탄압받을 때조차 그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방패가 되어주었다.
벤티악 가문의 기사들은 이제 완전히 벤티악 가의 일부였다.
“아마 테르소의 영주는 진실을 알고 있겠지.”
평범한 숲을 잠시 관조하던 슬라르한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테르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슬라르한의 근처에 있던 일리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르델의 죽음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르델의 죽음에는 그다지 관심 갖지 않았던 터라 그가 죽은 곳이라든가 범인에 대해 알아보질 못했다.
릴리에트가 테르소의 아말 족 소탕에 자진해서 나선 것은 오로지 공을 세워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였으니까.
전생에도 슬라르한이 오고 싶어 했지만 황제는 아이르델을 죽인 자신의 과거가 찔렸는지 릴리에트에게 맡겼다.
‘슬라르한을 경쟁자로 뒀으면서 어떻게 전 공작의 죽음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 어휴, 이 바보.’
아이르델에 대한 공식 문서가 전부 날조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여기 있는 벤티악 가의 모든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니 그다지 쓸모없는 정보였다.
일리에가 주변에 무심했던 자신의 전생을 반성하는 사이에도 벤티악 가 기사단은 부지런히 말을 달려 테르소의 영주성에 도착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어서, 어서 오십시오! 제가 테르소의 영주인 라일 스테른입니다. 아하하!”
흉포한 아말 족에 시달리는 땅의 책임자답지 않게 꽤나 밝은 얼굴이었다. 슬라르한에게 상당히 아부를 떠는 것도 같았고 말이다.
하지만 일리에는 그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심어둔 작자지. 황제에게도 꽤 잘 보였고. 한심해 보이지만 간단히 무시해도 될 만큼 만만하지는 않아.’
별 볼 일 없는 지방 출신의 남작이 황녀와 황제의 눈에 들어 꽤 커다란 영지를 받기까지 했으니, 그것만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전생에도 날 구워삶으려다가 클리드한테 된통 당한 놈이지.’
클리드가 없었다면 저 역시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초반의 지나친 저자세가 영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그런 태도가 꾸준히 이어지자 저도 모르게 그를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까딱하면 비굴해 보일 것 같은 저자세도 나중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가 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어쨌거나 릴리에트는 그때 고작 열여덟 살의 어린 황녀였고 위엄을 갖추고 싶어 애쓰던 때였으니 말이다.
자신의 전생을 씁쓸하게 곱씹던 일리에는 영주의 안내를 받는 슬라르한을 기웃거렸다.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귀한 기사단을 이 먼 곳까지 이끌고 오신 벤티악 공작님을 위해 작은 환영회를 준비했습니다. 별 볼 것 없는 영지라 대단치는 않지만 나름 엄선한 무희들도 불렀으니, 오늘 저녁은 편안히 즐기십시오. 허허허!”
스테른 남작은 굽실대는 허리를 펴지도 않으며 샐샐 웃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선 슬라르한이나 참모진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우리는 아말 족을 소탕하기 위해 온 것이지, 유흥이나 즐기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러니 환영식 같은 것은 생략했으면 좋겠군요.”
“하, 하하하! 역시 소문대로 청렴하신 분인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랫사람들도 생각해주셔야지요. 혈기 왕성한 젊은 사내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풀지도 못했을 텐데, 그렇게 빡빡하게 조이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여러분?”
슬라르한이 한 번 거절했지만, 남작은 벤티악 기사단원들의 동의를 구하듯 인자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여기 도착하기 얼마 전에 아이르델이 피습당했다는 장소를 확인한 데다 그 정보가 전부 거짓일 확률이 높고, 그 거짓 정보를 만드는 데 이 영주가 일조했을 확률 또한 높았기에 기사단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좋다고 환호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서로 눈치를 보거나 실실대는 말단 병사조차 없는 것을 확인한 스테른 남작의 표정은 당황에 물들었다.
슬라르한은 기사단을 한 번 뒤돌아봤다가 다시 무심하게 남작에게 말했다.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술과 여자에 빠질 정신 나간 녀석은 벤티악 기사단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든든한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합니다.”
“아…… 그, 그렇군요…… 하하! 알겠습니다. 역시 벤티악 기사단은 다르군요. 여기서 지내시는 동안 저희 테르소 기사단에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눈치 빠른 스테른 남작은 금세 당황을 지워내고 벤티악 기사단을 치켜세웠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일리에와 딱 마주쳤다. 그는 꽤 놀란 듯 미간을 움찔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일리에를 위아래로 훑었다.
‘눈 깔아, 이 자식아. 어딜 훑고 있어?’
일리에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고 이를 바득 갈았다.
지금 저 작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군대를 따라다니며 몸을 파는 계집이라고나 여기면 다행이었지, 슬라르한이 앞에서는 깨끗한 척 굴면서 시침 노예를 데리고 다닌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일리에가 여자라는 것을 확신했는지 음흉하게 씩 미소를 지으며 슬라르한을 흘끗 쳐다보았다.
일리에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의 존재가 슬라르한의 오점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하지만 역시나 눈치 빠른 남작은 일리에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은 채 슬라르한을 비롯한 참모진을 성안으로 안내해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기사와 병사들은 다른 사람의 안내를 받아 여럿이 모여 잘 수 있는 커다란 방으로 향했다.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짐을 풀고 한숨 돌릴 때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기 시작했다.
무희와 술은 거절했던 기사들이었지만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양질의 식사는 얼마든지 환영할 만했다.
“여기 영주가 그래도 예의는 아는 놈인 모양이야.”
“그러게. 인상이 꼭 쥐새끼 같아서 처음엔 좀 그랬는데, 아까 우리 공작 각하께도 깍듯하게 대했던 걸 보면 괜찮은 사람인가 봐.”
“이제껏 어딜 구해주러 달려갔어도 그다지 환대받지 못했잖아. 그런 곳들이랑 비교하면 여기 영주는 아주 괜찮은 거지.”
슬라르한에게 설설 기던 모습과 먼 길 온 기사들을 위해 큰 연회를 준비한 모습에, 영주에 대한 기사들의 평가는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일리에는 전생의 자신이나 이 녀석들이나 마찬가지구나 싶어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런데 그게 좀 코웃음 치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야, 웃는 꼬락서니가 왜 그러냐?”
누군가 일리에에게 시비를 걸었다. 일리에는 차라리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인간들이 참 태세 전환 빠르다 싶어서요. 여기 영주가 주인님께 친절한 건 다 주인님께서 황제 후보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전에는 황제 폐하의 핍박을 받고 있었으니까 어딜 가든 푸대접 받았던 거고요.”
“어…… 그건 그렇지…….”
“하지만 언제 또 손바닥 뒤집듯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죠. 보나 마나 어느 쪽에 줄을 서야 나중에 이득을 볼까 계산하고 있을 텐데.”
“으음…….”
“게다가 원래 테르소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건 벤티악 가문의 가신이었다면서요? 그분이 숙청당한 틈을 타 이 지역 영주가 된 작자인데, 그런 사람이 과연 우리 주인님을 진심으로 반기고 있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럼 저 인간이 우리한테 잘해주는 이유도, 얼른 아말 족이나 소탕하고 얌전히 꺼지라는 뜻이겠네?”
“바로 그거죠! 역시 똑똑하신 기사님답습니다!”
인간의 태세 전환이 빠르다는 말은 꼭 스테른 남작만을 지칭한 게 아니었다. 방금까지 남작이 꽤 예의 바른 인물이라는 데 동의하던 기사들이 금세 분개하며 도끼눈을 떴으니까.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아이르델 각하의 원한도 풀어드려야지!”
일리에는 혈기가 넘치는 만큼 다루기 쉬운 그들을 보며 전생의 제 병사들을 떠올렸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다들 똑같이 용감하고 정 많고 멍청한 녀석들이었다.
“아말 족을 물리쳐서 공도 세우고, 전 공작 각하의 원한도 풀어드리면 되죠!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벤티악 기사단 아닙니까?”
“맞아! 너, 이 자식, 오랜만에 맞는 말 한다! 아하하하!”
일리에의 적당한 선동질에 기사들은 어느새 경계심과 호승심 가득한, 평소의 벤티악 기사단으로 돌아왔다.
그때, 하인 하나가 방에 들어서며 일리에를 찾았다.
“예? 저요?”
“예. 벤티악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생글거리는 하인의 눈초리는 기분 나쁘게 휘어져 있었지만 벤티악 기사단의 그 누구도 일리에가 슬라르한의 호출을 받아 나가는 걸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일리에는 어디까지나 슬라르한의 심부름꾼이었고, 그녀가 슬라르한의 호출을 받아 뛰어가는 건 이제 너무나 익숙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인은 슬라르한의 앞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일리에를 흘끔거렸지만, 일리에는 싸늘하게 마주 쏘아보는 것으로 그의 개수작을 미연에 방지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짐은?”
“네?”
“짐은 안 가져왔나?”
“가, 갑자기요? 주인님께서 부르셨다는 얘기만 들어서…….”
그러나 슬라르한이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기사들의 방에 같이 짐을 푼 건 아니겠지?”
“예? 안 되나요……?”
“안 돼. 당장 짐 갖고 와.”
“여기……로요?”
“이 쓸데없이 너른 방을 봐라. 여기에 너 하나 재울 곳 없을까.”
슬라르한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여기 오는 내내 다 같이 야영을 했다지만, 사내들과 한방에서 함께 몸 누이기가 조금 찜찜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슬라르한과 한방에서 지내는 건 더 곤란했다.
자신이 슬라르한의 침노라고 믿는 스테른 남작의 생각에 기름을 붓는 격이고,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더라도 저 자신이 힘들 터였다.
‘잠결에 내가 널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얘가 아직 여자 무서운 줄을 모르네.’
날이 갈수록 슬라르한에 대한 마음이 커져서, 야영할 때도 일부러 슬라르한과 떨어진 곳에서 잤고 그의 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게 주의했다.
혹시나 이 마음이 더 부풀까 봐, 커다란 목표를 향한 집중이 흐트러질까 봐…….
하지만 슬라르한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내가 불편할 거라는 핑계는 집어치워. 아무리 네가 기사단과 친하다고 해도, 사내들만 가득 들어찬 방에 여자애가 자게 둘 수는 없다.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더 골치 아프기도 하고.”
“그, 그럼 영주님께 부탁해서 하녀들 방에서 신세를 지는 건…….”
“갑자기 늘어난 입에 하녀들도 고생이 많을 텐데, 그들을 굳이 더 불편하게 만들 이유가 있나?”
“아, 그, 그렇……죠.”
“알아들었으면 얼른 짐 갖고 와.”
일리에는 뭐라고 더 반박하지도 못하고 기사들의 숙소로 가서 제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어디 가냐는 주변 기사들의 질문에는 ‘기사도 아닌 계집애가 기사님들 방에 끼여 자려 한다고 혼났어요.’라고 둘러댔다. 누구도 그 이상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난감한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슬라르한의 방에 들어섰더니 하필이면 스테른 남작이 와서 슬라르한과 얘기 중이었다.
스테른 남작은 제 짐을 껴안은 채 들어오는 일리에를 보고는 알 만하다는 눈빛을 하고 슬라르한을 쳐다보았다.
슬라르한도 그의 생각을 대충 읽은 모양이었지만 무심한 어조를 바꾸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허허! 그럼 잠시 후 만찬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그는 휜 눈매를 유지하며 얌전히 방에서 물러났다.
스테른 남작이 나가고 나자 슬라르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간이침대가 놓인 방 한구석을 턱으로 가리켰다.
기사들의 숙소에서는 짚더미 위에 모포를 깔고 자야 했는데, 그에 비해 상당히 안락해 보이는 침상이었다.
당장이라도 침대 위로 뛰어들어 쑤시는 몸을 쉬고 싶었지만 그래도 양심상 한 번쯤은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아까 스테른 남작님도 영 이상하게 보시는 것 같았는데…….”
“그게 중요한가?”
“어…… 아무래도 주인님에 대한 질 나쁜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으니까요.”
기껏 걱정해 줬더니 슬라르한은 코웃음이나 치고 말았다.
“퍼트리라지.”
“예?”
“벤티악 공작을 건드리면 무슨 꼴이 나는지 보여주는 기회가 될 테니, 정말 그것도 괜찮겠군.”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얘가 언제 이렇게 거칠어졌지?’
하긴, 아이르델이 억울하게 죽은 지역인 데다 스테른 남작도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도발해 주길 더 바라게 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괜히 추잡한 소문에 휘말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일리에의 머뭇거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슬라르한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네가 좀 곤란한가…….”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베델을 떠올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남자가 따로 있는데 오해를 사기는 싫을 것이다.
자신이라도 일리에가 베델과 같은 방을 쓴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테니까 말이다.
‘왜……?’
문득,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겼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일리에가 베델과 한방을 쓴다면 불쾌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대체 왜?
순간 꿈에서 봤던 분홍색 머리칼의 그 여자가 떠올랐다.
“르한!”
그리고 위르스 산에서 일리에가 저를 부르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르한. ……르한!”
머릿속이 왠지 개연성 없는 이미지와 소리로 뒤엉키는 것 같았다.
그때, 일리에가 슬라르한을 일깨웠다.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주인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주인님께서 고작 스테른 남작을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지요. 제가 여기 있는 게 주인님 심부름 하기도 더 편하고요. 그럼 저는 저기다 짐을 풀겠습니다!”
일리에는 걱정하던 아까와는 달리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의 짐을 간이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아이르델이 죽은 지역에 와서인지 슬라르한이 불안정해 보여. 옆에서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도 슬라르한의 눈빛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르한. 이번에도 이 누님이 너한테 행운을 가져다줄 테니까.’
일리에는 슬라르한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기를 바라며 더 밝게 웃었다.
* * *
최근 수도를 중심으로 ‘두꺼비’ 또는 ‘두꺼비 입’이라 불리는 물건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 하고 입을 벌린 듯한 두꺼비 모양의 도자기 장식품인데, 그 자체의 가격도 비쌀뿐더러 주기적으로 등에 마석도 갈아 끼워줘야 해서 유지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랬는데도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이나 권력자들은 반드시 구입했다.
편지를 적어 두꺼비 입 안에 넣으면 상대방의 두꺼비가 그 편지를 뱉어내는 마법 우체통이었기 때문인데,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그들에게는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받아봐야 할 사람에게 두꺼비가 없어서야 소용없는 일이었기에 수도의 세력가들은 자신이 아끼거나 전략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는 지방의 가신에게 두꺼비를 선물하곤 했다.
그리고 테르소의 스테른 남작에게 두꺼비를 선물했던 아이리스는 방금 그에게서 온 편지를 읽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벤티악 공작을 거기에 보낸 거야? 하여간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늘 진중한 편이던 아이리스였지만 치솟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변방의 스테른 남작은 아이리스에게 꽤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람 자체는 탐욕스럽고 역겨웠지만 그가 바치는 물건은 아이리스의 세를 불리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른 남작도 그래. 왜 괜히 쓸데없는 상소를 올려서는…….”
그렇다고 해도 황제가 슬라르한을 그곳에 보낼 줄은 몰랐다. 제가 벌인 짓이 드러나는 게 두렵지도 않았던 걸까, 아니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됐든 아이리스로서는 정말이지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벤티악 공작이 대단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테른 남작조차 못 찾은 그 야만족의 본거지를 금방 찾아내기야 하겠어요?”
옆에서 시녀 블레어가 아이리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지만 그다지 도움 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벤티악 공작이야. 다른 기사단도 아니고 벤티악 기사단이라고.”
여태껏 황제의 온갖 억지 같은 명령도 기어이 완수하고 말았던, 지독한 근성의 기사단.
“게다가 벤티악 공작도 공을 세워 점수를 따야 할 거 아냐. 그 시간과 돈을 들여 거기까지 갔는데 빈손으로 돌아온다? 말도 안 되지.”
아이리스는 슬라르한이 아말 족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리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아이리스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방해받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를 불러들일 핑계를 만들어야 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아이리스는 이내 편지지 한 장을 꺼내 한참이나 고민하며 답장을 썼다.
그리고 그녀가 두꺼비 입에 넣은 편지는 곧바로 스테른 남작의 집무실에 있는 두꺼비의 입을 통해 뱉어져 나왔다.
술과 여자를 거절당한 뒤 초조하게 아이리스의 답장을 기다리던 스테른 남작은 허둥거리며 그 편지를 낚아채고는 조심스럽게 펴보았다.
-친애하는 R.
걱정이 많겠지만, 우선 최대한 시간을 벌도록 하세요.
공작의 눈이 무서워 그의 앞에서는 못 마신다 하더라도 거기까지 진군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술을 마다할 리 없습니다. 그들의 숙소에 공작 모르게 독주를 들여보내세요.
그리고 공작이 추문에 걸려들 일을 벌인 뒤 두꺼비 입을 통해 나에게 알리십시오. 곧바로 폐하께 알려 벤티악 공작을 불러들일 테니까요.
그는 의외로 나이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황제 후보 된 자가 어린 여자를 겁탈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가만히 두고 보시지만은 않겠죠. 참고하세요.
편지를 다 읽은 스테른 남작은 무릎을 쳤다.
‘역시 아이리스 황녀님이시구나! 이렇게 현명하시다니!’
자신은 벤티악 공작의 방에 있는 계집애를 보고도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밖에 못 했는데, 아이리스는 이미 상대의 취향을 다 파악하고 공격할 요소로 삼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알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그에게는 열여섯 살 된 딸도 하나 있었다.
스테른의 성을 이은 유일한 자식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그런 딸까지 기꺼이 활용할 준비가 된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