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15/32)

3장

“으음…….”

푹 자고 난 것 같은 개운함을 느끼며 일리에는 눈을 떴다.

밖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짹짹대는 것을 보니 이른 아침인 것 같았다.

“으으…… 삭신이야…… 도대체 얼마나 퍼질러 잔 거야…….”

피로는 풀린 것 같았지만 등과 허리는 왠지 뻣뻣해진 것처럼 아팠다.

일리에는 눈을 문지르며 눈곱을 떼다가 겨우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띠던 천장에 점점 노르스름한 빛이 섞여들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의 방 천장은 아니었다.

“응? 뭐, 뭐야!”

꿈지럭거리던 일리에는 발로 뭔가를 찬 것 같아 화들짝 놀라며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발로 찬 ‘그것’도 낮게 신음하며 엎드린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주인님……?”

슬라르한이었다.

일리에는 잠깐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진심으로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왜…… 여기서 주무시고 계세요?”

그러니 이런 멍청한 듯한 질문이나 할 수밖에.

하지만 개운한 일리에와는 달리 피곤한 기색을 흘리며 일어난 슬라르한은 아직 잠이 덜 깬 시선으로 일리에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물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예? 아, 뭐…… 그렇긴 한데…….”

“어디 이상하거나 아픈 곳은 없고?”

“아뇨. 되게 개운한데요.”

“하긴, 사흘 만에 깨어난 사람치고는 팔팔해 보이는구나.”

“제가 기초체력을 단단히 다져놓기는 했지요. 하하…… 하…….”

싱겁게 웃던 일리에는 뭔가 이상한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사흘이요?”

슬라르한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일리에를 보면서도 놀라거나 한심하게 보지 않았다.

그저 일리에가 예전 모습 그대로라는 것에 짙은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너 지금, 사흘 만에 깨어난 거다.”

일리에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었다.

그사이 슬라르한은 몸을 일으켜 일리에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러고는 일리에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을 살짝 꼬집어보거나 어깨와 팔을 가볍게 주물러 보면서 일리에가 멀쩡한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일리에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민망해져서 몸을 슬쩍 움츠리며 그의 손을 피했다.

“정말……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네가 잠든 사이,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생겼거든. 아픈 곳이 없다면 지금 당장 물어보고 싶은데.”

“네? 뭐, 뭐가 궁금하신데요?”

일리에가 왠지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라르한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무겁고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리에트 전하와는…… 어떤 관계냐?”

“예? 어…… 으음…….”

갑작스럽게 라리에트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일리에의 눈동자가 슬라르한을 쳐다보지 못하고 사방을 헤매기 시작했다.

“머리 굴리는 게 훤히 보이는 편이구나, 너는.”

“누, 누, 누가요!”

“아니라면 쉽게 답할 수 있을 텐데.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될 테니까.”

일리에는 억지로 유쾌한 미소를 지은 채 변명했다.

“아니, 다 아실 만한 분께서 갑자기 이상한 걸 물어보시니까 그렇죠. 라리에트 전하와 무슨 관계냐뇨? 저야 어쩌다 운 좋게 황녀 전하와 연이 닿은, 평범한 평민 심부름꾼이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있나요’ 부분에서 갑자기 소심해진 일리에가 슬라르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런 것뿐이라면…… 난 너를 황족 모독죄로 벌해야 하는데 말이다.”

“예? 아, 아니, 왜요!”

오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황족 모독죄라니, 일리에는 황당해져서 따져 물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라리에트, 그러면 안 돼.”

“엥?”

“네가 정신 지배를 당하는 동안 계속 반복해서 읊었던 말이다.”

일리에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제야가 건 정신 지배는 강한 게 아니었는지, 지금도 그때 꿈꾸듯 봤던 장면이 기억났다.

클리드와 결혼해 그를 죽일 마음을 먹은 라리에트라니,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의 공포심이 너무 컸는지, 입 밖으로 계속 라리에트의 이름을 부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가 한 말처럼 라리에트를 오로지 황녀 전하로만 봤다면, 그녀를 이름으로만 부르거나 반말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일리에.”

일리에가 오랫동안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지 못하자 슬라르한이 부드럽게 불렀다.

“네가 나를…… 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일리에의 눈동자가 슬라르한에게로 향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잠꼬대처럼 하는 말인데도…… 네가 얼마나 라리에트 전하를 애틋하게 여기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라리에트를 부르며 이엘로드 숲으로 향하던 일리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가던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넘어질 것보다 울 것이 더 걱정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목소리로 걱정하는 존재가 보통의 존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말해줄 수 있을까.”

일리에는 뭔가를 내려놓은 듯 차분히 묻는 슬라르한을 보며 가슴 한가운데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머리가 비상하고 눈치가 빠르니 자신이 이제까지 늘어놓아 온 그 조잡한 변명들이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다.

그런데도 그는 늘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도저히 묻지 않고 배길 수 없는 것이라면 ‘네가 날 믿을 수 있는 언젠가 말해달라.’라며 유예해주었다.

늘 그에게는 거짓으로만 일관하는 것 같아 그게 너무 미안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별로 다를 것도 없을 테니까.

“정말…… 저를 믿으세요?”

“믿지 않았다면 널 내 곁에 두지도 않았겠지. 이렇게나 수상한 녀석을.”

슬라르한이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황당해할 일이기는 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심지어 수상하다고 여겨지는 녀석을 어떻게 덜컥 심부름꾼으로 쓸 생각을 했을까.

“다만 내가 아직 네게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게 좀 미안하지.”

“그, 그런 게 아니고요…….”

“눈치 보라고 한 말 아니다. 그저 내 진심일 뿐이야.”

일리에를 심부름꾼으로 쓰기 시작한 게 충동적인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후로 일리에가 보여준 행동을 생각하면 그건 신의 한 수였다고 할 만했다.

타리크쯤 되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저를 위해 목숨까지 담보를 삼아가며 위험을 무릅쓸까.

타리크는 받아갈 보상이나 있지, 일리에는 딱히 그런 걸 바라고 하는 짓도 아닌 것 같았다.

슬라르한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일리에는 미안한 듯 한참 손가락만 꼼질대고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언젠가…….”

“음?”

“언젠가 모든 일이 다 끝나면요…….”

“끝나면……?”

“그때 다 말씀드릴게요. 약속해요.”

슬라르한의 얼굴이 굳어가자 일리에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지금 말씀드리지 못한다고 해서 절대 주인님께 나쁜 일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지금은……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내년 말 겨우살이 축제까지만, 그때까지만 저를 조금 더 믿어주세요. 그다지 많이 남지도 않았잖아요.”

“……믿는다고 했잖아. 겁먹지 마라.”

슬라르한은 간신히 일리에를 달랬지만, 사실 겁먹은 쪽은 슬라르한이었다.

‘내년 말 겨우살이 축제까지만…….’

애써 잊고 지냈는데, 일리에는 황위 경쟁이 다 끝나고 나면, 그리고 자신의 몸값을 다 털고 나면 멀리 떠나겠다고 했다.

전에는 일리에가 떠나는 날이 황위가 정해지는 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몸값을 다 털어내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그건 전적으로 일리에의 공로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런 공로가 4천5백만 페르소도 안 된다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니, 정말로 내년 겨우살이 축제에서 자신이 황위 계승자가 된다면…….

‘일리에가 떠난다고……?’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생리적인 거부감이 몰려왔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술이 바싹 말랐으며 목구멍이 조여오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혹시, 내년 이후로도 그냥 내 옆에 있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냐?”

전에도 한 번 물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 일리에는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 지금의 일리에 역시 긍정적인 대답을 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쓸모를 다한 제가 더 붙어 있어서 뭐 좋을 게 있다고요. 괜히 남들 눈에 거슬리기만 할 거예요. 절 거둬주시려는 주인님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아마…… 제가 떠나는 게 나을 겁니다.”

일리에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선득한 기운이 그의 심장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럼…… 정말로 내가 황위를 잇게 된다면…… 너와 함께할 수 있는 날은 고작 1년 반도 안 남은 거구나.”

시간의 길이를 문자화해서 입 밖으로 내자 마치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었다.

일리에와 함께할 날이 이렇게나 짧을 줄은 몰랐다.

저에게 있어 일리에가 이렇게 소중해질 줄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일리에가 베델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혹시 그와 함께 멀리 떠날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떠날 때는 누구와 함께 갈 거냐?”

치졸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질척거리는 마음도 감추지 못한, 전혀 신사답지 못한 질문…….

베델과 함께 떠난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지금 이대로 마음을 죽여야 할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고백해야 할까.

아, 그것도 너무나 비겁한 생각이었다.

주종 계약에 묶여 있는 여자에게 그 주인 되는 인간이 ‘널 원한다.’라고 하면, 그 여자는 뭐라고 답해야 한단 말인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일리에의 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일리에는 씩 웃으며 말했다.

“혼자 떠날 거예요. 멀리 떠나서, 양이라도 치면서 살려고요.”

“혼자…… 양을 친다고…….”

일리에는 방금 자신이 한 대답이 슬라르한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선사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네. 한 번쯤은 한적한 산골에서 양이나 치면서 조용히 살아보는 게 꿈이거든요.”

“얼마나 오래?”

“글쎄요. 한…… 3년쯤? 제 성격상 그쯤이면 지겨워져서 다시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3년 정도는 꼭 조용히 살아보고 싶네요.”

일리에는 흐뭇한 상상을 하며 몽글몽글한 미소를 피웠다.

“그래. 알았다.”

“어, 그, 그럼…… 내년 말까지는 그냥…… 저, 믿어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지. 네가 날 배신할 리는 없잖나. 네가 누구의 피를 먹었는지 그리 잘 기억하고 있으니…….”

“어…… 그, 그렇죠…….”

여전히 테르소의 일을 잊지 않은 슬라르한의 뒤끝에 일리에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 * *

일리에와 슬라르한이 다사다난한 와중에도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사교계도, 종교계도, 황실도, 평민 사회도 다 나름의 일로 바빴다.

슬라르한이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일은 필로코스 왕국의 왕세녀가 된 캐롤린 올리비에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를 왕세녀로 결정한 필로코스 국왕이 내부의 불만을 쳐내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아이리스가 그녀와 접촉했다.

그러나 그 후에 어떻게 됐다는 소식은 없었다.

‘당연하지. 아이리스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네.’

일리에는 바사르의 날을 반짝반짝하게 닦으며 혼자 키득댔다.

황녀, 그것도 많은 귀족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제1 황녀로서 공작 부인을 꼬드기는 것쯤이야 우습게 여겼을 테다.

올리비에 공작 부인과 안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괜찮은 보석을 내어주며 잘 달래면 서로 적당한 약속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위가 완전히 달라진 캐롤린은 이전과는 딴판이 되었을 게 뻔하다.

전생에 자신이 찾아갔을 때는 현관에 마중을 나오지도 않았었다.

대화 내내 관심 없다는 듯 제 손톱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바뀐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듯 손님인 제가 앞에 있는데도 필로코스에서 왔다는 편지를 계속 받아보았다.

제가 그랬듯 아이리스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어제는 라반이 올리비에 공작 저에 찾아갔다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거기에 대한 소문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라반의 성격상 일이 잘 풀렸다면 당장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을 테니, 캐롤린이 라반 역시 쳐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르 역시 실패할걸. 아니, 네 후보 중 엘로르가 제일 어려워할 일이지.’

황위를 위해서라면 자존심쯤은 잠시 접어둘 수도 있는 아이리스나 라반에 비해 엘로르는 절대 자존심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슬라르한이 자존심을 굽히고 조아리는 모습도 상상하기는 힘들었지만, 다행히 슬라르한은 굽히고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쯤 그 여자랑 만났으려나?’

일리에는 말끔해진 바사르를 햇빛에 비춰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슬라르한은 올리비에 공작 저의 응접실에서 20분째 캐롤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황위 후보인 공작이 미리 약속을 하고 왔는데도 한참 기다리는 이 상황이 두려울 만도 하건만, 주변의 사용인들은 자신이 마치 왕실의 시녀나 시종이라도 된 듯 고고한 표정들이었다.

아마 아이리스나 라반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쳤을 테고, 그들은 공작 부인이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한 뒤 근처에서 서 있던 하인에게 메모지와 펜을 달라고 한 뒤, 그 자리에서 간단한 메모를 작성한 후 미련 없이 일어섰다.

“공작 부인께서 상당히 바쁘신 모양이군. 약속 시간도 잊어버릴 정도라니…….”

“최근 필로코스의 일로 상당히 바쁘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바쁘기는 나도 매한가지라서 말일세. 메모를 남겼으니 부인께 전달해 드리게. 나는 이만 가봐야겠군.”

슬라르한은 아쉬운 게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응접실에서 나왔다.

응접실에서 그의 동태를 살피던 하인은 그가 멀어지자마자 부리나케 캐롤린의 방으로 달려갔다.

“마님! 벤티악 공작께서는 메모 한 장만 남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뭐? 참 나, 그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어떻게 황제가 되겠다고…….”

자신의 방에서 한가로이 책이나 읽던 캐롤린은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인이 건네는 메모를 펼쳤다.

그러나 삐딱하게 사선으로 기울었던 그녀의 입꼬리가 점점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인께서 핑크 다이아몬드를 컬렉션에 들이고 싶어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나 많이 바쁘신 모양이군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연락해 주십시오.

추신. 다만, 찾는 분들이 너무 많으니 기다려 드리는 건 사흘을 넘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캐롤린은 ‘핑크 다이아몬드’라는 부분을 손끝으로 짚어가며 두세 번 확인했다.

당연히 그저 그런 돌덩이를 들고 와 수지타산 맞지 않는 제 입장만 나불댈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판이었다.

“피, 핑크 다이아…….”

“예?”

옆에서 하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지만 캐롤린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던 핑크 다이아몬드인가.

그 어떤 보석이든 10캐럿 이하로는 들이지 않는 자신의 보석 컬렉션을 위해 10년 넘게 알 굵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찾아 주변 나라의 경매장까지 다 뒤져왔다.

하지만 애초에 잘 발굴되지 않는 핑크 다이아몬드는 1, 2캐럿짜리조차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컬렉션에 대해 알고 왔다면 슬라르한이 들고 온 핑크 다이아몬드 역시 10캐럿 이상일 확률이 높았다.

“이건 무조건 잡아야 해!”

캐롤린은 벌떡 일어나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고귀한 부인이 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 따위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벤티악 공작을 붙잡아! 얼른!”

캐롤린의 목소리가 저택 안을 카랑카랑 울렸다.

그녀의 전에 없이 다급한 태도에 사용인들도 그제야 허둥거리며 현관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럴 줄 알고 일부러 천천히 마차를 향해 걷고 있던 슬라르한은 뒤에서 하인이 두 번 부를 때까지 돌아보지도 않고 딴청을 피웠다.

“벤티악 공작 각하!”

“아……! 날 불렀던가? 정원이 아름다워 잠깐 정신을 뺏겼네. 무슨 일이지?”

“헤엑, 헤엑…… 가, 각하…… 부, 부인께서…… 뵙자고…….”

“흐음…… 하지만 나도 다음 일정이 있어서…….”

“부디, 조금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각하.”

하인은 헥헥대면서도 절박하게 매달렸다.

슬라르한은 다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하며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응접실로 들어서자 캐롤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제가 너무 늦었죠? 금방 처리하고 온다는 게 일이 너어무 밀려서 그만…….”

“바쁘시면 다음에 뵈어도…….”

“아뇨, 아뇨!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손님 대접도 못 하고 그냥 보내 드릴 수야 있나요.”

아이리스 앞에서도 도도하게 굴었다는 공작 부인이 마치 누가 그랬냐는 듯 살갑게 굴었다.

그리고 차 한 잔 내오지 않았던 아까와는 달리, 하녀가 차는 물론이거니와 3층으로 된 티푸드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슬라르한은 짐짓 못 이기는 척하며 자리에 앉아 공작 부인이 직접 따라주는 차를 받았다.

그녀는 슬라르한이 차를 한 모금 다 마실 때까지도 참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아까 남겨주신 메모를 봤는데…….”

“아, 보셨군요.”

“정말로, 핑크 다이아몬드를 갖고 계세요?”

“뭐, 어쩌다 보니 손에 넣게 됐습니다만, 저야 보석에 문외한이기도 하고, 저희 가문에 보석을 아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그러다 부인의 보석 컬렉션이 유명하다는 얘기도 듣고…… 하필 핑크 다이아몬드만 빠져서 애타게 찾고 계시다는 얘기도 들어서…….”

그 말에 캐롤린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정말 잘 찾아와 주셨어요, 공작님. 세상에, 제 얘기를 기억까지 해주고 계셨다니, 너무나 감사드려요.”

“부인의 보석 컬렉션이 워낙에 유명한 거죠. 그 어떤 나라의 왕실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컬렉션이라고 들었습니다.”

“호호!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 여기저기서 인정받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셨듯 10캐럿 이상의 핑크 다이아몬드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요.”

“워낙에 귀한 다이아몬드다 보니 원석이 발견되면 최대한 잘게 쪼개 각지로 판매한다더군요. 그래도 공급이 수요를 전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지만 저는 10캐럿 이상은 되어야 보석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슬라르한은 다시 차를 들이켜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캐롤린은 일을 질질 끄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슬라르한 쪽으로 좀 더 몸을 당겨 앉았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단도직입적으로 여쭐게요. 몇 캐럿인가요?”

“100캐럿입니다.”

“네? 1……캐럿?”

“100캐럿이요. 부인께서 10캐럿 이하는 쳐다보지도 않는 분이라는 걸 아는데 왜 1캐럿짜리를 가져오겠습니까?”

캐롤린은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해졌다.

“다만 원석에서 갓 떼어낸 수준이라 연마하고 나면 캐럿은 더 떨어질 겁니다. 그래도 최소 80캐럿 이상은…….”

“살게요.”

슬라르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캐롤린이 다짜고짜 구매 의사를 밝혔다.

“얼마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흐음…… 제가 보석의 시세에도 어둡다 보니 일단은 보석상에 가서 물어봐야…….”

“마지막 거래가 있었던 10캐럿짜리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 가격이 10억 페르소였어요. 제가 보석과 관련해서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캐롤린은 그가 보석상에 갔다가 다른 이의 꼬임에 넘어갈까 봐 몸이 달았다.

핑크 다이아몬드는 부르는 게 값이다 보니, 보석상에서도 어떤 출혈을 감수하고도 사들이려 할 터였다.

해당 보석상과 연결된 다른 가문에 연락이 들어갈 확률도 아주 높았고 말이다.

“하지만 제가 가진 건 원석이기도 하거니와 보석의 크기가 커지면 가격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고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사실 그 누구라 하더라도 공작님께서 가진 그 물건의 가격을 한 번에 다 치를 수는 없을 겁니다. 아마 수표를 써야 하겠죠. 치를 능력들이야 다들 비슷비슷할 거예요. 어쩌면 쪼개 팔기를 요구할지도 모르고요.”

얼마 전에 핑크 다이아몬드를 구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명단을 본 적이 있었다.

다들 자금력 빵빵하고 한가락 한다는 집안들이었다.

그중 첫 번째가 되어야만 했다.

캐롤린은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자금과 그 외로 슬라르한에게 제시할 수 있는 이점을 열심히 계산해 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제안했다.

“저는 수표에 더해, 벤티악 공작님의 든든한 우방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우방이라…….”

“얼마 전 아이리스 전하와 라반 전하께서 다녀갔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분들로부터 미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경쟁자들의 얘기를 듣고도 슬라르한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차를 들이켤 뿐이었다.

캐롤린은 다급해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필로코스의 왕세녀가 되었다는 소식은, 공작께서도 들으셨겠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필로코스의 왕세녀로서 제가 공작님을 돕겠어요. 이 정도의 약속이라면, 핑크 다이아몬드의 주인으로 절 낙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슬라르한은 캐롤린의 완전히 달라진 태도에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사실 그에게 핑크 다이아몬드란 색깔이 조금 들어간, 투명한 돌덩이에 불과했다.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비싼 돌덩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기준에서는 석탄이나 철광석, 의료 약재나 무기 등보다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런 돌덩이에 눈이 돌아가 자국의 미래까지 걸다니…….

너무 튕겼다간 캐롤린이 앵돌아질 것 같아 적당히 유하게 대응했는데, 아예 턱을 치켜들고 무례하게 나왔어도 그녀가 매달렸을 것 같았다.

어쨌든 이쯤이면 됐다 싶었던 슬라르한도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겠다니, 저도 부인의 호의에 합당한 대답을 드려야겠군요.”

캐롤린의 얼굴이 부푼 희망과 기대에 물들었다.

“수표는 됐습니다. 단,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의 우군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생각보다 빠른 시일 안에 제가 부인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겠군요.”

“기꺼이 돕겠습니다!”

“아마…… 현 필로코스 국왕 폐하를 설득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어떤…… 설득을 말씀하시는 거죠?”

“군사 동맹 쪽입니다.”

캐롤린이 멈칫했다.

기껏해야 후보 평가 위원회에 소속된 귀족들에게 슬라르한을 밀어주는 일 정도를 생각했더니, 슬라르한이 꽤 심각한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설마, 황위를 얻지 못하셨을 때를 대비하시려는 건…… 아니죠?”

반란을 일으키려 하냐는 질문을 부드럽게 돌려 하는 캐롤린에게 슬라르한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벤티악 공작가는 그 이름이 다할 때까지 황실에 충성합니다. 반란이라니, 말도 안 되죠. 오히려 파르디나스를 지키기 위한 일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원하시는데요?”

“파르디나스 북부와 맞닿은 필로코스 남쪽 지역의 군사력 정도를 원합니다.”

그 얘기에 캐롤린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쪽이 좀 골치 아프긴 하죠.”

“어차피 필로코스 쪽에서도 한 번쯤 손을 쓰려 했을 겁니다. 힘을 합치면 훨씬 낫겠죠.”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던 캐롤린이 마침내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저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네요.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슬라르한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새로운 동맹 관계를 약속했다.

* * *

“뭐? 벤티악 공작이?”

필로코스 왕국의 왕세녀이자 올리비에 공작 부인인 캐롤린이 슬라르한의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금세 사교계에 퍼졌다.

엘로르가 그녀를 찾아가도록 설득하려던 클리드는 정보원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닭 쫓던 개처럼 황망히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하필이면…….”

아이리스를 앞에 두고도 오만하게 굴었다는 캐롤린이니 엘로르가 그 자리를 얌전히 버틸 거라는 기대는 사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라르한이 필로코스 왕세녀의 손을 잡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라반이 비굴하게 굴어 그녀의 마음에 들었으면 했건만…….

“설마 그 벤티악 공작께서 누군가에게 굽실댔을 리는 없고…… 뭐가 먹힌 거야?”

“핑크 다이아몬드랍니다.”

“핑크 다이아몬드? 그게 어디서 나서?”

“롤랑 백작가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소량 나왔다는 것 같습니다.”

“하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운이 좋을 수가……!”

클리드는 정보원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캐롤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핑크 다이아몬드가 롤랑 백작가의 광산에서 발견되고, 그게 또 슬라르한의 손에 떨어지다니…… 누가 이 상황을 노리고 연출했대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롤랑 백작도 대단하군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핑크 다이아몬드라면 욕심이 났을 법도 한데.”

“벤티악 공작이 황제가 되었을 때 얻을 이득이 더 클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요.”

“하긴 그렇지. 그 벤티악 공작이 설마 이런 공로를 잊겠어? 차고 넘치도록 보답해 주겠지.”

클리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슬라르한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지나치게 깨끗한 성품’은 의외의 부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런 신뢰를 얻지 못했다면 롤랑 백작도 핑크 다이아몬드를 기꺼이 건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는 믿지 못할 사람에게 제 운명을 걸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지금 왜 갑자기 일리에의 그 말이 떠오르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의 관계를 주의 깊게 살펴.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알려라.”

“예, 알겠습니다.”

정보원을 돌려보내고 난 클리드는, 믿지 못할 자신의 주군과 그 주군을 기만할 생각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이 참 우습다고 생각하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

* * *

황제 후보들과 귀족들까지 대거 모였던 엘라니쉬 신전에 흑마법사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대주교 헤스페리아를 비롯해 많은 사제들에게 심각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수도권의 주교들을 소집한 헤스페리아는 엘라니쉬 신전과 산하 신전 내의 대대적인 정화를 명했고 교황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서신을 띄웠다.

그러나 주교나 사제 중에는 헤스페리아와 생각이 다른 이들도 꽤 있었다.

“답답하긴. 그 정도의 흑마법이 뭐가 두렵다고 저 난리랍니까? 그리고 흑마법사를 경계할 거라면 일반 마법사도 똑같이 경계해야지, 왜 흑마법만 악으로 싸잡아 때립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흑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악마에게서 힘을 빌려온다고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솔직히 흑마법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황실보다 더 권력을 잡고 싶어서 흑마법을 꼬투리 잡는 거겠죠. 어떻게 보면 엘로르 전하께서 더 교황에 어울리는 신심과 자비심을 가지신 것 같다니까요.”

맥클리어를 통해 엘로르로부터 값비싼 보석을 ‘헌납’받은 주교와 사제들은 저들끼리 모여 헤스페리아에 대한 성토를 이어갔다.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맥클리어는 침통하게 말했다.

“엘로르 전하께서는 황녀라는 자신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숨은 다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동안 가난한 자와 기댈 곳 없는 자들 곁에 발 벗고 달려가셨습니다.”

사제들은 엘로르가 괴질이 발생한 빈민가를 시작으로 해서 고아원과 신전의 구휼원에 봉사를 다니고 귀족들의 지원금을 모아 평민 학교를 지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전까지 그녀의 별명이 ‘밤에 피는 장미’였다는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구태의연한 노인네들은 자신들이 쥔 한 줌의 권력을 놓기 싫어 하찮은 것을 핑계로 새로운 물결을 막으려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백성들의 열망을 계급과 권력으로 내리누르려는 거지요.”

맥클리어의 분에 찬 목소리에 함께 모인 사제들은 다들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가 주장하는 바를 언뜻 듣기에는 늙고 탐욕스러운 종교계의 원로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폭거를 자행한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헤스페리아는 종교에 몸담은 이래 일생토록 신전에서 나온 것 외의 그 어떤 것도 따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방에는 낡고 딱딱한 침대 하나, 사제복 서너 벌과 속옷 몇 벌을 담은 작은 장롱 하나, 오래전에 그녀가 직접 떠서 만든 숄 하나와 손때 탄 경전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싼 것은 전대 대주교가 물려준 마석 묵주 반지 하나가 전부였다.

그녀의 권력 역시 그런 청빈하고 신실한 삶 때문에 얻은 것이지, 권력자에 대한 로비로 얻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권력으로 행한 일이라고 해봐야 신전 안팎에서 벌어진 소란의 정리라든가 부정한 일들의 처벌 정도였다.

그녀의 인생은 온전히 야나크 교와 엘라니쉬 신전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에게 그런 진실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런 사람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게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야말로 백성들이 원하는 신앙의 중심이 될 사람들입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젠 야나크 교의 중심층이 좀 더 젊어져야 합니다. 변화를 빠르게 수용하고 능력 있는 사제들이 주교가 되어야죠!”

대부분 3, 40대인 사제들이 거침없이 자신들의 속내를 밝혔다.

보통 사제가 주교가 되기 위한 자격을 얻으려면 20년 이상의 수련 기간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고, 기간이 긴 이유는 이미 요직을 차지한 원로들이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자신들의 차례가 뒤로 밀리는 것은 오로지 윗대의 쓸데없이 긴 명줄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파르디나스 제국의 제18대 황제가 되실 엘로르 전하와 손을 잡고 종교계의 부패를 쓸어내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맥클리어의 선언에 모인 사제들은 우렁차게 박수를 치며 그의 결정에 환호했다.

그러나 그중 똑똑하고 눈치 빠른 누군가는 맥클리어가 어떤 방식으로 전심전력을 다할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의 어떤 도움을 바라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맥클리어는 미소를 서서히 거두며 목소리를 낮췄다.

“각 신전의 신도들과 사제들을 설득하여 저의 복위를 도와주십시오. 일단은 헤스페리아 대주교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야 우리가 바라는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주교의 선종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벌어질 혼란을 재빨리 수습해 주십시오.”

맥클리어가 처음에 그랬듯, ‘대주교의 선종’이라는 말에 다른 사제들 역시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슬쩍 뒤로 물러섰다.

“서, 선종이라니요?”

하지만 이미 그 과정을 한 번 지났던 맥클리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사를 뒤져보십시오. 변혁이 일어날 때 희생이 따르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까? 낡은 것이 무너져야 그 토대 위에 새로운 것이 세워질 수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헤스페리아 대주교께서는 나름대로 업적을 쌓아오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사제께서는, 구세력을 그대로 놔두면서 우리가 바라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거기에는 반박하던 이의 입도 다물렸다.

그들이 바라는 종교 내 권력 교체를 위해서는 기존 권력자들이 사라지는 과정이 필수적이었으니까.

그게 구세력의 죽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죽지 않고는 제 권력을 놓으려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긴 침묵 끝에 맥클리어가 사제들을 다독였다.

“물론 마음이 무거울 것임을 잘 압니다. 나 역시 헤스페리아 대주교님을 존경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할 대상은 대주교가 아닌,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엘로르 전하께서도 도와주시기로 하셨으니, 너무 걱정들 마시고요.”

엘로르가 돕기로 했다는 말에 사제들의 얼굴에는 옅게 화색이 돌았다.

기존의 권력을 무너트리고 새 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또 다른 권력이 자신들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안도하는 기색을 확인한 맥클리어는 좀 더 대담하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오늘 우리의 대화에 적극 의견을 내어주실 분들을 좀 모셨습니다. 엘로르 전하께서 이끄는 봉사단의 우수 회원분들이십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있던 사제가 집무실 안쪽에 달린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인사들 나누십시오. 하하하!”

사제들은 맥클리어 주교의 소개라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람들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덕분에 루트 교의 흑마법사들은 손쉽게 야나크 교 사제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집무실로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자신들의 마력을 흘리고 있었지만, 신력 있는 사제가 하나도 없는 그 방에서는 다들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 * *

올리비에 공작 부인의 확고한 지지를 얻은 슬라르한이 그다음 만난 것은 헤스페리아 대주교였다.

처음에는 정치 권력과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만남을 거절했던 헤스페리아였으나, 슬라르한이 흑마법사의 존재를 안다고 하자 결국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너무 늦게 찾아뵌 것이 아닌가 싶어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공작님이나 저나, 그동안 고민이 많았지 않습니까.”

헤스페리아는 일리에를 데리고 온 슬라르한을 자애롭게 맞으며 자리를 권했다.

겉보기로는 평화로운 티타임이었지만 헤스페리아나 슬라르한의 마음은 그다지 편치 못했다.

헤스페리아는 신전 내 정화 활동 중 예상치 못하게 불만을 가진 사제들과 맞닥뜨리고 있었고, 슬라르한은 흑마법사가 어떻게 또 일리에에게 마수를 뻗을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었다.

“편지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벤티악 공작께서 문제의 그 흑마법사를 직접 보셨다고요.”

“얼마 전 수도가 떠들썩했던 사건입니다만, 이엘로드 숲에서 발견된 오두막 얘기를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예. 끔찍한 사건이었죠. 저희 신전 사제님을 파견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기도를 올리도록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길 발견하신 분도 벤티악 공작이셨죠?”

“예.”

슬라르한은 아직도 그날의 분노가 다 풀리지 않은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날 그 오두막에서 저는 악랄한 흑마법사와 그가 연구하던 무언가를 놓쳤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얼굴만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굉장히 민감한 내용이라 여태 함부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대주교님께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흑마법사는, 엘로르 전하의 측근 시녀인 해리엇 아일입니다.”

“2황녀 전하의……!”

헤스페리아가 탄식했다.

맥클리어는 ‘떠돌아다니는 흑마법사’일 것이라며 엘로르와 흑마법의 관계를 부정했지만, 저에게 미리 흑마법사의 존재를 경고하던 편지의 내용이 맞았다.

“엘로르 전하가 흑마법사를 끌어들인 지 꽤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두막을 발견한 날 밤, 그 여자의 사악한 힘에 희생될 뻔한 건 바로 제 심부름꾼인 이 아이였습니다.”

슬라르한의 설명에 헤스페리아의 시선이 일리에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그녀의 질문에, 일리에는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그렇다고 장난기를 섞지도 않은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신 지배 마법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나요?”

“오, 세상에…….”

“제가 자다가 일어나 몽유병 환자처럼 그 숲으로 걸어가더랍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굉장히 두렵고 초조한 꿈을 꾸고 있었지요.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는 반드시 이엘로드 숲으로 가야만 제가 걱정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주인님께서 저를 깨우려고 하셨을 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주인님을 해쳐서라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만큼이요.”

사실 그때는 슬르라한을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고 저를 흔드는 게 굉장히 불쾌하고 화가 났다.

얼른 가서 라리에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꽉 차서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헤스페리아는 손목에 감고 있던 낡은 묵주를 풀어 손에 쥐고는 나무 구슬을 하나씩 세어가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제가 주교 서품을 받을 당시, 운 좋게도 악의 정화에 특기가 있는 분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흑마법에 대해서도 남들보다는 자세히 알게 되었죠.”

자신도 그때 흑마법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더라면 흑마법에 대해 맥클리어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육을 담당했던 주교에게서 흑마법의 본질이나 그 끔찍한 술법의 역사를 배운 뒤로는 거기에 절대 너그러워질 수 없게 되었다.

“흑마법은, 일반 마법과는 완전히 달라요. 보통의 마법이 자연의 힘을 조금 뒤트는 것에 불과하다면, 흑마법은 자연의 힘과는 아예 상관없이 악마의 힘을 빌려옵니다. 그러니 일반 마법보다 더 강력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거죠. 하지만 그만큼 이 세상에 악의 힘이 스며드는 겁니다.”

“흑마법을 쓰는 것만으로도 악마의 힘이 지상으로 새어 나온다는 말씀인가요?”

일리에의 질문에 헤스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금기인 겁니다.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무슨 핑계를 대든 지상의 생명체에게 위협이 되는 일이에요.”

헤스페리아와 슬라르한, 그리고 일리에는 각자 조금씩 결이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슬라르한이었다.

“그 흑마법사는 상당히 높은 서클의 보유자입니다. 그리고 키메라 제작에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키메라요? 세상에, 갈수록 가관이로군요.”

일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키메라가 뭔데요?”

“시체를 조합한 존재랄까. 이미 죽은 것이지만 마력에 의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왜 굳이 시체를 조합하나요?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저한테 건 것처럼 정신 지배를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조금 달라. 살아 있는 인간의 정신 지배에는 시전자 본인의 마력이 일정 부분 들어간다. 하지만 시체인 키메라는 마석의 마력으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거든. 게다가 고통을 느끼지도 않지. 자신이 원하는 존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동물을 죽여서 제 입맛대로 조립한다는 소리예요? 끔찍해요.”

“상상하기도 싫지만, 동물만 쓰지는 않은 것 같다.”

“예?”

일리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가 곧바로 이엘로드 숲의 오두막에서 무엇이 발견됐는지 떠올렸다.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오두막 한쪽에 파인 구덩이 안에는 조각조각 분해된, 수많은 사람 시체가 발견됐다고 했다.

“으…… 토할 것 같아요.”

흑마법사가 저를 노리고 있는 데다 정신 지배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슬라르한이 저를 잘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삐끗했다면 제 몸 역시 갈기갈기 분해되어 구덩이 안에서 썩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슬라르한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만, 카제야의 실험에나 쓰여 버려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잔뜩 일그러진 일리에의 표정에 헤스페리아가 차를 한 잔 더 따라주었다.

“누가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그렇기에 키메라는 고위 흑마법이고 악마에게서 빌리는 힘 역시 큽니다. 그 정도라면 아마 그 흑마법사의 영혼은 거의 전부 악에 물들었을 겁니다.”

“악마에 가깝다는 건가요?”

“악마의 하수인에 가깝다고 해야겠군요. 인간 자체는 무슨 짓을 하든 악마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유한한 신체와 영혼 때문이죠.”

일리에는 전생의 카제야를 떠올렸다.

이제야 그녀가 자신의 나라가 아닌, ‘리카온의 나라’를 만들겠다며 떠들어댔던 게 이해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리카온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것이고, 마치 리카온의 수족처럼 리카온이 강림할 나라를 만드는 데 제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악마에게 정신을 지배당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꼴이 되면서까지 흑마법을 쓰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전생의 자신이나 카제야나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싶었다.

저 역시 클리드의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서는 그게 꼭두각시 짓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모른 채 클리드의 수족이 되어 참 열심히도 살았다.

클리드의 두뇌가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해서는…….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로 클리드의 말에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카제야는 고위 서클의 흑마법사로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을 테고.

악마의 추종자로 살길 선택한 카제야보다는 제 처지가 조금 나은 것 같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리에의 안색을 살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막아줄 테니까.”

그 소리에 또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헤스페리아의 앞이라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일리에는 제 무릎을 꽉 쥐었다.

하지만 헤스페리아는 일리에보다는 슬라르한 쪽에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2황녀 전하의 측근 시녀가 흑마법사라는 것을 아신 뒤 황실에는 말씀을 드렸나요? 황제 폐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흑마법을 황위 경쟁에 끌어들였다는 것은 어떻게 보든 간에 잘못된 일이지 않습니까. 분명 법전에도 관련 항목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법이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법을 휘두를 수 있게 허락받은 것은 황제 폐하 한 분뿐인데요. 그리고 제 백부께서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자신의 권력에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흑마법이든 무엇이든 상관치 않는 분이십니다.”

“네?”

“엘로르 전하께 흑마법사를 떼어내려다 황제 폐하께 흑마법사를 붙이는 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제가 이 얘기를 발설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경악할 만한 이야기를 들은 헤스페리아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로 자신이 너무 오래 현실 세계와 유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나라 전체가 타성에 젖었죠. 어떻게 보자면 태평성대가 이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요.”

“그 말씀은 우리 교단에도 적용할 수 있겠군요.”

착잡해하는 두 사람을 곁에 두고 일리에는 더 골치 아픈 얘기를 꺼내야 해서 조금 곤란했다.

하지만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얘기였다.

“저기, 죄송한데…… 다른 문제도 좀 있거든요. 혹시 루트 교라고, 들어보셨나요?”

“루트 교?”

슬라르한과 헤스페리아가 동시에 물었다.

아직은 지방에서만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고 있을 테니 대주교나 공작이라 하더라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을 신봉하는 종교거든요. 흑마법사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반드시 이 종교의 힘을 빌릴 겁니다. 어쩌면 본인이 그 종교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사실은 교주지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답할 말이 궁했다.

“신도님께서는 그걸 어디서 들은 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헤스페리아가 곧바로 물었다.

“어…… 그러니까…….”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살던 덕분인지 저도 모르는 걸 많이 알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렇지, 일리에?”

“아, 네! 하하…….”

뜻밖에도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궁지에서 꺼내주었다.

‘얘가 왜 이러지? 저도 나한테 물어보고 싶을 거면서…….’

고맙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일리에가 의아해졌다.

어쨌든 지금은 이 문제에 정신을 빼놓을 때가 아니었다.

일리에는 다시 헤스페리아에게 당부했다.

“하여튼 그 루트 교에서 제일 먼저 대주교님 같은 분을 목표로 삼고 공격할 겁니다. 야나크 교의 사제나 신도들 중에도 루트 교의 교리에 빠진 이들이 있을 테고요. 그들을 이용해 물리적인 공격을 감행할지도 모르니, 대주교님께서도 조심하세요.”

“엘룬을 섬기는 자들이, 악마를 신봉하게 됐다는 말씀입니까?”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헤스페리아의 얼굴에는 이제 미소는커녕 생기 한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일리에더러 야나크 교단에는 그럴 사람이 없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저부터가 맥클리어 주교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교단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이 정도의 일에 좌절하고 실망했다면 지금껏 사제로 살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될 시점이 왔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사실 교단의 부정부패나 사제들의 파계 행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실제로 목격한 것만 세어도 두 손, 두 발이 모자랄 정도니까.

역사가 오랜 것이 야나크 교의 자랑이라지만, 그건 고인 물이 썩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몇 번인가 교황청에 시정 명령을 내려달라고 편지를 띄워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 이번 일도 교황청에서 외면할까 봐 두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강경한 어조를 썼는데, 알고 보니 강경한 어조도 부족할 정도의 상황이었다니…….

그녀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지만 엘로르가 교단에서 득세하려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은 슬라르한밖에 없는 것 같았다.

“대주교로서 드릴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제가 방법이 없군요. 벤티악 공작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드리길 원하십니까?”

“파르디나스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황제이듯, 야나크 교의 최고 통치자는 교황입니다. 교황께서 움직이셔야 이 거대한 문제를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부디 교황 성하를 설득해 주십시오.”

슬라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교황과도 손을 잡게 된다면 과연 황제가 가만둘 것인가가 문제였다.

지금 황제가 슬라르한의 승승장구를 놔두고 있는 것은 아무리 슬라르한의 세력이 커져 봐야 황제인 자신만 못하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나크 교가 엘로르가 아닌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된다면 저울은 크게 휘청일 것이 분명했다.

그때 고민하는 슬라르한을 놔두고 일리에가 나섰다.

“저희 주인님께서도 위험을 무릅쓰셔야 하는 일이니만큼, 대주교님께서도 저희 주인님께 그만한 대가를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평민 심부름꾼이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건방진 말이었다.

“일리에……!”

슬라르한이 낮게 일리에를 부르며 말리려고 했지만 일리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슬라르한의 무릎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헤스페리아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헤스페리아 역시 조금 놀란 것 같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도 공짜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가 벤티악 공작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일리에가 조금 더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제국의 모든 지역마다, 다른 건 몰라도 신전은 하나씩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럼, 대주교님의 권한으로 다른 교구의 소규모 신전에 작은 부탁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주교들은 모두 동일한 권한을 갖기에, 제가 다른 주교님의 우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주교님들이 계시는 큰 지역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요, 사제님이나 수도사님들이 계시는 작은 신전에요.”

“글쎄요…… 어떤 부탁이냐에 따라 좀 다를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일리에는 ‘이 녀석이 또 무슨 짓을 벌이려나.’하고 생각하는 게 뻔한 슬라르한의 표정을 흘끗 살피다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누굴 좀 찾아야 하는데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인데, 아마…… 인적 드문 마을에 숨어 살고 계실 것 같거든요?”

“정확히 누굴 찾으시는 겁니까?”

“……벤티악 공작 부인을 지키고 있는 벤티악 가문의 기사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제야 슬라르한의 눈이 커졌다.

“너…… 어떻게……!”

자신도 잠시 잊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일리에는 그 일을 한시도 잊지 않은 듯, 기회가 오자마자 붙잡고 있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우리 주인님이 황제가 되시는 날만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런데 만약 그분들이 황제 폐하께 먼저 발각된다면 주인님이 아주 곤란해지시거든요. 지금의 황제 폐하가 또 주인님을 쥐고 흔들려고 할 거예요.”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헤스페리아였지만 현 황제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동의했다.

“사람을 찾는 정도의 부탁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일리에가 밝게 웃었다.

제국에서 차기 교황감으로까지 거론되는 헤스페리아가 나서준다면 벤티악 전 공작 부인과 기사들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이런 내용의 메시지를 소규모 신전에 전달해주시겠어요?”

일리에는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지에 간단한 메모를 적어 헤스페리아에게 건넸다.

헤스페리아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메모였지만, 슬라르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대주교를 방문한 것은 비밀이었기에 슬라르한과 일리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슬라르한은 어떤 생각에 빠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리에는 그 자리가 가시방석 같아 괜히 쓸데없는 말도 던져보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기도 했지만, 슬라르한은 창밖을 바라보며 답이 없었다.

그러다 마차가 저택에 가까워가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일리에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의 오래된 암호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어도…… 네가 대답해 주기는 힘들겠지?”

역시 그 문제였구나 싶었다.

당연히 말해주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생에 자신이 황제가 된 뒤 벤티악 공작가를 완전히 박살 내면서 찾아낸 암호첩을 보고 안 거였으니까.

“음…… 이것도 언젠가는 꼭…….”

“알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사단의 극비 사항을 알고 있는 게 미치도록 신경 쓰일 법했지만 슬라르한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슬라르한이 신경 쓸 것을 알고 벌인 짓이긴 했지만, 진짜로 그가 묻지 않으니 오히려 더 말하고 싶어졌다.

“정말로 절 믿어주시는 거예요?”

“믿는다.”

“제가…… 주인님의 피를 마시지 않았더라도 절 믿어주셨을까요?”

창밖으로 되돌아갔던 시선이 다시 일리에에게로 향했다.

“죄, 죄송해요. 그, 뭐냐, 절대 뭐가 섭섭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하하! 참, 당연한 말을…… 어……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냈지?”

일리에는 귓불이 벌게져서는 목 뒤를 긁적였다. 자신의 주둥이는 왜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을 내뱉어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믿었겠지.”

“……예?”

“믿었을 거라고.”

갑자기 찾아온 적막에,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왜요?”

일리에는 확신했다. 자신이 바보 같은 말을 꺼낸 건, 지금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어느 때보다 슬라르한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뭐가?”

“그게…… 그렇잖아요. 주인님께서는 아무나 믿지 않으시잖아요. 오히려 의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으니까.”

“그런데 저를 왜 믿으세요? 아무리 제가 주인님의 피를 마셨고, 주인님이 언제든 죽여 없애버릴 수 있는 존재라지만…… 제가 몰래 주인님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기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내가 널 죽여 없앤다고? 재미있는 상상을 다 하는군.”

“말…… 돌리지 마세요…… 제가 엄청 수상해 보일 거라는 거, 저도 알아요. 그래서 사실은 주인님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한 날도 많거든요. 그런데…… 제 고민이 무색하게도 주인님께서 절 너무 믿어주시니까…….”

“그래서 억울했다는 거냐, 뭐냐.”

“자꾸 오해하게 되잖아요.”

잠깐, 말이 끊겼다.

꾹 다문 일리에의 입술과 반항적인 눈빛이 슬라르한에게 뭔가 곤란한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리에에게도 곤란한 대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뭘?”

“왜…… 왜 자꾸 저한테…… 잘해주세요?”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런 것마저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걸, 일리에는 알고 있을까.

슬라르한은 당장이라도 일리에를 붙들어 내가 널 마음에 품고 있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따로 있는 일리에에게 그런 행동은 충분히 강압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슬라르한의 시선이 슬그머니 창밖으로 향했다. 그는 마차가 저택의 현관문 앞에 설 때까지 대답을 미루다가, 마부가 워어, 하며 말들을 진정시킬 때쯤 답했다.

“나도 그 ‘언젠가’가 되면 대답해 줄 수 있겠지.”

그리고 일리에의 동그랗게 커진 두 눈을 응시하다가 마차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일리에는 뭐라고 따지지도 못하고 입만 어물거리며 그에게 불만 섞인 눈빛을 보냈지만 슬라르한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계속 거기 앉아 있을 테냐.”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다.

그제야 일리에는 자신이 던진 질문이 몰고 온 후폭풍에 얼굴이 벌게졌다.

‘정말 내 주둥이는 왜 뇌를 안 거친 말을 내뱉는 거냐고!’

슬라르한은 제 마음을 눈치챘을 것 같았다.

저를 좋아하는 티가 팍팍 나는 계집애에게 차마 매정한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어서 대답을 뒤로 미룬 것일 테다.

‘쪽팔려…….’

일리에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기분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지금 이걸 보고 있다면 제발 5분 전으로만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빌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 * *

슬라르한이 올리비에 공작 부인을 포섭하고 엘로르 곁의 흑마법사에 관한 것을 알아보며 대주교까지 만나러 다니는 사이, 기존 동맹 가문들 관리는 타리크가 맡아보고 있었다.

덕분에 타리크의 인맥은 하루가 다르게 넓어졌고, 초대받는 자리도 많아졌으며, 그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슬라르한 옆에 있어서 그동안 가려졌지만 그 역시 꽤나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깨까지 기른 까만 머리칼, 짧게 다듬고 다니는 턱수염과 창기사다운 너른 어깨를 지닌 타리크는 특유의 야성미와 의외의 매너로 여성들의 엄청난 추파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디넬 경!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지난번 루엔볼린 자작 저의 연회에서 뵈었는데요.”

“아……! 분명 뵌 기억은 있습니다만, 성함이……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비비아나 린도예요. 이번에는 꼭 기억해주세요.”

“아아, 린도 자작님 댁 첫째 따님이셨죠!”

“아뇨, 둘째요.”

“이런, 두 번이나 낙제점이군요. 죄송합니다.”

“으음, 그럼 저랑 춤이라도 한 번 춰주시든가요. 디넬 경께서 춤을 그렇게 잘 추신다면서요?”

“소문이 부풀려진 것 같습니다.”

타리크는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슬라르한의 힘이 되어줄 사람이 다가오는 거야 좋은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는 건 슬라르한에게 좋은 일도 아니었고 그가 바라는 일도 아니었다.

여태 몇 번이나 기억 못 하는 척하며 여성들의 접근을 막았지만, 이번 영애는 순순히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춤을 춰주는 것이야 어려울 일도 아니었지만, 한 번 누군가와 춤추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의 청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어머, 린도 양! 오랜만이네요.”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타리크 앞에 선 영애를 불렀다.

“꺄아! 컬리넌 영애! 언제 오셨어요?”

“방금요. 파티 주최자이신 슬로언 백작 내외분께 인사드리고 왔어요. 그런데…… 무슨 말씀 나누시는 중이었나요?”

“아아, 제가 디넬 경께…….”

“어머, 타리크 님이셨군요.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타리크는 뒷모습만 봐도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엔시아는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놀란 척을 했다.

타리크는 엔시아가 저를 찾을 일이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요?”

“네! 저번에 편지로 말씀드린 일, 기억하시죠? 그 일로 조용히 말씀 좀 나눴으면 해서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에요.”

엔시아가 풍성한 드레스 치마 밑으로 타리크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생글거렸다.

“아, 아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기억력이 안 좋다니까요. 린도 양, 정말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이만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일 얘기를 우선해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 하하, 뭐, 어쩔 수 없죠.”

떨떠름하게 웃는 비비아나를 향해 엔시아가 쐐기를 박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달튼 영식이 린도 양을 찾는 것 같았는데…….”

“네? 저, 정말요? 어떡해! 저, 저는 이만 물러가 볼게요. 좋은 시간 되세요!”

약혼자를 놔두고 이 남자, 저 남자 찔러 보는 취미가 있던 비비아나는 약혼자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리에 부리나케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타리크가 머쓱하게 엔시아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컬리넌 영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편지를 따로 받았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논의해야 할 일이 있었던가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엔시아가 부채를 쫙 펴더니 입을 가리고 말했다.

“빚 갚은 거잖아요. 그것도 몰라요?”

“빚?”

“곤란할 때 도와주신 거, 한 번은 갚았어요. 이제 한 번 남았죠?”

그제야 타리크는 엔시아가 일부러 자신을 위해 나서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만면에 기쁜 듯한 미소가 퍼졌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곤란하던 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교계에서 활동하시려면 요령 있게 끊어낼 줄도 아셔야죠. 린도 영애 같은 여자들이 한둘인 줄 아세요? 이런 식으로 잡힐 때마다 다 춤춰주고 다니실 거냐고요.”

엔시아의 목소리가 왠지 뾰족했다.

그런데도 그저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던 타리크는 엔시아를 향해 팔을 내밀었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팔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늦은 말씀입니다만, 오늘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흥. 그거야 당연한 소리고요.”

“각하께서 보셨다면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한데 말이죠. 아쉽게도 오늘 각하께서는 다른 일로 바쁘셔서.”

타리크와 함께 천천히 발코니로 향하던 엔시아가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그게 왜 제가 아쉬울 일인가요? 전에도 말씀드렸듯, 저는 그분께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 결혼 동맹을…….”

“일단 제안해 본 것뿐이었어요. 그리고 공작님께서 고사하셨고요. 제 복을 제 발로 차는 사람한테 제가 왜 매달려야 해요?”

“아…… 그러셨군요.”

“네! 더는 그런 착각 하지 말아주세요. 불쾌하네요.”

“죄송합니다. 하긴…… 영애께서야 아쉬울 게 없으시죠.”

“맞아요. 아쉬울 거 없어요. 저는 이미 저 자신으로 충분히 대단하거든요.”

한때 엘로르를 이기기 위해 반드시 황후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엔시아였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축복 성사 때, 일리에가 하인 된 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눈빛으로 슬라르한을 보고 있을 때도 왠지 아무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타리크와 잡담을 나누는 게 더 재미있고 신경 쓰였으니까.

타리크는 제 주인밖에 모르는 고지식하고 세련되지 못한 사내였지만, 그래도 가끔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인적이 뜸한 발코니 근처로 나온 두 사람은 잠시 정원을 구경했다. 저녁 햇살이 내려앉은 장미 정원에는 빨간 장미가 한가득 피어 있었다.

“저걸 보니까 영애의 별명이 왜 여름 장미인지 알 것 같군요.”

“비꼬시는 건가요?”

“설마요. 장미는 여름 장미가 제일 화려하고 아름답고 생기 넘치잖습니까. 딱 영애 같아 보여서요.”

거부(巨富)인 슬로언 백작가답게, 정원에 심은 장미도 제일 비싼 종인 로사 레지나였다.

“식상한 얘기네요.”

분명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한 얘기였다. 그런데 왠지 엔시아의 뺨은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더우십니까? 뺨에 열이 좀 오르는 것 같습니다. 여름에는 저녁 햇살도 뜨거우니…… 홀로 다시 돌아갈까요?”

홀 안은 아티팩트 덕분에 시원한 기운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엔시아는 몸을 돌리는 대신 타리크의 팔을 더 강하게 붙들었다.

“됐어요. 벌써 들어가서야 아까 린도 영애에게 한 변명이 거짓말처럼 보이잖아요. 제 평판을 떨어트릴 셈이에요?”

엔시아는 별생각 없이 평소처럼 툴툴댔다. 그러나 그건 타리크에게 따끔한 통증을 선사했다.

“저와 같이 있는 게 더…… 영애의 평판에는 안 좋지 않을까요?”

“네?”

“어느 연회에서나 영애를 향한 관심이 뜨겁지 않습니까. 오늘도 영애가 여기 도착한 이후 계속 따라다니는 시선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저 같은 남자와 발코니에 따로 오래 나와 있으면…….”

멋쩍은 듯한 타리크의 목소리에 엔시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저 같은 남자’가 어떤 남잔데요?”

“아니, 뭐…… 글쎄요. 별 볼 일 없는 남자……?”

그러자 엔시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이보세요, 디넬 경. 벤티악 공작님을 황위에 앉힐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지금 본인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나 알고 계세요?”

“예?”

“디넬 경이 가진 게 별로 없는 자작이라는 건 이제 사교계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미래 가치를 내다볼 줄 알거든요. 벤티악 공작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디넬 경의 처우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질 거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고요.”

“그건…….”

“하지만 디넬 경이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사람 취급하신다면 그런 디넬 경을 대리자로 내세우고 있는 벤티악 공작님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실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타리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과거에는 디넬 자작가라는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며 제 앞에서 스스럼없이 모욕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타리크 디넬을 모르지 않는다.

호가호위라지만 자신의 처신이 슬라르한의 평판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어디서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 했다. 애초에 그 스스로도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엔시아 컬리넌 앞에만 서면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벤티악 공작가의 안주인 자리를 대놓고 요구하는 뻔뻔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엔시아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그녀가 오만하기만 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 의외로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다는 것, 전쟁이나 역사에 해박하고 관심 분야가 다양해서 배우는 점도 많다는 것, 은근히 상대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는 것, 매정한 말에 상처받지 않는 척하지만 꽤 오랫동안 아파한다는 것…….

여름 장미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겉모습 속에 숨긴 의외의 내면에, 타리크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엔시아의 생각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어쩌면 정말로 슬라르한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여잔데. 가족도, 재산도, 영지도, 명예도 없는 한미한 자작 가문 출신인 자신과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도 뻔뻔하게 느껴졌다. 제 주제에 감히 컬리넌 후작가의 고명딸을 탐내는 것 같아서.

“하긴, 다른 사람들 눈에 우리는 그저 벤티악 공작 각하의 대리자와 컬리넌 후작의 대리자로 보일 테니까 오해할 여지도 없겠네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타리크는 괜히 제 속내를 들킨 것처럼 민망해서 시선을 피했다.

덕분에 더 찌푸려진 엔시아의 고운 미간을 보지 못했다.

“애초에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참나.”

“그러게 말입니다.”

해가 저물어가며 정원에 어스름이 깔렸다. 여름 밤바람이 둘 사이를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자 은은한 장미 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말없이 어두워지는 정원에만 시선을 주며 장미 향만 맡고 있는데도 왠지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여름밤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오, 나의 로사 레지나! 여기 계셨군요!”

와인을 몇 잔 들이켠 듯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루이빌 백작가의 후계자, 다미언이었다.

작년부터 가문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는 클리드의 형인 맥시밀리언과 친한 사이였기에, 굳이 따지자면 엘로르 쪽에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연회에만 가면 엔시아 곁에 들러붙어서 꽤 성가시게 굴었다.

지금도 타리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엔시아에게만 말을 거는 모습이, 과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루이빌 영식. 죄송하지만 지금은 제가 디넬 경과 대화 중이라서…….”

“디넬 경……? 아아, 벤티악 공작이 데리고 다니는 호위였던가? 그런데 디넬…… 디넬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남작인가?”

슬라르한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는 타리크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는 의도적으로 타리크를 조롱하며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자작입니다.”

“자작이라고요? 그런데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어디, 시골 출신인가……?”

노골적인 무시에 인내심이 먼저 바닥난 건 엔시아였다.

“후계 수업을 받는다는 분께서 아직도 귀족 연감을 못 외우신 것 같군요.”

그 말에 다미언이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이, 일이 너무 바쁘니 중요하지 않은 가문쯤은 잊어버릴 수도 있는 거죠.”

“어머, 세상에! 저는 처음 뵐 때부터 디넬 경을 알고 있었는데…… 제가 루이빌 영식보다 한가해서 디넬 경을 알아뵌 걸까요?”

거기에는 다미언도 입이 다물렸다.

엔시아 컬리넌은 컬리넌 가의 아들들보다 더 발이 넓었고 참여하고 있는 사업도 많았다.

컬리넌 후작이 제 딸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인가 보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수완 좋다는 소릴 들었던 엔시아 앞에서, 고작 루이빌 백작가의 아들이 제 일정이 바쁘다고 뽐낼 수는 없었다.

곁에서 미묘한 위치가 되어버린 타리크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컬리넌 영애께서 대단하신 거죠. 바쁘신 와중에도 놓치는 게 없으니. 잘 모르신다니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벤티악 기사단의 총기사단장이자 벤티악 공작 각하의 참모로 일하고 있는 타리크 디넬입니다.”

시골의 디넬 자작가라고 한다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 벤티악 공작가 기사단의 총기사단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소드 마스터를 몇이나 데리고 있다는, 제국의 모든 귀족 가문의 기사단을 통틀어 최고라고 불리는 곳 아닌가.

그렇다면 그 본인 역시 마스터 수준에 오른 기사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다미언의 건방진 태도도 슬그머니 수그러들었다.

“아, 뭐, 저도 인사가 늦었습니다. 루이빌 백작가의 다미언입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관심사는 타리크가 아닌 엔시아였다.

“그나저나 연회를 밝혀 주셔야 할 꽃이 여기 숨어계시니 연회장이 영 재미가 없습니다.”

“제가 남의 집 연회장 분위기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영애께서는 이런 외진 곳보다 연회장 한가운데가 더 어울리시는 분 아닙니까. 드레스도 새로 맞추신 것 같은데 그것도 자세히 좀 보여주십시오.”

엔시아는 전부터 사람 성질 돋우는 말만 골라 하는 다미언을 어디까지 봐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제가 지금은 디넬 경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고요.”

“어차피 두 가문 간의 일 얘기일 텐데, 그건 나중에 편지로 하셔도 될 말씀 아닙니까? 파티에 오셨으면 춤을 추시는 게 더 중요한 일이죠.”

엔시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누가 일 얘기래요? 저희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요.”

“예?”

다미언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졌다. 엔시아를 빤히 쳐다보던 시선은 곧 타리크 쪽으로 향했다.

“하실 말씀은 다 하신 것 같은데, 이만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루이빌 영식? 저희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아서.”

타리크가 꺼지라는 말을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했다. 태도는 여유만만했지만 미간 한가운데가 살짝 찌푸려진 것이, 심기가 좀 불편해 보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좀처럼 믿지 못하는 듯한 다미언을 보며 타리크의 표정은 한층 더 냉랭해졌다.

“루이빌 영식. 아까부터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었습니다만, 지금 본인이 상당히 무례하시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뭐, 뭣?”

“엔시아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감히 연회장의 장식품 취급을 하다니요? 언제부터 컬리넌 후작가의 영애가 연회장의 분위기를 띄워야 할 무희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까? 엔시아의 가치를 안다면 식상하게 꽃 운운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아 참, 그리고 드레스가 어쩌고 어째요? 당신 보라고 입은 드레스겠습니까?”

스피어 마스터가 살기까지 뿜어내며 으름장을 놓자 다미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아, 그, 그…… 죄,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다미언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몸을 돌리자마자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쯧. 저런 치들이 백작 후계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다니, 한심하군요.”

타리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엔시아가 이런 무례한 대접을 어디서 얼마나 받고 있을까 싶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러나 돌아본 엔시아는 즐거운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아까까지 자기도 식상하게 장미꽃이네, 뭐네 했으면서.”

“아, 그, 그건…….”

“디넬 경은 제 가치를 알긴 하고요? 전엔 공작 부인 자리에 목맨 여자 취급을 하셨잖아요.”

“목을 매다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 영애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 지위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디넬 경이 생각하는 제 가치라는 건 뭔데요?”

“그동안 주변에서 많이 들으셨을 텐데, 굳이 제 입으로까지 듣고 싶으십니까?”

“네. 듣고 싶어요. 칭찬은 몇 번을 들어도 좋은걸요.”

사실 다른 이들의 칭찬 따위는 관심 없었다. 엔시아가 궁금한 건 저 속 모를 타리크 디넬의 생각이었다.

“두뇌가 비상하시고 멀리 내다보는 혜안이 있으시죠. 손익 계산도 빠르시고 어린 나이에도 컬리넌 후작가의 한 축을 지탱하고 계시는 건 물론, 사교계에서도 균형을 유지하고 계시고요. 아무리 타고난 거라고 해도 노력 없이 이뤄진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으셨겠죠. 그리고 저는 노력가를 좋아하거든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던 엔시아가 슬그머니 부채를 펼쳐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말하라고 시켜놓고는, 왜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끔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분명 여린 곳이 있으면서, 마치 아픈 곳을 드러내면 공격당하리라는 걸 아는 짐승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부분이요.”

“비유를 해도 하필…….”

“그런데도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답죠. 그래서 컬리넌 영애를 비유하자면 꽃이라기보다는…… 암사자 같습니다.”

엔시아의 귀는 어둠으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빨개졌다.

“사자면 사자지, 암사자가 뭐예요?”

“수사자들은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마초들이거든요. 그보다는 암사자가 훨씬 영리하고 우아하죠.”

엔시아가 피식 웃었다. 전장을 전전하던 기사에게 무슨 로맨틱한 비유를 바라랴마는, 암사자라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컬리넌 영애는…….”

“엔시아.”

“네?”

“아까는 잘만 부르시더니, 왜요?”

“아…… 그거야…….”

“엔시아라고 부르세요. 대신 저도 타리크……라고 불러도 되죠?”

타리크는 엔시아의 목소리로 불리는 제 이름이 낯설어 움찔했다. 하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쁜 낯을 숨겨야 할 정도로 좋아서 문제였다.

“물론입니다. 성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엔시아.”

“천만에요. 타리크.”

여름밤, 장미 향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 * *

전국의 소규모 신전에 헤스페리아 대주교의 기묘한 지령이 도착한 것은 대주교와 슬라르한의 비밀 회동이 있은 지 두 달 뒤의 일이었다.

-검은 절벽에서 일했던 파수꾼에게 10라리페르소의 헌납을 부탁드립니다.

‘라리페르소’란 제국 공통으로 쓰이는 화폐인 ‘페르소’와는 달리 각 지역에서 발행하여 쓰는 지역 화폐였다. 세금 이상의 농산물을 거둬들이거나 영지민들에게 의무 이상의 부역을 시킬 때 영주가 어음처럼 발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동화로 만들어지는 라리페르소에는 어느 지역에서 발행한 동전인지 찍혀 있었고, 가끔 전 지역 신자의 참여가 필요한 기도를 올릴 때, 각 지역의 신자들이 참여했음을 확인하기 위해 10라리페르소의 화폐를 받기도 했다.

덕분에 헤스페리아의 서신을 받아든 각 지역의 사제들도 수도에서 뭔가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생각했을 뿐,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은 뭐든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으로 돌려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인지, ‘검은 절벽’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되묻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벤티악 기사단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일리에의 꾀였다.

벤티악 기사단에서는 피아 구분이 되지 않을 때나 주변이 적으로 둘러싸였을 때를 위해 암호를 만들어두었다.

그중 ‘검은 절벽’은 ‘벤티악 가’를 의미했고, ‘파수꾼’은 당연히 ‘기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벤티악의 기사라면 그 뜻을 잘 알았을 테고, 이 지령 역시 벤티악 가에서 보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적었던 그 메모를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은 절벽의 파수꾼.

오랫동안 불러본 적 없는 암호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 이름을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 슬라르한은 벤티악 공작가가 언제나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롭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거대한 절벽처럼 보이는 가문이었음을, 그리고 그 가문은 충성스러운 파수꾼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음을 되새길 수 있었다.

자신이 그걸 잊고 있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고, 대신 일깨워 준 일리에가 고마웠다.

물론 일리에가 그 암호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지금도 궁금했지만, 일리에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그녀가 말해줄 그 언젠가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억지로 캐낼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이제는 단편적으로 한두 가지 알아내고 끝낼 상황도 아니야.’

아마 일리에와 오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이다.

그렇게 예상하면서도 일리에가 자신의 뒤통수를 친다거나 배신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쨌든 헤스페리아와의 약속은 거래였다. 그녀가 자신이 의심받을 것을 감수하면서도 작은 신전들에 지령을 내려준 대신, 슬라르한은 교황을 상대해야 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흑마법과 관련한 의심스러운 일들이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상세히 편지로 알렸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 탓인지, 교황청에서는 ‘확인해 보겠다.’라는 대답 외에는 돌아오는 게 없었다.

결국, 슬라르한은 한 달 전에 교황에게 알현 신청을 하고 허락을 받자마자 교황청이 있는 제국 남부의 아카디아로 향하는 중이었다.

2주 정도가 걸리는 여행길이었지만 딱히 지루하지는 않았다.

* * *

“와…… 아카디아는 왠지 제국 같지가 않아요.”

마차 맞은편에 앉아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일리에가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교황청에서는 아카디아의 독립을 원하고 있다더군. 종교가 어느 한 국가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상징성을 위해서라도 독립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

“그런데 왜 안 하는 건데요?”

“안 하는 게 아니라 아직 못하고 있는 거다. 아카디아에는 교황청과 교황청 소속 둔전(屯田:각 궁과 관청에 딸린 밭)이 있을 뿐, 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많은 것들이 부족해. 독립하면 당장 먹고살 일부터가 걱정일 거다. 하지만 아카디아의 독립에 황제 폐하께서도 딱히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라,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독립할 듯하구나.”

일리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아카디아의 독립 문제는 몇 번 거론됐었지만 루트 교가 야나크 교단에 엄청나게 침투하면서 그 문제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교도에게 오염된 세계 최대 종교의 교황청 지역을 독립시키면 그곳이 반란분자들의 집결지가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독립할 수 있으려나?’

일리에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야나크 교의 미래를 짐작해 보았다.

결국 아카디아가 독립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도, 슬라르한과 자신이 루트 교의 확산을 얼마나 막느냐에 따라 달라질 터였다.

‘딱히 이 세상을 구할 생각은 없었는데…….’

슬라르한만 황제로 만들면 될 거라 믿고 시작한 일인데,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교황께서는 이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신 걸까요? 편지로도 충분히 설명한 것 같은데 반응이 영…….”

“글쎄.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지. 알현 신청은 곧바로 받아들여진 걸 보면 말이야.”

두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마차는 드디어 아카디아에 도착했다.

3대 황제가 신심이 워낙 깊어 당시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를 죄다 아카디아로 끌어모아 교황청을 비롯한 신전들을 지었다는데, 그 덕분에 아카디아는 지금도 파르디나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다.

몇백 년 전에 깔아 놓은 화강암 도로는 지금도 튼튼했고, 은빛으로 반짝이며 물을 뿜어내는 분수대와 곳곳에 서 있는 예술적인 조각상과 웅장한 건축물의 조화는 눈이 돌아갈 것처럼 아름다웠다.

슬라르한의 일행은 귀빈으로 대우받아 교황청 안의 숙소에서 머물 수 있었다.

교황과 가까운 곳에서 기도를 올리거나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전국, 아니, 전 세계에서 몰려든 신도들로 아카디아는 북적거렸지만, 교황청 안은 마치 별세계라도 된 듯 고요했다.

저 바깥의 소음이 안 들릴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이기도 했다.

말수가 적은 수도사의 인도를 따라 숙소에 도착한 일행은 각자의 방에 짐을 풀었다.

유일한 여자 일행인 일리에는 혼자 쓰는 작은 방을 배정받았는데, 벤티악 저택에서 쓰는 방보다도 훨씬 작고 검소한 방이긴 했지만 번잡하지 않은 소박한 방이 오히려 기분을 침착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일리에는 방 구석구석을 돌아보다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놓인 엘룬상(像)에 시선이 멈추었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지극히 자비로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뜬 엘룬의 모습은 신심이 지극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경건해지게 만들었다.

일리에는 엘룬상 아래 놓인 묵주를 집어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엘룬 님.”

엘룬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클리드에게 이용당한 전생, 식물인간으로 지낸 10년, 죽음, 루벨파스트, 그리고 우연히 만난 슬라르한.

“저를 과거로 돌려보내 주신 건, 엘룬 님이시죠?”

엘룬상은 여전히 인자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엘룬 님. 저는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부디, 제가 머저리 짓을 하지 않도록 엘룬 님께서 좀 도와주세요.”

역사가 흘러가는 데 정답과 오답이 없다고는 하지만, 일리에가 생각하기에 전생에 벌어진 일들은 명백히 오답이었다.

탐욕과 거짓과 위선에 오염된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나마 가장 진실하고 선했던 사람들은 죄다 안 좋은 결말을 맞았다.

아니, 그 누구도 좋은 결말을 맞지 못했다.

황제, 아이리스, 렌셔, 엘로르…… 그 누가 행복했던가. 과연 클리드라고 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까?

그러니 그 시간 전부는 오답이었다. 권력에 미쳐 날뛰던 인간들은 물론이요, 그들의 지배하에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니.

“이번에는 제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일리에가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네!”

깜짝 놀란 일리에가 후다닥 일어나 문을 여니 슬라르한이 서 있었다.

“자고 있었나?”

“아, 아니에요.”

슬라르한의 시선이 묵주를 쥔 일리에의 손에 가 닿았다.

“기도하고 있었나 보군.”

일리에는 민망한 듯 웃으며 묵주를 다시 엘룬상 아래에 올려 두었다.

“교황님은 언제 만나 뵈시는 거예요?”

“알현 시간은 내일 3시로 잡혔다. 그때까지는 성수로 목욕재계하고 채식을 하며 몸을 정화해야 한다는군.”

“채식이요? 으…….”

교황은 여태 보낸 편지에 뜨뜻미지근했던 것과는 달리 알현 시간도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잡아주었다.

의아한 일이긴 했지만 슬라르한이 제국의 공작이자 황제 후보라는 것을 떠올려 보자면 꼭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일리에는 그보다 채식을 해야 한다는 것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 혼자 독대할 테니 너한테는 해당 없는 말…… 아니, 나와 함께 갈 테냐?”

“예? 저, 저도 가도 되나요?”

“대동할 사람이 있으면 미리 말만 해주라던데…… 혹시 모르잖나. 교황과 마주했을 때, 네가 뭔가를 느낄지도…….”

“허…… 교황청에 와서까지 사특한 점술을 더 믿으시다니, 주인님의 신앙심도 알 만하네요.”

일리에의 농담에 슬라르한이 쿡쿡대며 웃었다.

하지만 정말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이제는 일리에가 부릴 마법 같은 일들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물론 또 위험한 일에 자처해서 나서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아마레즈 교황께서는 어떤 분이세요?”

슬라르한의 기대와는 달리, 일리에는 전생에 교황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녀를 만나본다고 해도 특별히 떠오르는 일은 없을 터였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는 쿠르즈 왕국의 성녀로 추앙받던 분이지. 뤼소 공작의 여동생이고, 성녀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할 말 다 하고 사시는 분이기도 하지.”

“성녀 호칭은 어떤 일로 받게 되신 건데요?”

“공작가 영애였던 그녀가 집안을 뛰쳐나가 왕실이 밀어버리려던 빈민가를 지켰거든. 그때 신력이 발현돼서 왕국의 군대를 막아냈다더군.”

“왠지 굉장히 기대되는 분인데요?”

“성수 목욕과 채식. 잊지 말고.”

“으으…… 채식…….”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을 거다. 빵과 잼, 과일 같은 건 얼마든지 먹어도 되니까.”

“인간은 간사하다는 말이 맞아요. 루벨파스트에서 쫄쫄 굶던 게 고작 2년 전인데, 이제는 하루라도 고기를 안 먹으면 제대로 먹은 것 같지가 않다고요.”

일리에가 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슬라르한은 일리에와 함께 해온 시간이 벌써 2년이 좀 넘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시간이 참…… 빠르구나.”

“그러게요. 겨우살이 축제도 금방 코앞에 닥칠 것 같아요.”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이름이 불릴 그 자리를 떠올리며 한껏 기대에 찬 얼굴이었지만, 정작 슬라르한은 속이 선득해졌다.

일리에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어쩌면, 이 짧았던 2년만큼도 안 남았다는 생각에…….

* * *

교황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황제의 보좌와 비교하자면 형편없이 작고 소박해 보이는 의자에,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의 황제가 미소 지으며 앉아 있었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벤티악 공작.”

슬라르한이 한쪽 무릎을 꿇고 교황의 반지 위에 살짝 입을 맞추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에 화답했다.

한때 쿠르즈 왕국의 공작 영애 말리아 뤼소였던 교황 아마레즈는 헤스페리아 대주교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인이었다.

자신이 살던 왕국의 왕명을 홀로 막아냈다는 전설 때문인지, 그녀는 적당한 타협이라는 걸 모를 것처럼 꼿꼿해 보였다.

“그쪽은?”

“제 심부름꾼인 일리에라고 합니다.”

아마레즈의 시선을 받게 된 일리에는 조용히 교황 앞에 나아가 무릎을 깊게 내리며 교황의 반지에 입 맞추었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일리에라고 합니다.”

“흐음…….”

일리에를 쳐다보는 아마레즈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적대감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태도였으나 그녀는 이내 슬라르한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아카디아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제게 그것을 묻는다 하심은, 이제까지 제가 보냈던 편지를 성하께서 보지 못하셨다는 말씀이겠군요.”

“편지……?”

아마레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봐도 슬라르한이 보낸 편지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역시, 중간에 누군가가 손을 썼구나.’

일리에는 교황청에까지 루트 교의 마수가 뻗쳤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전생에도 루트 교는 황궁, 귀족 사회, 교단 할 것 없이 퍼졌었고, 교황청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래 이 시점에 교황청까지 퍼졌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출현으로 더 빠르게 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전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뭔가를 곱씹으며 생각하던 아마레즈는 다시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아무래도 중간에 누락된 편지가 있었나 보군요. 어떤 일로 편지를 보내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전에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제 편지를 못 받으셨다면, 엘라니쉬 신전의 헤스페리아 대주교님께서 보낸 편지도 전혀 못 받아보셨습니까?”

“헤스페리아가……?”

아마레즈의 눈이 커졌다. 그마저 받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건 뭔가 이상하군요. 솔직히 말해, 가끔 권력자의 아부성 짙은 편지나 사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는 절 보좌해 주시는 사제 선에서 거릅니다. 하지만 헤스페리아의 편지까지 걸렀다는 것은…….”

의자 손잡이를 손끝으로 톡톡 치던 아마레즈는 곧 자신의 보좌 사제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그전에 제 말씀을 먼저 들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짐작 가시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슬라르한은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말했다.

“제가 여기 온 것도, 헤스페리아 대주교님께서 성하께 지속적으로 편지를 드린 것도 모두 같은 일 때문입니다. 이단이 야나크 교단 내에 침투한 것 같습니다.”

“이단이라니요?”

놀랄 만도 했다.

야나크 교는 워낙에 거대한 종교이자 오래된 종교인 데다 분파를 허용하지 않아서, 그 지위를 위협할 어떤 이단이나 사교도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단을 조사하고 심문할 이단 심문소라는 기관도 있었지만, 이제는 교리성이라 하여 그저 교리와 신앙 연구를 위한 기구로 변화하였다.

현재의 교황으로서는 이단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게 들릴 터였다.

“루트 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요.”

“얼마 전까지는 주로 중앙의 관심이 뜸한 지방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흑마법 신봉 종교입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수도와 야나크 신전에서까지 퍼지고 있습니다.”

슬라르한은 저 역시도 일리에한테 듣고 깜짝 놀랐던 루트 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 일리에가 헤스페리아 앞에서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낯설고 의아했던 루트 교는, 그가 개인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문제 있는 종교였다.

제국 전체적으로 점조직처럼 퍼져 있었는데 사제급이 집결을 명하면 빠르게 큰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직은 평민들이 주된 신도들이었지만 점점 야나크 사제와 귀족들도 신도로 포섭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렇게 급속도로 퍼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루트 교의 중요 교리가 바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것입니다. 평민들에게 인기를 끌 법한 교리죠. 게다가 흑마법을 신봉하는 터라 헌금을 많이 내면 개인적인 복수도 해준다더군요.”

“황당하군요. 범죄 집단이나 할 일을 어찌 신의 이름으로 행한단 말입니까.”

의자 손잡이를 꽉 쥔 아마레즈의 손이 분노로 바르르 떨렸다.

“교리니, 헌금이니 하는 종교적인 단어를 쓰고는 있지만 종교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정말로 평등을 교리로 내세웠다면 노예제도부터 반대해야겠죠. 하지만 그들은 노예를 흑마법에 쓸 값싼 재료로나 생각합니다.”

“끔찍하군요.”

“하지만 사랑과 자비는 멀리 있고, 원한과 복수는 눈앞의 일이니…….”

물론 정말로 신실한 이들은 루트 교의 허점을 금방 간파하고 사이비 종교 취급했다.

그러나 죽이고 싶은 인간 하나 마음에 품지 않은 사람 없었고 시골로 들어갈수록 배움도 짧아서,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들이 루트 교도들의 달콤한 꼬드김에 쉽게 넘어갔다.

그게 결국 자신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영혼이 타락한다는 게 어떤 일인 줄도 모르고…….

“그들이 언젠가 이 땅 위에 내려올 신의 현신이라고 설파하는 ‘리카온’은, 사실은 악마라더군요. 악의 현신이라고나 할까요? 그들은 파르디나스를 리카온이 재림할 성지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 모든 건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타인을 저주하려다 잡힌 루트 교도 흑마법사를 심문했습니다. 잔챙이이긴 했지만 루트 교와 관련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리에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교황청에도 이미 루트 교에 물든 사제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흑마법사가 나타났다는 헤스페리아 대주교님의 편지를 성하께 전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마레즈는 침통한 표정으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사실…… 안 그래도 최근 이상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순수한 신력이 깃든 도시 아카디아는 여태 사특한 힘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던 성결의 도시였다.

그러나 작년 말부터 아마레즈는 기이한 불쾌감에 종종 신경이 날카로워지곤 했다.

“악마의 힘을 경고하기 위해 세웠던 ‘경계의 종’이, 올해 1월, 2천 년 만에 처음으로 울렸습니다.”

“아…… 그게 실제로 울리는 종이기는 했군요?”

일리에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지만 아마레즈는 무례를 탓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신력이 없는 사제들은 뭔가 고장이 난 줄 알고 있지만, 저를 비롯해 신력이 있는 사제들은 교황청 내부와 아카디아 곳곳을 순찰하며 종이 울린 원인을 찾아보았지요.”

“뭔가 찾으신 게 있습니까?”

슬라르한의 심각한 목소리에 아마레즈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허의 문’이라고 아십니까?”

“공허의 문……?”

“악의 힘이 지상에 퍼지는 통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카디아의 곳곳에서 공허의 문과 연결된 ‘공허의 틈새’를 발견했습니다. 공허의 틈새만으로는 큰 위협이 아니지만, 언젠가 공허의 문이 열려 버린다면 공허의 틈새를 통해 악의 힘이 퍼져 나갈 수 있지요.”

아마레즈는 아카디아 뒷골목과 숲속 같은 곳에서 발견한 사특한 마법진을 떠올렸다.

뱀의 눈처럼 세로로 길쭉한 틈이 한가운데 그려져 있고 그 주위로 둥글게 차원문의 주문이 쓰여있던, 한눈에도 일반 마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던 마법진.

“그때는 그 일의 목적도, 주체도 알 수 없었지만, 공작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야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는군요.”

“놈들은 아카디아 먼저 악의 힘으로 물들일 작정이었나 봅니다.”

“대담하기도 하지.”

인자하거나 온화하다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아마레즈는 자신이 느끼는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한시라도 빨리 야나크 교 내부부터 단속해야겠군요.”

“혹시 따로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괜히 황실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봐 그동안 성기사단의 활동을 최대한 자제토록 해왔습니다만, 이런 사안을 두고서는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전원 신력이 강한 전투 사제들로 구성된 성기사단은 확실히 황실에서 경계할 만한 전력이었다.

덕분에 교황 대대로 성기사단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성기사단 자체가 약화된 건 아니었다.

“전제국의 주요 신전으로 성기사단을 파견하고 교리성의 권한을 확대하겠습니다. 벤티악 공작께서도 힘을 보태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을.”

슬라르한과 아마레즈는 구체적인 공조 방법을 의논한 뒤 이야기를 끝냈다.

아마레즈는 슬라르한에게 축복까지 내려준 뒤 일리에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었다.

“재미있는 아이구나.”

“예……? 제가요?”

재미있다는 말을 자주 듣긴 했지만 그 아리송한 말을 교황에게까지 들을 줄은 몰랐던 일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심약한 아이였다면 불쌍하다고 했겠다만, 넌 네 처지에 비해 참…… 씩씩하니까 말이다.”

아마레즈가 말하는 ‘네 처지’라는 게 무엇일지, 솔직히 묻기가 두려웠다.

교황이라는 그녀의 지위와 신력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전생까지 다 꿰뚫어 볼까 봐…….

일리에의 두려움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원래 더 파헤칠 생각이 없었던 건지, 아마레즈는 그저 일리에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기도했다.

“운명 속을 헤매는 이 어리석은 백성도 구원해 주소서. 엘라니쉬 엘로하임.”

한숨과도 같은 그 기도에 일리에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마레즈가 쓰다듬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씩 웃었다.

“엘룬께서 저를 못 본 척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벌써 반쯤은 구원받았거든요.”

씩씩한 일리에의 얼굴에 아마레즈는 그들이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6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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