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벨파스트의 노예 6권
1장
“헥, 헥!”
맥클리어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황궁의 복도를 뛰었다.
그가 향한 곳은 당연히 엘로르의 방이었다.
“어머, 괜찮으세요, 주교님? 이렇게 다급하게 무슨 일이세요?”
엘로르는 제 앞에서도 거친 숨을 내쉬느라 말 한마디 못 잇는 맥클리어에게 시원한 냉차를 건넸다.
“헤엑, 헤엑,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뇨?”
“교, 교황, 헤엑, 교황청에서……!”
“교황청? 아카디아에서 무슨 낌새가 있나요?”
맥클리어는 가슴을 몇 번 치다가 냉차를 단숨에 비운 뒤 소리쳤다.
“교황이 교단 내에 퍼지고 있는 이단을 축출하기 위해 성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성기사단이 뭘 하는 이들인지 모르는 엘로르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게 왜 큰일인데요?”
“아이고, 전하! 성기사단은 전원 신력을 지닌 광신도들이라고요! 그놈들은 융통성도 없어서, 조금이라도 교리와 어긋난다 싶은 사제가 있다면 죄다 교리성으로 넘겨 버릴 겁니다. 말이 교리성이지, 이단 심문소라고요!”
그제야 엘로르의 고운 미간에 노기가 드리웠다.
“누구 맘대로.”
엘로르는 곧장 카제야를 불렀다.
“해리엇. 아카디아의 노망난 할멈이 성기사단을 풀겠다네? 이쪽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단단히 골이 난 엘로르를 보면서도 카제야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였다.
“모든 것은 전하의 뜻대로.”
그날 밤 카제야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루트 교의 사제급 흑마법사들에게 수도 집결을 명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의 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을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두 수도로 모이십시오. 모든 것은 리카온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 * *
헤스페리아의 기이한 명령서가 제국 곳곳의 작은 신전에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헤스페리아는 ‘델칸트’라는 지역명이 새겨진 10라리페르소짜리 동전을 손에 넣었다.
“델칸트가 어디예요?”
“제국 북서부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나도 어제 지도를 한참이나 찾아보고서야 발견했다.”
슬라르한은 엄지손톱만 한 작은 구리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일리에의 질문에 답했다.
‘검은 절벽에서 일했던 파수꾼’이라는 말이 혹시나 잘못 이해되어 여러 곳에서 라리페르소 동전이 들어오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고, 혹은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초조한 기다림 끝에 받은, 아주 작은 안부 인사.
‘저희는 델칸트라는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신전에서 기도를 올릴 여유 정도는 있고, 누군가 감시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찾아와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작은 동전 안에, 그런 안부 인사가 촘촘히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슬라르한은 간밤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작은 구리 동전만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며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내내 뒤척였다.
“델칸트에 직접 가보실 건가요?”
“내가 직접 움직이기는 위험하지. 황제 폐하께서 금방 눈치채실 테니까. 오늘 새벽, 타리크를 보냈다.”
“어? 벌써 가신 거예요?”
“타리크에게 정예 기사 열 명을 딸려 보냈다. 먼 곳인 데다 돌아올 때는 속력을 내지도 못할 테니 아마…… 넉넉잡아 두 달은 걸리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타리크에게 맡긴 일에 대해서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던 평소와는 달리, 지금 슬라르한의 얼굴에는 다 감추지 못한 초조함과 불안감이 엿보였다.
“분명 별 탈 없이 돌아오실 거예요.”
“……그것도 네 점술인가?”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감……?”
“그럼 무사하겠지. 네 감은 언제나 들어맞았으니까.”
슬라르한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전생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터라 일리에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손쓸 수 없는 일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돌팔이 점술을 믿으며 다른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그나저나…… 이번 일은 도대체 왜 생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전생에 벤티악 전 공작 부인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알게 된 바가 없었다.
전생에는 자신이 테르소에 갔으니 슬라르한도 랑깃 숲에서의 일을 모르고 지나갔던 걸까.
‘그렇다면 전생에는 나 때문에 어머니를 찾을 기회도 놓쳤다는 건데…….’
또 속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도대체 전생에 슬라르한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던 건지 모르겠다.
벤티악 전 공작 부인을 데리고 델칸트에 숨어 지내는 벤티악 기사들은 아마 슬라르한이 황제가 되는 날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을 텐데, 전생에 그가 황제가 되지 못한 다음에는 어떻게 됐을까.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한숨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가만히 일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타리크니까…… 아무 일 없겠지. 비싼 아티팩트도 몇 개 쥐여서 보냈으니까.”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슬라르한인데 그는 일리에 걱정뿐인 것 같았다.
“만약…… 이건 만약의 일인데요…… 테르소에 가게 된 게 주인님이 아니라 아이리스 전하였다면, 그래서 랑깃 숲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어딘지 찔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묻는 일리에를 보며 슬라르한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몰랐더라도 어머니를 찾을 수는 있었을 거다.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어머니를 찾을 방법은 있거든. 대신…… 이보다는 많이 늦어졌겠지. 이렇게 일찍 그들의 위치를 알게 된 건 다 네 덕분이다, 일리에. 고맙다.”
“고, 고맙긴요, 뭘…….”
“이 일에 대해서는 1천만 페르소로 치기에도 적은 감이 있군.”
마음 같아서야 얼마든지 더 높게 값을 쳐주고 싶었지만, 일리에의 몸값이 너무 빠르게 변제되고 있었다.
이전에 변제했던 475만 페르소에 라리에트를 라반 진영에서 빼낸 일 50만 페르소, 아말 족 본진을 찾아낸 일 500만 페르소, 흑마법사의 정신 지배를 감수하며 그 실험실을 찾아낸 일 200만 페르소, 보라색 드레스에 관한 조언에는 900만 페르소를 더 쳐줬고, 이번에 어머니와 벤티악 기사단의 위치를 찾는 일에 1천만 페르소를 쳐줬다.
덕분에 일리에의 몸값은 이제 1,375만 페르소밖에 남지 않았다.
황제의 관을 쥐기도 전에 일리에의 몸값 먼저 다 변제될 것 같아 불안할 지경이었다.
슬라르한의 속도 모르고 일리에는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제가 주인님께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요.”
“지나치게 유능하지…….”
슬라르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타리크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일도 없는 척하며 몸을 사리던 슬라르한에게 비공식적인 방문 요청이 들어온 것은 그 이틀 뒤였다.
슬라르한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대였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상대의 방문을 허락했다.
“어서 오십시오, 컬리넌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벤티악 공작님.”
컬리넌 후작도 없이 혼자 찾아온 엔시아였다.
비공식적인 만남이기에 그들의 만남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벤티악 공작 저 내에서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통로로 이동하며 조심했다.
장식 없는 마차에서 내린 뒤 마주친 사람 하나 없이 슬라르한의 집무실에 들어선 엔시아는 차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는 일리에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금세 표정을 풀었다.
“일리에가 차 시중까지 들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이야, 일리에.”
일리에에게까지 안부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슬라르한은 아직도 찔레천 드레스 사건 때의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눈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일리에는 능청스럽게 엔시아에게 친한 척을 해댔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그사이 더 예뻐지셨는걸요? 컬리넌 후작님께서도 안녕하시지요?”
“그, 그럼. 물어봐 줘서 고마워.”
엔시아는 오히려 당황한 채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일리에가 슬라르한과 그녀의 찻물을 따르는 동안 집무실 안을 살피는 척하며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으음…… 아!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디넬 경이 안 보이시네요? 늘 공작님 곁을 보좌하시는 분 아니었나요?”
언뜻 듣기에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얘기 같았다.
“타리크는 다른 임무가 있어서 좀 멀리 떠났습니다. 아마 두 달쯤 뒤에 돌아올 겁니다.”
“두, 두 달이나요……?”
“예.”
“아아……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극비 사항이라…….”
말을 아끼는 슬라르한 때문에 엔시아는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왠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고, 마침 그 순간에 일리에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일리에의 생글거리는 낯에 엔시아는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 차만 홀짝거렸다.
“이렇게 비밀로까지 하면서 찾아오신 이유가 따로 있으실 것 같은데요.”
“아!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괜히 얘기가 퍼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슨 일이십니까.”
엔시아가 일리에를 다시 흘끗 바라보았지만 슬라르한은 일리에를 내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일리에는 외부에 이런 이야기를 발설할 아이가 아닙니다. 완전한 제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공작님만 믿을게요. 얼마 전, 저희 집에서 중도파 귀족들의 모임이 있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늘 있는 모임이었죠.”
엔시아는 어딘지 분위기가 이상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 * *
“음? 누가 좀 늦나……? 자리가 좀 비었군요?”
모임 시작 시간에 맞추어 회의실에 들어선 컬리넌 후작과 엔시아는 인원수에 맞게 들여놓은 의자 몇 개가 빈 것을 확인했다.
한두 번 갖는 모임도 아니었고 모임 시간을 착각할 사람들도 아니었으니 확실히 뭔가 좀 이상했다.
그때 누군가가 곤란한 듯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랭보어 백작과 줄린 자작이 모임을 탈퇴하겠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아니, 갑자기 왜요?”
“엘로르 전하 쪽을 지지하겠다고 하더군요.”
“엘로르 전하……?”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함께 ‘황제의 진짜 혈육도 아닌 황손들’이라며 욕하던 이가 갑자기 엘로르 쪽으로 돌아서다니…….
“어? 저는 스패로 남작에게 똑같은 얘기를 듣고 왔는데요? 앞으로 엘로르 전하를 지지하겠다면서, 모임을 탈퇴한다는 얘기를 좀 전해달라고…….”
“스패로 남작까지……?”
“아…… 저기, 저는 레버튼 남작의 편지를 갖고 왔습니다만…….”
“거기도 모임을 탈퇴하고 엘로르 전하 쪽으로 붙는답니까?”
“예에…….”
그쯤 되니 다들 안색이 새파래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컬리넌 후작이 버럭 노성을 질렀을 때, 누군가가 소심한 목소리로 웅얼댔다.
“다들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 같더니, 야나크 교의 성녀로 소문난 엘로르 전하께로 갔다고……?”
하지만 컬리넌 후작은 짜증을 부리느라 그 소리를 못 들었고, 엔시아 혼자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 * *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요? 중도파 귀족이 넷이나 엘로르 전하 쪽으로 돌아서다니요.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 같다고 했습니까? 그 종교에 대해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그건 더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얘길 한 분은 린도 자작이었으니, 그분께 여쭤보면 더 자세한 걸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슬라르한과 일리에는 루트 교가 이미 귀족 사회 안으로까지 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마십시오. 영애가 위험해집니다. 대충 짐작 가는 건 있으니까요.”
“그게 뭔가요?”
슬라르한은 잠시 고민하다 흑마법사와 루트 교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엔시아에게 알려주었다.
“조만간 공유할 내용이긴 하지만,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역공을 당할 수 있기에 아직 조심하고 있습니다. 영애께서도 일단은 모른 척하십시오.”
“알겠어요. 혹시 타리, 아니, 디넬 경께서도 이 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그 외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마차가 세워진 뒤뜰 쪽으로 몰래 나왔다.
엔시아의 뒤를 따르던 일리에는 막 마차에 오르려는 엔시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혹시, 타리크 님께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주인님께서 매를 날리실 때 같이 보내 드릴게요.”
“하, 참 나…… 너, 너무 되바라진 거 아니니?”
“없으세요?”
“내가 그분께 따로 전할 말이 뭐가 있겠니?”
“위험한 일 하러 가신 건데…….”
“뭐?”
엔시아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위험? 얼마나? 도대체 어딜 가셨길래?”
“극비라, 저도 자세히는 말씀 못 드려요. 어쨌든, 전할 말씀은 없으시다는 거죠?”
마차 문의 손잡이를 잡은 엔시아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꼭 다문 입술이 뭔가를 고민하듯 머뭇거렸다.
“뭐, 굳이 남기라면…… 그냥……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라고 전해 드리렴.”
“네, 알겠습니다.”
“……그래.”
엔시아는 뭔가를 더 묻고 싶은 듯 어물거리다가 한숨을 쉬고는 딴소리를 했다.
“찔레천 드레스 일은…… 미안했어.”
그러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 도도한 엔시아가 사과를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에이, 뭘요. 말씀은 잘 전해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스름을 헤치며 멀어지는 마차 뒤로, 일리에는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피가 마르는 듯한 시간이 한 달하고도 반쯤이 지난 어느 밤, 굳게 닫혔던 벤티악 가의 후문이 조용히 열렸다.
방문자를 확인하는 절차도, 횃불도 없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행렬이 벤티악 가의 후문을 지나 어둠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어두운색 후드 망토를 쓰고 있던 그들이 얼굴을 드러낸 건, 최소한의 조명만 켜둔 슬라르한의 집무실에서였다.
“프레데릭! ……카르프! ……케일럽!”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기사들이었지만 슬라르한은 내내 잊지도 못한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벤티악 공작 각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둑어둑한 응접실에는 금세 수염 덥수룩한 사내들의 낮은 울음소리가 차올랐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어찌 편히 눈을 감으셨겠는가. 죄송하다고 하지 말게. 나야말로…… 나야말로 자네들에게…….”
슬라르한도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목울대만 꿀꺽댔다.
그들을 데려온 타리크와 다른 기사들 역시 두툼한 손바닥으로 연신 얼굴을 훔쳐내며 코를 들이켰다.
너무도 잔인한 세월이었다.
아무 죄도 없이, 너무도 한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고 보니, 그래도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각하께 편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테르소에서 벗어난 뒤로도 한참을 황제의 늑대들에게 쫓겨서…… 혹시라도 위치가 발각될까 봐…….”
“그랬겠지. 황제가 자네들을 그냥 보내려 했겠나.”
간신히 눈물기를 거둔 그들은 자리에 앉아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동굴에 잠든 어머니가 있었고, 황제 폐하는 그런 어머니를 미끼 삼아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짐작하고 있네만, 사실인가?”
“비슷합니다.”
그들을 대표해 상급 기사인 프레데릭이 설명했다.
“테르소 초입의 랑깃 숲에서, 저희는 저희를 기다리는 황실 근위대와 맞닥트렸습니다. 정식 황실 기사단이 아닌, 황제 폐하만의 호위대였습니다.”
“……황제 폐하의 ‘늑대’들이군.”
“예. 그때 이미 저희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공작 부인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으냐는 말에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의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프레데릭의 목소리는 점점 침통한 빛을 띠었다.
“웬 동굴로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그곳에는…… 황제 폐하가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앞에…… 관이 하나…….”
그의 숨이 파르르 떨렸다.
넋 나간 사람처럼 관 안에 누운 여인만 바라보며 한 발짝씩 떼던 아이르델이 떠오른 탓이었다.
“세……이렌…….”
“내가 네 형이라는 것은 잘도 잊는 것 같더니, 집 나간 마누라 얼굴은 잊어버리지도 않는구나.”
“폐, 폐하…… 도대체…… 이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은 쪽은 오히려 나다. 이것을 보아라. 테르소의 영주인 스테른 남작이 발견한 지 한참이나 됐건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자는 이 여자는 이렇게나 멀쩡하구나. 이래도 이년이 마녀가 아니라고 잡아뗄 셈이냐?”
황제의 말대로 세이렌은 오래 굶으며 누워 있는 사람이라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했다.
하지만 그녀가 사비 족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사비 족은 모두가 마법사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 얘기를 꺼냈다가는 아마 사비 족 전체가 마녀나 악마로 싸잡힐 판이었다.
“그렇게 여기셨는데도 곧바로 죽이지 않고 저를 불러내셨다는 건, 제게 바라는 바가 있다는 말씀이겠군요.”
“네놈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어디서 건방진 말버릇이야!”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원하긴! 이 마녀와 결탁하고 반란을 모의한 죄로 벤티악 가문을……!”
“그녀와 저는 이미 이혼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 일을 가지고 이제 와 문제 삼으시겠다고요? 제가 그녀와 부부가 아닌데, 폐하의 결정이 다른 귀족들에게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이, 이놈이……!”
황제가 이를 갈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아이르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 모가지가 아니십니까? 그걸 위해 여기까지 저를 불러내는 수고를 마다치 않으신 것일 테고요.”
그때부터 벤티악 기사단의 모두는 긴장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황제의 늑대들과 싸우라는 명령이길 바랐다. 차라리 황제를 이 자리에서 죽이자고, 황제가 바라는 대로 정말 반역을 일으키자고 하길 바랐다.
그러나 아이르델은 그러지 않았다.
“제 기사단에게 세이렌이 누워 있는 그 관을 옮기도록 하시고, 형님은 그토록 바라시는 제 목을 가져가십시오.”
“우스운 소릴 하는구나. 내가 네놈들 하나라도 보내줄 것 같으냐?”
“아니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정말로 반역을 일으키길 바라십니까? 형님께서 늑대들을 아끼시는 거야 잘 알고 있지만…… 제가 데리고 온 기사들 역시 전원 소드 마스터입니다. 자신 있으십니까?”
“이, 이, 네 이놈!”
황제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르델은 상관하지 않았다.
“프레데릭. 자네들은 전부, 이 관을 지고 여기서 나가게.”
“각하! 차라리 검을 들라고 하십시오!”
“데릭. 내 마지막 명령이야.”
기사단의 모두가 분노와 억울함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네들이 세이렌의 관을 들고 사라지면, 오늘의 일은 아무런 증거가 남지 않지. 우리 형님도 증거 없는 일을 가지고 내 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지는 못할 테고.”
아이르델은 프레데릭에게 말하면서도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프레데릭은 세이렌이 살아 있는 한 황제는 언제든지 벤티악 가의 숨통을 끊으려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님을 모시고…… 때가 올 때까지 숨어 지내야겠구나.’
자신의 여자를 지키려 한 아이르델을 위해서, 반드시 영광의 미래를 가져올 슬라르한을 위해서.
결국 프레데릭과 기사단은 눈물을 머금고 세이렌이 누워 있는 관을 짊어지고 나왔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이르델은 동굴 입구에 서서 황제의 늑대들이 뒤쫓지 못하게 지켰다.
덕분에 기사단은 곧바로 보인 작은 마을에서 관을 올려 둘 수레를 구한 뒤 추적을 피해 더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거기서 황명을 무시한 채 늑대들과 싸웠더라면, 어쩌면 이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법사를 대동한 황제는 몸을 뺐을 테고, 아마 곧바로 슬라르한 님을 공격했겠지요. 아이르델 님은…… 본인 목숨 하나로 나머지 모두를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얘기 중간에 결국 터져 버린 울음 때문에 프레데릭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응접실은 다시 침통하게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나 가만히 바닥만 바라보며 얘기를 듣던 슬라르한은 끝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울컥거리는 제 속을 가라앉혔다.
“정말…… 수고가 많았네. 정말로…….”
뭐라고 더 치하할 말을 찾지 못한 슬라르한이 어금니만 꽉 깨물었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분명 때가 온다. 복수는, 완벽한 때에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그때까지만 조금 더 기다려 주게.”
너무나 많은 감정을 억누른 탓에 건조해져 버린 목소리로 슬라르한이 말했다.
벤티악 가의 비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고, 슬라르한은 오늘도 해묵은 상처를 파헤쳐진 고통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지금은 열렬히 원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완벽한 때에, 반드시.’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 * *
“아, 오셨어요?”
기사단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세이렌이 누워 있는 방에 들어온 슬라르한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일리에와 그녀의 고양이 녹스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세이렌과 기사단이 돌아온 것은 저택 내의 사용인들에게도 비밀이었기에 세이렌의 시중은 일리에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마력으로 신체의 시간이 멈춘 것이나 다름없어서 누가 계속 옆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갓 저택에 돌아온 어머니를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슬라르한은 아무 말 없이 침대 곁으로 다가가 고요히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랑깃 숲의 동굴에서 느꼈던 어머니의 불안정한 기운이 더욱 확실히 느껴졌다.
이토록 강한 기운을 남겨둔 것은, 아들이 자신을 찾아와 주길 바랐기 때문일까.
“어머니…… 집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밀랍같이 창백한 얼굴, 단단히 감긴 눈꺼풀, 혈색 없는 입술…… 언뜻 보기에는 죽은 사람 같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어머니를 되찾았으니 이제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슬라르한은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얼마 전 롤랑 백작에게서 받은 녹마석 목걸이였다.
어머니의 마력이 아주 쇠한 듯 불안정하니, 녹마석이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벨벳 상자에서 목걸이를 끄집어내어 어머니의 목에 걸어주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세이렌은 아무런 변화 없이 조용한 숨만 나눠 쉴 뿐이었다.
“너도 이만 들어가 쉬거라.”
“……괜찮으세요?”
“이 방에는 내가 결계를 쳐두었으니 침입자는 없을 거다. 걱정 마라.”
“마님 말고…… 주인님이요.”
슬라르한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어머니의 얼굴만 내려보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 봐.”
“……네.”
일리에는 더 묻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스. 이리 와.”
일리에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녹스를 불렀지만, 녹스는 세이렌의 머리 옆에 몸을 말고 앉아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녹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꼬박꼬박 대답하던 녹스가, 이번에는 아예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죄, 죄송해요. 얘가 왜 이러지?”
일리에가 진땀을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세이렌에게 제 몸이 닿지 않게 하면서 녹스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녹스는 오히려 몸을 빼면서 우우웅, 하는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녹스……?”
“너만 괜찮다면, 그냥 두어라.”
“네? 그, 그래도…… 될까요?”
“어머니 곁에 저 녀석이라도 있어 준다면 나야 고맙지.”
희미하게 웃는 슬라르한을 보며 일리에는 짐짓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녹스가 되게 똑똑하거든요. 화장실도 알아서 잘 가리고요, 빵이랑 물만 놔두면 밥도 알아서 먹어요. 아마 마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녹스가 뛰어와서 알려줄 거예요.”
슬라르한은 고양이 따위에게 그런 큰일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일리에와 고양이가 열심히 저를 위로해 주려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결국 일리에는 세이렌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녹스를 두고 혼자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늘 녹스가 있던 방에서 혼자 지내야 하는 게 생각보다 좀 쓸쓸하긴 했지만, 녹스 덕분에 슬라르한의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아 제 고양이 예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니까. 사람보다 낫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일리에는 새벽잠을 청했다.
* * *
세이렌과 기사단이 돌아온 다음 날도 벤티악 저택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나 늘 슬라르한과 일리에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베델은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갑자기 자기 전에 마시는 피로회복제 같은 게 내려졌으니 의심할 만도 하지 않은가.
그는 그것을 마시지 않고 자는 척하다가 일어나 슬라르한을 감시했고, 어둠 속에 조용히 귀환한 벤티악 기사들과 세이렌을 목격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아이르델 벤티악이랑 나갔던 기사들이 왜 세이렌 벤티악이랑 돌아와? 세이렌 벤티악 상태는 또 왜 저래?’
황제가 그에게 ‘그날’의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베델로서는 어느 한 조각이 맞춰지지 않은 퍼즐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것이 황제에게 전했을 때 비싸게 팔릴 만한 정보라는 것은 확실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누가 봐도 몰래 들어오는 기사단과 세이렌 벤티악이라니, 뭘 모르는 사람이 봤어도 보통 일은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황제에게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연락을 넣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하아…… 어떡하지……? 말해? 말아? 말해? 말아?’
간밤에 기사단이 들어오는 것을 몰래 확인한 이후로 베델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도 머뭇대지 않고 곧바로 정보로 팔았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슬라르한의 운명이 곧 일리에의 운명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벤티악 공작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니…… 하아, 진짜 저 자식을 어쩌지?’
일리에만 아니라면 이렇게 머리 복잡해질 일도 없었다.
아니, 왜 일리에 때문에 자신이 머뭇거려야 하는지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의외로 셀리나가 죽은 게 나한테 충격이었나 보지?’
죽은 여동생에 대해 여태 별생각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동생을 떠올리게 한 일리에에게 이렇게나 인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베델이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어린 하인이 뛰어와 슬라르한이 그를 찾는다고 알려주었다.
“하아…….”
전에는 슬라르한을 만나러 갈 때마다 정보를 캐러 가보자는 의욕이 피어났는데, 지금은 왠지 피하고만 싶었다.
또 무슨 대단한 정보를 줘서 저에게 고민을 안겨줄까 걱정되었으니까.
그래도 주인이 부르는데 가지 않고 버티는 하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어쨌거나 싹싹하고 출세욕 많고 성실한 하인을 연기하는 중이었으니까.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아, 들어오게.”
평소보다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한 집무실에서, 슬라르한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차를 직접 우리고 있었다.
“손님이라도 오십니까?”
그러나 슬라르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찻잔 두 개에 차를 따랐다.
“앉게.”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평소와는 다른 흐름이었다. 베델은 바싹 긴장한 채 슬라르한의 맞은편에 앉았다.
슬라르한은 찻잔 하나를 베델 앞쪽으로 밀어놓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베델.”
“예, 주인님.”
“자네가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
그리고 슬라르한이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베델은 슬라르한이 자신을 해고하려고 불렀나 싶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자신을 해고해 준다면 그거야말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럼 더 이상 이 저택에서 벌어진 일을 황제에게 보고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갈 리가 없었다.
“그동안 자네의 능력과 됨됨이를 높이 샀네. 자네가 저택 내 다른 사용인들의 곤란한 상황을 요령 좋게 해결해 주는 것도 알고 있고, 일리에까지 신경 써주는 것도 알아.”
베델은 함부로 대답하지 못하고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만 조금 더 꽉 쥐었다.
“자네가 저택 관리인들과 사용인들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까지 하고 있다지? 덕분에 집사와 하녀장이 일하기가 훨씬 편해졌다고 칭찬이 자자하더군.”
“과, 과찬이십니다. 그건 그냥, 제가 오지랖이 넓었던 것뿐이라…….”
“아니. 자네는 정말 최선을 다해 일해 주었어. 정말 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칭찬 끄트머리에 달린 말이 좀 이상했다. 베델은 가만히 그의 눈치만 보았다.
“자네가 제의받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보다 더 큰 보답을 하겠네. 그러니…… 지금 잡은 그 손을 놓고 내 손을 잡아주지 않겠나?”
“……예?”
“의뢰비 외에 황제 폐하를 따르는 이유가 따로 있나?”
베델은 벌어진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경악했다.
“아, 아니, 저는…….”
“이 자리에서 자네를 벌할 생각은 없어. 진지하게 자네를 영입하고 싶어 제안하는 것일세.”
심장이 무섭도록 쿵쾅거렸다.
도대체 언제 들켰는지 짚이는 구석조차 없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이 자신의 배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오해할 여지가 없었다. 아니라고 발뺌한다고 넘어갈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되고 보니 베델은 궁금한 거나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떻게 아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던가요?”
“그분이 제 사람들마저 쉽게 버릴 수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이래 봬도 황금 갈퀴의 수장입니다. 그걸 몰랐을 리가요.”
“그랬는데도 황제 폐하의 손을 잡은 이유는?”
“특별할 것도 없는 정기 보고 때마다 3백만 페르소, 거기다 조금이라도 상세한 정보, 특이한 정보에 대해서는 2천만 페르소까지 추가로 쳐주시거든요. 가장 후한 고객이시죠.”
“그러다 내 손에 죽게 될 거라는 불안감도 없었나? 아니면, 나를 완벽하게 속일 자신이 있었나?”
“……자만했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되었는데도 슬라르한은 화내는 기색 없이 차분히 차만 들이켰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일리에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일리에? 일리에에게는 자네 정체를 말해주었나?”
“아니요. 하지만 그 녀석 꽤 똑똑하니까…… 제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죠.”
슬라르한은 잠시 베델을 쳐다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베델도 일리에를…….’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지 몰라도, 슬라르한이 보기에 둘은 이미 사랑하는 사이 같아 보였다.
심장이 또 쥐여 짜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익숙하게 아픔을 삼키고 벤티악 공작으로서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일리에가…… 자네의 정체를 짐작할 힌트가 되어준 것은 사실이지. 1년 전쯤, 고모부님께 주의를 들은 적이 있네. 황제 폐하께서 우리 가문 내의 사소한 일까지 아시니, 꽤 측근인 누군가가 황제 폐하의 사람 같다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한 정보였다.
“처음에는, 자네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그런데 일리에의 신변과 관련한 익명 편지를 받고서는 그게 자네이지 않을까 짐작했지.”
베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 측근이라 봐야 몇 되지 않아. 그런데 그중에서 일리에의 안전을 걱정할 사람은 자네밖에 없거든.”
“하……! 이미 들켰으니 말씀입니다만, 어떻게 그게 저뿐일 수 있습니까? 디넬 경이나 기사단 사람들도 겉으로는 툴툴대지만 일리에 녀석을 꽤 챙긴다고요.”
“자신의 정체가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익명의 편지를 보낼 정도가 되는가가 문제겠지. 그리고 일리에는 사실, 자네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타인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아. 겉으로야 까불대지만.”
“그거야…… 그렇죠.”
“일리에의 신변을 걱정했다는 것은 일리에와 꽤 친밀한 관계라는 뜻이고, 일리에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연 상대는, 내가 알기로는…….”
슬라르한이 뒷말을 더 붙이지 않았지만 베델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일리에가 이 저택에서 제 마음을 내준 사람은 해봤자 슬라르한과 저뿐일 터였다. 타리크는…… 글쎄…… 좀 애매했다.
“제가 스스로 무덤을 팠군요.”
“설마. 나락에서 벗어날 동아줄을 잡은 거지.”
전과는 달리 자신만만한 슬라르한을 보며 베델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겨우 차를 들이켰다.
“나락에서 벗어날 동아줄이요? 공작께서 황제가 되면, 이 나라가 달라진답니까?”
슬라르한은 대답 없이 베델을 살폈고, 베델은 그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울분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황제? 썩었죠. 하지만 그 양반 혼자 이 나라를 말아먹은 건 아닙니다. 귀족 사회를 들여다보십시오. 제국의 1할도 안 되는 인원이 나머지 9할을 쥐여 짜내면서 제 배 불리기에만 열을 올리지요. 굶주린 열두 살짜리 계집애가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지다 맞아 죽었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시궁창 쥐새끼 한 마리 죽었다 치는 거죠.”
공작 앞에서 황제와 귀족을 욕하는데도 슬라르한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공작님 본인의 인성이 참으로 고결하다는 건 저도 인정하겠습니다. 솔직히 여기 들어와 사는 내내 공작께서는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사는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래서요? 귀족들의 도움이 아니면 황제가 될 수도 없는 분이, 그 썩은 귀족 사회를 다 뜯어고칠 수 있으십니까? 이 나라가, 황제 하나 바뀐다고 바뀔 나라냔 말입니다!”
베델의 속에 켜켜이 쌓인 귀족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슬라르한은 자신이 귀족 대표로 백성의 대표에게 혼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침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하지만 권력이나 부에 대한 욕심도 없는 그가 굳이 황제가 되려는 것은, 이런 나라를 조금이나마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일리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귀족이라서 거부감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핍박받는 사람의 대표가 될 상징성은 충분하지 않겠나?”
씩씩대던 베델도 그 말에 대해서만은 반대할 수 없었다. 베델이 할 말을 잃은 틈을 타 슬라르한이 진중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한 번에 만족스러울 만큼 바뀌지는 않겠지. 하지만 변화의 시작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네. 나는 그 변화의 시작점이 될 각오가 되어 있어. 손에 쥔 권력을 오래 잡고 있을 생각도 없고.”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황위 경쟁이라는 유례없는 방식으로 선출된 황제…… 자칫하면 귀족들이 파를 갈라 싸우고 저들끼리 계급을 또 나누게 될 원인이 되겠지. 다들 어디에 줄을 설지 고민하는 게 다 그 때문이 아닌가.”
당연한 일이었다. 황위 경쟁에서 이긴 후보자는 자신을 지지해 준 귀족들을 중용하고, 반대편에 섰던 귀족들을 내칠 테니까.
“그래서야 도박판이나 다름없지.”
“그렇다고 그들을 나 몰라라 할 건 아니잖습니까.”
“맞아. 그러니 황제 자리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되는 거야. 애쓴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보답을 하되, 그들의 권력이 고착화할 시간을 주지는 않을 생각일세.”
베델은 도무지 슬라르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금방 놔버릴 권력이라면 이 고생을 해서 도전하는 의미가 뭐란 말인가.
“거짓말!”
“믿고 안 믿고는 자네의 자유지만…… 영험한 점쟁이이신 일리에가 배팅한 후보가 나라는 건 잊지 말아주게.”
슬라르한이 씩 웃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미소였다.
베델은 일리에가 슬라르한에게 반한 이유를 더 모른 척하기 어려워졌다.
이토록 올바르고 단단하고 매력적인 남자가 웃어준다는데,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제기랄.”
베델이 공작 앞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욕설을 짓씹는데 슬라르한이 손을 내밀었다.
그 믿음직스러운 손을 바라보며 베델도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상관없는 도박판이라면, 이기는 쪽에 걸어야겠죠.”
“탁월한 선택이 될 거라고 약속하지.”
두 남자의 손이 단단히 마주 잡혔다.
* * *
요즘 황제는 황위 경쟁이 생각보다 지루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기대했던 것은 황위 후보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암투가 횡행하고, 황후와 황비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상당히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었고, 매일 자신보다 제 자식과 조카들이 더 칭송받는 소릴 들어야 했던 황제는 꽤 짜증이 났다.
“……엘로르 전하께서 리살로 신전 구휼원에 5백만 페르소를 기부하셨으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리어포드 마을과 리살로 마을에는 벤티악 공작이 방문하여 위로를 전하고 준비한 밀가루 500포대를 각 가정에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아, 다들 참으로 성군의 자질이 보이시는구나. 나 따위 늙은이는 얼른 죽어 사라져 드려야겠군그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후보들 모두 폐하를 본받고자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흥! 그대들 속내를 내가 모를 줄 아는가? 얼른 다루기 쉬운 애송이가 황위를 차지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겠지.”
황제는 안 그래도 뒤틀린 속을 스스로 더 뒤틀어가며 매일 불만을 쌓아갔다.
무슨 사고라도 터지기를 바라던 황제의 앞에 제국 북부에서 날아온 상소문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카스틸로 잔당들이 또 기승을 부린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지난번 토벌 이후 잠잠하더니, 돈이 다 떨어졌는지 또 기어 나온 모양입니다.”
“저런, 저런…… 인근 지역 제국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겠구나. 당연히 구제해야지.”
카스틸로 잔당 토벌은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는 했지만, 황제가 저토록 너그러운 자세로 출병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문제를 보고하던 대신은 물론 그 휘하 관리들까지 ‘이번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하고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황위 후보들을 긴급 소집해라.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다.”
그 소리에 다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황제는 또 황위 후보들을 싸움 붙일 기회로나 여긴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생각에 반대할 수 없었다.
황제가 소집을 명하자마자 두 시간 만에 네 후보가 황제의 앞에 앉았다.
“최근 너희들의 눈부신 활약에 대해 매일 보고받고 있는 바, 짐이 매우 뿌듯하도다. 다들 성군의 자질이 출중하니 그중 누굴 뽑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허허허!”
황제가 인자한 얼굴로 후보들을 칭찬했지만, 후보 중 그 누구 하나도 기쁜 낯빛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단지 누군가를 칭찬하기 위해 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차 한 잔을 다 마시지도 않은 시점에 황제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다들 카스틸로 문제에 대해 들어보았을 테지?”
“예, 그러하옵니다.”
“골치 아픈 녀석들이야. 이번에도 국경을 넘어와 카스틸로 국민이었던 이들을 배신자라며 죽이는 모양이더구나. 쯧쯧.”
카스틸로는 십여 년 전 제국에 복속된 소국이었다.
특히 남존여비 사상이 아주 강한 나라였는데, 제국에 복속되던 당시 억압받던 여성들이 제국에 협조한 덕분에 손쉽게 복속이 가능했다.
그러나 왕이었던 자와 군사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파르디나스와 필로코스의 국경 근처에 숨어 지내면서 중앙의 관심이 시들해질 때마다 내려와 카스틸로 국민이었던 여자들을 배신자라며 죽이거나 납치, 강간하곤 했다.
이미 제국민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여자들이 주 타깃이었는데, 그 탓에 국경 지역 국민들의 이탈이 심했다.
“이대로라면 필로코스 쪽 국경 마을이 텅 비겠다. 더 이상 좌시해선 안 될 일이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놈들을 절멸해야 할 것 같구나. 내가 직접 기사단을 지휘하며 놈들을 끝장내고 싶긴 하다만은…….”
황제의 시선이 후보들을 훑었다. 그 시선에는 잔인한 기대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다행히 내게는 날 대신해 줄 용맹한 후계 후보가 넷이나 있구나. 이번 일은 너희에게 맡기마.”
거기까지였다면 그저 또 한 번의 시험이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후보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지나가듯 한마디 덧붙였다.
“다들 몸조심하거라. 난전 중에 눈먼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 누가 죽였는지도 모를 테니…….”
그건 명백히 정적을 죽일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슬라르한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우리 백부님께서는 여전히 대단하시군.’
동생을 죽인 데 이어 이제는 자식과 조카를 죽이려고, 그것도 제 손을 대지 않고 죽이려고 작정을 했다.
그리고 그런 비정한 말을 들은 황손들의 눈빛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는 듯이 반짝거렸다.
황궁이란 안 그래도 더러운 것이 고여 더 더럽게 푹 썩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 주군은 그 진창 한가운데서 태어났기에 능히 버틸 수 있을 것이라던 클리드의 말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카스틸로 잔당 소탕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년으로 넘어갈 것 같으니, 겨울맞이 축제 때 하던 후보 평가 위원회의 점수 발표는 내년 봄맞이 축제로 미루겠다. 이번 일로 다들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길 기대하마.”
슬라르한은 황제의 입에 발린 걱정과 격려를 한참이나 더 듣고 있다가 출병 날짜를 듣는 것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물러나왔다.
* * *
“후우, 아직 10월 초인데 벌써 입김이 나오네요.”
일리에는 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을 보며 신기해했다.
벤티악보다 더 북쪽인 셰바란 지역은 이미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망할 새끼들. 저런 놈들이니까 여편네들도 학을 뗐지.”
한겨울을 제국 최북단에서 보내게 된 기사들은 카스틸로 잔당들에게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일리에는 그들을 보며 실실 웃다가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카스틸로 잔당을 뿌리 뽑기 어려웠던 이유는 이들이 파르디나스와 필로코스 국경 지역에 자리 잡고 제국군이 들이닥칠 때마다 필로코스 쪽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필로코스도 카스틸로 잔당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군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더 경계했기에 제국군은 늘 코앞의 놈들을 놓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필로코스의 왕세녀가 된 캐롤린을 포섭하는 게 아주 중요했다.
전생에 캐롤린과 손잡은 렌셔는 카스틸로 잔당을 뿌리 뽑기 위해 공조하는 대신 적당히 자신의 점수만 챙기는 쪽을 택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미 이번 일을 위한 사전 논의가 슬라르한과 캐롤린 사이에 충분히 오간 상태였으니까.
‘보나 마나 황손들은 절대 직접 나가 싸우려 들지 않을 테니, 이번 일에서도 슬라르한이 제일 높은 점수를 딸 수 있겠어.’
전생에 직접 검을 들고 기사단의 선두에 선 것은 슬라르한과 릴리에트뿐이었다.
릴리에트가 없는 이번 생에서는 기사단을 진두지휘할 사람이 슬라르한밖에 없었다. 검술 실력이 릴리에트에게도 한참 못 미쳤던 라반이 검을 들고 나설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전생에 검을 들고 누볐던 전장이 눈 앞에 펼쳐지자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타리크 쪽으로 시선이 갔다.
저 어딘가에서 타리크의 어깨를 찌르고 그에게서 스피어 마스터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빼앗아버렸던 죄책감이 여전히 양심을 찔렀다.
“타리크 님!”
“엉? 뭐냐, 꼬맹아.”
“이번에는 컬리넌 가 아가씨께 다녀오겠다고 제대로 인사하셨습니까?”
“뭐? 이 자식, 또 헛소리하지?”
타박하는 타리크의 귓불이 금세 달아올랐다.
“하지만 저번에 델칸트에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가셨을 때…… 아가씨께서 꽤 서운해하셨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중간에 아가씨의 안부 인사도 보내드렸잖아요.”
“……그게 진짜 엔시아가 전한 말이었다고?”
“네! 그럼 제가 미쳤다고 후작 영애를 사칭하겠습니까?”
타리크는 그 메시지마저 일리에의 장난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설마, 컬리넌 영애께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나,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아이고…… 그 아가씨, 보나 마나 엄청 삐치셨겠네요.”
타리크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것 같았다.
“이런…….”
“에휴, 내 그럴 줄 알았죠.”
“다, 닥쳐라! 그게 다 네 녀석이 평소에 장난을 너무 많이 친 탓 아니냐! 난 또 네가 날 놀리는 줄 알고……!”
“이젠 제 탓인가요? 쯧쯧.”
일리에가 한심하다는 듯 혀까지 차자 타리크는 분하다고 여기면서도 뭐라고 더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고 제가 타리크 님 성함으로 아가씨께 편지를 보내두었습니다.”
“뭐? 너, 도대체 뭐라고 헛소리를 보낸 거냐!”
“헛소리라뇨? 원래 이런 미묘한 관계일 때는 너무 질척대도 좋지 않은 법이니까, 간단히 어디 다녀온다는 보고 정도만 했죠. 지금쯤 컬리넌 영애가 그 편지를 앞뒤로 계속 살피고 있을 거예요. 뭐라고 더 써놓은 건 없나, 불빛에도 비춰보고 계실 테고.”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라고…… 뭐, 그 정도의 안부 인사는 붙였겠지?”
타리크는 헛소리 운운했던 게 방금이면서 이제는 편지를 제대로 적었는지 닦달까지 했다.
일리에는 사랑에 빠진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전생의 타리크와는 정말 많이 다르다 싶었다.
전생에는 제 주군처럼 기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표정으로 악에만 받쳐 있는 기사였는데…….
“보고 싶을 거라고 적어놨어요.”
“뭐! 야, 그건 너무 낯간지러운……!”
“여기서 죽으면.”
“……엉?”
“여기서 죽어버리면요, 영영 아무 말도 못 전해요.”
“그, 그거야 그렇지.”
“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늘, 유언을 쓴다는 생각으로 편지를 남겨야 해요.”
타리크의 입이 꾹 닫혔다.
“제가 그런 말도 안 써놨는데 타리크 님이 돌아가셔 버리면…… 컬리넌 영애는 영영 타리크 님의 마음을 짐작하지도 못하시겠죠.”
타리크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지다 못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말을 적지 말아야지. 내가 죽게 된다면 그런 편지를 받은 엔시아만 괜히 기분 찝찝해질 거 아니냐.”
“으휴, 남자들이란……! 타리크 님, 진짜 여자 마음 모르시네요!”
“아……니냐?”
“남자들은 그게 무슨 대단히 멋있는 건 줄 아는데, 전혀 아니거든요? 관심이랑 호감 줬더니 난 어떻다 말도 없이 죽어버리다니…… 그것만큼 남겨진 사람 허탈하게 하는 게 어딨어요?”
“그런가…….”
“그렇게 멋진 척 무게 잡다가는 후회하실걸요?”
타리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붉은 머리칼의 미녀를 떠올리는 중일 터였다.
“물론, 타리크 님은 무사히 그 아가씨 곁으로 돌아가시겠지만요! 그렇죠?”
“크흠. 당연하지!”
금세 잘난 척 턱을 치켜드는 그의 모습이 웃겼다. 어느새 이렇게 정이 들었나 싶을 만큼 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는데요, 절대 적의 약한 모습에 흔들리지 마세요. 절대로요.”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뇨. 모르시더라고요.”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리에는 피식 웃으며 느려진 말의 허리를 가볍게 찼다.
전생의 과오를 되돌릴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막 펼쳐지고 있었다.
* * *
카스틸로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출정한 네 개의 군대는 특히 많은 피해를 입은 마을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부근에 넓게 진영을 세웠다.
황제가 정말로 카스틸로 잔당을 뿌리 뽑을 의지가 있었더라면 네 후보의 군대를 통솔할 지휘관을 내려보냈겠지만, 후보들이 서로 죽이기를 바랐던 터라 오히려 통합된 지휘 체계 자체를 바라지 않았다.
덕분에 몸을 사린 쪽은 슬라르한이 아닌 나머지 후보들이었다.
슬라르한이 소드 마스터라는 건 알음알음 알려진 지 오래였고, 벤티악 기사단이 대단하다는 것은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예상대로 아이리스, 엘로르, 라반은 철통같은 보호를 받으며 막사 안에서 명령만 내리기로 했다.
그러니 가주가 직접 선두에 나선 슬라르한 진영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올리비에 공작 부인으로부터는 별다른 연락이 없나요?”
슬라르한의 심부름꾼으로 그의 곁에 붙어 있으면서 잔시중을 들고 있던 일리에는 작전 회의를 마친 기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슬쩍 물었다.
“그쪽도 준비가 다 됐다더군. 겉으로야 파르디나스를 더 견제하고 있었지만, 그쪽으로서도 카스틸로 잔당이 골치가 아팠을 거다.”
“셰바란 마을은 어때요?”
“이탈한 주민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아직 재생의 가능성은 있다. 이탈한 주민들도 아주 멀리 떠난 것 같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쨌든 이번 기회에 카스틸로 잔당들은 꼭 박멸했으면 좋겠어요.”
테르소의 아말 족은 제국인 여자 포로들에게는 원수였지만 자신들의 아이를 낳아주는 피르미 족과의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카스틸로 왕국은 여자 자체를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보질 않았다.
여자에게 임신, 출산, 육아, 가사, 노인 봉양의 모든 의무를 지웠고, 그러면서도 남자들에게 기생충처럼 붙어산다며 천시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남녀 사이에 범죄가 일어난다면 무조건 여성 쪽이 가중 처벌당했다.
여자가 강간을 당해도 사내를 부정하게 유혹했다며 여자 쪽을 공개 처형할 정도였다.
카스틸로 놈들의 그런 속성 때문에 전생에도 꼭 전멸시키고 싶었는데, 철딱서니 없는 렌셔가 필로코스 쪽의 공조를 끌어내지 못해 실패했다.
‘그놈들은 또 기어 나와 카스틸로 출신 여자들을 죽였겠지…… 만약 내가 타리크의 어깨를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좀 달랐을까……?’
카스틸로 잔당 소탕에 실패한 건 꼭 렌셔 때문만도 아니었다.
저 역시 소탕 작전 자체보다 타리크 디넬이라는 전력을 슬라르한에게서 제거하는 쪽을 택했으니까.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거야. 올리비에 공작 부인도 포섭했고, 타리크 디넬도 멀쩡할 테고, 전생의 나처럼 슬라르한을 방해할 인간도 없으니까.’
그 생각에 스스로가 조금 처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신의 사도를 방해하는 악당이나 다름없었다.
방향이 잘못된 노력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 일리에는 그녀의 전생을 통해 비싸게 배웠다.
“일리에.”
“아, 네!”
조금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에는 슬라르한이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주인님이요?”
일리에 앞으로 성큼 다가온 슬라르한이 검지 끝으로 일리에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너.”
그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낮고, 달았다.
“그, 그럴 리가요! 저 완전 쌩쌩한데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지?”
“제 표정이요?”
일리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댔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방금 일리에가 절대 ‘괜찮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리에는 너무나 생기가 넘치는 아이라, 어딘지 몸이 좋지 않거나 슬프고 우울한 생각에 빠질 때면 구름에 가린 해를 옆에 둔 기분이 된다.
내리쬐던 햇살이 갑자기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걸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다. 본인이나 아니고서야…….
“우리가 질까 봐 두려우냐?”
“아니요. 주인님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잘 아는군. 아니면 혹시, 따라나서고 싶어서……?”
“어…… 그건 좀…… 네.”
일리에는 여전히 검을 들고 전장에 달려들고 싶었다.
전생에 자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활약했는지 안다면 슬라르한도 내보내 줄 텐데,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고는 했다.
하지만 이곳에 따라오는 조건으로 절대 전투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해버린 터였다.
일리에의 그런 생각이 빤히 보이는지, 슬라르한은 더욱 엄한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약속했지? 이번 일은 아말 족 소탕 때와는 다르다. 절대 군영 바깥으로 나가지 마라. 군영 외곽 쪽도 안 돼. 아니, 막사 밖으로는 웬만하면 나가지 마라.”
“네에…….”
“이번에는 떼써도 소용없어.”
일리에의 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슬라르한도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널 노리는 인간 역시 많다는 걸 잊지 마라. 이번 전투에는 다른 후보들까지 다 내려와 있으니 더 위험하다. 내가 널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고, 널 신경 쓰느라 적들을 놓칠 수도 있어.”
“……제가 좀 더 강한 기사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넌 이미 네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정말로 나를 도와주고 싶다면, 제발 안전하게 있어. 네 걱정을 안 해도 되도록.”
“네.”
듣고 있자니 왠지 속이 간질거리는 염려여서 일리에의 실망했던 얼굴도 스르르 풀어졌다.
그때, 바깥에서 병사들을 집합시키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드디어, 첫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마.”
“네. 다 쓸어버리세요!”
일리에의 씩씩한 응원에 슬라르한이 피식 웃고는 막사의 장막을 걷으며 밖으로 나갔다.
쏟아지는 빛을 향해 걸어 나가는 크고 단단한 등, 그리고 장막이 도로 닫히기 직전 아주 잠깐 마주친 시선을, 일리에는 영영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 *
황제 후보들이 수도를 비웠지만 그들이 없는 곳에서도 네 진영의 싸움은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
“상상 이상이군.”
클리드는 루트 교의 정확한 분포를 알아봐 달라고 의뢰했던 건의 결과를 하나씩 받아보는 중이었다.
조금 위험한 사이비 종교로나 여겼는데 루트 교의 교세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었다.
“지방 쪽은 더 심합니다. 루트 교가 득세해서 야나크 교 신전에 아무도 오지 않는 지방도 있다니 말 다 했죠.”
배우지 못한 이들은 루트 교의 어두운 면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인간은 평등하니 리카온을 믿으면 너희도 귀족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달콤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흑마법 주술에 참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루트 사제들이 시키는 대로 영혼을 팔아 영주를 죽이고 지역 유지를 죽였다.
여러 사람의 영혼을 조금씩 떼어 바쳤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루트 사제들이 죽은 부자들의 재산을 가져와 나눠주니 그게 기꺼울 따름이었다.
“저주로 사람을 죽이고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른다고? 그건 이미 배움의 문제가 아니야.”
“지속적으로 세뇌당한 탓이지요. 게다가 보통 살해당하는 이들의 평소 행실이 좋지 못하기도 했고요. 여럿이 함께하니 죄책감도 옅어졌을 겁니다.”
“그대로 놔두기에는 너무 위험해…….”
이들이 엘로르를 돕는다지만 그 저의가 너무 의심스러웠다. 아니,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이들을 의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해리엇 아일의 행방은 찾았나?”
“아니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사라진 뒤로 수도에 루트 교도 수가 늘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어디 숨어서 배후 조종을 하는 것 같은데…….”
한숨이 나올 일이었다.
엘로르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할까.
“맥클리어 주교 쪽은 어떤가? 뭐, 대충 예상은 되네만.”
“수도권의 야나크 교 사제들을 모아 교황청의 성기사단 파견과 교리성 권한 확대 결정에 항의하고 있습니다. 헤스페리아 대주교 쪽과도 완전히 틀어졌죠.”
“대주교 암살도 여러 번 사주한 것 같던데?”
“저희가 파악한 것만도 세 번입니다. 대주교의 신력이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게 됐겠지만요.”
정보원은 거기에 추가된 정보도 몇 장 건넸다.
헤스페리아가 암살자들을 물리치며 그들의 배후를 캐려 했는데 암살자들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었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흑마법 계약에 의한 살인멸구였던 것 같았다.
클리드는 정보원에게 정보료를 건네주고 언제나 그렇듯 몸조심하라는 인사와 함께 일별했다.
정보원마저 나간 집무실에는 클리드의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정말이지, 내 계획을 잘도 망가트려 놨군.”
클리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엘로르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은 신전이었다. 그런데 그 신전의 세력이 반으로 쪼개져 싸우고 있으니 엘로르에게는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그러니 이상하단 말이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여자는 아닌데…….”
엘로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곤 했지만, 클리드는 그녀의 속이 저보다 훨씬 시커멓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성녀 놀이를 하며 신전의 세력, 아울러 신도들의 세력을 끌어오고 있는 엘로르였는데 거기다 루트 교를 풀어놓으면 저에게 손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엘로르는 그쪽 길을 선택했다.
‘신전 세력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리는 더 큰 이득이라…… 그게 뭐지……?’
주체가 해리엇이라면 이해되는 일이기는 했다.
흑마법사에게 가장 눈엣가시일 세력이 야나크 교일 테니 그 안에서부터 와해하겠다는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을 허락했을 엘로르는 대체 어떤 대가를 약속받았길래 자신의 가장 큰 세력까지 포기했을까.
한참 생각에 빠졌던 클리드는 결국 해리엇이 흑마법사라는 그 부분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가 다른 계획을 진행하는 중이거나, 혹은 엘로르를 세뇌했거나…….’
클리드는 책상 위에 넓게 펼쳐놓은 정보들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쪽 세력과 적대 세력에 대한 정보, 클리드가 개인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가 작은 종이에 키워드만 쓰인 채 수도의 지도 위에 핀으로 점점이 꽂혀 있었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가설을 세웠다 무너트리고, 다시 세워나가던 클리드의 시선이 순간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이엘로드 숲…….’
몇 달 전 슬라르한이 기괴한 미치광이의 실험실을 찾아냈던 곳이었다.
다 낡아빠진 오두막 안에 이상한 실험 기구가 가득 차 있었고, 오두막 한쪽 구석에 파인 구덩이 안에는 시체 조각들이 썩어가고 있었다는 곳…….
‘아무래도 해리엇 그 여자의 흔적이겠지?’
거기까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지만, 해리엇이 거기서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아낸 바가 없었다.
‘해리엇이 벤티악 공작을 공격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몸을 뺐다…… 게다가 오두막 안의 철창에 어떤 동물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바로 그게 문제의 핵심일 것 같은데 말이야…….’
클리드는 지도 위의 이엘로드 숲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벤티악 공작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군.’
클리드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선택을 잘못했다는 건 명확해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최악을 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제국의 북쪽에서는 전에 없이 무서운 기세로 카스틸로 잔당 소탕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격 체계가 통일되지 않아 전투는 산발적인 데다 중구난방으로 이뤄지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전력이 투입되었기에 점점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틸로 놈들도 멍청하지만은 않아서, 네 개의 세력이 각각 따로 싸운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그 뒤로는 이쪽 진영을 약 올리다 저쪽 진영으로 도망가는 식의 작전을 많이 썼는데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슬라르한은 이쪽으로 도망 온 잔당들을 단 한 번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갑옷 벗을 시간도 없이 최전선을 누비고 살았다.
‘그래도 닷새나 돌아오지 않는 건 처음인데…….’
일리에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쪽의 뿌연 지평선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건조한 겨울 날씨에 흙먼지가 피어오른 것을 보니 한창 싸우는 중이거나, 아니면 기사단이 말을 달려 군영으로 돌아오는 중일 것이다.
일리에는 부디 후자이기를 바랐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에 대마법사라고는 해도 말이야, 그래도 사람이잖아. 당연히 지칠 거라고. 몇 안 되는 잔챙이들 정도는 그냥 놔둬도 될 텐데.’
하지만 슬라르한은 절대 단 한 명이라도 얼쩡대는 꼴을 못 봤다.
일리에는 그의 융통성 없는 완벽주의를 툴툴대며 막사 주변을 설렁설렁 뛰었다.
최전방이라고는 해도 여기서 일리에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슬라르한의 심부름꾼으로 따라왔는데 슬라르한이 막사에 거의 붙어 있질 않았으니까.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뭔가 주워 먹고 체력 훈련을 한 다음 땀을 씻고 막사 주변을 정리했다. 사실 정리나 청소라고 해도 막사의 주인이 돌아오질 않으니 거의 손댈 데도 없었다.
다시 주변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잡일을 조금씩 돕다가 밥을 먹고, 또 검술 훈련을 했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저물곤 했다.
너무도 지루하고 걱정만 느는 나날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따라오질 말걸.’
일리에는 막사 주변을 지나 군영 외곽을 뛰면서 속으로 투덜댔다.
슬라르한과 만난 이래 이렇게나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못 봤던 적이 없었다.
그를 못 본다는 게 이런 건가, 싶어지니 나중에 그를 떠나 사는 게 조금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군영의 끄트머리쯤에서 달리기를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였다.
“……!”
뒤에서 덮쳐오는 살기에 일리에는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일리에가 서 있던 자리로 누군가가 단도를 휘두르며 미끄러졌다.
“어……? 너는……!”
“오랜만이네, 변태 아가씨.”
잊으라고 해도 잊기 힘든 외모의 사내였다.
“이든! 이든, 맞지?”
“옛 친구 부르듯이 부르지 마, 이 도둑아!”
머리를 감싼 두건 밖으로 그의 아름다운 은발이 몇 가닥 흩날렸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그의 푸른 두 눈엔 원망과 독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일리에는 그가 자신을 부른 ‘도둑’이라는 호칭 덕분에 그가 왜 자신을 죽이려는지 감을 잡았다.
“이봐. 말은 바로 해야지. 도둑은 내가 아니라 네 주인님이잖아?”
그 말에 이든은 더 화가 난 듯 다시 일리에를 향해 덮쳐왔다.
일리에는 또다시 순간적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하지만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가벼운 체력 훈련을 하러 나온 거라 검 따위는 지니고 있지 않았고, 하필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여기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잡생각을 하며 뛰다 보니 평소보다 멀리 나와 버린 것 같았다. 왜 하필 이든이 숨어든 날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도 참 의아한 일이었다.
‘제기랄. 슬라르한이 알면 혼낼 텐데.’
사실 슬라르한에게 혼나기 전에 여기서 살아남는 것부터가 일이긴 했지만, 일리에는 익숙하게 슬라르한을 먼저 떠올렸다.
“자, 잠깐, 이든! 난 너한테 그다지 악감정 없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악감정 가질 일도 아니지. 내가 네 방에서 갖고 나온 건 엄연히 우리 주인님이 받으셔야 할 물건이었다고. 너도 생각을 해봐.”
“닥쳐!”
“으앗!”
이든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건 일리에에게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몸을 굴려 도망 다니는 것도 한계였으니까.
일리에보다 두 뼘 가까이 더 큰 이든은 도망 다니는 일리에를 쉽게 붙들었다.
일리에가 이든의 정강이며 복부를 걷어찼지만, 그는 익숙한 듯 아픔을 참으며 일리에를 바닥에 넘어트렸다.
“야! 정신 차려! 여긴 우리 진영이야! 너 이러다 잡히면 개죽음이라고!”
“난 너만 죽이면 돼! 너만 죽이면, 내가 개죽음을 당하든 말든 상관없어!”
“야, 야, 야! 그건 아니지! 아, 좀 진정해 봐!”
늘씬한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든은 의외로 격투에 능했다. 하긴, 만에 하나의 상황이 발생하면 아이리스를 지켜야 하니 웬만한 훈련은 다 받았을 것이다.
일리에는 진심으로 이든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동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주인을 향해 이루지 못할 감정을 품은 동병상련의 정이랄까.
군영 내의 개들이 가까운 곳에서 피어나는 피 냄새를 놓칠 리 없으니, 여기서 이든이 일리에를 죽인다고 해도 그는 절대 그 자랑스러운 승리를 제 주인에게 보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든은 정말로 자신의 목숨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가 쥔 단도의 날카로운 선단이 일리에의 목 근처에서 어지러이 배회했다.
“으윽, 이, 이것 좀 놓고, 말을……!”
“너하고 나눌 얘기 없어. 그냥 죽어!”
“시, 싫…… 으윽……!”
사내가 제 온 체중을 싣고 내리꽂는 단도를 막아내기엔, 일리에의 힘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죽어!”
이든이 기합처럼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제 온 힘을 가해 단도를 일리에의 목에 찔러넣었다.
* * *
“후우…… 쥐새끼 같은 놈들이네요. 오늘 혼쭐이 났으니 며칠은 잠잠하려나요?”
닷새나 쉬지 않고 카스틸로 잔당들과 숨바꼭질을 했더니 타리크도 피로감과 짜증을 숨길 수 없었다.
차라리 검을 들고 제대로 맞서기나 했다면 속이라도 시원하지, 그놈들은 약 올리다 도망치기 일쑤라 병사들 전원이 정신적으로 지쳤다.
하지만 결국 슬라르한은 이쪽을 도발한 카스틸로 일당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몰살했다.
그러니 당분간은 이쪽으로 얼씬도 못 할 게 분명했다.
“글쎄, 모를 일이지.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래도 오늘 밤은 좀 쉴 수 있겠죠. 오랜만에 좀 씻어야지, 으휴, 땀 냄새…….”
슬라르한은 타리크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오히려 정겨웠다. 타리크가 이렇게 투덜거린다는 건 모든 일이 다 잘 흘러갔다는 뜻이니까.
“들어가면 바로 저녁 시간이겠네요.”
“돌아간다는 전갈을 미리 보내놨으니 아마 가자마자 먹을 수 있…….”
“음……? 각하……?”
타리크는 잘 말하다가 갑자기 온몸이 굳은 슬라르한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타리크.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 나머지를 데리고 천천히 따라오게.”
“예?”
슬라르한은 타리크가 되묻는 그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말에 박차를 가했다.
분명, 일리에에게 걸어둔 아티팩트 하나가 방금 깨어졌다.
도대체 군영 안에 얌전히 있는 아이가 목숨을 위협당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슬라르한은 그야말로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이럇!”
저 멀리 군영의 깃발이 보이는데, 최고의 군마가 입에 거품을 물며 달리고 있는데 모든 게 너무 느리게만 느껴졌다.
“일리에!”
저 먼 곳에 있는 아이가 부르는 소릴 들을 리 만무했지만 슬라르한은 애타게 일리에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또 그 순간, 아티팩트 하나가 더 깨어졌다.
“안 돼!”
일리에의 발에 걸어준 아티팩트는 세 개.
그중 하나는 위르스 산에서 깨어졌고, 나머지 두 개가 방금 짧은 시간을 사이에 두고 깨어졌다.
일리에가 지금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뜻이며,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목숨을 지켜줄 아티팩트는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럴 때는 공간 이동 마법을 배우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마음은 이미 일리에 곁에 가 있는데 몸은 아직도 군영에 닿지 못했다.
“일리에!”
극도의 긴장과 공포가 엄습하자 슬라르한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마력이 마구 뻗어 나와 그가 향하고자 하는 쪽으로 퍼져 나갔다.
‘죽일…… 거야…… 일리에를…… 감히……!’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점차 사라지며, 일리에를 공격하는 그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살의만 점점 명징해졌다.
그리고 그사이 군마는 군영에 닿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군영의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났지만 슬라르한은 본능적으로 말이 쓰러질 것을 깨닫고 날듯이 바닥에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주변의 눈을 의식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일리에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곧장 달렸다.
‘안 돼…… 이번엔 잃을 수 없어……!’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일리에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만이 그를 달리게 했다.
그리고 저 멀리, 그의 소중한 파랑새가 웬 괴한 아래 깔려 간신히 단도를 막아내고 있었다.
언뜻, 목 주변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리에!”
그는 저도 모르게 검을 휘둘러 자신의 마력을 쏘아냈다.
자칫 일리에가 맞을지도 모를 만큼 괴한과 일리에가 붙어 있었지만 슬라르한의 마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가 죽이고자 하는 상대를 향해 곧게 뻗어나갔다.
“크학!”
시커먼 연기 같은 무언가에 맞은 이든은 그대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쿨럭!”
몸에 남은 충격이 뒤늦게 올라오더니 검붉은 피가 뱉어져 나왔다. 아마 갈비뼈도 몇 개 부러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든은 제 몸이 부서질 듯 아픈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주, 죽여야…… 저 계집을…… 죽여야…….”
두 번이나 단도로 목을 찔렀는데도 죽지 않은 일리에였다.
하지만 왠지 세 번째는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힘을 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일리에! 일리에!”
한참 바닥에 피를 쏟던 이든이 가까스로 고개를 드니, 그 유명한 벤티악 공작이 자신의 하찮은 심부름꾼 계집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그 뺨을 톡톡 치고 있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방금까지 죽을힘을 다해 버티던 일리에는 거의 탈진한 모양이었다.
“주…… 죽여야…… 해…….”
이든은 다시 단도를 그러쥐고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꾹 누른 채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러자 슬라르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황금색, 또는 호박색이라고 알려진 그의 눈동자는 그러나, 호박색이라기엔 상당히 붉은 빛을 띠었다.
“벌레만도 못한 것이 감히…….”
슬라르한이 이를 바득 갈며 자신의 검을 쥐었다.
소드 마스터인 그가 저 대검을 살짝만 휘둘러도 이든은 종잇장처럼 베여나갈 터였다.
그러나 이든은 그래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여기서 죽은 것을 안다면 아이리스가 제 충심만큼은 알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이든은 이를 악물고 단도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대검을 가볍게 놀려 그의 단검을 쳐내고는 무방비 상태인 이든의 가슴을 향해 대검의 끝을 겨누었다.
“아이리스 전하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겠군.”
“이건, 오로지…… 내…… 의지…….”
“노예 따위의 의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네놈의 죄는 어디까지나 네 주인의 죄지.”
“아, 아니야!”
“감히 내 것을 훼손한 그 죄의 대가는, 네 주인의 사지를 잘라서 받겠다.”
그제야 이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그 전에, 네놈부터 목숨을 내놔야겠지만.”
슬라르한의 검에 소드 마스터의 검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든은 하얗게 질린 채 무릎을 꿇었다.
“아이리스 전하는, 제가 여기 와 있는 것도 모릅니다. 저 계집애가 제 방의 물건을 훔쳐 가서 혼났던 것 때문에…… 제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벌인 일이니…… 제 목을 자르시고, 대신 아이리스 전하께만은…….”
“너도, 아이리스도…… 전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슬라르한에게는 이미 맹렬한 살의밖에 남지 않았다.
일리에가 죽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완전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는 아찔한 감각은 그를 거의 미칠 지경으로 만들었다.
슬라르한의 주변으로 피어오른 검은 안개가 불길하게 일렁이며 이든의 주변을 감쌌다.
“내 것을, 탐한 죄는, 죽음으로…….”
슬라르한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더니 퍼져 있는 안개 같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이든의 목 주변을 감싸더니 천천히 조여들었다.
“끅, 끄윽…….”
손으로 떼어내려 해도 잡히지 않는 힘이었다. 이든은 제 목 주변을 긁어대며 괴로워했다.
슬라르한은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검을 들어 그 날카로운 끝으로 이든의 가슴을 사선으로 내리긋기 시작했다.
“내 것이야.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아…….”
무언가에 홀린 듯 중얼거리는 슬라르한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음습하고 섬뜩했다.
‘아이리스…… 아이리스…….’
이든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아이리스 걱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때문에 아이리스가 곤란해질 것이 두려웠지,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어쩌면 기다리던 죽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죽음은 쉽게 와주지 않았다.
갑자기 목을 조이던 힘이 탁 풀어지고, 가슴을 그어대던 검 끝이 물러갔다.
“켁…… 쿨럭……!”
잔뜩 좁아진 목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을 하며 피도 뱉어내던 이든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게…… 뭐지……?’
어룽거리며 밝아진 시야 끝에, 석상처럼 굳은 채 뒤를 돌아보는 슬라르한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같이 시선을 내렸더니, 일리에가 그의 망토 끝을 간신히 붙들고는 뭐라고 중얼대고 있었다.
“하지…… 말아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일리에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이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일리에.”
“저……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이든은 저도 모르게 슬라르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핏빛이었던 두 눈동자가, 빠르게 호박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듯, 아니, 이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아예 잊어버린 듯 검을 내던지고 일리에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더니 제 왼손의 장갑을 벗고는 그대로 손날을 베어냈다.
“말하지 마. 일단, 일단 이것부터…….”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받친 뒤 피가 흘러내리는 자신의 손날을 일리에의 입에 갖다 댔다.
그것만 해도 의아한데 일리에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익숙한 듯 그의 피를 빠는 것이다.
이든은 자신이 정신을 잃고 이상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졌다.
그리고 일리에가 슬라르한의 손을 떼어낼 즈음이 되자, 일리에의 목에 났던 상처는 완전히 사라졌다.
“뭐…… 뭐야…….”
이든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슬라르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사라졌던 살기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일리에가 슬라르한을 붙잡았다.
“주, 주인님! 저 녀석,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슬라르한은 답이 없었다.
그러자 일리에가 비척대며 일어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 불쌍한 애예요. 그…… 아마, 저 때문에 많이 혼나서 그랬던 모양인데…….”
“일리에. 이건 네 문제가 아니다. 아이리스 전하의 첩자가 우리 군영 내에서 내 휘하 사람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야. 명백히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무조건 죽이겠다고만 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그래도 지금은 온전히 벤티악 공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든은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건 온전히 나 혼자 일으킨 일입니다! 내 개인적인 원한이라고! 차라리 날 죽여!”
“닥쳐, 이 멍청아!”
버럭 화를 낸 쪽은 일리에였다.
“죽는 걸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마! 죽고 나면 다 끝이야!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고, 아무것도 바로잡을 수 없다고!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리스 전하도 더는 못 봐!”
일리에는 아직 기력이 돌아오지 않은 몸으로 소리를 지른 탓에 금방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시 슬라르한에게 매달렸다.
“주인님도 보시다시피 애가 많이 모자라잖아요. 어디가 좀 아픈 애라고요. 한 번만 불쌍하게 여겨주세요. 네?”
“왜…… 저 녀석을 감싸는 거냐.”
슬라르한의 목소리가 어딘지 상처받은 것 같았다.
일리에도 슬라르한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기는 어려웠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제 속을 들킬까 봐서.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이든이 죽을지도 몰랐다.
“저…… 저도, 노예였잖아요. 저도 주인님께 도움이 되려고 필사적이었어요. 그래야 주인님이 저를 버리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니까…… 저 녀석을 이해할 수 있어요.”
슬라르한의 눈이 커졌다.
생각해 보면 일리에가 이든의 방까지 숨어 들어가 아이르델의 유품을 훔쳐 온 것도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일리에가 제 주인에게 도움이 되겠답시고 위험을 무릅쓴 것뿐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내가, ‘도움이 되어야 버려지지 않는다.’라는 것일 줄은 몰랐다.
“일리에…… 난 널 버린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알아요. 그래도 불안한 게 노예 신세인걸요. 저는 주인님의 마음을 알고도 불안했는데…… 저 녀석은 어떻겠어요?”
슬라르한은 그제야 일리에가 이든을 감싸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리에가 보기에 이든은, 그러니까 과거의 자신이자 제 안의 가장 약한 부분인 것이다.
그런 이든을 죽여 버린다면 일리에는 오히려 상처받을 터였다.
슬라르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전히 일리에가 저 같잖은 놈의 손에 죽을 뻔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저 같잖은 놈이 일리에의 과거라고 생각해 보니 조금 가련해 보이기도 했다.
“이번 단 한 번만이다…….”
그 말에 이든보다 일리에가 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아유, 저 녀석도 알아들었겠죠! 야, 그렇지?”
홱 뒤돌아보는 일리에의 얼굴에 이든은 좀 멍해졌다. 자길 죽이려던 사람을 저토록 절박하게 살리려 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리에는 아무 대답 없이 멍한 이든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야, 정신 안 차리냐? 허튼 소리하지 말고 얼른 감사하다고 인사드려!”
“하지만…….”
“네 주인을 생각하라고!”
슬라르한이 마음을 바꿔먹을까 봐 불안해하며 일리에가 계속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이든이 어느 부분에서 흔들릴지 뻔히 안다는 듯한 그 협박에, 이든도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다시는…… 이런 무례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애가 이제야 정신 좀 차린 것 같네요. 그죠, 주인님? 하하! 야, 뭐하냐? 얼른 일어나서 돌아가 봐! 얼른!”
슬라르한의 날카로운 눈빛이 여전히 이든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일리에는 더 안절부절못하며 이든을 채근했다.
이든은 두 사람을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작게 웃었다.
“너는…….”
“엉? 너 또 무슨 헛소릴 하려고!”
“너는 사랑받고 있구나…….”
“어……?”
“부럽네…….”
이든은 웃고 있었지만 그 어떤 표정보다 우는 것에 가까웠다.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꾹 다물었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얼른…… 돌아가.”
이든은 슬라르한에게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간신히 일어섰다.
피 칠갑을 한 입가, 시커멓게 멍이 든 목, 길게 여러 번 베인 가슴, 부러진 게 확실해 보이는 갈비뼈…… 오히려 이든이 죽다 살아난 사람 형상이었다.
일리에는 그 모습이 왠지 너무 안타까워서, 하지만 이 이상 자신이 그를 챙겼다가는 슬라르한이 더 화를 낼까 봐 그저 손끝만 움찔거렸다.
그 마음을 어떻게 안 건지, 슬라르한이 벌떡 일어나 이든에게 다가갔다.
“살려 보냈는데 곧 죽어버리는 것도 억울할 일이지…….”
그는 한 손은 이든의 목에, 다른 한 손은 이든의 갈비뼈 쪽에 얹더니 소량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의 피처럼 상처를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었지만, 마력으로 만들어낸 상흔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는 있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널 보면 아이리스 전하를 죽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이든은 창백해진 채로 다시 인사를 올리고 어두운 숲을 향해 비척비척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슬라르한은 뒤돌아 일리에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일리에의 발목을 확인했다.
창백한 이든의 얼굴처럼 희끄무레한 색으로 변한 마석 세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주인님…….”
“나는.”
“네, 넵!”
“다시는 테르소에서의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죄, 죄송합…….”
“날 죽일 셈이냐?”
일리에는 그 말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가 죽을 뻔한 게 왜 슬라르한이 죽는 일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요……?”
“막사 안에만 있으라고 했잖아.”
“사람이 어떻게 막사 안에서만 살아요? 답답해서 죽을걸요. 제가 이렇게 나돌아다니는 게 싫으셨으면…… 좀 빨리 오시지 그러셨어요.”
저도 모르게 서운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슬라르한은 거기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늦게 돌아와서 서운했나?”
“아니, 뭐…… 할 일이 없으니까 지루해서 그랬죠…….”
아까까지만 해도 희게 질렸던 얼굴에 갑자기 홍조가 돌았다. 슬라르한은 그제야 저 자신도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일리에의 뺨에 튄 흙을 닦아주다가 피가 흘러 검붉게 젖은 셔츠 깃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피에 젖어 축축한 셔츠에서 피 냄새가 옅게 풍겼다.
“일리에.”
“네……?”
“절대…… 죽지 마라.”
“죽지 않으려고 노력은 해요.”
“네 말대로, 죽으면 너로서는 모든 게 끝나. 하지만 혼자 남겨진 나는…….”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남겨진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프고도 섬뜩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 하하! 혼자 남겨지다니, 그 무슨…… 주, 주인님께는 타리크 님도 계시고, 이제는 세이렌 님도 계시고…….”
“글쎄.”
슬라르한은 더 이상 답하지 않고 일리에를 달랑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주변에 쳐놨던 결계를 풀었다. 그제야 슬라르한을 찾아 소리 높여 외치는 타리크와 다른 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엥? 어디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았는데……!”
“주변에 들짐승이 다녔던 모양이다.”
타리크의 시선이 일리에에게로 향했다.
일리에는 ‘또 너냐?’ 하는 표정의 타리크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북쪽에는 금방 겨울이 들이닥쳤다.
아직 카스틸로 잔당이 완전히 소탕된 것은 아니었지만, 눈이 내리는 기간에는 놈들도 공격해올 수 없었다.
슬라르한은 이 시기에 셰바란 마을을 둘러보며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후보들이 진영을 구축한 마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셰바란 마을은 특히나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마을이 가장 크기도 했거니와 카스틸로 출신 여성과 혼인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죄다 때려 부순 것 같던데요? 벽체가 허물어져 이 한겨울에 옷을 껴입고 지내는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마을 공동 시설의 파괴가 특히 심하더라고요.”
“우선은 목책부터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카스틸로 놈들이 소규모 습격을 해올 수도 있으니까요. 나무가 많은 산이 근처라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기사들은 각자 병사 몇을 데리고 마을 곳곳을 둘러본 결과에 대해 보고했다.
분쟁의 소강상태는 두세 달 정도 지속될 것이고, 그사이에 마을을 복구하려면 꽤 서둘러야 했다.
“군사를 네 조로 나누고 마을 복구, 경비, 벌목, 휴식 순서로 순환 근무하게 하도록. 군량 상태는?”
“황실에서 지원을 넉넉히 해주셨고 컬리넌 후작가와 롤랑 백작가에서 추가로 보내주신 고기와 포도주가 어제 도착했습니다.”
“감사한 일이군. 쉬지 못하고 일하는 병사들에게 음식만큼은 모자람 없이 베풀도록.”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약 올리는 카스틸로 잔당을 잡는 것보다야 마을에 머무르며 일하는 편이 병사들에게는 차라리 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진영에서는 한겨울 동안 푹 쉬는 쪽을 택했기 때문에 슬라르한은 병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다들 힘들겠지만 이곳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고 조금만 고생해 주게. 우리야 전쟁이 끝나면 수도로 돌아가 편하게 지내겠지만, 우리가 손봐주지 않으면 이곳 사람들은 앞으로도 한참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지 않나.”
“각하의 뜻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불만 있는 녀석들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만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기사단은 대체로 슬라르한의 뜻을 잘 따라주었다. 덕분에 마을 복구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다 따라주어도 날씨가 따라주지 않으면 별수 없었다.
12월 중순까지는 그나마 잘 버티던 하늘이 12월 말에 접어들자마자 꾸물거리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참아왔던 눈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징글맞게도 많이 오네.”
마을을 한 바퀴 순찰하고 들어오던 타리크가 눈 묻은 망토를 탈탈 털며 구시렁거렸다.
“이 기회에 다들 쉬는 거지.”
같이 나갔다 들어온 슬라르한은 걱정할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눈을 턴 망토를 벽에 걸었다.
어제부터 눈 올 기운이 물씬 풍겼던 터라 잘라놓은 목재나 복구 장비들은 잘 보관해 두었지만, 이렇게나 눈이 많이 오면 며칠간은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할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얼른 이 앞으로 오세요.”
슬라르한과 타리크가 지내는 작은 오두막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는 일리에는 그들이 나간 사이에 불을 지펴 요리사에게서 받아온 스튜를 푹 끓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눈 묻은 겉옷과 부츠를 대충 벗어놓는 사이 따끈한 스튜와 빵으로 식탁을 차린 일리에는 그들이 식탁에 앉자 젖은 부츠를 불가 앞에 널어놓았다.
“일리에.”
“아, 네!”
식탁에 앉은 슬라르한은 숟가락도 들지 않고 일리에를 불렀다.
전에는 먼저 드시면 나중에 먹겠다고 거절도 해보았으나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자리에 앉지 않으면 절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타리크 보기가 왠지 민망해서 결국은 제일 말석에 앉아 두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나날이었다.
타리크도 일일이 눈살 찌푸리기가 지쳤는지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마을의 상황과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식사 시간도 끝났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눈이 오면 할 일이 없었으니까.
세 사람은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았다. 슬라르한은 어제 읽다 만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타리크는 창밖을 보며 불퉁한 표정을 풀지 않았으며 일리에는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아으으! 진짜 할 일 없네.”
요란하게 하품을 하던 타리크가 어깨 부근을 주물럭대며 중얼거렸다.
“할 일이 없으니까 오히려 삭신이 쑤신단 말이지.”
그 소리에 슬라르한이 그를 흘끔 살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여기 온 이래 계속 어깨를 만지고 있던데. 혹시 다친 건가?”
“다친 적은 없습니다만, 이상하게 이쪽 어깨가 좀 쑤시네요.”
그는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 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일리에의 귀는 쫑긋 섰다.
“어, 어깨가, 쑤셔요?”
“엉. 창 휘두를 일도 별로 없었구만, 왜 이러는…… 잠깐. 미리 말해두는데, 나 아직 늙은 건 아니다!”
일리에가 늙은이니 뭐니 놀릴까 봐 타리크가 미리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일리에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타리크가 문지르고 있는 곳은 분명 전생에 일리에가 검으로 찔렀던 오른쪽 어깨 부근이었다.
그리고 타리크는 고작 잠을 잘못 잔 것 정도로 저렇게 아픈 티를 내지 않는다.
일리에는 전생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생……은 이미 없어진 일이잖아. 그런데 왜 어깨가 아파?’
생각한다고 해서 그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 검에 찔린 뒤 다시는 창을 들지 못하게 되었던 전생의 타리크가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거친 기운을 풀풀 흩날리던 그가 그 이후로 왠지 말수가 적어졌고, 표정이 없어졌더랬다. 창기사에게서 창을 빼앗았으니 그는 분명 깊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잊고 있던 죄책감이 일리에의 속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그, 제, 제가 좀 주물러 드릴게요!”
일리에는 벌떡 일어나 타리크의 뒤로 돌아갔다. 타리크는 이 녀석이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미쳤냐?”
“가만히 좀 있어 보세요! 기사는 자기 몸 관리가 최우선인 거 몰라요? 아프면 주물러 달라고 부탁을 해도 모자란 일인데 왜 센 척하세요?”
그러고는 타리크의 오른쪽 어깨를 꾹꾹 주무르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아, 가만히 있으라니까요!”
일리에는 타리크의 등짝을 세게 쳐서 윽박지르고는 다시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어떻게 아프세요? 호, 혹시…… 찌르는 것처럼 아프세요?”
“네 놈이 친 등짝이 더 아프다, 이 자식아! 별것도 아닌데 갑자기 호들갑을 떨고 난리야?”
“할 일 없으니까 이거라도 하게요!”
“쳇! 그럼 그렇지.”
타리크는 코웃음 치면서도 일리에가 주무르는 대로 그냥 놔두었다. 일리에의 말대로 정말 찌르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슬라르한의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하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일리에는 그의 어깨를 주무르는 게 지상 과제인 것처럼 열심히 몰두하고 있었지만, 타리크는 책에 시선을 두고 있으면서도 아까부터 책장을 넘기지 않는 슬라르한이 대단히 신경 쓰였다.
“크흠! 야, 이제 됐다. 괜찮아진 것 같다.”
“무슨 말씀이세요? 주무른 지 5분도 안 됐는데.”
“아이참, 진짜…… 아! 아까 데일 녀석이 밥 먹고 나서 같이 포커나 치자고 했는데, 깜빡했다!”
타리크는 어색하게 선언하듯 말을 내뱉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도 걸치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고 말았다.
뒤에 남겨진 일리에만 황당한 표정으로 쾅 닫힌 문을 쳐다볼 뿐이었다.
“어깨 아픈 것보다 포커가 더 중요한가…….”
일리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구시렁댔다. 하지만 거기에 맞장구치는 대답도, 피식 웃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제 등 뒤가 좀 싸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슬라르한은 아까 모습 그대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통 이런 일이 벌어지면 쳐다보는 척이라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건만…….
‘삐쳤다. 이건 확실히 삐친 거다!’
왜 삐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심기가 단단히 상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의 기운이, 그것을 숨길 생각도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으흠! 저, 저기, 주, 주인님도 어디 아픈 데 없으세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없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아! 오래 걸어 다니셨으니까 다리 아프시죠?”
마침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다리였기에 일리에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슬라르한의 옆에 찰싹 붙어 앉은 뒤 두 손으로 그의 무릎 부근을 주물렀다.
그 순간 슬라르한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어어? 이것 봐요! 아프시잖아요!”
“괜찮다니까.”
슬라르한이 일리에의 손을 잡고 제 무릎 위에서 치웠다. 하지만 일리에는 미간까지 찌푸리며 짐짓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손대자마자 아파서 놀라셨으면서! 하여간에 남자들은 센 척하는 게 자랑이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일리에는 다시 슬라르한의 무릎을 꼭꼭 주물렀다.
슬라르한은 읽던 책까지 덮고 당황했다.
“나는 괜찮…….”
“저도 주인님의 괜찮다는 얘기는 안 믿을 거예요.”
일리에는 의기양양하게 손에 힘을 더 주면서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릎에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오는 일리에의 손길에, 슬라르한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만져본 적 없는 곳을, 하필이면 일리에가 만지고 있었으니까.
“정말 괜찮다니까!”
“아, 좀 가만히 계세요!”
“너야말로 가만히……!”
슬라르한이 참지 못하고 일리에의 손목을 잡고 거칠게 떼어냈다.
주무르는 손에 무게 중심을 얹었던 일리에가 기우뚱하며 뒤로 넘어간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일리에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그 위를 슬라르한이 누르는 모양새였다.
“어…….”
놀라서 눈을 깜빡이던 일리에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해 보고자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역시나 놀란 슬라르한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일리에만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묘한 적막감이 돌았다.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 창밖에서 휘이잉 바람이 지나는 소리는 들리는데, 일리에와 슬라르한 두 사람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서는 어서 빨리 이 상황을 무마하라고 요란하게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일리에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마른침만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갈 뿐이었다.
왠지, 슬라르한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확실히 그랬다. 그의 숨결이 제 뺨에서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잘게 숨을 쪼개 쉬던 일리에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곧, 슬라르한의 입술 끝이 일리에의 입술 끝에 스치듯 닿았다. 일리에의 등줄기로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잠시 거기에 머물던 슬라르한의 입술이 곧 멀어지더니 슬라르한이 몸을 일으켜 급하게 오두막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일리에만 놀란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그리고 갑자기 어마어마한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으아악! 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으아악! 앞으로 슬라르한 얼굴을 어떻게 봐!’
일리에는 저 혼자 오해해서 주둥이를 내밀고 있었다고 착각하며 제 머리를 두들겨댔다.
하지만 문을 등진 채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은 슬라르한은 아직도 거칠고 뜨거운 숨만 헐떡대고 있었다.
‘내가…… 내가 미쳤지.’
아직도 일리에의 체온이 입술 끝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두 입술이 포개졌다면…….
‘거기서 멈출 수 있을 리 없잖아!’
슬라르한은 두껍게 쌓인 눈 위로 열 오른 제 머리를 그대로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