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벨파스트의 노예 7권
1장
“으응…….”
일리에는 작은 신음 소리에 다시 벌떡 일어나 세이렌을 살폈다.
슬라르한이 일리에 모르게 키메라를 해치우러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제부터 세이렌이 조금씩 움직이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저택에 와 있다는 것은 여전히 극비였고, 덕분에 그녀를 돌볼 수 있는 인력은 한정적이었으며, 그중에 여자는 일리에뿐이었다.
일리에는 자청해서 세이렌의 방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하신가…… 아니면 어디가 아프신가……?”
슬라르한의 말로는 그녀의 몸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것이며 그사이에도 따로 뭘 먹이거나 씻길 필요는 없다고 했다.
마법이 참 대단하긴 대단한 능력이구나 싶었지만, 애초에 그들이 이토록 핍박받은 것 역시 그 대단한 능력 때문이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르…… 안…… 돼…….”
“응? 방금 뭐라고 하시지 않았나?”
일리에는 다시 세이렌 곁에 바짝 붙어서서 그녀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가쁜 숨을 내쉬던 입술은 또다시 ‘르한…….’ 하고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뒤로는 다시 잠든 듯 고요해졌다.
“꿈꾸시나 보다. 악몽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일리에는 저와 함께 세이렌을 불안한 듯 쳐다보는 녹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르한, 안 돼!”
안타깝게도 세이렌은 가장 끔찍했던 날의 일을 꿈꾸고 있었다.
슬라르한이 공허의 문이며 봉인된 리카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던 그날도 두려웠지만, 그 후로 10년간 슬라르한은 자신의 힘을 잘 통제했다.
하지만 클리드 카시르 솔렌이 귀족 회의의 만장일치로 새로운 황제가 되고, 10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왔던 릴리에트를 폐황제로 선포해 어딘가로 숨겼을 때, 슬라르한은 폭발해 버렸다.
그들이 숨어지내는 루엘미나 산에는 금세 먹구름처럼 보이는 악의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온 세상에 있는 흑마법사들이 리카온의 재림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대부분의 사비 족들은 공허의 힘에 반응하는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악의 하수인들이 자신들의 군왕을 찾으려 슬금슬금 제국의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리카온이 깨어나고 사비 족이 악마가 되고 가까이는 파르디나스가, 장기적으로는 온 세계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터였다.
슬라르한의 첫 발작 후 차분히 대화를 나눈 뒤, 아들이 황위 경쟁에서 끝까지 버틴 이유가 바로 그 릴리에트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 마노는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아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방법이, 방법이 있다, 르한! 시간을 되돌리면 돼! 시간을 되돌려서 그녀를 구하면 돼!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할 거니? 릴리에트의 삶이 절망으로 끝나게 내버려 둘 거야?”
마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이 지경이 됐다면 사실 슬라르한이 제 목소리를 듣고 있을지, 듣고 있더라도 신경이나 쓸지 의문이었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나 버리는 걸까.
마노는 애초에 아이르델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다고 저 자신을 탓했다.
리카온의 마력을 과할 정도로 많이 타고난 자신은 숨어 사는 게 차라리 나았다. 제 안에 깃든 힘이 어떤 위험으로 변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사랑은 동족에 대한 의무감, 이 세상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들을 다 무력화시켰고 오로지 그 한 사람을 원하게 만들었다.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녀의 사랑을 알게 된 사비 족 일원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마노를 놓아주었다. 이 땅에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쭉 슬픈 비밀을 간직한 채 지내온 그들은, 그들의 어여쁜 공주님더러 네 사랑을 포기하고 의무에만 충실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불안한 행복 속에서 마노는 아이르델의 아이를 낳았다. 그의 눈부신 플래티넘 블론드를 이어받은, 너무나 예쁜 아들이었다.
아이르델과 슬라르한, 두 사람의 사랑 속에서 마노는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단란한 가족의 행복을 깨부수었다. 아이르델과 슬라르한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황제의 핍박에, 마노는 결국 남편과 아이를 두고 벤티악 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그때까지 스스로 힘을 발현시키지도 못하고 있던 슬라르한에 대해 안심한 탓도 있었다.
‘그래. 이 정도라면 나만큼의 마력도 없는 거야.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
마노는 아들의 마력을 가로막고 있던 봉인을 해제하고 어느 이상 마력을 쓰지 말라고 목걸이까지 걸어준 채 벤티악 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다시 만나게 된 슬라르한은 이미 목걸이의 통제를 우습게 벗어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런 재앙이 제 아들에 의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마노는 이성을 잃고 리카온이 되어가는 슬라르한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빌었다.
제발 돌아와 달라고, 너만 돌아와 준다면 이 어미가 반드시 시간을 되돌려 주겠다고,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구하라고.
“정말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마노는 제 머리 위에서 울린 아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핏빛으로 변했던 눈동자가 점점 호박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 안심할 수 없다는 걸, 마노는 알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슬픔, 분노, 절망이 가득해서, 마노가 던진 한 줄기 희망이 사라진다면 다시 어둠에 잠식될 게 뻔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르한. 마법의 제물이 될 생명과 영혼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구할 수 있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영혼을 대가로 바칠 인간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황후가 되지 못하고 궁을 떠났다는 엘로르가 흑마법사를 수소문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미끼를 드리우는 건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어려운 조건을 걸었다.
“정말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그럼 혹시…… 릴리에트가 없는 과거로 되돌려 줄 수 있어? 릴리에트가 존재하는 한 이런 일은 반복될 수 있으니, 그년이 없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존재 하나를 완전히 지워낸 세계로의 회귀를 원했다.
마노는 고민했다.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슬라르한이 동의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몇 가지를 물어보고는 동의했다.
“릴리에트의 영혼은, 되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아마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눈뜨게 될 거야.”
“저와…… 만날 수 있을까요?”
“만날 거다. 이 마법에 네 염원이 섞여 들어갈 테니까, 반드시. 하지만 아마…… 너 역시 릴리에트라는 존재를 잊을 거야.”
“그녀를 잊더라도 그 영혼을 몰라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황녀가 아닌 편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녀는 그런 진창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회귀하면, 이번 생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이 마법에 대가를 바친 이는 기억을 유지할 수 있어. 아마 엘로르가…….”
“엘로르 그 여자 혼자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위험합니다. 릴리에트가 기억을 가진 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마노는 가만히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릴리에트의 숨이 붙어 있다면…… 그녀의 생명을 바칠 경우, 그녀 역시 기억을 유지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릴리에트의 숨을 슬라르한이 직접 끊어놔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사라졌다가 얼마 후, 잠든 것 같은 릴리에트를 안고 나타났다.
“자신을 죽여 달라는 릴리의 부탁을 너무 오랫동안 거절해 왔습니다. 이제는…… 들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도대체 릴리에트를 어디서 데려온 거니?”
“솔레일 궁의 지하. 클리드 카시르 그 인간이, 살아 있는 릴리의 무덤으로 만든 그곳에서요.”
시간을 되돌릴 마법의 조건은 모두 갖춰졌다. 그러나 여유는 없었다.
릴리에트는 이미 의식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고 생명의 빛 또한 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노는 영원히 비밀로 하리라 마음먹었던 시간 회귀의 마법진을 슬라르한에게 알려주었고, 슬라르한은 자신의 피와 마력을 쏟아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마노는 마법진 한가운데 릴리에트를 눕히고 그 위로 검은 천을 덮었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바치러 온 엘로르의 앞에서 시간 회귀의 마법을 시전했다.
마법진은 맨 처음 릴리에트의 생명을 잡아먹었고, 그다음으로는 엘로르의 영혼을 손에 쥐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마노의 어마어마한 마력을 빨아들였다.
“어머니의 마력핵이 들어간다는 말씀은 없었잖습니까!”
마법진의 온 빛이 마노의 마력핵을 빨아먹던 순간, 슬라르한은 어머니가 거짓말한 것을 알아채고 소리쳤다.
“르한…… 우리는 다시…… 다시 만날 거다. 절대로, 변하면…… 안 돼…….”
간신히 마지막 말을 전하자마자 그녀의 마력핵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고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가 멈추더니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법사에게 마력핵이란 영혼이나 다름없었고, 조각난 영혼은 흩어졌다.
그러나 그중 그녀의 기억과 힘의 일부를 간직한 영혼 한 조각이 까만 고양이의 형태로 빚어졌다.
* * *
“냐옹…….”
녹스가 야옹거리며 세이렌의 뺨을 핥았다.
“녹스, 그러면 안 돼. 네 혀는 꽤 까칠하거든.”
일리에는 걱정하듯 세이렌만 바라보다가 가끔씩 그녀의 뺨을 핥는 녹스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마님이 그렇게 좋아? 처음 봤을 때부터 주인 만난 듯 딱 달라붙더니…….”
“야우웅. 야웅.”
“아니, 섭섭하다는 게 아니라…… 네가 왠지 슬퍼 보여서.”
일리에는 녹스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질이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그녀의 작은 고양이는 사람의 감정에 꽤나 예민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때, 누군가 다급하게 노크한 뒤 들어왔다.
“어? 타리크 님?”
“일리에! 잠깐 나와봐야겠다.”
“예?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각하께서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괴물과 싸우러 나가셨다가…….”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타리크에게서 그런 표정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일리에는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도 아마, 슬라르한에게 벌어진 것 같았다.
“어, 어서 가요!”
일리에는 곧바로 타리크를 따라나섰다.
“키메라랑 싸우셨다는 거죠? 오늘 그런 곳에 간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각하께서 말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다! 그리고 네가 알면 뭘 어쩌게!”
“그래도요! 하여간에 진짜……! 그래서, 많이 다치신 거예요?”
“아, 아니…… 다치신 건 아닌데…….”
“그럼요?”
“제기랄, 일단 가서 봐봐!”
타리크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로비가 보이는 난간 쪽으로 나오니 슬라르한을 데려온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게 보였다.
밖은 이미 깜깜했지만 그들은 오늘 슬라르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떠드느라 활기차 보였다.
그들의 모습만 보고서는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일리에가 그들의 모습을 살피는데 타리크가 일리에의 팔뚝을 붙들더니 슬라르한의 집무실 방향으로 꺾었다.
“야. 각하께서 너한테 엄청난 은혜를 베푸신 건, 너도 알지?”
“당연히 알죠.”
“각하께서 평소에 얼마나 자신을 억누르고 사시는지도…… 너는 알잖냐. 그렇지?”
“그, 그럼요.”
“그래서 말인데,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가, 각하께서 널…… 하아…… 제기랄…….”
“말 좀 끝까지 해요!”
일리에의 타박에 타리크가 우뚝 섰다. 어느새 슬라르한의 집무실 앞이었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만약에 각하께서…… 굉장히 사적인 요구를 하셔도…… 응해줄 수 있겠냐?”
“……예?”
일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데 타리크는 차마 일리에를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께……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타리크는 한참 한숨을 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정확한 건 모른다. 하지만 각하의 상태가…… 좀 많이 이상해. 계속…… 널 찾으시는데…….”
“저를요?”
“그런데 그게 꼭…… 하아…… 모르겠다, 진짜. 저분이 여자를 찾으신 적이 없는데…….”
그건 일리에에게도 놀라운 얘기였다.
슬라르한이 여자를 찾지 않는다는 건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방금 타리크의 말은, 그랬던 슬라르한이 여자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 사적인 요구라는 게…….”
“아니다. 내가 한 말은 잊어버려라.”
타리크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슬라르한이 자신의 주군이고, 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의 입장만을 생각해 여자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원래는 일리에만 안에 들여보내려던 타리크는 자신이 앞장서서 문을 두드렸다.
“각하. 타리크입니다. 일리에를 데려왔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타리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문을 열었다.
일리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슬라르한을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슬라르한의 책상 뒤편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일리에는 타리크도 뒤에 남겨둔 채 책상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주인님!”
“흐윽…… 흐윽…….”
슬라르한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벽에 기대 괴로운 신음을 뱉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갑옷만 벗고 곧바로 집무실에 틀어박힌 듯, 그의 뺨에는 아직도 무언가의 피가 튄 흔적이 남아 있었고, 머리칼은 아직도 땀에 젖은 채였다.
키메라와 싸웠다더니 몸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풀풀 날렸다.
‘이 자식, 왜 이래? 맛이 갔잖아?’
얼마 전부터 마력량이 증가하느라 고통스러워하던 모습과 아주 비슷했다. 그때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는 게 다른 점이었지만 말이다.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주인님!”
“일리……에…….”
“네, 저 여기 있어요. 어딜 다치신 건가요?”
“일리에…… 일리에……!”
슬라르한은 신음처럼 일리에의 이름을 부르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일리에는 그가 갑작스럽게 저를 끌어안은 것보다 그의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셔츠 천 한 겹 너머로 느껴지는 그 박동이 너무 커서, 금방이라도 슬라르한의 심장이 터져 버리는 게 아닌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살아 있어…… 아니야, 일리에는…… 살아 있어…….”
슬라르한은 누군가에게 애써 부정하듯 중얼댔다.
일리에는 왠지 그게 꼭 악몽에서 갓 깨어나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혼잣말을 하며 악몽의 잔상을 털어내던 수많은 새벽을 보내봤기에 알 수 있었다.
일리에는 굳었던 팔을 뻗어 슬라르한의 등을 감쌌다. 그리고 어린아이 달래듯 그 너른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네! 저, 멀쩡히 잘 살아 있어요.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슬라르한이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어깨와 목덜미를 덥히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더욱 힘주어 조여왔다. 마치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일리에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타박했다.
“주인님. 오늘 저 몰래 위험한 데 갔다 오셨죠?”
슬라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이젠 일부러 절 따돌리시는 거예요?”
이번엔 그의 이마가 일리에의 어깨를 좌우로 문질렀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저 모르게 나가시니까 이런 꼴이 되시는 거잖아요. 이게 뭐예요? 어휴, 냄새. 저, 셰바란에서 며칠간 씻지 못했을 때도 주인님이 이렇게 엉망이신 걸 본 적이 없는데.”
냄새난다는 소리에 슬라르한이 조금 움찔하며 슬그머니 일리에를 안은 팔에서 힘을 뺐다.
그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왜 이렇게 귀엽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커다란 녀석을 귀엽다고 여기게 될 줄이야.’
전생에는 그저 무뚝뚝하고 빈틈없고 감정 없는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생각 많고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완전무결해 보이던 그는 상당히 불안한 일면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주인님. 일단 좀 씻으실래요? 그러고 나서 뽀송뽀송하게 머리도 말리고, 맛있는 저녁도 먹고, 폭신한 침대에서 푹 주무시는 거예요. 그럼 훨씬 나아질걸요? 약속해요.”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등을 계속 토닥거리며 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그녀가 그렇게 토닥이는 동안 슬라르한의 거친 숨결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타리크는 조금 놀란 것 같더니 일리에가 눈짓하자 일리에를 도와 슬라르한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슬라르한을 부축해 목욕탕으로 향했다.
“수고했다. 씻는 건 내가 도울 테니 너는 이제 들어가 봐.”
“아……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타리크의 배려에도 일리에는 목욕탕 안까지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슬라르한이 일리에의 팔을 꽉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테르소의 아말 족 본거지에서 돌아올 때 같았다.
타리크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일리에의 팔뚝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슬라르한의 손을, 손가락 하나하나 떼어가며 달랬다.
“가, 각하!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만 이 손을 놓으…….”
그러나 타리크가 슬라르한의 손가락을 두 개째 떼기도 전에, 타리크는 물론이고 일리에까지 슬라르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꼈다.
샛노란 슬라르한의 눈동자가 타리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더 손을 떼려 했다가는 타리크라 하더라도 슬라르한의 공격을 당하게 될 것 같았다.
“저어…… 일단은 주인님 하고 싶으신 대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최대한 이쪽을 안 보고 있을게요.”
“하아…… 미안하다. 그럼…… 조금만 참아라.”
타리크는 일리에가 이 가문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일리에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슬라르한은 타리크가 옷을 벗기는 동안에도 내내 일리에의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그의 시선 역시 고개를 돌린 일리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슬라르한에게 잡힌 채 시선을 딴 곳에 두려고 노력하는 일리에나, 비협조적인 거구의 남성을 벗기고 씻기는 타리크나 난감하고 곤란한 상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사실 이 상황에서 제일 미칠 것 같은 건 슬라르한이었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죠? 르한! 르한, 제발…… 제발 나 좀 죽여줘요! 제발!”
절박하고 애타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던 순간이 여전히 생생했다.
갑자기 저에게 달려들던 키메라를 베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릿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더니 머릿속에서는 전후 관계를 전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고, 눈앞에는 축 늘어진 여자를 안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까만 천으로 감싸여 있어서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슬라르한은 그게 왠지 일리에인 것 같다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신을 죽여달라는 처절한 애원도, 꼭 일리에의 목소리 같았다.
“왜? 내가 네놈의 적선이라도 바랄까 봐? 차라리 죽여라!”
루벨파스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일리에가 피를 토하듯 죽이라고 애원하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키메라들은 달려들었고, 슬라르한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베어나갔다.
자기가 보는 눈앞의 환영이 질 나쁜 장난질이라는 걸 애써 되새김질했지만,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주변과 그 한가운데 홀로 쓰러진 여자의 모습은 그의 분노와 공포를 마구 자극해 댔다.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다 죽여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없는 이 세상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를 죽인 이 세상에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복수하고 싶었다.
그토록 찬란한 자리에 어울리던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녀가 찬란한 자리에 올라서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내 것이 되길 바란 것도 아니잖아! 그저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었어! 그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잖아!’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분노가 마구 터져 나왔다.
덕분에 솔프리움 거리에 나돌아다니던 키메라를 한 마리도 남겨놓지 않고 전부 쓸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고도 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서, 귀환할 때쯤에는 제 곁의 벤티악 기사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상 상태를 눈치챈 타리크는 곁에서 조금만 버티라고, 조금만 버티면 금방 일리에를 데려오겠다고 달랬다.
아마 입으로 계속 일리에의 이름을 중얼거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불안감과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두 눈으로 일리에가 멀쩡한지 확인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주인님!”
폭발할 것 같은 마력을 억누르는 것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청량한 목소리가 그의 익어가는 신경을 일시에 식혀주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아주 건강하게, 저토록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살아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
종알대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게 저를 탓하는 소리 같다고 여기면서도 그녀를 안은 팔을 풀 수 없었다.
“주인님.”
목욕탕 안이라 조금 울리는 일리에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듣고 있으면서도 멍하니 일리에만 바라볼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손 대신 저쪽 손으로 저를 잡으시면 안 될까요? 이 손을 안 놓으셔서 셔츠를 벗길 수가 없어서요. 저 안 도망갈 테니까…….”
슬라르한은 그때 처음으로 일리에를 붙들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팔을 꽉 붙들고 있었는지, 그가 잡은 아래쪽으로는 피가 통하지 않아 불그죽죽해져 있었고, 그의 손목 아래로는 흠뻑 젖은 셔츠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얼른 일리에의 팔을 놔줘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손을 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손을 놓으면 일리에가 그대로 쓰러져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정한 일리에는 그의 불안을 이해했는지 다른 쪽 팔을 내밀었다.
“주인님. 자요. 저쪽 손으로 이쪽 팔을 잡으세요.”
슬라르한은 욕조 안에 늘어져 있던 왼손을 들어 일리에의 오른팔을 붙잡고는 나머지 손을 떼기 위해 애를 썼다.
일리에를 잡고 있던 오른쪽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괜찮아요. 저도, 주인님도, 다 괜찮아요.”
슬라르한은 그 다정하고 슬픈 위로에 두 눈을 꾹 감고 다시 일리에를 품에 안았다.
“으앗!”
일리에가 작게 놀랐지만 도무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오른손이 일리에의 팔뚝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때를 틈타 타리크가 재빨리 슬라르한의 손목에서 셔츠를 빼냈고, 일리에는 완전히 다 벗은 슬라르한에게 안긴 채 얼굴만 새빨갛게 붉혔다.
“거의 다 됐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타리크는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부지런히 슬라르한을 씻겼고, 그들은 슬라르한을 목욕탕에 데려온 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에야 겨우 그들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슬라르한을 부축하고 그의 침실로 향하면서 타리크와 일리에는 진이 다 빠진 와중에도 서로에게 조금은 동지애를 느끼며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슬라르한의 상태가 점점 괜찮아지고 있으니, 정말로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슬라르한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클리드와 마주치지만 않았어도, 아마 일이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벤티악 공작……?”
슬라르한이 돌아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집무실에 없어서 침실 앞까지 찾아온 클리드였다.
“다친 겁니까?”
그는 타리크와 일리에에게 부축받아 침실로 돌아오는 슬라르한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어딜 다치신 게 아니라 힘을 너무 쓰셔서…….”
타리크가 막 슬라르한 대신 변명하려던 때였다.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제 뒤로 밀어놓고는 갑자기 클리드의 멱살을 잡았다.
“각하!”
“벤……티악, 공작……!”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타리크도 미처 슬라르한을 막지 못했고, 클리드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채 소드 마스터에게 멱살을 잡혔다.
“약속…… 했잖아. 왜 지키지 않았지?”
“약……속이라니, 크흡, 이것 좀……!”
“네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타리크가 슬라르한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슬라르한의 힘은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이대로라면 클리드 정도는 금방 질식해 쓰러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에는 슬라르한이 아직 제정신을 되찾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라는 것은 왠지 알 수 있었다.
엉망인 채로도 자신이 살아 있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하던 슬라르한이니까.
“주인님!”
일리에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다시 분노로 차오른 슬라르한은 곧바로 일리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클리드의 얼굴은 피가 몰려 시뻘게지고 있었다.
일리에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슬라르한의 등 뒤로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르한.”
아까처럼 큰 소리로 부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의 움직임은 일시에 멈추었다.
“그만둬요.”
일시에 적막해진 것 같은 복도에 슬라르한의 격한 숨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지만, 이내 클리드의 멱살을 쥐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제야 클리드의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곁에서 열심히 말리던 타리크는 쓰러질 뻔한 클리드를 붙들었고, 일리에는 슬라르한을 껴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하아, 하아, 도,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한참 기침을 하던 클리드는 반쯤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이 처음 저택에 찾아왔던 날이나 세이렌을 죽이려 했던 날의 반응이 이랬다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제 와 이러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타리크는 슬라르한이 다시 공격할까 봐 클리드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서 조용히 말했다.
“각하께서 그 괴물 놈들을 다 해치우기는 하셨는데, 그 후로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다행히 일리에 녀석의 말은 좀 들리는 것 같은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격적이랄까요. 놀라셨겠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일리에의 목소리만 들린다고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각하께서 괜찮아지실 때까지는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달하실 사항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그저, 걱정이 되었던 것뿐입니다. 그럼…… 나중에 괜찮아지시면 찾아뵙기로 하죠.”
클리드의 시선이 여전히 슬라르한을 다독이고 있는 일리에를 스쳤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클리드를 돌려보낸 타리크와 일리에는 슬라르한을 간신히 침대에 눕혔고, 슬라르한은 그때까지도 일리에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 이거 참 난감하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마님이 좀 걱정이네요. 아무도 곁에 없어서…….”
“부인의 상태는 내가 확인하고 오마.”
타리크는 슬라르한을 씻기느라 다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세이렌이 누워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 타리크의 뒷모습을 보며 일리에는 왠지 마음이 짠해졌다.
아마 타리크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슬라르한이라 할지라도 이만큼이나 버텨왔을 리가 없다.
뛰어난 참모의 존재란 저런 거구나 싶어서, 전생의 클리드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었다.
클리드의 생각을 떠올리다 보니 아까 슬라르한이 클리드에게 했던 말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오늘 나간 일에 관해 뭔가 약속한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멱살 잡힌 클리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가 그렇게나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도 드문 일이니까.
아니, 그 이전에, 정신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클리드의 약속 따위를 슬라르한이 믿었을 리 없다.
‘도대체 뭐지?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멱살을 잡은 건가?’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침실까지 오는 길에 마주쳤던 몇몇 사용인들을 보고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리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슬라르한은 간신히 안정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것 같기는 했지만 일리에의 손목을 잡은 손은 여전히 단단했다.
“르한…… 너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일리에는 단단히 감긴 슬라르한의 눈꺼풀과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늘 이렇게 괴롭고 힘들었던 거야? 그걸 잘 숨기기만 했던 거냐고, 이 미련퉁이야.”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철벽은 어쩌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리고 전생에도.
그리고 자신이 그 아픈 속을 헤집는 사람이었다고 깨닫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비겁한 꼼수로 1등을 차지하고, 그를 이용하고, 그의 형제와도 같은 참모를 불구로 만들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사라진 그를 예우해 주기는커녕 벤티악 영지의 레제 성과 수도의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나 진짜 나쁜 년이었네…….’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황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자신은 그저 비겁했을 뿐이다.
더 찔리는 것은, 슬라르한은 저를 만날 때마다 황녀를 대하는 예의를 다 차렸다는 점이다.
말 한마디 함부로 하지 않았고, 여자가 검을 휘두른다고 얕잡아본 적도 없으며, 자신의 무례한 말장난에도 품위와 존중을 담아 응대했다.
‘이 녀석이 전생을 기억 못 하는 게 다행이지. 그때는 날 얼마나 싫어했을까?’
일리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목을 무슨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들고 있는 슬라르한을 내려다보다가 굳게 닫힌 침실 문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누가 들어올 낌새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일리에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재빨리 슬라르한의 뺨에 입술을 쪽, 맞췄다.
순식간에 해치운 일인 데다 슬라르한도 깰 기미가 없고 누가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 맞춘 지 5초가 지나기도 전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 진짜 뭐 하는 거야!’
괜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슬라르한을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서둘러 입 맞춘 게 다행한 일이었다. 조금 뒤 침실 문을 누군가가 작게 노크한 것이다.
일리에는 화들짝 놀라며 슬라르한이 깼는지 확인하다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문을 연 사람은 왠지 이상한 표정의 타리크였다.
“다, 다녀오셨어요?”
“어…… 그…… 그런데, 좀…… 일이 생겼다.”
“네?”
타리크의 말에 불안감을 느낄 새도 없이,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어……?”
일리에도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타리크와 함께 온 사람은, 여태 자는 모습만 봤던 세이렌, 그녀였기 때문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답지 않게, 그녀는 무척이나 차분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마님! 드디어 뵙게 되는, 아니, 그런데 이렇게 걸어 다녀도 괜찮으신 거예요?”
“일리에……?”
“네! 그러고 보니 제가 이름도 말씀을 안 드렸네요. 저는 일리에라고 합니다.”
당황은 했지만 일단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하던 일리에는 자신의 손목이 슬라르한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제가, 어, 공작 각하의 심부름꾼이거든요! 이건 그러니까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뭐랄까, 사람이 악몽을 꾸면 뭔가 손에 쥐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도 같고…….”
일리에는 괜히 슬라르한의 어머니에게 요망한 불여우 취급이라도 받게 될까 봐 횡설수설했다.
그러나 세이렌의 표정은 어딘지 슬플 뿐, 이 상황을 당황스러워하거나 언짢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슬라르한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일리에는 슬라르한에게 손목을 잡힌 채 그 옆에 엉거주춤 섰다.
세이렌의 분위기가 너무도 슬퍼서, 헛소리를 늘어놓던 입도 꾹 다물렸다.
세이렌은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아들의 뺨을 쓸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억눌러 왔는지, 슬라르한은 이미 너무 지쳐 보였다.
사비 족이 세상에 떠도는 악마의 힘을 흡수해 공허의 문이 열리는 걸 막는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움’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존재가 자신 본연의 힘을 쓰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공허의 문이자 봉인된 리카온 그 자체인 슬라르한은 ‘사랑하는 존재와 같은 존재로 남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자신의 본능을 억눌러 왔다.
날아다니고 뛰어다닐 수 있는 존재가 평생 기어 다니기로 마음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상의 생명체들은 슬라르한의 그 ‘사랑’에 목숨이 걸려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세이렌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게 두려워서 모든 걸 되돌렸는데, 그들이 기어이 너를 찾아내고야 말았구나. 이게 운명인 건지…….”
그녀는 야윈 손을 지친 아들의 이마에 갖다 댔다.
아직 마력핵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 슬라르한의 깊은 곳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깊은 곳까지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슬라르한에게서는 짙은 악마의 힘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억지로 공허의 문을 열려고 시도한 흔적이 느껴졌고, 슬라르한의 몸에 남아 있는 엘룬의 축복이 안간힘을 다해 힘의 범람을 막아내고 있었다.
의외인 것은, 슬라르한의 의지가 확고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세이렌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일리에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슬라르한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래,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빛을 놓을 수는 없는 거지…….’
리카온이 눈뜨면 일리에 역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릴 운명이었다. 리카온에게는 이지도, 감정도 없으니까.
하지만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포기할 리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던 당시에는 릴리에트를 되살릴 가망이 없었다. 식물인간이 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어 사비 족의 피로도 그녀를 낫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리에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보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슬라르한인데, 고작 이 정도의 충격을 못 버틸 리 없다.
“일리에…….”
“네, 마님!”
“앞으로도 우리 르한을, 많이 도와주렴.”
세이렌은 얼떨떨한 표정의 일리에에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슬라르한의 이마에 대고 무슨 주문을 외우자 슬라르한의 호흡이 훨씬 더 편안해지면서 일리에를 잡은 손에 힘이 풀어졌다.
“르한은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일리에도, 타리크도, 오늘은 들어가 쉬어라. 르한 옆은 내가 지킬 테니까.”
“하지만 마님도 이제야 겨우 눈뜨셨는데……!”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희도 알고 있잖니? 나는 괜찮아. 그러니 걱정 말고 들어가 쉬렴. 앞으로의 싸움이야말로 더 힘들어질 테니까.”
그녀의 말에 일리에와 타리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마른침을 삼켰다.
* * *
온몸에 묵직한 추가 달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슬라르한은 눈을 떴다.
늘어진 팔을 들기도 버거울 것 같았지만 낮은 신음과 함께 뒤척인 몸은 생각 외로 가벼운 느낌이었다.
슬라르한은 버석거리는 듯한 눈꺼풀을 깜박이며 잠시 혼몽한 정신을 깨웠다.
짙은 군청색의 캐노피를 보며 기억을 하나씩 더듬다 보니 어제의 일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 저, 멀쩡히 잘 살아 있어요.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이상한 상태였을 것이 분명한 저에게 평소처럼 생긋 웃으며 답하던 일리에의 모습과,
“거의 다 됐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꼼짝도 못 하는 자신을 어린아이 씻기듯 씻겨주던 타리크와,
“약……속이라니, 크흡, 이것 좀……!”
다짜고짜 저에게 멱살 잡히고도 이해해 주었던 클리드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누군가 제 뺨에 살짝 입 맞춘 꿈도 꾼 것 같고, 꿈에 어머니가 나왔던 것도 같다.
“……엉망이군.”
슬라르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때, 누군가가 살며시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슬라르한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곁에 누군가가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등줄기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그런 그를, 아스라한 기억으로만 늘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부드럽게 다독였다.
“놀랐구나, 르한.”
“……어머니?”
“기운이 진정됐는데도 눈을 뜨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단다.”
세이렌이 마치 어제도 평범하게 일상을 나눈 것처럼, 기억과 조금도 다름없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언제…… 깨어나신 겁니까?”
“어제, 네 힘이 너무 커져서 덩달아 눈이 뜨였단다. 덕분에 마력핵이 회복하긴 했지만, 사실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
“제 힘…….”
슬라르한은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어제의 그 뜨겁고 흉포한 기운이 아직도 제 심장 근처에 머무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르한. 너도 지금쯤은 네 힘이 그 무엇과도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7, 8년쯤부터 어머니께서 주신 목걸이가 제 힘을 억누르지 못하게 됐고, 대신 제가 힘을 쓰려고 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쓰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마치,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제 머릿속에다 대고 소리치는 것처럼요.”
세이렌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순간들도 있었을 텐데…….”
“작년에 테르소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알게 된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힘이 통제가 안 됐습니다. 그 이후로는 너무 화가 나면 극단적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하지만 여태 버텨냈구나.”
“저 스스로 버텨낸 게 아닙니다. 제가 그럴 때마다 옆에서 제 심부름꾼 아이가 차분하게 말을 걸면서 저를 진정시켜 줬습니다. 이번에는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간 게 아니라서…….”
“일리에 말이구나.”
“아, 벌써 인사를 나누셨던가요?”
“……그래.”
‘인사를 나눈 지는 꽤 되었지.’라고 생각하며 세이렌이 희미하게 웃었다.
“르한. 내가 떠나던 그때는 몇 년 뒤에 너를 다시 만나러 올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래서 적어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네가 너 자신으로 살게 하고 싶었기에 많은 것을 비밀로 놔두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때 모든 것을 다 알려줬어야 했던 건가 싶기도 하구나.”
“비밀……?”
슬라르한의 되물음에 세이렌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비 족이 리카온의 후손이고, 우리가 쓰는 힘이 악마의 힘이라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예. 어머니께서 힘을 각성시켜 주신 그때,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여쭙고 싶었던 것들이 있습니다.”
슬라르한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께서 떠난 이유는, 황제 폐하가 하는 말씀이 다 맞아서였습니까?”
“오, 르한. 그건 아니야. 그건 정말이지 아니란다.”
“하지만 우리는 악마의 후예라면서요? 그게 저 흑마법사들보다 나을 게 뭡니까?”
세이렌이 슬프게 웃었다. 이래서 어린 슬라르한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자책할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게다가 어린아이의 생각이란 쉽게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때 다 말해줬더라면 슬라르한의 각성 시기는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사비 족은 반신(半神)처럼 살 수 있는데도 인간으로 살기를 선택했단다. 어둠의 힘을 이겨낼 수 있도록 엘룬의 축복을 받았지. 공허의 문 문지기라는 중책도 맡았다. 우리 일족은 수천 년간, 파멸의 앞잡이가 아닌 생명의 수호자로 살아왔어. 우리는 오히려 흑마법사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란다.”
“그렇다면 왜 제 힘이 이렇게 제멋대로 날뛰려는 겁니까? 가끔 폭주할 것 같은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그건…….”
세이렌은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을 꾹 쥐었다. 슬라르한이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도 침착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확실히 알지 못하면 앞으로 흑마법사와의 싸움에서 반대로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이렌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비 족 안에서 천 년마다 한 번씩, 강한 힘을 타고나는 아이가 태어난단다. 숨어 있는 리카온의 힘이 세상 밖으로 튀어 나가려고 하는 거지.”
“……그 말씀은, 아니, 잠시만요.”
“처음에는 나인 줄 알았다. 내 힘이 다른 일족들보다 훨씬 커서, 내가 이번 천 년의 리카온인 줄 알았어.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다고, 그리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니었군요.”
“설마하니 보통 인간의 피까지 섞인 네가 그러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르한. 내가…… 네 아버지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이렌은 침통해했지만 사실 이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고, 재수 없게 리카온의 강한 힘을 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인생 전부를 희생해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슬라르한도 이제야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 사실을 비밀로 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들었다면 아마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사비 족의 핏줄을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려 했던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눈을 감고 있던 슬라르한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제가 리카온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도 제가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엘룬의 축복 덕분이지. 리카온의 힘을 강하게 타고날수록, 엘룬의 축복 역시 강하게 타고난다. 넌…… 흑마법사들이 열려는 공허의 문 그 자체이자, 가장 강력한 문지기인 거야.”
결국 그 말을 입에 올릴 수밖에 없게 된 세이렌의 눈빛이 참담했다.
“저 하나의 결정만으로 이 세계가 망할지 말지 결정된다는 겁니까?”
“우리 일족 모두가 최선을 다해 너를 돕고는 있지만, 이렇게나 큰 힘이라면…… 맞아. 네가 그 빗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죽는 게 이 세상을 위해 더 나은 일 아니겠습니까?”
“르한…… 그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너는 그렇게 간단히 죽을 수가 없어. 상처가 나도 곧장 아물고, 위기 상황에서는 보호 본능이 발동해 힘이 터져 나올 거다. 여태 크게 다쳐본 적도 없지?”
“정말…… 최악이네요.”
몸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슬라르한이 한숨을 내쉬고 세이렌이 눈시울을 붉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세이렌은 눈가를 황급히 닦아내고 들어오라고 일렀다.
“마님, 차라도 한 잔…… 어? 주인님!”
문을 빼꼼히 열고 세이렌에게 주전부리라도 전해주려던 일리에는 슬라르한이 깬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
일리에의 밝은 목소리에 슬라르한은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흘렸다.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안 됐다. 아, 그리고 어제, 너에게 실례가 많았던 것 같은데…….”
“에이, 그 정도는 실례라고 할 수도 없죠! 배 안 고프세요? 수프라도 좀 가져올까요?”
“식사는 좀 나중에…… 그보단 타리크와 얘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구나.”
“금방 모시고 올게요!”
세이렌의 말대로 슬라르한이 하룻밤 만에 괜찮아지자 일리에는 적잖이 안도한 듯 생기발랄해졌다.
세이렌은 일리에가 나간 문을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슬라르한에게 말했다.
“최악인 것만은 아니야. 엘룬께서는 네게 커다란 축복을 남겨주셨거든. 그게 네 의지를 단단하게 유지해 주고 있지.”
“그 의지가 지금 좀 위태로워서요.”
“글쎄, 그럴까?”
“어머니께서 저를 너무 대단하게 보시는 것 아닐까요?”
“네가 무너지는 순간 일리에는 죽어.”
세이렌의 선언과도 같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슬라르한의 숨이 순간 멈췄다.
모든 생각이 정지하고 꿈에서 봤던, 사방이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한가운데 홀로 쓰러진 여자의 환영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세이렌은 경직된 슬라르한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아직 일리에는 살아 있지. 건강하게, 밝은 모습으로…… 그러니 너는 무너지지 않을 거다. 이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도 너는, 그 아이 하나 살리겠다고 버텨냈으니까.”
“……제가요?”
“그래. 넌 이미, 이보다 더 최악을 버텼어.”
이상한 이야기였다.
일리에를 만난 이후로는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고, 기억을 잃은 적이 없는데 어제야 눈을 떴다는 어머니는 도대체 언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리에를 보며 기시감에 시달렸던 것이 떠올랐다.
“저는 전혀 기억에 없지만…… 제가 과거에 일리에를 만난 적이 있긴 한 거로군요.”
세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왠지 언젠가 만났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한 꿈도 꾸고…… 도대체 그게 언제였습니까?”
“언젠가…… 말해줄 수 있는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슬라르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일리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모든 일이 다 끝나면요…… 그때 다 말씀드릴게요. 약속해요.”
꽤나 여러 번 듣는 ‘언젠가’라는 말이 왠지 어느 한순간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황위 후계자가 되고, 흑마법사들을 막아내고, 일시적이나마 평화를 얻어낸 그쯤……?
그 ‘언젠가’가 오면, 어머니는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일리에와의 인연에 대해 말해줄 것이고, 일리에 역시 저에게 말하지 않은 속내를 털어놓을 것이다.
자신 역시 숨겨뒀던 마음을 일리에에게 고백할 테고, 일리에는…… 일리에는 떠날 것이다.
과연 최악을 면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일리에가 곁에 없는 여생을, 자신은 잘 버티며 지낼 수 있을까.
지금도 일리에의 목소리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이성을 놔버릴 것 같은데…….
하지만 세이렌의 말이 맞았다.
일단 지금은 일리에가 건강히 살아 있음을 다시 깨달은 것만으로도 자신의 힘을 버틸 힘이 더 생겼다.
“버텨야겠네요. 하지만 이번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정말 위험합니다. 도대체 키메라에 무슨 장치를 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분노를 자극하는 환영이 상당히 강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공허의 문을 열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으니까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나도 네 곁에서 도와줄 테니.”
그들이 자신 없는 다짐을 하고 있을 때쯤, 다시 일리에가 노크했다.
그 뒤로는 아직도 걱정이 다 가시지 않은 표정의 타리크가 서 있었다.
“타리크.”
“각하! 이제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뭐, 그런대로…… 자네에겐 면목 없게 되었네.”
“저보다야 일리에 녀석이 좀 곤란했죠. 저야 괜찮습니다. 각하께서 취하신 것 같은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즐거웠고요.”
타리크는 조금도 거짓말하는 기색 없이 킬킬대며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슬라르한은 언제나 너무 완벽한 모습만 보여서 저게 사람은 맞나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그 원인이 좀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타리크가 본 이래 슬라르한이 가장 많이 망가진 날이었다.
감정도 철저히 숨기던 사람이 계속 일리에의 이름만 중얼대면서 그 녀석만 쳐다보는데, 솔직히 옆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 마음이 선연히 들여다보였다. 저렇게나 큰 감정을 어떻게 숨기고 사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조금 즐겁기도 했다.
슬라르한이 술을 즐긴다면 인생의 선배로서 연애 조언도 좀 해주고 그랬을 텐데 말이다.-물론 이 생각을 일리에가 알았다면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겠지만.
“두 사람에게 정말 크게 민폐를 끼쳤네. 다시 한번 사과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되셨는지, 혹시 기억하세요?”
타리크 곁에서 피식피식 웃던 일리에가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키메라에 뭔가 사술을 걸어놓은 것 같더군.”
“황제 폐하께서 각하를 황실 기사단의 선봉으로 임명한 이유와 연관이 있을까요?”
그 말은 곧, 황제도 키메라를 만든 흑마법사와 한패일 것 같냐는 뜻이었다.
하긴, 키메라같이 듣도 보도 못했던 괴물이 수도에 나타났는데도 미적지근했던 것을 보면 충분히 그 답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벤티악 기사단을 끌고 갔다면 아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마스터급 기사가 없는 황실 기사단만 내어준 걸 보면…… 내가 그 사술에 확실히 걸려들길 바랐다고 봐야겠지.”
“망할 노친네 같으니라고! 황손이 아닌 각하께서 후계자가 되길 바라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이런 질 나쁜 장난질이랍니까?”
타리크가 이를 바득 갈았다.
애초에 가만히 있던 슬라르한을 들쑤신 것도 화가 났지만, 이왕 밀어준다고 했으면 자기가 했던 말이라도 지켜야 하지 않는가.
타리크는 속이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그러나 곁에 있던 일리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흑마법사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부터 황제 폐하께서는 애타게 흑마법사를 찾으셨을 겁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나려고 했을 거예요.”
“그게 말도 안 되는 짓이라 이거다! 제국의 황제가 되어서는 흑마법사를 찾아?”
“그런 분이시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주인님께 해가 되는 짓을 벌인 걸 보면 아마, 이미 흑마법사와 접촉했을 거예요. 더 이상 주인님의 충성을 바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됐다는 겁니다.”
일리에의 분석에 슬라르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엘로르 전하의 시녀라는 그 흑마법사가 황제 폐하께 붙은 거야. 아니, 황제 폐하가 그 흑마법사에게 붙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술이 얽힌 키메라 공격과 기이한 출정 명령이 동시에 성립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가 저쪽에 넘어갔다면…… 상황이 아주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엘로르 전하가 부리는 흑마법사라면 평가 점수를 조작해 엘로르 전하를 후계자로 정하실지도 모르고요.”
타리크는 심각한 얼굴로 걱정했지만 슬라르한의 생각은 달랐다.
“엘로르 전하는 흑마법사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쪽에 가깝다고 보네. 물론, 그녀가 먼저 흑마법사를 수소문했다니 화를 자초한 거나 다름없지만.”
엘로르에 대해 생각하자 그녀의 참모였던 클리드가 떠올랐다. 어제 일리에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정말 죽였을지도 모르는…….
슬라르한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리다가 난감한 얼굴로 부탁했다.
“그러고 보니 카시르 영식에게도 사과해야겠군. 모셔와 주겠나?”
“아, 제가 다녀올게요!”
일리에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그, 타리크, 자네가 좀 수고해 주게. 일리에한테는 좀…… 할 말이 있어서.”
“예, 알겠습니다.”
일리에와 타리크는 별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슬라르한은 이제부터 일리에에게 할 말을 떠올려야 해서 진땀이 다 났다.
하지만 일리에가 클리드를 부르러 가서 그와 둘만 접촉하는 시간이 생긴다는 게 너무나 불쾌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갑자기 나오는 대로 뱉은 말이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옆에는 세이렌도 있었으니까.
세이렌은 아까부터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었지만 제 발 저린 슬라르한은 그 눈빛마저 따끔거렸다.
그러나 일리에는 늘 그렇듯 그를 구해주었다.
“저…… 어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어……? 아, 뭐, 응…….”
“그…… 목욕탕 일 말씀이실까요, 아니면 카시르 영식 때 일 말씀이실까요?”
일리에는 한숨까지 내쉬며 뭔가를 잔뜩 각오한 얼굴이었지만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할 말 있다는 사람이 오히려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으흠! 둘 다.”
“그, 저기, 목욕탕에서는 맹세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못 봤다기보다는, 명치 아래쪽으로는 못 봤습니다. 아니, 못 본 거라기보다는 안 본 거죠! 맹세코!”
일리에의 힘찬 대답 후 한동안 슬라르한의 침실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일리에는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어제 내 벗은 몸을 봤냐고 추궁하기라도 할 줄 알았다는 건가?’
황당하긴 했지만 막상 듣고 보니 진짜로 좀 궁금해지기는 했다. 명치 아래로는 못 봤, 아니, 안 봤다지만, 그 위로는 봤을 텐데 아무 생각이 안 들었나 싶어서.
옆에 세이렌만 없었어도 물어봤을 것이다.
“그럼…… 카시르 영식이…….”
“아! 그,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주인님이라고 불렀는데 주인님께서 전혀 듣지 못하셔서…… 추, 충격 요법으로…… 성함만 부른 거였는데…….”
이번엔 무슨 일이었나 했더니 자신을 이름으로만 부른 걸 내내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의외로 소심한 부분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르한……이라고 불렀던가?”
“네. 그, 그건 알아들으시더라고요. 정말로 주인님이라고 한 번 부르긴 했는데,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고 또…….”
“탓하는 게 아니야. 사실…… 덕분에 위험한 순간을 간신히 잘 넘겼다고 하는 말이다. 당황스러웠을 텐데…… 고마웠다.”
“에,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저는 주인님의 심부름꾼이잖아요!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어야 벤티악 공작님의 심부름꾼이구나, 하죠.”
다시 씩 웃는 일리에의 모습을 보며 슬라르한은 같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 보니 아까 세이렌과 무슨 얘기 때문에 우울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리카온이 어쩌고, 공허의 힘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슬라르한에게는 그따위 것보다 일리에의 저 미소를 한 번 더 눈에 담는 편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아…… 어머니가 말씀하신 게 이거였나?’
자신의 의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엘룬께서 남겨주신 축복.
즐거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 마주친 눈 부신 태양.
“그나저나 이제 카시르 영식을 만나셔야 하니까 옷을 좀 입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군.”
“가볍게 걸치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일리에는 드레스룸으로 향해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슬라르한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엘룬께서도 영악하시네요. 저런 축복을 내리시다니…… 이거야 원, 거부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곁에 앉아 있던 세이렌은 다시 슬라르한의 손을 꼭 잡으며 옅게 웃었다.
* * *
“우선,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슬라르한이 클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디넬 경께 말씀 들었습니다. 키메라에 공작의 정신을 혼란케 하는 사술이 얽혀 있었다고…….”
“그렇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카시르 영식께 심각한 위협을 가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슬라르한이 클리드의 목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목을 조른 것도 아니고 멱살을 잡았을 뿐인데, 셔츠 깃으로 미처 다 가려지지 않은 목 앞쪽에 푸르스름한 멍이 얼핏 보였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공작의 몸이 더 걱정되는군요.”
클리드가 너그럽게 전날 일을 이해해 줘서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클리드는 어젯밤부터 계속 슬라르한이 저에게 했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중이었다.
“약속……했잖아. 왜 지키지 않았지?”
“네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그가 사술에 의한 환영을 보던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클리드의 예리한 직감이, 그게 바로 저를 향한 원망이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의심을 하게 된 것은, 슬라르한이 자신의 정신 지배를 풀어주던 그날, 자신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간 기묘한 기억의 잔상 때문이었다.
기억이라기엔 참 이상했던 것이,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기억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순간 클리드는 그게 엘로르가 말했던 ‘전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신 지배를 푸는 와중에는 전생에 자신이 일리에를 혼자 짝사랑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순간 눈앞에 번뜩인 환상에서는 일리에와 똑같은 눈을 한 여자가 제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슬라르한이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분한 태도이긴 했지만,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착각할 수 없었다. 그건 열정과 집착이었다.
기묘한 삼각관계였다.
‘만약 내가 흑마법에 당한 탓에 전생을 본 거라면, 벤티악 공작 역시 흑마법의 사술로 그 전생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도대체 우린 무슨 관계였던 거지?’
엘로르는 저더러 ‘네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며 악을 써댔고, 슬라르한은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라며 화를 냈다. 그리고 일리에는…….
“저는 믿지 못할 사람에게 제 운명을 걸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여전히 그 단호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한 말도 아닌데 그 말이 지금 왜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내가 믿지 못할 놈이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데.’
클리드는 슬라르한의 방을 나오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일들이지만, 만약 황위 경쟁이 제 생각대로 흘러갔더라면 자신은 확실히 신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나쁜 놈이 됐을 테니까.
그게 자신의 본성인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 같아서 속이 공허해졌다. 사랑 같은 감정놀음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 * *
키메라와의 격전이 벌어진 이래, 수도에는 흉흉한 괴담이 나돌기 시작했다.
“누가 그러는데, 저번에 나타난 괴물 중 한 마리의 머리가 글쎄, 1년 전쯤 행방불명된 이웃이랑 똑 닮았더라는 거야.”
“파르디나스에 엘룬의 축복이 다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러니 지옥에서 괴물들이 기어 올라오는 거래요!”
두려울 만도 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괴물, 그것도 지독한 시취를 뿜어내는 괴물이 베어도 죽지 않고 사람들을 물어 죽였으니.
황위 후계자가 결정되는 해에 벌어지는 불길한 일들 때문에 한편에서는 이것이 신의 뜻 아니겠느냐는 소리도 나왔다.
“성녀를 황제로 추대하라는 엘룬의 계시인 게야!”
“그럼, 그럼! 황제는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 하늘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거라니까!”
그런 말들이야 전부터도 루트 교도들을 중심으로 흘러나왔지만, 끔찍한 괴물들의 출몰에 일반 백성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베델을 통해 바깥의 상황을 전해 들은 타리크는 분통을 터트렸다.
“진짜 황당하구만! 괴물을 도심에 푼 게 누군데! 그걸 뒤처리한 건 또 누군데!”
심지어 키메라들을 처리하다가 슬라르한은 위험한 상황에도 빠지지 않았던가.
곁에 있던 클리드는 그런 타리크를 달랬다.
“어차피 일반 백성들은 이 일의 배후나 벌어진 이유 같은 건 잘 모르니까요. 흑마법사는 뒷일까지 노리고 일을 벌였을 겁니다. 루트 교를 통해 직접 소문을 퍼트렸을 확률이 높고요.”
그들이 걱정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베델이 건넨 정보를 확인하던 슬라르한은 이내 턱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생각하더니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확실히, 이래서야 공정하지 못하지.”
“공정하지 못한 것뿐입니까? 일단 기분이 나쁘죠, 기분이! 일은 저쪽에서 저질렀고 고생은 이쪽에서 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콩고물마저 저쪽에서 주워 먹잖습니까!”
“그러게. 내가 주워 먹어야 할 콩고물이었는데 말이야.”
“아니, 그걸 또 그렇게 받아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슬라르한은 쩔쩔매는 타리크를 보며 피식 웃다가 다시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베델 군이 또 다른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네. 이걸 이용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가 자신이 읽고 있던 종이를 타리크에게 넘겨주자 타리크와 클리드가 서로 붙어 앉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몇 줄 읽지도 않은 사이에 ‘허!’하는 황당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게 사실입니까?”
“이놈들, 뭐 하는 놈들이랍니까! 황실에서도 이걸 알고 있습니까? 알면서도 그냥 놔두는 거랍니까?”
클리드와 타리크의 흥분은 당연했다.
-……접촉한 루트 신도 25명 중 11명이 지인의 실종 사실을 고백. 그들이 말하는 실종자의 수만 약 50명.
……처음에는 ‘다른 교구에서 전도 활동을 한다.’라는 윗선의 말을 믿었으나, 서로 정보 공유를 통해 ‘특별 기도회’에 참석한 이들만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됨.
현재, 이 사실을 인지한 신도 중 5명은 개종했으나 그중 2명 행방불명.
어느 모로 보나 의심스럽고 꺼림칙한 실종이었다.
“11명이 증언한 실종자의 수가 50명이라면, 실제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가 사라졌다는 겁니까?”
“대략적으로 파악된 루트 신도 수가 수도 내에만 1만 명이 넘어간다니, 아무리 못해도 기백 명은 되겠지.”
“정황상 루트 교 자체적으로 신도들을 빼돌린 것 같습니다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빼돌렸을까요? 게다가 특별 기도회는 또 무엇인지…….”
타리크의 질문에는 잘 대답하던 슬라르한이, 클리드의 질문에는 답을 머뭇거렸다. 클리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혹시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카시르 경. 흑마법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아카데미와 황궁 내의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는 관련 서적은 다 읽었습니다.”
“지식이 상당하시겠군요. 그럼…… 모든 마법이 그러하듯, 흑마법 역시 대가를 요구한다는 걸 알고 있으시겠죠?”
“그거야 당연…… 아, 그렇다면 설마……!”
클리드의 눈이 경악스럽게 벌어졌다.
모든 흑마법 서적에서는 흑마법이 요구하는 ‘대가’를 늘 일정 페이지 이상 할애하여 설명했는데, 어떤 식으로 설명해 놨다고 해도 주요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악마의 힘, 공허의 힘, 어둠의 힘으로 불리는 그 힘이 대가로 바라는 것은 오로지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생명력이란 인간의 목숨 또는 영혼이었다. 영혼을 취하는 것은 방법이 까다로운 경우가 많았지만,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간단했다.
흑마법이 위험한 것은 상대를 마법진 위에 세울 수 있기만 하다면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목숨도 동의 없이 가져다 바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떠올려 볼 것도 없이, 흑마법이 생명력을 대가로 취한다는 것만 봐도 실종자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악한 마법의 제물이 되었겠군요.”
“이런 걸 노려 적극적으로 포교해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노예를 사는 것도 돈이 많이 들었을 테니까요.”
“이 배라먹을 잡것들이!”
클리드와 슬라르한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타리크가 분을 못 참겠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어린애도 없어졌다지 않습니까, 어린애도! 이것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슬라르한은 타리크의 분노에 저가 다 미안해졌다. 세이렌은 사비 족이 흑마법사와 대척점에 서 있다고는 했지만, 슬라르한 자신은 흑마법사들이 갈구하는 악의 힘 그 자체였으니까.
‘내가 이성을 놓는 순간 이 세상이 절망에 빠진다는 걸 알게 되면, 타리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세상을 위해 자신이 직접 죽여주겠다고 나설까, 아니면 악 그 자체인 자신이라도 주군으로 계속 따르겠다고 할까.
아마 타리크는 괴로워하면서도 제 온 힘을 다 끄집어내어 죽이려 들 것이다. 자신도 타리크의 손에서라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리카온이 그렇게 호락호락 죽어주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지만.’
넌 그렇게 간단히 죽을 수도 없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라 입안이 썼다.
자신이 리카온, 또는 공허의 문 그 자체라는 사실을 타리크에게 차마 알려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타리크만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입술이 바싹 말랐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최선은 다해봐야 했다.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막고 저쪽의 기세도 꺾으려면 이 사실을 루트 신도들에게 퍼트려야 해. 분명 여기에 거론된 11명이 아니더라도 지인이 사라져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을 걸세.”
슬라르한의 제안에 타리크도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하지만 곁에 있던 클리드는 걱정스럽게 첨언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방문을 붙이거나 거리에서 소리치며 알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 분명히 루트의 지도부에서 공작님의 모함이니, 뭐니 하며 역공하려 들 테니까요.”
“그렇겠죠. 사실, 같은 루트 신도가 얘기해야 더 빨리 퍼지기는 하겠지만, 신도들을 포섭할 수 없으면 야나크 교 신전 내에서라도 소문을 퍼트릴 셈입니다. 그 안에서도 루트 신도와 교류하는 이가 있을 테니까요.”
그때 곁에서 대화를 듣고만 있던 베델이 끼어들었다.
“그건 저희 쪽에서 돕겠습니다. 이미 루트 교 내부에 침투한 정보원들이 있으니까요.”
“그거 괜찮군요!”
클리드가 반색했지만 슬라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정보원들이 위험해져. 그들에게 이 이상 위험부담을 지울 수는 없네.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도록 하지.”
그의 대답에 베델은 자신이 역시 이쪽으로 갈아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정보원을 하나의 사람으로 생각해 준 의뢰인은 없었으니까.
문득, 직전 의뢰인이었던 황제가 떠올라 웃음이 다 나왔다.
“아, 베델. 오늘 보고를 끝으로 너와의 계약은 끝내겠다.”
“예? 가,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뭐, 슬라르한 녀석이 너무 철두철미하니 저택 내에서는 별달리 나올 정보가 없는 것 같구나. 그동안 수고했다.”
“폐하! 지금은 벤티악 공작이 저를 좀 의심하는 듯해서 가져올 수 있는 정보가 빠듯합니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다시 공작의 신임을 되찾겠습니다! 그럼 분명히 값어치 있는 정보를……!”
“이젠 필요 없다.”
“……예?”
황제는 어딘지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로 베델을 내려다보았다.
“그까짓 놈의 약점 하나 잡으려고 내가 안달복달해야겠느냐? 흥! 두고 보아라. 그딴 것이 없어도 슬라르한 놈은 나에게 반항할 수 없을 테니.”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언제나처럼 소름 끼쳤다. 그때 베델은 황제가 흑마법사와 손잡았음을 깨달았더랬다.
베델은 황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미적거렸다.
“저는 그래도 당분간 벤티악 저택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사라지면 공작이 저를 의심할 테니…….”
“뭐,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베델이 어떻게 되든 조금도 관심 없는 태도였다. 어쩌면 자신과 거래한 자를 멀쩡히 살려 보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비를 베풀었다고 여길지 모른다.
사실 여태까지는 의뢰인들의 그런 태도가 당연하고, 정보원들의 목숨값이야 정보료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슬라르한을 보니 타인에게 진심으로 추종받는 사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베푼 것은 잊어도, 신세 진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 상대가 얼마나 한미한 사람이든지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인간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어쩌면, 뒷골목에서 맞아 죽은 소녀의 이야기에도 조금은 신경 써줄지 모른다.
‘황제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정치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 없던 베델이 처음으로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정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제국의 더 나은 미래에 공헌하는 것 같아 뿌듯해졌다.
* * *
엘로르를 황제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을 더 키워가려던 루트 교 내에서 은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흑마법을 쓰려면 사람 목숨을 바쳐야 한대요.”
“요새 안 보이게 된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 모두 흑마법으로 죽은 거래요.”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한 신도들은 그럴 리가 있느냐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런 무서운 소문을 믿기에는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루트 교 사제들이나 흑마법사들이 아주 선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수도로 올라온 지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점점 많아지고, 그들이 어디 갔냐는 질문에 사제들마다 제각각인 대답을 내놓자 신도들은 점점 흑마법과 루트 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부화뇌동하며 루트 교 신자가 되었던 이들은 이번에도 역시 쉽게 태도를 바꾸었다.
“난…… 난 죽고 싶지 않아. 흑마법이 그런 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루트 교로 개종하지도 않았어.”
“맞아. 부자가 되게 해준다더니 맨날 똑같은 일만 시키고.”
“나도 그냥 고향에 돌아갈래. 엄마 보고 싶어.”
야나크 교 사제들을 정신 지배한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던 루트 교 신도 수는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대주교 헤스페리아가 성기사단과 함께 흑마법의 본질과 해악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각 가문의 기사단에 출퇴근하며 일하는 하인들로부터 키메라를 처단하던 날의 이야기가 슬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괴물들이 나타나 죽지도 않고 계속 달려들자 용맹한 기사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그때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난 벤티악 공작이 괴물들을 해치웠다는 이야기였다.
벤티악 공작이 차분하게 대응 방법을 알려주고 자신이 솔선해서 괴물들에게로 달려갔다, 벤티악 공작이 그 많은 괴물들을 혼자서 거의 다 해치웠으며, 다른 가문과 황실의 기사들은 그 모습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하는 이야기들은 영웅의 전설을 듣는 것 같았다.
“만약 엘로르 전하가 정말 성녀라면, 그때 나와서 괴물들을 물리쳐 주셨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정작 달려 나온 황제 후보는 벤티악 공작님 한 분뿐이셨지.”
“그런 분이 황제가 되신다면, 어떤 위험이 닥쳐도 막아내 주시지 않을까?”
“벤티악 공작가야 전부터 유명했잖아. 원래 선대 황제 폐하께서는 전 벤티악 공작님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셨다던데?”
여론이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졌다.
겨울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겨울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때 사람마다 떠올리는 것은 제각각이겠지만, 올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겨우살이 축제를 떠올렸다.
3년마다 한 번 열리는 겨우살이 축제는 안 그래도 큰 이벤트였는데 올해는 황위 후계자까지 발표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겨우살이 축제를 맞이하기 위해 라리에트는 일시적으로 귀국했다. 그녀의 곁에는 베르트가 함께였다.
“어서 오십시오, 라리에트 전하. 오시는 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환대 감사합니다, 벤티악 공작. 공작 저에 머무르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라리에트가 짐을 푼 곳은 황궁이 아니라 벤티악 공작 저였다.
그녀가 유명 작가가 되고 나자 라반이 끈덕지게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다. 지금 황궁으로 들어간다면 라리에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라반에게 시달려야 할 터였다.
라리에트는 고민 끝에 슬라르한에게 공작 저에서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슬라르한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 결과, 라리에트는 황궁에 가 황제에게 인사만 올리고는 곧장 벤티악 저택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슬라르한과 악수를 나눈 라리에트는 가벼운 안부를 묻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 일리에도 잘 지냈어?”
“네! 전하께서는 더 예뻐지셨네요. 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이시고요.”
“정말?”
라리에트는 작게 키득거리며 일리에에게 다가갔다.
사실 일리에는 라리에트가 보인 순간부터 그녀에게 달려가 꼭 안아주고 싶은 기분을 참느라고 동동거리고 있었다.
그런 일리에의 기분을 대충 눈치챈 슬라르한이 일리에의 등 뒤로 커다란 손을 얹어 그녀를 앞으로 밀었다.
“전하께서 오신다고 했을 때부터 일리에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전하께서 쓰실 방은 일리에가 다 청소해 놨으니, 미비한 구석이 있다면 일리에를 불러다가 혼내십시오.”
슬라르한의 말에 라리에트는 금세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이야? 일리에도 나 보고 싶었어?”
“당연하죠! 베르트 님께서 어련히 잘 챙겨주실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난생처음 외국에 나가시는 거였잖아요. 예민한 사람들은 물갈이도 한다는데, 전하께서는 괜찮으실지 걱정이 돼서…….”
“일리에!”
라리에트는 아까까지 잘 지키던 품위와 체통을 벗어던지고 일리에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일리에도 기다렸다는 듯 저보다 작은 라리에트를 꼭 안아주었다.
전생의 기억처럼 여전히 여리고 따뜻한 어깨였다. 이 가녀린 아이가 어머니와 오라비에게 폭언을 듣고 살았을 세월을 생각하면 지금도 복장이 뒤집혔다.
이렇게 예쁘고 다정하고 재능 있고 겸손한 아이가 피붙이라면 그걸 자랑스러워해야지, 어떻게 거기다 대고 쓸모없다고 할 수 있었을까.
‘하긴, 계집애의 존재 이유는 결혼 장사랑 후계 보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었으니까.’
검을 잡은 저에게는 더 심했다.
말을 그렇게 타고 다니다가는 불임이 된다느니, 황녀의 피부가 볕에 그을리는 건 수치라느니, 어떻게 남자 기사들의 기를 죽이고 다니냐느니, 정말 온갖 개소리들을 지치지도 않고 늘어놓았다.
‘내가 황제가 되고 나서 라반과 어머니의 목을 치지 않은 건 정말 자비로운 결정이었지.’
슬라르한이 황제가 되면 전생에 자신이 못 했던 일을 좀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그들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오랜만에 만난 라리에트와 회포를 푸는 게 먼저였다.
라리에트가 일리에를 너무 아낀 덕분에 일리에는 그들의 만찬 자리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슬라르한이 더 흐뭇해 보이는 건 좀 이상한 일이었지만, 일리에는 라리에트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 행복감은 만찬 후에 이어진 후식 시간에 최고치를 찍었다.
“저어…… 몇 가지, 벤티악 공작과 일리에에게 제일 먼저 알려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베르트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라리에트가 크게 심호흡하고 말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가볍게 내린 결정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라리에트 전하께서는 늘 연치보다 성숙한 분이셨지요. 어떤 결정을 내리셨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라리에트는 슬라르한의 응원에 힘을 얻은 듯 다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감사합니다. 이 소식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저를 가장 위해준 두 분께 처음으로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말하려니 좀 부끄럽기는 한데…….”
“저는 라리에트 전하의 그 어떤 결정이라도 지지할 겁니다. 말똥으로 그릇을 굽겠다고 하신다면 제가 말똥을 구해다 드릴게요.”
“푸흡! 일리에!”
진지한 얼굴로 말똥 얘기를 하는 일리에를 보고 라리에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귀족의 응접실에서 나오기 힘든 대화 소재에 슬라르한과 베르트도 불시에 터진 웃음을 수습하느라 입술을 꽉 물었다.
덕분에 라리에트의 긴장감은 상당히 풀린 것 같았다.
“사실, 풉, 사, 사실은…… 으흠! 나와 베르트가…… 약혼하기로 했어요.”
“네에?”
일리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라운 일이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싶어 슬라르한은 의아한 눈으로 일리에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라리에트와 베르트를 번갈아 쳐다보던 일리에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리에! 괜찮아? 왜, 왜 울어?”
당황한 라리에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에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그러나 일리에는 한참이나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다. 두 손으로는 라리에트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슬라르한은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일리에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았다.
“일리에. 라리에트 전하께서 놀라셨다.”
“죄, 죄송…… 죄송합…….”
“시간이 좀 필요한가?”
“흐윽, 아,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저는 그냥…… 너무 기뻐서…….”
그 대답에 라리에트와 슬라르한, 그리고 베르트까지 서로 놀란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말 너무, 너무 잘됐어요. 흐으으…… 잘됐, 흐윽…….”
일리에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갔다. 이 자리에서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안 그런 척해야 했던 그들의 전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라리에트를 위한 일만 했던 베르트와 그의 애틋한 시선을 뺨으로만 받아내야 했던 라리에트…….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녀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날이 시퍼렇게 선 단도를 구해다 줘야 했던 베르트와, 그런 그에게 당신만은 행복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던 라리에트…….
전생의 그들이 어긋났던 것은 오로지 저 때문이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이었던 저 때문에 라리에트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미안해, 라리에트. 다행이야, 라리에트.’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이제야 간신히 라리에트에게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전하께서 일리에더러 자매 같다고 하신 덕분에 일리에가 정말로 전하를 여동생처럼 지극히 여겼나 봅니다. 일리에에게는 따로 가족도 없어서, 전하의 경사가 많이 기쁜 모양입니다.”
“일리에…… 고마워, 정말. 이렇게까지 기뻐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일리에는 여전히 격하게 흐느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전하. 일리에가 조금 진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슬라르한은 라리에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쓰러질 듯 우는 일리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응접실 옆에 딸린 방으로 데려갔다.
“일리에. 우는 건 좋다만, 이러다가 쓰러지겠다. 네가 쓰러지면 라리에트 전하께서 자책하실지도 몰라.”
“흑, 흐윽, 죄, 죄송…….”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울어라.”
슬라르한은 훌쩍거리는 일리에를 천천히 품에 안았다. 들썩거리는 어깨가 애처로웠다.
‘너한테 라리에트 전하가 무엇이길래…….’
진짜 가족이라 하더라도 이토록 기뻐하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일리에의 눈물에서는 기쁨과 함께 슬픔과 회한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품에 안고 있으니 일리에가 느끼는 아픔이 전이되어 오는 것 같았다.
차라리 제가 그 슬픔과 아픔을 대신 느껴주고 싶었다. 일리에는 그저 기쁨만 느꼈으면 했다.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일리에의 등을 쓸 때마다 일리에의 격한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가 열 번쯤 쓸었을 때, 간신히 눈물을 그친 일리에가 손으로 제 코와 입을 가린 채 웅얼거렸다.
“어, 어떠케, 요…… 주, 주인님 옷에 제 코…… 코가 묻었…….”
코맹맹이 소리로 어쩌냐고 웅얼대는 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엉망으로 울고 난 사람이 이렇게나 예뻐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슬라르한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일리에에게 건넸다.
“옷 걱정까지 하는 걸 보니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보군.”
슬라르한의 손수건을 받자마자 제가 얼굴을 묻었던 슬라르한의 가슴팍을 먼저 닦던 일리에가 민망한 듯 얼굴을 더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 있을 테니 매무새 다듬고 나오거라. 라리에트 전하께서 많이 놀라셨을 거다.”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라고 한 말은 아니고.”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주고는 다시 응접실로 나가 라리에트를 안심시켰다.
“이제 좀 진정이 된 모양입니다. 얼굴 좀 닦고 나온다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다행이……에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으려던 라리에트는 슬라르한의 가슴에 생긴 젖은 자국을 보고는 혀를 씹을 뻔했다.
커다란 메달 크기의 자국은 딱 사람 눈 간격 사이로 두 개였다. 누군가가 저기다 얼굴을 묻고 울었던 게 분명했다.
더 놀라운 건, 슬라르한 본인도 저 자국을 못 본 게 아니었을 텐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때 마침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일리에가 쭈뼛거리며 나타났다. 눈, 코, 입이 다 빨개져서 여태 훌쩍거리면서도 그 얼굴에 번진 미소는 이제 기쁨만으로 반짝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호들갑 떨었죠……?”
“아니야, 일리에. 네가 기뻐해 줘서 나도 내 결정에 더 확신을 얻게 됐어. 고마워.”
“혹시 황궁에서 걸고넘어질 일은 없나요?”
“내가 황위 후보인 상황에서는 ‘결혼 동맹’이라는 핑계로 밀어붙일 수 있거든. 그래서 조금 서두른 면도 없지 않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아.”
부끄러워하는 라리에트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베르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가 벤티악 공작께 알려 드려야 할 소식이 하나 더 있지 않나요?”
“아, 맞다!”
라리에트가 자세를 바로 하며 다시 슬라르한과 일리에를 두루 쳐다보았다.
“나머지 한 가지 소식은, 저는 물론이거니와 피델로 왕실이 벤티악 공작님을 차기 후계자로 지지하겠다는 겁니다.”
“네? 전하와 피델로 왕실이……?”
이번엔 슬라르한이 놀란 얼굴을 했다. 부연 설명으로 나선 건 베르트였다.
“피델로는 파르디나스 제국의 차기 황제가 앞으로의 양국 관계에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왕 폐하와 국가 대신들의 논의 끝에, 벤티악 공작이야말로 새 시대를 열어나가실 분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뜻밖의 지원군이었다.
그리고 라리에트가 덧붙였다.
“이 내용을 조만간 정식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공작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말간 얼굴이 해사하게 웃었다.
언뜻, 일리에와 참 닮은 미소라는 생각이 슬라르한의 뇌리를 스쳤다.
* * *
귀국한 라리에트가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
“저는 오늘부로 슬라르한 벤티악 공작을 황위 후계자로서 공식 지지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저에 대한 가점의 평가가 있다면 벤티악 공작의 점수에 합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막내 황녀가 단단히 야문 표정으로 제 오라비가 아닌 사촌 슬라르한을 지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녀와 함께 자리했던 베르트 역시도 깜짝 발표를 이어갔다.
“피델로 왕실 역시 슬라르한 벤티악 공작을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직 황위 후계자로 결정되지도 않은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은 타국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피델로의 국왕은 베르트의 안목을 믿었다. 그의 막내아들은 상당히 괴짜이기는 하지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으니까.
그리고 남들이 아직 나서지 않은 이때 관계를 구축해 놓으면 나중에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이 갑작스러운 발표로 슬라르한을 뺀 나머지 후보들이 모두 당황했지만, 그중에서도 라반은 완전히 절망했다.
‘난 망했어.’
제 동복 여동생의 지지조차 받지 못하는 후보를 누가 신뢰해 줄 것인가. 심지어 토라진 어머니 역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참모들의 의견에 따라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고는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패색은 짙게 깔렸다.
그는 이를 바득 갈며 어머니를, 라리에트를, 다른 후보들을, 황제를 원망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라반이었지만 아이리스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이야? 왜 하필!”
댐 건설 착공식을 화려하게 열어 평가 위원회의 이목은 집중시킬 수 있었지만, 공사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들에게서 끌어낸 자금은 대부분 평가 위원회에 속한 귀족들의 가족이나 측근 쪽에 뇌물로 써버렸고, 지금은 겨우살이 축제를 기다리며 시간만 끌고 있는 형국이었다.
투자한 귀족들은 착공만 하고 전혀 진척되는 게 없는 댐 공사에 하나둘씩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슬라르한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던 두 세력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받은 것이다.
경쟁 막판에 누군가에게 큰 힘이 실리는 것 같은 이미지는 나머지 후보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리스는 서둘러 자신의 지지 세력을 모으고 라리에트나 베르트와 같은 선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슬라르한을 뺀 나머지 후보 중에 그나마 흔들리지 않을 이는 엘로르뿐이었다.
파죽지세였던 과거보다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지금도 거리 곳곳에는 성녀인 엘로르를 황제로 뽑으라는 벽보가 나붙었고 루트 교를 통한 지지자 모집도 순조로웠다.
신도들의 실종 소문으로 주춤한 평민 집단 대신 루트 교에 대해 잘 모르는 귀족 집단에 손을 뻗은 덕분에 사교계에서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이제 클리드는 없었지만 그가 떠나기 전까지 만들어준 엘로르의 성녀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었고, 그가 계획한 평민 학교, 평민 치료소, 고아원의 건립은 차례차례 이루어지며 좋은 반응을 끌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엘로르는 전혀 여유롭지 못했다.
‘뭐지……? 전생에는 이런 일 없었잖아! 갑자기 라리에트는 왜 튀어나오고, 피델로는 왜 끼어들어?’
그녀가 여태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미래를 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조금씩 무너져 온 미래는, 지금에 와서는 어느 것 하나 전생과 똑같은 게 없었다.
예측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 되어 엘로르를 짓눌렀다.
클리드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가 미래를 예측해 줬겠지만, 카제야는 그를 벤티악 공작 저에 심어놓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정신 지배마저 깨지고 말았다.
그의 곁에는 릴리에트로 의심되는 계집까지 있는데 말이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불안감에 떨다가 버틸 수 없을 때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카제야를 불러댔지만, 그녀는 짧으면 이틀에 한 번, 길면 닷새에 한 번 정도 찾아올 뿐이었다.
그녀를 타박하기도 난감했다.
그녀는 최근 황제와 직접 대면하며 로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반드시 황제가 되어야 해…… 반드시 황제가 돼서, 클리드와 맺어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과거로 회귀한 뒤 거의 잊고 지냈던 전생의 마지막 날이 최근 자꾸 떠올랐다.
“대가로는 뭘 원해?”
“당신의 영혼.”
시간 회귀의 마법은 보통 일이 아니니 당연히 영혼을 원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엘로르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한껏 튕겼다.
“누가 바보인 줄 알아? 영혼을 잃은 채 회귀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곧바로 당신의 영혼을 가져가는 게 아닙니다. 이 시간 회귀의 마법은 당신의 염원으로 이루어지는 것. 당신이 과거로 돌아가 다시 한번 더 삶을 살아내며 당신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면, 그때 영혼을 받아갈 겁니다. 당신이 염원을 이루면 영혼을 잃을 일도 없는 거지요.”
“그래……? 그렇다면 좋아. 계약하겠어.”
그때는 자신이 실패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무조건 클리드만 손에 넣으면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릴리에트가 황제가 된 건 전부 클리드 덕분이었잖아! 그가 황제로 만들어준 거잖아! 그런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설마…… 릴리에트여야만 했던 거야?’
끔찍한 가정이 떠올랐지만 엘로르는 곧바로 도리질 쳐 생각을 털어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릴리에트는 황손답지도, 여자답지도 않았다. 변변한 재주도 없이 태어난 주제에 튀어보겠다고 남자처럼 입고 검을 휘두르던 골칫덩이였다.
황족의 예의 규범집을 제대로 읽어나 봤을까 싶은 그 계집이 황제감이었을 리 없다.
“클리드…… 클리드를 되찾아와야 해…….”
혼자 중얼거리던 엘로르는 곁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쳐다보던 시녀들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가서 해리엇을 데려와.”
“아, 아일 양은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데려오라면 데려와!”
쨍그랑, 하고 찻잔이 깨졌다.
찻잔을 머리에 맞은 시녀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고, 밖에 서 있던 기사들은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가 기함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마에서 피 흘리는 시녀는 울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그 주변의 시녀들 역시 놀란 얼굴로 다친 시녀를 부축하고 있었으며, 엘로르는…….
“닥쳐! 감히 누구 앞에서 말대답이야! 내가 황제가 될 거야! 그러니까 얼른 해리엇을 불러오라고! ……아니, 그게 아니지. 어차피 그년은 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오지 않을 거야. 흐흑…… 애초에 그딴 걸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야. 이봐, 너희! 벤티악 공작 저에 가서 클리드를 데려와. 얼른!”
엘로르는 소리를 지르다가 혼자 중얼거리다가 울다가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황족의, 그것도 황위 후보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엘로르의 호위를 서고 있던 기사 몇 사람은 곧바로 벤티악 공작 저로 떠났고, 시녀 몇 사람은 카제야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벤티악 저택에서는 클리드의 신변 보호를 이유로 들면서 인도하길 거부했고, 그 대신 카제야가 엘로르를 만나러 왔다.
벤티악 공작 저의 답신을 받고 황실 기사단을 파견할 생각까지 하고 있던 엘로르는 동정 어린 표정을 한 카제야를 보자마자 그녀의 소맷부리를 붙잡았다.
“해리엇.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난 불안해 죽겠다고! 왜 부를 때 오지 않아? 클리드는 언제 데려올 거야? 벤티악 공작 저에서 클리드를 안 보내주겠대. 아무래도 황실 기사단을 보내서 강제로 데려와야 할 것 같아.”
한때는 아름답게 빛났던 엘로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탁했다.
‘인간이 추락할 때는 바닥이 없다더니…….’
카제야는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초조해하는 엘로르를 보며 내심 비웃었다.
쓸모를 다한 인간이었지만 어쨌든 후계 발표 때까지는 남들 앞에 멀쩡히 서 있어줘야 했다.
“전하.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가고 있는데 왜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정말이야?”
“네! 발표일이 다가오니 긴장이야 되시겠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태 전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사업들은 전부 호평받고 있습니다. 루트 교도들이 힘써준 덕분에 백성들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전하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어요. 게다가 저는 황제 폐하를 만나 엘로르 전하를 신경 써주시도록 부탁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구나…… 하아…… 모든 건 다 잘 돌아가고 있어…….”
“그럼요. 이럴 때일수록 전하께서는 성녀다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조금만 버티십시오.”
그제야 엘로르는 안도의 눈물을 터트렸다.
“무서웠어. 내가 황제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알잖아.”
“그러니 제가 최선을 다해 돕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황태녀만 되시면 카시르 영식을 데려오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니, 지금은 카시르 영식을 놔두십시오. 지금 억지로 데려오려 하면 괜히 문제만 커집니다.”
“응…… 알았어.”
엘로르는 카제야의 품에서 훌쩍거리며 울었다. 얼른 겨우살이 축제가 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카제야의 위로에도 불안감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