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20/32)

2장

황제 후보 평가 위원회는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한 회의에 돌입했다.

그들이 숙식을 해결하고 회의를 진행하는 가넷 별궁 주변에는 호위 병력이 겹겹이 깔렸고, 회의가 진행되는 열흘간 온 수도는 숨을 죽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편에서는 3년 만에 맞이하는 겨우살이 축제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겨우살이 축제라니…… 엄청 오랜마……안이 아니고, 처음이네요. 하하!”

일리에는 겨우살이 그림이 그려진 장식들이 거리마다 휘날리는 것을 보며 아주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서둘러 말을 바꿨다.

슬라르한은 이제 그런 말실수에 대해서는 일일이 따지지도 않았다. 그녀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조바심을 내어 일을 망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들은 오랜만에 마차를 타고 축제 분위기 가득한 거리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핑계로는 수도 내 백성들의 분위기를 알아본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슬라르한이 일리에를 데리고 나온 것은 그녀가 저 때문에 덩달아 저택에 처박혀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표일이 다가오면서 암살 위협도 늘어났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덕분에 슬라르한은 저택에서 종일 서류만 붙들고 있는 날이 많았고, 그의 심부름꾼인 일리에 역시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슬라르한은 그게 미안했다. 남들이 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기는 겨우살이 축제를 둘이서만 조금 즐겨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고 말이다.

“해가 바뀌면 너도 스무 살이구나.”

“네!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네요. 제가 언젠가 주인님도 스물몇 살밖에 안 되지 않았냐고 따졌는데, 그때 주인님께서…….”

“그 말은 네가 스무 살이라도 되고 난 다음에 하라고 했지.”

“맞아요. 하하하하!”

일리에는 유쾌하게 웃으며 그들이 함께한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지났구나, 하고 새삼스러워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창밖을 보니 낯선 거리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아티팩트를 하나 주문 제작하려고.”

“아티팩트요? 우와…… 그거, 되게 비싸죠?”

“종류에 따라 다르지. 오늘 주문할 아티팩트는 귀한 거지만.”

슬라르한은 금세 호기심 어린 얼굴로 변한 일리에의 모습을 망막에 새겼다. 이 얼굴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탄 마차는 신비한 가게들이 모여 있는 다르겔 거리로 향했다.

마차는 다르겔 거리 입구에서 섰고, 거기서부터는 누가 됐든 마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

슬라르한은 이 가게, 저 가게를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일리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좁다란 거리를 걸으며 아기자기한 연말 분위기를 즐겼다.

“어서 오십시오.”

딸랑딸랑, 하는 도어벨 소리에 이어 노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마법사 가게들이 몰려있는 다르겔 거리의 제일 안쪽, <디포르제 아티팩트>라는 상점이었다.

“오랜만이군, 버번.”

“아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벤티악 공작 각하 아니십니까.”

“잘 지냈나?”

“말 그대로 공작 각하 덕분에 편안히 지냈습니다. 지난번에 키메라가 출몰했을 때 놈들이 이쪽을 덮칠까 봐 아찔했던 걸 생각하면…….”

노인은 이마를 닦는 척하며 과장되게 휘유, 하는 한숨 소리를 냈다.

슬라르한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본론을 꺼냈다.

“디포르제는 어디 있지?”

“우리 마법사 어르신께서는 2층 작업실에 계십니다. 금방 모시고 올 테니 여기서 차라도 드시며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파리 쫓듯 손을 파닥거리자 테이블 위에 놓였던 찻주전자에서 절로 김이 피어올랐다.

그러고는 둥실 떠올라 역시나 스스로 달각거리며 제자리에 놓인 찻잔 위로 따끈한 찻물을 부었다.

슬라르한은 익숙한 듯 찻잔이 놓인 테이블 근처로 가서 일리에가 앉을 의자를 빼준 뒤 자신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와아…… 놀랍네요.”

“키메라도 보고 정신 지배까지 당해본 녀석이 이 정도에 놀라기는…….”

“하지만 이거야말로 마법 같은걸요.”

일리에는 신기해하며 찻잔 위로 코를 대고는 킁킁대며 냄새를 맡다가 소심하게 차를 홀짝였다.

“정말, 그냥 ‘차’네.”

슬라르한은 신기해하는 일리에의 모습에 쿡쿡대며 찻잔을 들었다.

“디포르제가 이번에는 얼마나 기다리게 하려나…….”

“디포르제가 누구예요?”

“이 가게 주인이자, 꽤 실력 있는 마법사지. 괴짜이기도 하고.”

“아까 그분은요?”

“디포르제의 제자. 마력은 거의 없는 일반인인데, 마법을 너무 좋아해서 오랫동안 디포르제 밑에서 배웠다더군. 마석을 이용하는 마법사지만 본인은 거기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고.”

“신기해라…….”

일리에의 얼굴은 장난감 가게에 들어온 어린아이 같아졌다. 슬라르한은 손을 뻗어 일리에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반듯하고 동그란 이마가 입맞춤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마음을 의식하고 난 뒤부터는 일리에와 뭘 해도 엉큼한 생각부터 들어서 큰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머리칼을 넘겨줘도 일리에가 그저 헤헤, 하며 웃고 있으니 자꾸만 착각을 하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곧 겨우살이 축제네요. 기대도 되지만 걱정도 돼요.”

“네가 왜?”

“주인님은 너무 걱정을 안 하시니까 저라도 해야죠, 뭐. 주인님께서 후계자가 되시리라고 확신하긴 합니다만, 혹시 그 흑마법사가 농간을 부리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네요.”

“글쎄…… 흑마법사는 일단 황제 폐하를 정신 지배할 수 없다. 황제는 교황의 강력한 축복을 받는 데다 일반 마법으로도 몇 겹이나 보호받거든. 현재 후보 평가 위원회 회원들 역시 보호받고 있고. 그럼 할 수 있는 게 흑마법을 대가로 한 점수 조작인데, 그것도 쉽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왜요?”

“어차피 점수 합산 시에 최고 점수와 최저 점수는 빠지거든. 게다가 그런 거래를 하기에 황제 폐하는…… 신의와는 담쌓은 분이라서.”

일리에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때, 2층에서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오늘은 일찍 내려왔군.”

슬라르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법사 쪽을 바라보자 일리에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어지간히도 급한 일인가 보죠? 수도 내 암살 길드의 0순위이실 벤티악 공작께서 직접 나오시다니.”

“오랜만입니다, 디포르제.”

전혀 살갑지 못한 태도로 퉁명스레 인사를 건넨 이는 이제 10대 중반이나 됐을까 싶은 소녀였다. 어린애인데 노인들이나 쓸 법한 외알 안경을 끼고 있는 게 조금 특이하달까.

일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슬라르한과 디포르제, 그리고 디포르제 앞에서 극진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버번이란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디포르제의 시선 역시 일리에에게 닿았다.

“그 꼬맹이는 누굽니까?”

“제 심부름꾼인 일리에라고 합니다.”

저보다 더 꼬맹이가 저더러 꼬맹이라고 하니 황당했지만, 다들 디포르제에게 공손한 태도라 일리에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일리에라고 합니다.”

“흐흥…… 이거, 이거, 우리 공작 각하께서는 재미난 꼬맹이를 데리고 다니시는구먼?”

디포르제는 슬라르한의 용건은 묻지도 않고 성큼성큼 일리에의 앞에 가서 섰다. 그녀가 안경알을 잡고 추켜올리자 안경알이 묘한 색으로 반짝였다.

“생명은 다했는데 영혼은 남아서 빈 껍데기를 찾아 썼구나. 도대체 무슨 한이 그리 많아 목숨을 쫓아가지 못했누, 쯧쯧.”

“예……?”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야. 안 그러냐, 꼬마야?”

일리에는 디포르제의 말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이 이미 죽었던 사람임을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다.

“놀리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겁이 많은 아이라…….”

어느새 곁에 다가온 슬라르한이 일리에의 팔뚝을 잡고 그녀를 제 뒤로 숨겼다.

그 모습에 디포르제가 깔깔대며 요란하게 웃었다.

“아아, 세상에! 우리 공작 각하께서 순정을 바치는 상대셨던가?”

“디포르제. 장사 안 할 겁니까?”

슬라르한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목소리의 온도가 살짝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기색을 놓칠 마법사가 아니었다.

“아이쿠, 이런. 내가 공작님의 심기를 거슬렸구먼. 미안하다, 꼬마야. 지겹도록 나이를 먹으면 조그만 재밋거리에도 눈치 없이 달려들게 되거든.”

저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애가 계속 할머니 같은 말투를 쓰니 너무 이상했다. 일리에는 호기심을 못 참고 슬라르한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물었다.

“지겹도록 나이를 먹었다고요? 저보다 어려 보이시는데요.”

그 질문에 디포르제는 또 웃었고 슬라르한은 일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릴 때 잘못 쓴 마법의 대가로 아흔 살을 먹은 지금도 그때의 모습 그대로인 거지. 겉모습만 열다섯 살 소녀일 뿐, 속은 삭을 대로 삭은 노인이다.”

“삭다니, 거참 표현이 거칠군요.”

디포르제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이 중요한 시기에 어쩐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아티팩트 가게에 왜 왔겠습니까? 아티팩트를 주문하러 왔지요.”

슬라르한 역시 자리에 앉고는 일리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리에. 필요하면 부를 테니 가게나 구경하고 있어라.”

“네.”

일리에가 머뭇대지도 않고 일어서자 눈치 빠른 버번도 일리에에게 가게 구경을 시켜준다며 같이 자리를 떴다.

그제야 디포르제의 얼굴에서도 장난기가 가셨다.

“또 무슨 대단한 아티팩트를 주문하셔서 이 노인네를 고생시키시려고요?”

“팔찌 하나, 목걸이 하나를 주문하려고 합니다. 팔찌는 아까 그 아이가 낄 것으로 해주시되, 경상 이상의 상처를 입으면 발동되는 아티팩트를 엮어주십시오.”

“경상 이상의 상처를 무효화 하는 아티팩트를, 아예 줄줄이 엮어달라고요? 가격이 어마어마해질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끊어지거나 빠지지 않게 분실 방지 마법도 걸어주십시오.”

디포르제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거에 치명상 무효화 아티팩트가 세 개 달린 팔찌를 슬라르한에게 판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 해도 말 세 필 가격이었다.

심지어 중경상 이상 피해 무효화 아티팩트는 치명상 무효화보다 비쌌고, 그걸 엮어서 팔찌를 만들면 못해도 열다섯 개 이상은 들어갈 것이다.

그쯤이면 수도 내의 웬만한 저택을 사고도 남는 가격이 될 텐데…….

“하긴…… 돈이 없어 고민하실 분은 아니니, 뭐, 알겠습니다. 팔찌는 그렇다 치고, 목걸이는요?”

“목걸이는 내가 사용할 물건입니다. 내 마력이 일정량 이상으로 많아질 때마다 경고 메시지가 내 머릿속으로 들리도록 해주십시오.”

주문 내용을 들은 디포르제가 다시 미간을 구겼다.

“제가 아티팩트를 만든 지 벌써 50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이런 주문은 처음이군요.”

“만들 수 있습니까?”

“제가 못 만들면 아무도 못 만드는 거겠죠. 메시지는…… 소리로 들리기만 하면 됩니까? 이미지는 들어가지 않아도 되나요?”

“넣을 수 있다면……아주 잠깐 보이도록 해주십시오.”

슬라르한은 목걸이 아티팩트의 상세한 내용을 더 설명했고, 설명이 진행될 때마다 디포르제의 미간은 더 구겨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일 생각이십니까?”

“제가 벌이려는 게 아닙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최악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겁니다.”

“허허…… 아무리 들어도 의심스럽고 꺼림칙하군요. 아까 저 아가씨 팔찌처럼 예쁘기만 한 물건이면 좋으련만.”

그 말에 슬라르한이 피식 웃었다.

“그 팔찌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는 물건이고요.”

일리에가 죽으면 방금 의뢰한 목걸이 따위는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할 테니까.

“겨우살이 축제 전에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여태 뭐 하다가 이제야 와서는 촉박한 주문을 넣으십니까?”

“그동안 일이 좀 많았어야죠.”

“노력해 보긴 하겠습니다만 장담하긴 어렵습니다. 더 급한 것이 어느 쪽입니까?”

“그렇다면…… 목걸이 쪽을 먼저.”

디포르제는 혀를 차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댔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지는 않았다.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의뢰서만 들고 일어서는 디포르제에게 슬라르한은 추가금을 약속했다.

“일리에. 잠깐 와봐.”

“네, 주인님.”

슬라르한의 부름에 일리에가 나타나자 디포르제는 다짜고짜 일리에의 손목을 잡고 가늠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다섯 개쯤 들어가겠네요. 무슨 색이 좋으냐, 꼬마야.”

“네? 갑자기 무슨…….”

“대답이나 해. 무슨 색이 좋아?”

“……호박색이요.”

“얼씨구.”

디포르제는 혼자 키득거리다가 뒤를 돌아보며 슬라르한에게 물었다.

“공작 각하님 것은 회색으로 만들어드리리까?”

“그거 괜찮겠군요.”

일리에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미소를 띤 채 저를 바라보는 슬라르한의 시선과 마주치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맑은 호박색이 예쁘겠다, 하고 말했던 건데 그게 슬라르한의 눈동자 색이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아, 그, 그런 게 아닌데…….”

하지만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은 듯했고, 일리에의 귓불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슬라르한은 이젠 엄연히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일리에의 손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일리에는 아마 떠날 확률이 높았다. 그게 일리에가 행복한 길이라면 기꺼이 보내줄 수는 있었다. 격식과 위선에 숨 막히는 귀족 생활은 일리에와 어울리지 않기도 했으니…….

하지만 그녀를 아무런 보호도 없이 그냥 보낸다는 건, 그 자신에게 매분 매초가 불안하고 초조한 고통일 터였다.

‘아티팩트 열다섯 개…… 저 말괄량이가 열다섯 개만 부서트리면서 버틸 수 있으려나.’

치명상 무효화 아티팩트 세 개를 2년 만에 다 없애 버린 데다 그사이 자신의 피를 먹인 것만도 몇 번이던가.

일리에를 놀리는 디포르제와 얼굴이 빨개진 일리에를 쳐다보던 슬라르한은 디포르제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두 줄로 만들어주십시오.”

“엥?”

“한 줄로는 아무래도 모자랄 것 같아서.”

“참나…… 어지간히도 날뛰는 망아지인가 봅니다. 하하하!”

일리에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 * *

첨예한 눈치 싸움과 긴장감 속에서 겨우살이 축제가 열렸다.

그사이에도 슬라르한은 몇 번이나 암살 시도를 받았으나 그는 애초에 쉽게 죽지도 못하는 처지라 그 시도들은 의뢰인들의 돈 낭비로 끝나 버렸다.

겨우살이 축제 당일 아침, 일리에는 한숨도 못 잔 얼굴을 하고는 슬라르한의 앞에 나타났다.

슬라르한의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있던 타리크는 퀭한 얼굴의 일리에를 보고 낄낄대며 웃었다.

“하여간에 웃기는 놈이란 말이야. 야, 이 녀석아. 누가 보면 네놈이 후보인 줄 알겠다!”

“그런 타리크 님은 어젯밤 퍼질러 주무셨고요?”

“물론 나도 긴장이야 되지만, 너만큼은 아니라고.”

“하긴, 타리크 님은 주인님 때문에 긴장한 게 아니라 컬리넌 영애 보러 갈 생각으로 긴장하신 거겠죠.”

“이놈이, 아직도!”

타리크는 짐짓 성질을 부릴 것처럼 을러댔지만 이내 크흐흐, 웃으며 넘겨버렸다.

그때 집사가 올라와 문을 두드렸다.

“타리크 님. 밖에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만,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아, 확인해 봐야지. 또 어디서 파리가 날아와 붙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각하. 저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음. 곧 따라가지.”

슬라르한은 타리크를 먼저 내보낸 뒤 책상 위에 정리해 놓은 서류 몇 장을 간단히 확인하고, 빡빡하게 매어진 듯한 크라바트를 잡아당겨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일리에는 그런 슬라르한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전생의 겨우살이 축제 당일을 떠올렸다.

이래저래 모자란 모습만 보이던 렌셔, 슬라르한의 막판 공격에 큰 타격을 입었던 아이리스는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묘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릴리에트는 속으로 잔뜩 긴장했으면서도 겉으로는 슬라르한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3년간의 일들을 돌아보면 대체적으로 자신이 슬라르한을 조금씩 다 앞섰다. 그런데도 괜히 속이 조마조마했던 것은, 그게 다 비겁한 수를 써서 이긴 탓이었다.

슬라르한은 조금도 꼼수를 쓰지 않았고, 그랬으면서도 큰 공을 세우곤 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부럽고 질투가 났는지 모른다.

“황제 후보 평가 위원회의 공정한 심사 결과를 나 역시 받아들이는바, 4황녀 릴리에트 시야르드 솔렌을 황태녀로 선언한다.”

황제가 커다란 목소리로 발표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했다.

발표 직후 분위기가 어땠더라…… 저는 클리드와 포옹하며 기쁨을 만끽했고, 렌셔는 적장자가 황태자가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며 주변에 불만을 나불댔다. 아이리스의 주변은 갑자기 시끄러워졌고, 슬라르한은…….

‘슬라르한은 어땠더라……? 기억이 잘 안 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듯 기억을 뒤져봐도 슬라르한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사라졌다는 것밖에는…….

‘어쨌든 오늘은 연회장 안에 슬라르한의 이름이 울려 퍼질 테니까. 그 모습을 직접 못 보는 게 좀 아쉽네.’

일리에는 그의 이름이 발표되고 모두가 슬라르한에게 축하를 보내는 그 상황을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 헤실대는 일리에의 모습에 슬라르한 역시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넌 좀 자두는 게 좋겠다. 도대체 뭐가 그리 걱정된다고 잠도 못 자?”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불리면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 곧바로 전 공작가에 비상 명령을 내리고 방어에 돌입해야지. 누가 되든 나를 가만두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 봐요! 걱정 안 하게 생겼냐고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자신만만해서 보기는 참 좋은데요, 그래도 저는 조마조마하다고요.”

슬라르한은 잠투정하듯 투덜대는 일리에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고 졸음이 묻은 눈꺼풀을 엄지손 끝으로 쓸었다.

“그러니까 그사이에 넌 잠이나 좀 자두라는 거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그의 따뜻한 손끝이 눈꺼풀 위를 지나자 일리에는 정말로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슬라르한의 손이 제 얼굴을 좀 더 만져줬으면 했고, 왠지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그 행복감이 30초쯤을 넘어가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일리에가 퍼뜩 놀라 눈을 뜨자 무섭게 굳은 슬라르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일리에가 눈을 뜨고도 그녀의 뺨에 댄 손을 떼지 못하고 일리에의 눈썹뼈와 눈꼬리와 뺨을 엄지손 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기분이 이상한데…… 꼭…… 키스할 것 같은…….’

일리에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반쯤 잠에 발을 담갔던 것 같던 의식이 또렷해지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런데 그건 슬라르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꺽, 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일리에는 셰바란의 오두막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또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주, 주인님! 타리크 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는데도 슬라르한의 시선은 진득하게 일리에의 입술 근처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주인님……?”

슬라르한이 어금니를 꽉 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일리에와 시선을 맞부딪쳤다.

“오늘 내가 다녀오면…….”

“네……?”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네가 미뤄뒀던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나?”

낮게 깔린 슬라르한의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깔려 있었다. 의미심장한 그 목소리에 일리에는 제 심장이 방금 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네요. 벌써 그렇게 됐구나…….”

“지금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면…….”

“아닙니다. 꼭…… 해드릴게요. 잘 다녀오세요.”

애써 웃는 일리에의 얼굴에 혹시나 괴롭거나 싫은 기색이 보일까 봐 한참 뜯어보던 슬라르한은 그녀가 단단히 마음먹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깐 머뭇대다가 그답지 않은 부탁을 했다.

“가기 전에…… 네가 행운을 빌어줬으면 좋겠는데.”

어딘지 귀엽기까지 한 그 부탁에 일리에가 눈을 반짝 떴다.

‘행운을 비는 거라고 핑계 대면…… 뺨에 뽀뽀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저도 모르게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슬라르한에게 바짝 다가갔다. 멍하니 있다가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제 모든 좋은 기운을 주인님께 드릴게요. 주인님께 엘룬의 축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일리에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슬라르한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잠든 슬라르한의 뺨에 도둑 키스를 했을 때보다는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어 심장이 짜릿했다.

화들짝 놀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진득하니 입술을 댈 수 있도록 허리를 숙인 채였다.

‘역시, 뽀뽀하기에 더없이 좋은 핑계였어!’

제 속을 들키지 않고 입을 맞췄다는 기쁨과 함께 비겁한 수로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자책감이 고개를 들려는 순간, 슬라르한이 일리에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이긴 했는데 너무 입술 근처라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뜨겁고 촉촉한 입술의 느낌이 뺨에 꽤 오래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고맙다. 영험한 내 점쟁이의 기운을 믿어보지.”

미소 띤 슬라르한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일리에는 뻔뻔하게 웃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였다. 그 보석 같은 눈동자에 온전히 저 하나만 비치고 있는 이 순간을,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제가 좀, 영험하죠.”

일리에가 푸스스 웃으며 농담하자 슬라르한도 소름 돋을 만큼 아찔한 기운을 흐트러트리고 일리에의 이마에 다시 가볍게 입 맞춘 뒤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제는 정말로 황궁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황궁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아마 올 수 있는 귀족은 전부 다 왔을 것이다.

덕분에 연회장 안은 한겨울인데도 후끈했다.

겨우살이 축제 선언, 황제에 대한 하례, 참석자 소개 등 지루한 의례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황제 후보자 평가 위원회의 의장이 부의장 및 몇몇 의원들과 함께 등장해 황제에게 어떤 서류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게 평가 결과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방금까지 시끌벅적하던 회장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한동안 황제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언의 증인이 될 대귀족 몇 명과 대주교 헤스페리아, 외국의 사절 몇 명이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섰다.

“후계 발표를 시작하겠다.”

황제의 명령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네 명의 후보가 자세를 바로 했다. 여기저기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발표에 앞서, 후보들 모두 그동안 충분히 우수한 자질을 보여주었으며 그중 한 사람을 뽑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었음을 밝힌다. 후계자로 정해지지 않은 후보는 솔레일 위원회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하고 앞으로도 제국을 위한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할 것이다.”

솔레일 위원회는 황제 직속의 정책 연구회였고, 솔레일 위원회 회원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후계자가 되지 못한 후보가 솔레일 위원회 회원 자리에 만족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경쟁은 모든 것을 쥐거나 아무것도 쥐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만 있는 게임이었다.

“자, 그럼 올해 각 후보들의 공로 먼저 발표하겠다. 우선 아이리스. 올해도 굵직굵직한 토목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수도 외곽 지역 백성들의 삶을 크게 개선시켰구나. 세 개 마을에 다리를 놓고, 두 개 마을에 목책을 둘러줬고, 두멜로 강 댐 건설에 착공했군. 잘했다.”

아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지만 그녀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녀의 황태녀 등극을 바라고 투자한 귀족들이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다음은 엘로르. 작년에 이어 신전의 봉사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평민들을 위한 의료원을 지으며 성녀로서 그 이름이 드높았구나. 나도 네 덕분에 수도 내 백성들의 삶이 크게 나아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수고 많았다.”

엘로르 역시 겸손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사흘 전부터 잠도 거의 못 잔 상태였던 데다가 목구멍으로 식사도 넘기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가 라반의 공적을 얘기하는 동안 계속 시선을 돌려 클리드를 찾았다. 그러나 인파로 북적대는 연회장 안에서 클리드 한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곁에 선 카제야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고, 엘로르도 주먹을 꽉 쥐며 쿵쾅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때, 황제의 한마디 말로 엘로르는 물론이거니와 회장 안의 모두의 숨이 멎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슬라르한.”

슬라르한의 이름이 불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기대, 불안, 희망, 공포, 기쁨, 혐오…… 인간의 모든 감정이 촘촘히 박혀 드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따끔따끔할 정도의 관심 속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을 뿐이다.

“올해는 신전과의 접촉이 많았구나. 신전의 교육 사업, 소규모 기도원 건립 등에 기부하고 수도 내에 나타난 괴물들을 처치했지. 그 피해자들의 구제에도 힘썼고…… 피델로와의 관계를 개선시킨 라리에트의 점수 역시 네게 가점되었다. 수고 많았다.”

황제의 심드렁한 목소리 때문에 그의 공로가 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작년의 점수 발표가 올해 대축연에 이뤄지기도 해서 후보들 모두 대단할 거리가 없었다.

그렇게 따져보자면 슬라르한의 점수는 만만치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지난 3년간의 총점을 바탕으로 후계자가 될 후보를 발표하겠다.”

황제는 후보 평가 위원회 의장이 내미는 다른 종이를 받아들고 가볍게 훑더니 긴장한 표정의 좌중을 둘러보며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3년 간의 총점은, 아이리스 92점, 엘로르 106점, 라반 77점, 슬라르한 117점이며…….”

“와아-!”

“황제 후보 평가 위원회의 공정한 심사 결과를 나 역시 받아들이는 바, 슬라르한 벤티악을 후계자로 선언한다.”

“와아아-!!”

점수 발표 순간부터 웅성거리던 연회장은 황제의 후계자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엄청난 환성으로 뒤덮였다. 마치 거기 모인 모두가 원래부터 슬라르한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예상대로 후계자 선출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나머지 후보들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함성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엘로르가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당연히 사방에서 ‘어머!’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끝까지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시선들이었다.

카제야를 비롯한 엘로르의 시녀 몇 명이 그녀를 부축했다.

“저런, 저런…… 긴장이 풀린 모양이구나. 슬라르한 외 나머지 후보들의 퇴석을 허락한다. 슬라르한은 앞으로 나오거라.”

슬라르한은 엘로르를 부축해 퇴장하는 카제야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다가 앞으로 나아갔다.

황제는 슬라르한을 옆에 세우고 마치 총애하던 장자를 황태자로 선언하는 듯 다시 한번 결과를 선언했다.

헤스페리아는 교황의 대리 자격으로 황위 후계자 선언문의 아래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고, 그 아래로 황제와 슬라르한의 인장 역시 차례로 찍혔다.

이제 별 이변이 없는 한 파르디나스의 제18대 황제는 슬라르한이 될 터였다.

‘그래, 별 이변이 없으면 말이지. 히히히!’

황제는 속으로 즐거운 웃음을 삼켰다. 그토록 원했던 슬라르한의 목줄을 제 손에 쥐었으니 기쁜 기색을 참기가 힘들었다. 유능한 흑마법사 덕분에 슬라르한을 후계자로 정하고도 그의 목줄을 쥘 수 있게 된 것이다.

“폐하를 위한 회춘 마법 때문에 벤티악 공작은 늙어 죽을 때까지 황위 후계자로만 살아갈 것입니다. 후계자라는 위치 때문에 폐하께서 내리시는 온갖 귀찮은 일은 다 처리하면서, 후계자라는 이 목줄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러니 그를 후계자로 정하는 편이 폐하께는 더없이 훌륭한 선택이지요.”

자신만만하게 웃던 흑마법사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황제는 흑마법사가 왜 현자라 불리는지 알겠다며 혼자 웃음을 삼켰다.

* * *

카제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엘로르를 방까지 데려온 뒤 다른 시녀들을 물렸다.

그녀는 이미 수석 시녀였기에 다른 시녀들은 그녀의 말에 토 달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커다란 황녀의 방에는 이제 엘로르와 카제야만 남았고, 그즈음이 되자 엘로르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해, 해리엇! 이제 어떡해! 응? 사, 상황을 되돌릴 수 없어? 아니면, 베, 벤티악 공작을 죽인다든가!”

이 상황 자체가 꿈이길 바라는 엘로르의 몸은 사정없이 떨렸다. 카제야가 얼른 해결책을 제시해주길, 그녀는 애타게 바랐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전하. 하지만 저는 시간 회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거니와, 벤티악 공작을 죽이기 위한 시도는 여태 계속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은 아마…… 막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엘로르의 기대와는 달리, 카제야에게서 나온 답은 너무나 가볍고 단호했다. 엘로르의 안색은 더 이상 안 좋아질 수 없을 만큼 새파랬다.

“뭐? 안타까워? 이게, 너한테는 고작 안타깝고 말 일이야? 내가 황제가 될 거라고 장담했잖아! 이 거짓말쟁이!”

“다른 후보의 참모들 역시 자신의 후보가 황제가 될 것이라 믿고 일했을 겁니다. 그걸 거짓말쟁이로 매도하시다니요.”

“흐흑……!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내가 황제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너는 알잖아!”

그 말에 카제야의 입술이 매끈한 호선을 그렸다.

“그럼요. 잘 알죠.”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난 이제 어떡하냔 말이야!”

엘로르의 절규에 카제야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곁에 앉아 덜덜 떨고 있는 그 가녀린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달래듯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전하의 영혼이 빠져나간 그 몸은, 제가 잘 써드릴게요. 당신이 바라던 대로 엘로르 델 솔렌은 파르디나스 제국의 제18대 황후로 이름을 올리게 될 겁니다.”

“……뭐?”

카제야는 황망히 되묻는 엘로르의 몸을 꽉 껴안고 놔주지 않은 채 자신의 영혼을 옮기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완전히 회복한 마력핵은 이미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기 시작한 엘로르의 몸 안에 카제야의 영혼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돼애!”

“안 되긴 뭐가 안 돼? 어차피 비어버릴 몸, 내가 잘 써주겠다는데. 크흐흐흐!”

영혼을 이동하는 중에 카제야의 진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0대 초중반 여인의 것이 아닌, 낮고 걸쭉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엘로르는 카제야의 몸을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온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갔고,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 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공중에 서서히 흩어지는 환영을 보았다.

“안…… 돼…… 싫어…….”

카제야 역시 자신은 만들 수 없는 마법진이 그 대가를 앗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바로 옆에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자신도 리카온에게 영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 영원히 갇혀야 할 테니까.

고통을 피하고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카온의 재림을 도와야 하고, 그의 반려이자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때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리석고 가엾은 엘로르. 너와는 달리 나는 내 꿈을 이룰 거란다. 거기에 네 몸을 써주는 것이니까 영광스럽게 생각하렴.”

축 늘어졌던 엘로르의 팔이 바르르 떨다가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 대신 엘로르를 껴안고 있던 해리엇 아일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바닥으로 뒹굴었다.

“하아…… 해리엇의 몸이 좀 더 좋았던 것 같기는 하지만…… 뭐, 나쁘지 않아.”

엘로르의 목소리가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엘로르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카제야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몸에 익숙해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탁해졌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다시 초점이 또렷했고, 초조해 보였던 표정은 여유로워졌다.

카제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앞뒤로 비춰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몸을 옮겨 다닌 이래 이 정도로 미인의 몸에 깃든 건 처음이었다.

사실 카제야가 타고났던 성별은 남자였다. 하지만 영혼을 옮기는 마법을 터득한 이래 여자의 몸으로만 움직여 다니고 있었다.

성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로 사는 편이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편했기 때문에 여자로 사는 것뿐이었다.

‘리카온의 성별을 굳이 따지자면 남성형 같으니까, 내가 여성형인 쪽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카제야는 슬라르한이 리카온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엘로르를 위한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슬라르한이 후계자에 오르도록 힘써왔다.

슬라르한이 예상대로 황위 후계자가 되었으니, 이제 자신이 그를 각성시킨 다음 그의 반려가 되면 모든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황제는 자신의 수명을 한도 없이 늘려 권력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영생이란 고작 인간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00년 조금 넘게 산 카제야도 점점 버티기가 힘겨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리카온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인간으로서의 찌꺼기를 버리고 완전한 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이제 곧…… 염원이 이루어진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진 아가씨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제야는 엘로르가 쓰러지고 부축당하느라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손보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해리엇 아일의 몸을 마력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스스로 걸어 자신의 방까지 돌아가도록 주문을 걸었다.

해리엇은 오늘 밤까지만 멀쩡해 보이면 되었다. 내일부터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테니까.

* * *

엘로르의 퇴장 후 아이리스와 라반도 더 이상 회장 안에 있지 못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라반은 그저 망신살이 좀 뻗치고 만 정도였지만, 아이리스 쪽은 분위기가 심각했다.

“내 돈! 내 투자금을 돌려달라 이겁니다!”

“두멜로 댐 건설은 예정대로 진행될…….”

“아니, 됐고요! 아직 착공식만 한 상태지, 실제로 뭐가 이루어진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내 투자금, 돌려주십시오!”

아이리스가 퇴장하는 것을 보고 귀족 몇 명이 부리나케 따라가 방문 앞까지 다다른 그녀를 붙들고 투자금 반환을 요구했다.

귀족들이 관심도 없는 댐 사업에 투자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될’ 아이리스에게 줄을 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황태녀가 되는 데 실패했고, 일개 황녀인 아이리스의 사업에 투자할 돈이면 다른 일에 투자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문제는, 아이리스가 그들의 투자금을 이미 다 써버렸다는 데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당장 내놓으라고 하셔도 그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웃기지 마! 그 돈, 다 얻다 퍼줬어!”

그사이에 뒤따라온 한 남자 하나가 황녀에 대한 예우도 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술이 얼근히 취해 있었다.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망발하십니까!”

아이리스를 모시는 시녀 하나가 엄하게 타박했지만, 그 사내의 눈은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난 빚까지 낸 거라고! 내년에 곧바로 자재부 관리가 되어 충당하려고 무리해서 빚을 낸 거란 말이야! 으흐흑, 매일 빚 독촉에 시달리는 기분을 네가 알아!”

아무도 그에게 빚을 내어 투자하라고 한 적 없는데도 그는 그 모든 탓을 아이리스에게 돌렸다.

“네, 네년 모가지를 잘라 벤티악 공작께 바치면 내 빚을 물어주실지도 모르지!”

그는 심지어 단도를 뽑아 들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와 시퍼렇게 날 선 단도의 모습에 옆에서 같이 돈 내놓으라고 소리치던 남자들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리스를 지키기 위해 그사이를 막아선 건 여린 체구의 시녀들뿐이었다.

“그만두십시오! 경비병! 거기 아무도 없는가!”

시녀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경비병을 찾았고 소란을 눈치챈 경비병들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남자가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아이리스를 보호하려는 시녀의 머리채를 잡고 옆으로 내팽개친 뒤 아이리스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이리스가 등 대고 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며 단단한 팔뚝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재빨리 뒤로 잡아끌었다.

“꺄아아악!”

시야가 빠르게 바뀌는 사이, 시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이리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붙들어 뒤로 잡아뺐지만, 그 순간에는 자신의 다리가 풀려 쓰러지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술 취한 사내가 단도를 휘두르고,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의 새빨간 피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자 그 쇳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아이리스가 소리 지른 순간 경비병들 역시 달려와 술 취한 사내를 붙들었고, 그 옆에서 같이 제 돈 내놓으라 하던 인간들은 후다닥 도망쳤다.

“저것들을 전부 다 잡아들이고 의원을 불러라! 이놈은 황족 시해 미수로 극형에 처해!”

“내 돈 내놓으라고!”

악을 쓰던 남자는 경비병 하나가 창 끝을 목에 대고서야 조용해졌다.

바닥에 쓰러졌던 아이리스는 바들거리는 다리로 저 대신 칼을 맞은 이에게 기어갔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진 단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었는지, 손으로 얼굴을 꾹 누른 채 쓰러진 그의 아래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태어난 이래, 사람 몸에서 이토록 많은 피가 나오는 걸 처음 보았다.

“아, 안 돼…….”

“괘, 괜찮…… 으…….”

“이든…… 이든, 안 돼……!”

아이리스는 벌벌 떨리는 손을 함부로 이든의 몸에 대지도 못하고 하얗게 질렸다.

아름다운 이든이, 언제나 하얗게 빛나던 이든이, 지금은 너무나 빨갰다. 질척한 붉은 액체가 그의 목을 타고 흐르는 게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왜…….”

“괜찮……으세요……?”

“이든, 왜, 왜 네가 끼어들어…… 왜 끼어들어!”

아이리스는 화가 난 듯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한 시도였을 뿐이다.

이든은 다친 곳 없는 아이리스를 확인하고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의원은 아직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이리스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했다. 황태녀로 뽑히지 못한 것도, 지지자들이 곧바로 등 돌린 것도, 이든이 베인 것도, 전부…….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과 시종, 시녀들이 다친 시녀와 이든을 옮기고 충격받은 아이리스를 부축했다.

주변에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속닥대는 소리, 기사와 경비병들의 무기와 갑옷이 절걱대는 소리, 구둣발 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모든 게 뿌옇게 뒤섞이던 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리스는 자신이 붕대로 칭칭 감긴 이든의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의원에게 이든을 반드시 살리라고 소리 지르던 모습이 꿈이었던 것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든은 광대 부근에서부터 뺨을 지나 턱까지, 그리고 어깨와 팔뚝에 긴 자상을 입었다. 상처의 깊이도 깊은 편이라 흉터가 남을 것이라 했다.

“이든…….”

푹 쉬어버린 목소리로, 아이리스는 이든을 불렀다.

물수건으로 닦아놓긴 했지만 아직도 이든의 머리칼과 얼굴 주변에는 말라붙은 핏기가 남아 있었다.

“피가…… 너무 많이 났어…….”

사람 몸에서 피가 얼마나 빠져나오면 죽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아까 이든의 몸에서 나온 양이면 죽음 근처까지는 갈 것 같았다.

의원은 당분간 좋은 음식을 먹으며 푹 쉬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아이리스는 그 말을 듣고도 이든이 죽을까 봐 무서웠다.

그녀는 이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든이 아파할까 두려워 세게 잡지도 못했다.

늘 따뜻했던 그의 손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이든…… 괜찮은 거지?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그렇지?”

자꾸만 손이 떨렸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제 곁에 남은 건 이제 이든밖에 없었다. 이든마저 떠나버린다면…… 아이리스는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주…….”

“이든?”

신음 같은 목소리가 분명 들렸었다. 아이리스는 이든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이든. 정신 들어? 나 보여?”

“주인……님…….”

상처를 꿰매는 동안 값비싼 수면제로 잠들었던 이든이 깨어나고 있었다.

“많이 아파? 하긴, 그렇게 많이 다쳤는데 아프겠지. 도대체 네가 왜 나선 거야, 이 바보야!”

갓 깨어난 이든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화부터 내는 아이리스에게, 이든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주인님이 다치셨으면…… 저는, 이것보다 더…… 아팠을 거예요.”

“하…… 네 처지나 걱정했어야지, 이든. 장식품에 상처가 났으니, 이젠 장식품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니? 내가 널 계속 내 옆에 둬야 할까?”

아이리스는 오만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일부러 더 싸늘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이렇게 정떨어지는 소리를 하면 이든도 정신을 차릴 터였다. 목숨 바쳐 구해낸 이가 아무리 높은 신분이더라도 이런 소릴 하면 상처를 받을 테니까.

그렇다. 상처받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이든에게는 늘 이런 소리밖에 할 수 없었다.

저를 사랑하는 게 빤히 보이는 남자……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헌신적이며 자신의 가장 추악한 속을 보고서도 천사처럼 웃어주는, 그녀의…… 노예.

노예 따위와 절대 스캔들을 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여태껏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 치며 일부러 이든을 더 막 대했다. 저에게 완벽히 충성하는 아름다운 사내를 제멋대로 다루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쯤이면 이든도 제게서 금붙이나 좀 챙기며 똑똑히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저만을 바라보던 이든은, 결국 크게 다치면서까지 저를 지켰다.

“물론 나도 아랫사람의 충심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아니란다. 네가 날 구한 값은 충분히 치르마. 무엇을 원하니?”

차마 이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던 아이리스가 대단한 자비를 베푼다는 듯한 투로 물었다.

“정말로……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황녀의 목숨은 가볍지 않아. 무엇을 원하는지나 말해.”

이든은 강한 척하는 아이리스를 보며 다시 웃었다. 그의 주인은 자신이 꽤나 잘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의 솜털 하나까지 사랑해 왔던 이든은 지금 그녀가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아이리스를 지키다 죽었어도 그다지 서럽거나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아이리스가 자신을 오랫동안 기억해 줬을 테니까.

하지만 살아버린 지금은,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녀의 말대로 노예 이든은 예쁜 장식에 불과해서, 커다란 흉터를 달고는 아이리스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저를…… 면천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면천?”

아이리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든을 쳐다보았다. 이든이 정말로 저에게 정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노예 증서를 태워 버린다면 아이리스가 이든을 곁에 둘 빌미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황녀의 목숨이 비싸다는 둥 지껄였던 터라, 면천해 줄 수 없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좋아. 너도 이런 삶이 지긋지긋하겠지. 블레어! 밖에 블레어 있니?”

아이리스는 제 측근 시녀를 불러 이든의 노예 증서를 가져오게 했다. 오래된 것이라 누렇게 바랬지만 거기에 쓰인 글자는 여전히 또렷했다.

노예 이든을 아이리스 비아 솔렌이 8백만 페르소를 주고 샀다는 내용이었다.

고작 8백만 페르소 때문에 이든은 그녀의 곁에서 창부 노릇을 해야 했다.

아이리스는 그 노예 증서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옆에서 타고 있는 양초의 촛불에 가져다 댄 뒤 길게 불이 옮겨붙은 그것을 사기 접시 위에 올려 두었다.

습기도 없이 잘 마른 오래된 종이는 금세 주홍빛 불꽃의 먹이가 되어 까맣게 오그라들었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이든은 면천되었다. 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자유민 이든이었다.

아이리스는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종이의 흔적을 바라보며 저와 이든 사이의 가는 끈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됐니?”

“부탁 한 가지만 더……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리스는 그것이 돈을 달라는 부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유민이 되었으니 떠나고 싶을 테고, 떠나려면 돈이 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든에게 줄 돈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파스완 중앙은행에 가서 네 이름을 대고 네 목걸이에 걸린 인장을 찍어 보여주면 네 금고로 안내해 줄 거야. 내 곁에서 고생한 대가는, 거기에 넣어두었다.”

뜻밖의 이야기에 이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이리스는 거기서 아주 작은 위안을 얻었다. 자신의 내탕금에서 다달이 이든 몫을 빼어 모아둔 것이었는데, 그 정도면 이든도 웬만한 귀족 못지않게 잘 살 수 있을 터였다.

“감사합니다만, 제가 드리려던 부탁은 그게 아닌데요.”

“그럼 뭔데?”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건 그냥 주인님이 쓰세요. 그리고 저를…… 저를 주인님 곁에 있게 해주세요. 잡일꾼이라도 좋습니다. 그저……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뭐……? 그게…… 그게 네 소원이야? 그게 소원이라면 면천은 왜 해달랬어?”

“노예로서는 싫습니다. 그럼 제가 뭘 하든 ‘노예가 주인을 두려워해서 한 일’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자유민으로서 한다면, 그게 제 자의라는 걸 알아주시겠지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아이리스의 비명 같은 되물음에 이든이 한숨처럼 웃었다. 그의 영원한 주인님은 너무나 외로운 사람이라 대가 없는 진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이든은 결국 따귀라도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 건방진 소리를 지껄였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아이리스는 말문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만 어물거렸다.

뭐라고 더 윽박질러야 할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리스의 침묵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이든이 민망한 듯 웃고는 다시 부탁했다.

“그냥…… 주인님을 위해 살다가 죽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제 유일한 소원입니다.”

“이든…… 이 멍청한 녀석아…… 그래도 이것저것 가르쳤다고 생각했더니, 길거리에서 빌어먹던 시절보다 하나도 나아진 게 없어!”

“주인님…….”

“챙길 건 똑똑하게 다 챙기랬잖아! 다른 무엇보다 네 한 몸이나 잘 챙기랬잖아! 아무도 믿지 말랬잖아!”

아이리스의 뺨 위로는 길게 눈물길이 그어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믿지 말아야 할 못된 년한테, 도대체 왜 빠진 거냐고!”

여태 이든에게는 잔인한 짓만 해왔는데, 이든은 한결같았다. 아이리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이 테싯 거리에서 제 손을 잡아주셨던 그날부터, 당신은 내 삶의 이유였어요. 그뿐입니다.”

조용한 고백에, 아이리스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온 세상에게 버려진 것 같았는데, 그녀의 곁에는 적어도 이든이 있었다.

한참 울던 아이리스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이든에게 말했다.

“난 너에게…… 어떤 미래도 약속해 줄 수가 없어. 난 황녀고…… 넌…….”

“알아요. 그냥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난 앞으로 추락할 일만 남았어. 어쩌면…… 탑에 갇힐지도 몰라. 죄인의 하인으로 사는 삶은 절대 즐겁지 않을 거야.”

“괜찮아요. 그냥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아이리스가 눈물로 젖은 손으로 이든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난 끝까지 이기적이네…… 미안해……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줘, 이든…….”

그제야 이든의 얼굴에 진심으로 기쁜 미소가 번져갔다. 긴장이 풀리고 이제야 상처가 욱신거렸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왠지 일리에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네, 주인님.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인님 곁을 지킬게요.”

이든은 아이리스의 손을 꼭 잡으며 제 삶의 이유를 다시 깨달았다.

* * *

겨우살이 축제 날은 얼마나 난리였는지 모른다. 슬라르한이 후계자로 낙점된 것은 오히려 별일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엘로르가 쓰러지고, 아이리스는 술 취한 지지자에게 살해당할 뻔했으며 컬리넌 후작, 엘란츠, 롤랑 백작 등 슬라르한의 최측근들은 갑자기 인사하겠다는 인파에 치였다.

엔시아는 자기와 춤춰달라는 남자들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타리크에게 구해졌다. 그 역시도 많은 영애들에게 둘러싸였었기에 두 사람은 ‘편안한 연회를 위한 전략적 연합’이라는 핑계로 연회가 끝날 때까지 함께했다.

그러나 아무리 요란스럽더라도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흘렀고, 연회는 끝이 났으며,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늘 규칙적으로 생활하던 슬라르한도 다음날은 오전 느지막이 눈을 떴다. 새벽녘까지 사람들에게 시달린 탓에 아직도 머릿속이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황위 후계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하인을 시켜 일리에를 데려오도록 했다.

일리에를 기다리는 동안은 후계자 발표를 기다리던 그 순간보다 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태 일리에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너무 뛰어서 토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일리에의 노크 소리를 듣는 순간 싹 사라졌다.

“부르셨어요, 주인님?”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오전의 햇살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일리에의 얼굴이 문틈으로 쏙 삐져나왔다.

슬라르한은 흐뭇한 낯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일찍 부른 건가?”

“벌써 11시가 다 됐는걸요, 뭐. 그리고 주인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시간 중에 너무 이르다든가,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기특하기도 하지.”

의젓한 대답에 슬라르한은 쿡쿡 웃으며 일리에를 방으로 들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권했다.

슬라르한은 손수 차를 우리며 일리에의 찻잔에 따끈한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

“어제 내가 황궁으로 가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겠지?”

일리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가 어떤 것이든, 네가 미뤄뒀던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나?”

낮게 속삭이던 그 목소리를 잊어버렸을 리가.

슬라르한이 황위 후계자가 된 이상, 더 숨길 것도 없었다. 제 말을 듣고 저를 미친 계집쯤으로 여길 수는 있겠지만, 이제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오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궁금하신 건 다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전에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 얘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고, 제 말을 믿으실지 말지는 주인님께서 판단하시면 됩니다.”

슬라르한은 긴장되는 속을 차 한 모금으로 누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나?”

“기억하기도 하고,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제 머리는 저의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지만, 이 몸의 과거는 전혀 알지 못하거든요.”

“……뭐?”

일리에는 크게 심호흡하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는, 한 번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기 한참 전의 과거로 돌아와 웬 낯모르는 소녀의 몸에서 눈을 떴습니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죽기 전의 제 삶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이 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잠깐 멍하니 일리에를 쳐다보던 슬라르한이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더니 다시 시선을 치켜들었다.

“네가 미래를 알 수 있었던 건, 그럼…….”

“네. 점쟁이니 뭐니 했지만, 사실은 이미 한 번 겪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네가 기억하는 일들은 모두 이 황위 경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넌…… 누구였다는 말이냐.”

일리에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제 이름은…… 릴리에트 시야르드 솔렌이었습니다.”

“……시야르드? 아니, 그 전에…… 솔렌? 솔렌이라고?”

‘솔렌’이라는 성은 황제와 황제의 배우자, 황위 후계자, 그리고 미혼의 직계 자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슬라르한의 눈이 경악한 것처럼 커졌다.

“전생에는, 4황녀였죠. 제가…… 라리에트의 언니였습니다.”

슬라르한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살았던 그 전생의 황위 계승자는…… 누구였지?”

그 질문에 일리에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것으로도 답이 충분했다.

“너였……던가…….”

“라반 대신 제가 후보가 됐었죠. 그리고 제 참모가 바로…… 클리드 카시르였습니다.”

“그렇다면 엘로르 전하는…….”

“전생에 그녀는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클리드를, 그러니까 카시르 영식을 짝사랑했었고, 이번 생의 그녀 역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

“거기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도 늦게 안 사실이기도 했거니와 제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슬라르한은 갑자기 쏟아진 엄청난 이야기에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순간, 꿈에서 봤던 그 여자가 떠올렸다. 라리에트와 비슷한 적발과 녹안을 지녔던 여자, 자신이 릴리라고 불렀던 그 여자…….

“혹시 전생에, 라리에트 전하와 비슷한 머리칼 색을 갖고 있었던가? 눈동자는 녹안에…….”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슬라르한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득한 기억처럼 남은 꿈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위 경쟁과 관련한 발표가 있던 대축연 때…… 나에게 인사를 건넸던가?”

“어…… 네…… 설마, 전생을 기억하는 거예요, 르한?”

‘르한’이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와 어투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슬라르한은 도대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르한…… 그래, 르한이라고 불러댔던 것 같군.”

“세상에, 당신도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 그럼…… 내가 누군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거예요?”

“난 기억하지 못한다. 몇 번…… 꿈에서 봤을 뿐. 희한한 개꿈이라고 생각했지.”

“어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되돌려지면서 과거의 파편이 남은 것 같군.”

“아…… 그럼 날 기억하지 못했다는…… 하긴, 기억했다면 저를 옆에 두셨을 리가 없지요.”

일리에는 반가워하던 낯을 지우며 다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 뒀을 리가 없다고?”

“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황위 경쟁의 승리자였다고…… 그러니 주인님께는 제가…… 최대 정적이었던 거죠.”

“하아…… 그랬겠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주인님께 못된 짓도 많이 저질렀고요.”

“예를 들면?”

“……카스틸로 잔당 소탕 작전 때, 타리크 님의 어깨를 못 쓰게 만들었어요.”

슬라르한의 기억이 셰바란에서의 겨울로 되돌아갔다.

유난히 타리크를 챙기던 일리에가 떠올랐다. 어깨가 쑤신다던 타리크와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주물러 주겠다고 나서던 일리에…….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구나.’

저는 그것도 모르고 괜히 질투했었다. 질투라는 단어를 쓰기가 참 민망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그건 질투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 네가 황태녀가 된 뒤, 나는 어떻게 됐지?”

“그건 저도 궁금하네요. 저는 황태녀가 된 2년 뒤에 황제에 등극했는데, 그때까지 측근들의 뒤를 봐주던 주인님은 제가 황제가 되고 결혼 발표를 하자마자 사라지셨거든요.”

“……결혼 발표를 했다고?”

“네. 클리드 카시르랑요.”

슬라르한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클리드를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하게 적대적이던 일리에가 떠올랐다.

“넌, 카시르 영식을 처음 봤을 때부터 싫어했었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리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식물인간으로 지냈던 그 10년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슬라르한과 지낸 몇 년 동안의 세월 덕분인지, 지금은 꽤 참을만한 고통이었다.

“클리드는…… 황제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저랑 결혼한 거죠. 저는 황제가 된 지 1년도 안 돼서 쓰러졌고, 그 뒤로 10년간…… 의식만 살아 있는 식물인간으로 지냈습니다. 끔찍했죠.”

언젠가 일리에가 클리드를 평가하며 ‘조강지처를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바람피울 상’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게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짜였다니, 슬라르한은 황당해서 코웃음이 다 났다.

“식물인간으로 10년을 지냈다면…… 그 뒤로는……?”

“죽었죠.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10년이 거의 다 될 때쯤부터는 의식이 많이 흐렸어요.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슬라르한은 남의 일 얘기하듯 가볍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리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요?”

“그런 삶을 보내고 되돌아와, 하필이면 정적이었던 나의…… 노예가 되었다는 게, 치욕스러웠을 법도 한데.”

“처음에는 조금,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받아야 할 벌이자, 제가 갚아야 할 빚 같더라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전생에서도 주인님은 이상적인 황제감으로 칭송받았거든요. 아마 제가 주인님의 자리를 강탈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엘룬께서 저를 주인님께 보내지 않았겠어요?”

빙긋 웃는 얼굴에는 회한이나 슬픔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늦었지만, 그리고 전생의 르한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어요. 당신 것을 빼앗아서 미안했어요. 당신의 소중한 걸 망가트려서 미안했어요. 나를 원망했을 텐데, 끝까지 예의를 다해 대해줘서 고마웠어요. 이번 생에서야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사과하는 일리에는 맑게 갠 하늘 같았다. 자세한 일을 알 수는 없지만, 일리에가 전생의 한을 푼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일리에는 후련해 보였다.

“널…… 원망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에요. 말로 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 그때는 정말 상황이 심각했다니까요.”

“그래도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난 알아.”

릴리에트의 꿈을 꾸며 느꼈던 당황스러울 정도의 설렘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일리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인 것 같았다. 이번 생의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전생에서의 마음까지도…….

“일리에. 나도 여태 미뤄뒀던 이야기가 있는데…….”

“네? 저한테요?”

슬라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긴장되어 보였다.

“네, 말씀해 주세요.”

“일리에. 난…… 내가, 사실은…….”

슬라르한이 마른침을 삼키며 낯간지러운 단어를 꺼내려던 그 순간이었다.

콰앙, 하며 문이 열리더니 타리크가 뛰쳐 들어왔다.

“각하! 황궁이 점거되고 키메라가 쏟아져 나옵니다!”

놀란 얼굴로 문을 바라보던 슬라르한과 일리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황궁이 점거되다니? 누구에게?”

“엘로르 전하가, 황제 폐하를 인질로 삼고 루트 교도와 흑마법사들을 동원해 황궁을 장악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황궁에서도 탈락한 후보의 반발에 대비를 단단히 해둔 상태였다. 그 많은 황실 기사단이 이렇게 간단히 무너졌을 리가 없었다.

슬라르한은 일리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이야기는, 돌아와서 해야겠구나.”

일리에는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기억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고, 이제는 슬라르한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 *

새벽까지만 해도 눈부신 샹들리에와 흥겨운 음악, 우아한 춤과 화려한 드레스로 수놓아졌던 황궁은 그 몇 시간 사이에 완전히 엘로르, 아니, 카제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녀가 카제야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후보 평가 점수 2위였던 엘로르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실 기사단과 궁내 사용인들 모두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엘로르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수도에 출몰했던 괴물들이,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서부터 쏟아져 나온다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곧바로 벤티악 저택에 소식이 들어갔기에, 슬라르한은 큰 피해가 나기 전에 키메라로 뒤덮인 황궁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황당하군.”

“황당하기만요? 저는 토할 것 같은데요.”

슬라르한 옆에서 키메라 군단의 모습을 바라보던 타리크는 정말로 속이 안 좋은 듯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짐승끼리의 조합이 대부분이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키메라 중 꽤 많은 수가 인간의 머리나 팔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르딩딩한 살갗의 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고, 다른 짐승의 몸뚱어리에 붙은 머리가 눈알을 굴리고 있는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울렁대는 속을 두드리던 타리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이상해 보이나?”

“저번이랑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저번에 나타났을 때는 마구잡이로 주변을 공격하더니, 지금은 마치…… 황궁을 지키거나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이랄까요?”

거칠어 보여도 타리크 역시 전장에서 뼈가 굵은 기사였다. 상대의 전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했다.

사실은 슬라르한 역시 아까부터 그게 영 꺼림칙하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엘로르. 차라리 내가 너를 다시 황태녀로 선언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싸늘한 솔레일 궁의 홀. 안절부절못하며 엘로르의 눈치를 보던 황제가 물었다.

그는 황좌에 앉아 있었지만, 그 곁에 앉은 엘로르가 오히려 더 황제 같아 보였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벤티악 공작이야말로 이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할 분이니까요. 그분이 후계자로 뽑힌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이 아닌 아이르델이 황제였어야 했다는 말을 다시 듣게 된 것 같았다.

그는 금세 불퉁해진 어조로 툴툴댔다.

“그럼, 이건 다 무엇이냐? 네가 황태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왜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인 게야?”

엘로르에게 하는 말 같았지만, 그가 제 옆에 있는 상대를 진짜로 엘로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잠에서 다 깨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엘로르가 침실로 들이닥쳤을 때부터 황제는 그게 엘로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로르라고 하기에는 행동에 전혀 머뭇거림이 없었고, 무엇보다 제가 꼬드기려고 공을 들이던 그 흑마법사의 말투와 너무 똑같았다.

한눈에 그녀임을 알아보고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저 씩 웃어 보이고는 그를 황좌에 앉혀두기만 했다.

황궁 내 사용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황실 기사단, 황제 직속의 호위단까지 모두 엘로르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보고는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죽거나 다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태어난 이래 늘 황태자로서, 황제로서 모두의 우러름만 받고 살아왔던 탓이었다.

그러니 흑마법사의 엄청난 힘을 알면서도, 자신이 인질이 된 상황이면서도 턱을 치켜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황제를 흘끗 바라보던 카제야는 다시 홀의 거대한 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고는 예쁜 입술을 휘며 웃었다.

“벤티악 공작께서 자신의 운명을 자꾸 회피하려 하시니, 그걸 깨닫게 해드리려는 겁니다.”

“운명을 회피하다니?”

“그분은 파르디나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지배하실 분이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정신이 팔리셨는지 자꾸 미적대시네요. 여유 있는 상황이라면 좀 더 유희를 즐기시도록 놔두겠지만…….”

카제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는 코웃음 쳤다.

자신이 슬라르한을 알아 온 게 몇 년이던가.

직접적으로 대면해 본 건 몇 번 되지 않았지만, 우수한 정보원들을 파견하고 수집해 온 정보들을 보면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구나. 그놈은 내 도움 없이는 이 나라의 후계자 역할도 제대로 못 할 놈이다. 겁쟁이에 멍청한 놈이지. 이번 황위 경쟁에서는 참모와 조력자를 잘 얻어서 성공한 것뿐이야.”

황제는 어린애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카제야는 그런 황제의 모습을 비웃다가 이 인간의 밑바닥이 어떨지 조금 궁금해졌다.

“착각은 그쪽이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슬라르한 벤티악은,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라니? 그럼…….”

“리카온을 알고 있나요?”

“리카온? 루트 교에서 재림할 거라고 믿는다는 그 악마?”

“맞아요. 인간들의 표현으로나 ‘악마’지, 사실 그는 신이에요. 인간의 몸을 빌려 이 땅을 지배할, 신이죠.”

“그래서?”

카제야는 여전히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는 황제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슬라르한 벤티악이 바로 그 리카온이라는 말씀입니다.”

“뭐라고? 아하하하! 엘로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가 진짜 그런 신 같은 존재라면, 왜 이제껏 그렇게 머저리처럼 살았단 말이냐! 와하하하하!”

황제는 여태 슬라르한이 참고 살았다는 걸 잘 아는 듯했다.

“그가 리카온이자 공허의 문인 동시에 그 문의 문지기였기 때문이죠. 사비 족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니까. 망할 사비 족 놈들.”

카제야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황제는 ‘사비 족’이라는 이름에 눈을 번득였다.

“역시, 그 사비 족 놈들이 마족이었던 게지? 아이르델 놈, 끝까지 아니라고 버티더니…… 내 직감은 전부터 대단했다고! 어디 나를 속이려고!”

카제야는 혀를 쯧쯧 찼다. 이 인간의 밑바닥은 그냥 저것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냥 보기에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해 빠진 인간이기는 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거만하기가…… 장단 맞춰주기도 점점 질리는군.”

“뭐, 뭐야? 감히 어느 앞이라고 그런 되바라진 말투를 쓰느냐!”

“너야말로 주둥이를 좀 닥치고 있는 게 좋겠구나.”

엘로르의 입에서 걸걸한 남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급하게 빼앗은 몸이라 아직 영혼과 육신이 완벽하게 일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제야는 짜증 나는 듯 목을 가다듬더니 손을 한 번 휘둘러 황제의 입을 막아버렸다.

황제는 읍읍, 하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지만, 그의 입은 아교로 붙여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리카온은 각성할 것이고, 나는 그의 황후가 되어 영원한 어둠의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그 위대한 시작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영광으로 알아라, 인간.”

카제야는 더 이상 황제와 자신을 같은 ‘인간’으로 묶지도 않았다. 자신이 저런 버러지 같은 존재와 같은 존재일 리가 없으니까.

그 시각, 슬라르한은 뒤늦게 도착한 성기사단과 다른 귀족가의 기사단을 통합하며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공작께서 알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성기사단장이 무뚝뚝한 얼굴로 슬라르한에게 물었다.

“신력을 지니신 분들이 앞장서 주셔야 합니다. 놈들은 흑마법과 마석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신력에 상당히 약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놈들을 벨 때는 마석이 심어진 곳을 노려 단번에 베어야 합니다. 가장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사선으로 베십시오.”

성기사단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슬라르한의 양옆으로 길게 늘어섰다.

그 뒤로는 벤티악 기사단을 비롯한 일반 귀족가의 기사단이 긴장된 얼굴을 하고 섰다.

검과 창을 쥐고 늘어선 기사들은 예리한 겨울바람처럼 찌를 틈도 없이 탄탄해 보였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던 슬라르한은 투구를 쓰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저 괴물들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부딪혀 보지 않을 방법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아티팩트를 손으로 잠깐 눌러보며 이것이 자신을 붙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럼 전군, 앞으로! 황제 폐하를 구하라!”

“와아아아-!!”

슬라르한의 쩌렁쩌렁한 진군 구호에 맞춰 기사단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슬라르한과 성기사단은 뒤따르는 기사단보다 한참이나 더 빨랐다.

황위 후계자이면서도 몸을 전혀 사리지 않는 슬라르한이 제일 앞에서 검을 휘두르자 기사단 전체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하지만 키메라들 역시 일제히 사납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어슬렁거리기나 하던 그들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시무시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하아아악!”

“끼에에에-!”

요란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어느 것 하나 특정 동물의 포효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키메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괴물일 뿐, 그 안에서 키메라 제작을 위해 희생된 존재를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투확,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었는데 슬라르한이 내지른 검이 제일 거대한 키메라의 마석 심장 한가운데를 사선으로 갈랐다.

갈라진 키메라의 육신에서 쏟아지는 썩은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며 고약한 냄새를 피웠다. 그러나 악취와 음기는 성기사들의 놀라운 신력으로 금세 사라졌다.

“포 빌다움 엘라누 알크!”

성기사단장이 시동어를 외침과 동시에 공중에서 금빛 채찍 같은 것이 나타나 사방을 내리치며 사특한 것들이 뱉어낸 기운을 흐트러트리고 날뛰는 키메라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머리부터 잘라! 사지를 다 자르고, 다시 뭉쳐지지 않는지 확인해라!”

벤티악 기사단의 마스터급 기사들은 자신의 오러를 잔뜩 밀어 넣은 검으로 키메라의 사지를 잘라냈고 뒤따라오는 일반 기사들을 보호했다.

맞부딪친 순간에는 기사단 쪽에 승기가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키메라들도 만만치는 않았다.

키메라는 짐승들의 가장 위협적인 부분만을 모아 붙여놓은, 게다가 가장 잔혹하고 공격적인 성향만을 남겨놓은 괴물이었다. 게다가 두려움도 없었고 통증을 느끼지도 않았다.

슬라르한이나 성기사단에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일반 기사들을 상대로는 오히려 키메라 쪽이 더 우세했다.

“으아아악!”

저에게 달려드는 키메라의 목을 베었는데도 달려드는 기세가 줄어들지 않아 그대로 키메라 아래 깔리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키메라들은 어느 한 군데가 베이거나 찔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고, 예전보다 빨라진 속도로 기사들의 뒤를 노렸다.

심지어 인간의 머리나 팔을 달고 있는 키메라들은 기사들의 투구를 벗기거나 팔, 다리를 붙잡으며 예상치 못한 공격을 해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키메라의 엄청난 힘에 당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슬라르한과 벤티악 기사단이 일격에 키메라를 베어내는 것을 보고 만만하게 생각하던 일반 기사들은 금세 공포에 젖어 들었다. 너른 황궁 앞 광장에는 키메라의 잔해와 기사들의 시체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뒤편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릿시움!”

누군가의 선창에 여기저기서 릿시움을 외쳐댔다.

그러자 키메라들이 갑자기 방향을 잃더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거나 엉뚱한 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많은 기사들이 냄새나는 키메라의 아가리 바로 앞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다!”

키메라에 죽을 뻔했던 기사가 뒤를 돌아봤다가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개인주의 성향이 아주 강하던 마법사들이 모여들어 키메라와의 싸움에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슬라르한 역시 멀리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기운을 느꼈다.

‘왔군.’

그 괴팍한 디포르제도 흑마법이 판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는 왜 우리가 너희들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냐고 툴툴댔지만, 결국은 동료들을 모아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말이다.

슬라르한은 다시 검을 다잡고 주변을 가득 채운 괴물들을 반으로 썰어대기 시작했다.

저 멀리, 황궁 입구가 보였다.

슬라르한은 자신의 힘을 차분히 억누르면서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들이 황궁 앞에 있던 키메라들을 뚫었다고 여길 무렵, 황궁의 제3, 제4 옆문이 열리더니 소형 키메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기사들 쪽으로는 시선도 안 주고 일반 백성들이 사는 거리 쪽으로 달려갔다.

들개 크기의 키메라라지만 보통 사람은 그 키메라 하나를 이기기도 어려울 게 분명했다. 아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물려 죽을 게 뻔했다.

“타리크! 데일! 이쪽은 내가 맡을 테니, 타리크와 제1 사단은 3번 문 쪽을, 데일과 제2 사단은 4번 문 쪽을 맡아 놈들이 민가로 내려가지 않게 저지해!”

얼굴에 키메라의 검은 피를 묻힌 슬라르한이 타리크와 데일을 찾아 소리쳤다.

타리크와 데일 역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뒤에 있는 사람들을 믿고 민가로 뻗칠 악의 기운을 막아야 했다.

그들은 바닥에 땀을 흩뿌리며 휘하의 사단을 이끌고 양옆으로 흩어졌다.

‘제기랄.’

힘을 끌어올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 들었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올 것을 아는데, 억지로 조금씩 열어가며 졸졸 흐르는 물을 받아 쓰는 기분이었다.

이미 평소 쓰던 마력과 오러에 공허의 힘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고, 공허의 힘이 스며들자 그의 검은 키메라들을 더욱 쉽게 베어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기분 좋은 힘이 온몸을 타고 흐를 것 같았다. 그 힘에 몸을 맡긴 채 멋대로 베고 찌르고 휩쓸어버리고 싶었다.

‘안 돼, 참아야 해.’

이를 악물며 참느라 관자놀이가 욱신욱신 아파올 때쯤, 머릿속에 일리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노예가 아니고, 주인님도 공작님이 아니고, 그냥 이 자연의 일부일 뿐인 것 같아서…… 왠지 속이 간질거려요.”

그 순간 눈앞에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위르스 산의 바람을 맞으며 너럭바위 위에 벌렁 드러누운 일리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뜨겁게 과열되었던 것 같은 목 뒤가 식으면서 쿵쾅거리던 심장 박동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티팩트 하나가 벌써 발동되었군.’

슬라르한의 손에 땀이 배었다.

위험 수위에 다다를 때마다 일리에의 목소리와 모습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아티팩트를 세 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아직 흑마법사의 머리털 한 올 보이지 않는데, 벌써 아티팩트 하나가 발동될 만큼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는 것에 슬라르한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일리에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라던 어머니의 말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험 수위에 올랐던 힘의 크기는 일리에의 얼굴과 목소리를 순간적으로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후우…….”

슬라르한은 더운 숨을 내뱉으며 힘을 조절했다. 그러고는 다시 바닥을 박차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어, 아무것도…….’

황궁에서 키메라가 쏟아져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일리에는 제 방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해했다.

전생에는 키메라라는 것이 나타난 적도 없었다. 자신과 클리드가 루트 교와 흑마법을 그토록 축출하려 했는데도 그런 괴물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전생에서는 저런 게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나타난 거야? 설마, 나 때문에 미래가 틀어져서……?’

전생에서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면 그 이유라고는 하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고 믿고 모든 것을 틀어왔는데, 그게 더 끔찍한 재앙을 몰고 온 것이라면……?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정체도 알 수 없는 재앙 속에 슬라르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기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혀 새로운 일,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고, 슬라르한은 짐작할 수 없는 위험 속으로 달려 나갔다.

‘안 되는데…… 슬라르한은 무사히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가 황위 후계자만 되면 모든 일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후계자로 결정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지만 당장이라도 슬라르한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나가기 전, 일리에가 저택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오게 명령했다.

그녀의 방문 앞에는 슬라르한의 서슬 퍼런 명령을 받은 하인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치사한 놈! 사람 답답해 죽는 꼴을 보려고 작정했지, 아주?”

제 방에서 혼자 투덜거려 봐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 손 모아 잡고 엘룬에게 비는 게 고작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참담했다.

그런데 그때, 굳게 닫혀만 있던 문이 끼이익 열렸다.

“어? 마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조심스럽게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세이렌이었다.

“일리에. 괜찮니?”

“너무 괜찮아서 문제죠.”

일리에는 괜히 슬라르한에게 심통이 나서 세이렌에게 일러바치듯 툴툴댔다.

“제가요, 그래도 웬만한 중급 기사 정도는 되는 실력이거든요. 물론 오러도 없고 그렇지만, 그래도 말이에요. 가서 작은놈이라도 베어낼 수 있는 거잖아요. 다른 기사님들이랑 협공으로 잡아도 되는 거고. 주인님은 제가 여자라고 너무 절 보호하려 드세요.”

안 그러려고 했는데 말을 할수록 입술이 삐죽 나왔다.

일리에에게는 기사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늘 깔려 있어서, 슬라르한이 보호한답시고 이렇게 가둬놓을 때마다 조금 슬퍼지곤 했다. 물론 그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다 제 배부른 투정인 건 알지만요. 여기 가만히 있으려니 주인님이 걱정돼서 괜히 말이 많아졌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일리에. 나도 너와 비슷한 생각이란다.”

“예?”

세이렌은 일리에의 손을 꼭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 마, 마님! 왜 이러세요!”

“일리에, 제발 르한 곁에 있어줘. 르한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예?”

일리에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일리에. 난…… 네가 과거로 회귀한 걸 알고 있어. 네가 릴리에트 황녀였던 것도 알고 있지. 어떻게 황위에 올랐는지도, 어떻게 죽었는지도 전부 알고 있어.”

일리에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전생에 세이렌 벤티악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그걸……!”

“알 수밖에 없지.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알고 있던 유일한 마법사가 바로…… 나였으니까.”

일리에는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건 엘룬의 뜻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마법이었다니……!

“그럼, 마님께서 주인님께 전생의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주인님도 뭔가 좀 아시는 것 같았는데…….”

“아니…… 시간 회귀의 마법은 완벽하게 미래를 지워 버리는 게 아니거든. 그랬다면 대가를 바친 이라 하더라도 미래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럼요?”

“파편처럼 남아 있는 거야. 이 마법에 대가를 바친 이들은 전생을 완전히 기억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꿈에서 보는 식으로 미래의 파편을 보게 돼…… 르한도 그런 식으로 널 봤던 것 같더구나.”

일리에는 세이렌의 말을 한 번에 다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왜 전생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대가를 바친 이들만이 전생을 기억한다면, 저는 어떻게 된 거죠? 저는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다가 죽었는데요.”

“아니. 의식을 잃었을 뿐, 숨은 붙어 있었어. 그리고 네 기억을 온전히 남기기 위해 시간 회귀의 마법에 너의 생명도 대가로 바친 거지. 어차피 널 살릴 방법은 없었으니까.”

문답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일리에는 더 아리송해졌다. 왜 굳이 자신을 찾아다가 마법의 대가로 바쳤을까. 아니, 왜 시간을 되돌린 걸까.

“도대체 왜 시간을 되돌린 건가요? 르한이 황제가 되지 못해서? 아니, 만약 그렇다면 황위 후계가 결정된 시점에서 돌렸어야지, 왜 12년이나 지나서……!”

“애초에 시간을 되돌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 때문에 슬라르한이 각성할 뻔했거든. 그걸 말릴 방법으로는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각성?”

일리에의 되물음에 세이렌은 한숨처럼 답했다.

“……슬라르한이, 흑마법사들이 찾는 리카온이자 공허의 문이란다.”

“예에? 말도 안 돼! 주인님이 그걸 막으려고 얼마나 애쓰시는데요!”

일리에가 화를 내듯 소리쳤지만 세이렌은 눈을 꾹 감으며 감내할 뿐, 반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일리에는 세이렌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진짜!”

“사비 족은, 리카온의 피를 이어받은 일족이야. 우리 안에서 천 년에 한 번씩, 리카온의 힘을 강하게 타고 태어나는 이가 생긴다. 여태까지는 그게 슬라르한만큼이나 강했던 적이 없었는데…….”

일리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럼 여태 주인님도 자신이 리카온이라는 걸 몰랐다는 거예요? 우린 그걸 막으려고 교황청까지 다녀왔다고요. 성수로 목욕까지 했단 말이에요. 그래도 멀쩡하셨어요, 주인님은!”

“각성하기 전에는 그냥 슬라르한일 뿐이야. 하지만 각성하고 나면…… 슬라르한은 사라져 버리는 거나 다름없어. 리카온은 이지도, 감정도 없는, 공허의 힘과 악, 그 자체니까. 그래서 내가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일리에.”

“뭘요?”

“제발 르한을 지켜줘. 그 애가 그 애로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일리에.”

그 말에, 일리에는 심각한 상황임을 모르는 게 아닌데도 풉, 하고 웃어버렸다.

“제가 뭐라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씀이세요? 제 전생을 알고 계시다니 대화가 빠르겠네요. 저랑 르한이 전생에 원수나 다름없었다는 거, 알고 계시죠? 이번 생에서는 관계가 크게 좋아졌지만, 그래도 주인과 하인 이상으로는……!”

“아니야, 일리에!”

세이렌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리에에게 매달렸다.

“전생에 르한이 각성할 뻔한 이유, 그리고 르한이 시간 회귀의 마법을 시전한 이유는 모두 너 때문이었단 말이다! 너를 살리려고!”

세이렌은 일리에의 손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꽉 붙들었다.

아까부터 공허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슬라르한이 점점 한계까지 밀려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슬라르한을 붙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일리에가 여기서 물러서면 슬라르한은 흑마법사들에 의해 리카온으로 각성해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리에는 세이렌이 다급한 속내를 짐작하면서도 멍청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놓치고 있던 중요한 부분에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저를 살리려고 했대요?”

“그건…….”

“아니! 아니에요. 듣지 않을래요.”

일리에는 살짝 열어본 비밀의 상자를 황급히 닫아버리듯 바르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 이유를 듣는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전생의 감정을 궁금해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리에는 전생의 슬라르한이 자신을 살리려 했던 건 그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겠거니 하고 묻어두기로 했다.

“어쨌든…… 제가 슬라르한의 각성을 막을 방법이 뭔가요?”

뭔가 단단히 각오한 일리에의 얼굴을 보며 세이렌은 바투 다가가 앉았다. 세이렌이 생각하기에도 지금은 과거의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그 아이가 폭주하려 할 때 곁에 있어 줘야 해. 네가 함께 있어 준다면 슬라르한은 절대 각성하지 않을 거야.”

“간단하네요. 그런데 그것도 제가 여길 나갈 수 있어야 하는 일이라…….”

그러자 세이렌이 일리에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자.”

일리에는 그제야 하인들과의 실랑이도 없이 세이렌이 제 방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쯤 열린 문밖으로 벽에 기대 잠든 하인들의 다리가 보였다.

“마법이라는 거…… 편리하네요.”

“저주이기도 하지.”

세이렌이 슬프게 웃으며 일리에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일리에가 도착하기 전에 슬라르한이 폭주를 일으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 *

슬라르한이 휘두르는 검에 키메라는 여전히 끽소리도 못하고 썰려 나갔다.

일반 기사들이 벨 때는 어디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달려들던 키메라가, 슬라르한이 벨 때는 그대로 나동그라지는 것을 보고 다른 기사들도 슬라르한이 자신들과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그만!”

전장을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키메라들이 공격을 멈추고 성문 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슬라르한과 다른 기사들 역시 저절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엘로르가 황제와 함께 서 있었다.

슬라르한은 한눈에 엘로르가 흑마법사에게 몸을 강탈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녀에게서는 너무나 강한 어둠의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젯밤 쓰러진 이후에 당했겠군.’

쓰러진 엘로르를 부축했던 것은 해리엇이라는 그 시녀였다. 그들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때 그들을 막을 수 있었다면 엘로르는 지금도 멀쩡할 수 있었을까.

“다들 고전 중이시군요. 하긴, 그러라고 만들어낸 애들이기는 하지만요.”

엘로르가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다. 마력을 타고 그녀의 목소리는 멀리 퍼져 나갔다.

“무슨 속셈이냐.”

슬라르한이 낮게 물었다. 주변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카제야는 금세 알아듣고는 활짝 웃었다.

“언제까지 참으실 생각이십니까, 왕이시여. 당신의 힘이라면 모든 게 간단히 끝날 텐데요.”

“그게 네가 바라는 바임은 아주 잘 알고 있지.”

“아하하하! 어쩜, 제 마음을 이리도 잘 알아주시니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닥쳐라, 어둠의 개야.”

“당신께서 어둠의 제왕만 되어주신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개로 살아가겠습니다. 저로서는 기꺼운 일이지요.”

엘로르는 생글생글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왕께서 마음껏 즐기시도록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이를 어쩌죠? 시간이 없네요.”

사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카제야의 사정이었다.

애초에는 이렇게 빨리 일을 칠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게 더 완벽히 준비된 다음에나 벌일 생각이었는데, 한 번 더 껍데기를 바꿔 쓴 탓인지 그녀의 영혼이 그 잠시도 버티지 못할 만큼 무너져가고 있었다.

카제야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이성을 끌어모아 버티는 중이었다. 솔직히 눈앞에서 넘실대는 슬라르한의 검은 기운은 당장 달려가 빨아먹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그 정도로, 카제야의 영혼에서는 카제야라는 인간의 지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카제야는 더 머뭇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황궁 안의 모든 이들을 다 죽이길 바라지 않는다면, 벤티악 공작 혼자 성안으로 들어오세요. 반항할 때마다 황족 하나씩을 베어 성문 위에 걸겠습니다.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건, 공작 본인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요?”

그녀의 선언에 주변에서는 일제히 놀라며 슬라르한의 눈치를 보았다.

이대로 슬라르한 혼자 성안에 들어가면 그가 죽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가지 않으면 황족들과 황궁 내 사람들이 죽어 나갈 판이었다.

게다가 키메라와의 싸움도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다. 키메라만 다 베어낸다고 해서 끝인 게 아니라, 그 뒤에는 황실 기사단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벤티악 기사단은 슬라르한을 절대 내어주지 않을 기세였지만, 슬라르한은 팔을 들어 벤티악 기사단을 진정시켰다.

“내가 가겠다.”

“절대 안 됩니다!”

3번 문 쪽을 지키게 보냈던 타리크가 언제 되돌아왔는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온몸에 키메라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슬라르한의 앞을 막아선 그의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타리크. 비키게.”

“안 됩니다, 각하! 차라리 절 죽이고 가십시오! 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안 됩니다!”

슬라르한은 그의 앞에서 팔 벌려 가로막은 타리크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 걸세.”

“지금 각하의 눈동자 색이 어떤 줄은 아십니까?”

“뭐……?”

슬라르한은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물론 그런다고 제 눈동자 색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주홍빛입니다. 아무리 다르게 보려고 해도, 평소의 눈동자 색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제야 슬라르한이 멈칫했다.

아티팩트가 한 번 발동하기는 했지만 일리에의 목소리를 들은 뒤로는 힘이 가라앉았다. 그것으로 잘 참고 있는 줄 알았다.

아마 주변이 온통 악의 힘으로 범벅진 이 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풀어지는 힘을 잘 자각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주먹을 꽉 쥐고 다시 타리크를 타일렀다.

“내가 가지 않으면, 정말로 성안의 황족들이 다 죽어 나갈 걸세. 황제 폐하의 목숨까지 위태로워.”

“죽어 나가라죠!”

“타리크!”

“여태 각하를 핍박한 인간들입니다! 그 인간들이 각하의 목숨을 담보 삼아 살아나는 꼴은, 저는 죽어도 못 보겠습니다!”

슬라르한은 다시 한숨을 쉬며 타리크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걱정하지 마. 대책은 다 세워놨으니까.”

“안 속습니다. 저 안에 무슨 괴물들이 있을지, 무슨 함정이 있을지 각하께서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자네 고집도 상당하군.”

“그러니 이번만큼은 각하께서 좀 져주십시오.”

슬라르한이 난감한 빛을 띠던 그때였다.

“이거 놔라! 다들 미친 거야?”

악을 쓰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성문 위에 라반이 끌려 나오고 있었다.

라반이 몸부림쳤지만, 그를 양쪽에서 붙든 기사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했다.

그리고 라반의 뒤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온 카제야는 슬라르한의 앞에 타리크가 막아서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어쩌실 건가요, 벤티악 공작. 이대로 시간을 끌면 키메라들도 다시 움직이겠어요. 그럼 상황이 더 안 좋아질 텐데……?”

엘로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슬라르한의 눈빛이 달라졌다.

“각하!”

타리크가 다급하게 슬라르한을 붙들었다.

슬라르한은 자신의 오른팔이자 형제 같던 타리크에게 옅게 웃어 보이다가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조금 흘려보냈다.

타리크가 눈을 크게 뜨면서도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이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걸세.”

“각하! 제발, 제발……!”

“내가 가지 않으면 황족은 물론, 죄 없는 이들을 하나씩 끌고 나와 죽일 거야. 그 꼴을 보면서 버틸 수는 없지 않나.”

“각하께서 돌아가시면 더 큰 재앙이 닥칠 겁니다!”

“난 죽지 않아. 죽으려고 해도 못 죽는다더군.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결국 타리크는 완전히 힘이 빠지고 말았다.

타리크 외의 다른 기사들도 슬라르한을 말리려고 했지만 슬라르한은 그들을 시선으로 제압하고는 성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갈 테니, 황족에 대한 위협을 멈춰라!”

라반의 곁에 선 카제야에게 소리친 슬라르한은 이내 성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키메라들이 마치 자신들의 왕이라도 맞이하듯 길을 비키며 몸을 낮췄고 성문 위의 엘로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성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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