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커다란 홀의 문이 열리고 갑옷을 갖춰 입은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문은 다시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로 어제 후계자 발표가 있었던 홀이었다.
어제는 그토록 요란하고 휘황찬란했던 홀이, 지금은 고요하고 어두운 공기 속에 침잠하는 듯했다.
출입문 맞은편의 단 위에는 황제가 홀로 보좌에 앉아 있었고 귀족들이 자리하던 홀 양옆에는 똑같은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루트 교 사제들과 흑마법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엘로르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흑마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르델 놈이 끝까지 시치미를 뗐지만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하지.”
적막한 홀 안에 황제의 목소리만 울렸다.
“네 어미가 마족이었으니 너 역시 마귀의 새끼쯤 되겠구나. 여태 그 흉포한 성정을 숨기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클클.”
황제가 보좌 옆에 놓여있던 대검의 손잡이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단 아래로 내려왔다.
기이익, 하며 검이 대리석 바닥을 끄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황제의 목소리, 태도, 자아내는 분위기 모두 위압적이었지만 슬라르한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흑마법사는 어디 있습니까.”
“네가 알아서 뭣하게?”
“그 사특한 자를 없애야 합니다.”
그 말에 황제가 어깨를 들썩이며 킬킬대다가 검 끝으로 슬라르한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누가 누구더러 사특하다는 것이냐? 사특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면, 너부터 죽어야지. 아니 그러하냐?”
그 순간, 슬라르한은 황제가 든 검 위로 희미한 오러 같은 것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황제는 검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 그가 직접 오러를 피워냈을 리는 없었다.
‘설마 흑마법사의 마력을 빌린 건가…….’
꽤 그럴듯한 추측에 목 뒤가 뻣뻣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다시 한번 차분하게 황제를 설득해 보고자 했다.
“폐하께서는 흑마법사의 사술에 눈앞이 가려지셨습니다. 엘로르 전하의 탈을 뒤집어쓴 그 흑마법사가 원하는 것은 제국의 황권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절대 속으시면 안 됩니다!”
“아하하하! 저 혼자 고결한 척하는 것이 제 아비와 똑같구나! 하지만 난 절대 속지 않는다. 너야말로 사특한 마귀임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즐거운 듯 웃는 황제의 입매 사이로 드러난 앞니가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마치 가장 즐거운 것 하나를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 같은 기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황제는 여전히 차분한 슬라르한 앞에 자신이 쥐고 있던 검을 한 번 가볍게 휘두르고는 이죽대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니라. 네놈은 마귀라 산 채로 불태워져도 할 말이 없겠지만, 그래도 내 동생의 아들 아니냐. 그러니 내 너희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네놈 역시 네 아비와 같은 검 아래 목이 떨어지게 해주마.”
슬라르한은 그제야 그가 아까부터 자랑스레 휘두르고 있는 저 검이 아버지의 목을 벤 그 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이제 아이르델이 아말 족에게 기습당해 죽었다는 거짓말조차 더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기사 프레데릭에게서 들었던 랑깃 숲 동굴에서의 이야기가 떠올라 슬라르한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모두를 보낸 뒤 홀로 이 인간 앞에 고개를 빼고 죽음을 기다려야 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토할 것만 같았다.
“……제 아버지를 폐하께서 죽이셨다고 자백하시는 겁니까?”
“자백? 네 어디 감히 황제를 죄인 취급하느냐? 네놈이야말로 반역의 의지가 있었음을 자백하는 것이냐?”
본인이 추궁당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야비한 미소를 띠던 얼굴이 금세 험악하게 뒤틀렸다.
“그 건방진 모가지를 성문 앞에 내걸어주마! 죽어라!”
그는 손에 쥔 검에 마력을 더 흘려 넣으며 크게 휘둘렀다.
카앙-!
강철 검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숙주 계약을 맺어 카제야의 마력을 빌린 황제는 회심의 일격이 간단히 가로막혔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곧 이를 갈며 발악했다.
“네 이놈! 마력이 깃든 검을 막아내다니, 이것이야말로 네가 마귀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냐!”
“제가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이지요. 숙련된 소드 마스터의 오러는 마력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 마력을 쓰십니까? 설마, 흑마법사에게 마력을 빌리셨습니까?”
“나야 마귀에 맞서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황제의 도를 넘는 뻔뻔한 태도에, 슬라르한은 그를 설득하는 게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황제에게는 벤티악 가의 결백함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그의 강박증과 피해망상증에 의해 만들어진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불안 요소를 없애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나 벤티악이 두려우셨습니까? 벤티악이 여태 한 번이라도 폐하의 명령에 불복한 적 있던가요? 도대체 무엇이 그리 두려우셨습니까?”
“뭐, 뭐얏! 누가 두렵다 했느냐! 제국을 위해 악마의 하수인을 제거하는 것은 황제로서의 의무다!”
“하…… 하하하……!”
슬라르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대단한 희극 아닌가.
“악마의 하수인을 제거하는 것이 황제의 의무임을 아셨다면, 애초에 흑마법사와 손을 잡지 마셨어야죠.”
“건방진 놈! 네놈이 아니었다면 손잡을 일도 없었……!”
“저 때문이 아니지요, 폐하. 본인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손잡은 것 아닙니까. 그랬으니 저를 황위 후계자로 선언하시고도 여유로웠던 것이고요. 제가 진짜 마귀라 여기셨다면 저를 후계자 후보로 선택하지도 않으셨어야 합니다.”
황제는 슬라르한이 자신의 속내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에 다시 놀랐다. 이제는 그런 속내를 숨길 필요가 없었지만, 슬라르한에게 지적받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후계자로 뽑아주었더니 그 은혜도 잊고 이젠 내 탓을 하려 들어? 드디어 네놈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아닌 게 아니라 슬라르한은 더 이상 황제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여기서 살려줘 봤자 이 모든 사태가 끝나고 자신을 반역자로 몰아가며 기어코 벤티악 가를 멸문시키려 할 터였다.
슬라르한은 황제의 검과 부딪쳤던 자신의 검날을 가볍게 쓸어보고는 아까와 사뭇 달라진 눈초리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네. 이젠 어쩔 수 없군요. 이 본성을 끝까지 억누르고 살아가고자 했는데 이리도 저를 자극하시니, 저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황제 역시 그의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챘다.
슬라르한의 눈동자가 점점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도 그 변화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목에 걸린 아티팩트가 발동됐지만 이번만큼은 일리에의 목소리도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이, 이 건방진……!”
황제는 등줄기의 솜털까지 삐죽 솟는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지만 이를 바득 갈며 그 공포심을 떨쳐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뜻이 꺾여본 적 없던 그는 본능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덤벼들었다.
“죽어라, 이 악마야!”
황제가 마력을 잔뜩 흘려 넣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캉! 채앵, 캉! 카앙-!
기세 좋게 휘둘러댄 것과는 달리, 그의 검은 귀 따가운 금속성 소음을 울리며 슬라르한의 검에 계속 가로막혔다. 종내에는 팔목이 아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황제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는 동안, 슬라르한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오해한 게 두 가지 있는데…….”
슬라르한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낮고 차가웠다.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거기에 깃든 분노를,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황제를 내세우고 몸을 숨긴 채 상황을 관망하는 카제야까지 느낄 수 있었다.
“하나는, 나를 고작 마귀의 새끼라 여긴 것이고.”
슬라르한의 검이 무겁게 공기를 가르며 황제가 입은 금속 갑옷의 가슴판을 가볍게 베어냈다.
검이라면 절대 벨 수 없는 갑옷을, 슬라르한의 검은 종잇장 베어내듯 갈라 그 안에 숨겨진 살점에 얕은 생채기를 냈다.
“또 하나는, 내가 내 아버지처럼 신사다우리라 여긴 것이다.”
갑옷을 베고 돌아온 검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어 황제의 어깨 보호구를 갈랐다.
황제는 방어하려고 검을 휘둘렀지만 그가 가른 건 허공일 뿐, 자신의 판금 갑옷을 가른 검과 마주치지도 못했다.
“뭐, 뭐야!”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슴팍의 따끔거리는 느낌이 자신의 착각인가 했는데, 곧이어 액체가 주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피였다.
“가, 가, 감히 황제의 몸에 상처를 내! 이건 반역이다! 저놈의 목을 잘라! 반역이다!!”
황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황실 기사단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던 무장 기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슬라르한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딛더니 여태 무거운 것처럼 움직이던 대검을 빠르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소드 마스터의 검은 마력으로 강화된 황제의 몸 여기저기에 날카로운 자상을 만들어냈다.
당황한 황제 역시 검을 휘둘렀지만, 검술이라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의 발버둥은 슬라르한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 황제의 몸은 표면이 다진 고기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크헉, 그만! 그만해!”
마력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한계였다. 황제는 따끔거리기만 하던 몸에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들기 시작하자 그만하라고 소리 질렀다. 아니, 명령했다.
그러나 슬라르한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자상을 점점 깊게 내며 천천히 황제를 죽여갔다.
단번에 죽여주기에는, 그의 원한과 분노가 너무나 깊었다.
“슬라르한! 르한! 끄악! 정신 차려라! 그만둬!”
뒤로 계속 물러나던 황제가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슬라르한은 봐주지 않고 따라붙으며 ‘느릿한 살해’를 이어갔다.
아까부터 그림자처럼 바닥에 깔리던 검은 기운이 그의 피부에서 서서히 피어올랐다.
‘드디어 공허의 문이 열린다!’
그들의 대립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카제야는 짙게 퍼지기 시작한 공허의 힘을 느끼며 아찔한 환희를 느꼈다.
역시, 그의 분노를 자극하기 위해 황제를 이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슬라르한이 황제를 죽이는 방식 역시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단번에 목을 베거나 짓이겨 버리는 것은 겉보기에나 잔혹할 뿐, 너무 자비로운 죽음이었다.
평소의 그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의 선택을 해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카제야는 그가 리카온으로 각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 살려줘! 살려줘, 르한! 내가, 잘못했다! 으악!”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던 황제는 그의 등 위를 쉭, 하고 지나간 검에 다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황제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검을 거두었다.
피를 칠갑한 황제는 그의 공격이 멈춘 것을 인지하자마자 너덜거리는 판금 갑옷에 여기저기 찔리면서도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했다.
카제야는 그제야 줄지어 선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앞으로 걸어 나오며 검은 후드 망토를 벗었다.
슬라르한의 싸늘한 눈초리가 그녀에게 날아가 박혔지만 카제야로서는 그마저도 기꺼울 따름이었다.
“이 세계의 왕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카제야 히클.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며 당신께서 임하실 땅을 만들어온 첫 번째 종입니다.”
슬라르한과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멈춘 카제야가 드레스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언뜻 보기에는 꼭 엘로르 같았다.
“에, 엘로르! 크흑……! 그놈을…… 죽여라……! 아니, 날, 먼저 치료해!”
바닥에서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던 황제는 엘로르가 나타난 것을 보자마자 다시 기세가 등등해서 태세를 바꾸었다.
그런 황제를 내려다보던 슬라르한이 냉기가 피어오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힘을 빌려 쓰고 있는 제국의 황제 폐하가 거기 계시는데, 내가 어찌 이 세계의 왕이라 할 수 있으며, 너를 어찌 내 종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비꼬는 소리에도 카제야는 기쁜 듯 입술을 휘며 다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곧 정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황제를 향해 손을 들어 주문을 외우자 황제의 몸이 크게 뒤틀렸다.
“으아아아악!”
고요한 홀에 황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깨가, 팔꿈치가, 팔목이, 다리가 제각각으로 틀어지고 어디선가 ‘뚜둑’하며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끄아아악!!”
황제는 아까까지의 슬라르한이 차라리 자비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에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깨닫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터졌고 침이 흘렀다.
그러나 황제가 고문이나 다름없는 마법에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슬라르한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슬라르한! 이걸, 멈추게 해! 저년을 죽여라!”
황제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러나 카제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슬라르한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인간이란 참으로 하찮지 않습니까? 고작 이 정도에도 몸을 뒤틀며 지저분해지지요. 그런 주제에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뻗대는 꼴이라니…… 도대체 이런 것들과 어떻게 이제껏 부대끼며 살아오셨습니까?”
그녀의 표정은 슬라르한을 안타까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경련하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차갑고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데 그 앞에서 나를 더 높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어머! 그렇군요. 제가 마음이 급해 이런 실수를 저질렀네요. 호호호!”
카제야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손을 휘둘러 황제에게 살해 저주의 마법을 내리꽂았다.
“크학!”
황제의 외마디 비명이 울리고, 바르작대던 그의 몸이 크게 펄떡였다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원망에 찬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카제야가 아닌 슬라르한 쪽이었다.
“네놈이…… 기어……이…… 나를, 죽…….”
절명의 순간에마저 뉘우치는 기색 없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슬라르한은 싸늘하게 답했다.
“제가 어찌 황족 시해의 대역죄를 저지르겠습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황실에 충성스러운 벤티악인 것을요.”
이 상황을 만든 건 슬라르한이었는지 몰라도, 황제를 죽인 것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사였다.
이것은 아이르델을 죽이고도 거짓과 조롱으로 일관한 황제에게 슬라르한이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기만이자 복수였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주며 죽였으면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황제의 입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마지막 한마디가 끝을 맺지 못하고 멎으며 경악에 물들었던 탁한 녹안이 뒤집혔다.
사는 내내 남을 의심하고, 의심을 진실이라 여겨 상대를 괴롭히고,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며 억울해하고, 자기만이 통찰력을 갖고 있다며 자화자찬하던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잘났다고 떠벌리던 인간의 마지막치고는 너무나 추레하고 형편없었다.
“마음에 드셨는지요, 어둠의 왕이시여!”
카제야가 다시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대단한 묘기를 부린 어릿광대가 관객의 환호를 바라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카제야는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부터 당신이 리카온인 줄 알았다면 엘로르를 돕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이토록 멋지게 자신이 이 세계의 제왕임을 드러내셨군요. 오랜 세월 당신을 기다려 온 종으로서, 너무나 기쁩니다.”
“종을 운운하다니, 우습군. 여태 나를 방해해 오지 않았던가?”
“오오, 왕이시여, 부디 오해를 거두어주십시오. 제가 이 땅을 당신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은 당신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역사를 통틀어 뒤져보아도 좋습니다. 저만큼이나 이 땅 위에 어둠의 힘을 흘러넘치게 한 자가 또 있던가요?”
카제야의 태도는 주인이 내려줄 상을 바라는 노예처럼 비굴하고 유혹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슬라르한은 노예 시절의 일리에를 떠올렸다. 그때 왜 일리에가 노예처럼 느껴지지 않았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노예처럼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던 그 순간조차도.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드디어 자기가 바라던 질문을 듣게 된 카제야는 기쁜 기색을 억누르지 못한 채 양손을 꼭 모아 쥐고 슬라르한의 곁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많은 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첫 번째 종으로 영원히 살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실 때, 바로 그 곁에서 그 모습을 보게 해주시고, 돕게 해주십시오.”
“그저 종으로서……?”
“당신의 곁…… 당신의 황후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슬라르한은 저도 모르게 푸흡, 하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빙빙 돌려 말하나 싶었는데, 저더러 황후 자리를 달란다.
그가 리카온으로 각성하면 사실 황제니 황후니 하는 개념조차 사라지겠지만, 저 흑마법사가 바라는 바는 명확했다.
리카온의 반려 자리, 즉 리카온의 힘에 곧바로 영향받을 수 있는 ‘반신(半神)’의 자리를 원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가 욕심이 과하군. 아니면 나를 우습게 여겼든가.”
“그럴 리가요! 저는 흑마법사로 살기 시작한 이래 오로지 리카온 님의 재림을 위해서만 살아왔습니다! 200년을 말이지요. 이 지극한 사랑과 충성심이라면, 당신의 반려로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고작 200년이지. 수천, 수만 년의 역사 속에서 고작 200년. 일개 인간이라고 보자면 긴 시간이지만, 대를 이어 신념을 가꿔온 인간들과 비교하자면 한없이 짧은 시간이다.”
자신의 지난 노력을 폄하하는 말에 카제야는 앞에 있는 이가 리카온이라는 것도 잊은 듯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그럼, 저보다 더 당신의 반려에 어울리는 존재가 있습니까?”
“글쎄. 하지만 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무엇보다도 나는 사내를 좋아하는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지.”
슬라르한은 아까부터 카제야 본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걸걸한 남자가 여자 흉내를 내며 배배 꼬는 듯한 목소리였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팔뚝에 소름이 돋은 게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카제야는 그런 슬라르한의 대답에 조소했다.
“왕께서는 아직도 그 껍데기로서의 삶의 자세를 버리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성별과 나이, 인종과 출신을 따지는 것은 결국 다 인간들이나 하는 짓인 것을요. 아니면…… 그 계집 때문인가요?”
카제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쉬지 않고 몽글거리는 연기가 담겨 있었다.
“제가 그 계집애의 마르를 하나만 만들어놓았을 것 같습니까? 저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답니다.”
엄지와 검지 끝으로 유리병의 목을 잡고 좌우로 흔들면서 카제야는 씩 웃었다. 슬라르한은 그것이 일리에의 정신을 지배하는 물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긴요. 당신께서 얼른 리카온으로 눈뜨시길 바라는 충심으로 하는 짓이지요. 당신께는 그 계집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계집이야말로 당신이 당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란 말이지요. 그따위 것은…… 사라져 버리는 게 좋아요.”
슬라르한이 재빨리 움직여 카제야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낚아채려 했지만 카제야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슬라르한은 허공을 움켜쥔 꼴이 되었다.
“저런…… 아직도 그 육신을 버리지 못하시다니, 당신의 종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하하!”
허공에 카제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널따란 홀 사방에서 메아리쳐 오는 그 목소리에 슬라르한의 신경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그 아이를 사랑하십니까?”
또 어디선가 카제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슬라르한은 대답할 수 없었다.
“후후. 당신과 사랑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병립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보다는 아마 독점욕에 가깝겠죠. 당신의 손아귀에 쥔 채,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당신이 원하는 형태의 행복을 안겨주는…….”
슬라르한은 대답 대신 이를 바득 갈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곳에 나타나 슬라르한을 흘끗 쳐다본 카제야는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그의 모습에 쿡쿡대며 웃었다.
“그렇게 괴로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의 주인.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바치겠습니다. 그 아이는 말 잘 듣는 키메라로 만들어 드리죠. 언제까지고 당신 혼자 독점할 수 있게 말입니다. 아하하하!”
승리감 가득한 웃음소리가 홀을 울리자 슬라르한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더 진하게 흘러넘쳤다.
슬라르한은 황제를 농락하던 검을 다시 뽑아 들고 홀 양옆으로 늘어선 흑마법사들을 노려보다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슬라르한이 무슨 생각으로 달려드는 건지 눈치챈 것처럼, 흑마법사들은 재빨리 마력을 운용해 자리를 피하거나 그를 공격했다.
콰앙-!
슬라르한이 휘두른 검에서 시커먼 기운이 날아가며 홀을 장식하던 석상 하나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때 저편에서 언뜻 요사하게 웃는 카제야가 보인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그쪽을 향해 다시 마력을 흩뿌렸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가던 마력은 카제야가 서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호호호! 힘을 더 끌어올리신다면 당신께서 저를 따라잡지 못하실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안타깝다는 듯 조롱하는 목소리가 유혹적으로 슬라르한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다시 저 멀리서 카제야가 작은 유리병을 흔들며 웃는 게 보였다.
슬라르한이 카제야의 위치를 확인하려 시선을 돌리는 사이 흑마법사들 역시 힘을 합쳐 슬라르한을 공격했다.
커다란 마력구가 슬라르한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고, 슬라르한은 재빨리 방어막을 펼쳐 막아냈다.
콰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슬라르한의 발이 바닥의 대리석을 파헤치며 뒤로 한참이나 밀려 나갔다.
“잔챙이들은 꺼져라!”
새빨개진 눈동자가 방해물들을 사납게 훑는 동시에 슬라르한의 입에서는 이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된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황궁이 진동하며 흑마법사들 위로 새카만 공허의 힘이 장대비처럼 내리쏟아졌다.
“크아악!”
“카제야 님!”
아까까지는 슬라르한의 공격을 손쉽게 피하던 흑마법사들이 이번에는 바닥에 뒹굴며 격한 신음을 토해냈다.
실력자인 흑마법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하자 카제야는 오히려 더 기뻐했다.
“드디어 리카온께서 깨어나신다!”
카제야의 외침에 다친 곳을 감싼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흑마법사들이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리카온 님! 공허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저희를 종으로 맞아주십시오!”
피를 흘리면서도 흑마법사들은 기쁜 빛을 띠었다. 공허의 문만 열린다면, 그 넘치는 힘만 얻을 수 있다면 이따위 상처쯤이야 금방 복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슬라르한은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일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카제야…… 당장 나와라. 네가 정말 내 종이라면, 내 명령을 따라야 하지 않겠나!”
“호호호! 물론이죠. 다만 아직 당신께서 완전히 제 주인으로 각성하지 않으셔서 말이죠. 조금만 더 힘내주십시오.”
카제야는 정말로 즐거웠다.
슬라르한은 못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아까 그가 공허의 힘을 흩뿌리던 순간 공중에 생겨난 까만 점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이 바로 공허의 문!’
슬라르한이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점은 커졌다. 카제야는 그를 더 자극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자신의 환영을 만들어내며 유리병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그녀의 의도대로, 일리에를 조종할 수 있는 물질이 카제야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은 슬라르한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붉게 물든 눈동자를 하고 사방으로 검은 기운을 쏘아내며 황궁의 홀을 부수고 있는 슬라르한과 그에게 베이거나 공격당해 나뒹굴면서도 광기 어린 찬양을 이어가는 흑마법사들의 모습은, 이 자리가 지옥이라 해도 믿을 만큼 괴기스러웠다.
* * *
“이럇! 조금만 더 힘내!”
일리에는 이미 온 힘을 다해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황궁을 향해 달렸다.
그녀의 목에는 세이렌이 걸고 있던 녹마석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르한이 있는 곳은 황궁 안이다. 이걸 가져가렴. 흑마법에 의해 정신을 지배당하는 이들 앞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거야. 르한의 위치도 이게 알려줄 테고.”
세이렌이 특별한 마법을 걸었는지, 녹마석 안의 오로라는 녹색이 아닌 검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르한! 제발 무사해!’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슬라르한이 황궁 안에 있다는 얘기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멀리서 보기에 황궁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 앞에서는 여전히 키메라와 기사단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라르한 혼자 황궁 안에 있다는 소리였는데, 어떤 이유로든 그게 희소식일 일은 없었다.
일리에가 향하는 곳은 전생에 익숙하게 드나들었던 ‘개구멍’이었다. 어차피 황궁의 모든 출입구는 막혔을 테니, 방법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황궁의 서쪽 성벽 한쪽에는 숲이라 하기에도 뭣한 덤불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이쯤에 분명, 개구멍이 있었는데…….’
일리에는 땀으로 젖은 온몸에 잡풀의 솜털 씨앗이며 잔가지들을 묻혀가며 조심조심 성벽의 아래쪽을 더듬었다.
그러다 잡초로 메워진 커다란 구멍을 발견했다.
‘역시 있구나! 엘룬 님, 감사합니다!’
전생의 기억이 맞아 든 것에 감사하며 일리에는 구멍을 메운 잡초를 대충 뽑아내고 납작 엎드려 개구멍을 살금살금 통과했다.
모든 기사단이 황궁의 정문인 남쪽에 다 몰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서쪽으로는 방비가 허술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녹마석이 통통 튀어 오르며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일리에는 달리다 걷다를 반복하며 녹마석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세이렌의 말대로 주변에서 보초를 서는 경비병이나 기사들은 일리에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가끔 허드렛일하는 하인들이 일리에를 가늘어진 눈으로 좇고는 했지만, 일리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가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관심을 껐다.
‘일단 르한을 찾는 것까지는 순조롭겠어.’
막는 이 없는 성 안을 가로지르며 일리에는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섣불리 희망적인 생각을 해서였을까.
일리에가 녹마석의 지시에 따라 솔레일 궁에 발을 들인 그때, 갑자기 솔레일 궁 전체가 우르릉, 하며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거대한 진동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개구멍을 지났을 때보다 녹마석이 더 빠르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뭐, 뭐야! 설마!’
일리에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녹마석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 그쪽으로는 홀밖에 없었으니까.
콰앙-!
다시 궁 전체가 흔들리며 굉음이 울렸다. 높다란 천장에서 돌조각과 먼지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일리에는 본능적으로 슬라르한이 폭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안 돼, 르한!”
쓸데없이 긴 복도를 달리며 일리에는 자신의 짧은 다리와 느려터진 속도를 원망했다.
마음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다리가 따라가지 못해 까딱 잘못하면 바로 다리가 엉켜 나동그라질 것 같았다.
그 사이에도 홀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려왔고 커다란 유리창들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불안한 울음소리를 냈다.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달린 일리에는 녹마석 목걸이를 옷 안에 집어넣은 뒤 홀의 쪽문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마음이야 급했지만 이 앞에 흑마법사들이 포진해 있다면 낭패였으니까.
하인들에 의해 기름칠이 잘 된 문고리와 경첩은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다행히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전혀 다행스럽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 화려하고 장엄하던 솔레일 궁의 연회 홀이 엉망진창이었다.
사방에 대리석의 먼지가 흩날렸고, 바닥에는 피가 낭자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여럿 쓰러져 있었고, 홀의 구석으로 검은 연기 같은 뭔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 난장판의 한가운데, 슬라르한이 서 있었다. 아무도 그를 공격하는 자가 없었는데, 그는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과 사방을 돌아보는 붉은 눈동자는 세이렌의 설명이 없었어도 그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각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리에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슬라르한의 이름을 외쳤다.
“르한!”
순간, 슬라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신의 부름에 반응했다는 게 그나마 희망적이었다.
아까까지는 언뜻 보기만 해도 새빨갰던 슬라르한의 눈동자가 점점 주홍빛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굳이 눈동자 색을 보지 않더라도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기운이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허공의 새카만 구멍이 도로 작아지기 시작했다. 작아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성인 남자의 한 아름을 넘어선 크기였다.
일리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공허의 문을 막던 빗장은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르한! 정신 차려요! 이놈들의 도발에 넘어가면 안 돼요!”
일리에가 그에게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러나 일리에를 바라보는 슬라르한의 표정은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피해!”
슬라르한의 외침에 일리에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일리에가 있던 자리로 뭔가가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이나 싶었던 순간, 일리에가 보던 눈앞의 장면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녀는 어느새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아까 서 있던 곳의 반대 방향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하필 지금 나타날 건 뭐니? 조금만 더하면 그분께서 눈을 뜨셨을 텐데.”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왠지 익숙했다.
일리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어……? 엘로르……?”
분명 엘로르였다. 그런데 어딘지 좀 이상했다. 엘로르가 마법을 쓰는 것 같은 이 상황하며, 평소와는 전혀 다른 저 표정하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구나.”
골이 난 듯했던 그녀는 금세 미소를 지으며 일리에의 등을 살짝 밀며 말했다.
“네 주인님께서 너를 너무나 보고 싶어 하시니 얼른 가보렴.”
일리에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하게 들리는 그 말투에 영 기분이 안 좋아졌지만, 저 멀리에서 창백하게 질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슬라르한이 너무 걱정되어 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일리에는 카제야 쪽을 흘끔거리며 슬라르한에게로 달려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일리에…….”
일리에의 발소리가 너른 홀 안에 외롭게 울렸다.
그리고 그 뒤로 카제야의 싸늘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당신은 그 무엇이든 손에 넣으실 수 있지만, 진실을 정확히 아실 필요는 있죠. 인간이란, 종이 인형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라든가…….”
그 소리와 함께 달려가던 일리에가 그 자리에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어……?”
“일리에!”
슬라르한이 굳었던 몸을 움직여 일리에에게 달려갔다. 일리에의 뒤로, 카제야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손으로 무언가를 찢는 게 보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종이 인형이었다.
그러나 카제야의 발밑에 일리에의 ‘마르’가 담겼던 유리병이 텅 빈 채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 종이 인형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종이 인형의 두 다리를 반쯤 찢어놓은 상태였다.
“보셨지요? 이렇게나 약해빠진 족속들이랍니다. 쯧쯧. 제가 이것의 심장을 반으로 찢어놓으면, 간단히 죽어버리겠죠.”
“그만둬!”
“리카온 님께서는 아직도 이런 것에 흔들리고 있군요. 그래서는 안 돼요. 인간이든, 버러지든, 우리에게는 그저 똑같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슬라르한의 커다래진 눈이 저만을 향하고 있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며, 카제야는 자신이 쥔 종이 인형을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헉……!”
슬라르한의 품에 안겼던 일리에가 짧은 숨을 들이켜며 동공이 커졌다.
슬라르한의 귓가에 카제야가 종이 인형을 찢는 소리가 벼락처럼 울렸다.
그 순간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마지막 아티팩트가 작은 빛을 터트리며 발동되었다.
“네! 저, 멀쩡히 잘 살아 있어요.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생글거리는 일리에의 얼굴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가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제 눈앞에 있는 일리에의 생명은 바스러지고 있었다.
커다래진 회색빛 눈에 마지막 생의 빛이 일렁이고,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순간이 슬라르한에게는 느리게 흘러갔다.
“오오-! 위대한 어둠의 왕이시여! 공허의 군주시여!”
카제야가 감격하여 지르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윙윙대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슬라르한의 눈은 제 품 안에서 사그라지고 있는 한 생명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 생명 한 가닥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일리에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보지 못하는 그의 뒤편 공중에서는 작아지던 까만 구멍이 급격히 몸집을 키워 사람 하나가 지나다닐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커다란 구멍 안에는 시커먼 연기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카제야와 모든 흑마법사들이 그토록 애타게 바라던 공허의 문이었다.
카제야는 유희를 즐기듯 천천히 찢던 종이 인형도 내팽개치고 공허의 문 앞으로 달려갔다.
고문서와 전설에서만 존재하던 그것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숨이 멎을 것 같은 감동이 밀려들었다.
“난…… 난 틀리지 않았어…… 내가 맞았다고……!”
저에게 미쳤다느니, 헛된 망상 집어치우라느니 하며 비웃던 과거의 흑마법사들을 데려와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카제야가 공허의 문 앞으로 달려가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흑마법사들도 엉금엉금 기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안에 가득 찬 저것이 분명 흑마법의 원동력인 어둠의 힘일 터였다.
저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단숨에 부상에서 회복하고 9서클의 흑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누가 위고 아래인지 따질 것도 없이 서로를 밀치며 그 새카만 어둠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공허의 문은 그들이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곳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열려 있었다.
“너희들! 엎드려라! 내가 일단 저기에 닿고 나면 너희에게도 힘을 나누어줄 테니까……!”
카제야가 다른 흑마법사들에게 소리 질렀지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말에 힌트를 얻었는지 제 옆의 흑마법사를 때려눕히고 그 어깨를 밟고 올라가고자 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와중에, 바닥에 떨어졌던 종이 인형은 뭔가를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의 인력에 따라 이쪽으로 굴러오다가 슬라르한의 손에 닿았다.
종이 인형은 이리저리 찢겨 너덜거렸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슬라르한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주…… 인님…….”
그의 품에서 의식을 잃어가던 일리에가 가까스로 슬라르한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일리에는 그녀만이 슬라르한의 각성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했던 세이렌을 떠올리며 용서를 빌었다.
‘미안해요.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아요.’
지금의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아는 그와는 너무나 달랐다. 짙은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 웃음기 없는 얼굴, 차가운 체온…….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슬라르한의 모습에, 일리에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짙은 슬픔을 느꼈다.
슬라르한이 저를 품에 안고서도 공허의 문을 열어버린 것을 보면 애초에 자신 따위가 슬라르한의 빗장이 되어줄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는데 결국 슬라르한은 리카온으로 각성했고, 이제 이 세상에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악마의 하수인들이 활개 칠 테고, 인간의 역사는 하찮은 게 되어버릴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멸망하고, 살아 있는 것들은 비참해질 것이다.
이젠 모든 게 끝이었다.
끝…….
‘잠깐. 이게 끝이라고?’
불쑥 반항적인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다 끝나 버렸다기엔, 이 상황이 너무나 싸구려 촌극 같았다.
이런 끝을 보자고 자신이 지난 3년여간 그 고생을 해왔던 게 아니다. 그를 황제로 만들려고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야만인들에게 잡혀가기도 했는데, 결국 이런 결말이라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을 번쩍 뜬 일리에는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 끌어내어 슬라르한의 멱살을 잡았다. 멱살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일리에는 이를 악물었다.
“야! 정신 차려, 르한! 이 똥멍청아!”
일리에가 바락 소리를 지르는 데도 그는 제 손에 잡힌 종이 인형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정신 차리라고! 마카롱인지 뭔지, 그런 거 되지 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일리에는 이를 악물고 그의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물론 흔들린 쪽은 그가 아니라 일리에였지만 말이다.
“나 때문에, 나 살리려고 시간을 되돌렸다며!”
그 마지막 외침에, 슬라르한의 눈동자가 일리에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바라지도 않는데 날 살려놓고는, 고작 이따위 결말이야? 너, 죽을래? 망할 새끼야!”
“일…….”
슬라르한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지만 일리에는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왕 다시 사는 인생이라면, 행복해져야지! 유한한 목숨 아까워하면서 너만을 위해 열심히 행복하게 살다가 후회 없이 죽어야지! 난…… 난 그러고 싶었다고!”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멱살 쥔 손에 힘을 더 꽉 주며 참아보려 했지만, 갑자기 울컥 솟은 눈물이 뺨을 적셨다.
“너무…… 남들한테만 휘둘린 삶이었잖아. 우리 이제…… 우리만을 위해서 행복하게 살자, 좀! 어? 아무것도 못 느끼고, 모든 걸 다 죽여버리는 그런 허무가 되지 말라고!”
“일……리…….”
“멋대로 시간을 되돌린 주제에 이렇게 막장 짓 저질러 놓고 다 끝내? 누구 맘대로! 난 이렇게 못 죽어! 그러니까 정신 차려, 이 나쁜 놈아!”
“일리……에…….”
일리에는 그제야 슬라르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아 일리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응! 르한! 나, 일리에야. 릴리에트야.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다 좋은데, 멱살은 좀 놔줬으면 좋겠다.”
“……뭐?”
리카온으로 각성한 것치고는 너무나 여상스러운 말투였다.
일리에는 뭔가 좀 이상한 느낌에 코를 훌쩍 들이켜고는 서서히 멱살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슬라르한이 작게 콜록, 하고 기침했다.
“숨넘어갈 뻔했군. 악력이 좋아졌구나, 일리에.”
“……르한?”
“이 종이 인형에 걸린 사술을 푸느라고 집중을 좀 해야 했다.”
“엉?”
일리에가 얼빠진 얼굴로 슬라르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손 쪽으로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그의 왼손에는 까만 연기를 피우며 재가 되어가는 뭔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그동안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군.”
“아, 아니…….”
“뭐, 네 말뜻은 잘 알겠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따위 것들의 왕이라니, 창피해서라도 되어줄 생각 없다.”
슬라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리에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고는 아귀다툼을 벌이는 흑마법사들 쪽을 쳐다보았다.
멀찍이 피해 있던 루트 교 사제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저들끼리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서운 기세로 서로를 잡아 뜯는 흑마법사들에게 다가갈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힘을 휘둘러 연회 홀의 거대한 문을 열고 검대에 달아두었던 신호탄을 꺼내 그대로 바깥으로 날렸다.
펑,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자 어둠의 힘에 정신이 팔렸던 카제야가 고개를 홱 돌렸다.
“리카온 님!”
“르한은 리카롱인지 마카롱인지, 되어줄 생각이 없다니까!”
슬라르한 대신 일리에가 바락 소리쳤다. 슬라르한이 어디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그의 몸통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였다.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혼자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달콤한 마카롱 한 조각을 일리에의 입에 넣어줄 생각을 하다니, 제가 생각해도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멀쩡한 일리에의 모습에 카제야는 자신이 종이 인형을 완전히 갈라놓지 못했음을 깨닫고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당신도 더는 거부하실 수 없을 겁니다. 공허의 문이 열렸으니까요!”
“그 문을 왜 열었는지도 생각해 봤어야지.”
슬라르한은 웃음기를 지우고 자신의 모든 정신을 공허의 문에 집중했다. 아까부터 뭔가를 빨아들이던 공허의 문의 인력이 훨씬 강해졌다.
“으헉…… 이, 이게 뭐야……!”
“안 돼, 안 돼애!”
공허의 문 근처에서 서로 밀치던 흑마법사들이 당황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허의 문이 빨아들이고 있던 것은 이 세상에 퍼진 어둠의 힘이었다.
카제야도 자신이 가진 어둠의 힘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둠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면 흑마법을 쓸 수 없었다.
“안 돼! 이게 어떻게 늘려 놓은 힘인데!”
카제야가 제 힘의 소멸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허우적댔으나 그 힘의 근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
“왜입니까! 왜 동족을 버리고 인간 따위를 선택하시는 겁니까!”
카제야는 마노에게도 느꼈던 똑같은 의문을 슬라르한에게 물었다.
“카제야 히클. 너는 네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좀 오래 살긴 했어도 너는 그저 인간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지. 고약한 힘이 깃들어 있긴 하지만 나도 인간이다.”
“궤변입니다! 이런 힘을 지닌 인간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마법사들은 다 신인가? 마력과 비슷한 신력을 가진 사제들도 다 신이겠군? 그런데 신이 육체와 영혼을 갖고 있던가? 동족이라는 개념은 갖고 있던가? 네가 하는 모든 생각이 바로 인간이기에 나온 생각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나?”
“으으윽…….”
카제야가 이를 악물었다. 슬라르한의 눈에는 그런 모습마저 지극히 인간 같아 보였다. 저런 모습의 인간을 한두 해 봐왔던가.
“너는 결국,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었을 뿐이다. 모든 권력과 힘을 독점해 지배자로 군림하고자 했을 뿐이야. 그게 헛된 일인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슬라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제야는 자신의 남은 힘을 끌어모아 슬라르한에게 살해 저주를 날렸다.
“안 돼!”
일리에는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슬라르한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가슴 한복판으로 곧장 쏘아지던 살해 저주는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공기 중에 파스스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서, 섬찟한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넌 너무 무모해. 도대체 내 심장을 몇 번이나 떨어트릴 셈이냐.”
목소리는 매섭게 타박하는 것 같았지만 일리에를 붙든 팔뚝에는 그녀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서는 자신의 마력이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카제야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왔는데!”
“그건 네 사정이고.”
슬라르한이 피식 웃었다.
저 멀리서부터 성이 들썩들썩 움직이는 것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
“진격! 진격!”
멀리서도 타리크의 우렁찬 목소리는 착각할 수 없었다.
슬라르한은 거의 대부분의 어둠의 힘을 빨아들여 포화된 공허의 문을 천천히 닫기 시작했다.
허공에 열렸던 새카만 구멍이 서서히 작아지는 것을 황망히 바라보던 카제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더니 갑자기 죽어 널브러진 황제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슬라르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슬라르한은 공허의 문을 닫으면서도 여유로워 보였지만 일리에는 그가 나설 틈을 주지 않았다.
“지옥에 가면 엘로르 그 계집애한테 안부나 전해줘. 덕분에 내가 개고생 잘했다고.”
일리에는 허리춤의 바사르를 뽑았다. 카제야가 괴성을 지르며 일리에를 향해 검을 내리쳤지만 그 검은 일리에의 검에도 닿지 않았다. 일리에가 검을 쥔 카제야의 손목 자체를 날려 버렸으니까.
그러고는 일리에가 다시 검의 방향을 비틀어 크게 휘두르자 허공에 피가 흩뿌려지더니 몸 한가운데를 깊게 베인 카제야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 안…… 돼……!”
지나치게 긴 목숨을 이어가던 늙은 흑마법사는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생생한 고통에 오히려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카제야는 꼴딱 넘어가려는 숨을 애써 이어 쉬며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그가 여태 희생시킨 자들의 영혼이 질러대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그 비명 중 하나는 엘로르의 영혼이 질러대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옥에서, 네가 그토록 바라던 악마들과 잘 지내보라고.”
일리에가 이를 바득 갈다가 바사르로 카제야의 목을 내리쳤고, 여태 잘 피해왔던 죽음의 새카만 그림자가 카제야를 집어삼켰다.
200년을 넘게 살았던 카제야 히클의 마지막은, 그렇게나 짧았다.
* * *
기사단을 막던 키메라들이 미묘하게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언제 공격해야 할지 가늠하던 타리크는 슬라르한이 들어간 솔레일 궁 쪽에서 뭔가가 팡 터지는 것을 목격했다.
너무나 익숙한 색깔의 신호탄이었다.
“각하의 신호다! 전군 진격! 진격!”
타리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슬라르한이 신호탄을 쏘았다면 저 안에서는 분명 뭔가 급박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때를 맞춘 듯, 키메라들은 점점 힘을 잃으며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엉뚱한 방향을 보며 입질하는 괴물을 베어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타리크는 이를 악물고 키메라를 베어내며 성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슬라르한의 신호탄을 본 나머지 벤티악 기사단도 와아아, 하는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기 시작했다.
성기사단과 다른 가문의 기사단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황실 기사단을 베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성문을 지키던 그들은 갑자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엉? 디넬 경? ……이게 무슨 난립니까?”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벅이는 그들의 모습에, 타리크는 얼마 전에 슬라르한에게 들은 ‘정신 지배’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성의 기사들이나 사용인들이 그 정신 지배라는 것에 걸려든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많은 인원이 반역이나 다름없는 엘로르의 행위에 고분고분 따랐을 리 없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성안에 황제 폐하와 벤티악 공작 각하께서 흑마법사들에게 잡혀 있습니다!”
“예?”
황실 기사들은 더 이상 놀랄 수 없을 만큼 혼비백산했다.
대부분은 대충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경악하여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느라 정신없었지만, 타리크는 그들 하나하나를 붙들어 상황 설명을 해줄 틈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 진격해 솔레일 궁의 홀로 달렸다.
제발 늦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것이 슬라르한 걱정이라는 걸 슬라르한이 직접 확인시켜 주었다.
타리크를 위시한 기사단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슬라르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좌우를 가리켜 루트 사제들과 힘을 잃은 흑마법사들을 포박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곁에는 피 묻은 검을 들고 씩씩대는 일리에가 서 있었고 바닥에는 황제와 엘로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기는 했지만 타리크로서는 ‘잘 됐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흑마법사들은 자신이 아는 공격 마법을 몇 번이고 외워봤지만 그들이 완전히 힘을 잃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고, 우왕좌왕하던 루트 사제들 역시 서슬 퍼런 기사들의 기세에 눌려 줄줄이 밧줄에 묶였다.
주변이 정리되자 홀의 한가운데 남은 건 황제와 엘로르의 시체뿐이었다.
“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누군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슬라르한이 황제와 황녀를 둘 다 죽인 게 아니냐는 의혹이 담긴 질문이었다.
그러나 타리크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 만세! 파르디나스를 영광의 길로 인도하소서!”
커다란 홀에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 순간, 다른 이들도 상황 파악을 끝냈다.
지금 와서 반역이냐, 아니냐를 따진다고 무슨 소용 있을까.
슬라르한은 전 황제와 황제 후보 평가 위원회가 인정한 황위 후계자였고, 전 황제는 붕어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파르디나스 제국의 새 황제였다.
그를 구하기 위해 솔레일 궁으로 짓쳐 들었던 기사들과 황실 기사들, 그리고 이제야 갓 정신 지배에서 풀려 혼란스러워하던 궁내 사용인들까지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새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파르디나스를 영광의 길로 인도하소서!”
도미노가 흩어지듯 슬라르한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멀어지는 곳까지, 새 황제를 맞는 인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슬라르한은 파문의 중심에 서서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리 황제가 될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당황스럽거나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해치워야 할 일이 또 하나 그의 앞에 던져진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조아린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조금 떨어진 문간에서 저를 바라보는 일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와중에 그녀만 고개를 들고 있어서 금세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지그시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오랜 싸움이 비로소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축하해.’
일리에가 입술만 움직여 축하 인사를 건넸다.
슬라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에는 아마 이로써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슬라르한에게는 이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군.’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새 황제 등극 요청을 받아들였다.
* * *
슬라르한은 빠르게 혼란을 정리하고 나섰다.
선 황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죽어 거기에 대한 진상 조사단이 꾸려지기는 했지만, 흑마법사가 빙의한 엘로르에 의해 죽었다는 그의 진술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루트 교 사제들과 힘을 잃은 흑마법사들의 증언 역시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라르한이 리카온이며 공허의 문을 열었다는 그들의 증언은 채택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일이었거니와, 슬라르한이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기 때문이다.
다들 그 이상 파고들지 않고 모든 사건을 정리했다.
하지만 슬라르한의 리카온 각성과 공허의 문이 열리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알고 있었던 일리에는 나중에 슬쩍 슬라르한에게 물었다.
“그때, 어떻게 된 거였어요? 저는 주인님이 정말로 그 리카온인가 뭔가가 되시는 줄로만 알았다고요. 공허의 문도 완전히 열려 버린 것 같았고…….”
그러자 슬라르한이 피식 웃으며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나도 모르고 있었다만, 엘룬께서 내게 아주 강력한 축복을 내려주셨더구나.”
일리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슬라르한은 그저 웃었다.
그로서도 아찔했던 그날의 기억은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리에가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 역시도 자신이 각성했다고 여겼다.
심장이 멎은 것 같았고, 눈앞의 모든 게 천천히 흘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여태 애쓰며 막아두었던 공허의 문이 완전히 개방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그 막대한 힘에도 슬라르한은 아무런 기쁨도, 쾌락도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게 다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까지 굴러온 종이 인형에서 미약한 사술을 느낀 순간, 그는 정신을 차렸다. 만약 인형에 걸린 저주가 완성되어 일리에가 죽었다면 사술 역시도 느껴질 리 없었다. 사술이 남았다는 건 아직 일리에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슬라르한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종이 인형의 사술을 풀면서 그 사술이 일으킨 피해를 복구시켜 나갔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리는 것이라 상당한 집중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일이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일리에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리에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저에게 ‘유한한 목숨 아까워하며 열심히 행복하게 살다가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이하자.’며 호소했다.
그녀가 최선을 다해 살고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래서 그녀가 행복하다면, 슬라르한에게도 일리에의 죽음이 더는 공포가 아닐 터였다. 슬라르한의 새로운 목표가 세워지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슬라르한은 자신이 공허의 힘을 완전히 통제하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지만 일리에의 두 눈동자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리에는 엘룬이 그에게 내린 최대의 축복이자 완벽한 빗장이었다. 그녀가 그를 붙들어주었기에 그는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일리에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각성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던 것이다.
“정말이지, 엘룬도 짓궂으시다니까.”
일리에가 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슬라르한은 그녀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 * *
사상 초유의 난리가 일단락되자 황궁에서는 황제의 국장 먼저 치르고 대관식을 열기로 했다.
하지만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슬라르한은 황궁의 임시 집무실에서 쏟아지는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었다. 물론 그의 능력이 출중한 덕분에 정세는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그런 소식들을 전해 들으며, 일리에는 자신이 맡은 일을 다 해냈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졌다.
막판에 아찔한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슬라르한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해 냈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파르디나스의 성군으로 기록될 치세를 펼쳐나갈 것이다.
“드디어 다 끝났네.”
막연히 ‘모든 일이 다 끝나면’ 떠나자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았다.
일리에는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설마, 여태 내가 한 일이 4천5백만 페르소 어치도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지?’
문득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리에는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튼튼한 가방을 하나 사기로 했다. 혼자 나가려고 했는데 집사에게 외출을 허락받다가 베델과 마주쳐서 베델도 함께 가게 되었다.
“가방? 무슨 가방?”
가방을 사러 간다는 말에 베델이 사과를 와삭 씹어 먹다가 되물었다.
“짐가방이요.”
“짐가방? 왜?”
“짐가방을 뭐하러 사겠어요? 짐 싸려고 사지.”
“너…… 어디 가냐?”
일리에는 그저 웃었다. 하지만 베델도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서, 그녀가 곧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인님이 과연 널 보내주시기는 할까?”
“약속한 게 있어요. 그분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니까, 보내주실 거예요.”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 없는 일리에의 모습에 베델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야. 어딜 가려고 그래? 이제까지 고생한 대가를 받아야지. 여기서 좋은 집도 사고, 하인도 부리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라고.”
“으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미 그렇게 살아봤다. 그리고 그게 행복한 삶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일리에는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더는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따르는 삶이 아닌, 그저 제 마음 가는 대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일리에가 튼튼하고 가벼운 가죽 가방을 앞뒤로 살피는 동안, 베델이 또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로 주인님 안 보고 살 수 있어? 주인님 좋아하잖아.”
“……좋아하니까 떠나는 거예요.”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저는 그다지 착한 인간이 못 돼서요. 주인님을 좋아하는데, 그리고 제가 그분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아는데, 그분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꼴은 또 못 보겠거든요.”
“아…….”
“지금 떠나지 않으면, 그분이 다른 사람과 행복한 모습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 꼴까지 보고 떠나게 될 거예요. 언젠가 떠나게 될 거라면, 차라리 마음 아픈 꼴 안 보고 지금 떠나는 게 낫잖아요.”
베델은 뭐라고 더 말려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는 못했다.
일리에의 말이 맞았다.
슬라르한도 일리에를 아끼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제국의 황제가 루벨파스트 노예 출신의 심부름꾼과 결혼할 리는 없었다.
그가 일리에와 결혼하고 싶어 하더라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실의 모두가 들고일어나 반대할 것이다.
“야…… 그럼 그냥…… 내 밑에 들어와서 일하지 않을래?”
“네? 베델 님 밑에서 일을 하라니요?”
“내가 사실은, 정보 길드를 운영하고 있거든. <황금 갈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예? 베델 님이 <황금 갈퀴>의 길드장이라는 말씀이세요?”
“어어…….”
일리에는 입을 쩍 벌린 채 잠깐 굳었다. 황금 갈퀴라면 전생에서도 여러 번 들어봤던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였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가 참 여러 가지 일들을 잘도 안다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는 너무 자연스럽게 얘길 해서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길 가다 우연히 주워들을 법한 정보는 아니었다.
“어쩐지…….”
“그동안 숨겨서 미안. 우리 일이라는 게 좀 그래.”
“주인님도 알고 계시고요?”
“응. 살면서 처음으로 들켰지.”
“와…… 우리 주인님 대단하시네.”
일리에가 키득거렸다.
“어쨌든,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 없냐고.”
“수도에서 살라고 하는 말씀이라면 거절합니다. 당분간은 한적한 시골에 박혀서 유유자적 살 거예요.”
베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리에에게 신경을 더 쓰는 거였다. 그 역시도 슬라르한이 이렇게 갑작스레 황제가 될 줄 몰랐고, 일리에가 이렇게 갑작스레 떠날 줄도 몰랐다.
남의 일은 잘도 짐작하면서 정작 제 가까운 곳의 일은 예상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 참 무능하게 느껴졌다.
“난, 너…… 보고 싶을 것 같은데.”
“편지할게요.”
“편지로는 얼굴을 못 보잖아.”
괜히 칭얼대는 베델에게 일리에는 담담히 웃어 보이며 한마디 했다.
“미안해요.”
“그……!”
거기다 대고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베델은 답답한 입만 어물거리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미 일리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고, 자신은 그 마음에 균열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일리에에게 스며들지 못했다.
“꼭 편지해.”
그러니 이따위 말이나 하고 나자빠진 것이다.
일리에는 그의 붉어진 뺨과 귓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베델의 취향이 정말 유별나다고 생각하면서…….
* * *
슬라르한이 황제로 등극한 이래 벤티악 저택은 내내 분주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정신없었다.
선 황제의 장례도 끝나고, 각국의 사절 맞이도 성공적으로 해낸 슬라르한이 대관식이 있기 전 마지막으로 저택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는 건 벤티악 공작 부인으로 복권된 세이렌이었다. 슬라르한이 황제가 되고서야 자신이 집에 돌아왔음을 알릴 수 있었던 비운의 안주인이었지만, 그녀는 전에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모두가 부산한 와중에 일리에만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슬라르한의 심부름꾼이었던 그녀의 위치는 아직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함부로 일을 시킬 수 없었고, 수도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일리에도 괜히 남들과 정 쌓을 일을 만들지 않았다.
일리에는 벤티악 저택을 둘러보며 지난 3년간의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여기서 훈련하다가 이상한 오해를 샀었지?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네.’
연무장 근처의 창고를 보며 일리에는 혼자 피식거리며 웃었다.
“너 지금…… 우는 거냐?”
당황하던 슬라르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쩔 줄을 모르다가 조심스럽게 제 어깨를 토닥거리던 모습도, 더 잘하고 싶으냐며 검술 훈련을 봐주겠다고 했던 것도, 연습용 목검에 자신의 사인을 새겨 건네주던 것도…….
겉모습이 사근사근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슬라르한은 참 다정했다.
‘누가 노예 따위의 검술을 눈여겨보겠어?’
다른 사람이었으면 자신의 검술을 본 게 아니라, 노예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만을 주목했을 것이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비어 있는 연무장을 설렁설렁 걸어 다니다가 대련용 허수아비들이 선 곳에 다다르자 또 걸음이 멈추었다.
겨울맞이 연회가 있던 밤, 그가 누구와 첫 춤을 출까 생각하다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무작정 이곳으로 나왔었다.
왠지 분한 기분에, 죄 없는 허수아비만 때려대면서 마음을 달랬는데 갑자기 슬라르한이 나타났다.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늦은 시간은 위험해.”
자신을 걱정해 주던 그 목소리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그러다가……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이 제 뺨을 쓸다가 감쌌다.
그때는 정말로 그가 키스할 줄 알았다.
‘지금도 이상하단 말이지. 내가 몇 초간 정신을 놨던 것 같아.’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았다. 구름에 달이 가려서 사방이 캄캄했으니까.
그의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졌던 것은 어쩌면 저만의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 하나, 하나를 다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저만의 착각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렸던 건 사실이므로.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짐들이 다 정리되어 어쩐지 텅 비어 보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일리에는 방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폈다.
녹스라도 있었다면 덜 쓸쓸해 보였을 텐데, 세이렌이 정신을 차린 이후로 녹스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왠지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그러기로 되어 있었던 일처럼…….
일리에는 녹스가 긁어서 생긴 창문틀의 흠을 만지작거리며 창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 방에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황궁에서 아이르델의 유품을 찾다가 흠씬 채찍질 당하고는 끙끙 앓던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슬라르한이 저에게 피를 먹이며 돌보고 있었다.
“건방진 노예구나.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혼몽한 상태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했다. 분명 저를 타박하는 내용이었는데도 어딘지 웃음기를 머금은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는, 아이르델의 유품을 되찾았다는 것보다 그 때문에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그 일뿐만이 아니었다.
이 방에서는 슬라르한에게 노래 선물도 줬었다.
별것도 아닌 유행가를 불러줬을 뿐인데, 그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기뻐해 줬다.
불러달라고만 하면 얼마든지 더 불러줄 수 있는데…….
일리에는 그런 추억들을 곱씹다가 테이블 옆 의자에 올려 둔 자신의 짐가방을 쳐다보았다.
짐이라 봐야 많지도 않았다. 옷가지 몇 벌, 식기 몇 개, 신발 한 켤레, 수건 넉 장, 모아둔 돈 조금이 전부였다.
사실 슬라르한의 곁에 계속 있고 싶다는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슬라르한이 너무 좋았고, 그가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황제가 되는지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저와 멀어질 것이다. 저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고, 그의 곁에 붙어 있을수록 그의 오점이 될 인생이었다.
어쩌면 과거의 일로 그가 저와의 지저분한 염문설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그러길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라르한이 어떤 아름다운 귀족 영애와 그림 같은 쌍을 이뤄 모두의 찬사를 받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거기다가 축복을 빌어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못 되었다.
‘더 생각하지 말자. 미련 없이 떠나는 거야.’
일리에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서도 딱 한 번만, 슬라르한과 입 맞춰봤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슬라르한이 벤티악 저택에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었다. 이제 그의 집은 황궁이었고, 벤티악 공작 저에는 몇 가지 일들을 정리하러 들른 것뿐이었으니까.
슬라르한은 어머니와 기쁜 포옹을 나누었고 오랫동안 일한 가신들과 가슴 뜨거운 인사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중요한 일들을 처리했고, 벤티악 가의 모든 사용인들이 참석한 만찬 자리에서 진심을 담아 그들의 공로를 치하해 몇몇 오래된 가신의 눈물을 뽑아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벽한 하루였다.
그러나 슬라르한 본인은 저택에 도착한 내내 조바심 나는 마음을 억누르느라 꽤나 애를 썼다.
그리고 간신히 창밖이 어두워질 때쯤이 되어서야 자신이 정말로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을 제 방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일리에!”
그의 반가운 목소리에 일리에가 대답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근 한 달 만에 만나는 일리에였다. 일리에와 함께한 이래 이토록 오래 떨어져 본 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일리에를 와락 끌어안았다. 일리에를 안는 게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건만, 이 단단하면서도 늘씬한 몸의 감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황궁은 숨이 막혀. 너나 타리크도 곁에 둘 수 없고, 바늘 꽂을 빈틈 하나 없는 꼬장꼬장한 시종장이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대니.”
“그건 시종장님 얘기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분은 분명 주인님께서 이제야 갓 황제가 되신 분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르실걸요?”
“뭐, 선대 황제보다야 훨씬 낫기는 하겠지.”
두 사람은 꼭 껴안은 그 상태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보통은 침통한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선 황제 국장이었지만, 이번 국장의 분위기는 역사에 유례없을 만큼 밝았다.
물론 황궁에서는 ‘체통’을 위해 짐짓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긴 했지만, 드디어 무능한 황제가 죽었다고 다들 기뻐했다.
“다른 황족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황후와 황비들은 뒷방 신세가 되었지. 아이리스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독신을 선언하고 궁 밖의 저택을 얻어 살겠다더군. 2황녀 루리아는 그동안 거절하던 르부이에 백작 후계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 같고, 라반과 타리스는 제 어미 곁에 있다가 결혼 후에 적당한 작위를 하나 얻은 뒤 궁을 나가겠지. 라리에트는 올해 말쯤 피델로의 막내 왕자와 약혼식을 올릴 것 같고.”
대부분 예상하던 대로였으나 아이리스의 행보가 조금 의외였다. 전생에서도 이든이 아이리스를 칼브림에서 지켰기에 이든을 살려둔 것이었지만, 둘이 나가서 살지는 않았는데…….
일리에는 그가 놓아줄 때까지 그저 가만히 안겨 있다가 그가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떼자 그제야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사실, 주인님이 오신다고 해서 저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슬라르한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 일리에가 하겠다는 말이 그다지 즐거운 내용일 것 같지가 않았다.
“주인님. 이제…… 미뤄뒀던 정산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일리에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슬라르한은 숨이 턱 막혔다.
무엇에 대한 정산인지는 되묻지 않아도 뻔했다. 둘 사이에 계산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사실 일리에가 잊고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맹랑하고 해맑은 심부름꾼은 겉보기와는 달리 계산이 철저했다.
“그래…… 해야지…….”
“제 몸값 4천5백만 페르소 중에, 제가 중간까지 정산했던 것은 3,125만 페르소였습니다. 1,375만 페르소가 남았었는데…… 주인님께서 황제 폐하가 되시기까지 제가 했던 일이 그 정도는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도 깎는 것 없이 철저한 계산에 슬라르한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고작 1,375만 페르소 어치밖에 안 됐을까. 오히려 네 몸값을 제하다가도 차고 넘칠 정도로 공이 커서 내가 너에게 뭔가 돌려줘야 할 것 같다. 무엇을 원해도 좋아. 작위, 저택, 돈이나 보석, 무엇이든 다 줄 수 있다.”
슬라르한의 목소리는 조급하고 초조하게 들렸다. 황제가 되었어도 자신에게는 일리에를 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진 탓이다.
차라리 일리에가 황제 자리를 달라고 했으면 더 쉬웠을 텐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일리에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더니 몇 번이나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갖고 싶은 걸 가져가도 되나요?”
슬라르한은 일리에가 갖고 싶은 걸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은 데 절망했다. 일리에는 조금도 여기에 머물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도리는 없었다.
“뭐든지.”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중에 하나를 가져가고 싶은데…… 제가 가져가는 걸 주인님께서 빤히 보고 계시면 너무 창피할 것 같거든요. 잠깐만 눈 감아 주시면 제가 그걸…… 가져오고 싶은데요. 아, 무, 물론! 주인님께서 눈 뜨셔도 제가 뭘 가져갔는지 모를 정도로 사소한 거, 하나만…… 가져갈게요.”
뭔가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가져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슬라르한은 끝까지 귀여운 일리에의 태도에 가슴이 아플 정도로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이 방에 일리에가 탐낼 만한 게 뭐가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보던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에 다가와 마주 붙는 촉촉한 입술을 느꼈다. 눈을 감아달라는 일리에의 부탁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숨을 멈춘 그에게서, 일리에도 곧 입술을 떼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슬라르한의 시선에 일리에의 뺨이 새빨개졌다.
“이거면…… 되거든요.”
일리에는 괜히 흠흠, 하는 소리를 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이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슬라르한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어…… 주인님, 화…… 나셨어요?”
“황당하군. 네가 얼마나 비싼 것을 가져갔는지 알고 있나?”
“예……?”
“난 더 이상 벤티악 공작도 아닌, 대 파르디나스 제국의 황제다. 심지어 난…… 아직까지 누구와도 입 맞춰본 적이 없거든.”
“예에?”
“그렇게까지 놀라니 더 불쾌하군.”
일리에의 얼굴이 빨개졌다가 곧장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루벨파스트 노예 출신의 평민 계집이, 황제의 첫 키스를 빼앗아 버렸다!
“죄, 죄, 죄송합니다! 정말, 저는 그럴 줄은 몰라서……! 죄송합니다!”
슬라르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갔으니, 내가 또 거슬러 받아야겠다.”
“네……?”
일리에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훅 끼치는 것 같더니 일리에의 입술이 그에게 먹혔다.
“흐읍!”
가벼운 키스였던 제 것과는 달리, 슬라르한의 키스는 너무 뜨겁고 너무 아찔했다.
입술만을 탐하던 그는 일리에가 숨을 쉬느라 입을 벌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침범해 들어왔다.
일리에는 자신의 뇌가 익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주하고 있는 것 입술과 혀일 뿐인데 왜 머리가 끓어 넘치는 것 같은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 키스를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잠자리를 안 가져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슬라르한과 하는 입맞춤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다 달랐다.
일리에는 저도 모르게 슬라르한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이대로 그와 입을 맞춘 채 영원히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했다.
두 입술과 혀는 서로 질척하게 얽혔다가 새처럼 쪼았고, 그러다가 또 진득하니 맞붙었다.
그러다 일리에는 자신이 어느 틈엔가 슬라르한의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지 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슬라르한이 속삭였다.
“주인님…….”
“제발 가지 마, 일리에. 내 옆에 있어. 너 없이 지난 한 달을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달라는 것은 다 줄 테니 여기 있어, 일리에…….”
“하지만…….”
부정적인 단어가 흘러나오자 슬라르한은 또다시 자신의 입술로 일리에의 입을 막아버렸다.
“르한…….”
“사랑해, 일리에.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 못 믿겠다면 내 심장을 꺼내서 보여줄게. 가지 마…… 제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입맞춤과 애원에 일리에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아주 오래전 이 장면을 꿈꿨던 게 기억났다.
저에게 뭔가를 애원하며 입 맞추던 슬라르한과 그저 울기만 하던 자신을 꿈꿨었다. 그때는 별 민망한 꿈을 다 꾼다며 무시했는데, 이런 이별을 예지하는 꿈이었다니…….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뺨을 감싸 쥐고 그의 체온을 제 입술에 각인했다. 그의 체향, 그의 뺨과 머리칼의 감촉, 그가 숨 쉬는 온도,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도 사랑해요, 르한.”
“일리에…….”
“지금은 우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일리에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도 해사하게 웃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에만 모든 힘을 쏟고 싶어요. 나머지는 내일…… 내일 생각하기로 해요.”
일리에의 조용한 타이름에 슬라르한은 곧바로 일리에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목덜미를 간질이고, 그의 손이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는 걸 느끼면서 일리에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사랑하는 이의 품은 이렇게나 기쁘고 슬픈 것이었다.
**
창밖에는 새벽 동이 아스라이 터오고 있었다.
일리에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간밤의 정사로 제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았지만, 일리에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켜 간단히 씻고 제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랬는데도 제 몸에서 슬라르한의 살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일리에는 제 팔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다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호박색 아티팩트가 줄줄이 엮인 팔찌가 달려 있었다. 간밤에 정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가 잊어버릴세라 그녀에게 채워준 것이었다.
“중경상 이상의 신체적 피해를 무효화하는 아티팩트야. 미리 주고 싶었는데 완성이 좀 늦어져서…… 혹시라도 네가…… 아플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그렇게나 제가 아플까 봐 걱정하더니, 막상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짐승처럼 저를 몰아붙였다.
그렇다고 그게 힘에 부쳤다거나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끝내줬지.’
전생의 기억을 뒤져봐도 이렇게나 끝내주는 밤은 처음이었다. 그 덕분인지 슬라르한은 그녀가 침대에서 빠져나올 때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일리에에게는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다.
일리에는 간밤의 기억을 되새기며 열 오른 얼굴에 손부채를 파닥이다가 크게 심호흡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열어 복도로 나왔다.
어제저녁 만찬에 포도주가 넉넉히 풀렸다더니, 커다란 벤티악 공작 저 전체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인사는…… 남기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일리에는 벤티악 공작 저만의 서늘한 냄새를 맡다가 조용히 걸음을 옮겨 마구간으로 내려갔다.
말은 어제 미리 준비해 뒀다.
‘일찍 깨우는 게 미안하니까 사과 한 알 정도는 미리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구간으로 다가가는데, 거기에는 거구의 남자 하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그를 보고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냐?”
“타리크 님…….”
“쯧. 진짜 가려나 보네.”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거예요?”
“밤새웠다. 왜?”
황당했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진짜 가야겠냐?”
하얀 입김이 어두운 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일리에는 얼어버린 듯 잘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겨우 위로 끌어올렸다.
“제가 여기 남아서 뭐 하게요?”
“폐하께서는 네게 진심이야. 절대 소홀히 대하지 않으실 거다.”
“알아요.”
“아는데 왜? 네 녀석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은 하지 마라.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타리크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 했는데,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제가 그걸 왜 부정해요? 부정할 생각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떠나는 이유는…… 제 사랑이 죽어가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뭐? 야, 쪼끄만 게 심각한 척하지 말고……!”
“주인님이 절 사랑하시면, 저랑 결혼이라도 해주실 수 있대요?”
“뭐……?”
“타리크 님은 거기에 찬성할 수 있어요? 제가 황후감인가요?”
타리크의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정부로 살아도 만족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일리에도 타리크의 속내를 다 눈치챈 모양이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시죠? 감히 말도 안 되는 걸 바란다고…… 하지만 어쩌겠어요? 사랑은 누구랑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타리크도 일리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란 것의 속성이 그랬다.
저 역시 제 사랑을 누군가와 나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데, 일리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었다.
하지만 일리에가 슬라르한과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기란 불가능했고, 황후가 될 사람이 슬라르한의 정부를 가만히 놔둘지도 의문이었다.
타리크는 결국 일리에의 입장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한 손에 쥐고 있었던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이거…… 갖고 가라.”
“이게 뭔데요?”
일리에는 타리크가 건네준 주머니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그의 앞에서 주머니를 풀어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넉넉한 돈과 지도, 보석 몇 개가 들어있었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예요?”
“몰라, 인마. 폐하께서 너 주라고 하신 거니까.”
“예? 주인님께서요?”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떠날 걸, 그분은 알고 계셨던 모양이지.”
일리에는 말문이 막혀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제 손에 잡은 주머니를 하염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슬라르한이 이걸 챙기면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떠올리자 제 가슴이 다 아팠다.
다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일리에는 이를 앙다물고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타리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타리크에게도 크게 허리 숙여 꾸벅 인사한 일리에는 준비해 두었던 말을 끌고 나와 안장 위에 올라탔다.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조심히 가라…….”
일리에는 착잡한 표정의 타리크에게 작게 미소 지어 준 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길을 향해 가볍게 말을 몰았다.
미련 한 톨 남기지 않은 가벼운 그 뒷모습을, 슬라르한은 2층 창문에 붙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먹은 마디가 희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돌아보아 줄 이 없는 서러운 한숨이 언 창을 뿌옇게 물들였다.
* * *
수도 한참 북쪽의 산촌 메이요른에는 젊은이가 많지 않았다.
양이나 치고, 버섯과 땔감, 산딸기 같은 야생 열매를 해다가 파는 마을이었기에 젊은이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따분했다.
그런 메이요른에 3년 전 찾아온 젊은 아가씨는 그들 기준으로 보자면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다.
기껏 해봐야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 어린 아가씨였는데, 그녀는 바지를 입고 검을 찬 채 나타나 사람들을 놀래더니 다음 날 마을의 괜찮은 집 하나를 일시불로 사버려서 더 놀라게 했다.
돈이 많은 아가씬가 했더니, 그다음 날부터는 또 양치기 일을 배운다며 마을의 노인들을 귀찮게 했다.
하지만 일머리 좋은 아가씨라 그런지, 그녀는 금방 양 치는 법을 배웠다.
심지어 저 체격에서 어찌 저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장작 패는 것도 잘했다.
덕분에 그녀가 메이요른에 들어와 산 지 반년이 안 됐을 때부터 메이요른 사람들은 그녀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어이, 일리에!”
“네, 글리스 아저씨!”
“이것 좀 먹고 해라.”
양들을 풀어놓고 풀밭에 드러누워 떠다니는 구름만 바라보던 일리에는 거친 숨을 쉬며 이쪽으로 올라오는 사내에게 냉큼 달려가 그가 건네는 갓 찐 감자 두 덩이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따끈할 때 먹어. 이건 데운 양젖.”
“우와! 오늘 점심이 너무 호화로운데요?”
“으이그. 너무 늦지 않게 양들 몰고 들어와.”
“네, 알겠습니다!”
오늘의 양떼 주인인 글리스는 아저씨라고는 불리지만 이미 60대에 접어든 남자였다.
다리 한쪽이 불편해서 일리에에게 자주 양을 맡기는 귀중한 고객이었는데, 그의 양을 맡을 때마다 이렇게 점심도 얻어먹곤 했다.
다시 목책 옆에 주저앉은 일리에는 아직 김이 풀풀 날리는 따끈한 양젖을 홀짝이다가 뜨끈한 감자를 반 갈라 호호 불며 한 입 베어 물었다.
“핫, 뜨거, 뜨거! 후…….”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소금을 넣고 쪘는지, 따로 소금을 찍지 않았는데도 약간 짭조름하니 맛있었다.
“하아…… 벌써 3년이나 됐네.”
새해만 되면 슬라르한이 떠올랐다.
1월 중순이 그의 생일이기도 했거니와, 그를 떠나온 날도 이즈음이었기 때문이다.
슬라르한과의 뜨겁고 가슴 아픈 밤을 보낸 뒤 그대로 수도를 떠나 메이요른으로 온 게 벌써 3년 전이었다.
외지인을 배척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메이요른 사람들은 일리에를 잘 받아들여 줬다.
마을에 젊은이가 별로 없는 탓도 있었지만, 그들이 순박한 덕분이기도 했다.
일리에는 여기서 그녀가 그렇게 바랐던 대로 복잡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 지극히 평온한 삶을 살았다.
물론 전생의 일이나 이번 생의 일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왠지 다 꿈처럼 느껴졌다.
검불이나 묻히고 다니는 자신이 그렇게 빛나는 사람을 도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이다.
간간이, 그가 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꽤 자주, 꽤 심하게 보고 싶었다.
아직도 어두운 침실에서 저를 내려다보던 그 뜨거운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르한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메이요른에 온 이후 일부러 수도의 소식에는 귀를 닫고 살았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역대 황제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치적을 쌓고 있을 것이다.
일리에는 다시 흰 구름이 떠다니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을 잡을 듯이 뻗은 손목에, 호박색 아티팩트들이 조롱조롱 엮인 팔찌가 반짝였다. 이미 몇 개는 빛을 잃은 채였다.
일리에는 빛을 잃은 아티팩트를 바라보다가 다시 양젖을 담은 통을 집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에 젖어 괜히 헛헛해지느니, 따끈할 때 얼른 점심을 해치우는 편이 생산적이었다.
* * *
산골에 있는 메이요른은 상점이 없었다. 메이요른 사람들이 생필품을 구하는 곳은 보름에 한 번 산 아래에서 열리는 시장이었다.
그날을 위해 메이요른 사람들은 보름 동안 부지런히 나무를 해다 땔감으로 만들고, 양털을 깎고, 버섯을 땄다.
일리에도 이번 장에는 내려가서 밀가루와 이스트, 말린 과일 같은 것을 사고, 가죽 신발 제작도 의뢰해야 했다.
“두 달만인가?”
혼자 살면서는 필요한 게 많지 않아 보통은 시장에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부탁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신발을 주문해야 했기 때문에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들른 시장은 한 시간이나 말을 타고 내려온 보람이 있게도 활기차고 재미있었다.
일리에는 비상식량으로 산 육포 한 줄기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시장 구경을 했다.
내려오자마자 신발은 주문했고, 말린 과일과 육포도 샀고, 조금 이따가 밀가루만 한 포대 사면 될 것 같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다니던 일리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응? 뭐 재미있는 거 하나?”
가끔 광대들이 공연을 펼치거나 이야기꾼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할 때도 있어서 일리에는 잔뜩 기대하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광대도, 이야기꾼도 아니었다.
황실에서 전국의 작은 마을에까지 다 뿌린 방문이었다.
-금일(제국력 899년 1월 15일), 제18대 황제 슬라르한 벤티악 솔렌으로부터 황위를 양위받으신 엘란츠 멜바란 솔렌께서 제19대 황제로 즉위하셨으며…….
그 뒤로 무슨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 것 같았지만 일리에는 앞의 두어 줄이 이해되지 않아 뒤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뭐? 슬라르한이…… 황제 자리를 엘란츠한테 양위해? 왜……?’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 흩어진 뒤에도 방문 앞에 서서 혼자 그 글을 몇 번이고 읽어봤지만, 양위에 관해서는 다른 말이 없었다.
일리에는 주변 상인을 붙들고 물었다.
“저기…… 제가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와서 그러는데요. 왜 황위가 양위되는 거래요?”
“어? 글쎄. 높으신 분들 사정을 우리가 아나. 하하하!”
다른 상인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는 오랜만의 시장 구경이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일리에는 주변을 구경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예정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산길을 오르는 내내, 그리고 집에 와서 짐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식사를 만드는 내내 머릿속에서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슬라르한도 이상한 독에 당했다거나…….’
온갖 음모가 판치는 곳이니 슬라르한도 독에 당하지 말란 법 없었다.
자신 역시 황위에 오른 지 1년도 안 되어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일은 라델에라도 가서 알아봐야지.’
라델은 여기서 말을 타고 이틀 정도 걸리는 소도시였는데, 그래도 수도의 일을 전하는 신문이 출간되는 곳이었다.
라델에 가면 분명 앞뒤 일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일리에는 저녁을 먹은 뒤 며칠 집을 비울 준비를 했다. 아직 날이 추우니 음식이 크게 상할 염려는 없었다. 다만, 그 사이에 눈이라도 크게 오면 좀 곤란해서 창문의 덧문을 닫고 갈지, 그냥 갈지 조금 고민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챙기는데 누군가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마을 사람이 찾아오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었다.
‘뭐지?’
그렇다고 도둑이나 강도가 있는 동네도 아니었지만 일리에는 벽에 걸어둔 바사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문에 바짝 다가서서 물었다.
“누구세요?”
밖에서는 곧바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일리에는 바사르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누구시냐니까요?”
“여기가…….”
“예?”
“여기가…… 일리에라는 분이 사는 집이 맞습니까?”
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신데요?”
“저는…….”
그러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일리에가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설마…… 르한……?”
밤이 되면 깜깜해지는 동네라 어두운색 후드 망토까지 뒤집어쓴 그는 어둠에 거의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어내렸다.
눈부신 플래티넘 블론드가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랜만이구나, 일리에.”
일리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놀란 입을 떡 벌리고 그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일리에?”
“미쳤어요?”
처음 터져 나온 소리는 미쳤냐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는데, 그것을 다 제치고 튀어나온 것이었다.
슬라르한은 대뜸 미쳤냐는 소릴 들었는데도 씩 웃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여기서 계속해야 할까?”
그제야 일리에는 몸을 비켜 그를 집안에 들였다. 밖을 더 둘러보았지만 슬라르한을 호위해 온 것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예요?”
“내가 내 피를 먹인 사람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걸, 너보다 잘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일리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일 라델에라도 가볼 생각이었어요. 오늘 제가 아주 이상한 벽보를 봤거든요. 제18대 황제 슬라르한 벤티악 솔렌이 자신의 황위를 엘란츠 멜바란 솔렌에게 넘겼다는 내용이었는데…….”
“아, 그거. 그 소식이 여기는 이제야 퍼졌단 말인가?”
“제가 늦게 봤을 수도 있고요. 오늘 두 달 만에 시장에 내려갔다가 본 거거든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일리에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슬라르한은 꿈에서도 그리던 일리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3년 사이에 어디가 얼마나 변했는지 찾아보는 게 더 급했는데, 일리에는 그의 황제 자리에 관한 내용이 더 급했던 모양이다.
“엘란츠와 연합할 때, 그에게 내건 조건이었지.”
“예?”
“그때 네가 말했었지? 그는 욕심이 있는 사람이니, 적당한 대가를 약속하고 연합을 시도해 보라고.”
“그, 그러기야 했죠.”
“엘란츠 형님께 약속했지. 황위에 오르면 5년 내로 그에게 양위하겠다고.”
“뭐라고요? 아니, 도대체 왜요!”
슬라르한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의 일리에를 보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내가 황제가 되지 않으면 내 사람들이 위험해질 상황이었지만, 사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 그러니 나나 엘란츠 형님이 서로 이득일 수 있는 협정이었지. 그리고 그게, 내가 결혼 동맹을 맺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고.”
그가 컬리넌 후작가의 결혼 동맹을 끝까지 거절했던 이유가 드디어 풀렸다. 물론 그렇다고 속이 시원한 건 아니었다.
“반발이 없었어요?”
“그걸 없게 하려고 지난 3년간 잠도 거의 못 자가며 준비했거든. 좀 벅차긴 했지만 결국 해냈지. 나 자신이 이렇게 자랑스러워 보긴 처음이라니까.”
“하아……!”
슬라르한의 설명을 듣고도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일리에는 제 머리를 몇 번 쳤다. 슬라르한이 그 손을 붙들기 전까지 말이다.
일리에는 제 손목을 붙든 슬라르한에게 버럭 소리쳤다.
“내가 당신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요? 그걸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내팽개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슬라르한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며 말했다.
“너는 황제로 살았던 그 전생이…… 행복했어? 날 황제로 만들었던 것보다 더 고생했을 텐데.”
기습적인 질문에 일리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일리에의 뺨을 쓸던 그의 손가락이 꾹 다물린 일리에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네가 아니면 내 삶에는 의미가 없어. 나한테는 그래. 너와 내가 마음 편히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슬라르한이 지분거리던 손가락 때문에 일리에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슬라르한은 조심스럽게 일리에에게 다가갔다가 그녀의 입술 앞에서 머뭇거렸다. 마치 입 맞춰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았다.
3년 만에 만났어도 그의 향기는 여전했다. 그의 아찔한 눈빛 역시 여전했다.
일리에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일리에의 입술 위에 내려앉다가 뜨겁고 젖은 살덩이가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꿈에서도 그리던 입맞춤이라 일리에는 제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거라고 여기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3년 전과는 달리 갈급하게 굴지 않았다. 천천히, 일리에가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며 다가왔다.
한참 입 맞추던 그가 얼굴을 떼더니 조금 가빠진 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직…… 네 옆이 비었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을까?”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일리에가 코웃음 쳤다.
“들어오자마자 이 집안에 다른 사람 흔적이 있는지 찾아봐 놓고는…….”
“여기 오는 내내 그 걱정밖에 안 했거든.”
“걱정되면 편지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기간을, 너에게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없었어. 매일 밤, 네 곁에 누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긴 했지만.”
일리에도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다시 슬라르한에게 입 맞추었다.
그들은 장작 타는 소리만이 나는 고요한 곳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슬라르한은 3년 사이에 더 성숙해진 일리에를 안으며 거의 이성을 잃었고, 일리에 역시 농밀해진 슬라르한 때문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한참이나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던 그들은 달이 서쪽으로 넘어갈 때쯤이 되어서야 가쁜 숨을 갈무리하며 서로를 껴안고 누웠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 안에서 그동안의 일들을 묻고 확인했다. 메이요른에서 지낸 일리에의 삶에서 놀랄 만한 소식이란 나무를 하다가 구르거나 같은 돌부리에 세 번이나 걸려 넘어져 손목의 아티팩트 몇 개를 날려 먹었다는 것 정도였지만, 슬라르한의 삶은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었다.
일리에를 만나러 떠나기 위해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그는, 엘란츠에게 황위를 양도하며 완벽한 자유를 약속받았다.
일리에는 더 이상 황제도, 공작도 아니게 된 슬라르한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 근육 사이를 손가락으로 내리그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무슨 사이예요?”
“난 네 남편이 되고 싶은데. ……너무 분위기 없는 프러포즈였나?”
“푸흡!”
일리에가 쿡쿡대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뇨. 이것으로 좋아요. 정말이에요.”
아무런 격식도 없이, 그저 서로만이 존재하는 이 순간이 그 어떤 프러포즈보다 완벽하게 느껴졌다.
* * *
뿌우- 하는 증기선 소리가 항구에 울려 퍼졌다.
“승선 마감합니다! 승선 마감!”
“닻을 올려라!”
거대한 증기선이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항구를 채운 사람들이 배에 탄 사람들을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아는 이 하나 없이 둘이서만 배에 오른 슬라르한과 일리에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아기레스, 덴포를 거쳐 피델로로 가는 저희 엘룸 파르디나스 호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배의 선장인…….]
배의 선장이 확성기를 이용해 승선객들에게 인사했다.
“파르디나스를 벗어나 보는 건 처음이에요.”
일리에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꼭 누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일리에와 함께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 슬라르한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대답했다.
일리에는 그런 그의 태도에 쿡쿡대며 웃다가 살그머니 그에게 기댔다.
“라리에트를 만나러 간다니, 너무 설레요. 라리에트가 결혼을 하다니…….”
일리에는 메이요른으로 떠난 뒤로도 간간이 라리에트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슬라르한이 황위에 오른 그해 말, 예정대로 베르트와 약혼했고 올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매번 일리에를 걱정하던 라리에트는, 작년에 슬라르한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일리에에게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고 했다. 그제야 일리에가 자신과 베르트의 약혼 소식에 눈물을 쏟던 기분을 이해했다나.
그 후로 라리에트가 줄기차게 피델로에 놀러 오라고 칭얼대기도 했거니와 그녀의 결혼식만은 놓칠 수 없었기에, 일리에는 메이요른 생활을 정리하고 첫 번째 여행지로 피델로를 선택했다.
처음 파르디나스를 떠나는 것이었지만 일리에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제 곁에 슬라르한이 있고, 둘이 함께 모험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대되었다.
슬라르한의 체온을 느끼며 미소 짓던 일리에가 중얼거렸다.
“난, 자유롭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할 줄 알았어요.”
“이런. 난 어떻게서든 널 찾아 나섰을 텐데…….”
일리에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던 슬라르한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당신과 함께여서 내 자유가 더 커졌어요. 마음껏 사랑하는 자유를 얻었어. 메이요른에서 혼자 지낼 때는 자유로우면서도 늘 외로웠는데, 지금은…… 자유로우면서도 너무나 충만해요.”
“나도 네게 도움이 돼서 다행이군. 난 아주 오래전부터 네 존재만으로도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거든.”
슬라르한의 입매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다가 일리에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사랑해.”
입술 위를 간질이는 고백에 일리에가 다시 미소 지었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플래티넘 블론드가 눈부셨다.
<루벨파스트의 노예,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