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벤티악 기사단을 환영하는 연회는 저녁 늦게부터 열렸다.
많은 수의 인원을 들이기 위해 성의 메인 홀이 열렸고,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자태의 오리고기 요리와 갓 구운 빵이 가득가득 놓여 있었다.
“시골 음식이라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양은 넉넉하니 많이 드십시오.”
스테른 남작이 연신 굽신대며 슬라르한과 그 휘하 기사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덕분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유쾌했다.
벤티악 기사단과 테르소 성의 기사단, 영주인 스테른 남작 내외와 그들의 딸이 모두 함께하는 자리였다.
슬라르한은 곁에서 계속 테르소 지역이 얼마나 아말 족 때문에 힘들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스테른 남작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테르소 기사단의 면면을 살폈다.
생각보다 다들 체격도 좋고 훈련도 잘된 것 같았으나 왠지 말수가 적고 가끔 스테른 남작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기사단장조차 그다지 입을 열지 않았는데, 슬라르한과 타리크가 병력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물을 때마다 그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스테른 남작에게 향했다가 돌아왔다.
‘흐음…… 보통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자들은 아랫사람에게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긴 하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해지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슬라르한은 스테른 남작을 대하는 아랫사람들의 태도만 보고도 남작이 평소 어땠을지 대충 상상할 수 있었다.
“하하하, 그런데 말입니다, 벤티악 공작님.”
슬라르한은 갑자기 은근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스테른 남작에게 여태 얘기를 잘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흘끗 시선을 던졌다.
그는 만면에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바싹 다가왔다.
“공작님께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시기는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시는데요.”
의외였다. 그런 눈치까지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전투를 앞두고 당연한 일이죠. 혹시 신경에 거슬리셨습니까?”
“아, 아이구,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오라…… 이럴 때는 적당히 날 선 신경을 풀어주는 게 오히려 집중력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글쎄요. 딱히 신경 안정제 같은 건 복용하지 않아도…….”
“에이, 약 같은 건 오히려 몸에 안 좋습니다. 그보다는 남자에게 더 좋은 신경 안정제가 있지 않습니까.”
스테른 남작이 어울리지도 않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아까 언뜻 보니 이미 그런 용도로 데려온 아이가 있는 것 같긴 하던데…… 그보다는 제 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애가 제 어미를 닮아서 반반하기도 하고, 말도 잘 듣는 착한 아이거든요.”
“……예?”
슬라르한은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졌다. 그러나 스테른 남작은 오히려 더 바싹 붙어 앉으며 속닥댔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아직 처녀입니다. 설마 공작님 시침 시중을 드는데 닳고 닳은 아이를 들여보내겠습니까? 하하하.”
슬라르한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스테른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뭐가 잘못된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스테른 남작. 도대체 자기 딸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시침 시중? ……황당하군.”
“예? 아, 뭐, 뭐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아! 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다고 저 아이를 공작님의 여자로 받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제 성의일 뿐입니다.”
“남작이 성의를 보이는데 왜 남작의 딸이 희생해야 합니까?”
“예? 그, 그야…… 제 딸이니까요.”
갑자기 라리에트가 떠올랐다.
탐욕스러운 오라비와 어미 때문에 아비뻘의 사내에게 팔려갈 뻔했던 어린 황녀.
그녀는 그나마 불운을 피할 방법이 있었으니 다행이었지만, 시골 귀족의 딸에게는 아비의 명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이걸 뭐라고 말해서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저 멀리에서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일리에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일리에라면 뭐라고 했을까.’
사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라면 당장 스테른 남작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대책 없이 솔직하고 불의를 참지 않는 게 일리에였으니까.
그런 일리에가 보고 있는데 이런 역겨운 사내에게 좋은 말로 에둘러 거절하는 건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스테른 남작.”
“아, 예!”
“그런 제안…… 심히 불쾌합니다.”
“……예?”
“남작 눈에는 내가 짐승으로 보이나 봅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아마 아까 내 방에서 지내게 한 심부름꾼 아이를 이상하게 오해한 것 같은데, 그 아이는 어디까지나 내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다 큰 여자애를 남자들 가득한 방에서 재울 수 없기도 하고, 내 자잘한 시중을 들어야 하니 내 방의 간이침대를 내준 것뿐이지요.”
“아, 그……러셨습니까.”
“그리고.”
슬라르한은 스테른 남작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그러나 조금은 살기를 담아 말했다.
“자기 자식마저 일회성 소모품 취급하는 사람의 어디를 믿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군요.”
슬라르한의 서슬 퍼런 기운을 맞은 스테른 남작은 그제야 자신이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잘 알지는 못했다. 그저 죄송하다고만 할 뿐, 내 딸이 눈에 차지 않았나 보다 할 뿐이었다.
스테른 남작이 속으로 ‘참 더럽게 비위 맞추기 힘든 사람이네.’라고 구시렁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슬라르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딸이 어딘지 안도하는 빛을 띠어서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물론, 자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지역을 방문하는 권력자에게 바쳐질지 모르는 아가씨였지만…….
그때 저 멀리 홀의 입구 부근에서 약간의 소란이 벌어진 것 같았다.
홀 안이 시끌벅적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문밖에서 경비병들에게 붙들린 어린 소년의 행색은 절대 성안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군요.”
슬라르한이 그쪽을 주시하자 스테른 남작이 고개를 들었다가 대번에 얼굴을 찡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 소년이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데, 얘기라도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아, 참, 도대체 저 쥐새끼가 어디로 들어온 거야…….”
스테른 남작은 이미 그 소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그래서 더욱 그 소년의 말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예 연회장 상석에서 일어나 소년이 경비병에게 붙들려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스테른 남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슬라르한을 만류했다.
슬라르한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일리에도 슬그머니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냐.”
“헉, 고, 공작님!”
그가 직접 나온 것을 본 경비병들은 뻣뻣하게 얼었다. 그 틈을 타 소년이 경비병들의 손아귀를 빠져나와 슬라르한의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모아 빌었다.
“수도에서 오신 높으신 분이죠? 아말 족을 소탕하러 오신 분 맞으시죠? 저희 누나 좀 구해주세요! 제발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아말 족에 잡혀간 저희 누나를 살려주세요!”
고작해야 열 살을 좀 넘었을까.
아이의 얼굴은 빈말로도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꼬질꼬질 때가 묻은 것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맞아 터진 듯한 뺨이나 입가는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웠다.
슬라르한은 스테른 남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지민이 잡혀갔다는 얘기는 없지 않았습니까?”
“아, 뭐, 몇 명 잡혀가긴 한 것 같은데, 지금쯤 아마 죽었거나 놈들의 여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구하려고 해보지도 않았다는 겁니까?”
스테른 남작은 슬슬 짜증이 나는지, 슬라르한 앞에서도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저희 병력은 저 산중 어디에 잡혀 있는지도 모르는 몇 명을 구하기는커녕, 놈들이 마을을 약탈하는 걸 막기도 급급합니다.”
그의 불퉁한 언사에 곁에 있던 타리크가 짐승이 그르릉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도대체 뭘 막았다는 겁니까? 마을도 난장판이던데.”
“그, 그게 막은 거라고요.”
하지만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니요! 아니에요! 아말 족이 우리 마을을 덮쳤을 때는 아무도 와주지 않았어요! 저희 아버지랑 마을 아저씨들은 아말 족에 맞서 싸우다 다 돌아가셨고요! 마을 아줌마들이랑 누나들이 여러 명 잡혀갔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요!”
슬라르한의 뒤에서 기웃거리던 일리에는 그 아이가 어느 마을 출신인지 알 것 같았다. 전생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됐던, 영지 외곽의 가난한 마을일 터였다.
‘여자들이 잡혀갔었지, 참…….’
그 사실을 안 건 아말 족 소탕이 한참 이루어지던 후반이었다.
그전까지 클리드는 피해 상황을 정리한 서류는 건네주었지만, 저런 이야기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놔두지 않았다.
전생에도 저 마을 사람들은 아말 족과 싸우다 죽었을 것이고 여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납치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정을 전혀 몰랐던 황녀 릴리에트는 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다.
일리에가 전생을 떠올리는 사이, 분위기는 점점 경직되어 갔다.
아이는 영주가 뭐라고 확답을 해주지 않는 이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영주는 당장이라도 아이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그런 스테른 남작에게 짜증이 난 기색이었다.
아무리 스테른 남작이 아이리스 쪽 사람이라지만, 여기 인력도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벌써 사이가 틀어지는 건 좋지 않았다.
일리에는 조용히 앞으로 나와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얘! 높으신 분들께 말씀을 올리려면 먼저 네가 누구인지 밝혀야지. 이름이 뭐야?”
아이는 갑자기 제 누나 또래의 여자가 나타나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겨우 대답했다.
“네, 네스터요.”
“그래, 네스터. 난 일리에라고 해. 여기 계신 공작 각하의 심부름꾼이야. 여기서 이렇게 앉아만 있을 게 아니라 저쪽에 가서 자세한 얘기를 들려줄래? 그래야 우리 각하께서도 생각해 보실 수 있거든.”
“저, 정말, 저희 누나를 구해주시는 건가요?”
아이는 성급하게 희망을 품었다.
일리에는 자기가 아이를 더 자극했나 싶어 슬라르한을 슬쩍 올려다보았지만, 슬라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에의 행동을 허락했다.
“그래, 네스터. 벤티악 기사단은 아말 족을 소탕하러 왔어. 그럼 놈들이 잡아간 네 누나나 다른 사람들도 구해낼 수 있겠지?”
네스터는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숫제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슬라르한 옆의 스테른 남작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봐, 그건 그렇게 간단히…….”
“네스터! 영주님께도 감사 인사를 올려야지. 이건 다 벤티악 공작님께 도움을 요청하신 영주님의 은혜이기도 하거든.”
그 말에 네스터는 퍼뜩 고개를 들더니 스테른 남작 쪽을 향해서도 절을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못 해주겠다는 소릴 할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스테른 남작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어물쩍 넘어갔다.
일리에는 네스터를 일으켜 자리를 옮겼다.
아이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예상 가능할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걸었을 발은 낡은 천으로 둘둘 싸였을 뿐이었는데,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천 위에 피가 조금 말라붙어 있었다.
죽을 각오로 온 아이에게 허기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겠지만 일리에는 일단 아이에게 수프와 빵을 좀 먹였다.
“그래, 아말 족은 언제 너희 마을을 습격한 거야?”
네스터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일리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열흘 전이요. 순식간이었어요. 밤에…… 다들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기습이었구나.”
“다른 때는 창고만 털어가더니, 이번에는 마을을 때려 부수더라고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나가서 싸우기는 했는데…….”
“농부들이 아말 족 전사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지.”
“네…… 놈들은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창고를 털었어요. 그리고 젊은 여자들만 골라 납치했어요.”
네스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살아남은 어른 몇 명이 영주님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씀드리러 갔어요. 하지만 영주님은 문도 안 열어주셨대요.”
“그래서?”
“저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엄마랑 아빠도 돌아가셨는데 누나마저 되찾지 못한다면…… 흐으윽…… 저도 차라리 죽어버릴래요. 어어엉!”
비쩍 마른 아이는 온몸의 물기를 다 짜낼 기세로 울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말리지 않고 네스터가 울고 싶은 만큼 울도록 놔두었다.
눈앞에서 부모가 죽고, 누나가 납치당했다.
누나가 그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네스터에게는 끔찍한 고통일 터였다.
그런 아이에게 울지도 말라는 건 너무한 일이었다.
전생에서도 놈들의 행태는 꿀벌의 집을 터는 말벌 떼 같았다. 식량을 원하면서도 일하기는 싫어해서, 파종 때는 나타나지 않다가 작물들이 거의 다 자랐을 때쯤 나타나곤 했다.
사람들도 그걸 알았기에 식량의 대부분은 집구석에 숨기고, 그들이 털어갈 양은 창고에 따로 보관해 두었기에 인명 피해가 아주 심하지는 않았다.
‘아마 마을을 직접 공격한 건 여자들을 납치하기 위해서였겠지.’
제국민과는 골격부터가 다른 이종족인데다 나면서부터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자란 덕분에 그들은 제국민들보다 체격과 힘이 더 좋았다. 심지어 약탈을 업으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놈들이었으니, 농사나 짓던 제국민이 그들을 막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제국에서도 그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해봤으나 천성이 거친 그들은 종종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점점 안 좋아진 아말 족과 제국민 사이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황녀 릴리에트도 한때는 그들을 이해해 보려고, 회유할 방법이 없는지 찾아보려고 노력했으나 몇 번의 교섭 결렬 끝에 그들과 화합할 희망을 버렸다.
그들은 침입하지 않는 대신 주기적으로 식량과 여자를 바치라는 조건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썩을 놈들. 제국을 식민지 취급한다니까.’
그들이 그토록 뻔뻔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본거지가 험준한 산속에 꼭꼭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기습으로 치고 들어왔다가 다시 빠르게 산속으로 숨어 자취를 감추니, 그들보다 더 좋은 무기를 들고 있다 한들 제국의 기사단은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을 섬멸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의 본거지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하아, 하…… 죄송해요. 눈물이 안 멈춰서…….”
한참을 울고 난 네스터는 거친 숨을 내쉬며 겨우 몸을 추슬렀다.
그제야 일리에는 네스터에게 물을 건넨 뒤 더 자세한 일을 물었다.
“괜찮아. 그나저나 아말 족이 다음 나타날 곳은 대충 알 수 있었을 텐데…… 영주님이 미리 방어할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어?”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일리에는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영지 내에서 농작물을 수확할 때가 된 곳이 어디지?”
“다음번 기습을 당할 지역을 물어보시는 거라면, 영지 내에 두 군데 정도가 있어요. 영주님의 땅인 감자밭하고 저희 마을 근처의 빨간무밭이요. 빨간무는 얼마 전에 수확이 다 끝나고 창고로 옮겨졌어요.”
“그럼 내일 나랑 빨간무 저장 창고로 같이 가줄 수 있어?”
“감자밭은요?”
“으응. 거긴 아마 괜찮을 거야.”
영주가 제 땅의 수확물을 가만히 눈뜨고 빼앗길 리 없었다. 아말 족도 이미 다 수확한 것을 약탈해 가는 놈들이었으니 감자밭은 확실히 아니었다.
스테른 남작이나 영주성의 병사들과는 달리 일리에가 직접 같이 가보겠다고 말해주자 네스터는 한결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표정이 희망으로 물들었다.
“우리 누나를 꼭 찾아주세요. 우리 누나 이름은 티로테예요.”
“그래. 누나랑 다른 사람들 모두 무사하길 기도하자.”
살아 있다고 해서 그들 모두 살 의지를 갖고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리에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그래서 지금 그 마을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몇 없대요.”
연회가 끝나고 드디어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일리에는 슬라르한에게 네스터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얘기를 한참 듣고만 있던 슬라르한은 깊게 한숨 쉬었다.
스테른 남작이 아부나 잘하는 무능력한 작자임은 애초에 알아봤지만, 그런 이를 분쟁지역의 영주로 앉힌 황제의 판단력은 더 골치가 아팠다.
기사단을 운용할 능력도 없으면서 권력으로만 내리누르고 있어서 기사들은 물론 일반 병사들도 싸울 의지가 높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지역을 둘러보고 벤티악 기사단과 테르소 기사단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빠르게 공격을 들어가야겠지. 우리가 여기 온 것을 아말 족도 알고 있을 테니, 저쪽도 기습할 틈을 노리고 있을 거다.”
“오늘 밤에 기습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연회가 열렸다는 것도 알 텐데…….”
“이미 병력을 깔아두었으니 너는 걱정 말고 잠이나 푹 자거라.”
“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일리에는 인사말을 맺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안 그래도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은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상황에서도 쪼르르 달려 나와 영지민 아이를 챙긴 것을 보면 일리에의 인성을 알 수 있었다.
‘제 몸이나 챙길 것이지, 하여간에 약한 것들만 보면 그냥 두질 못해서…….’
슬라르한은 비 맞은 까만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던 일리에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저보다 약한 것만 챙기는 줄 알았더니 황녀의 사정까지 마음 쓰질 않나, 심지어 때로는 자신 역시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았다.
제 몸 아프고 힘든 건 지나치리만치 무심한 아이가, 약한 것들의 생채기는 절대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기사는 무엇보다 약자를 보호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신체적 강인함은 아직 한참 멀었는지 몰라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기사단의 그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했다.
분명 힘들었을 텐데도 여기까지 오는 내내 우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일리에가 꿋꿋이 버틴 덕분에 다른 기사나 병사들 역시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계집애보다 징징댄다며 놀림받았을 테니까 말이다.
일리에의 존재는 확실히 기사단에 어떤 동기를 부여하고 있었다.
‘계집애보다 뒤처질 순 없지.’ 하는 마초적인 자존심 때문에 다들 전보다 더 훈련에 집중했고, 체력과 실력이 늘어서인지 기사단의 분위기도 알게 모르게 밝아졌다.
‘기사로 따지자면 확실히 중급 기사 역할은 충분히 해낼 만큼 성장했어.’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부터 꽤 완성되어 보이는 검술이었지만, 고작 1년 사이에 검술 이외의 부분 역시 놀라우리만치 성장했다.
죽도록 체력 훈련을 한 결과 힘도 굉장히 좋아졌고, 속도는 따라올 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보는 눈도 좋았고 특히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가끔씩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솔직히 일반 기사들이 이 정도 했더라면 전투에 투입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 없었을 것이다.
‘저 녀석은 다 좋은데…… 무모한 면이 있는 게 문제야.’
그게 일리에가 여태 불안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저 다치는 것에 너무 무심한 아이다 보니 생각도 못 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이번엔 전투에 나서지 않을 테니 괜찮겠지…….’
왠지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으며 슬라르한도 잠을 청했다.
* * *
다행히 간밤에 아말 족의 기습은 없었다. 아말 족도 벤티악 기사단의 전력을 파악할 시간은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룻밤 동안 배불리 먹고 푹 쉰 기사단은 다음 날부터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우선 네 개 조로 나누어 영지 내를 순찰하며 피해 상황을 조사하도록 하겠다.”
슬라르한은 조금 더 쉬다가 하라는 스테른 남작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곧바로 피해 상황 조사에 들어갔다.
테르소 기사단이 안내하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그중 가장 계급이 낮은 몇 명만 차출해 길앞잡이만 시켰을 뿐이다.
거기에 타리크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툴툴댔다.
“테르소 놈들을 더 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놈들이 지켜야 할 영지인데…….”
하지만 슬라르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테르소 기사단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서 말일세. 기사들이 전부 스테른 남작의 눈치를 보고 있어.”
“하지만 아말 족을 소탕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스테른 남작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 우는소리를 하지 않을까요?”
“글쎄,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아말 족 소탕보다는 제 딸을 내 침실에 밀어 넣는 일에 더 열심이더군.”
연회 때 그렇게 냉랭히 거절했는데도 간밤에 슬라르한의 방에는 얇은 침의만 입은 남작의 딸이 찾아왔었다.
일리에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어디서 한참 울다 왔는지 눈가가 다 짓물러 있었다.
일리에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내보내긴 했지만, 남작이 무엇을 기대하며 보냈는지를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했다. 숙면을 방해받은 것은 덤이었다.
그 얘기에 타리크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무래도 차기 황제와 연줄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군요. 이런 일이나 아니면 중앙에서 관심을 주지 않을 테니…….”
“그랬을 수도 있지.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아이리스 전하 쪽 군대가 움직였을 거야. 후보들이 점수를 쌓으려고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중앙 쪽으로는 얼굴도 들이밀 수 없는 시골 남작이었으니 황제 후보자와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심을 끌어야 했을 것이다.
아말 족의 침입으로 고생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어제 네스터라는 아이가 했다는 얘기만 들어보면 스테른 남작은 적당한 희생을 치르며 현상 유지하는 쪽을 더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태 편하게 살아왔던 인간에게는 좋든 나쁘든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이 달갑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더더욱 이번에 아말 족의 뿌리를 뽑아놔야 하는 거야. 한 번 쫓아주는 것에 그쳐서는, 이곳 사람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테니까.”
타리크는 그제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검 손잡이를 꾸욱 쥐었다.
슬라르한이 그런 타리크의 어깨를 툭툭 치고 몸을 돌리려는데 순간 어떤 것이 슬라르한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저건……!’
타리크의 검 손잡이에는 빨간 술의 검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 언젠가 엔시아가 슬라르한에게 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사실 타리크가 매달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여태 단 한 번도 저 검 장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잊고 지냈던 물건이었으니까.
“그럼 저는 저희 조 녀석들을 데리고 테르소 남쪽 지역의 피해 상황을 조사해 오겠습니다. 각하께서도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 그, 그러지. 아말 족이 언제 기습할지 모르니 자네도 조심하도록.”
“옙! 저녁에 뵙겠습니다.”
타리크는 슬라르한에게 인사하고 멀어져갔지만 슬라르한은 왠지 복잡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저 검 장식을 타리크에게 건네면서 누구에게 받은 건지는 말해주지 않았었다. 그때는 그걸 설명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으니까.
이후로 타리크가 저에게 한 번 돌려주려고 했었던 것 같지만 아마 타리크더러 가지라고 준 모양이었다.
아마 타리크는 제 주군이 저에게 준 것이라며 소중히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장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엔시아이며, 그걸 자신의 무운을 빌며 건네주었다는 것을 알면…….
‘불쾌해하겠지.’
안 그래도 타리크와 엔시아의 관계에 대해 핑크빛 소문이 난 적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중에 얘기는 해야겠군.’
슬라르한은 난생처음 ‘죄를 지은 건 아닌데 죄를 지은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작게 한숨 쉬다가 말에 올라탔다.
지금은 일에 더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슬라르한이 기사들을 데리고 성을 떠나자 일리에도 네스터와 함께 빨간무밭으로 향했다.
슬라르한에게는 미리 ‘네스터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라고 말해두었으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네스터는 스테른 남작의 무능을 고발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성안에 계속 머무르게 했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일리에는 작은 말 한 필을 얻어 네스터를 태우고 아이의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영지는 전체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낙후되어 보였다. 왜 그런가 하고 살폈더니, 마을 곳곳의 목책이나 건물이 부서지고 무너진 데가 많았다.
“저건 언제 망가진 거야? 꽤 오래되어 보이는데…….”
“아마 3년쯤 됐을 거예요. 그때 아말 족이 저 마을의 호박을 다 훔쳐갔거든요. 그때 부서진 것 같아요.”
“3년이나 그냥 방치했다고?”
“어른들 말씀이, 영주님이 바뀐 다음부터는 영지의 뭐가 부서져도 고쳐주지 않는대요. 그건 영지민들의 재산이니 영지민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요.”
“뭐? 아니, 영지의 방비를 위한 목책이 왜 영지민들의 재산이야? 그럼 이 나라의 도로나 국경 방책도 다 제국민 개개인의 사유 재산인가?”
일리에가 버럭 화를 내자 네스터가 다 포기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소, 소리 질러서 미안해. 네 잘못도 아닌데…….”
“아뇨, 화내주셔서 고마워요. 사실은…… 수도에서 오신 높은 분께서도 관심 없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관심 없었으면 어쩌려고 했어?”
“그 앞에서 계속 떼쓰다가…… 죽어버리려고 했어요.”
“야! 아직 쪼끄만 게 자꾸 죽겠다는 타령이야? 널 살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네가 살아야지!”
“하지만…….”
네스터의 눈에는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알아, 인마. 네가 얼마나 괴로울지…… 하지만 너희 누나가 돌아왔을 때, 누나를 살아가게 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네스터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아말 족에게 잡혀간 마을 여자들이 아주 안 좋은 짓을 당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들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개중에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이가 생길 것이다.
그런 그녀들을 살아가게 해줄 사람들은 남은 가족들뿐이었다.
일리에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네스터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더 빨리 말을 몰아 네스터의 마을 근처에 있는 빨간무밭 저장 창고 앞에 도착했다.
네스터의 말 대로 밭은 얼마 전에 수확을 마친 그대로 다 파헤쳐져 있었고, 몇 겹으로 사슬을 둘러친 창고 안에는 빨간무 몇 포대가 놓여 있을 터였다.
“빨간무 같은 건 심은 지 20일만 지나도 수확할 수 있는 건데, 이걸 털어간다고? 아우, 진짜 그 날강도들……!”
“그래서 아말 족이 빨간무 창고를 습격할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요. 한 달 정도만 있으면 또 수확할 수 있으니까.”
한숨이 나오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싸움을 피했던 게 아말 족의 못된 버릇을 더 부추겼을 것이다. 자신들이 강하다고, 테르소의 영지민은 자신들의 노예나 다름없다고 여기도록 만들었을 테다.
‘전생에 자근자근 밟아준 것처럼 이번에도 씨를 말려주마.’
일리에는 이를 바득 갈았다.
빨간무밭과 창고를 돌아보고 네스터가 사는 마을로 막 출발하려던 순간이었다.
네스터를 먼저 태운 말 위에 올라타려던 일리에는 발을 떼려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조용히 네스터를 불렀다.
“네스터.”
“네?”
“말 탈 줄 알지?”
“어…… 네…… 그런데 그건 왜요?”
“영지 북쪽 신전 방향으로 가다 보면 벤티악 공작 각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누, 누나…….”
“얼른 달려가서 아말 족이 습격했다고 알려!”
일리에는 허리춤에서 바사르를 꺼내 들며 말의 엉덩이를 쳤다.
네스터의 눈이 크게 떠지는가 싶었지만 아이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금세 깨닫고는 고삐를 꽉 쥐고 신전 쪽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일리에는 네스터가 달려간 길을 등지며 앞으로 나섰다.
빨간무밭 저 너머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눈에 보기에도 제국민과 다른 체격의 사내 대여섯 명의 인영이 드러났다.
“마을 놈들이 드디어 말귀를 알아들었나 보군. 식량과 여자를 가져가라고 놔둔 것을 보니. 크크큭.”
억양이 센 아말 족 특유의 제국어가 들려왔다. 일리에는 이를 갈며 전생에 배운 아말 족 단어를 내뱉었다.
“줄루크.”
그 말을 들은 아말 족 침입자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잘못 들었나 싶을 것이다. ‘줄루크’는 아말 족 고유 언어로 ‘모자란 놈’을 뜻하는 욕설이었다.
저희끼리나 쓰는 욕설을 처음 보는 제국인 계집이 내뱉었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일리에는 그들이 의아해하는 틈을 타 그들의 전력을 파악했다.
침입자는 정확히 다섯 명이었다.
다섯 명만으로도 빨간무 창고를 충분히 털어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어쩌면 오늘 성에서 출발한 기사단의 행로도 다 파악했는지 모른다.
그동안 열심히 검술을 연마했고 바사르까지 쥐고는 있다지만 일리에 혼자 전사 다섯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그들을 진지하게 상대할 마음도 없었다.
‘이 기회에 놈들의 본진까지 납치를 당하자.’
테르소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이들의 본거지를 찾을 생각이었지만, 정식 기사도 아닌 자신의 말을 어떻게 따르게 할지가 고민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그곳을 알고 있는지 슬라르한에게 설명하는 것도 점술 운운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잡혀간다면 슬라르한이 직접 찾아올 수 있을 터였다.
‘그의 피를 먹은 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으니까…….’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그 능력 하나만 믿고 무모한 짓을 해보려 하고 있었다.
특히 이 루트로 잡혀가면 네스터의 마을 여자들이 잡힌 곳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도 이 방법을 생각해 낸 이유였다.
‘죽지만 않으면 돼…… 죽지만 않으면…….’
목숨만 붙어 있다면 슬라르한이 살려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팔다리를 잃는다면 치명적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살아남기만 한다면 슬라르한이 황제가 되는 것을 돕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일리에는 창고 앞을 막아서서 아말 족 놈들로부터 빨간무를 지키려 드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들 역시 여기까지 내려온 목적은 창고를 터는 일이었기에 도망간 네스터를 쫓지 않고 곧바로 창고 쪽을 향해 다가왔다.
“어딜!”
일리에는 검을 휘두르며 그들을 열심히 쫓는 척하는 한편, 최대한 시간을 벌었다.
“헤헤, 검을 든 계집이라니…… 이 지역 계집은 아니군그래.”
“그건 또 별미겠는데?”
놈들은 저들끼리 킬킬대며 여유를 부리면서도 일리에가 든 검이 보통 검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함부로 검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일리에도 지금은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 죽는다면 그들은 자신을 납치하기보다 이 자리에서 살해하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정도 시간을 끌었으면 됐어.’
일리에는 네스터가 신전에 닿았을 즈음의 시간이 흐르고 아말 족 전사들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흐를 때쯤 슬슬 힘이 빠진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구석으로 몰아넣은 사냥감이 지친 기색을 드러내자 포식자들은 금세 눈치를 챘다.
“얌전히 무기를 버리면 다치게 하지는 않겠다. 검을 내려놔. 어차피 너 혼자서는 우릴 이길 수 없다.”
“오, 오지 마!”
“헤헤! 날뛰어봤자 계집이지!”
일리에가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던 쪽의 아말 족 하나가 별안간 달려들며 뒤에서 몸을 껴안았다.
끔찍한 감각이었지만 일리에는 꾹 참으며 잡혀가는 아가씨 역할에 충실했다.
한 놈이 일리에를 제압하는 사이 나머지 네 녀석은 망치로 창고 문을 간단히 부수고 각자 빨간무 한 포대씩 등에 지고 나왔다.
“가자!”
“아하하! 오늘은 의외의 수확이 있구만!”
“그러게. 이 검도 꽤 좋아 보이는데? 족장님이 좋아하시겠어!”
그들은 오늘의 수확에 흡족해하며 풀숲 뒤에 숨겨두었던 말 위에 올라탔다.
제국 기사들이 타고 다니는 것보다 키는 작지만 다리가 두껍고 튼튼해 산을 잘 뛰어다니는 야생말이었다.
일리에는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은 척 몸에 힘을 뺐다. 아말 족 사내들은 일이 쉽게 됐다며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일리에는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주변을 확인했다.
만약 슬라르한이 못 올 상황이 된다면, 자신이라도 마을 여자들을 데리고 여기에서 도망칠 궁리를 해봐야 했으니까.
‘그럴 일은 없길 바라지만…….’
전생에서도 겪어본 적 없던 미끼 작전에 솔직히 잔뜩 긴장되긴 했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한참이나 산길을 오르더니 울창한 숲에 가려진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어? 그건 또 뭐야?”
“하하하! 사내놈들이 다 뒈졌는지 계집 하나가 창고 앞을 지키고 있더라고!”
“설마. 그거 잡아가고 당분간 오지 말아 달라는 소리 같은데?”
“진작에 이랬으면 좀 좋으냐고. 멍청한 놈들.”
아말 족들끼리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에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기절한 척했다.
저를 안아 든 놈 옆에 다른 놈들이 와서 자신을 구경하는 게 다 느껴졌다.
“꽤 귀여운데?”
“저번에 잡아 온 계집들보다 상태가 좋으니 이번엔 좀 오래 버티겠지.”
“제국 계집들은 약해 빠져서 몇 번 가지고 놀지도 못한다니까.”
“어쨌든 족장님께 먼저 올려야 하니까 준비시켜.”
그들의 대화 몇 마디 안에서 지난번 잡혀 온 여자들이 어떤 지옥을 겪었을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제발 너무 늦지 않았기를…….’
일리에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전생에는 그들을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아니, 얼굴도 구경하지 못했다.
릴리에트가 아말 족 본거지 내에 납치된 제국민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본거지가 대부분 파괴된 다음이었으니까.
“거기에 제국민 여자들도 있었다잖아, 클리드!”
“전하. 큰일을 이루기 위해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차피 살아도 산 인생이 아닌 사람들이었을 텐데, 거기에 우리 군의 병력이 더 희생됐어야 했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릴리에트 전하. 이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로 더는 응석 부리지 마십시오. 동화책에서나 나올 정의를 이룩하려면 전하의 병사들 몇십, 몇백 명이 대신 피를 흘려야 한다는 걸,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 말에 자신은 한마디도 더 할 수 없었다.
병사들의 희생을 발판삼은 주제에, 더 큰 선을 이루겠다고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잡혀가 끔찍한 일을 당한 채 절망 속에 죽어갔을 그녀들을, 황녀 릴리에트는 잊은 적 없었다.
밤마다 피우는 독한 연초의 이유 중 하나는 분명 그녀들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구해줄게. 반드시……!’
구하는 주체가 슬라르한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는 절망 속에서 죽도록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 일리에는 제국민 여자들이 감금된 오두막 안에 처넣어졌다.
“저녁까지 이 계집을 깨끗이 닦고 꾸며놔라. 이 계집이 족장님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너희 중 누군가 또 차출될 테니까, 최선을 다해보라고.”
아말 족 사내가 야비하게 비아냥거리다가 나갔다.
* * *
작은 손으로 말 고삐를 꼭 붙들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말을 달린 네스터는 저 멀리 수도에서 온 기사단의 모습이 보이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공작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공작님! 공작니임!”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린 네스터는 자신을 붙드는 기사들을 뿌리치려 애쓰며 목이 터져라 슬라르한을 불렀다.
다행히 그들은 테르소 성의 기사들과는 달리 네스터를 슬라르한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기사들 눈에도 심상치 않아 보일 정도로 네스터는 절박한 상태였다.
슬라르한은 어렵지 않게 네스터를 알아보았다.
“너는 분명 어제 성에 찾아왔던…….”
“아말 족 놈들이 나타났어요! 누나가, 누나가 혼자 놈들을 막아섰다고요!”
다짜고짜 내지른 소리에도 슬라르한은 네스터가 말하는 ‘누나’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일리에가……?”
“잡아갔을 거예요! 흐윽, 흐으, 놈들이 잡아갔을 거예요…….”
네스터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꺽꺽대며 울었다.
제 누나에 이어 친절하던 일리에마저 저 때문에 잡혀간 것 같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슬라르한은 곧바로 말에서 내려 네스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정하고 자세히 얘기해라. 아말 족이 나타난 곳이 어디냐!”
“허억, 흑, 빠, 빨간무밭이요. 거기, 창고가 있어요. 빨간무를 수확해서 창고에 넣어뒀거든요. 아말 족이 그걸 훔치러 올 거라고 얘기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놈들이 나타나서…….”
슬라르한은 빨간무밭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정신을 집중해 일리에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한곳에 머무는 것 같던 그녀의 기운이, 방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아버지가 테르소를 향해 출발하던 날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길한 기운이 그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타리크 대신 자신을 보좌하고 있는 기사를 불렀다.
“데일.”
“예, 각하.”
“피해 조사를 종료한다. 당장 모든 기사단을 테르소 성 앞에 집결시켜. 오늘 바로 놈들을 치겠다.”
“예!”
데일이라는 기사는 되묻지도 않고 시원스레 대답한 뒤 이 소식을 다른 조에 전할 기사들을 뽑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테르소 기사단 쪽 말단 기사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작정 산으로 들어간다고 놈들을 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놈들의 본진이 어디 있는지, 저희도 아직 모릅니다.”
슬라르한은 싸늘한 눈으로 그 기사를 쳐다보며 답했다.
“이젠, 내가 아네.”
“예?”
테르소의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슬라르한은 그에게 더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에 분노하지 않으며 답해주기엔, 그의 모든 세포가 지나치게 날 서 있었다.
“꼬마. 일리에가 혹시, 별다른 말은 없었나?”
“아, 아니요. 얼른 가서 아말 족이 나타났다고, 공작님께 알리라고만…….”
“그래,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수고 많았다. 너는 마을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지금부터는 전쟁이 벌어지는 거나 다름없으니, 함부로 산 쪽으로 다가오지 않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저…… 누, 누나는, 우리 누나랑 일리에 누나는, 돌아올 수 있는 거죠?”
네스터가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슬라르한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흐흑, 감사합니다!”
슬라르한은 몇 번이고 허리 굽혀 인사하는 네스터를 하급 기사에게 맡기고 빠른 속도로 성을 향해 돌아왔다.
소식을 들은 스테른 남작이 성문 앞까지 나와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고, 슬라르한의 조보다 먼저 성 앞에 도착한 기사들이 서두르며 무기와 장비를 확인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출병 소식에 테르소 기사단과 스테른 남작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벤티악 기사단은 그저 전열을 가다듬을 뿐이었다.
“고, 공작 각하! 이렇게 갑자기 공격이라니요! 위험합니다!”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는 내가 판단합니다.”
스테른 남작이 짐짓 걱정하는 투로 말렸지만 대답하는 슬라르한의 목소리는 아침에 나갈 때와는 달리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각하께서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아말 족 놈들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그러다 기습에 크게 당하실 겁니다!”
“남작은…….”
“예?”
“마치 내가 아말 족을 소탕하지 못하길 바라는 것 같군요.”
“아,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벤티악 기사단의 실력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거나…….”
“각하, 그건 오해……!”
“그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시간에 테르소 기사단 집합 명령이나 내리시는 게 좋을 텐데요.”
그때쯤 슬라르한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못해 살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 스테른 남작이 즉시 이해했을 정도로 말이다.
전에 없이 날 선 슬라르한의 무시무시한 분위기 때문에 벤티악 기사단과 테르소 기사단은 순식간에 테르소 성 앞에 집결했다.
“테르소의 영주 라일 스테른과 황실 간의 구조 협약에 따라, 이 시간부터 아말 족 소탕이 확실해질 때까지 전군의 최고 명령권자는 나, 슬라르한 벤티악이 될 것이다.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금부터 내 명령에 토를 달거나 불복하는 자는 곧바로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이의 있나?”
이의가 있더라도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슬라르한은 말 그대로 누구 하나를 물어뜯고도 남을 정도의 살기를 내뿜고 있었으니까.
타리크마저 슬라르한의 눈치를 살피게 될 정도의 살기였다.
“지금부터 전체 병력을 다섯 개로 나누고 진군 시 주의점을 알려주겠다.”
슬라르한은 다섯 개 조의 통솔자를 전원 벤티악 기사단에서 뽑고 테르소 기사단 정예의 반만을 공격군에 포함시켰다. 나머지 반과 일반 병사들은 성을 지키도록 놔두었다.
그리고 슬라르한이 테르소 기사단의 정예를 뽑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타리크가 데일 곁에 다가가 속닥댔다.
“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각하께서 왜 저래?”
늘 침착하고 조심성 많은 슬라르한이 이렇게나 충동적으로 움직인 적은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다. 뭔가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났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데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까 어떤 꼬맹이가 달려와서 하는 말이, 왜 그 노예였던 계집애 있잖아? 걔가 아말 족 놈들한테 잡혀갔다더라고.”
“……일리에가?”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여하튼 각하의 심부름꾼 하는 걔 말이야.”
“걔가 아말 족에게 잡혀갔다고?”
“어. 둘이 같이 그다음 습격당할 위험이 높은 곳을 둘러보고 있었다나 봐. 그 녀석, 참 재수도 없지.”
“그걸 듣고 우리 각하는 눈이 뒤집히신 거고?”
“우리가 영지 안을 살피고 있는 와중에 놈들이 기습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불쾌하셨나 봐.”
데일은 그렇게 말했지만 타리크의 생각은 달랐다.
‘일리에 녀석이 또……!’
가는 곳마다 일을 벌이는 녀석도 문제이긴 했지만, 일리에의 일이라면 열 일 다 제쳐놓는 슬라르한도 문제였다.
타리크는 이번만큼은 슬라르한을 말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서 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각하.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타리크. 꼭 지금이어야 하나?”
“예. 지금이어야 합니다.”
“알았다.”
슬라르한은 정예군을 지정하는 일을 금방 마무리 짓고는 기사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었다.
그리고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타리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각하. 설마 그런 게 아니라고는 믿고 싶습니다만, 지금 이렇게 공격을 서두르시는 거, 일리에 녀석 때문입니까?”
그 질문에 슬라르한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타리크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건 평소 그가 알던 ‘무뚝뚝하지만 내심 다정한 주군’의 눈빛이 아니었다.
당장 누구 하나라도 죽일 것 같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타리크도 절대 만만한 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슬라르한에게 얻어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각하. 물론 저도 그 녀석을 구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급하게는 안 됩니다. 아말 족 놈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산속을 헤맬 겁니까?”
그리고 그제야 슬라르한이 무겁게 입을 뗐다.
“타리크.”
“예, 각하.”
“일리에는…… 내 피를 마셨어.”
“……예?”
“그리고…… 내가 내 피를 먹인 자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걸, 알아.”
그 순간 타리크의 표정이 멍해졌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 같았다.
“서, 설마…….”
타리크는 슬라르한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역시 슬라르한의 피를 먹고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슬라르한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기억해 본 적 없었고, 이런 식으로 이용할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미친…….”
“추적이 가능한 건……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뿐이다. 그리고 난 절대 그 아이가 죽게 놔둘 생각이 없어. 절대로.”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타리크도 이를 꽉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공을 세우게 하려고 제 목숨을 담보로 거는 미친놈이 어딨어! 심지어 계집애가!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그제야 슬라르한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역시 분노로 머리통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그 분노가 누굴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사방으로 살기가 뻗어나갈 것만 같았다.
* * *
아말 족 사내가 나간 뒤 일리에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주변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만 날 뿐, 누구 하나 일리에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일리에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창으로 빛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 사람들의 얼굴을 다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오두막 안의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다.
“여기 혹시…… 티로테라는 분, 있나요?”
일리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몇몇이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었다.
일리에는 그들을 향해 다시 물었다.
“티로테가 누군가요?”
“티로테는…… 왜 찾아요?”
“티로테의 동생한테 얘길 들어서요.”
“그래서요? 티로테의 소식을 알면, 그걸 네스터한테 알려줄 수 있나요? 당신도 여기 잡혀와 버린걸.”
그녀들의 태도는 이미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리에는 자신이 한발 늦었음을 깨달았다.
“티로테가…… 누군가요?”
티로테에 대해 아는 것 같았던 여자들이 다시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일리에는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 옆에 송장처럼 누워 있는 여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리에는 본능적으로 그게 티로테임을 알았다.
그녀는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멍하니 눈뜬 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 같았다.
“티로테…….”
그녀는 일리에의 부름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있던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다 저 개 같은 야만족 놈들 때문이야!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그 절규에 주변의 여자들이 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린 놈들의 노리개로 살다가 죽겠지…… 영주님은 우릴 버렸어.”
“나쁜 새끼. 세금은 세금대로 박박 긁어갔으면서! 야만족이 침입했을 때 그 새끼가 한 게 뭐가 있어!”
여자들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스테른 남작을 저주했다.
일리에는 스테른 남작이 아말 족을 방치했었다는 데 좀 더 무게를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들…… 진정하세요.”
일리에가 타이르자 다들 갈 곳 없는 분노를 일리에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지금 우리가 진정하게 생겼어?”
“너도 오늘 밤 개새끼 우두머리에게 당하고 나면 우리가 이해되겠지!”
그녀들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던 일리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다시 말했다.
“여러분. 조만간…… 구원군이 올 거예요.”
갑자기 오두막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우리도 처음엔 그렇게 믿었지.”
한동안의 정적 뒤에 누군가가 힘없이 말했다.
“헛된 희망 품지 마. 그게 사람 더 미치게 하거든.”
다른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덧붙였다.
“우리가 살아 돌아간다 해도, 마을 사람들이 반겨줄 리 없어.”
또 다른 누군가의 말끝에는 억울한 눈물기가 배어 있었다.
“차라리 한 번에 죽여주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또 몇몇이 엉엉 울었다.
그것만 들으면 다들 절망에 빠져 살 의지를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리에는 그녀들의 절규 안에 담긴 목소리를 들었다.
‘살려줘.’
‘우릴 구해줘.’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줘.’
그건 가장 처절한 호소였다. 마치 루벨파스트에서 죽어가던 일리에가 슬라르한의 망토 끝자락을 잡은 채 죽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일리에는 울컥 솟구치려는 눈물을 도로 삼키고 그들을 돌아보며 낮게 속삭였다.
“저는, 아말 족을 소탕하기 위해 수도에서 온 벤티악 기사단의 심부름꾼입니다. 벤티악 공작님이 여러분들을 구하러 오실 거예요. 그러니, 절대 삶의 의지를 놓지 마세요.”
수도에서 온 기사단의 일원이라는 말에 여자들은 숨을 들이켰다. 의심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일리에가 그동안 잡혀 온 사람들과는 달리 시종일관 침착하고 어떤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을 본 여자들은 서서히 눈물을 거두었다.
“저, 정말……이에요?”
“진짜 우리를 구하러 와요?”
그녀들은 마지막 구명줄에 매달리는 것처럼 절박한 표정이었다. 아까보다 말투가 정중해진 것만 보아도 그들의 절실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리에는 슬라르한을 믿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 단단히 먹어요. 그리고 아말 족 놈들이 의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태도를 조심하세요.”
그녀들은 서로 마주 보다가 마지막으로 믿어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물론 일리에의 말을 못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잡혀온 지 오래되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이 기사단을 이끌고 오면 어차피 다들 믿게 될 일이었다.
일리에는 오두막 안을 살피며 살아남은 여자들의 수를 셌다. 일리에 자신을 빼면 총 열여덟 명이었다.
“이곳에 잡혀온 사람은 여러분이 전부인가요?”
일리에의 물음에 그나마 가장 적극적으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더 많았었죠. 하지만 도망치다 죽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도망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많았나요?”
“많았죠. 오두막 문도 잠겨 있지 않았고 이 주변 감시도 허술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저 짐승 같은 놈들의 유희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사람들이 도망치면…… 그때부터 사냥이 시작되는 거예요.”
끔찍한 이야기였다.
전생에 아말 족을 좀 불쌍하게 여겼던 적이 있는데, 그때 마음 쓴 게 억울해질 정도로 분이 치밀었다.
“얼마나 죽었습니까?”
“글쎄…… 우리가 오기 전에도 이미 많이 죽었을 테니, 숫자를 세는 게 의미가 있나 싶어요. 자살한 사람 숫자도 꽤 되고…….”
여태 많은 사람이 아말 족에게 잡혀가 죽었다는데 스테른 남작은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썩어빠진 놈 같으니…….’
영주가 영지민에게서 세금을 걷는 것은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테른 남작은 안전을 보장하기는커녕 영지를 제대로 일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 영지를 지킬 의지가 있었다면 영지 내의 목책 상태가 그랬을 리 없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티로테가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으, 으아아! 싫어! 아아악!”
티로테가 발버둥 치자 옆에 있던 여자들이 티로테의 곁에서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들로서는 티로테를 진정시키려는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티로테는 더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일리에는 재빨리 그 곁에 다가가 티로테를 놔주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치며 말을 걸었다.
“티로테! 티로테! 지지 마. 우리는 반드시 테르소로 돌아갈 거야. 네스터가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
일리에도 티로테가 제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주고 싶었다.
티로테가 몸부림치며 일리에를 마구 쳤지만 일리에는 그녀에게 우리는 살아 돌아갈 것이며 네스터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이 모든 게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도 해줬다.
그러나 정작 티로테가 반응한 말은 다른 것이었다.
“저놈들 꼭 다 죽여 버릴게! 널 건드린 놈은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게!”
“정말이야?”
방금까지 혼란 속에 빠진 듯이 허우적대던 티로테가 섬뜩하게 눈동자를 돌리며 일리에를 쳐다보았다.
어둑한 오두막 안이었는데도 티로테의 눈에서 안광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응. 정말이야.”
“약속할 수 있어?”
“응. 내 목숨을 걸게.”
티로테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식은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이마와 메마른 입술, 야윈 몸과 덜덜 떨리는 손은 그녀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아까와 달랐다.
“얘, 얘가 정신을 차렸네! 정신 차렸어!”
“티로테!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니?”
주변의 여인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티로테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일리에만을 쳐다보았다.
“너…… 오늘 밤…… 우두머리 방에 끌려갈 거야…….”
푹 잠긴 목소리가 끔찍한 기억을 더듬듯 말을 끌어냈다.
“알아.”
“어쩔 셈이야?”
“운이 좋으면 그놈을 죽여 버릴 수도 있겠지.”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여자들이 실소를 터트렸다.
“뭐? 너, 미쳤구나? 네가 어떻게 여기 족장을 이겨?”
하지만 일리에는 티로테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살짝 미쳤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죽이지 못하더라도 제가 모시는 주인님이 반드시 죽여줄 테니까…… 그때까지 저는 여기서 버티면서 기다릴 거예요.”
“이미 놈들에게 당하고 난 다음에 구출되면 그게 무슨 소용인데?”
“제가 살아서 버티고 있어야 주인님이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으니까. 그래서 주인님이 이놈들을 다 소탕하면, 앞으로 테르소 지역은 살 만해지겠죠. 소용없는 짓이 아니에요.”
“넌?”
“저요? 저로 인해 주인님이 공을 세우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저한테 의미가 있는 일이거든요.”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일리에도 자기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세상 모두에게 이해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일리에의 대답은 티로테에게만큼은 제대로 들린 모양이었다.
“우두머리의 이름은 카라즈야. 아까 네가 본 아말 족 놈들보다 한 뼘은 더 커.”
“……알아.”
친히 모가지를 베어준 카라즈 놈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술상이 들어올 거야. 술과 간단한 안주. 카라즈가 살살 달래는 척하면서 술을 따라줄 거야. 어차피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 긴장이라도 풀라면서.”
티로테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그건 무심한 것도 아니었고 초탈한 것도 아니었다. 분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재와 같은 건조함이었다.
“그 술을 마시면……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 그러니…… 뭔가 해보려고 한다면…… 그 술을 먹지 마.”
괴로운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티로테의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알았어.”
“그리고…… 카라즈의 방 모든 잠금장치는…… 일반적인 잠금장치를 여는 방향과 반대로 돌려야 열려.”
아마 그 방에서 빠져나오려고 문을 열어보려다 알게 된 정보일 것이다.
일리에는 이를 바득 갈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즈는…… 고분고분한 것보다는…… 반항하는 여자를…… 흐윽…… 더…… 좋아해.”
“티로테…….”
“그러니까 반대로, 흐윽, 놈한테 살랑거리거나 아양을 부리는 척하면, 악몽이…… 빨리 끝날지도…… 흐으윽.”
일리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티로테의 고통이 전이되는 것 같아 심장이 옥죄어들었다.
저와 동갑이라는 순수한 아가씨가 며칠간 지옥을 겪으며 정신을 거의 놓아버리기까지, 그녀는 얼마나 신을 찾아 구해달라고 빌었을까.
전생의 그녀는 카라즈의 목이 떨어졌다는 것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일리에는 테르소 여인들을 대신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하기 시작했다.
* * *
“이런 길이 있었다니……!”
슬라르한이 앞장서서 아르테즈 산의 험준한 산길을 헤치며 나아가자 테르소에서 나고 자랐다는 기사마저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공작 각하는 우리도 모르는 길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가시는 거야?”
“높으신 분이라 우리 같은 놈들이랑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지.”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말이야. 세상에…… 이쪽 길은 짐승이나 다니는 길인 줄 알았더니…….”
테르소 기사들은 신기한 듯 계속 입을 놀렸지만 벤티악 기사단은 오히려 조용했다.
슬라르한의 행동이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이전의 아이르델만 해도 작전 중에 신묘한 수를 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슬라르한을 전적으로 믿었다.
벤티악 가의 선택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 그들은 지난 세월 동안 터득해 왔다.
“어유, 진짜 이 길이 맞는 건…….”
“쉿!”
묵묵히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선두가 갑자기 멈춰서자 각 조의 조장들이 입술 한가운데 집게손가락을 댄 채 입단속을 했다.
“여기서부터는 중간중간에 함정이 있는 것 같다. 전군, 일렬종대로 조심히 따라오도록. 부주의하게 굴어서 기사단 전체에 피해를 입히는 일 없도록 하라.”
“옛!”
슬라르한은 아까부터 일리에가 지나간 자리를 자신의 마력으로 더듬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덕분에 말이 빠르게 달린 곳, 천천히 걸어간 곳, 갑자기 지그재그로 지나간 곳 모두 그는 알 수 있었다.
일리에가 놈들에게 잡혀가지 않았던들, 이렇게 쉽게 아말 족의 본거지를 찾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리에가 무모한 짓을 벌인 게 화가 났지만 결국 자신은 그녀의 무모한 짓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그런 저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혹시 또 모르죠. 이번에도 저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길지…….”
그런 말을 지껄이며 생글생글 웃던 일리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설마 그때부터 이런 일을 작정하고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찾아내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한 달간 방에 가둬 버릴 것이다. 가둬서 맛있는 것과 좋은 것들만 잔뜩 안겨줄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무사해라, 일리에.’
슬라르한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제발 살아 있기만 하라고 간절히 빌었다.
“각하, 날이 저물어가는데요. 이쯤에서 야영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아마 일리에가 잡혀가지 않았더라면 슬라르한도 그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나란 놈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일리에가 아닌 다른 포로들도 일분일초 피를 말리며 지내고 있었을 텐데, 일리에가 잡혀가기 전까지는 그들의 절박함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이제는 슬라르한도 네스터의 애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쉬는 잠깐 사이에 일리에가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목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놈들의 본진이 머지않았다. 이대로 계속 진군한다.”
슬라르한은 걸음도 멈추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 * *
아말 족이 일리에에게 입히라고 던져준 옷은 속옷부터 제대로 갖춰진 제국식 일상용 드레스였다. 귀족의 것은 아니었지만 꽤 잘 사는 평민 여성의 옷 같았다.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훔쳐 온 거지?”
“죽은 누군가의 옷이겠지. 매번 입히라는 거 보면 카라즈 놈이 좋아하는 스타일인 모양이고.”
일리에의 혼잣말에 일리에에게 옷을 입혀주던 여자 하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희생된 누군가의 옷을 입고 또다시 희생당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칠 법도 했지만, 일리에는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
죄없이 죽어간 이 옷의 주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신을 차린 것 같았던 티로테는 완전히 제정신을 찾은 게 아니었다.
일리에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던 그녀는 또다시 허공을 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그녀를 돌보던 같은 마을 여자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리에는 오두막 한편에 있던 물동이의 물로 대충 씻고 닦은 다음 드레스를 입었다.
사실 대단한 치장이랄 것도 없어서, 그러고도 해가 다 지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말 족에는 여자가 없나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아말 족 여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잡혀 온 뒤로도 아말 족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없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이놈들은 피르미 족 여자들한테서만 아이를 낳아. 겨울이 되면 ‘번식’을 위해 뽑힌 사내들이 알루 산 너머에 있는 피르미 족을 찾아가는 거야. 그리고 번식 행위를 끝내고 돌아올 때는 다섯 살이 된 아말 족의 핏줄들을 데려오는 거지.”
“허……! 아니, 딸을 낳을 수도 있잖아요!”
“딸은 데려오지 않아. 그래서 피르미 족도 딸이 태어나면 열 중 일곱 정도는 죽여 버린다더라. 낳아도 돈이 안 되니까.”
황당했다.
돈을 주고 번식을 한다는 것도, 그걸로 먹고 사는 부족이 있다는 것도…….
“그런 식으로 피가 섞였으면 아말 족도 결국 피르미 족이나 다름없다는 거잖아요!”
“점점 희석되어 가고는 있겠지. 하지만 피르미 족은 아말 족 피가 섞인 아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그 두 부족의 피가 섞여야 가장 체격이 좋다나 봐. 그래서 이놈들은 절대 제국인 여자에게서는 아이를 보지 않아. 임신이라도 하면 바로 죽여 버리지. 그래서 아말 족이 제국에 편입되지 않는 거야. 제국인의 핏줄이 없으니 제국인에게 동정심이나 동질감을 느낄 일도 없는 거지.”
일리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전생에 아말 족 소탕 작전을 벌이고 성공까지 했건만,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무관심에 얼마나 많은 원한이 이 산 아래 묻혔을까.
그때, 오두막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준비됐나!”
일리에를 데리러 온 아말 족 하나가 일부러 더 험악하게 을러댔다.
그의 뒤로는 새로운 여자를 구경하려고 몇 명이 몰려들었다.
“역겨운 놈들.”
일리에는 낮게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여자들은 일부러 태도를 조심할 것도 없이 이미 반대쪽 구석으로 몰려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로 잡혀 온 여자가 우두머리에게 바쳐지는 동안은 아무도 다른 여자를 건드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 여자의 끔찍한 시간을 대가로 잠시간 안전을 보장받는 건, 남겨진 여자들에게는 죄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꾸물대지 말고 얼른 나와!”
바깥에서 놈이 윽박지르자 일리에는 뒤돌아보며 조용히 일렀다.
“나는 괜찮으니까, 여러분도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요.”
그러고 나서 일리에는 오두막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등은 조금도 떨지 않았고, 그녀의 발걸음은 조금도 머뭇대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누군가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의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두막 안의 모두는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우리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일리에의 말에 신뢰가 생겼고, 뱀의 아가리로 들어가면서도 남겨진 이들을 염려하던 목소리에 용기가 솟았다.
서로 몸을 바싹 붙인 채 서서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그들은 문이 완전히 닫히고 아말 족들이 멀어져 가자 아까 몰래 깨트린 사기그릇 조각을 하나씩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을 뒤에 남기고 나온 일리에는 곧바로 아말 족 놈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헤헤! 꽤 그럴듯하잖아?”
“이번에는 얼마나 버티려나?”
“키키킥. 이봐, 여자! 소리 질러봐!”
하지만 일리에는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도발을 무시했다.
그녀를 데리러 온 사내는 일리에가 같잖아 보였는지 비웃으며 조롱했다.
“그래, 계속 콧대를 세워라. 우리 족장님은 너 같은 계집을 무너트리는 걸 즐기시거든.”
그러고는 일리에를 끌고 카라즈가 머무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족장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마을 안의 다른 집들보다 크고 화려했다. 그래봤자 나무로 지은 오두막 주위에 인골을 엮어 장식해 둔 것뿐이지만 말이다.
“족장님! 여자를 데려왔습니다.”
그가 문을 두드리고 고하자 안에서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이놈 얼굴도 오랜만이군.’
10년이 훨씬 지난 과거의 일이라 낯설 줄 알았는데, 마치 얼마 전에 봤던 얼굴처럼 기억이 생생했다.
불그죽죽한 얼굴과 커다란 근육질의 몸뚱이, 부리부리한 눈과 번들거리는 저 이빨까지…….
‘여전히 역겹네.’
일리에의 감상을 알 리 없는 카라즈는 그녀의 팔뚝을 붙든 채 소리쳤다.
“술상은 아직이냐!”
“갑니다, 가요!”
왜소한 사내 하나가 쟁반에 술병과 술잔 두 개,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 두 가지 정도를 얹고서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그는 카라즈의 방 한가운데 쟁반을 내려놓고 일리에를 위아래로 한 번 훑은 뒤 비굴한 미소를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일리에는 재빨리 카라즈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바사르!’
방의 한쪽 벽면에 무기 몇 개가 걸려 있었는데, 그중 제일 아래에 일리에의 바사르가 걸려 있었다.
“흐흐흐! 자자, 앉으라고.”
카라즈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짐짓 호의를 베풀 듯 자리를 권했다.
일리에는 마지못하는 것처럼 그가 내어준 방석에 앉았다.
“이름이 뭐지?”
“너 따위와 통성명이나 할 기분은 아닌데.”
“으하하하! 오랜만에 상당히 용감한 계집을 잡아 왔군그래! 좋아, 좋아. 뭐, 이름은 중요하지 않지.”
그는 천천히 잔에 술을 따랐다.
“멍청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일리에는 답하지 않았다. 카라즈는 아마 긍정의 대답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는 꽤 관대한 주인이다. 네가 느낄 두려움도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제국 사내 따위는 다신 생각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고는 술잔 하나를 일리에 앞에 내밀었다.
“자, 한잔해. 어차피 벌어질 일은 달라지지 않으니, 마시고 긴장이라도 좀 풀어라.”
하지만 일리에는 술잔을 흘끗 내려다봤을 뿐 그 잔을 받아들지는 않았다.
“난 그다지 긴장 안 되는데? 그러니 후딱 하고 끝내지.”
“……뭐?”
“옷부터 벗을까?”
일리에는 벌떡 일어서서 허리에 둘둘 매어진 끈을 풀기 시작했다. 스커트를 몇 겹이나 입어서 치마 하나를 벗어내도 세 겹이나 더 남을 터였다.
“아니, 자, 잠깐!”
“왜? 설마 이걸 한 땀, 한 땀 풀어보길 기대하며 기다렸나? 사춘기 소년이야?”
카라즈의 말문이 막혔다.
원래는 술 때문에 정신은 온전히 깨어 있고 사지만 움직이지 못하게 된 일리에를 눕힌 뒤 공포심을 조성하며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려는 계획이었다.
언제나 제국 여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소리 지르는 꼴을 구경할 수 있었기에 카라즈가 제일 즐거워하던 일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진짜 그래? 세상에…… 못해도 마흔 살은 먹은 것 같은데, 유치한 것도 정도가 있지.”
“서른여덟이다.”
“서른여덟이나 마흔이나.”
일리에는 계속 끈을 풀어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카라즈는 오히려 저가 당황스러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 너……! 계, 계집이 맞는 거냐?”
“아, 좀 기다려. 확인하게 해주겠다잖아.”
그사이 일리에는 끈을 다 풀고 치렁치렁한 치마 한 겹을 훌렁 벗어 내렸다. 그러고는 또 그 아래 있는 치마의 끈을 찾아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다.
“아, 귀찮게 뭐가 이렇게 많아.”
일리에는 짜증까지 내가며 열심히 옷을 벗었고 카라즈는 일리에가 벗어던진 치마를 붙들고 그녀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넌 뭘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 너도 옷 벗고 침대에 누워!”
일리에가 옷을 벗다 말고 카라즈에게 소리치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다가 일리에가 언제까지 이렇게 당당한가 보자는 듯 허리에 맨 띠를 벗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한참 벗은 것 같은데도 일리에는 아직 슈미즈와 보디스를 걸치고 있었다.
“어…… 이건 일일이 풀기가 좀 힘들겠는데…….”
촘촘히 묶인 보디스의 끈을 내려다보던 일리에는 카라즈가 얇은 속옷 한 장만 남겨놓고 침대에 올라가는 것을 흘끔 보다가 무기가 걸린 벽 쪽으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냐!”
“끈을 도저히 못 풀겠어. 칼 좀 빌리자.”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검을 되찾아오는 것을 빌린다고 표현하는 게 좀 잘못됐을 뿐.
일리에는 단도를 집으려는 척하다가 바사르의 손잡이와 검날 부분을 고정하고 있는 잠금쇠를 가볍게 밀어 열었다. 물론, 티로테가 말해준 대로 평소 알고 있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말이다.
그리고 일리에가 바사르를 꺼내 들자 침대에 앉아 ‘어어.’ 하던 카라즈도 곧바로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네 이 년!”
“전장에서보다는 확실히 멍청하네. 줄루크!”
일리에는 바사르의 손잡이를 단단히 쥔 채 몸을 낮춰 카라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카라즈도 괜히 이 야만족의 우두머리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커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게 가뿐히 공중제비를 돌며 일리에가 내지른 검을 피했다.
그러고는 침대 곁에 놓아두었던 제 검을 재빨리 들었다. 한쪽으로 살짝 휜 곡도였다.
“아아, 그 검도 오랜만이네. 이런 것도 참 희한하지? 전에도 너, 그 검 들고 나랑 싸우다가 죽었잖아.”
“흥! 역시나 미친 계집이었군그래!”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시다면야.”
일리에의 대답에 코웃음을 친 카라즈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일리에를 난도질할 기세로 달려들었다. 바사르에 맞부딪치는 곡도의 감각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래, 그때도 이렇게 공격해 들어왔지. 공격 패턴도 여전하네. 아니, 당연한 건가.’
일리에는 엄청난 힘을 무기로 쇄도해 오는 카라즈의 검을 간신히 막아내며 그의 틈을 기다렸다. 분명히 조만간, 틈이 생길 터였다.
* * *
슬라르한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저편 너머를 가리켰다.
기사들 역시 숨죽인 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이동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아말 족 본거지를 둘러싼 목책과 경비병들이 보였다.
몇 년 동안이나 찾지 못했던 악당들의 소굴이 거짓말처럼 나타난 것이다.
아말 족은 때마침 저녁 시간인지 마을의 몇몇 군데 피워진 불가 근처에 모여 앉아 뭔가를 먹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봐도 테르소 영지에서 잡혀 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 감금해 두었을 터였다.
슬라르한과 주변의 몇 명은 조용히 활에 화살을 걸고 크게 시위를 당겼다. 화살촉 끝에는 예전에 일리에가 만들어줬던 동물 진정제 가루 주머니를 끼운 상태였다.
퉁-!
가볍게 놓은 시위로부터 화살 여러 발이 날아가 아말 족 마을 여기저기에 박혔다. 하얀 가루가 주변에 흩날리던 그 순간, 슬라르한의 곁에 있던 타리크가 뿔피리를 크게 불었다.
뿌우우, 하는 뿔피리 소리가 길게 숲을 뒤흔들자 새들이 놀라 소란스레 날아갔다.
아말 족 소탕 작전의 시작이었다.
“뭐, 뭐야!”
늘 테르소 지역을 기습하던 주제에 기습당하는 건 처음이었던 아말 족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과 뿔피리 소리에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기습이다! 제국놈들이……!”
마을 경계 부근에서 경비를 서던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다 칼에 찔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적 떼를 섬멸하고 포로들을 구출하라!”
“와아아아-!”
슬라르한이 이끄는 기사단은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며 그동안 테르소를 유린해 왔던 아말 족의 본거지로 들이쳤다.
진정제 분말은 이미 다 흩어진 상태라 기사단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지만, 기습에 당황하여 조심할 새도 없었던 아말 족 전사들은 자신의 몸이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조차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카앙-!
아말 족 무리가 모여 앉았던 한가운데로 달려든 슬라르한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아말 족을 베어나갔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포로들이 붙잡혀 있을 만한 곳을 찾느라 마을 여기저기를 훑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달려 나오는 아말 족 사내들만 보일 뿐, 제국인 여자들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일리에가 보이지 않았다.
일리에의 위치를 더 자세히 파악하려면 일리에에게만 정신을 집중해야 했는데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이 마을 안인데, 분명 이 가까운 곳 어딘가인데 아말 족들은 그보다 더 자세히 위치를 가늠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데일! 애버딘! 양쪽으로 흩어져!”
슬라르한은 믿을 만한 이들에게 마을 안쪽으로 파고들기를 명령했다.
그사이 아말 족 전사 하나가 창끝으로 그의 목을 겨누었지만 슬라르한은 데일과 애버딘이 달려가는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가볍게 창끝을 쳐내고 곧바로 상대의 복부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커헉!”
적군이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도 슬라르한의 뇌리를 잠식하는 두려움과 초조함을 밀어내 주지 못했다.
‘어디 있는 거냐, 일리에! 어디야!’
혹시라도 아말 족 놈들이 일리에를 인질로 삼을까 봐 큰 소리로 외쳐 부르지도 못하고 눈으로만 일리에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지만, 검날에 누군가의 가죽이 베이고 뼈와 살이 썰려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사방이 피비린내와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 피 냄새 안에 일리에의 것이 섞이기 전에 빠르게 놈들을 전멸시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그러나 포로에 대한 생각은 아말 족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라서 누군가가 아말 족 언어로 소리쳤다.
「제국인 계집들을 붙잡아! 인질로 써야 한다!」
그 말에 몇몇 아말 족 사내들이 마을 안쪽에 숨겨진 오두막을 향해 달려갔다.
기사단이 여길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굳이 이 험준한 산길을 헤쳐 올라온 것은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다급하게 오두막까지 달려간 그들은 다짜고짜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모두 다 나와!”
그들이 문을 열자 들리는 소음과 얼핏 보인 광경으로, 오두막 안의 여자들은 일리에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정말…… 우릴 구하러 왔어……!”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들을 잡으러 들어오던 사내가 이를 바득 갈며 을러댔다.
“오히려 네년들 때문에 저놈들은 다 죽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네년들이 죽을 테고.”
그의 누런 앞니가 징그럽게 번들거렸다.
* * *
채앵-!
벌써 몇 번째의 합이 맞부딪쳤다.
카라즈는 이제 당황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계집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맞은 편의 여자는 아말 족의 우락부락한 녀석들도 두려워하는 자신의 검을 마주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위축은커녕 묘하게 여유마저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저 겁을 상실한 미친 계집인 줄로만 알았다.
자신이 내려친 검을 막기 급급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세 번, 네 번, 다섯 번으로 이어지고 여자의 눈빛이 마치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빈틈을 노리는 짐승처럼 전혀 흔들림이 없자 그제야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여자가 내 검을 막아서는 게 가능한 일이었나?’
그때부터 카라즈의 검은 흔들렸다.
그리고 일리에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생에 이미 그를 한 번 무너트린 적이 있으니까.
* * *
아말 족은 무식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부족을 다스릴 족장을 선출했다. 족장에게 결투를 신청해 거기서 이기면 새로운 족장이 되는 것이다.
단, 그 싸움은 무조건 목숨을 걸어야 했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덤비지 않을 뿐이었다.
카라즈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족장 자리에 올라 서른여덟이 된 이제까지 약 스무 번의 도전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강력한 족장이었다.
하지만 도전은 그의 집권 초반에 몰려 있었고 그가 너무도 절대적으로 승리한 덕분에 근 5년간은 아예 도전이 없었다.
전생에 아말 족과의 전투에 앞서 아말 족 포로로부터 거기까지의 정보를 입수한 릴리에트는 카라즈가 방만해져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지독한 마초들의 집단에서 그곳의 우두머리는 제 앞에서 몸을 낮추는 다른 수컷들에게 익숙해져 있을 터였다.
‘그런데 하물며 계집이 맞서서 무너지지 않는다면…… 꽤 당황스럽지 않을까?’
사실 그건 수많은 짐작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릴리에트는 묘하게 그 짐작이 들어맞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수많은 아말 족과의 전투 끝에 드디어 카라즈가 선두에 나서자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기사단의 맨 앞에 나서서 그와 맞부딪쳤다.
그 당시 저를 보고 비웃던 카라즈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했다.
“제국의 사내놈들은 다 뒈졌나 보군. 고작 계집을 우두머리로 세우다니!”
이미 다 이긴 싸움을 마주한 것 같은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릴리에트 황녀를 선두에 둔 기사단은 반대로 초조함과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전하! 전하께서 잘못되시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 없는 싸움이 되는 겁니다!”
기사단장과 클리드가 번갈아 가며 릴리에트를 말렸지만 릴리에트는 검을 뽑아 드는 것으로 그들의 입을 막았다.
“내가 죽는다고 이 싸움이 의미 없는 게 되는 건 아니지. 테르소를 구할 수 있잖아. 내가 죽는다면 곧바로 그들의 방심을 노려 공격하도록.”
지도부의 모두가 말썽꾼 황녀의 고집 때문에 이를 박박 갈았다.
누군가는 이번에야말로 저 황녀가 죽는 꼴을 볼 수 있겠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릴리에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나아갔다.
“아말 족의 우두머리께서 제국 기사단의 수장을 찾았다기에 내 친히 나왔네만. 어디, 그 잘난 실력 좀 구경이나 해보지.”
그러고는 뽑아 든 바사르를 치켜들며 공격을 선언했다.
카라즈는 비웃음을 거두지 않고 달려 나왔다. 지금 보는 저 곡도를 그러쥐고, 참으로 여유롭게도.
그러나 그의 예상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허공에서 맞부딪치고도 릴리에트는 멀쩡히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제법이군, 하면서도 얕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던 카라즈는 이번에야말로 끝낸다는 식으로 몇 번이나 더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릴리에트는 그의 검을 막아내고 쳐내고 흘려냈다.
거구가 휘두르는 검은 그 위력이 상당했지만 섬세함이 부족했고,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법에 대해서만 몇 년을 수련했던 릴리에트는 그의 검을 받아친 뒤 교묘히 흘려 버릴 수 있었다.
이런 계집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말 족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릴리에트는 카라즈의 표정이 의아함에 물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구경은 잘했다. 이제 내 차롄가?”
릴리에트는 씩 웃으며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던졌다.
제 등 뒤에서 기사단장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휘두를 검술은 최대한 몸이 가벼워야 했고, 카라즈가 제 머리를 날릴 기회 따위는 줄 생각도 없었으니까.
하나로 묶은 옅은 적발이 흩날리는 모습을 눈으로 좇던 카라즈에게 예리한 칼날이 들이친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릴리에트는 몇 번의 합을 주고받으며 카라즈의 검술이 단순하다는 것을 파악한 상태였다.
아마 그들의 결투는 검술보다 힘을 겨루는 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릴리에트는 몇몇 좋은 스승으로부터 힘의 격차를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배워왔다.
“처음에는 상대의 방심을 유도할 것.”
릴리에트의 검이 강철로 된 연기처럼 카라즈의 옆구리 부근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두 번째로는 상대가 나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 것.”
카라즈가 당황해 릴리에트의 검을 쳐내려고 곡도를 휘둘렀지만 그가 베어낸 건 허공이었다.
“마지막으로, 순간의 빈틈을 파고들어 단칼에 목숨을 앗아갈 것!”
뒤로 빠지나 싶던 바사르가 독니를 날카롭게 세운 독사처럼 쇄도하더니 이내 퍽, 하는 소리가 나며 진득한 핏방울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놀란 눈을 감지도 못한 카라즈의 머리통이 다시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우두머리끼리 대결하는 동안 물러서 있던 양쪽 진영의 사내들이 일제히 입을 떡 벌린 채로 굳었다.
수백 명이 모인 자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테르소의 벌판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찰나였지만 마치 영원 같은 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 역시 릴리에트였다.
“충성스러운 나의 기사단이여. 적을 섬멸하라!”
“우와아아아아-!”
놀라운 광경에 압도되었던 기사단은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끼며 일제히 검과 창을 들었다.
그들이 황녀 릴리에트를 자신의 주군으로 받아들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그런 전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일리에는 이번에도 카라즈의 방심을 유도해 검을 되찾았고, 그가 자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옴과 동시에 빈틈을 만들도록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다.
그 찰나를 기다려 왔던 살기가 바사르를 쥔 일리에의 오른손으로 타고 흘렀다.
단순히 조금 가벼운 강철 검이었을 뿐인 바사르는 순식간에 요요한 기운을 흘리는 뱀이 되어 먹잇감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커걱!”
맹수의 독니는 갑옷 한 조각 걸치지 않은 카라즈의 가슴 한복판을 빠르게 찔렀다가 몸을 뒤틀며 뽑혀 나왔다.
예리한 검날이 만든 상처에서는 이내 검붉은 피가 꿀럭거리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으…… 아그극…….”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서서히 무릎 꿇는 카라즈의 얼굴은 전생의 그날과 똑같이 지금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네가 죽인 여자들의 영혼 앞에서 영원히 고통받거라.”
일리에는 싸늘하게 내뱉으며 바사르를 크게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만하고 잔악했던 야만족 족장의 머리가 떨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
피비린내 자욱한 오두막 안이 왠지 적막했다.
이 짐승의 머리통을 잘라냈어도 티로테 같은 여자들의 원한이 풀릴 리 만무했다.
하지만 전생의 그녀들은 이마저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자신이 카라즈의 목을 자르는 사이, 클리드의 지시를 받은 기사단 일부가 아말 족의 본거지에 폭탄을 던져 제국인 포로들까지 다 죽이고 말았으니까.
“이번에는…… 살릴 거야……!”
일리에가 이를 부득 갈며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통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 * *
이제까지 테르소 기사단과 몇 번 부딪치면서 제국의 병력을 얕보던 아말 족은 테르소 기사단과는 전혀 다른 실력의 벤티악 기사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심지어 진정제 분말까지 흡입한 상태였기에 그나마 있는 실력도 다 휘두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그들이 제일 자신 있어 하던 기습 공격을 당해서.
“포로들은 아직인가?”
주변의 아말 족 전사들을 해치운 슬라르한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를 향해 달려온 것은 제국인 포로가 아닌, 여기저기 숨어 있던 아말 족들이었다.
“땅 밑에 개미굴이라도 파둔 건지…….”
슬라르한 곁에서 싸우던 타리크가 짓씹듯 내뱉었다.
게다가 아말 족들이 앞세운 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애들이었다.
손에 쥔 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들도 있었다.
“이놈들에게는 윤리라는 게 없는 건가.”
슬라르한 역시 분노를 억누르며 중얼거렸지만 아말 족의 비겁한 행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여자들을 하나씩 죽이겠다!”
소년병들을 앞세운 것도 모자라 제국인 포로들을 향해 창을 겨눈 채 누군가가 협박했다.
슬라르한은 빠르게 여자들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나 스무 명 남짓한 여자들 틈에서 까만 머리칼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가 다음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저들 틈에도 없다면, 도대체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슬라르한은 급격히 불안정해진 기운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포로들은, 그게 전부인가?”
포로들의 안전 자체는 걱정할 것이 아니었다. 때를 보아 마력으로 여자들 주위에 보호막을 두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일리에가 없는 상태에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일리에의 행방과 안전이 더 중요했다.
예상대로 포로에 반응하는 슬라르한을 보며 여자들을 데려온 사내는 히죽 웃었다.
“그렇, 아, 아니지. 오늘 잡아 온 계집이 하나 더 있는데 아마 우리 족장님께서 듬뿍 귀여워해 주고 계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아말 족 전사들 모두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제국 기사단이 마을을 이렇게나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동안, 그들의 족장인 카라즈는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일까.
아무리 색사에 심취한다고 해도 이런 소란을 모른 척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마치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 멀리에서 묘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단 한 사람이 자박자박, 흙바닥 밟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느릿하면서도 묘하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이 누구 하나 저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슬라르한은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지금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왠지 꼭 제가 아는 이일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일리에의 몸 안에 있는 자신의 피를 추적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이야말로 무기를 버려라. 이제부터는 내가 아말 족의 우두머리가 된 것 같으니까, 내 명령에 따라야지?”
그리고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내던진 둥그런 덩어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어린 소년병들이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가 덩어리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으아아, 소리 지르며 달아났다.
성인 아말 족 사내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처참하게 흙바닥에서 나뒹구는 카라즈의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그다음에야 확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아까 카라즈의 침소에 밀어 넣은 제국인 포로였다.
하얀 슈미즈는 물론이고 머리통을 쥐고 온 손이나 검을 쥔 나머지 손도 온통 피로 물들어서 마치 지옥의 심판자 같았다.
“이, 이게 대체…….”
아말 족들은 입을 쩍 벌린 채 굳었다.
기사단이 이 산골 깊숙한 본진을 기습한 것보다 제국인 계집이 저희의 강력한 우두머리를 죽였다는 사실이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 사내놈이었구나!”
그들의 결론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왜? 여자는 짐승 새끼 하나 못 죽일 줄 알아?”
일리에가 그렇게 피식 웃으며 비아냥대던 순간이었다.
“억!”
포로들 앞에서 놀란 입만 어물어물하던 사내 하나가 짧은 비명을 지르고 풀썩 쓰러졌다.
“그, 그, 그래! 여자는, 지, 짐승 새끼 하나, 못 죽일 줄 알아?”
방금까지 넋이 나간 듯 멍하던 티로테였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모를 날카로운 사기그릇 조각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가 따로 없는 무기라 티로테의 손도 베여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티로테!”
일리에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가려 했지만 티로테는 완전히 눈이 뒤집혀 다른 아말 족 사내의 관자놀이를 향해 사기그릇 조각을 찍어 내렸다.
“죽어! 죽어! 죽어!”
티로테의 행동이 신호탄이었는지 다른 여자들도 손에 꾹 쥐고 있었던 사기그릇 조각을 빼 들고 주변에 휘둘렀다. 몇몇은 티로테가 공격하는 사내를 함께 공격했다.
일리에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 가만있다간 포로들이 다 죽을 것이다.
일리에는 바사르를 쥐고 포로들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슬라르한의 팔에 가로막혔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일리에.”
왠지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낮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슬라르한은 일리에를 향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마력을 뿜어내 여자 포로들 주위로 반투명한 보호막을 쳤다.
그가 마력을 운용할 수 있다는 건 벤티악 기사단의 기사들도 대부분 모르는 일이었기에 다들 저게 뭔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뒷수습은 언제나 타리크의 몫이었기에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늘 쓰던 핑계를 댔다.
“포로들 주변으로는 보호 아티팩트가 발동되고 있다. 놀라지들 마.”
타리크의 사정이야 어떻든, 일리에를 되찾은 슬라르한에게 더 이상 두려운 것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단을 흘끗 뒤돌아보며 낮게 명령했다.
“공격을 재개하라.”
희미한 마력을 타고 퍼진 명령은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묘하게 귀에 박혔고 심장을 뛰게 했다.
소강상태는 깨졌다.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진 제국 기사단은 테르소의 오랜 골칫거리를 섬멸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제기랄. 도대체 뭐가 그리 급해서……!”
성에 남은 스테른 남작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하게 손끝을 씹어댔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절차를 싹 다 무시하고 움직이는 귀족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벤티악 기사단이 올 줄은 모르고 황실의 관심도 좀 구걸할 겸 상소를 올렸던 것인데, 덕분에 그는 인생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아이리스 황녀가 시간을 벌 방법까지 알려주었지만 벤티악 공작은 마치 여기가 자신의 영지라도 되는 것처럼 아말 족을 때려잡는 일에만 눈이 벌게서 그의 꼼수에는 전혀 걸려들지 않았다.
‘그 야만족이 다 죽으면 캐비스는 도대체 어디서 구하냐고!’
애초에 스테른 남작은 아말 족을 소탕할 생각이 손끝만큼도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스테른 남작의 돈줄이었기 때문이다.
아말 족은 아르테즈 산 깊숙한 곳에서 마약의 원료가 되는 식물을 대규모로 재배하고 있었다.
캐비스라는 이름의 그 식물은 제국에서 거래가 금지된 품목이었지만 찾는 이는 많았고, 뇌물만 잘 바치면 윗선에서도 유통을 눈감아주곤 했다.
아말 족이 캐비스를 잡초 키우듯 쉽게 길러낸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테르소에 온 지 석 달이 안 된 시점이었다.
제국 여러 지역과 외국까지 돌아다니는 상인을 만나 우연히 알게 된 것인데, 그 후로 스테른 남작은 아말 족의 우두머리를 만나 거래를 제안했다.
“식량과 여자를 가져가는 걸 대충 눈감아줄 테니, 캐비스로 그 값을 내시오. 어차피 댁들은 캐비스를 직접 유통하지도 못하니 내가 그걸 사주겠다는 소리요.”
“그나마 말이 통하는 제국인이군그래.”
스테른 남작과 카라즈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계약을 맺고 이제껏 잘 지내왔다.
카라즈는 자신의 부족에게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았고, 스테른 남작은 캐비스를 팔아 영지 수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를 쌓고 있었다.
아말 족을 소탕해 달라고 상소를 올린 건 순전히 나중에 의심받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영지민이 계속 잡혀가고 식량을 약탈당하는데 입 닫고 있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일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벤티악 전 공작이 죽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어. 제길! 제기라알!’
게다가 아이르델을 죽인 황제가 그 아들 되는 이를 직접 여기에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 진짜로 아말 족을 다 소탕하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 그럴 리 없어. 여태 그 누구도 찾지 못했던 놈들의 본거지를, 여기 처음 와본 벤티악 공작이 어떻게 찾아내겠어?’
스테른 남작은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자신도 모르는 아말 족의 본거지를 슬라르한이 단번에 찾아낼 리 없지 않은가.
‘기사단에게도 적극적으로 돕지 말라고 말해두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테르소 기사단은 그동안 확실히 눌러두었다. 그들을 눌러두기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전문 도박꾼들을 은밀히 기사단에 섞어 놓은 게 전부였다.
여가랄 게 없는 테르소에서 기사들이 도박에 빠지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사들에게 선심 쓰듯 저리로 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도박을 업으로 하는 ‘꾼’들을 상대로 시골 기사들이 이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라서, 기사들이 스테른 남작에게 진 빚은 눈 깜짝할 새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빚이 늘어날수록 남작이 부르는 이율도 높아져 갔다.
이제 테르소 기사단에서 스테른 남작에게 빚을 지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
이렇듯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도대체 왜 갑자기 벤티악 공작이 나타나서는……!
“이게 다 줄리엣, 네 탓이다! 사내 하나 홀리지 못하는 계집애를 얻다 쓰라고! 부인도 부인이오! 그동안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애가 저 모양이야!”
스테른 남작은 괜히 죄 없는 제 부인과 딸에게 역정을 냈다.
아비의 명을 못 이기고 공포심에 짓눌린 채로 슬라르한의 침실에 찾아갔다가 되돌아온 열여섯 살의 줄리엣은 다음 날 아비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남작 부인도 그런 스테른 남작을 말리지 못했다. 테르소에서는 그가 황제나 다름없었으니까. 그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남작 부인이라 하더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남작 부인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달랬다.
“공작 각하의 방에 여자애 하나가 함께 잔다면서요? 그 애가 있어서 그랬을 거예요.”
“뭐? 남자야 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할 텐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안 그런 사람일 수도 있죠. 아예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면 꽤 깊은 관계인지도 모르고요.”
“흐음…….”
남작 부인과 줄리엣은 납득하는 것 같아 보이는 남작의 태도에 안심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다면 줄리엣, 다음번에는 그 계집애와 너를 바꿔치기하면 되겠구나.”
스테른 남작은 빙긋 웃었지만 줄리엣의 안색은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