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18/32)

3장

“각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이 시간에 누가 방문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시간은 이미 오후 8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비밀 회동이나 아니면 애초에 약속을 잡을 시각도 아니었지만, 약속하지 않은 사람의 만남 요청을 집사가 저에게까지 알린다는 것은 찾아온 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단 모시게.”

슬라르한은 느슨히 풀어놨던 셔츠 소매와 깃의 매무새를 다시 손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뜻밖의 손님이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부터 사과를 드려야 할까요?”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 보이기는 하는군요, 카시르 영식.”

평소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의상을 고집하고 어느 한 군데 흐트러짐도 없었던 클리드 카시르가, 지금은 온 산을 헤매다 구조된 사람처럼 바지에 풀물이 잔뜩 들고 여기저기 잔 나뭇가지에 쓸린 꼴로 서 있었다.

늘 깔끔하던 밀색 머리칼도 흐트러진 채였고 면도도 하지 못했는지 듬성듬성 턱수염이 자라 있었다.

“앉으시죠. 식사는 하셨습니까?”

“식사 생각은 없습니다만, 물 한 잔을 주신다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슬라르한은 곁에 있던 저그를 집어 들고 그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클리드가 물을 마시는 사이 슬라르한이 보낸 눈짓에 집사는 조용히 물러갔다. 아마 누구도 이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게 신경 써줄 터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하아……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죽으러 간다면서 일리에에게 보냈다는 편지 얘기는 들었습니다.”

“아아, 거기서부터 해야겠군요. 간단히 압축하자면, 저는 엘로르 전하가 흑마법에서 손 떼지 않는 한 같이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고, 잔뜩 화가 나신 우리 전하께서는 시녀이자 흑마법사인 해리엇 양에게 시켜 저를 감금하셨죠.”

“대단하군요.”

“그런데 그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눈을 떠보니 감시자도 없는 웬 오두막이었고…… 거기서 도망쳐 나온 거죠.”

“지나치게 간단한데요?”

클리드는 피식 웃으며 반쯤 남은 물을 다시 단숨에 비웠다.

“저도 처음에는 너무 쉽다 싶었는데,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뒤에서 웬 사냥개……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웬 짐승이 따라오기 시작하더군요.”

“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사냥개의 속도를 이기기는 힘들었을 텐데…….”

“그랬겠죠. 심지어 그건…… 다리는 늑대였으니까…….”

“다리는 늑대……? 아까는 사냥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머리는 개였습니다. 그것도 두 개나 달렸더군요.”

슬라르한은 그게 키메라라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이미 네발짐승 정도는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는 수준인 모양이었다.

네발짐승을 조합할 수 있다면 인간을 조합하는 것도 금방일 터였다.

‘아니…… 이미 성공했는지도 모르겠군.’

이엘로드 숲에서 발견된 그 괴기스러운 오두막,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조각난 시체의 잔해들…… 그건 분명히 인간을 가지고 키메라 연구를 한 흔적이었다.

슬라르한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픈 문제라니요……? 엘로르 전하 옆에 상급 흑마법사가 붙어 있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있습니까?”

“그 흑마법사가 생각보다 더 미친 것 같거든요. 당신이 봤던 그 괴생명체는 키메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것들을 필요한 부분만 조합하여 마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생명체라고 부르기도 부적합합니다만.”

슬라르한의 설명을 듣고서야 클리드는 자신이 그 짐승의 눈을 보고 이상하게 느꼈던 이유를 깨달았다.

움직이는 시체를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그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금방 깨닫기 어려웠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끔찍하군요.”

“그보다 더 끔찍한 건…… 그 흑마법사가 아마, 인간을 대상으로도 키메라를 만든 것 같다는 점입니다.”

“아……! 그래서……!”

“……그래서?”

“제가 누워 있던 그 오두막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상태가 이상하더군요. 헐벗은 데다 정신을 놓은 것처럼 멍하니…….”

“아마 키메라 연구에 쓰일 후보들이었을 겁니다. 당장 그 오두막 먼저 쳐야겠군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십니까?”

슬라르한의 질문에 고개를 쳐들었던 클리드는 한참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 이상한 짐승에게 쫓기느라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이해합니다.”

클리드는 땀으로 젖었다가 식어 찐득거리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여기까지 어찌어찌 도망쳐 오기는 했지만, 지금쯤이면 해리엇이나 엘로르도 자신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됐을 것이다.

카시르 후작 저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슬라르한이 물었다.

클리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저 지독한 피로감만이 온몸을 짓눌렀다.

“엘로르 전하와는 완전히 갈라서신 겁니까?”

“그분은 제가 아닌 그 흑마법사를 택했습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그분 곁에 있을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카시르 후작 저는 이미 엘로르 전하의 입김이 닿고 있습니다. 영식이 사라진 뒤, 당분간 영식께서 황궁의 귀빈실에서 지내게 됐다고 얘기하고 다닌 게 바로 카시르 후작이니까요.”

“아아, 아버님께서는 형님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제 실종 따위야 가벼이 여길 수 있는 분이시거든요.”

클리드가 쓰게 웃었다.

그런 클리드를 가만히 바라보던 슬라르한이 고민 끝에 제안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흑마법사가 이 안까지 뒤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뜻밖의 호의에 클리드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졌다.

“저를 포섭하시는 겁니까?”

“일리에를 집적거리지만 않는다면.”

“하……! 이젠 본인 마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당신이 일리에에게 일러바칠 리 없다는 걸 아니까요.”

“왜 그렇게 절 믿으십니까?”

“당신을 믿는 게 아닙니다. 연적에게 좋은 일을 해줄 남자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 말에 순간 멍해 있던 클리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세상에, 벤티악 공작!”

그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한참을 더 웃던 그가 간신히 웃음을 진정시키면서 덧붙였다.

“공작은 못 속이겠군요.”

“남자의 직감이죠.”

슬라르한은 다시 집사를 부르는 종을 울렸다.

“당분간 카시르 영식이 여기서 지낼 테니 방을 준비해 주게. 당장은…… 목욕물과 식사부터.”

* * *

모든 것이 급박하게 흘러갔다.

황위 경쟁의 마지막 해라는 조바심, 초조함이 모두의 판단력을 흐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보들 중에서 가장 처참한 성적을 보이는 라반은 라리에트가 소설의 판권을 슬라르한에게 넘긴 뒤부터 제 어미인 다이애나와 싸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잘 구슬렸어야죠! 걔 송별회에 가서 그 난장판을 벌여놓지만 않았어도 걔가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자신이 부추긴 주제에 이제 와 어미 탓을 하는 라반을 보고 다이애나도 더는 참지 못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라반! 라리에트에게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낸 게 누군데! 라리에트가 돌아선 것도 네가 그 애를 클로이덴 백작에게 시집보내려 했기 때문 아니냐! 그래놓고는 어미를 탓해? 차라리 라리에트를 밀었어야 했어! 널 믿은 내가 잘못이다.”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던 두 사람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지원까지 잃은 라반은, 더는 기대할 것 없는 후보였다.

하지만 무너지는 것은 라반만이 아니었다.

사전 조사를 충분히 해야 할 댐 건설 계획을 급하게 밀어붙이던 아이리스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는 12월이 되기 전에 슬라르한 쪽으로 쏠린 흐름을 자신에게로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절박했고, 황위 경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경쟁자 하나가 그녀의 실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리스와 벨린 백작가가 계획했던 댐 건설 계획이 귀족 회의에서 통과된 순간에는 큰 고비를 지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그건 아이리스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다음날 바로 그녀에게 투자한 귀족들이 헐레벌떡 뛰어와 따지기 시작했으니까.

“아이리스 전하!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저한테 약속하셨던 루아므네의 영주 자리! 그걸 앤트워스 백작에게도 약속했다고요?”

“어허! 자네가 잘못 알아들었겠지! 그건 전하께서 애초부터 나에게 약속하신 거라니까 그러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전하! 법사부의 판관 자리, 그, 그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제게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도대체 왜 리버트 자작 같은 자가 그 자리를 거론하고 있는 겁니까?”

“아이리스 전하! 댐 건설을 위한 암반 조사 내용이 부실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저는 이 공사를 위해 빚까지 져가며 투자했습니다! 망하면 안 된다고요! 공사와 관련된 서류를 좀 보여주십시오!”

늘 고상하고 점잖은 분위기가 흐르던 아이리스의 접견실은 목에 핏대를 세운 귀족들이 들어차 소리를 지르느라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시장터가 된 것 같았다.

접견실로 향하는 문 앞에서 창백하게 질린 채 귀족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다 듣고 있던 아이리스는 벌벌 떨리던 두 손을 꽉 쥐었다.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일단 지금 이 위기만 넘기면, 황제만 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을 열어라.”

“하오나 전하……!”

시녀가 아이리스보다 더 벌벌 떨며 귀족들 앞에 나서려는 그녀를 말렸다.

“열어.”

아이리스는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시 한번 명했다.

흔들림 없는 명령에 시녀도 더 말리지 못하고 바들거리는 손으로 잠금장치를 풀고 접견실의 문을 열었다.

“아이리스 비아 솔렌 1황녀 전하 드십니다.”

시종이 큰 소리로 고하자 제멋대로 떠들던 귀족들도 순간 말을 멈췄다.

탐욕과 조바심과 분노 같은 것으로 후텁지근하게 데워졌던 공기가, 아이리스의 등장과 동시에 서늘하게 식었다.

“다들 이렇게 기립해 맞이해 주니 고맙군요. 이제 착석해도 좋습니다.”

아이리스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귀족들을 착석시키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다 큰 사내들의 고함 소리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아이리스의 모습에, 따지러 몰려왔던 귀족들도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불안감이 다 가셨을 리 없다.

“전하! 어젯밤에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집에 익명의 투서가 전해졌습니다. 그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제일 씩씩거리던 달튼 백작이 저에게 온 편지를 펼쳐 아이리스에게 건넸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아이리스가 추진하고 있는 댐 공사는 전부 엉터리이며 오로지 귀족들의 돈을 끌고 오기 위한 핑계라는 것, 그리고 네게 약속한 그 자리는 이미 앤트워스 백작에게 약속한 자리라는 것이었다.

누가 쓴 편지인지는 몰라도 내부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배신을 했구나.’

아이리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간 이 노련한 귀족들에게 물어뜯기고 말 터였다.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댐 건설이 장난입니까? 엉터리라니요! 말도 안 되는 모함에 놀아나지 좀 마십시오. 경쟁 막판이 되니까 결속을 흔들기 위해 마구잡이로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인데, 그런 것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판단력이 흐려지셨습니까?”

“하, 하지만 앤트워스 백작에게 물어보니 그도 루아므네를 약속받았다고…….”

“달튼 백작. 루아므네와 비슷한 영지가 파르디나스에 몇 개나 있습니까?”

“예? 그, 그건…… 잘…….”

“쯧쯧. 이러고도 대귀족이라 할 수 있으십니까? 왜 루아므네란 이름에만 집착하십니까? 그 규모를 보시란 말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꼬투리 잡힐 수 있는 저로서는 제가 드리고자 생각한 영지를 딱 집어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하죠. 누군가의 것을 뺏어서 드리겠다는 거니까. 그렇기에 그와 비슷한 규모의 영지 이름으로 돌려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

“다른 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버젓이 임기가 남은 자리를 드리겠다고 말씀드리면,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가만히 넘어갈 것 같습니까? 그렇기에 그 비슷한 것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정도는 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건만!”

“죄, 죄송합니다, 전하.”

아이리스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제발 부끄러운 줄 좀 아십시오. 제 밥그릇 뺏길까 봐 아침부터 달려온 꼴이라니…… 다른 후보들이 알까 두렵습니다.”

판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아이리스가 저희를 속였다며 분노를 드러내던 이들이 전부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두통이 생기는군.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건대,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떠올려 보시란 말입니다.”

안타깝다는 듯한 어투에 귀족들의 고개가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 접견실에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아이리스는 등을 돌려 퇴장했다.

이 진창 같은 황궁에서 가장 오래 산 황녀답게, 그녀는 귀족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에 도착한 아이리스는 이든만 들어오게 허락한 뒤 방문을 잠그게 하고는 그대로 소파 위로 무너졌다.

“전하!”

“이든…… 내가 실패하면 그들은 날 죽이려 들 거야. 내 뼈와 가죽을 발라내 팔아서라도 제 돈을 돌려받으려 하겠지. 일이 실패한다면 난…… 난……!”

“전하, 이제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분명 황제가 되시는 분은 전하이십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상하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든은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바들바들 떠는 아이리스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제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명령해 주십시오, 전하. 제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이든! 너까지 내 곁을 떠날 셈이야?”

아이리스의 눈이 순간 표독스러워졌다.

이든은 이럴 때마다 그녀의 숨겨진 다정함을 느끼곤 했지만, 지금은 그조차 너무 괴로웠다.

아이리스의 곁에서 그녀의 고통을 그대로 목격하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지난번처럼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다치고 올 생각하지 마. 그때도 벤티악 공작이 너그럽게 봐줬으니 그 정도로 끝난 거지, 법도대로라면 넌 그 자리에서 끔찍하게 죽었어.”

샤르덴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아이리스가 또다시 이든을 책망했다.

거기서 보고 들은 일들을 일러바쳤다면 칭찬을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살려준 은혜도 모르는 짐승은 아니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그랬다고? 왜? 내 곁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아서?”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전하! 저는 조금이라도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든. 넌 내 노예야. 그 어떤 황족도 고작 노예에게 기대지 않아. 넌 그냥 내 옆에서 예쁘게 웃기나 하면 돼. 그냥 내 옆에 있으라고! 알았어?”

이든은 이를 앙다물고 물기 어린 눈을 꾹 감았다.

노예로 전락한 순간부터 자존심이라고는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아이리스가 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수치심으로 저려왔다.

“이든. 대답해. 위험한 짓 하지 않고, 내 옆에 있을 거지?”

“……네, 전하.”

“하아, 그래, 착하다, 우리 이든.”

아이리스가 이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사랑하는 아이리스의 품에 안겼는데도 이든은 슬펐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슬펐다.

* * *

“으음……!”

식사를 하다 말고 슬라르한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일리에가 움찔했다.

“주인님. 또 가슴이…….”

“괜찮다. 신경 쓸 것 없어.”

“하지만 최근에 이런 일이 잦아졌잖아요. 의원을 부르세요, 제발.”

“의원이 와서 본다고 나을 일이 아니라 그렇다.”

“네?”

“그런 게 있어.”

슬라르한은 반도 먹지 않은 음식을 남겨두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네가 불안해 보이면 저택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눈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거다. 황제 폐하가 안달을 내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하지만…….”

“애초에 난 의원을 만날 일이 없다. 네 목숨을 구한 피가 내 몸에 잔뜩 흐른다는 것만 기억해도 알 수 있는 일 아니냐.”

그러고 보니 슬라르한이 다친 걸 본 적이 없었다. 피를 건네주려고 칼로 손을 그은 상처도 금방 아물었고.

“그렇다면…… 마, 마력과 관련된 통증인 건가요?”

일리에는 누가 들을세라 슬라르한 곁에 바싹 붙어 소곤거렸다.

“비슷해. 마력이 더 커지려니 조금 무리가 오는 것뿐인데, 어차피 흑마법사와 싸우려면 마력은 좀 키워놔야 해서 어쩔 수 없다.”

슬라르한은 이번에야말로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무리 일리에라 해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였고, 어쩔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일리에를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아, 그런 거였구나…….”

“줄곧 괜찮다고 말해왔던 것 같은데.”

“칫. 괜찮다는 말처럼 안 믿기는 말이 어딨어요?”

“네 괜찮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냐?”

“거, 거짓말이라니!”

슬라르한은 이제 저에게 눈썹도 찡그리고 반말을 섞기도 하는 일리에를 보며 쿡쿡댔다.

일리에와 이런 한가한 농담이나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가 앞으로 마주해야 할 문제들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다.

‘위험해…….’

슬라르한은 여전히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몸 안의 기운을 조절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쉬는 편이 좋겠지. 일찍 잠자리에 들 테니, 집무실 정리를 부탁한다.”

“네! 푹 쉬세요.”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정수리를 쓰다듬고는 침실로 향했다.

날뛰려는 마력을 안정시키는 데는 꽤 많은 힘이 소모됐다.

일리에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해 놨지만 슬라르한은 날이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때 갑자기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마력에 심장이 쥐어짜이고 뇌가 타버리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치게 쾌락을 자극하는 감각이라 불쾌해졌달까.

범람하는 힘에 몸을 맡기면 분명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한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달콤한 게 좀 지나쳐서 토할 것 같은 기분도 같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그의 몸에 내재된 사비 족으로서의 두 본능일 것이다.

리카온의 피는 늘 악에 물든 힘을 원하지만 엘룬의 축복은 그 힘을 경계하게 만든다.

엘룬의 축복이 리카온의 힘을 압도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슬라르한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차라리 잠들어 버리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던가.

슬라르한은 한동안 그를 괴롭혔던 기시감이 지배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황궁인데도 어딘지 다른 느낌이라 어색했다.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귀족들이 왠지 떨떠름한 얼굴로 괜히 그를 피했고 누구 하나 그를 환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슬라르한은 그때 이게 언제인지 깨달았다.

‘황위 경쟁 발표가 있던 대축연…… 그때인가?’

슬라르한은 오랜만에 소외감과 옅은 혐오감 같은 것을 느끼며 연회가 벌어지는 홀로 들어섰다.

흘끔대는 시선은 언제 느껴도 그다지 기분 좋지 않았다.

아직 황제가 나오지도 않았고 모두 가볍게 음료를 즐기고 있을 뿐인 그 너른 홀에서, 슬라르한은 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서도 철저히 혼자였다.

그때, 저 멀리서 웬 환한 빛이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벤티악 공자. 아니, 이젠…… 공작이겠군요.”

언젠가 본 적 있었던 붉은 머리칼의 그녀였다. 흐릿한 적발과는 달리 선명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릴리에트 전하.”

“그러게요.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뵌 것 같으니까…… 7년쯤 됐네요.”

슬라르한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서 이런 머리 색깔을 한 소녀의 이미지가 얼핏 스쳤지만, 그 이상으로는 더 떠오르지 않았다.

7년이나 보지 못한 사이라면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아무도 그에게 말 걸지 않는 그곳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사를 건네온 것이었다.

“잘 지냈냐고는 못 묻겠네요. ……얘기 들었어요.”

그러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개망나니 같은 황제 폐하 때문에 벤티악 가에서 너무 고생이 많네요. 돕지 못해서 미안해요.”

슬라르한은 조금 놀랐다.

맞은편의 그녀는, 그러니까, 그래, 황녀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황녀인 것은 분명했다.

황손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돕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진심인 듯, 그녀의 입에 걸린 미소에는 위로의 기운이 어렸을 뿐, 조소 같지는 않았다.

슬라르한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맙다고만 하면 황제가 개망나니라는 말에 수긍한 꼴이 되고, 황제 폐하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기엔 너무 위선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러자 릴리에트라는 그 황녀는 주변을 슬쩍 훑어보다가 다시 입 주변을 손으로 가린 채 속삭였다.

“솔직히, 저 같았으면 당장에 쳐들어와서 저 망나니 목을 벴을 거예요. 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벤티악 공작 정도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대단한 인내심이라고 생각해요.”

“전하…….”

“알아요, 알아요, 내가 미친 소리 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래도 사람인데, 화 나는 게 당연하잖아요. 남인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공작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할 때마다…… 내가 그 인간의 딸이라는 게 미안할 지경이라고요. 친딸이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랄지…….”

입을 삐죽대며 미간을 찌푸린 얼굴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지만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혼자 키득대며 소곤댔다.

“놀라지 않는 걸 보니 그 인간이 고자라는 얘기는 들었나 봐요?”

내뱉는 말마다 대답하기 어려운 말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쪽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혼자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는데, 나중에는 좀 기쁘더라고요. 나는 내가 저 미치광이 핏줄이라는 게 늘 불안했거든. 나도 언젠가 저 꼴이 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니 고자래! 엘룬께서 황실에 자비를 베푸신 거죠. 물론 황비랑 붙어먹은 놈도 제정신은 아니겠지만, 설마 저 개망나니만 하겠어요?”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뭔가 굉장히 신기하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벤티악 영지에서는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도, 웃지도 않는다는 게 떠올랐다.

“그렇습니까.”

“네. 아! 나 지금 벤티악 공작을 위로하던 중이었죠, 참. 최근 들어 가장 기쁜 일이라 저도 모르게 자랑을 했네요. 미안해요.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음…… 잘 버티셨다고요. 앞으로는 상황이 점점 나아지길 바랄게요. 진심으로.”

반짝반짝.

눈동자도 반짝, 종알대는 입술도 반짝, 반들거리는 코끝도, 귀여운 귓불도, 날씨보다 조금 이르게 드러낸 어깨도, 모든 것이 다 반짝거렸다.

저런 빛을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어릴 때 부모님과 둘렀던, 황실 별장이 있는 리벤 호수에서 본 것 같았다.

한여름, 청록빛을 띤 호숫물에 햇빛이 반짝여 눈이 부셨는데, 딱 그때 느낀 기분이 들었다.

저 빛을 쥐고 싶다고…….

그가 일렁이는 속을 뱉듯 한숨을 쉬자 눈앞에 펼쳐졌던 장면이 가루 날리듯 흩어졌다.

사방으로 훅 퍼진 빛의 입자는 다시 모여들며 또 다른 기억의 장면을 그려냈다.

당장이라도 꼬투리를 잡아 벌을 내릴 것처럼 치켜 올라간 황제의 눈꼬리, 못마땅해 보이는 황후와 황비들의 얼굴, 멀찍이 물러선 귀족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슬라르한은 익숙한 듯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곧 황제의 길고 긴 잔소리가 이어질 터였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이상하네요. 아까 분명 사냥하는 모습을 봤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화살이 아니라 검으로 잡고 계셨구나! 죽인 다음에라도 화살을 꽂아놓지 그러셨어요, 벤티악 공작!”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그는 황제 앞이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돌렸다.

사냥의 여신처럼 직접 말을 탄 채 활을 쏘던 유일한 황녀, 릴리에트였다.

그제야 그는 이것이 사냥 대회 때의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암사슴보다야 좀 컸죠, 아마? 대략 열 마리 정도가 공작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던데. 몇 마리 죽였잖아요? 맞죠?”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런다는 듯, 그녀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우지도 않은 채 물었다.

올려다보지 않아도 이 일의 배후인 누군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킨 듯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일이 더 커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저 햇빛 같은 소녀가 저를 노리는 누군가의 또 다른 표적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기는 자신이나, 정말로 일을 묻어버리는 황제나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고맙기는 했지만 그녀가 왜 저를 도와주는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경쟁자 아니던가.

그는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릴리에트라는 저 황녀는 꼭 황제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경쟁자가 곤란에 빠지길 적극적으로 바라야지, 왜 돕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는데, 자꾸 시선이 갔다.

‘나도 나약해 빠졌군. 내 목을 노릴 상대가 하찮은 자비심 좀 베풀었기로서니, 거기에 흔들리다니.’

하지만 이 차가운 수도와 황궁에서 처음 받아보는 배려였다. 처음 마주하는 진심이었다. 누군가의 속뜻 없이 환한 미소를 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휩쓸린 모양이었다.

그러지 말자고, 다음에 볼 때는 일부러 차갑게 대해 그 얄팍한 관심을 끊어내자고 생각했는데…….

“르한!”

허락하지도 않은 자신의 애칭을 함부로 부르며 유쾌한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그 황녀에게서 눈길을 떼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참, 그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요. ‘안녕, 릴리.’라고 하면 그만인데.”

짓궂은 눈매를 찡긋거리며 종알대는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한 번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지는 못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녀를 볼 때마다 들리지 않는 인사를 건넸다.

‘안녕, 릴리.’라고…….

다시 곱씹는 그 이름이 왜 이렇게 가슴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햇살 같은 릴리, 용감하고 씩씩한 릴리, 정적에게도 자비심을 베푸는 릴리, 내가 무너트려야 할 릴리, 사랑하는…… 릴리.

메말랐던 눈물샘에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더니 속눈썹이 젖어 들었다.

눈꼬리에 둥글게 몰리던 것이 주르륵, 관자놀이 위를 타고 흐르며 가슴속에서 뜨끈하게 막혀 있던 숨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허억!”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난 슬라르한은 한동안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을 느끼며 뜨거운 숨만 뱉어냈다.

꿈이 흩어지던 순간 흘러나온 눈물은 금세 멈췄지만, 그는 말라가는 눈물과 함께 사라지려는 한 소녀의 얼굴과 이름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릴리…… 릴리……? 릴리가 누구지……?’

어디선가 들어봤다.

흔한 이름이기도 했지만 그의 주변에서 그 이름이 들린 적은…….

“아!”

떠올랐다. 라리에트였다. 라리에트가 쓰는 작가명이 릴리였다. 그리고 라리에트는 꿈속의 그 소녀처럼 흐린 적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졌다.

“하아…… 내가 라리에트 전하의 꿈을 꿨다고? 희한하군.”

왠지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어딘지 좀 이상했다. 벌써 흐릿해진 꿈의 잔상이라지만, 라리에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라리에트 전하의 책 출판 일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군.’

전혀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 책을 출판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전부 일리에에게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슬라르한은 문득,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울컥울컥 치솟으려던 마력이 잠잠히 가라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이군. 하지만 또 언제 튀어나올지…….’

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붙였다. 이번에는 꿈을 꾸지도 않는 깊은 잠이었다.

넘치려는 힘을 완벽히 갈무리한 슬라르한이 편안한 잠에 빠진 같은 시각, 수도의 다른 곳에서는 맥빠진 이들이 낮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군요.”

흑마법사 하나가 실망했다는 투로 말했다.

제물의 생명력을 집어삼키며 붉게 빛나던 마법진은 무언가와 싸우는 듯 일렁거리다가 결국 천천히 빛을 잃었다.

벌써 다섯 번째 시도였는데 공허의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카제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저번보다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까. 힘을 가로막고 있는 문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거예요.”

제물을 스무 명이나 바친 보람이 있었다. 역시 장작이 넉넉해야 불이 오래 타는 법이니까.

“다음번에는 서른 명을 준비해 보도록 하죠.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으니까.”

카제야의 독려에 다른 흑마법사들도 기운을 차렸다.

* * *

설핏 잠이 들었던 클리드가 다시 눈을 뜬 건 자정이 넘은 한밤중이었다.

‘또 이 시간에 깨버렸군. 불면증인가?’

불면증에 걸릴 만도 했다.

벤티악 공작 저에서 지낸 지 며칠이 지났는데,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통 소식을 듣기가 어려웠다.

슬라르한이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도 최근 뭔가를 하느라 바빴고, 가끔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베델이라는 하인이 식사나 허드렛일을 챙겨줬는데 클리드는 그 하인 역시 평범한 하인은 아니리라 믿었다.

일머리 좋고 서글서글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데도 여기 머무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부분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가끔은 일리에가 들르기도 했다.

처음 이곳에서 만난 일리에의 태도는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으엑!”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던 그 모습만 떠올리며 웃음이 나왔다.

슬라르한이 앞뒤 사정을 설명하며 당분간 이 저택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설명하니 어찌나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지, 마치 이 저택의 주인이 일리에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쨌든 그 후로는 슬라르한이 시킨 것인지, 가끔 와서 대놓고 감시를 했다.

방 안을 기웃거리며 뭐 수상한 게 없는지 살피기도 했고, 불만 가득한 눈으로 사람을 위아래로 훑기도 했다.

그런 일리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클리드는 엘로르와 관계를 끊었다는 이야기, 자기도 흑마법사의 실험실에서 희생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불쌍하게 늘어놓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결국엔 그 유치한 대사를 읊어야만 했지. ‘전하, 저와 흑마법사 중 누굴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그랬더니 엘로르 전하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나보고 ‘당신은 날 배신할 거잖아!’라더군.”

이 부분에서 일리에가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것도 같다.

“도대체 평소에 얼마나 미덥지 못했기에 그런 소리까지 들으신 겁니까?”

“흐음…… 그건 좀 억울한데? 내가 그분을 믿지도 않았고, 서로가 필요에 의해 계약을 맺은 사이인 것은 맞지만, 난 계약 내용을 성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고. 어쨌든 계약서상에 의하면 그녀는 내가 가장 원하는 걸 줄 예정이었으니까, 내가 굳이 그 계약을 뒤엎을 이유는 없었지.”

“정말 그랬다면 왜 엘로르 전하가 그런 말씀을 하셨겠어요? 그분은 딱 보기에도 영식을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엘로르 전하께서 날 좋아한다는 건 눈치챈 주제에, 왜 내가 너한테 호감이 있다는 건 몰라주는 거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안, 미안! 농담이야. 나랑 조금만 더 놀아줘.”

클리드는 짓궂게 웃으며 일리에를 붙잡았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이긴 하지만, 엘로르 전하는 미래를 살다가 돌아오셨다던데? 그걸 미래라고 해야 할지, 전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안대.”

“전생을…… 살다가 돌아오셨다고요?”

“뭐, 여태 이상하리만치 감이 좋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게 감이 아니라 전생의 기억을 따른 거였다나.”

일리에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것 같았지만, 그거야 놀랐거나 황당해서였을 터였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일리에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리에가 살가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벤티악 저택에서 지내는 건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불투명해진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자꾸 한밤중에 눈이 뜨였다.

그럴 때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너무 지겨워서 어두운 벤티악 저택의 복도를 거닐었다.

조금 화려한 카시르 후작 저와는 달리 어둡고 중후한 벤티악 저택은, 음침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압도해 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게 참 슬라르한의 느낌과 비슷해서 저택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슬라르한 벤티악이라는 인간을 구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의외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오늘 밤도 자기는 그른 것 같은데, 일어나서 산책이나 할까.’

클리드는 흐트러진 셔츠의 앞섶을 챙겨 묶고 실내용 바지를 걸친 뒤 부드러운 가죽 슬리퍼를 신고 방을 나섰다.

여름밤이었지만 층고가 높은 벤티악 저택 내부는 은근히 서늘했다.

복도 곳곳에서 기름등이 희미한 불빛을 내며 타고 있었고, 창밖을 내다보면 저택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을 볼 수 있었다.

클리드는 그런 모습 하나하나를 살피며 그동안 다녀보지 않은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카펫이 반들거리지 않는 것을 보니 이쪽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쪽인가 보군.’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은 자신이 지내는 방 앞에 깔린 것보다 새것 티가 났다. 그 위를 밟는 게 미안할 정도였지만 클리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쪽 복도로 발을 들였다.

다른 복도와 크게 다른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쪽이 왜 그리 신경 쓰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설렁설렁 걸으며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하거나 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감상했다.

그런데 문득, 방금 지나온 복도의 어느 한 곳이 너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아까 지날 때는 문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다시 뒤돌아보니 굉장히 평범하게 생긴 문이 벽에 달려 있었다.

거기에 문이 있다고 인지하고서도 왠지 그 문이 벽에 그려진 그림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 문의 손잡이가 달칵 돌아가더니, 거기서 일리에가 나오는 게 아닌가.

“일리에……?”

그가 저도 모르게 일리에를 부르자 일리에는 펄쩍 뛰기라도 할 듯이 놀랐다.

“왜, 왜, 왜 여기 계세요?”

“잠이 안 와서 그냥 산책하는 중이었다. 너야말로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지? 네 방은 거기가 아니잖아.”

“하, 참나. 이 저택에 손님으로 머물고 계시는 건 카시르 영식 쪽이거든요? 제가 이 저택을 돌아다니는 건 우리 주인님의 심부름 때문이고요.”

“뭐, 그렇긴 하겠다만.”

일리에는 자신이 나온 방문을 가로막는 것처럼 등진 채 어딘지 초조해 보였다.

‘벤티악 공작이 날 받아들여 주긴 했지만, 아직 모든 걸 다 공개하기는 껄끄럽겠지.’

클리드는 이해했다. 손을 잡았다고는 해도 어제까지의 정적에게 당장 신뢰가 생기는 것은 아닐 테니.

“돌아가는 길이라면 같이 갈까?”

“그, 그러시든가요.”

클리드는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곁눈질하는 일리에와 함께 그 복도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일리에의 방 앞에서 그는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나이트 티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

“……아주 가지가지 하시네요.”

“네가 정 어렵다면 이 시간에 굳이 베델 군을 깨워야…….”

“아, 드린다고요!”

클리드는 씩 웃으며 일리에의 방에 입성했다.

평민 하인에게 주는 방치고는 꽤 번듯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방 크기도 꽤 컸다.

‘하긴, 벤티악 공작은 더 좋은 방을 주고 싶었겠지.’

클리드는 혼자 실실 웃으며 일리에가 따라준 차를 홀짝거렸다.

얼른 마시고 꺼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일리에는 의외로 자신의 차도 한 잔 따르더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물론 클리드 쪽으로 몸을 기울인 것 아니었다.

“엘로르 전하가…….”

“음?”

“크흠! 엘로르 전하가 카시르 영식에 대해 더 말씀하신 건 없나요? 그러니까 그, 전생? 거기서 봤던 기억 같은 거 말이죠.”

“그게 궁금했어?”

“아니, 뭐, 시, 신기하기도 하고…… 솔직히 거짓말 같기도 해서요.”

남들이 듣기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클리드는 엘로르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전생에서는…… 그녀도, 벤티악 공작도 이 경쟁의 승리자가 아니었던 것 같더라.”

“그, 그럼요?”

“뭐라더라…… 릴리에트?”

탁, 하는 둔탁한 소음이 들리고 작은 테이블 위에 뜨거운 찻물이 번졌다.

“어? 괜찮아?”

일리에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린 것이다.

다행히 찻잔은 깨지지 않았지만 작은 테이블 위와 일리에의 무릎이 찻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일리에는 제 무릎이 뜨끈하게 젖고 있는데도 클리드에게 박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요?”

“뭐?”

“그, 릴……리에트? 그게 뭐요?”

“네 주인이 승자가 아니라는 게 상당히 충격이었나 보구나.”

클리드는 일리에가 널어놓은 수건 한 장을 잽싸게 갖고 오더니 일리에의 무릎 먼저 닦았다.

아주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놀랄 정도는 되었을 텐데, 일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더 말씀해 주세요.”

“뺨에 키스해 주면.”

클리드가 조금 놀릴 요량으로 얄밉게 말했다. 그러나 일리에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그의 뺨에 살짝 입 맞추고는 제 입술을 소매로 닦았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놀란 쪽은 클리드였다.

일리에가 다가왔을 때 훅 끼치던 체향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엘로르를 포함한 다른 아가씨들의 뺨 키스를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하지만 키스를 받았는데도 따귀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멸감이 드는 동시에 일리에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욕망도 일었다.

“카시르 영식. 말씀해 주시라고요.”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채근하는 일리에를 보며 클리드는 간신히 정신 차릴 수 있었다.

“내가…… 그 릴리에트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엘로르 전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나더러…… 왜 그랬냐고, 왜 자길 버렸느냐고 소리쳤다. 전생에는 아마 내가 그녀를 버린 모양이지? 앞뒤 사정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랬구나…….”

일리에는 피곤한 눈을 꾹 감았다.

너만 죽으면 황후 자리는 자기 것이라며 의기양양하던 엘로르 때문에, 처음에는 그녀가 당연히 클리드의 황후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꿨던 꿈이…… 진짜 벌어진 일일 수도 있겠구나.’

카제야의 정신 지배를 당했던 그때 꿨던 꿈에서 엘로르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왜 자신이 아닌 라리에트가 황후여야 하냐며 악을 썼다.

하지만 그건 일리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클리드가 왜 라리에트를 황후로 지목했을까.

“괜찮아? 표정이 좀 이상한데…….”

클리드는 테이블 위까지 다 닦고는 일리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자세는 일리에의 기분을 더 가라앉혔다.

그가 이렇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저에게 청혼했던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식께는 없던 일인데…… 억울하셨겠네요.”

언뜻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았지만 클리드는 그 목소리에 담긴 희미한 적대감을 느꼈다.

그는 그 순간 처음으로 자신을 원망하던 엘로르의 입장에서 그 기분을 헤아려 보았다.

“글쎄…… 하지만 엘로르 전하께는 있었던 일이지. 어쩌면 더 미칠 것 같은 기분일 거야. 아무리 원망해도 나한테서는 그때의 사과를 받을 수 없을 테니까.”

일리에가 어금니를 꽉 물며 주먹을 쥐었다.

클리드는 하얗게 질린 그 주먹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혹시 그 전생에서 내가…… 너한테도 잘못을 저질렀나?”

일리에는 아무 대답 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뭔가를 알고 묻는지, 아니면 그냥 해보는 소리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전생에 저지른 죄를 낱낱이 나열하며 엘로르처럼 그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차갑게 식은 제 무릎을 한 번 쳐다봤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교계의 인기남이라는 영식이 이렇게나 꺼려지는 것을 보면 그랬을 것 같기도 하네요.”

순식간에 미묘한 분위기를 흩날려 버린 일리에를 좀 더 바라보던 클리드는 결국 일리에의 속내 캐기를 포기했다.

“그거 안타깝네.”

그 역시도 평소처럼 매끈한 미소를 보여줄 수밖에.

* * *

여름이 바스러져 가는 수도의 거리 곳곳에, 엄정한 표정의 성기사들이 무언가를 찾듯 구석구석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야나크 교도들은 그 유명한 성기사를 죽기 전에 두 눈으로 봤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지만, 실제 야나크 사제나 성기사나 교황은 이 상황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수도 곳곳에, ‘공허의 틈’이라는 마법진이 새겨지고 있습니다. 공허의 문과 연결되는 마법진이라 하더군요. 찾아낸 것만 해도 벌써 스무 개가 넘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하군요.”

엘라니쉬 신전에서 헤스페리아와 마주 앉은 슬라르한은 불쾌한 기분에 미간을 구겼다.

사실 슬라르한은 ‘공허의 문’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공허의 문이 무엇인지 알게 됐던 건 그의 어머니가 그의 마력을 일깨워 주며 떠났던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사비 족의 피가 몸에 흐르고 있다면, 그건 본능처럼 당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떠나고 1년쯤 지나자, 왜 어머니가 함부로 힘을 쓰지 말라고 하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쓰는 힘은 악마에게서 빌려오는 힘이었으니까.

그게 수치스러웠다.

네 어미는 마녀가 아니냐고 소리치는 황제에게 차마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어서, 리카온의 피로부터 이어진 사비 족의 역사를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그래서 더더욱 공허의 문을 열려는 세력들이 증오스러웠다.

공허의 문이 열리면, 사비 족은 제일 먼저 리카온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을 파괴해 나갈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황실에는 말씀해 보셨습니까?”

“황제 폐하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분은 ‘명확한 용도도 알 수 없는 낙서일 뿐인데 그런 것 가지고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할 수는 없다.’라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솔직히, 황제 폐하가 과연 그 마법진의 용도를 모르고 있는지부터가 의문입니다.”

슬라르한도 헤스페리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황제 폐하는 이미 루트 교 쪽과 접촉하신 것 같군요.”

“설마…… 정말이지, 설마 싶습니다만…… 황제 폐하께서 루트 교와 접촉하신 이유가 흑마법 때문이라고 보시나요?”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그분은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세상일 따위엔 관심이 없으신 분이고,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부와 권력을 누리게 해줄 힘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취하실 분이니까요.”

헤스페리아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이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그게 황실 순혈주의의 문제점인 겁니다. 엉망인 사람이 황제가 되는 걸 막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 황제가 황위 경쟁 체제를 제안하다니, 그것도 참 모순적인 일이군요.”

두 사람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 루트 교에 물드는 분이 없도록 최대한 결속을 다지겠습니다. 대주교님께서도 계속 힘써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길.”

“감사합니다, 벤티악 공작. 이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 갖는 귀족이라곤 공작뿐이군요.”

“루트 교도들이 일부러 귀족들을 안 건드리는 겁니다. 평민 집단과 사제들부터 물들인 뒤 귀족들을 삼키려는 거겠죠.”

그들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지만 헤어질 때는 서로 단단히 손을 맞잡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슬라르한은 곧바로 대대적인 측근 회의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아직 루트 교가 귀족들까지 크게 오염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미리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타리크가 열심히 움직여 준 덕분에 일주일 뒤, 벤티악 공작 저에는 그를 지지하는 대형 세력들이 모여 빽빽이 둘러앉았다.

갑작스러운 슬라르한의 호출에 다들 조금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촉박한 일정에도 전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슬라르한은 이제까지 자신을 위해 애써온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씩 확인하며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구 하나 믿지 못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만 하던 자신이었다.

이들과 동맹을 맺었을 때만 해도 어디까지나 이해관계로만 묶인 사이라고 생각했고 그 외의 감정을 따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작이 이해관계였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관계가 쌓이면서 점점 ‘계산할 수 있는’ 것 이외의 이득을 돌려주곤 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 덕분에 슬라르한은 전보다 더 당당하게 황제 앞에 설 수 있었고,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었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계산적인 적인 것을 떠나 이들의 희망과 기대가 모여 이룰 나라를 만들기 위해 황위 후계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 세력을 저지해야 했다.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뜬금없는 요청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모두, ‘라 퀴엘라 리카온’이라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다시 ‘라 퀴엘라 리카온’이라고 또박또박 발음해주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이게 뭔가 새로운 구호인가 싶어 씩씩하게 ‘라 퀴엘라 리카온!’이라고 답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랭스턴 자작.”

“아, 예! 하, 한 번만 더 아까 구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라 퀴엘라 리카온.”

“라, 르에, 리크…… 응? 이게 아닌데……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만…….”

“괜찮습니다.”

슬라르한은 랭스턴 자작의 뒤로 걸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흘려 넣었다.

“으윽! 이게 무슨 짓……!”

“자,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라 퀴엘라 리카온.”

“예? 라 퀴엘라 리카온…… 어? 이젠 되네요!”

마치 눈앞에서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슬라르한과 랭스턴 자작을 번갈아 보았다.

‘라 퀴엘라 리카온’은 리카온을 거부한다는 뜻의 주문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오염당한 사람은 아예 그 문장 자체를 이해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슬라르한은 자신의 세력 내에 루트 교에 물든 이가 단 한 명뿐이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받아들였다.

나중에 랭스턴 자작 저에는 한번 들러서 그 가족들을 다 살펴보기는 해야 했지만 말이다.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는 바로, 루트 교도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들은 흑마법사와 결탁한 사이비 무리입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는 이들을 매개로 하여 흑마법사를 찾고 계신 듯하고요.”

“황제 폐하께서 기어이……!”

이 자리에 앉은 그 누구도 현 황제에게는 아무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라는 작자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악의 힘을 좇는다는 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합니다. 특히 황위 경쟁 마지막 해라 사특한 술수가 횡행할 것입니다.”

슬라르한의 말에 다들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 파르디나스 제국이 어쩌다 이렇게 위태로워졌는지, 몇 번을 생각해도 속이 답답해지는 일이었다.

엔시아가 먼저 또래 사교계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전했다.

“수상한 자들이 사랑 점을 봐준다며 귀족 아가씨들에게 접근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를 따르는 영애들에게는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고 언질을 주긴 했지만, 호기심 많은 소녀들이 쉽게 뿌리치기는 힘들겠죠.”

그러자 마그렛이 엔시아의 이야기를 이었다.

“그것참 이상하군요. 부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자녀와 딱 맞는 결혼 상대를 찾아주겠다든가, 남편의 출세운을 봐주겠다든가 하면서 접근한다던데…….”

롤랑 백작 역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마석 판매 흐름도 영 께름칙하죠. 수도에서 집중적으로 판매량이 높아지고 있는데, 그게 어느 한 군데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노예 판매량이 뚝 떨어진 것도 좀 이상하고요.”

엘란츠가 외국 상황까지 알려주었다.

“더 이상한 것은, 외국에는 루트 교가 전혀 퍼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외국 친구들 중에는 루트 교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조차 없습니다.”

그들이 전해주는 정보를 들으며 슬라르한은 루트 교도들의 목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들은, 이 나라를 집어삼킬 심산인가 보군요.”

* * *

대형 만찬장에서 슬라르한과 그 세력을 이루는 귀족들의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그때, 클리드는 조용히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귀빈들이 여럿 방문했기 때문인지 사용인들은 모두 1층에 몰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2층 난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는 조용히 몸을 뒤로 물려 어딘가로 향했다.

이때가 아니면 제대로 확인해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고 적막하기까지 한 목적지에 닿은 그는 아직 까슬함이 살아 있는 붉은 카펫 위에 발을 올렸다.

한밤중에 일리에가 몰래 들어갔다 나왔던 그 방. 그 방을 확인하고 싶었다.

클리드는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벽을 살폈다.

아예 몰랐더라면 찾기 어려웠겠지만, 한 번 발견한 적이 있는 데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있던 덕분인지 그는 존재감 옅은 그 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본 그는 조용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다행히 문은 잠기지 않은 듯 부드럽게 열렸다.

들어선 방은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고 있는, 잘 정리된 곳이었다. 가구와 양탄자가 다 아름다웠는데, 그중에서도 방 안쪽에 놓인 침대가 가장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까만 고양이가 나타나더니 위협적으로 울었다.

“우우우웅…… 캬학!”

발로 차면 날아가 처박힐 것 같이 아주 작은 고양이였다.

“조용히 있으렴. 귀여운 고양이를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클리드가 싱긋 웃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후다닥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해꾼은 사라진 건가?”

그는 고양이가 나간 뒤 저절로 닫히는 문을 흘끗 쳐다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꺾어 꽂은 듯 싱싱한 장미였다.

“잠든 이를 위해 꽃을 꽂아놓다니, 지극정성이군.”

꽃잎을 만지작거리다 꽃송이를 바스러트린 클리드는 고개를 돌려 침대 근처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점점 명확해지는 잠든 이의 얼굴은, 중년의 나이에도 미색을 잃지 않은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하얀 베개 위에는 잠든 여인의 까만 머리칼이 흩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어딘지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초승달처럼 휜 까만 눈썹, 오뚝한 콧대, 미소가 잘 어울릴 것 같은 붉은 입술……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였더라…….’

클리드는 기억을 뒤졌다. 모든 이의 얼굴과 이름을 한 번 본 것만으로도 기억하는 클리드였지만 여인의 이름을 떠올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녀의 얼굴과 이름, 그녀와 언제 만났었는지까지 떠올렸다.

‘이건 분명…… 선대 벤티악 공작 부인……!’

그제야 일리에가 왜 이 방에서 자신의 관심을 떼어내려 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황제의 의심병 때문에 결국 스스로 이혼을 요구하고 벤티악 가를 떠나간 세이렌 벤티악은, 그녀 혹은 황제,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는 끝까지 벤티악 가를 핍박할 꼬투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건수로군. 황제가 이 사실을 알았다간 벤티악 공작의 숨통을 틀어쥐려 하겠지.’

그는 한 발짝 더 세이렌 쪽으로 다가갔다.

“공작 부인이 돌아오셨구나…….”

클리드의 입매가 요요하게 휘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고양되고 등줄기가 짜릿했다. 왠지 숨이 가빠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직감이라는 건 참 무서워. 안 그래도 네가 벤티악 공작의 어미이지 않을까, 의심했었거든. 마노…….”

클리드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 마구 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자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를 죽이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았고, 이 여자를 죽여야 모든 게 완전해질 거라는 기이한 강박이 피어났다.

사실 아까 이 사람이 세이렌 벤티악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 대한 것은 거의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귀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머리가 아팠다.

클리드는 송곳으로 뇌를 쑤시는 듯한 통증에, 가만히 품에 손을 넣어 크기가 작은 단도를 꺼냈다.

방에서 나올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다지 꺼내 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어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죽여야…… 아니, 왜……? 아니,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그래…… 일단 찌르고 생각하자…… 그러면 돼.”

관자놀이가 징징 울렸다.

들고 있는 단도가 바들바들 떨렸지만 세이렌을 죽이자고 마음먹으며 단도를 단단히 쥐면 두통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귀찮아…… 얼른 끝내고…… 으윽…… 돌아가자, 돌아가서…….”

돌아가서…… 아니, 돌아갈 곳이 있던가…… 어차피 카시르 후작가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원래 그랬다.

그렇다면 또 엘로르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지만 그녀 역시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이 그 어느 퍼즐 판에도 맞지 않는 조각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한 몸 끼워 넣을 자리를 갈구했지만,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었다.

아니…… 언젠가, 아주 먼 언젠가…… 누군가가 그 자리를 만들어줬던 것도 같은데…… 그래서, 그 자리가 너무 그리워서…….

“으으윽! 아윽!”

잠깐 딴생각으로 빠지자마자 그것을 탓하듯 두통이 극심해졌다.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단도를 쥔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저 하얀 목에 이 칼을 찔러넣기만 하면 이 통증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만둬, 미친놈아!”

막 내리꽂으려는 그의 손목을 누군가가 강하게 움켜쥐고 뒤틀었다.

“아악!”

팔이 뒤로 꺾이며 손에 쥐었던 단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인님이 불쌍해서 거둬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들어?”

그에게 올라타며 주먹으로 얼굴을 갈긴 이는 일리에였다.

꽤 단단한 주먹에 턱이 돌아가고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클리드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금니가 멀쩡할지 조금 걱정이 되었고, 자신이 그따위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스워 조금 웃었다.

“이…… 일리에?”

“클리드 카시르! 이게 무슨 짓이야!”

“일리에…… 이, 이거 놔봐.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저 여자…… 죽, 죽여야…… 죽여야 해.”

“뭐?”

“그래야, 하아…… 아악! 제기랄! 흐으…… 죽여야 해…… 죽여야…….”

“이놈 왜 이래?”

헐레벌떡 달려와 날카로운 소리로 우는 녹스 덕분에 큰일이 나는 것은 막았지만, 지금 클리드의 상태는 누가 봐도 이상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지금은 어디가 고장 난 듯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며 고함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일리에는 클리드가 카제야의 실험실에 누워 있다가 도망쳤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그때 이미 무슨 짓을 당한 거구나……!”

카제야가 그렇게 순순히 사냥감을 놔줬을 리 없는데 이상하다 했다.

뒤따라왔다는 키메라 역시 클리드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키메라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면, 클리드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늑대 다리를 단 키메라가 따라잡지 못했을 리 없다.

카제야는 클리드가 벤티악 공작가로 갈 줄 알았던 것이다. 혹은…… 벤티악 공작가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르고…….

“제길, 이걸 어쩌지?”

클리드의 위에서 그의 사지를 내리누르고 있던 일리에는 고민했다.

“이대로 쥐어패서 기절시켜……? 아니, 일단 말은 통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일리에의 머뭇거림이 클리드에게는 기회였다.

멍하니 ‘죽여야 한다.’라는 말만 되뇌던 클리드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갑자기 일리에를 거칠게 밀쳐냈다.

일리에가 나가떨어지며 몇 바퀴 바닥을 굴렀을 정도의 힘이었다.

“흐윽…… 이, 미친……!”

소파 끝에 부딪혀 구르길 멈춘 일리에는 욱신거리는 등을 쓸면서 곧바로 일어났지만 클리드의 손에는 이미 단도가 들려 있었다.

‘방해되는 것들은 다 죽여야 해. 일리에라 하더라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비이성적인 충동은 방해가 되는 저 작은 계집을 죽이라고 그의 뇌에다 직접 대고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순간, 그 반대되는 충동이 불쑥 일었다.

‘안 돼! 일리에는 안 돼!’

서로 강하게 맞부딪친 강렬한 충동은 그의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워댔다.

그리고 그것을 버티는 고통은 온전히 클리드의 몫이었다.

손에 쥔 단도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단도를 휘두르지도 못한 채 그는 괴롭게 신음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죽이라는 충동은 그 어떤 욕구보다 거대하게 일어나 그를 집어삼키듯 다가왔다.

당장 일리에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거라는 절박함과 공포가 목 아래 칼을 들이민 것 같았다.

“으아악! 죽어! 네가, 네가 죽어야……!”

클리드는 완전히 변해 버린 눈빛을 하고 일리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일리에도 그간 기사들과의 훈련을 대충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저보다 훨씬 큰 몸집의 사내가 광기 어린 힘으로 달려드는 데도 침착하게 받아쳤다.

일리에는 곧바로 제 어깨에 단도를 박아 넣으려는 클리드의 손목을 붙들고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이든과 싸울 때 배웠던 대로, 그의 아래 깔리는 모양새가 되지 않도록 재빨리 움직였다.

하지만 클리드 역시 만만치 않아서, 그는 다시 아래 깔려주지 않았다.

그 첫 대결에 클리드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는지 아까와는 다른 소리를 했다.

“안 돼…… 죽이면, 안…… 안 돼……!”

그러나 단도를 쥔 손에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첫 일격을 막은 것은 좋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될수록 불리한 건 일리에였다.

“카시르 영식! 정신 차리세요!”

혹시나 몰라 다시 한번 큰 소리로 호통쳐 봤지만, 그의 모든 것은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그 역시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일리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를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온몸은 오로지 저것을 죽여야 한다는 열망에만 따르고 있었다.

“으으…… 흐으으…… 안 돼…… 안 되는데…….”

클리드는 정말로 괴로워 보였다.

단검이 점점 일리에에게 향할수록 도리질 쳐가며 안 된다고 흐느꼈다.

일리에는 그가 카제야의 정신 지배에 걸린 상태로도 자신의 의지 한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신 지배에 걸릴 줄 알고 대비했던 저조차도 전혀 대항할 수 없는 힘이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의지가 강하면 저렇게까지 버티는지 감탄이 다 나왔다.

자신에게 단검을 겨누면서도 괴로워 울고 있는 클리드의 모습에, 일리에는 문득 이 상황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토록 스스로 거부하려 하는데도 그가 쥔 단도는 착실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면, 클리드는 자신을 죽여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운명인가 싶어서…….

“클리드…….”

“흐윽, 흐윽…….”

“당신은 이번에도 나를 죽이려고 하네.”

그 순간, 클리드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크게 눈을 뜨며 굳었다.

그러고는 방금까지 일리에를 죽이려 했던 게 무색하리만치 파드득 떨며 일리에를 밀치고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일리에는 뒤로 물러서는 그에게 오히려 한 발짝 다가가며 물었다.

“있잖아, 클리드…… 당신은 왜 나를 죽였어……?”

내내 묻고 싶었던 말, 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일리에도 그냥 툭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벌벌 떨던 클리드는 그 순간 정신을 놓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 * *

“헉!”

은 수반에 떠 놓은 물 위로 클리드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를 조종하고 있던 카제야는 갑자기 끊어진 클리드와의 연결에 가벼운 충격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고개를 털고 수반을 내려다보았으나, 그녀의 핏방울을 떨어트린 물 위에는 그녀 자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제껏 한 번도 피지배자의 의지로 끊어진 적 없는 정신 지배였다.

아니, 끊어지기 이전부터 클리드는 여태껏 그녀가 정신 지배했었던 수많은 피지배자들 중에 가장 반항이 심했다.

보통은 마르에 의해 명령받은 것을 수행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클리드의 경우에는 카제야가 중간에 끼어들어 더 많은 마력을 쏟아부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그는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다른 것은 그다지 문제없었을 거야. 그 인간이 거부했던 것은…… 그 작은 계집애를 죽이라는 명령이었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클리드와 그 계집애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뭔가 끈끈한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온몸의 격통을 참으면서까지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한단 말인가.

사실 사랑한다 해도 정신 지배가 내리는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납치해다 실험해 봤으니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뭐야? 이 계집애가 뭐길래, 이 계집애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지?’

과거를 알 수 없는 루벨파스트 노예 출신의 계집.

그 본인에게서는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벤티악 공작의 확고한 신임을 받는 하인.

라리에트의 호감까지 얻어내고, 평민 주제에 황비에게 대들었으며, 클리드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드는 맹랑한 심부름꾼.

루벨파스트에서부터 죽을 고비는 숱하게 넘겼다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게 해맑은 소녀.

그리고, 클리드 카시르에게 왜 나를 죽였냐는 이상한 질문을 하는 존재…….

‘보통 계집 같지는 않다고 느꼈지만, 이거, 재미있는데……?’

전부터 클리드에 대한 태도가 좀 이상하다고는 여겼지만, 그에게 반말로 왜 죽였냐고 묻는 것을 보고 카제야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꽤나 탄탄한 가설이었다.

‘이 계집애도 엘로르처럼 전생을 기억한 채 회귀한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전생에서 클리드 카시르에게 왜 죽였냐고 따질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지. 바로…… 그에게 배신당하고 죽은 황제, 릴리에트 시야르드 솔렌!’

재미있는 새 놀잇감을 찾은 아이처럼 카제야의 입술이 한껏 휘었다.

* * *

슬라르한은 기절한 클리드를 앞에 두고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회의를 끝내고 들른 집무실 책상 위에 ‘그 방’으로 와 달라는 일리에의 쪽지가 놓여 있었고, 다급하게 달려와 보니 기절한 클리드가 커튼 리본으로 꽁꽁 묶인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심지어 테이블 위에는 일리에의 것이 아닌 단도도 놓여 있었다.

그 정도의 장면만으로도 슬라르한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배신인가?”

“아뇨. 정신 지배예요.”

“역시 그랬군…….”

카제야가 클리드를 너무 쉽게 놓쳤다는 느낌이야 늘 있었다. 그래서 베델을 붙여 감시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 방의 결계까지 꿰뚫어 볼 정도로 카제야의 힘이 깃들어 있을 줄은 몰랐다.

지배자의 마력까지 빌려 쓰려면 지배자가 실시간으로 조종하며 자신의 마력을 일정 부분 내어줘야 했는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완벽한 은폐였다.

“하긴, 이 저택 내에까지 들여보낸 첩자인데 그 정도 정성이야 들였겠지만…….”

슬라르한은 세이렌의 곁에 다가가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한 뒤 일리에의 맞은편에 앉았다.

“예상이야 했던 일인데, 이 방을 찾아 들어올 줄은 몰랐네요. 제 탓이에요. 제가 그때 이 방에서 나가던 걸 들켜서…….”

“네가 나가는 걸 들켜서 이 방을 찾아낸 게 아니다. 그 정도 되는 흑마법사라면 이 정도의 결계는 알아볼 게 뻔한데…… 내가 안일했다.”

일리에가 막아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허무하게 어머니를 잃을 뻔했다.

최근 잦아진 마력 폭주를 억누르느라 결계와 이어둔 감각이 무뎌진 탓도 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누군가 침입한 것을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카시르 영식을 이제 어쩌죠? 정신 지배는 그걸 건 쪽에서만 깨트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슬라르한은 창백하게 질려 있는 클리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정신 지배를 건 마력보다 그것을 해제하는 쪽의 마력이 더 크면 정신 지배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고민하는 건 슬라르한인데 긴장한 건 일리에였다.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슬라르한에게까지 다 들렸다.

“그게 뭔데요?”

“하나는, 내 마력이 그 흑마법사보다 강한가 하는 문제고.”

“그리고요?”

“다른 하나는…… 카시르 영식이 그 충격을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거다.”

“충격……?”

슬라르한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집게손가락 끝으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자칫 잘못하면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어.”

“아…….”

클리드 본인의 의지가 어떻든 간에 벤티악 공작 저에서 지내던 클리드가 갑자기 미쳐 버린다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럼 그냥 가둬놔야 하는 걸까요?”

두 사람이 그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클리드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어……?”

“깨어나는가 보군.”

슬라르한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흑마법사의 공격을 대비해 마력을 준비했다.

그러나 눈꺼풀 아래에서 드러난 하늘색 눈동자에는 아까와 같은 탁한 기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일…… 리에…… 아……! 벤티악…….”

“대접이 과격해서 미안하군요. 이해해 주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슬라르한이 무심하게 인사를 건넸고, 클리드도 이렇게 되기까지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 이 상황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공작 부인……과 일리에…… 둘 다…… 다친 곳은…….”

“없긴 하지만, 아슬아슬했죠.”

일리에가 뚱한 표정으로 답하자 클리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슬라르한은 의자에서 내려와 클리드의 몸을 묶은 커튼 리본을 풀었다. 방 안의 모든 커튼 리본을 풀어서 밧줄처럼 연결한 다음 꽁꽁 묶어놓은 장본인인 일리에는 그걸 그냥 풀어줘도 되냐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네 주인이 이 정도를 대적할 실력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슬라르한은 일리에를 안심시킨 뒤 아직 몸을 잘 못 가누는 클리드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아마 대충 짐작은 하시겠지만, 흑마법사에게 이미 정신 지배를 당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흑마법사의 마력이 잠시 물러간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흑마법사가 마음만 먹으면 다시 당신을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클리드는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저를 그냥 가둬놓으시는 게 좋겠군요. 저택 내 임시감옥은 좀 위험합니다. 해리엇 양이 내 몸을 이용해서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것 같으니…….”

“얼마나 오래 갇혀 계실 줄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별수 없지 않습니까. 제가 갈 곳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클리드의 미소가 서글퍼 보였다. 슬라르한은 가만히 클리드의 목덜미에 손을 대고는 그에게 걸려 있는 정신 지배 마법의 수준을 가늠했다.

“정신 지배는 그것을 걸어놓은 쪽에서만 풀 수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정신 지배를 건 흑마법사보다 더 큰 힘을 지닌 자가 끊어줄 수도 있습니다.”

“예?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설마, 공작께서 해리엇 양보다 더 마력이 강하다는 말씀이십니까?”

“해봐야 아는 거긴 하겠지만, 방금 확인해 본 바로는…… 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단, 이 경우…… 마법이 파훼되는 데 따른 충격을 카시르 영식이 그대로 다 떠안아야 합니다. 제대로 버티지 못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해주십시오. 이대로 마녀의 꼭두각시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미치광이로 살아가는 편이 낫습니다.”

슬라르한은 클리드가 진심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눈동자를 집요하리만치 응시했다. 그러자 클리드가 쿡쿡대며 웃었다.

“각서라도 써드려야 할까요?”

“그거 좋겠네요.”

듣고 있던 일리에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협탁 위에 있던 메모지를 들고 왔다. 그러고는 슬라르한의 재킷 주머니에 꽂힌 만년필도 뽑더니 클리드의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쓰세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셨고, 우리 주인님께 뭘 부탁하셨으며, 이 일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날짜도 똑바로 쓰시고요. 카시르 영식의 사인은 다 알고 있으니 이상하게 위조할 생각 마세요.”

철두철미한 일리에의 모습에 클리드는 물론이거니와 슬라르한마저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얼마를 주고서라도 공작께 일리에를 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렇게 철저한 참모라니요.”

“제가 팔았을 것 같습니까?”

클리드는 계속 쿡쿡거리며 작은 메모지 석 장에 걸쳐 일리에가 요구한 모든 내용을 적고 사인까지 마쳤다.

사실 그가 막 적기 시작하려는 때 슬라르한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리긴 했지만, 일리에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클리드가 작성한 각서 내용의 확인을 마친 일리에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줬을 때야 비로소 슬라르한은 진지한 얼굴이 되어 클리드의 목 뒤에 다시 손을 얹었다.

“마법 파훼의 충격을 버티려면 가장 정신을 집중하기 좋은 한 가지를 계속 생각하십시오. 파훼 중에는 머리가 좀 아플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클리드가 어금니를 꽉 물고 눈을 감자 슬라르한도 그의 목덜미를 단단히 움켜쥐고 낮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까 정신 지배를 거부하면서 느꼈던 극심한 두통이 또 엄습하기 시작했다. 클리드는 아까처럼, 일리에를 떠올렸다.

“당신은 이번에도 나를 죽이려고 하네.”

“있잖아, 클리드…… 당신은 왜 나를 죽였어……?”

모든 생각이 엉망으로 뒤엉키는 데도 일리에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더랬다.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어디선가 일리에를 알고 지낸 적이 있었고, 아마도, 그녀를 죽였던 모양이다.

전 같았으면 도대체 그게 언제인지 머리 아프게 고민했겠지만, 엘로르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일리에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보게 되었다.

그러면 일리에가 처음부터 보였던 그 적개심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엘로르의 얘길 하며 말했듯, 이미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 과거이자 미래라지만, 그걸 실제로 겪었던 사람에게 남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실재한다.

하지만 그 원망을 쏟아낼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생에 자신이 일리에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없던 일이 되고 말았으니, 일리에가 저를 원망할 현실의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원망도 버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쉽게 움직이는 것이던가.

하지만 일리에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살해범을 눈앞에서 보는 기분이 어땠을까. 그런데도 꿋꿋이 존대하고 예의를 차리려 노력했던 일리에는, 어떤 생각으로 그 혐오감과 분노를 참았을까.

“흐으윽…….”

일리에의 생각에만 몰두하려고 했지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클리드는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고 일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슬라르한 쪽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전생에도…… 일리에는 벤티악 공작과 엮인 관계였을까?’

도끼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클리드는 그 생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생에 일리에와 슬라르한은 어떤 관계였을까. 연인이었을까? 황제가 되지 못한 슬라르한이 안타까워서 이번 생에는 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곁에 있는 걸까?

전생의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확인하긴 했을까? 키스해 봤을까? 아니면 서로의 몸도 탐했던 관계일까?

‘혹시 나는, 그런 일리에를 홀로 사랑하다 짝사랑에 지쳐 그녀를 죽인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벤티악 공작을 바라보는 네 눈빛이 왜 이렇게 아플까.’

평소 같았으면 감히 떠올리지도 않았을 생각이었지만, 속이 다 뒤집히는 것 같은 끔찍한 두통 중에 제정신을 놓지 않으려 몰두한 생각이라 한계랄 것도 없이 마구 번져갔다.

그 생각이 ‘나는 죽여서라도 널 독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쯤에 다다랐을 때, 그의 머리와 온몸을 두드려 대던 끔찍한 고통이 일시에 사라졌다.

“잘 참으셨습니다. 정신 지배 마법은 완전히 파훼되었습니다. 좀 쉬시는 게 좋겠군요.”

클리드는 멍해진 정신으로 눈을 떴다. 일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격통 때문에 다시 눈을 꽉 감았던 모양이었다.

얼굴이며 목덜미는 물론이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통증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쥔 탓에 손바닥에는 손톱이 찍힌 자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아…… 하아…… 감사합니다…….”

슬라르한은 클리드가 정상적인 대답을 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클리드는 그런 슬라르한이 아닌, 일리에를 바라보며 멍하니 물었다.

“너를 왜 죽였냐는 그 말…… 그게 무슨 뜻이야?”

“예……?”

가만히 있다가 뜬금없이 질문을 받은 일리에가 당황해 되물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확실히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저런 눈을 한 여자를,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죽일 수 있었을까.

“날 용서해 줄 수도 있다는 거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카시르…… 영식? 무, 무슨 말씀이세요?”

일리에가 순간적으로 슬라르한의 눈치를 보며 얼버무렸다. 슬라르한이 그 낌새를 못 느꼈을 리 없다.

일리에에게는 다행이랄지, 클리드가 버틴 건 거기까지였다.

“어떻게 하면…… 너를…….”

중얼거리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그는 완전히 탈진해서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슬라르한은 옆으로 쓰러지는 클리드의 몸을 받쳐 들었다.

일리에와 슬라르한은 서로 마주 보며 잠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리지. 혹시 아멜리아 못 봤어?”

동글동글한 얼굴에 갈색 머리칼을 한 소녀가 고향에서부터 함께 올라온 친구에게 물었다.

“아멜리아? 걔 일이라면 네가 제일 잘 아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게…… 얼마 전에 사제님 따라서 기도회 간다고 했던 애가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아서…….”

“나는 본 적 없어. 차라리 사제님한테 가서 물어보는 게 어때?.”

“으음……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어쨌든 고마워, 리지.”

작게 한숨을 내쉰 소녀는 시골의 형편없는 고아원에서 지내던 그녀와 친구들을 모두 수도에 데려와 준 사제를 찾아다녔다.

아멜리아는 그녀와 동갑인 소녀였는데 같은 고아원에서 자매처럼 자란 친구였다.

그들은 매 맞고 배곯는 생활에서 그들을 구원해 준 루트 사제들을 부모처럼 따랐다.

루트 사제들이 베푼 은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영 시골의 못 배운 농노나 될 뻔했던 그들을 수도에 데리고 와 매일 글자를 가르쳐 주었고 루트 교에서 만든 작은 공장에서 일도 시켜주었다.

매일매일 나오는 따뜻한 빵과 수프가 지금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 삶을 늘 함께하던 친구가 며칠째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이건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야 해, 마리. 사실은, 나, 다음 주에 대주교님이 계신 신전에 가서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신도가 되었어! 심장 터질 것 같아!”

“와! 좋겠다. 대주교님이시면 굉장히 높은 분이잖아?”

“그럼! 루트 교에서 제일 높은 분이라고 했어. 그분 앞에서 신실하게 기도를 올리면 리카온 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대.”

“진짜? 나도 가고 싶다…… 그럼 아멜리는 가서 무슨 기도를 드릴 거야?”

“돈 많이 벌어서 너랑 나랑 둘이 남들처럼만 살게 해달라고 빌 거야. 작은 방도 구하고, 가끔은 밖에서 음식도 사 먹고, 아주 가끔은 옷 같은 것도 살 수 있게.”

“와…… 정말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내가 가서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올게!”

그렇게 얘기하고 사제를 따라나선 지가 벌써 일주일이었다.

대주교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대주교님이 계신 곳이라면 아마 먼 곳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제 오는지만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마리는 공장에서 일하는 중에도 흘끔흘끔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런 일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아멜리아가 꼭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으니까.

결국 마리는 일이 끝나고 난 뒤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던 사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마리? 무슨 일 있니?”

그녀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마리는 소곤대며 물었다.

“사제님. 아멜리아가 어디 갔는지 혹시 아세요? 일주일 전에 대주교님 계신 곳에 기도하러 간다고 했는데 아직도 오지 않아서요.”

그 질문에 사제의 얼굴이 살짝 굳어서 마리는 조금 움찔했지만, 사제는 다시 인자하게 웃으며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런, 아멜리 걱정이 많이 됐던 모양이구나. 그럼 마리도 이번 주 기도회에 같이 갈까?”

“어? 저도 가도 되나요?”

“음…… 사실은 안 되는데, 마리가 아멜리를 너무 보고 싶어 하니까 사제님이 특별히 부탁해 볼게. 대신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다들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하면 곤란해지니까.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마리는 사제에게 몇 번이고 인사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 주가 지나기 전, 사제는 정말로 마리를 찾아와 기도회에 가자고 해주었다.

어딜 가냐는 리지의 질문에 잔뜩 자랑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말했다가 들키면 데려가 주지 않을까 봐 마리는 그저 아멜리아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만 답했다.

사제는 마리 외에도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이제 곧 대주교님을 본다는 생각에 설레서 연신 들뜬 태도로 웃고 떠들었다.

마리도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숲으로 들어갈수록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주교님이 계신 곳이 수도 안인데 아멜리아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가?’

다른 지방이기라도 했으면 이해할 만했지만, 수도 내의 큰 숲이라니, 조금 의외였다. 게다가 대주교님이 기거하고 있다는 신전 주변도 여러 사람들이 와서 머무르고 있다기엔 왠지 조용했다.

마리는 의아했지만 어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는 없었다.

사제들은 여전히 친절했고, 기도회에 입장하기에 앞서 ‘성수’라는 음료도 건네주었다.

다들 호들갑을 떨며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 음료를 마셨지만, 마리는 일부러 마시지 않았다.

‘기도회 중에 오줌 마려우면 안 되니까…….’

그건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배운 삶의 지혜였다. 원장님 설교 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손들었다가 뺨을 맞은 적이 있었기에 마리를 비롯한 고아원 아이들은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은 행사에 앞서서는 절대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사제가 와서 대기도실로 입장하라고 알려왔다. 마리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어른들의 뒤를 따라 기도실에 입장했다.

기도실은 상당히 특이했다. 앉을 의자는 없고 커다란 홀 한가운데 이상한 그림이 그려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제님들이 그 그림 안에 띄엄띄엄 둥글게 서서 신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여러분. 사제님들 사이사이에 한 명씩 서서 서로 손을 잡아주세요. 준비가 다 되면 대주교님께서 오실 겁니다.”

마리는 아멜리아가 어디에 있을지 가늠해 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그들을 데려온 사제가 친절히 마리의 손을 잡고 그림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아주었다.

“왜 그러니, 마리?”

“저기, 아멜리아는 어디 있어요?”

“후훗. 얼른 아멜리아가 보고 싶은가 보구나. 걱정하지 말렴. 기도가 끝나면 아멜리아를 만나러 갈 수 있단다. 아멜리아가 마리를 반갑게 맞아주겠구나.”

생글생글 웃는 사제의 얼굴을 보며, 마리는 처음으로 조금 무서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리의 손을 양쪽에서 붙든 사제들도 친절해 보였기에 마리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때 저쪽에서, 상당히 젊어 보이는 여자가 걸어 나왔다.

사제들이 일제히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취하는 것을 보니 그녀가 바로 대주교인 것 같았다.

“오늘도 우리의 신실한 루트 신도 여러분께서 참된 진실을 얻기 위해 자리해 주셨군요. 여러분들은 분명 리카온 님의 은혜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자, 시작할까요?”

그녀가 그림의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돌아보자 사제들이 손에 힘을 주어 잡으며 이상한 주문 같은 것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리는 이게 뭔가,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멍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런데 잠시 후, 까만색이던 바닥의 그림이 점점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이상한 빨간 선이 다리를 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어……? 이, 이게 뭐야!”

마리는 옥죄이는 느낌 때문에 놀라 다리를 탈탈 털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쪽에 선 사제들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손을 더 꽉 잡으며 외우고 있는 주문을 멈추지 않았고, 한가운데 선 대주교만이 마리에게 시선을 주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저런. 또 성수를 안 마신 아이가 있었구나. 우리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인 것을.”

“대, 대주교님! 저, 저는 이거 싫어요! 갈래요!”

“왜? 친구 찾아온 것 아니었니? 내, 그런 너의 사정이 딱해 특별히 허락해 준 건데, 이제 와서 그러면 안 되지. 조금 있으면 네 친구를 만나게 될 거란다.”

그리고 대주교가 양손을 펼쳐 뭐라는지 알 수 없는 주문을 크게 외치자 바닥의 그림이 새빨갛게 변했고, 몸을 타고 오르던 빨간 선이 마리와 다른 사람들의 몸을 덮치듯 휘감았다.

“아악!”

마리는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지만, 이내 눈앞이 어둡게 물들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슬프게 울고 있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 * *

“또 실패군. 저쪽도 악착같이 버티는 모양이야.”

저번보다 조금 더 오래 갔지만 결국 빛을 잃은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카제야가 이를 갈았다.

그와 동시에 얼마 전 클리드의 정신 지배 마법이 깨졌을 때를 떠올렸다.

예기치 않게 누군가가 자신의 마법을 깨트리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상대는 아마도 벤티악 공작일 테고, 그의 마력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자신을 뛰어넘을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

그랬기에 마법이 파훼되었을 때 더 놀랐다.

마력이 강한 것은 둘째 치고, 그의 마력은 너무나 자신의 마력과 비슷했다.

예전에 마노의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던-실제 마노가 그의 어미이기도 했지만- 힘은 그사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훨씬 더 흑마법사의 것과 비슷해져 있었다.

‘동류다! 이자와 나는 동류야.’

그 순간 느껴지던 환희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숨겼는지, 그리고 왜 흑마법사에 가까운 그가 저쪽 편에서 싸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것도 자신과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함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이 나라의 황제가 되어 리카온이 재림할 땅을 일구려는 거야!’

그러니 얼른 공허의 문을 열고 싶었다.

공허의 문만 열리면 이렇게 동족끼리 싸울 필요가 없을 테니까.

도대체 어떤 힘이 공허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 상대에게 이가 박박 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곧이야. 이쪽은 마법진에 쏟아 넣을 생명력이 넉넉하다고.’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발로 툭 차며 웃었다.

막판에 신도들이 몸부림치는 걸 막기 위해 반쯤 가사 상태에 잠기게 하는 음료인 성수를 개발했는데, 가끔 그걸 마시지 않는 사람이 좀 시끄러워질 때를 빼면 최근의 ‘집회’는 성공적이었다.

마법진이 유지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저쪽도 버티지 못하고 나동그라질 터였다.

그때 사제 하나가 다급하게 다가와 소곤댔다.

“카제야 님. 엘로르 전하께서 급하게 찾으십니다.”

“아아, 그 계집은 날이 갈수록 귀찮아지는구나.”

카제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법진이 그려진 홀을 빠져나왔다.

‘벤티악 공작 곁의 그 계집애가 릴리에트 같다고 했더니 눈이 뒤집혀서는…… 쯧쯧.’

그 말을 들은 엘로르는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경기를 일으켰다.

“죽여, 죽여야 해! 절대로! 아, 안 돼, 안 돼애애! 그런데 잠깐만! 그럼 지금 클리드가 릴리에트랑 같이 있다는 말이야? 미쳤어? 너 미쳤냐고! 왜 클리드를 거기로 보낸 거야!”

앞뒤 관계를 다 잘라 버리고 오로지 클리드가 릴리에트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을 떠올리며 그녀는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하도 보기가 역겹고 시끄러워서 기절시키기는 했지만, 그 뒤로 엘로르는 틈만 나면 카제야를 불러대며 일리에를 죽이라고 닦달하고 있었다.

그런 엘로르를 참아주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일이었다.

‘그 계집의 쓸모도 거의 다했어. 어차피 석 달만 기다리면 겨우살이 축제니, 그동안만 잘 달래놓으면 되겠지.’

이제 엘로르가 아는 전생의 이야기도 더 들을 게 없었고, 상황은 카제야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카제야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회귀의 마법을 밝혀내는 데 실패했으니, 그녀에게도 이번 삶이 마지막 기회일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 마지막 기회야. 공허의 문도 공허의 문이지만 일단 벤티악 공작부터 포섭하는 게 좋겠어.’

잠깐 생각에 잠겼던 카제야는 엘로르를 제쳐두고 황제에게 알현 신청을 했다. 슬라르한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의 힘을 확실히 파악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수도에 괴물이 나타났다.

포악한 짐승들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듯한, 썩은 내를 풍기는 괴물.

“키메라를 풀다니, 미쳤군.”

“애초에 흑마법사에게 정상적인 사고를 바라면 안 되는 거겠지요.”

슬라르한은 타리크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갑옷을 입고 검을 찼다. 그 곁에 있던 클리드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황실에 먼저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클리드의 질문에 타리크가 피식 웃었다.

“이미 키메라가 나타난 곳 근처에 있는 귀족가에서 황실에 도움을 요청했답니다.”

“그런데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죠. 그래서 우리 각하께서 나서는 것이고요.”

“이건 당연히 황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 아닙니까? 왜 일개 가문에서 나서서 처리해야 한단 말입니까?”

다시 타리크가 코웃음 쳤다.

“차라리 벤티악 기사단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면 다행이게요? 황실 기사단을 데리고, 벤티악 공작께서 지휘하시랍니다.”

“예?”

“황위 후보로서의 역량을 확인하시겠다나, 뭐라나…….”

어느 모로 보나 의심스러운 명령이었다.

기사단을 지휘할 수 있는 자리란 굉장히 영예로운 자리인 동시에 상징적인 자리였다.

일개 백작가의 작은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기사단장의 자리는 다른 가문의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황실 기사단을 벤티악 공작더러 지휘하라니, 황제가 노망이 난 것이든 뭔가 노리는 것이 있든 둘 중 하나였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쩌면 어딘가로 유인해 암살할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슬라르한은 자신을 걱정하는 클리드를 흘끗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카시르 영식의 염려를 듣고 있자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드는군요.”

“다른 속셈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많이 겪게 되는구나 싶어서요.”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료로 받아들이는 이 과정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황제 폐하께 제 쓸모가 다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슬라르한은 클리드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집무실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뒤에 남은 클리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슬라르한의 등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인간이랑 싸우려 했다니, 나도 참…….”

저도 모르게 든든하다고 여기게 되는, 기대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타인으로부터 이토록 자연스럽게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끌어내는 사람이니, 자신이 황제였다 해도 아이르델이나 슬라르한이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지금이야 황제 자리든 뭐든 다 잃어버린 것 같지만, 만약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슬라르한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 * *

슬라르한이 황궁에 도착하자 황실 기사단이 그의 뒤에 섰다. 벤티악 가에서부터 따라온 기사들은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저만이라도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타리크가 자존심도 접고 황실 기사단장에게 부탁해 봤지만 황실 기사단장은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후보 자신의 능력을 알아야 하기에 그 외 측근은 절대 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디넬 경.”

“아니, 지금 수도에 괴물이 나타났는데 황위 경쟁 운운할 때입니까?”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은 갑갑함이 들었다. 타리크는 속으로만 험한 소리를 주워섬길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각하.”

“자네나, 카시르 영식이나 나를 너무 걱정하는군. 일리에의 걱정 병이라도 옮았나?”

“각하께서 이런 식으로 나가시는 걸 알았더라면 그 녀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라갔을 겁니다.”

“자네까지 그러지는 말게. 일리에는 달래는 맛이라도 있지, 내가 자네까지는 좀 벅찰 것 같아.”

“지금 그런 농담 하실 땝니까!”

타리크는 버럭 화를 냈지만 슬라르한은 왠지 유쾌한 기분이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일 줄은 몰랐다.

그는 미간을 펼 줄 모르는 타리크를 뒤에 남겨둔 채 황실 기사단의 선두에 섰다.

“전 기사단, 수도 북서부 랄렘니쉬 광장으로!”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기세에 그 콧대 높은 황실 기사단도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불안한 기색의 벤티악 기사들을 남겨둔 채 키메라가 출몰했다는 수도 북서부를 향해 출발했다.

슬라르한이 최대한 서두르긴 했지만, 키메라가 나타난 지 이미 반나절 이상이 지난 터라 랄렘니쉬 광장 근처에서는 여러 가문의 기사들이 고전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기사들이 용맹하게 싸우고는 있었지만 광장을 물들인 붉은 핏물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검을 휘둘러도, 불을 질러도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달려드는 키메라들은 용맹한 기사들의 혼도 쏙 빼놓을 정도로 낯선 것이었다. 게다가 검에 베이고 찔려도 아무 타격이 없었다. 그들을 무력화시키려면 사지를 다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사지를 잘라내도 다시 결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슬라르한은 어느 기사의 보고에, 흑마법사가 키메라를 진화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들이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들이라 그런 것이고, 슬라르한에게는 상황이 좀 달랐다.

‘마력 흐름을 끊어놓으면 단박에 무력화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황제 폐하께서 알게 된다는 게 문제지. ……이걸 노렸던 걸까?’

다른 벤티악 기사들도 있다면 소드 마스터와 스피어 마스터들의 오러에 괴물들이 당했다고 우겨볼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언뜻 돌아봐도 황실 기사단에 마스터 급의 기사는 없는 것 같았다.

있더라도 오러를 발휘해 싸워줄 것 같지도 않았고.

슬라르한은 일단 상황을 보며 대응하자고 생각했다가 기사들의 시체가 즐비한 솔프리움 거리 쪽에서 완전히 생각을 바꾸었다.

상황을 보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다.

미친 흑마법사는 정말로 사람들을 다 죽일 생각으로 키메라를 풀어놓은 것 같았고, 황제는……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슬라르한은 검을 뽑아 들며 곧바로 검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이미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깜깜해지면 사람들의 피해가 더 커질 터라 서둘러야 했다.

“기사단은 3인 1조가 되어 괴물 한 마리씩 맡아 처단하도록. 처단할 때는 반드시 머리부터 베고 사지가 다 절단된 뒤에도 방심하면 안 된다. 괴물들이 이 이상 수도 안에 진입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어진다. 반드시 여기서 막아!”

“예!”

다들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는지, 황궁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심드렁했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황실 기사단이 3인 1조가 되어 흩어지자 슬라르한은 말에서 내려 기사들과 괴물들이 싸우고 있는 최전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점점 빨라져 종국에는 괴물들을 향한 질주가 되었다.

“비켜!”

썩은 피를 뒤집어쓰고도 키메라를 처치하지 못한 기사가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데 그 뒤에서 슬라르한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뒤로 나동그라진 기사는 순간 제 눈앞에서 벌어진 장면을 믿기 어려워 눈을 크게 떴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르스름한 기운을 흘리는 검이 늑대의 머리와 곰의 몸을 하고 어떤 동물의 것인지 모를 뿔을 단 괴물의 몸 한가운데를 그대로 갈랐다.

검을 휘둘러도 사람 목 하나 베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슬라르한의 검은 연한 과일 잘라내듯 털가죽 괴물을 가른 것이다.

그다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다음 커다란 괴물을 향해 달려갔다.

“어…… 한 방에 죽었네……?”

그들이 벨 때는 사지를 다 베도 펄떡대던 괴물이, 슬라르한의 검을 맞고서는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은 점점 절망에 물들던 다른 기사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베, 벤티악 공작 각하를 따라! 공작께서 괴물을 죽이신다!”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과의 반나절 넘는 싸움에 지쳐 있던 기사들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보자 다시 몸을 추슬렀다.

황실 기사단이 나서준 것도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벤티악 각하를 따르라! 괴물들의 머리부터 잘라내!”

노을이 지는 수도의 북서쪽에서, 슬라르한은 또 한 번 놀라운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것은 카제야와 황제가 짜고 벌인 일이었다.

도심에 풀어놓은 키메라는 슬라르한의 힘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조작해 놓은 것이었다. 덕분에 카제야는 그와 직접 맞부딪친 듯 생생하게 힘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가?”

슬라르한의 힘을 가늠해 보고 있던 카제야에게 황제가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의심하시던 대로입니다. 벤티악 공작은 소드 마스터이자 마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사비 족의 더러운 피를 이었으니 그놈도 제 어미와 똑같은 마족인 게야!”

그는 벤티악 공작가의 치부를 제대로 찾았다고 여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께서 염려하실 만큼 대단한 힘은 아닙니다. 애초에 그만큼 대단한 힘이었다면 여태 잠잠했을 리 없지 않습니까?”

“흐음……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황제 폐하께서는 황위 경쟁에 공정한 모습을 보이십시오. 누가 후계자로 결정되든 황좌에 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카제야의 장담에 황제는 기쁜 듯이 웃었다. 자꾸 튕기던 흑마법사에게 끝까지 성의를 보이며 회유했던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눈앞의 7서클 마법사는 현재 그의 체내 시계를 되돌리는 마법을 연구하는 중이었고, 겨우살이 축제쯤에는 연구가 끝날 예정이었다.

그럼 그때부터 황제는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 매일 조금씩 젊어질 것이고, 앞으로 2, 30년이 지나면 황위 후계자보다 더 젊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다들 이상하다고 여길 테지만 상관없다. 자신의 황권은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더 탄탄해질 테니까.

황제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간 뒤, 카제야야말로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벅찬 가슴을 내리눌렀다.

‘세상에! 그가 바로 리카온이었어!’

아직도 키메라의 마력 흐름을 끊어놓던 그 힘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힘은 흑마법사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힘이야말로 공허의 문 안쪽에 있는 바로 그 힘이었으니까.

슬라르한 벤티악, 그 자신이 공허의 문이자 그 문의 가장 강력한 문지기였다!

그리고 그 문이 완전히 열린다면, 그는 공허의 힘 그 자체인 리카온으로 각성할 것이다.

‘모든 게 예언대로야! 리카온이 곧 이 땅에 재림하신다!’

카제야는 흥분으로 떨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먼 옛날 들었던 예언을 떠올렸다.

“백조가 호수에 앉고 제국의 태양이 지면 어둠의 제왕이 이 땅 위에 임하시리라. 그는 스스로 영광의 자리를 쌓아 올리고 그 자리를 정복한 뒤, 모든 것을 무너트리리라.”

그녀에게 흑마법사의 힘을 일깨워주었던 대모가 죽기 직전 그녀에게 들려준 마지막 예언이었다.

제국이 태양이 진다는 것은 당연히 제국의 황제가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언제 어느 황제가 죽은 뒤인지 알기 힘들었지만, 백조가 찾아온 계절이라는 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파르디나스에서는 여태 겨울에 죽은 황제가 없었다.

하지만 겨우살이 축제 때 황위 후계자가 결정된다면, 카제야는 곧바로 현 황제를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공허의 문 그 자체인 남자가 그 자신의 영광의 자리를 쌓아 올려 나가고 있었다.

카제야는 킥킥대며 웃음을 흘렸다. 이토록 벅찬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언이 이루어지고 온 세상에 어둠이 도래하리라!”

그리고 자신은 어둠의 신부가 되어 영원히 이 행복을 누릴 것이다.

카제야는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슬라르한을 더 자극하기로 했다.

카제야는 자신과의 마력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키메라가 슬라르한을 덮치도록 조종했다. 슬라르한의 힘이 키메라를 치는 순간, 그는 그의 가장 강렬한 악몽을 보게 될 터였다.

<7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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