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신전에서의 행사는 무사히 끝났다.
그러나 헤스페리아 대주교는 오랜만의 활동에 피곤했는지, 돌아가는 후보들에게 인사를 전하러 나오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마지막 이벤트를 벌이려던 엘로르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다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헤스페리아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은 것은 몸이 아팠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아주 팔팔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이 세상에 무관심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그사이 변해 버린 동료와 후배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꼈다.
축복 성사가 끝난 늦은 저녁, 헤스페리아는 신전 안의 관리자급 사제들을 전부 호출하여 대예배당에 모이게 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엘라니쉬 신전 전체를 울리는 대주교의 은종 소리에 사제들은 바싹 긴장했다.
예배당에 모인 사제들이 앞에 선 대주교에게 존경을 표하는 인사를 올리고 앉아 숨을 죽이고 있는데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그들이 침묵에 질식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신전 안에 삿된 것이 들어왔는데도 다들 모른 척하시더군요.”
침묵을 깬 목소리에 오히려 예배당은 더 적막해졌다.
“처음에는 다들 행사 준비로 바빠 눈치채지 못하신 건가 싶었습니다. 그토록 사악한 기운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그걸 알았다면 다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어디선가 꿀꺽, 하고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또 다른 누군가가 ‘그건…….’ 하고 변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헤스페리아는 신경 쓰지 않고 목소리를 돋워 할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미 죽은 것들이 벌레 행세를 하며 예배당의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뭔가가 잘못됐음을 알았습니다.”
변명하려던 자가 입을 다물었고 몇몇이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게다가 2황녀가 불경하게도 스스로를 성녀로 만들려는 수작을 부리더군요. 바로 내 앞에서 말이죠.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철이 없다고 해야 할지…….”
다들 한숨을 쉬며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예배당의 한쪽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행사의 뒤처리 때문에 바빠서요. 말씀 중이셨습니까?”
생글생글 웃는 낯의 그는 엘라니쉬 신전의 총책임자 맥클리어 주교였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제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른 것을 눈치챈 헤스페리아는 맥클리어 주교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분은 맥클리어 주교였던 모양이군요.”
그러나 그는 능청맞은 얼굴로 좌우를 돌아보며 밝게 웃었다.
“이런, 다들 대주교님께 혼나고 있었던 겁니까? 혼이 나야 한다면 당연히 총책임자인 제가 혼나야지요. 대주교님. 오늘 일 중에 미진한 부분이 보이셨다면 저를 탓해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맥클리어 주교. 오늘 신전 안에 사특한 마력이 흘러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걸 들어오게 한 것이 주교 본인이십니까?”
보통의 사제 같으면 화들짝 놀랄 질문이었는데도 맥클리어는 순해 보이는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인지 제가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사특한 마력이라니요?”
“흑마법술이 예배당의 공중을 누비고 있더군요. 게다가 2황녀는 눈속임에 가까운 잔재주를 부려 저 자신을 성녀로 포장하려 하고, 우리 신전의 사제들은 거기에 동조해 무릎 꿇고 있고…… 계속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생각이십니까?”
“아아, 하하하! 오해십니다, 대주교님.”
“오해?”
헤스페리아는 제발 자신이 오해하는 것이기를 바랐다.
인생을 다 바친 엘라니쉬 신전에 악마의 힘이 스며들었다고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맥클리어의 대답은 그녀가 바라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흑마법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오늘 워낙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떠돌아다니던 흑마법사가 끼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흑마법이야 저희 선에서 통제 가능하니 놔둔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스페리아가 황당해하는 사이에도 맥클리어는 미소를 띤 채 자분자분 설명했다.
“그리고 엘로르 전하 관련해서 말씀입니다만, 대주교님께서 첨탑에 들어가 계신 동안 이 세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요새는 백성들도 신심이 많이 약해져서, 경전만 외워서는 신도를 늘릴 수 없단 말이지요. 그렇다고 야나크 교의 교세가 위축되는 것을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러니 정치의 힘을 빌려야 하는 거죠.”
“맥클리어 주교……?”
“수도권의 신전들은 모두 엘로르 전하의 황위 등극을 지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분은 진실로 신실하시며, 황위에 오르신 뒤에는 수도에 제2 엘라니쉬 신전을 지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어차피 성녀에 가까우신 분이니, 가벼운 마법을 써서 본인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쯤이야 저희가 협조해 드려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부상조랄까요?”
맥클리어는 한때 신의 언어를 하나씩 알아가는데 사무치는 기쁨을 느끼고 세상의 약자를 돕는 데 제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이였다.
그랬던 맥클리어가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헤스페리아는 그것을 그의 탓으로만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군요. 다 내 탓입니다.”
한 달 전쯤, 강력한 흑마법사가 수도에 나타났다는 익명의 편지를 받았을 때 이런 상황을 예견했어야 했다.
그때는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었지만, 그 편지에 적힌 대로 2황녀의 곁에 사악한 힘이 머무는 것 같았다. 편지의 경고는 농담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상황은 그때의 경고를 흘려들은 자신의 탓이었다.
“무엇이 대주교님 탓이란 말입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대주교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까지처럼 기도에 힘써주시면…….”
“맥클리어 주교의 엘라니쉬 신전 총책임 권한을 회수합니다. 그동안 엘라니쉬 신전과 멜바임 신전을 동시에 이끌어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다음 주부터 원래대로 멜바임 신전의 주교로서 소임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맥클리어의 입을 막듯이 헤스페리아가 그에게 맡겼던 최고 신전 통치권을 회수했다.
맥클리어가 놀라 말문이 막힌 사이 헤스페리아는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엘라니쉬 신전 산하 모든 신전의 주교들을 비상 소집하십시오. 내일, 수도권 신전들의 상황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대주교의 복귀 선언과 비상소집 명령에 예배당의 모든 사제가 당황했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맥클리어였다.
“대주교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제가, 제가 차분히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맥클리어 주교. 신전 안에 침입한 흑마법은 절대 미약한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설령 미약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엘룬을 모시는 신전 안에 악마의 힘을 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찌 모두가 이것을 괜찮다고 여겼단 말입니까! 이것은 야나크 교의 전례 없는 비상 상황입니다. 이마저 그 사악한 힘이 노린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헤스페리아가 침통하게 모두를 꾸짖자 다들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맥클리어는 헤스페리아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저런 융통성 없는 생각 때문에 엘룬의 뜻이 오히려 퍼지지 못하는 거야. 내가 바로잡아야 해.’
그는 예배당에서 돌아 나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배신자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 * *
“그 계집애는 어떻게 됐어?”
“대주교가 저를 눈치채긴 했지만, 무사히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조만간 벤티악 저택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 겁니다.”
클리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리에를 빼돌릴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카제야는 어린아이까지 이용해 손에 넣은 일리에의 까만 머리카락 한 올을 자세히 살피며 미소 지었다.
흑마법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카제야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웬만한 마법사들조차 흑마법으로 무엇이 가능한지 정확히 몰랐다.
“그 머리카락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엘로르도 궁금했는지 카제야에게 물었다.
“약한 강도의 정신 지배를 할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 외에도 그 사람이 입던 옷 역시 필요합니다만, 그건 이미 확보했지요.”
벤티악 공작가의 약점은 ‘지나치게 맑은 물’이라는 점이었다. 분명 그것 때문에 원한을 품은 자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노예 계집’ 때문에 쫓겨났다는 40대 중반의 사내를 찾아낸 건 행운이었다.
그를 해고한 건 슬라르한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노예 계집에게 더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노예 계집을 해코지할 일이라고 했더니 손쉽게 그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대부분 벤티악 가문에 충성스러웠지만, 그중에는 전에 저택에서 쫓겨난 사용인과의 정을 잊지 못해 부탁을 들어줄 만큼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벤티악 저의 옛날 동료를 만나 거짓말을 조금 섞은 사정을 설명한 뒤 일리에가 입던 셔츠를 빼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그 애에게 눈이 돌아갔던 게 다 악령의 짓이라지 않겠나. 그런 잘못된 욕구를 없애려면 애초에 내가 눈이 뒤집혔던 여자의 옷을 가져다 태워야 한다고 하네. 내가 제대로 살 수 있게 좀 도와주게. 이번 딱 한 번만 부탁함세.”
그와 함께 일리에를 때렸다가 회초리 매질과 감봉을 겪었던 하녀는 며칠간 고민하다가 일리에가 내놓은 세탁물을 몰래 뒤져 셔츠 하나를 꺼내 가져다주었다.
이 마법의 가장 어려운 게 바로 그 ‘옷’이었는데 의외의 조력자 덕분에 그게 쉽게 확보되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원래는 축복 성사 행사에서 직접 만나 더 강력한 정신 지배를 걸고 그녀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보려고 했지만 대주교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심지어 불쾌해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방법을 바꾸었다.
호기심 많고 붙임성 좋은 어린아이에게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대.’, ‘저 누나의 머리칼이 특히 좋겠는데?’라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루젠 자작가의 손자는 아주 훌륭한 미끼가 되어주었다.
‘사람들은 어린애에 대해 쓸데없이 관대해지니까 말이지.’
일리에는 제 머리카락이 가져올 행운을 믿는 어린아이 생각에 흐뭇했겠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 흑마법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쨌든 다 준비됐다는 거지? 그럼 빨리 시작해. 그 계집애가 내가 아는 미래를 뒤틀게 놔둬선 안 되니까.”
“주인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카제야는 언제나처럼 요사한 미소를 지은 뒤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 중간에 클리드와 만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일 양이셨군요. 전하를 뵙고 오시는 길입니까?”
“아, 네. 그런데…… 오늘 오시는 날이었던가요?”
“정해진 날은 아니지만 어제의 일로 엘로르 전하와 얘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전에 아일 양과도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카제야는 조금 머뭇거렸다.
일리에에 대한 정신 지배 마법을 얼른 완성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클리드가 저에게 이런 식으로 먼저 대화를 청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최초로 감시자 키메라를 붙이고 벤티악 공작 저로 향했던 날 이후로 제 몸에 붙은 날벌레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떼어냈다.
이미 그 벌레의 정체나 그 벌레를 누가 붙였는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괜히 피하려 한다는 인상을 줘서 저 천재라는 남자의 의심을 사면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으음…… 잠시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전하께는 저와 따로 만났다는 말씀을 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아마…… 아일 양께서 곤란해지실지도 모릅니다.”
카제야는 클리드를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집착하는 엘로르를 떠올리며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갓진 회랑으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언뜻 보기에는 밀회를 나누는 연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쯤이면 말씀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신지요.”
카제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젊은 천재의 꿍꿍이를 가늠해 보며 물었다.
“영애께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여전히 결혼 생각이 없으십니까?”
“네. 황녀 전하의 측근 시녀로 사는 지금의 삶에 저는 아주 만족하고 있거든요. 결혼을 하면 아무래도 황녀 전하께 그만큼 집중할 수 없으니까요.”
“결혼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애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연애요?”
“왜 놀라십니까?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시니 분명 다가오는 남성들도 많았을 텐데요.”
카제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의 전개에 조금 당황했다.
200년이 넘게 살면서도 연애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이미 흑마법이라는, 자신의 애정을 다 쏟아부을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 나이의 여성이 그런 쪽에 너무 무관심한 것도 이상해 보일 수 있을 법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눈에 띄게 이상해 보여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호호, 글……쎄요…… 제가 그다지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농담이시죠? 해리엇 양은 충분히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해리엇 양처럼 침착하고 지혜로운 여성분을 찾기도 어려운 일이죠.”
“감사……합니다.”
카제야는 클리드가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아보기 위해 계속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축복 성사에서 해리엇 양을 마음에 둔 분이 계시거든요. 아스토르 백작 영식이라고…… 물론 이런 방식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실지도 모르겠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분이 하도 의견만이라도 여쭤봐 달라고 해서 말입니다.”
“아아…….”
뭔가 대단한 계략인가 싶었는데 고작 연애 중매 노릇이었다. 하긴, 이 사람, 저 사람의 호감을 사야 하는 클리드로서는 이런 일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카제야는 정말로 인간관계 따위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남녀 관계는 더더욱 관심 없었다. 아무리 연하남이 대세라 하더라도 200살 가까운 나이 차는 극복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지금은 이상해 보여서는 안 되었다.
아스토르 백작 영식이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지만, 여차하면 흑마법을 위한 재료로 써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백작 영식이라니, 제가 눈에 차실지…….”
“눈에 차고도 넘쳤죠. 오죽해야 친구 동생에게까지 다리를 놔달라고 사정하겠습니까.”
“저는 일단 만나 뵐 생각은 있어요.”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영애! 어휴, 이제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영애에 대해 묻는 아스토르 영식에게 어제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하하!”
클리드는 아스토르 영식에게 해리엇의 답을 전해주겠다며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그녀와 헤어졌다.
‘이 정도 했으면 엘로르도 충분히 오해하겠지.’
그는 안 그래도 짜증 났던 형의 친구 아스토르 백작 영식을 미끼로 카제야와 엘로르를 낚는 중이었다.
라리에트가 피델로로 떠났는데도 제 곁에는 엘로르의 끄나풀이 따라다녔다.
그걸 알고도 놔두었던 것은 역으로 이용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말이지.’
그의 감시자는 자신이 해리엇과 남의 이목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걸 엘로르에게 전할 것이다.
엘로르가 해리엇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고 해리엇이 제대로 된 대답을 한다면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오해겠지만, 만약 해리엇이 ‘만나지 않았다.’라고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그녀에 대한 엘로르의 의심은 증폭될 것이다.
게다가 그 역시 해리엇을 따로 만난 적 없다고 잡아뗄 작정이었으므로.
그는 끄나풀이 엘로르에게 가 알릴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 괜히 황궁 뜰을 거닐다가 엘로르의 방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알현 요청이었는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내가 클리드의 방문을 미룰 리가 없잖아요.”
엘로르는 평소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클리드는 자신을 날카롭게 살피는 눈빛을 감지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어제의 일을 입에 올렸다.
“전하. 엊저녁, 헤스페리아 대주교가 업무 복귀를 선언하고 수도권의 야나크 교 신전 주교들을 소집했다고 합니다.”
“네? 그 노파가 갑자기 왜요?”
“아무래도 어제의 일이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대주교가 흑마법의 기운을 감지했다더군요.”
“흐, 흑마법을 감지해요? 대주교가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신력을 지닌 자들은 특히 흑마법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거의 반대되는 상성을 가진 힘이죠. 그나저나 누가 감히 신전에 흑마법사를 들일 생각을 했는지, 원…….”
클리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자 엘로르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여태 자신이 흑마법사를 곁에 둔 사실조차 얘기하지 않았으니 찔릴 만도 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결 기도의 사명을 지고 첨탑에 들어갔던 사람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요?”
“흑마법은 신전에서 굉장히 배척하는 힘입니다. 그걸 귀족들과 황족까지 모인 예배당에 들였으니, 아마 대주교가 단단히 화가 났을 겁니다. 완성을 목전에 둔 성결 기도를 중지하고 곧바로 복귀할 정도로 말이죠. 그 와중에 우리와 손잡은 사제들이 같이 걸려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네요.”
엘로르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클리드에게 카제야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있어서 제대로 의논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클리드라면 절대 신전에 카제야를 데리고 가지 말라고 조언해 줬을 텐데.
그렇다고 이제 와 밝힐 수도 없었다.
이제까지 클리드에게 키메라를 붙이기도 했었고, 클리드 몰래 자금을 운용해 마석과 노예를 사들이기도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연구 때문에 사람을 셋이나 죽이지 않았던가.
클리드가 알면 계약 파기를 외치고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약서에 ‘황위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공유하며, 일방이 공개하지 않은 정보로 문제가 생기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클리드가 반대할 것이 뻔해 비밀로 했던 일인데, 이렇게 빨리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맥클리어 주교에게서는 따로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직은요.”
“엘라니쉬 신전의 책임자이셨으니 그분도 아시는 게 좀 있겠죠. 직접 만나 뵙고 얘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만날게요. 클리드는 다른 일에 신경 써주세요.”
“하지만…….”
“어차피 우리하고 크게 관련 없는 문제잖아요. 클리드의 머리는 더 중요한 일에 써야 한다고요.”
저도 모르게 다급히 말리는 엘로르를 보며 클리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신전 쪽 인사들을 카제야와 둘이서만 만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야나크 교의 사제들 중에서도 부패한 자가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전하의 뜻대로 하시지요.”
클리드는 빙긋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 * *
엘라니쉬 신전에서의 축복 성사 이후 엘로르의 인기가 수직 상승했다.
그녀가 성녀임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제가 본 장면에 살을 더해 이야기를 부풀렸고, 사람은 무릇 신비한 일에 열광하기 마련이니까.
그 외의 후보들은 딱히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듯했다.
물론 아이리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가장 믿음이 가고 든든한 기도문을 낭독하셨다.’라고 추켜올렸고, 라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솔직하고 젊은 열정이 느껴졌다.’라고 포장했다.
슬라르한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그의 기도문이 가장 진솔했다고 떠받들었다.
공수표를 남발하지 않고, 만민을 아우르고자 하는 진심과 모든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가 엿보였으며, 자신의 초심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그의 인성이 돋보였다고 말이다.
그런 평가를 전해 들은 슬라르한은 그저 피식 웃었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그날 자신의 머릿속을 누군가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아마 저것도 황제 후보로 쳐줘야 하냐며 경악했을 것이다.
백성과 제국을 염려해야 할 사람이 제가 마음에 품은 여자 하나만 떠올리며 기도문이랍시고 낭독하고 있었으니까.
“웃기는 세상이군.”
아버지가 죽기 전, 벤티악 공작가는 황제나 다른 귀족들이 기대하는 바대로 오로지 제국의 안위와 황실의 안녕만을 바라며 충성했다.
그런데 그때는 딴마음을 품고 있다며 탄압받고 외면받던 자신이, 막상 여자 생각이나 하며 입에 발린 소리나 늘어놓자 칭송받게 되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쁜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절대 역심을 품으면 안 되고, 절대 꼬투리 잡힐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통제하며 살아왔던 시간보다 지금이 훨씬 마음 편했다.
마음만 편한 게 아니라 상황도 더 나아졌다.
전에는 자신 때문에 가신이나 측근들이 해를 입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상상조차 너무 고통스러워서 병적으로 가신들을 챙겼고, 저택이나 성의 사용인 한 명, 한 명의 근황을 살피며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가 무슨 짓을 해도 황제의 해코지는 피할 수 없었고, 자신이 관심 갖는 사람일수록 그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아졌다.
그래서 모든 것에 무관심한 척해야 했고,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사람인 척해야 했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슬라르한은 속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그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으니까.’
자신은 그저 고작 2대를 가고 끊길 벤티악 공작가의 마지막 후손이 되려 했을 뿐이었다.
결혼은 애초에 할 생각조차 없었다.
저에게 아내나 자식이 생긴다면 황제에게 인질을 더 만들어주는 꼴이나 다름없었고, 그는 그런 고통을 죽을 때까지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도 포장을 잘하는 건 중요한 거예요, 주인님. 이미지 싸움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이리스 전하는 든든한 맏이 이미지, 엘로르 전하는 성녀 이미지, 라반 전하는 음…… 정신 차린 망나니……? 정신을 차린 것도 아니지만, 뭐…… 그리고 우리 주인님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지혜롭고 현명하고 자애로운 소드 마스터인데 거기다 진솔하기까지 한! 완벽한 황제 이미지다, 이거죠!”
제 곁에서 쫑알쫑알 아부하는 일리에를 보며 슬라르한은 저도 모르게 입매가 풀어져 버렸다.
한 번 인정하고 나자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새처럼 부지런히 쫑알대는 저 입이 없었더라면 황위 경쟁이 시작된 이래로 어떻게 지금까지 제 마음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매번 하는 말이지만, 아부 한번 대단하구나.”
“아부라뇨! 저도 매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아부가 아니라 사실 명시라고요! 그리고 주인님은 이제야 사람들이 알아가고 있는 주인님의 본모습을 좀 더 적극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는 거고요.”
“뭔가를 어필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이고, 꼬장꼬장하시네. 그건 묵상록 같은 걸 집필하실 일 있으면 거기다 쓰시고요, 지금은 그런 한가한 타령 하실 때가 아닙니다.”
일리에가 사교계의 근황을 알리는 마그렛의 편지를 팔락팔락 흔들며 말했다.
일리에는 움직이기 싫어하는 소를 밭까지 끌고 가야 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답답하고 조바심이 일었지만, 슬라르한은 날이 갈수록 잔소리에 가까워지는 일리에의 충고마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게 들려서 고민하고 있었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른데……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러나……?’
여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정상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상 타리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주인님, 황제 폐하가 되어주실 거죠?”
“으음…… 뭐, 웬만하면.”
“아니, 아니,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니까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까지 저를 답답해하는 일리에를 보는 건 재미있었지만 너무 놀리면 삐칠지도 모르니 적당히 해야 했다. 게다가 이 눈치 빠른 아가씨라면 제가 일부러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을 알아챌 테니까.
“다른 후보들에게는 더 만만치 않겠지. 그들이 싸워야 하는 상대가 나니까.”
“오오! 그래요, 그거예요! 역시 우리 주인님! 멋지시다니까요!”
둘이 바보 같은 만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금 일리에가 그렇게 슬라르한을 북돋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런 기세로 올리비에 공작 부인을 공략하는 겁니다!”
슬라르한이 김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마그렛의 편지에는 사교계의 근황 외에도 최근 중요하게 부상한 인물에 대해 상세히 쓰여 있었다.
캐롤린 올리비에.
방년 38세. 밝은 갈색 머리칼과 진녹색 눈동자를 가진, 까탈스럽지만 유행을 선도하고 보석에 상당한 일가견을 지닌, 필로코스 왕국의 공주이자 현 올리비에 공작 부인.
여태 중요하지 않았던 그녀가 급부상하게 된 이유는, 제국 북부에 위치한 필로코스 왕국의 왕자와 공주들이 후계 싸움을 거하게 벌이다가 다들 죽거나 불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찍이 제국으로 시집와 모국과는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살았던 캐롤린은 그 후계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고, 덕분에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후계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부 방계 왕족들은 이미 남의 나라 사람이 된 캐롤린이 어떻게 다시 필로코스의 왕이 될 수 있냐며 반대했지만, 현왕이 제 직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의지가 워낙에 강했다.
덕분에 캐롤린은 최근 사교계의 화두로 떠올랐고, 마그렛은 슬라르한이 얼른 그녀와 동맹을 맺었으면 하는 의견을 보내온 것이었다.
“올리비에 공작 부인은 이제 이 나라에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정도로 똑똑하기도 하지. 그런 사람이, 이제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황제 후보자에게 호의적일까?”
슬라르한은 반쯤 떠보는 심산으로 일리에에게 물었다.
“호의요? 누가 그 여자의, 아니, 그분의 호의를 얻잡니까? 어디까지나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그분한테도 손해될 일은 아니죠. 아니, 오히려 그분은 후보들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을걸요? 그중에서 제일 좋은 제안을 한 후보와 손을 잡겠죠.”
일리에는 전생의 캐롤린을 떠올렸다.
일리에가 실패한 몇 가지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엄청 도도한 여자였지. 하긴, 아쉬울 게 없었으니까.’
필로코스가 파르디나스보다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파르디나스에 속국처럼 굴 위치는 또 아니었다.
필로코스는 매해 많은 양의 양털과 지하자원을 수출하고 있었고, 굳이 파르디나스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풍족한 부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 후보들이 내놓을 만한 게…….”
“알아요. 다들 뻔하죠. 미래에 필로코스의 왕이 될 사람에게, 미래에 파르디나스의 황제가 될 사람이, 미래에 있을 대가를 내놓을 수밖에요.”
전생에 그녀와의 거래에 성공한 사람은 1황자 렌셔였다.
‘덕분에 카스틸로 잔당 퇴치 작전 때 저 혼자 안전했지.’
올리비에 공작 부인이 중요한 것은 미래의 이웃 나라 왕과 동맹을 맺는다는 차원뿐만이 아니었다.
필로코스는 조만간 벌어질 카스틸로 잔당 퇴치 작전이 벌어지는 제국 북부 지역과 맞닿은 나라였다.
그때 필로코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 지금 캐롤린의 마음을 얻어둬야 그때 편해질 터였다.
‘물론 지금은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전생에서처럼 타리크가 검에 찔리지도 않을 테고, 슬라르한이 그 개고생을 하지도 않을 테지만…… 그래도 확보해 둬서 나쁠 것은 없는 세력이지.’
슬라르한이 황제가 되면 우선적으로 외교력을 보일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내가 불리한 일이야.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해봐야 보석밖에 없는데, 그 보석광의 마음에 들 만한 물건이라면 지금 내가 가진 내탕금 수준으론 어림도 없지.”
“속단하기는 이르죠. 기다려 보세요. 주인님께 분명 방법이 생길 거예요. 주인님이 준비하실 것은 그 여자의, 아니, 그분의 앞에서도 절대 굳지 않을 미소와 해탈한 마음가짐이라고요.”
“……올리비에 공작 부인을 굉장히 잘 아는 듯하구나.”
“아니, 뭐…… 주워들은 소문이 있어서 그래요. 하하!”
또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불댈 뻔했지만, 일리에는 간신히 제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캐롤린이 보석광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했고, 후보들은 전원 그들이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보석을 싸 들고 가 그녀를 회유한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것은 보석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국의 황제 후보자들까지 제 앞에 엎드렸다는 일화를 원했다. 그게 제국에 시집갔다가 돌아온 왕의 위상을 높여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전생처럼 일이 흘러간다면 그녀와 면담을 가진 후보들은 차례차례 얼굴을 구기고 나오게 될 것이다.
‘난 거의 깽판을 치고 나왔으니, 뭐…….’
전생에 렌셔가 그녀와 손잡을 수 있었던 것은 벼랑 끝에 몰린 렌셔가 제국의 1황자라는 자존심도 버리고 끝까지 그 앞에서 헤헤거렸기 때문이다.
그게 그녀의 허영심을 충족시켜 줬고 렌셔는 뜻밖에도 강력한 우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분을 만날 때는 절대 인상을 찡그리시면 안 돼요. 굉장히 자존심 세고 허영심 강한 사람이니까 그걸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당장 나가라고 할 거예요.”
“그래도 아직은 제국의 공작 부인인데…… 부국의 왕세녀라는 것은 대단한 권력이군그래.”
“무슨 당연한 말씀을. 지금은 그런 서열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꼭 그녀와 동맹을 맺어야 해요.”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자신을 설득하려는 일리에를 보면서도 슬라르한은 사실 자신이 없었다.
시야르드 온천 개발금까지 지불한 지금은 올리비에 공작 부인 한 사람만을 위해 큰 자금을 움직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값싸게 돌아다니고 있는 희귀 보석이 없는지, 경매장이라도 뒤져봐야겠군.”
일리에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누나가 이때를 대비해서 롤랑 백작가를 네 앞에 떨어트려 준 거란다. 조금만 기다려!’
조만간, 롤랑 백작이 움직일 터였다.
* * *
일리에의 예상대로 롤랑 백작이 움직인 것은 마그렛이 편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고모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슬라르한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처음에는 유용하게 쓸 정치적 동맹 세력이라고만 여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롤랑 백작 부부에게서 정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입 가벼운 수다쟁이로나 생각했던 마그렛의 모습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고, 마누라에게 휘둘리며 사는 숫기 없고 조용한 롤랑 백작의 모습 역시 본모습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황제 폐하의 앞에서 살아남은 황족을 무시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들이 황제의 핏줄이면서도 핍박받지 않고 오히려 가세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똑똑하고 노련했기 때문이다.
그 본모습을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 역시 남들의 말에 휘둘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난 뒤로 슬라르한은 조금씩 롤랑 부부에게 마음을 열어왔다.
그들도 슬라르한이 점점 더 살가워지고 있음을 느꼈는지, 거리를 재는 듯하던 태도가 사라지고 요즘은 정말로 친한 조카를 대하듯 했다.
“오랜만에 좋은 연초가 들어와서 벤티악 공작께도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렇게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고모부님. 조카가 고모부님께 연초를 얻어 피우다니, 남들 보기 부끄럽습니다.”
슬라르한은 드물게도 농담기 어린 말로 답하며 그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리에는 선물 거리를 들고 온 롤랑 백작을 보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드디어……!’
마그렛의 편지를 받은 뒤 며칠간, 슬라르한은 정말로 수도 내의 보석 경매장 매물을 살폈다.
물론 귀한 보석이 매물로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남들 눈에도 귀해서, 슬라르한이 지불할 수 있는 값을 훌쩍 넘어가기 일쑤였다.
번번이 눈앞에서 좋은 보석을 놓치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에 빠졌던 슬라르한에게 일리에는 은근슬쩍 수작을 부렸다.
“생각보다 많이 어렵네요. 아무래도 올리비에 공작 부인 쪽은 포기해야 할 것 같죠……?”
“……네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리가 없는데.”
“아니, 뭐, 제가 억지로 시키는 것처럼 말씀을 하세요? 저는 어디까지나 올리비에 공작 부인을 포섭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말씀드렸던 거죠.”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는데…….”
“아니라니까요. 어쨌든…… 그래도 정성 들여 정보를 주신 롤랑 백작 부인께 일이 좀 어려울 것 같다고 미리 말씀드려 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흐음…… 그래, 그래야겠지.”
슬라르한은 씁쓸하게 웃다가 편지지를 꺼내 마그렛에게 죄송하다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건 일리에가 일부러 시킨 일이 맞았다.
‘롤랑 백작 부인이 남편을 조금만 설득해 주면……!’
일리에는 지금이 바로 롤랑 백작가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나온 ‘그것’이 등장할 때라고 생각했다.
워낙 귀한 보석이니 내놓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에 준하는 보석을 들고 올 터였다.
일리에는 ‘최소 15캐럿 이상의 1등급 다이아몬드를!’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롤랑 백작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는 일리에를 흘끗 봤다가 슬라르한과 신변잡기의 근황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일리에가 속으로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됐는데…….’하고 생각할 즈음 헛기침을 했다.
“믿으시는 아이라는 건 알지만, 잠시 주변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일리에의 심장이 더 쿵쾅거렸다.
“알겠습니다. 일리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종을 울려주십시오.”
일리에는 눈치 빠르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그리고 일리에가 문밖으로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롤랑 백작이 품에서 무언가를 조용히 꺼냈다.
“연초도 연초입니다만, 사실 오늘은 이것을 전해 드리러 온 겁니다.”
따뜻한 차향이 머무는 티 테이블 위에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가 하나 놓였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시죠.”
슬라르한은 롤랑 백작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벨벳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메추리알만 한 크기의 핑크 다이아몬드 원석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직 연마 전인데도 오후의 햇빛에 영롱히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웠다.
슬라르한은 보석에 정통하지는 못했지만 이게 보통 보석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보시다시피, 핑크 다이아몬드의 원석입니다. 100캐럿쯤 합니다.”
어마어마한 캐럿에 슬라르한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어디서 나셨습니까?”
“사실 저희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핑크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지는 좀 됐습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싫어 숨기고 있었을 뿐이지요.”
서로 동맹 관계를 맺은 지 1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야 그 얘기를 한다는 것이 섭섭할 만도 했지만, 슬라르한은 롤랑 백작을 백분 이해했다.
이 정도의 조심성이 있었으니 서슬 퍼런 황제의 의심병 앞에서도 살아남은 것일 테다.
“블루 다이아몬드보다 희귀하고 비싼 보석이라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귀한 이것을, 왜 저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왜겠습니까?”
롤랑 백작이 차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빙긋 웃었다.
“올리비에 공작 부인이 핑크 다이아몬드를 구하려고 몇 년째 애쓰고 있습니다.”
슬라르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보석광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의 컬렉션은 새로운 품목이 들어올 때마다 사교계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의 컬렉션에 핑크 다이아몬드가 빠졌다는 소문은 그런 쪽으로 전혀 관심이 없는 슬라르한도 언뜻 들은 적 있었다.
그때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있으면 됐지, 왜 핑크 다이아몬드에까지 집착하나 여겼던 것도 같다.
하지만 핑크 다이아몬드는 가장 희귀한 보석 중 하나였고, 그것도 이렇게 큰 캐럿은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분명, 올리비에 공작 부인은 이것을 얻기 위해 상당히 큰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올리비에 부인이 아니라 슬라르한 그 자신이었다.
“이걸 제게 먼저 보여주신 고모부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이 보석의 값을 치를 능력이 못 됩니다.”
슬라르한은 케이스의 뚜껑을 덮은 뒤 롤랑 백작 쪽으로 밀며 송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롤랑 백작은 그 케이스를 도로 슬라르한 쪽으로 밀었다.
“이걸 공짜로 드리는 게 아니라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작께서는 이 값을 어떻게 치러야 할지 아시잖습니까.”
슬라르한과 롤랑 백작의 시선이 길게 마주쳤다. 롤랑 백작은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슬라르한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못을 박았다.
“황제가 되십시오. 이 나라를 구해내십시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돌덩이가 아깝겠습니까?”
“……매번, 분에 넘치는 기대를 받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되실 분이 그렇게 겸손하기만 한 것도 미덕은 아닙니다.”
롤랑 백작은 슬라르한을 가볍게 타박하며 품에서 봉투 하나를 더 꺼내 슬라르한의 앞에 밀어놓았다.
“그 안에는 핑크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려 애쓰는 사람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슬쩍 소문을 흘려 올리비에 공작 부인을 안달 나게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제게 핑크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 분명 고모부님이 그 출처로 의심받게 되실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슬라르한의 주변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갖고 있는 사람은 롤랑 백작밖에 없었다.
이 정도 되는 보석을 슬라르한이 직접 구매할 수 없다는 것은 남들 눈에도 자명했으니, 분명 롤랑 백작은 그가 원치 않았던 그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대범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핑크 다이아몬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린애 새끼손톱만 한 크기만 되어도 제국 내 보석상들이 사려고 앞다투어 달려들 핑크 다이아몬드인데 그걸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할 간 큰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았다.
슬라르한은 직감적으로 롤랑 백작가의 광산에서 이보다 더 귀중한 무언가가 나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마석이 묻힌 곳 주변의 광물은 성질이 바뀌어 더 희귀한 광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일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극도로 희귀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면…….
“설마, 마석이라도 발견된 겁니까?”
단 몇 마디의 힌트로도 곧장 정답을 맞히는 슬라르한을 보며 롤랑 백작이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그냥 마석이 아니라, 녹(綠)마석입니다.”
“예? 녹마석이라면, 오로라 마석 말씀이십니까?”
“저희도 처음 봤을 때는 그게 뭔지 한참 고민했지 뭡니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오로라 마석이라고도 불리는 녹마석은 마석계의 핑크 다이아몬드라 할 만했다. 귀한 마석 중에서도 희귀한 종류였으니까.
마석에도 종류가 있었는데 가장 흔하고 값싼 일반 마석은 수정처럼 투명했고, 그보다 마력의 함량이 높은 것은 구름 마석 또는 백마석이라고 해서 희뿌연 연기가 들어찬 것 같았으며, 최고급품인 흑마석은 흑요석처럼 새카맸다.
그리고 녹마석은 투명한 마석 안에 녹색에 가까운 오로라가 일렁이는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최고급품인 흑마석보다 들어 있는 마력의 양도 많았고, 특별한 힘과 만나면 상승작용까지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었다.
단, 이 특별한 마석을 운용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4서클 이하의 마법사에게는 일반 마석이나 다름없었지만 5서클 이상 되는 마법사에게는 참으로 탐나는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잘만 운용하면 자신의 심장에 서클 하나를 더 씌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발견되면 위험한 광물이기도 했다.
“오로라 마석이야말로 극비 중의 극비 사항입니다. 이 정보는, 공작께 처음으로 알려 드리는 겁니다. 저택에 결계를 씌운 대마법사가 있다고 하셨지요?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마력 방호를 조건으로 건넬 용의가 있습니다.”
슬라르한은 롤랑 백작의 제안에, 그가 자신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내걸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사람 앞에서 자신의 비밀만 감추고 있는 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저 역시…… 고모부님께 극비 사항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한층 더 진지해진 슬라르한의 표정에 롤랑 백작도 긴장했다. 그가 아는 슬라르한은 ‘극비 사항’이라는 말을 아무 데다 붙일 사람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저택에 결계를 두른 대마법사는…… 고모부님께서도 아는 사람입니다.”
“예? 저도 아는 사람이요?”
그는 자신과 슬라르한이 동시에 알고 있는 사람 중 ‘마법사’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을 쭉 떠올려 보았다.
“혹시, 일리에라는 저 아이입니까?”
그가 대번에 일리에를 집는 것을 보고 슬라르한은 왠지 제 속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롤랑 백작이 보기에도 일리에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는 뜻 같아 뿌듯해졌다.
“마법 같은 아이이기는 합니다만, 일리에는 아닙니다.”
“그럼…….”
“지금 고모부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
단번에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롤랑 백작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고, 공작 본인이십니까?”
슬라르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 백작은 그제야 그의 모친이 사비 족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부모 양쪽 다 사비 족이어야만 그 형질이 유전된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야만 사비 족 핏줄들이 조금이나마 더 안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롤랑 백작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슬라르한을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슬라르한은 놀랐지만 롤랑 백작은 한참을, 정말로 즐겁게 웃었다.
“세상에, 살다 보니 제 욕심대로 일이 흘러가는 경우도 있군요.”
“고모부님……?”
“웬만해서는 물건에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녹마석만큼은…… 워낙에 희귀한 것이기도 하잖습니까. 그래서 남 주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냐는 의심까지 받는 마석 아닌가. 몇 개만 경매에 내놓는다면 롤랑 백작가에서 이제까지 팔아온 다이아몬드 값 전체를 다 합친 것조차 우습게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니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 대마법사가 떠돌이가 아닌, 벤티악 공작가의 가신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작게 욕심을 품었었죠.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 본인이시라니…….”
정말로 기뻐 보이는 롤랑 백작의 표정 때문에 슬라르한은 왠지 낯이 뜨거워졌다.
부끄럽거나 민망한 게 아니라,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아버지를 잃은 이후, 이렇게나 윗사람의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슴을 따끈하게 데우는 내리사랑에 속절없이 어린애처럼 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극비 사항이겠군요. 황제 폐하께서 아셨다가는…….”
“제 목이 붙어 있지 못하겠죠.”
두 사람의 미소가 약간 굳었다. 아직 황제는 건재했고, 그의 변덕은 피바람을 몰고 올 수 있었다.
“조만간 공작께 녹마석도 전해드리겠습니다. 공작께서 황위에 등극하시는 날을 위해, 부디 유용하게 써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뭐라고 더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저야말로 공작의 힘을 빌려 제 꿈을 이루는 중입니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들은 어딘지 벅찬 감정을 느끼며 자리를 파했다.
그리고 롤랑 백작이 돌아간 뒤, 일리에가 슬라르한의 곁에 슥 나타나 물었다.
“제가 분명 방법이 생길 거라고 그랬죠?”
아직 롤랑 백작이 뭘 주고 갔는지 말도 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슬라르한은 진심으로 일리에의 능력에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
“어…… 사실은 정확히 뭘 주고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님 표정이 밝으신 걸 보니 최소 특등급 20캐럿 이상 다이아…… 아니, 그보다 더 되는 물건이군요?”
일리에는 놀라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슬라르한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피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피, 핑크 다이아몬드?”
그러나 곧바로 정답을 읊은 일리에 탓에 슬라르한은 또 깜짝 놀랐다.
“쉿!”
“아, 맞다, 맞다. 비밀이죠?”
“진심으로 묻겠다. 어떻게 아는 거냐?”
“어…… 그게…… 피, 핑크색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더라고요. 설마설마했죠, 저도.”
날이 갈수록 거짓말만 느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되뇌며 일리에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슬라르한은 아까 일리에가 그 대마법사냐고 묻던 롤랑 백작의 눈이 아예 틀린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 중이었다.
“……마석 사줄까?”
“예?”
“혹시, 서클을 감지하는 법을 모른다면 내가 알려줄 수도…….”
“전 그냥 점쟁이지, 마법사 아니라니까요.”
“……점쟁이가 마법사보다 능력이 뛰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금 처음 하고 있다.”
“뭐, 그건 사실인지도 모르고요.”
맹랑하게 저 자신을 치켜세우는 일리에의 태도에 슬라르한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귀여운 코끝을 가볍게 톡 쳤다.
시선이 일리에의 눈과 뺨과 이마와 코끝을 훑다 입술에 좀 더 오랫동안 머물렀다.
“어…… 으흠!”
그의 시선은 왠지 민망해진 일리에의 헛기침에 간신히 떨어져 나왔다.
“어쨌든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해둬야 하는 일이니, 너도 조심해라.”
“물론이죠!”
일리에는 어색했던 분위기를 지우려는 듯 장난기를 가득 담아 대답했다.
‘핑크 다이아몬드라면 슬라르한이 그 재수 없는 여자한테 굽실대지 않아도 되겠어. 다행이다.’
일리에의 미소가 짙어졌다.
* * *
기대했던 대로 롤랑 백작이 핑크 다이아몬드를 가져온 덕분에 일리에는 뿌듯한 마음으로 히죽대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이야, 일리에.”
“어? 베델 님!”
그의 말대로 정말 오랜만에 보는 베델이었다. 수도의 변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서 전해 들은 뒤 한 달은 넘게 그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때 그에게서 들었던 얘기 중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잠깐 어디 좀 다녀왔어.”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이 따로 있었어요?”
베델은 갸웃거리는 일리에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씩 웃고 말았다.
“아우, 배고프다.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
“저야 좋죠.”
일리에도 반가운 마음에 그와 함께 식사를 받아들고 식당 구석 자리에 가 앉았다.
근황에 대해 먼저 물은 것은 베델이었다.
“주인님이랑 엘라니쉬 신전에도 다녀왔다며?”
“네. 제가 참 출세했다 싶더라고요. 루벨파스트의 노예가 엘라니쉬 신전 안을 구경해 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별일…… 없었어?”
일리에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려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베델의 눈빛이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별일이요? ……예를 들어, 어떤 일이요?”
“글쎄. 그거야 네가 나한테 말해줘야 할 일이지.”
베델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일리에는 그의 어딘가가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베델 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어떤 일?”
베델이 일리에를 따라 하며 은근히 대답을 종용했다.
일리에는 처음으로, 베델이 보통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엘라니쉬 신전에서 있었던 일이야 아마 소문으로 다 들으셨을 것 같은데요? 엘로르 전하께서 조금 잔재주를 피우셨고, 덕분에 성녀라는 이미지를 더 강화하셨죠. 하지만 그게 고작이에요.”
“그것뿐?”
“예? 이거 말고, 뭐가 더 있어요?”
베델의 갈색 눈동자가 일리에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폈다.
분명 신전 안에서 흑마법이 사용됐다는 정보가 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면 좋겠지만, 왠지 거기에 일리에가 연관됐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그건 정보원으로 오래 일했던 그의 감이었다.
사실 그가 한 달이나 슬라르한의 감시 일을 쉬어야 했던 건 수도의 변사 사건 때문이었다.
그 일 때문에 정보 의뢰가 빗발쳐 한 달간 아픈 어머니를 돌본다는 핑계까지 대가며 저택을 잠시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괴기스러운 변사 사건이 흑마법에 의한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베델은 저도 모르게 일리에를 떠올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베델에게는 일리에를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길한 예감은 그의 등줄기를 뱀처럼 타고 올라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그런 와중에 대주교가 기거하는 엘라니쉬 신전에서마저 흑마법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엘라니쉬 신전에 파견해 두었던 마법사 정보원은 흑마법의 흔적이 어떤 까만 머리 소녀에게 묻어 있었다고 알려왔다. 타리크 디넬 옆에 있는 소녀였다고…….
그 외에는 누구 하나 흑마법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일이었다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흑마법에 대한 얘기는 은밀하게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대단히 큰 마법은 아니었다는 뜻이야. 사람들 눈에도 잘 띄지 않았다면 개인을 향한 주술이었다는 뜻이고. 그리고 일리에는 지금 나한테 뭔가를 숨기고 있단 말이지…….’
일리에는 자신이 꽤 연기를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지 몰라도, 오랫동안 정보원으로 일한 베델의 눈에는 그 머뭇거림이 훤히 보였다.
별일 없냐는 질문에 정말 별일이 없었다면 바로 ‘없었다.’라는 대답이 나왔을 텐데, 그녀는 저를 떠보듯 ‘예를 들어 어떤 일’이냐고 되물었다.
‘알면 알수록 맹랑하고 영리해.’
예전이었다면 황제에게 일리에가 보통 아이가 아닌 것 같다고 보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몇 차례나 황제에게 별로 신경 쓸 존재는 아니라고 보고했고, 황제의 비밀 호위 하나가 일리에는 물론이고 저까지 감시하는 것 같은 이 상황에서는 조금 고려해 봐야 할 문제였다.
“일리에. 넌 네가 지금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께서 이제까지 너에 대한 살해 위협을 몇 번이나 쳐냈는지 알고나 있냐는 말이야.”
“예에?”
일리에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주인님께서는 말씀도 안 해주신 모양이네.”
“아…… 어…… 네에…… 저는 전혀…….”
베델은 왠지 속이 조금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일리에가 천진난만하게 맹랑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슬라르한이 기울이는 노력을 알 것 같아서였다. 그게 왜 배알이 꼴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말이야, 후보들의 다른 측근들한테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너에게만은 지나치리만큼 관심을 갖더라고.”
“왜요?”
“왜겠어? 넌 노예 출신 평민인 주제에 공작의 심부름꾼이지. 거기다 철벽으로 유명한 벤티악 공작 곁의 유일한 여자인 것도 모자라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고 있잖아. 자, 다시 물을게. 왜겠어?”
“가십거리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게 제 목숨을 노려야 할 이유가 되나요?”
“남을 공격하려는 자는 그의 약점부터 찾는 법이야. 넌 충분히 주인님의 약점처럼 보여.”
일리에가 움찔했다가 곧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주인님의…… 약점…….”
“넌 귀족이 아니지. 부모도 없어. 널 죽여도 골치 아플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소리야. 그러니 네가 진짜 주인님의 약점이 아니더라도 한번 찔러나 보는 거지.”
흐려지는 일리에의 얼굴을 보자니 제 속이 더 쓰린 것 같아서 베델도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주인님이 득달같이 널 보호했단 말이야. 그러니 저 밖의 늑대들은 네가 정말로 주인님의 약점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야.”
일리에는 뽀얀 수프의 표면만 바라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손도 대지 않은 빵과 수프는 식었고, 사용인들로 바글대던 식당도 한산해졌다.
한참 말이 없던 일리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저한테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예요?”
무표정한 얼굴에는 이미 충격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었다. 묻는 목소리에는 왠지 대항하기 어려운 위엄 같은 것마저 느껴졌다.
베델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이라도 몸을 사려. 애초에 다른 사람들 앞에 널 드러낸 것부터가 너무 부주의한 짓이었어.”
베델은 감시 대상을 걱정하는 저 자신이 낯설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리에가 허무하게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부탁을 드리면 주인님께서도 받아들이실 거다.”
“싫어요.”
“어……?”
“그러니까 베델 님 말씀은, 제 목숨이 위험하니까 숨으라는 말씀이시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위험해져도 상관없어요.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을 거고, 죽더라도 주인님을 황제로 만들고 죽을 거예요.”
일리에의 고집스러운 대답에 베델은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일리에! 정신 차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야?”
“이제까지는 그게 쉬운 일이라서 해왔나요?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에요.”
“네가 그런다고 주인님이 널 사랑해 주기라도 할 것 같아?”
“사랑? 제 주제에 감히 그런 걸 바랄까 봐요? 그냥, 그게 제 사명이기 때문이에요. 그걸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일리에의 무심하면서도 단단한 눈빛은 마치 다이아몬드 같았다. 도저히 깰 수 없을 그 의지에 베델은 숨이 턱 막혔다.
“도대체 왜…… 왜 그렇게까지……!”
황당한 것을 넘어서 거의 절망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베델의 표정에 일리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신의 사명을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라고 돌려보내진 인생이라고,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이다. 또 한 번의 삶은 바란 적도 없지만, 이왕 받았으니 신의 뜻을 헤아리며, 그리고 자신이 전생에 후회했던 일들을 바로잡으며 살 뿐이다.
그런 삶에서 목숨을 아까워할까.
일리에가 두려운 건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과오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걸 바로잡는 것이 바로 슬라르한을 황제로 만드는 것이고, 실제로 그 목표를 위해 살면서 전생의 제 업보 몇 가지를 풀어낼 수도 있었다.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어, 왜 황제가 되려는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투쟁하며 사는 삶보다는 이런 삶이 훨씬 나았다.
“노예 출신 평민 계집애가 고귀한 공작님 곁에 붙어 다니니 남들 눈에는 주인님의 얼룩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그건 죄송하고 마음 아픈 일이지만, 제가 주인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네가 어떻게?”
“주인님께 향하는 이목을 대신 받든, 나중에 고기 방패가 되든, 어떤 식으로든 주인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일리에는 자신에게 점술가의 능력이 있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것조차도 거짓말이지만 아무래도 베델에게 너무 많은 힌트를 줘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델 님은…… 어떻게 저에게 많은 암살 위험이 있었는지 아시는 거예요? 그걸 주인님께서 걷어내신 건 또 어떻게 아시는 거고요?”
이번엔 베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일리에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죽은 제 여동생처럼 대책 없이 밝고 맹랑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일리에는 거의 기사나 다름없는 각오로 슬라르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보통 눈치가 빠른 것도 아니고, 보통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아이에게 대충 둘러댔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사거나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베델은 일단 적당히 발뺌하기로 했다.
“주인님께서 내게 몇 가지 믿고 맡기신 일이 있었어. 처음에는 그 일들의 연관성을 몰랐는데, 나중에는 그게 너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았거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슬라르한이 맡긴 몇 가지 일은 일리에와 연관된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중 일리에에 대한 위협과 관련된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아…….”
“나도 고민이 많았다.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에 대해서는 함구해야겠다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네 목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착잡해 보이는 베델의 모습에 일리에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루벨파스트에서 죽었을 목숨이니, 저는 이 목숨이 아깝지도 않고 저에게 닥칠 일이 두렵지도 않아요.”
루벨파스트의 진창을 굴렀던 사람답지 않게 너무나 맑고 또렷한 눈망울이었다.
베델은 처음으로, 저 눈망울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리에가 슬라르한을 버리고 저를 선택하게 할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은 슬라르한을 감시하라고 이 저택에 심어진 끄나풀이었으니, 이 사실을 알면 일리에의 혐오 어린 시선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일리에는 황제에게 보고해야 할 특이점이었고, 알 수 없는 위협이었고, 모든 계산에서의 변수였다.
분명 없애버려야 할 이유가 너무도 많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네 대단한 충성심을 꺾기는 힘들 것 같다만, 어쨌든 주인님이 황제가 되는 걸 보겠다면 그때까지 목숨은 아껴 둬야지.”
“최대한 조심할게요.”
“그리고 흑마법을 조심해라. 그게 왠지 널 노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예? 흑마법이라니…….”
모르는 척하면서도 일리에는 베델의 눈치가 보통이 아닌 것에 깜짝 놀랐다.
직접적으로 흑마법을 언급했음에도 일리에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베델이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다가 작게 속삭였다.
“한 달 전 벌어진 변사 사건의 공통점이 또 하나 발견됐어.”
“네? 그게 뭔데요?”
“세 건 다…… 자살인 것 같아.”
“네? 말도 안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 번째 희생자인 그 소녀한테는 적용할 수가 없죠. 평민 학교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는 입학만을 고대하고 있었다는데, 왜 자살을 하겠어요?”
“글쎄. 하지만 세 건 다 용의자로 지목할 만한 사람이 없어.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죽었나 싶을 정도로 목격자조차 없고. 그런데 얼마 전 신전에서 갑자기 흑마법이 사용됐다잖아. 흑마법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흑마법이라면…… 손대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가능한 일 아닐까?”
희생자들의 시체는 이미 땅속에 묻혀 흑마법의 흔적을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베델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 얘기에 일리에의 표정도 서서히 식어갔다. 카제야의 악랄한 마법 중 ‘정신 지배’가 떠오른 탓이었다.
전생에도 그 마법으로 멀쩡한 사람을 첨탑에서 떨어지게 하거나 도심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게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그렇다면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누군가가 잘라서 가져갔을 텐데.”
“그 부분도 포함해서 흑마법을 의심하는 거야. 두 번째 희생자의 상체가 통으로 사라진 거 알지? 사람의 몸을 그렇게 자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런데 그건…… 짧은 시간 안에, 너무나 깔끔히 잘려 나갔단 말이지.”
“깔끔……하게요?”
“그래. 절단면이 아주 깔끔해. 범행 도구를 짐작도 못 하겠다던데?”
일리에는 식판 위에 놓인 햄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저것만큼이나 깔끔하게 잘렸을까.
“그럼……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희생자가 제 앞에서 얌전히 죽어주면, 마력이 깃든 뭔가로 필요한 부분을 잘라서 가져갔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둘 사이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일리에는 베델에게 그 모든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그가 순순히 대답해 줄 리 없었고, 저에게 이런 정보를 알려준 건 분명 도움이 되었으니 이 정도는 눈감아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변사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저에게 말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보통의 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알려고 하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 같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조심해야겠네요. 그런데 우리 얼른 식사해야 할 것 같아요. 조만간 식사 시간이 끝나거든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자고 일리에가 신호를 보냈다.
베델도 그녀의 뜻을 알아챈 듯 아무렇지도 않게 빵을 뜯기 시작했다.
“일리에.”
“네?”
“난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가 경애해 마지않는 네 주인님 역시 그럴 거다. 확신해.”
베델을 따라 빵을 찢던 일리에의 손이 멈췄다.
베델은 일리에가 찢던 빵을 뺏어 마저 찢고는 그 위에 자신의 몫으로 받아온 잼과 햄을 듬뿍 얹어 도로 일리에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니 네가 죽으면…… 적어도 두 사람은 굉장히 슬퍼할 거야.”
일리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전생에 자신이 죽었을 때,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슬퍼해 줬을까 싶어서.
“저, 꽤 성공한 삶이네요. 두 명이나 제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이 있다니 말이에요.”
“농담 아냐.”
“저도 농담 아니에요. 그리고……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일리에는 베델이 쥐여준 빵을 왕, 하고 크게 깨물었다. 그러고는 가지런한 잇자국이 난 빵조각을 베델에게 보여주며 씩 웃었다.
베델은 그것만으로도 일리에가 하고픈 말을 이해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을게.’
참으로 위태로워서 안타까운 그 말을…….
* * *
사위가 어둑어둑한 시간, 검은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가 조용히 엘로르의 접견실을 찾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엘로르는 가볍게 턱짓하여 접견실의 문을 꼭 닫았다.
“잘 오셨습니다, 맥클리어 주교님.”
“늦은 시간인데도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아니에요. 주교님의 다급한 전갈에 저도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드를 내린 맥클리어는 엘로르가 권한 의자에 앉아 한숨부터 내쉬었다.
엘로르는 그를 위로하듯 따뜻한 차 한잔을 따라주며 그가 얘기하기 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최근 엘라니쉬 신전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저도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괜찮으신 건가요? 저도 물론 대주교님을 존경하고 우러르지만, 이건 너무나 일방적이고 급한 변화가 아닌가 싶어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맥클리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격한 목소리로 헤스페리아를 성토했다.
“전하께서 제대로 보셨습니다. 이건 횡포입니다! 제가 엘라니쉬 신전을 돌봐온 게 5년이 다 되었습니다. 대주교님께선 그간의 제 노력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만드신 거라고요.”
“그러게 말이에요. 대주교님께서는 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신전 안에 흑마법이 들어왔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작은 마술 같은 것이라고 설명을 했는데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시더군요.”
“어머, 세상에……! 그럼, 저 때문에 맥클리어 주교님께서 이런 수모를 당하셨단 말씀이세요?”
“전하 때문이라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원래 물이 오래 고이면 썩기 마련 아닙니까. 종교계도 마찬가집니다. 몸담은 지 오래되면 다들 신실하다고 믿지만, 실은 융통성 없고 권위 의식만 가득 찬 노인네들일 뿐이지요. 대주교님 역시 옛날 방법만 고집하고 계신 겁니다.”
맥클리어가 혀까지 쯧쯧 차며 미간을 구겼다. 엘로르는 처연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대주교님도 너무하세요. 맥클리어 주교님께서 그동안 얼마나 노력하셨는데…… 주교님이 일으키신 새 신앙 운동은 평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잖아요. 즉, 모두가 그 길을 원하고 있는 거라고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계급제에 익숙해진 고지식한 사람들에게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불쾌했겠지요. 바로 그 계급제의 정점에 서 계시는 것이나 다름없는 황녀 전하께서는 솔선수범하여 아랫사람들을 보살피시는데…….”
맥클리어는 저가 죄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엘로르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다정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가 주교님을 도와드릴게요. 주교님 같은 분께서 계속 일해 주셔야 이 세상의 약자들이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대주교님의 권력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분의 신력도 뭇 사제들과 비교할 게 아니고요.”
그 말에 엘로르가 빙긋 웃었다.
“그건 제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 주교님께서는 이제까지처럼 산하 신전의 사제님들을 잘 설득해 주세요. 어쩌면…… 대주교님의 선종이 갑자기 닥칠지도 모르니, 조금씩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지도 모르고요.”
“서, 선종……이요?”
“큰일을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죠. 안 그런가요?”
‘선종’이라는 말에 맥클리어의 눈이 놀란 듯 커졌으나 그는 잠시간의 갈등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낡은 것은…… 되도록 빨리 새것으로 바꿔야 하니까요.”
“잘 생각하셨어요.”
맥클리어는 엘로르의 천사 같은 미소를 보며 자신의 죄책감을 모른 척했다.
* * *
“으응…… 으으…….”
고요한 방 한가운데서 일리에가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야우웅.”
아까부터 녹스는 일리에의 머리 주변을 배회하고 얼굴을 핥거나 앞발로 건들며 제 주인을 깨우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쉽게 깨어나지 못하고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어떻게!”
아까부터 어떤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머릿속을 바늘로 쑤시듯 울리 퍼지고 있었다.
“클리드의 옆자리는 당연히 내 것이 되어야 하잖아! 안 그래? 대답 좀 해 봐!”
악령의 울부짖음 같던 목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다.
‘아…… 엘로르다…….’
일리에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나 발악하는 상황은 겪어본 적 없었다.
‘뭐지……? 왜 저렇게 미친 듯이…….’
일리에가 그런 궁금증을 가질 즈음, 흐느끼던 엘로르의 목소리가 다시 소리쳤다.
“왜 라리에트냐고! 왜 라리에트가 클리드의 황후가 되느냔 말이야!”
엘로르는 그 사실에 굉장히 충격받은 모양이었지만, 일리에 역시 충격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라리에트가 클리드의 황후가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클리드의 황후 운운하는 것을 보니 분명 전생의 기억인 것 같은데, 자신이 죽을 때까지 클리드는 라리에트에게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사별하고 돌아온 라리에트를 궁에서 살게 해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게 이성적인 호감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토록 황제의 관을 탐했으면서도 10년이나 저를 죽이지 않고 놔두었던 것을 보면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어떤 이득이 됐는지도 모른다.
자신으로부터 적법하게 관을 이어받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서 라리에트를 일부러 황후로 맞아들일 수도 있고, 아내의 불쌍한 자매를 구제하는 자비로운 황제로 보이려 할 수도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라리에트마저 그놈의 손에 시들어가게 할 수는 없어!’
일리에는 라리에트가 이미 베르트의 손을 잡고 피델로로 떠났다는 것조차 잊은 채 덜덜 떨었다.
암흑 속에서 엘로르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엘로르! 말을 해!’
속으로 외쳤더니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다시 엘로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흑…… 불쌍한 릴리에트. 머저리 릴리에트. 너는 네 동생년이 네 남편을 가로챈 것도 모르고 있지? 다음 주에 약식 결혼식을 올린대. 도대체 뭐가 그리 급해서…… 흐흐흑…….”
엘로르의 흐느끼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깜깜하기만 했던 시야의 한가운데가 어두운 촛불 빛이 일렁이는 것처럼 서서히 밝아왔다.
‘라리에트!’
적막한 방안에 라리에트가 작은 촛불 하나만을 밝힌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라리에트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 혼자인가 싶었는데 그 곁에 베르트가 보였다.
깔끔한 차림새였지만 그의 얼굴은 핼쑥했다.
“라리에트 전하.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이건, 이건 절대 릴리에트 폐하께서 바라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러나 라리에트는 벽을 응시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물론이죠. 언니는 이런 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언니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복수거든요.”
“전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어요. 황녀들 중에 가장 건강했던 릴리에트가 왜 갑자기 쓰러져요? 식물인간이라니요? 그것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게…… 클리드와 엘로르가 벌인 짓이라잖아요.”
어떤 경로로 입수한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릴리에트가 식물인간이 된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야윈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바르르 떨렸다.
“언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식물인간이 된 언니를 성심껏 간호해 준다며 클리드에게 고마워했어요. 언니를 그 꼴로 만든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게, 고맙다고…… 고맙다고…….”
억눌렀던 감정이 울컥 솟는지 라리에트는 몇 번이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베르트의 얼굴에도 참담한 고통이 드리웠다.
“그 인간을 죽인다고 언니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겠죠. 알아요. 하지만 저는…… 언니의 원수를 절대 그냥 둘 수가 없어요. 제가 미칠 것 같아서요.”
어룽거리는 촛불에 베르트의 젖은 뺨이 반짝였다.
이미 라리에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미안해요, 베르트. 당신께는 정말로 미안해요.”
“전하! 하지만 전하처럼 가녀린 분이 어찌 그를 죽이겠다는 말씀입니까! 실패하면요?”
“상관없어요. 적어도 그 뻔뻔한 낯짝에 침은 뱉어줄 수 있겠죠.”
라리에트는 힘없이 웃다가 작게 덧붙였다.
“언니가…… 보고 싶어요.”
일리에는 그 순간 눈치챘다.
라리에트는 클리드를 사랑하거나 황후 자리가 탐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그를 죽여 자신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복수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의 목숨을 버릴 생각이었다.
‘안 돼, 라리에트! 난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제발 베르트와 도망쳐! 제발! 너라도 행복해야지, 이 바보야!’
아무리 외쳐도 일리에의 목소리는 라리에트에게 가 닿지 않았다.
그사이 라리에트는 제 옆의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없이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구해다 주셔서 고마워요, 베르트. 당신께는 빚만 잔뜩 지네요.”
라리에트가 상자 안에 놓인 물건을 꺼내 들었다.
날이 잘 든 단도였다.
베르트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 보세요. 부디 당신만은…… 행복해지실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
라리에트는 저게 라리에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스산하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울음을 다 멈추지도 못한 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일리에는 라리에트가 앉아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사파이어 별궁의 제일 끝방!’
2황비와 그 자녀들에게 내려졌던 별궁의, 제일 눈에 띄지 않는 방이었다.
말썽을 부릴 때마다 어머니가 저 방에 자신을 처넣고 근신을 명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라리에트를 말려야 해!’
계속 신음하던 일리에가 눈을 번쩍 떴다.
“냐앙, 냐앙.”
녹스가 반가운 듯 뺨을 핥았지만, 일리에의 머릿속에는 당장 사파이어 별궁으로 달려가 라리에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라리에트…… 안 돼…….”
일리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츠를 신었다. 머릿속에는 황궁 안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거기로 가기 위해서는 꼭 황궁 근처의 이엘로드 숲을 지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러붙었다.
“이엘로드…… 숲……으로…….”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되뇐 일리에는 비척비척 방을 빠져나갔다.
* * *
창문 틈으로 날려 보낸 연기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카제야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투명한 유리병에 도로 빨려 들어가는 뽀얀 연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유리병 주둥이를 코르크 마개로 막았다.
자신의 피를 묻힌 일리에의 셔츠에 일리에의 머리카락, 박쥐의 날개와 염소의 눈알, 그리고 뱀의 혀를 넣어 감싼 뒤 마력 불꽃에 두 시간 동안 천천히 태우며 정성스레 주문을 외워 얻은 정신 지배 물질, 마르였다.
직접 대상을 앞에 두고 주술을 거는 것보다는 지배력이 약하고 만들기가 귀찮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한번 만들어두면 상대가 죽거나 연기가 흩어져 버리기 전에는 몇 번이고 재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것만 이용하면 사람 하나를 어딘가로 꼬여내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자, 그럼 우리 건방진 아가씨가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려 볼까?”
이엘로드 숲 한편에 비밀 실험실을 지어 연구를 하고 있던 카제야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리에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의 작업실에는 더 이상 눈에 거슬리게 벌벌 떠는 노예들이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차를 끓여 찻잔에 따랐다.
“끄읅…… 끄르륵…….”
“하스스…… 캬아…….”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카제야는 이상한 소리가 나는 작업실 한편에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는 노예 몇을 해체해 얻은 인간 조합형 키메라 넷이 우리 안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인간의 약한 부분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실험 끝에 동물보다 인간이 나은 부분은 머리와 손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건장한 인간의 몸을 기워대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짐승의 신체에 인간의 머리, 혹은 상체까지를 잘라 이어붙인 키메라를 주로 시도하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성공률도 비약적으로 높아진 상태였다.
다만 생각보다 이 흑마법술에 드는 생명력이 꽤 많은 것이 문제였다.
‘노예를 더 쓸어오든가 해야 하는데…… 흐음…….’
노예를 사는 데는 적지 않은 돈이 들었고, 저번의 대량 구매 때문에 자신을 추적하는 낌새도 몇 눈에 띄었다.
‘일리에라는 계집의 정신 지배를 더 강화해서 인간들을 좀 사냥해 오게 해야겠네. 급한 불 정도는 끌 수 있겠지.’
여자애지만 검도 차고 다닌다는 걸 보면 약해빠진 인간은 아닐 테니, 민가의 어린애 몇 명 정도는 납치해 올 수 있을 터였다.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부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에는 만만치 않은 자신의 마력이 들기에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나저나, 그 계집애를 깨워 여기까지 오게 할 악몽은 대체 어떤 걸까?’
유리병 안에 담긴 마르를 바라보며 카제야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
마르는 인간의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어두운 감정을 자극해 행동하게 했다.
제 집에서 엎어져 죽은 노귀족은 도대체 무슨 악몽을 꾼 것인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어버려서 물어볼 수 없었지만, 건장한 인부 남자는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나는 악몽을 꿨고, 시험에 수석 합격한 꼬맹이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악몽을 꿨다고 했다.
‘그 계집애도 제 주인에게 버려지는 게 가장 두려울까? 아니면 다시 루벨파스트에 노예로 팔려 가는 것? 아니, 인간은 의외로 본능에 충실하니 굶주리거나 매질당하는 악몽을 꿨을지도 모르지.’
그런 걸 상상하는 것도 카제야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인간의 음습하고 나약한 속성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었으니까.
그렇게 즐거운 상상에 빠져 한참을 기다리던 그녀가 슬슬 지루해질 때쯤, 바깥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걷는 소리의 간격은 일정하고 단정했다.
“오래 기다리게 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줘야겠는걸.”
물론 벤티악 저택에서 남의 눈을 피해 나와야 했을 테니 아무래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카제야가 알 바 아니었다.
되도록 빨리 이엘로드 숲으로 달려가라는 명령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노예에게는 벌을 내려 마땅했다.
최근 제 성미와는 어울리지도 않게 엘로르의 비위를 맞춰주다 보니 짜증이 꽤 쌓인 상태였고, 이럴 때는 누군가를 학대하는 게 아주 좋은 해결 방법이었다.
똑똑, 하고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카제야는 일리에를 때릴 회초리 하나를 손에 들고 앞뒤로 살피며 심드렁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의 허락에도 일리에는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카제야는 그제야 이 집 주변에 환영 결계도 쳐두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정신 지배로 여기까지는 왔는데, 문이 정확히 어딘지는 못 찾는 것 같았다.
정신 지배가 강하게 걸리면 카제야가 걸어둔 환영 마법 역시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일리에는 그만큼 강하게 걸려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계집애네.”
카제야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손을 한 번 휘둘렀다.
달칵.
적막한 숲 한가운데서 낡은 문손잡이가 작은 소음을 내며 열리고, 좁게 벌어진 문틈으로 새어든 창백한 달빛이 긴 빛 그림자를 그려냈다.
“뭐 하니? 들어오지 않고.”
손을 쓰지도 않고 문을 열어준 카제야는 회초리를 단단히 쥔 채 오만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가 기대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친히 문까지 열어주시다니, 고맙군.”
끼이익, 하고 열리는 문틈 새로 건장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컴컴한 그림자에 묻혀 있으면서도 노란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베, 벤티악 공작……!”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카제야는 그를 향해 강력한 충돌 공격 마법을 시전하고 곧바로 키메라들이 있는 철창으로 향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슬라르한 역시 만만치 않은 마법사라서, 뒤로 가볍게 물러나며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오두막을 감싸고 있는 결계에 충격을 주어 환영을 부숴 버렸다.
그러나 부서진 것은 환영 결계뿐만이 아니었다. 시체 썩은 내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결계 역시 부서져 버리자 후각 쪽으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슬라르한도 순간 멈칫했다.
“윽!”
온 숲의 파리들이 다 꼬일 것 같은 지독한 냄새였다.
그러나 곧바로 후각 차단의 마법을 스스로에게 건 슬라르한은 검에 일렁이는 기운을 싣고 낡은 나무 문짝을 그대로 내리쳤다.
애초에 오두막 자체에는 강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는지 문짝과 문틀은 맥없이 부서져 넘어갔고, 그 안에 널브러져 있던 수많은 실험 기구들과 유리 플라스크들이 귀 따가운 소리를 내며 깨지고 부서졌다.
그 와중에 창문틀에 놓여 있던 유리병 하나도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고, 거기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흘러나와 공중에 흩어졌다.
하지만 카제야는 공들여 만든 일리에의 정신 지배 물질까지 챙길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키메라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자신의 정체를 슬라르한에게 들킨다면 아주 곤란해질 판이었다.
키메라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엘로르 곁에서 그녀의 황제 등극을 도와야 자신의 목표 역시 달성할 수 있었다.
문밖에 서 있는 게 슬라르한이라는 것을 안 순간 이미 우선순위를 정한 그녀는 키메라들을 가둔 철창 안에서 광역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쳤다.
공간을 이동하는 찰나 슬라르한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그녀는 무사히 키메라들을 데리고 자신의 또 다른 아지트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제기랄!”
슬라르한과 카제야의 입에서 동시에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 * *
이틀 뒤, 수도에는 이엘로드 숲에서 발견된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얘기가 대서특필되어 호외로 팔려 나갔다.
최근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신문사’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했다.
실험실에서 번져 나온 시체 썩은 냄새가 숲 주변 마을에까지 퍼져 소동이 벌어졌으며, 실험실 한쪽 구석에 파인 구덩이에는 썩다 만 시체가 끝도 없이 쌓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자극적인 문장으로 길게 쓰여 지면을 채웠다.
그리고 기사는 이 끔찍한 장소를 발견한 것이 최근에 벌어진 변사 사건을 개인적으로 수사하던 벤티악 공작이며, 이 공로 역시 후보 평가 위원회에서 적합한 점수를 받을 거라는 예측까지 끄트머리에 달고 있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슬라르한 옆에서 읽던 신문을 내려놓은 타리크가 슬라르한에게 말했다. 그러나 슬라르한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코앞에서 범인을 놓쳤는데 뭘 잘했다고 수고인가.”
“적어도 일리에 녀석은 구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일리에를 구한 게 아니야. 일리에가 저 자신을 미끼로 나를 그 흑마법사에게 데려다준 거지.”
일리에가 위험을 무릅쓰고 만들어준 기회인데 그걸 놓쳤다는 자책감이 자꾸 어깨를 짓눌렀다.
“그나저나 그 녀석, 진짜 얕보면 안 되겠네요. 어떻게 흑마법사가 자기한테 접근할 줄 알았답니까?”
“일리에가 대단한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슬라르한은 한숨을 쉬며 저에게 기묘한 부탁을 하던 일리에를 떠올렸다.
* * *
“주인님. 엘로르 전하 곁에 있다는 그 흑마법사가, 어쩌면 저한테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사실, 축복 성사 때 흑마법사와 마주쳤어요. 엘로르 전하의 새로운 측근 시녀가 흑마법사 맞죠?”
자신이 흑마법사가 누군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일리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상한 벌레로 제 위치를 찾던데요? 아마 대주교님께서 느끼신 흑마법이 그거였던 것 같아요.”
“이상한 벌레……?”
순간 슬라르한은 전에 클리드가 달고 왔던 키메라를 떠올렸다.
“희한하게 생긴 날벌레가 저를 확인하자마자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어요. 하지만 대주교님께서 나머지 벌레들을 싹 다 태워 버리셨죠. 대주교님, 그때 좀 멋있었는데.”
슬라르한은 흑마법사가 기어코 일리에를 목표로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더러운 힘이나 빌려 쓰는 것들이 감히……!”
“하지만 아직 그 시녀가 흑마법사라는 증거는 없잖아요.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주인님만 곤란해지실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수작 걸기를 기다리자고요.”
“도대체 넌 뭘 알고 있는 거냐? 또 무슨 위험한 짓에 발을 들이려고!”
“이건 제가 몸 사린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거든요. 물론 저한테 그 방법을 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일리에가 마치 남 일 말하듯 설명한 그 수작이란 흑마법의 정신 지배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사는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대요. 아마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방법을 쓸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제 발로 주인님 곁을 벗어나게 해야 일이 쉬워질 테니까요.”
“그렇긴 하지.”
“일은 아마 밤에 벌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정신 지배를 당하면 태도가 평소랑은 조금 다르다고 하거든요. 대낮에는 그런 게 눈에 잘 띌 테니…… 그러고 보면 수도 변사 사건의 피해자들이 죽은 시간도 밤이었죠?”
그 말에 슬라르한의 눈빛이 번뜩였다. 흑마법이 끼어들었다는 정황이야 짐작했다지만, 범행 시간이 밤인 이유가 정신 지배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정신 지배에 대해 아는 게 더 있나?”
“저도 잘 모릅니다. 주워들은 것만 아는 척 나불대는 거죠. 그러니 제가 만약 정신 지배에 걸린다면 그 기회에 어떤 마법인지 잘 봐두시라고요. 이 기회에 또 점수를 올릴 일이 벌어진다면 더 좋겠지만…….”
“점수 따윈 상관없으니 제발 위험한 짓 좀 하지 마라.”
“이건 제가 안 하겠다고 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저를 목표로 삼은 흑마법사가 설마 그냥 물러서겠어요? 옆구리라도 찔러 보겠죠.”
일리에의 말에 반박할 구석도 없어서 슬라르한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만 문질렀다.
일리에가 제안한 것은 슬라르한의 침실 안에 일리에의 침대를 들이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한밤중에 일어나 몽유병자처럼 행동하거든 자신을 가만히 뒤쫓으며 정신 지배 마법을 확실히 파악해 두라고 말이다.
결국 일리에의 말을 따르게 된 슬라르한이 일리에와 같은 침실을 쓰게 됐다는 사실에 설렐 틈도 없이, 당장 그날 밤 일리에는 악몽을 꾸듯 몸부림쳤다.
괴로워 보이는 일리에를 깨우고 싶었지만 슬라르한은 꾹 참고 일리에를 지켜보았다.
한참 거친 숨을 쉬며 괴로워하던 일리에는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부츠를 신고 침의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흑마법사가 혹시나 일리에에게 자살을 명령했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가던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이엘로드 숲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숲 깊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건가? 하지만 왜 하필 황실 소유인 이엘로드 숲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따라가는데 일리에는 마치 목적지를 정한 것처럼 한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환영 마법으로 가려진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거기에 집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슬라르한은 저 집에서 흑마법사가 기다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 벌레만도 못한 것이…….”
누가 봐도 수상한 곳에 일리에를 불러낸 목적은 그게 무엇이든 절대 유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안에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하냐는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에는 분노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일리에가 노예였을 때도 자신은 그런 식으로 오만하게 불러본 적이 없는데, 고작 흑마법사 주제에 일리에를 아랫것 부리듯 말하다니.
그 뒤로는 정말 모든 걸 다 으스러트리겠다는 다짐으로 공격해 나갔다.
그러나 상대를 으스러트리기는커녕 상대와 그 상대가 지키려 한 뭔가를 다 놓치고 썩은 내 진동하는 오두막 하나만 건졌다. 다행히 일리에를 사로잡은 정신 지배는 풀렸지만 말이다.
* * *
“구덩이에 던져진 시체들도 부패가 너무 심해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고, 철창 안에 뭐가 있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지. 제길…….”
오두막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겨와 멈칫했던 그 짧은 시간이 흑마법사에게는 구명줄이 된 것이다.
착잡해하는 슬라르한에게 타리크는 일리에에 대해 물었다.
“그 녀석은 이제 멀쩡한 겁니까?”
“정신 지배에서 풀려난 후 몇 마디 말은 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자고 있네. 잠에서 깨어나야 괜찮은지를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야.”
“물어볼 거요?”
슬라르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에가 정신 지배를 당하며 일어난 그 순간부터 이상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일…….
“라리에트…… 안 돼…… 그러면 안 돼…….”
일리에는 멍한 상태로도 애타게 라리에트의 이름을 불렀다.
라리에트가 피델로로 떠나기 전 두 사람의 사이가 돈독했다고는 하나, 평민이 감히 황녀를 이름으로만 부르고 반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리에가 일부러 무엄하게 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리에는 간절히, 듣는 사람이 가슴 아플 정도로 애절하게 라리에트를 불렀다.
생각해 보면 일리에는 처음부터 라리에트에게 과하게 마음을 썼다.
물론 그녀가 처했던 상황이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느끼기에 부당하다고 여겨질 법했지만, 귀족끼리의 혼사를 따져보면 그런 일이 드문 것도 아니었다.
정신 지배에서 풀려 잠든 일리에의 곁에서 슬라르한은 그 일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일리에는 라리에트 전하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황녀를 낮춰 부를 정도의 친분은 만들기 쉽지 않았다.
황후나 황비가 괜찮은 귀족가의 아이들을 황자나 황녀의 놀이 친구로 붙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그런데 라리에트 전하는 놀이 친구가 없었단 말이지.’
다음 날 부리나케 마그렛에게 물어 확인한 사항이었다.
다이애나 황비가 제 딸을 거의 가둬 키운 탓에 놀이 친구는커녕 또래 영애와 교류한 것도 상당히 늦됐다고 했다.
‘그럼 도대체 일리에는 라리에트 전하와 언제 알게 된 거지?’
일리에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냥 모르는 척 묻어두자고 생각해 왔는데, 점점 무시할 수 없는 의혹이 피어나고 있었다.
“일리에…… 도대체 넌 누구냐…….”
슬라르한은 마른세수를 하며 뻑뻑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일리에의 곁에서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머리가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 * *
“카제야. 난 늘 너를 믿었어.”
엘로르의 목소리는 간신히 분노를 참는 듯 미세하게 떨렸다.
“7서클 흑마법사가 흔하지는 않잖아? 분명 너는 네 능력을 믿으라 했고, 난 거기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했어. 네 계약금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이제까지 너에게 든 돈만 8천만 페르소야.”
눈에 띄지 않게 자금을 끌어오느라 제 보석을 팔았던 것이 떠오른 엘로르는 냉침된 차를 급하게 마셨다.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잔이 비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네가 그랬지? 그 계집애를 꼬여내는 것 정도야 아주 쉬운 일이라고. 그래서 아무 말 않고 기다렸어. 아까도 말했듯이, 난 널 믿었으니까.”
그리고 엘로르의 눈빛이 금세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이게 뭐야? 계집애를 잡아오기는커녕 벤티악 공작에게 네 실험실을 들키고, 연구 자재들까지 다 잃었어. 황제 폐하께서 이엘로드 숲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겠다고 선언하셨고, 벤티악 공작의 위상만 높아졌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격랑 같은 분노가 몰아쳤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쨍그랑.
값비싼 크리스탈 유리잔이 카제야 뒤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죄송합니다.”
카제야는 겁을 먹거나 화가 난 기색도 없이 건조한 어투로 사과했다.
엘로르의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부분에 더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신 지배를 당한 그 계집애가 아닌, 벤티악 공작이 찾아온 것일까.’
그녀가 일리에를 불러낸 시각은 모두가 잠들었을 한밤중이었고, 일리에의 방이 슬라르한의 방과 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미리 확인해 둔 상태였다.
그렇다면 빠져나오는 걸 쉽게 발각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게다가 만약 우연히 눈에 띄었다 해도 보통이라면 그 뒤를 밟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어. 분명 마지막에 눈을 마주쳤단 말이지.’
슬라르한이 자신의 정체를 대충 추측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추측과 확신은 엄연히 달랐다.
이제 슬라르한은 자신을 명확히 목표물로 삼고 공격할 터였다.
그러나 카제야는 벌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싸우기가 좀 어려웠다.
마노에 의해 손상당한 마력핵이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최대한 자신의 힘을 쓰지 말아야 했고, 그런 상태로 연구를 하려면 엘로르의 아낌없는 지원 역시 더 필요했다.
“죄송하다는 말로 모든 실패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형벌이 왜 있겠어? 이제 이 일을 어쩔 거냔 말이야?”
엘로르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계속 카제야를 타박하자 카제야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일리에라는 그 계집애를 잡는 건 뒤로 미뤄야겠습니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 아이가 저를 잡기 위한 미끼인 것 같거든요. 그렇지 않다면 이번 일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미끼?”
“예. 마치 그 아이가 뭔가를 아는 것처럼 포장해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고 제가 그 아이에게 손 뻗을 때만을 기다린 거겠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엘로르의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카제야의 말이 아예 가능성 없는 일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고작 평민 계집이 황비에게 대꾸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아마 라리에트 전하와 짜고 벌인 짓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이애나 전하의 내밀한 일은 라리에트 전하께서 말해준 것일 테죠. 그리고 엘로르 전하의 관심을 끌기 위해 평민 계집을 이용한 것일 테고요.”
“그럼 우리가 벤티악 공작의 수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는 거네?”
카제야는 대답하지 않았고 엘로르는 어금니를 까드득 깨물었다. 마치 자신이 멍청해서 얕은수에 걸려들었다는 것 같았으니까.
화내고 싶었지만 무엇 하나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잘 살펴. 모르는 일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 계집애를 잡는 것보다는 야나크 교 내에 우리의 세력을 퍼트리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흑마법의 가장 큰 방해물이 바로 신전이니까요.”
“신력 있는 사제들이 문제긴 하지만 그쪽도 어차피 권력 싸움판이지. 주요 사제들만 잘 꼬드기면 되니까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히스테리를 부리던 엘로르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카제야 쪽을 곁눈질하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물었다.
“……혹시, 클리드에게 자문은 구해 봤어?”
“아닙니다. 그분은 제가 흑마법사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분께 자문을 구하겠습니까.”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아니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카제야는 클리드에게 자문을 구할 생각 따위가 없기도 했고, 또 괜히 클리드를 만났다고 했다가 엘로르의 질투심을 자극할까 봐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게 엘로르의 화를 더 돋운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분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담을 나누셨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 ‘연애’라는 단어가 들렸고, 카시르 영식께서 아일 영애께 매력적이라고도 했습니다. 대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아일 영애의 마지막 대답에 카시르 영식이 굉장히 즐겁게 웃기도 하셨습니다.”
클리드에게 붙여놨던 정보원이 전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클리드가 그럴 리 없다고, 카제야는 더더욱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만남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카제야라도 사실대로 얘기해 줬다면 이렇게 속이 뒤집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히 클리드에게 추파를 던져……?’
어느 모로 보나 눈길을 끌 구석이 없는 외모의, 썩은 시체들이나 껴안고 지내는 흑마법사 주제에 말이다.
그리고 클리드는 왜 자신을 곁에 두고도 늘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클리드에게 따져 묻기는 두려웠고, 눈앞의 흑마법사는 자신의 하수인이었다.
분노는 좀 더 만만하다고 생각되는 쪽을 향해 쏟아졌다.
“어쨌든 실망이야, 해리엇. 아니면 요새 딴생각을 하느라 집중이 흐트러진 거 아닌가?”
엘로르는 클리드와의 일을 염두에 두며 ‘딴생각’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카제야는 엘로르가 그녀를 이용하여 황위 찬탈을 하려는 자신의 본심을 눈치챈 걸까 봐 조금 멈칫했다.
엘로르는 그것마저 저 좋을 대로 오해했지만 말이다.
깊어진 의심과 분노로 미묘하게 어긋난 대화가 마무리되고 카제야는 엘로르의 방에서 나왔다.
사실 엘로르가 아무리 패악을 부려도 카제야는 거기에 크게 상처받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작은 개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짖는다고 해도 호랑이에게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는 법이니까.
카제야가 내내 신경 쓰는 쪽은 슬라르한이었다.
‘예상보다 강해. 마노의 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맞닥트렸을 때는 흑마법사의 마력과 비슷한 부분도 느껴졌단 말이야…….’
그게 제일 이상한 점이었다.
마력의 차이를 구분하는 건 웬만한 마법사도 어려워하는 일이었지만, 남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마력을 다루며 살아온 카제야는 그 예민한 감각을 가진 몇 안 되는 마법사 중 하나였다.
그런데 분명 자신을 공격해 오던 그 힘에서 저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습하고 서늘한 지하실을 채운 것 같은, 악마 리카온이 기꺼워할 것 같은 냄새 말이다.
‘고매하신 공작님께서 쓰시는 힘이 우리와 비슷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비 족에 대해서 연구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흑마법을 쓰는가에 대한 부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들이 흑마법사인가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한 부분을 의아해했는데, 그건 마력과 비슷한 힘을 지닌 그들이 왜 숨어 사냐는 것이었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신의 힘을 적극 이용하며 높은 보수를 받고 보통의 평민들보다 윤택하게 산다.
하지만 그들은 마법사로 사는 것도 아니고, 마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안 될 것처럼 외진 숲 깊은 곳에 숨어 살았다.
심지어 전 벤티악 공작 부인은 자신이 벤티악 가의 약점이 되자 황제를 공격한 게 아니라 저 자신이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카제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그들이 가진 힘이라는 게 대단치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들의 태도가 이해됐으니까.
하지만 반쪽짜리 사비 족인 슬라르한의 힘마저 저와 비슷한 수준으로 느껴졌다.
고작 반쪽짜리가 이 정도라면 그들의 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손쉽게 날려 버렸던 마노야말로 온전한 사비 족이었을지 모른다.
또 어쩌면 슬라르한이 특별하게 강한 것일 수도 있고.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란 늘 호기심 아니면 불쾌감을 불러왔는데, 이번에는 후자였다.
자신의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불쾌감. 그걸 다른 말로 해석하자면 두려움이었지만 카제야는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주교도 나섰다지? 쯧.’
신전 쪽은 엘로르가 막겠다고 했지만 완전히 믿고 맡기기도 불안했다.
특히 차기 교황감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대주교 헤스페리아는 정말로 교황과 맞먹는 수준의 신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이 예상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으로서는 대주교의 전력부터 무엇보다 빨리 눌러놔야 할 것 같았다.
‘당분간은 마력핵의 회복에 힘쓰면서 루트 교의 교세를 확장해야겠어.’
카제야는 200년이 넘는 인생 중 거의 처음으로 위기감이라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