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벨파스트의 노예 외전 1
1장 사라진 시간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그리 크지 않은 웅덩이의 수면 위를 스쳤다.
웅덩이 물은 마실 수 있을 것처럼 맑았고 주위에는 대추야자 몇 그루가 푸른 잎사귀를 드리워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그중 제일 잎사귀가 무성한 대추야자 나무 아래, 한 노파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소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낮잠 자는 손녀를 토닥이는 할머니 같았다.
그러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새파란 눈동자와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표정은 보통 사람답지 않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는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영혼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곳을 세심히 골라둔 터였다.
아마 이 영혼은 저를 많이 원망할 테지만, 결국에는 그 뜻을 깨달을 것이다. 그만큼 현명하고 감사할 줄 아는, 그녀가 참 사랑하는 영혼이었으니까.
“어? 오, 오아시스다!”
뜨거운 사막의 바람결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노파는 고개를 들어 그늘이 드리운 사구의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만사에 무심해 보이는 낙타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웬 사내들의 일행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아이를 보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노파는 다시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전생을 떠올려 보았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아마, 탐욕스러운 한 황제가 제 아이들을 황위 경쟁이란 이름의 싸움판으로 몰아넣던 그날일 것이다.
절망의 코앞에 선 한 남자에게 한 소녀가 장난스레 손을 내민 그날.
어둠 속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한 남자가 제 앞에서 팔랑이는 빛에 홀려 버린 그날…….
* * *
오랜 겨울에서 온 제국이 깨어나는 것 같던 그날은 바람에서 봄 냄새가 느껴지던, 제국의 대축연이 열리는 날이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연회인 데다 귀족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행사라 황궁은 어딜 둘러봐도 들뜬 분위기였다.
날씨보다 조금 이르게 얇고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포옹을 나누고, 남자들은 혹독한 겨울을 난 무용담을 떠벌리고 있었다.
봄을 여는 연회로 딱 알맞아 보이는 분위기가 갑자기 경직된 것은 어떤 젊은 남자가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방금까지 큰 소리로 웃고 떠들던 이들이 일시에 입을 닫고 서로 눈짓하며 소곤댔다.
그 갑작스러운 동요에, 달콤해 보이는 옅은 적발을 하나로 묶은 소녀가 연회장에 등장한 그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찬 봄 햇살에 서늘하게 반짝이는 플래티넘 블론드, 위대한 조각가가 빚은 듯한 얼굴, 탄탄하고 커다란 체격과 곧고 바른 자세, 귀족의 예의범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태도…….
놀라울 정도로 귀족의 모범이라 할 만한 남자였다.
‘어? 슬라르한 아닌가? 와…… 옛날에 봤을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전히 눈부시네.’
샴페인을 홀짝이며 7년 만에 만나는 제 사촌을 흘끗대던 릴리에트는 그의 외모에 잠깐 홀렸다가 곧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아무리 황제에게 핍박받는 가문이라 해도 그렇지, 제국의 공작이 연회장에 등장했는데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가 먼저 말을 걸면 아랫사람은 별수 없이 인사를 올려야겠지만, 지금 그의 주변에는 그가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여기서 그 장례식에 조문을 보낸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말이다.
슬라르한 역시 저를 꺼리는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다른 이에게 말을 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릴리에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남들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들 내가 예의 없다는 뒷말은 잘도 하면서, 이게 뭣들 하는 짓이야?”
황제가 벤티악 공작가를 미워하고 탄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벤티악 공작가보다 서열이 낮은 귀족들이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는 늘 품위와 예절 운운하던 인간들의 비겁한 작태에 릴리에트는 속이 다 안 좋아졌다.
그녀는 샴페인 잔을 훌쩍 비우고는 곧장 슬라르한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발견한 슬라르한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을 보고 릴리에트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하지만 우선은 아버지를 잃은 그를 위로하는 게 먼저였기에, 목소리가 너무 가볍게 튀어 나가지 않게 주의하며 말을 걸었다.
“잘 지냈냐고는 못 묻겠네요. ……얘기 들었어요.”
그러고는 다시 한 발짝 더 다가가 속삭였다.
“개망나니 같은 황제 폐하 때문에 벤티악 가에서 너무 고생이 많네요. 돕지 못해서 미안해요.”
순간 슬라르한은 빠르게 주변을 살펴 누군가 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멀찍이들 떨어져 있었다.
슬라르한은 다시 릴리에트를 바라보며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릴리에트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지? 우리가 서로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닌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의 대답을 반역의 증거랍시고 황제에게 일러바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나 릴리에트는 섭섭해하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를 대신해 황제에 대한 험담을 종알댔다.
“그래도 사람인데, 화 나는 게 당연하잖아요. 남인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공작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할 때마다…… 내가 그 인간의 딸이라는 게 미안할 지경이라고요. 친딸이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랄지…….”
처음에는 뜨악했지만 한마디씩 더해질 때마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표현이 조금 거칠기는 해도, 그녀는 진심으로 황제의 폭정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혹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망울 때문인지, 슬라르한은 점점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늦췄다.
의심을 거두고 보니 릴리에트는 황녀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귀족들이 그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황제가 불임이라는 게 판명 난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황손이라는 특권 역시도 바람 앞의 등불이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와 릴리에트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겠군.’
갑자기 왜 그 사실이 떠오른 건지는 모르지만,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던 불편한 기분이 그 생각 하나로 깔끔하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황제와는 완전히 타인이라는 생각이 그녀에 대한 편견을 없앴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의 선의에,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 위로 봄바람 한 줄기가 불어온 것 같았다.
모두가 노골적으로 피하는 걸 뻔히 보면서도 거리낌 없이 다가와 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사실 그동안 너무나 힘들었으니까…….
누구라도, 단 한 명만이라도 황제가 잘못되었다고, 벤티악 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음…… 잘 버티셨다고요. 앞으로는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쑥스러운 듯한 기색이었다.
슬라르한의 시선은 저와 마주치지 못하는 릴리에트의 눈동자를 쫓고 있었다.
‘저렇게 반짝거리는 걸, 어디서 봤더라…….’
매혹당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소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찬란하던 시절의 리벤 호수를 떠올리던 순간, 슬라르한에게 있어 릴리에트는 손에 쥐고 싶은 빛이 되었다.
그때부터 슬라르한은 릴리에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생각은 그날의 기억에만 머물러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가의 힘이 세지 않은 2황비의 둘째이며 문제아라는 소릴 듣는 4황녀라는 것 정도밖에는…….
‘뒷소문이 많다던데, 한번 알아봐야겠어.’
슬라르한은 황녀 릴리에트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맡긴 일이라 의뢰비는 자신의 내탕금으로 해결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돈을 써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한 가지 껄끄러운 점이 있다면, 그가 릴리에트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그의 충실한 보좌관이자 호위 기사인 타리크가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이었다.
“각하께서 하시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차피 황손들도 다 한통속입니다. 괜히 정 주지 마십시오.”
슬라르한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때까지는 그 역시 정을 준다거나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저 작은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다. 황위 경쟁이 선언된 이상 경쟁자를 조사할 필요도 있었고.
조사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받아볼 수 있었다. 여태 황실의 문제아로나 유명했지, 그다지 비밀스럽게 보호받는 존재는 아니었기에 정보를 수집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2황비 다이애나 솔렌의 1남 2녀 중 둘째. 활달하고 직설적. 모친 다이애나 황비와 오빠인 라반 황자와는 사이가 안 좋지만, 동생인 라리에트 황녀는 끔찍이 챙긴다고 함.
-평민의 삶에 관심이 많고 평민 말투를 자주 써 언사가 거친 편.
-필수 수업 불참 및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황손들 중 가장 많은 근신 명령 및 황실 예법 필사 명령을 받았다고 하나 본인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듯.
-12세 때부터 검술을 수련 중.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지는 않았으나 성실한 훈련 덕분에 현재는 하급 기사 수준의 실력으로 추측됨.
-황위 경쟁에 직접 뛰어들 것으로 보임. 참모로 클리드 카시르 포섭.
그 외에도 흥미로운 사실들을 몇 가지 더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는 사교계의 인기인이라는 클리드 카시르가 그녀의 참모가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신경 쓰였다.
* * *
클리드 카시르가 릴리에트의 참모가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사람은 또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엘로르는 소식을 가져온 시녀를 몇 번이나 닦달해 확인했으면서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왜 하필 릴리에트인가.
황손 중 가장 천박하고 혐오스러운 아이가 아니던가. 그런 아이를, 왜 세기의 천재라 칭송받는 클리드가 선택했을까.
‘설마, 진짜 그 애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클리드가 천재적인 사람임은 부인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 선택만큼은 그가 틀렸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렌셔만 아니었어도 클리드는 날 선택했을 거라고!”
2황비의 장자 라반은 제 여동생 릴리에트조차 이기지 못할 만큼 한심한 놈이었지만 렌셔는 자신이 당연히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인간이었다. 그런 이를 오라비로 둔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황위 후보자로 나서지 않은 탓에 클리드가 어쩔 수 없이 릴리에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하고 걱정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황위 경쟁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 없었다. 머리 아프고 매일매일 일에 쫓겨 다닐 테니까.
그녀는 그저 파티장의 꽃으로 만인의 시선을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멋있는 남자들과 설레는 시간을 보내다가 좋은 곳에 시집가서 품위 있는 귀부인이 되는 삶. 그게 엘로르가 아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인생이었다.
그리고 클리드는 그녀의 청춘을 아름답게 빛나게 해줄 사람이었고.
“카시르 영식도 재미 삼아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실 생각일 뿐이겠지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에트 전하의 손을 놓으실 겁니다.”
곁에서 시녀 하나가 눈치 빠르게 엘로르의 비위를 맞췄다.
그 말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엘로르는 자신의 보석함을 뒤져 작은 진주 핀을 그녀에게 주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충격받아서 조금 흥분했나 보네. 차나 한잔 우려주련?”
3년 뒤 엘로르는 안일했던 자신을 뼈에 사무치게 후회했지만, 이 당시만 해도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 * *
후보들이 처음으로 평가받게 된 자리는 사냥 대회였다.
거의 매년 열리지만 비교적 규모가 작고 주목도도 낮은 황실 행사였다.
그러나 그게 모든 귀족의 관심을 끌고 있는 ‘황위 경쟁’의 첫 번째 무대라니 그 어느 때보다 성황을 이루는 게 당연했다.
천막을 신청한 가문의 수는 이례적으로 많았고, 덕분에 평소 사냥 대회가 열리는 이엘로드 숲보다 훨씬 규모가 큰 티그리스 숲으로 장소가 변경됐을 정도였다.
“무슨 일이든 사람들이 제일 인상 깊게 느끼는 것은 맨 처음과 맨 마지막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이번 황위 경쟁의 첫 무대인 사냥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사냥 대회에서 첫 번째 경쟁이 펼쳐질 거라는 발표가 있은 다음 날, 클리드가 릴리에트를 찾아와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도 릴리에트는 클리드가 자신의 참모가 되어준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에 찬 시선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덩달아 의욕이 차올랐다.
그의 머리를 빌린다면 저처럼 수준 미달 황녀라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가 뭘 해야 하죠?”
“우선 황녀님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해야 합니다. 다른 후보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만드는 거죠.”
클리드는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릴리에트는 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한테 장점이랄 게 있나요?”
“이런…… 생각보다 소심하셨군요?”
“아, 아니, 소심하다기보다는, 정말로 누군가한테 칭찬을 들었던 부분이 없어서요.”
진심이었다.
그녀는 살면서 칭찬받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것을 물려받은 옅은 적발이나 선명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예쁘다는 소리는 가끔 들었지만, 아이리스나 엘로르 같은 미인들이 있는데 자신의 외모를 내세울 수는 없었다.
릴리에트가 한참 자신의 장점에 대해 고민하는데 클리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녀님의 모든 것이 황녀님의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포장해서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뿐이죠.”
“예를 들어, 어떤 점이요?”
“황녀님은 다른 황녀님들과는 달리 검술과 승마에 능하시죠. 활도 잘 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흉보는 부분인데요.”
“사냥 대회가 끝나고도 그러는지 두고 보시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지만 남들에게 가장 많이 공격당하는 부분을, 클리드는 ‘장점’이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라, 릴리에트는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어떻게 내리눌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클리드의 미소가 달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냥 대회에서 릴리에트가 1등을 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세웠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신기한 동물 진정제와 각성제가 그 방법이었다.
클리드가 약제를 준비하는 동안, 릴리에트는 그가 깔아준 판을 망치지 않기 위해 맹렬히 마상 궁술을 연습했다.
‘클리드를 실망시킬 수는 없어. 이번에 실패하면 클리드가 내 참모 자리를 그만둬 버릴지도 몰라.’
릴리에트는 자신에게 온 이 기회를 멍청한 실수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죽 장갑을 꼈는데도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만큼 연습했다.
진정제 가루가 없더라도 충분히 상위권에 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사냥 대회가 열리자 릴리에트는 긴장감에 속이 다 안 좋아질 지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매번 손가락질이나 받던 자신의 취미가 오늘 이후로는 자신의 장점으로 여겨지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들뜬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준비되셨습니까?”
“물론이죠.”
화창한 날씨 덕분에 클리드의 밀색 머리칼이 더 예쁘게 반짝였다. 자신을 향한 그의 푸른 눈동자가 청명한 오늘의 하늘을 닮은 것 같았다.
“티그리스 숲 안으로 진입하시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십시오. 그쪽에 짐승들을 넉넉히 풀어놓도록 손을 썼습니다.”
“고마워요, 클리드.”
릴리에트는 클리드가 이 황위 경쟁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언제나 수습할 방법을 떠올렸다.
‘천재란 저런 거구나. 대단하다.’
릴리에트는 저런 천재가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을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 여기며 힘차게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릴리에트가 계획대로 진정제 주머니를 터트리며 식은 죽 먹기 같은 사냥을 즐기고 있을 때, 슬라르한은 아버지의 유품을 숨겼다는 동굴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시커먼 옷의 암살자들과 마주쳤다.
“너희들이 여기 있다는 건, 아까 그놈의 말이 거짓이라는 뜻이겠군.”
반쯤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허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암살자들은 그와 말을 섞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까딱하자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슬라르한은 그래도 최대한 인명 희생 없이 좋게 끝내려 했다. 이들도 결국 명령을 받아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데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었으니까.
“내 발을 잠시 묶어두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슬라르한의 점잖은 제안에 암살자들은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슬라르한은 적당히 검을 받아주며 다시 한번 타일렀다.
“누구의 사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들이 여기서 나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계속하겠는가?”
그 말은 조금 우습게 들렸던 모양이다. 암살자들이 키득거렸다.
“촌구석에서 오냐오냐 곱게 큰 모양이지?”
“야만인에게 간단히 뒈진 아비만 봐도 벤티악 놈들 실력이 어떤지는 빤하잖아?”
슬라르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암살자들이 저를 도발하기 위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이르델과 벤티악 기사단은 제국 어딜 가든 그 용맹함과 무위로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헛소리를 용서해 주기에는 때가 영 좋질 않았다. 아직도 아버지의 관 위로 떨어지던 젖은 흙 소리가 귀에 생생한데 하찮은 것들이 아버지를 모욕하는 꼴을 너그럽게 봐줄 수는 없었다.
“감히 벤티악 공작가를 조롱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했다는 뜻이겠지? 그럼 기꺼이 상대해 줘야겠군.”
슬라르한은 싸늘한 기운을 흘리며 검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번쩍이는 검날 위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져갔다.
“소, 소드 마스터……?”
누군가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물음표를 제대로 달기도 전에 슬라르한은 검을 크게 휘둘러 저에게 다가오는 암살자 둘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슬라르한이 소드 마스터라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딱히 알릴 의무가 없기도 했거니와, 알려봤자 황제의 견제만 더 심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제기랄! 소드 마스터라는 얘기는 없었잖아!”
패색이 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벤티악 가를 우습게 봤고 비열한 명령을 따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저를 꼬여낸 방법조차 너무도 악랄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유품을 미끼로 쓰다니,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다.
슬라르한은 그의 앞에 선 놈들이 전부 짐승이라 여기며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급하게 가까워져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암살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건가 싶었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희들 뭐야!”
물론 귀족이나 황족답게 품위 넘치는 목소리는 아니었고, 있는 힘껏 꽥 소리를 지른 것에 가까웠다.
슬라르한이 멈칫한 사이 암살자들이 빈틈을 찾았다는 듯 공격해 왔지만 슬라르한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검을 쳐내고 찔렀으며, 말을 타고 급하게 다가온 그 여자 역시 검을 크게 휘둘러 암살자들을 쫓았다.
암살자들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는지, 눈치를 좀 보다가 서둘러 도망치고 말았다.
‘쯧. 다 없애 버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슬라르한은 멀어지는 암살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방해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괜찮습니까, 벤티악 공작?”
릴리에트였다.
빨간 깃이 달린 화살을 등에 진 채 커다란 활을 든 모습이 마치 신화에 나오는 사냥의 여신 같았다.
“……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리에트 전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쟤네들은 정체가 뭐예요?”
잔뜩 찌푸린 미간과 암살자들이 멀어진 방향을 보며 이를 가는 모습을 보니 릴리에트는 이 암살극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슬라르한은 이 상황에 대해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보나 마나 이 암살극의 배후자는 암살자들이 죽은 것 역시 자신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울 테니까.
“이 근처에 제 아버지의 유품이 숨겨져 있다고 해서 왔더니, 아버지의 유품 대신 저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 설명에 릴리에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엇에 놀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섣부른 위로나 동조를 하는 대신 당장 그들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쪽을 택했다.
“욕보셨네요. 사냥 대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얼른 잡으세요.”
하지만 슬라르한은 이 사냥 대회, 아니, 황위 경쟁 자체에 대해 크게 회의감이 들었다.
말이 ‘경쟁’일 뿐, 실상은 황족들이 다들 짜고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 역겨운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게 더없이 불쾌했다.
“먼저 가보십시오, 전하.”
“혹시 어디 다쳤어요?”
“아닙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슬라르한은 최대한 점잖게 릴리에트의 관심을 거절했다. 어차피 릴리에트도 황족. 그렇다면 더 이상 엮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사냥 대회의 결과 발표 때,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슬라르한이 한 마리도 사냥하지 못한 것을 두고 황제가 비난하려 한 그 순간이었다.
“이상하네요. 아까 분명 사냥하는 모습을 봤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화살이 아니라 검으로 잡고 계셨구나! 죽인 다음에라도 화살을 꽂아놓지 그러셨어요, 벤티악 공작!”
사냥 대회의 1등을 차지한 황녀가 역성을 들어준 것은 슬라르한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슬라르한이 열 명이나 되는 암살자들을 만났다는 것,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며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희생하려 했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일련의 소동은 금세 가라앉았지만 사냥 대회로 주목을 받게 된 후보는 릴리에트, 그리고 슬라르한인 게 분명해 보였다.
갑자기 저에게 다가와 괜찮으냐고, 아무래도 황후나 황비들의 소행 같다고 쑥덕대는 귀족들에 둘러싸인 슬라르한은 멀리 있는 릴리에트를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의 명예와 평판, 아니, 어쩌면 목숨까지 살린 어린 황녀는 그런 자비를 베푼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의 참모와 농담이나 나누고 있었다.
‘릴리에트…… 릴리에트 시야르드 솔렌…….’
슬라르한이 그녀의 이름을 곱씹고 있는데 그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듯 릴리에트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릴리에트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냐는 뜻일 터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꽤 귀엽네.’
슬라르한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샴페인 잔으로 입을 가렸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 * *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이든,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하는 것이든, 황위 경쟁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패배하면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형제들까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경쟁에 매달리는 후보들의 절박함을, 황제는 자신의 의무에 태만할 기회로 삼았다.
골치 아픈 상소를 선별해 ‘과제’라는 이름을 달고 앞에 내놓은 황제는 긴장한 기색의 후보들에게 말했다.
“황제란 제국의 어려움을 돌볼 줄 알아야 하는 법. 너희에게 황제의 영광스러운 의무를 맛볼 기회를 주마.”
마치 대단한 것을 ‘아깝지만’ 양보해 준다는 식의 어투였다. 물론 그 속내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어수룩한 사람은 그 자리에 단 한 명도 없었다.
후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각자 과제 하나씩을 선택했다.
전부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뿐이었지만 릴리에트가 고른 위르스 산 문제가 가장 기피 대상이었다.
“자신감이 과한 것 같은데, 릴리에트.”
접견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이리스가 조소를 띤 얼굴로 릴리에트를 비꼬았다.
솔직히 슬라르한도 릴리에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 황실에서 몇 년이나 해결하지 못한 일을, 왜 그렇게 흔쾌히 선택했을까.
하지만 릴리에트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꾸했다.
“큰 수확을 얻으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 아니겠어?”
빙긋 웃는 그 얼굴은 자신만만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받아든 과제를 우습게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리스와 렌셔는 릴리에트를 비웃었지만, 슬라르한은 릴리에트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게 클리드를 믿어서인지, 자기 자신을 믿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 내가 받은 과제도 만만치 않을 것 같으니까.’
슬라르한은 자신이 받아든 과제를 떠올리며 작게 한숨 쉬었다.
그가 받은 과제는 불법 노예 격투장 문제였다.
안 그래도 노예 제도 때문에 생기는 반인륜적인 사건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노예를 투견 취급하며 불법 도박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내가 해결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황제 폐하는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이니까.’
슬라르한은 다시 한숨을 쉬며 황궁을 떠났다.
* * *
위르스 산의 기이한 지진은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위르스 산 밑의 달로팡 마을 사람들 말로는 산 아래 드래곤이 잠들어 있으며 이것이 깨어날 징조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고 여겼지만 어쨌든 책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수도의 일들을 내팽개칠 수도 없어서 이틀을 달려 위르스에 도착한 뒤 닷새를 보내고, 다시 이틀을 달려 수도에 돌아간 뒤 닷새를 보내는 식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황족 같았으면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대신 자신의 대리인을 보냈겠지만, 릴리에트는 자신이 직접 말을 달리고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으아…… 이젠 드래곤 그림만 봐도 토할 것 같아요!”
황실 도서관의 마지막 드래곤 관련 서적까지 독파한 릴리에트는 소파에 널브러지며 중얼거렸다.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행사와 파티에 얼굴을 내밀고, 시간이 빌 때마다 클리드와 드래곤 관련 서적을 뒤지느라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잘 수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도마뱀 그림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적어도 위르스 산 아래 묻힌 드래곤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었습니다.”
위로하는 클리드의 목소리에도 실망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모양이지만, 릴리에트는 오히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걸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시간을 허비하기는커녕 큰 수확을 얻은 거죠! 정말 용이 잠들어 있다는 얘기라도 발견했어 봐요. 그럼 우리가 과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달로팡 마을 사람들이 드래곤 얘기를 너무 믿고 있어서 황실에서도 그 말에 따라 드래곤을 다시 잠재운다는 의식을 몇 번이고 치렀다.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 릴리에트라고 별다른 수가 있었을 리 없다.
“이래저래 짜증 나는데, 이번에 내려가면 일단 땅을 파보기로 해요.”
“하지만 그건 너무 막막한 일입니다. 팔 때 파더라도 그 영역을 좁힐 수 있는 다른 정보가 필요합니다.”
“진동이 강하게 느껴지는 지반이 군데군데 있었어요. 그런 곳을 중심으로 파 내려가 보면 되죠. 언제까지 책이나 파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후보가 나 말고 누가 있죠?”
“아이리스 전하는 며칠 전에 과제를 해결하셨고 렌셔 전하도 곧 해결하실 것 같다고 합니다. 현재 고전하고 있는 것은 우리와 벤티악 공작입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은 선착순으로 순위가 정해지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릴리에트가 궁금한 건 순위나 점수 문제가 아니었다.
“슬라르한이 받은 과제가 뭐였더라……?”
“불법 노예 격투장 문제였죠.”
“아, 그랬죠. 그런데 의외네요? 슬라르한이라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 같은데…… 슬라르한은 뭣 때문에 고생하고 있대요?”
“연루된 인물들은 대부분 파악한 모양인데 결정적인 증거를 못 잡았거든요.”
“증거……?”
“노예 격투 현장, 그 자체 말입니다. 격투장이 아무래도 황후 쪽과 연관된 대귀족의 사유지에 있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공작이라 하더라도 심증만으로 타 귀족의 사유지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황제 폐하께 수사 명령서를 받으면 될 일이잖아요.”
“그걸 못 받고 있으니 그렇죠.”
클리드가 삐딱하게 웃으며 답했다.
황제는 슬라르한을 밀어줄 듯했으면서도 벤티악 가에 대한 열등감과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후보들이 맡은 모든 일은 황제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도 슬라르한의 수사에 전혀 협조해 주지 않았다.
핑계는 ‘모든 후보에게 공정해야 하기 때문’이었지만, 다른 후보들은 황손이었기에 황실 발행 수사 명령서를 수월하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황제가 발행하는 명령서보다는 권한이 적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충분했다.
결국, 이번 경합에서 차별받는 쪽은 명백히 슬라르한이었다.
“……불공평해.”
“애초에 이 황위 경쟁의 시작부터가 불공평한 게임이었습니다. 모든 후보가 동등한 조건이 아니었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벤티악 공작에게는 안됐지만 우리로서는 반가운 일이죠. 그가 고전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선착순은 아니지만, 꼴찌라는 이미지가 씌워져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요.”
릴리에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못마땅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클리드는 그런 릴리에트에게 오랜만의 휴식이나 즐기라고 권하며 자리를 떴다.
드래곤 관련 조사는 어쨌든 끝났으니, 클리드가 다음 목표를 정해줄 때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부족한 잠이나 푹 자고 싶었다.
‘아니, 근데…… 이럴 거면 그냥 황손들끼리만 싸움을 붙이든지! 도대체 왜 슬라르한까지 끌어들여서 경쟁을 시켜?’
릴리에트에게 이것은 후보 하나가 더 늘어서 짜증 난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승부의 정정당당함에 관한 문제였다.
그녀가 검을 수련하며 배운 기사도의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싸움은 정정당당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처음부터 불공평한 싸움이었다지만, 어느 한 후보에게만 제재가 가해지는 것은 그저 괴롭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릴리에트는 집단 괴롭힘의 가해자 쪽에 서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조롱기 섞인 시선과 손가락질, 묘한 기피와 저 혼자 모르는 분위기…… 그런 건 이제껏 릴리에트도 실컷 당해온 것이었으니까.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뚱한 표정을 짓던 릴리에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이건 분명 황후 쪽에서 방해하는 겁니다!”
벌써 네 번째 황실 수사 명령서 발급에 실패한 슬라르한 곁에서 타리크가 분통을 터트렸다.
슬라르한은 이 과제를 받아 들고 기본적인 조사를 마친 뒤 수사의 고삐를 조여갈 때쯤, 발신인 불명의 밀서를 받은 것을 떠올렸다.
-평민과 자작 이하의 귀족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시오.
이 짧은 내용 외의 어떠한 글씨도 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백조 문양이 은은하게 인쇄된 고급 편지지는 분명 황후만이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그 명령을 듣지 않고 곧바로 노예 격투장 문제의 뿌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슬라르한이 두렵지도 않았는지 숨을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노예 격투장이 열렸다는 제보는 계속 들어왔고, 어떤 남작 하나는 큰돈을 탕진한 탓에 자살까지 했다.
이가 갈렸지만 슬라르한은 차분하고 은밀하게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증거를 확보하려던 그 순간에 결정적인 장애물과 맞닥뜨렸다.
노예 격투장이 황후의 사촌인 폴라드 백작의 사유지에 있는 것 같다는 정황이 포착되어 황실에 수사 명령서 발급을 요청했는데 황실 치안청에서는 별 희한한 이유를 대며 번번이 그 요청을 반려하고 있는 것이다.
“망할…… 제 국민들이 도박에 물들어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데, 황후가 되어서 사촌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수사를 방해해? 그러고도 제국의 황후라 할 수 있답니까?”
“폴라드 백작도 바보는 아닐 테니, 아마 수익의 일정 부분을 황후에게 바치고 있었을 테지. 그러지 않고서야 여태 그런 불법 행위의 꼬투리도 못 잡았을 리가.”
슬라르한은 화가 나서 가슴을 치는 타리크를 타이르며 돌아 나왔다.
물론 그라고 해서 속이 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이에도 폴라드 백작은 증거를 인멸해 가고 있을 것이고, 죄 없는 노예들은 귀족들의 잔인한 유희에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고 있을 것이며 격투장이자 도박장인 그곳에서 재산을 다 날린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제 딸을 팔거나 강도짓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다급하다고 여기는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이렇게 구제해 봤자 썩어빠진 놈들은 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불법 행위를 저지를 테고, 그와 연결된 권력자는 눈감아줄 것이다.
애초에 제국의 우두머리라는 황제부터가 그러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다 귀찮은데 그냥 부수고 들어가 버릴까.’
수사 명령서도 없이 무력으로 밀고 들어가면 분명 문제가 생기겠지만, 불법 격투장만 찾아낸다면 그 문제로 인한 마이너스 점수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수사 명령서 발급을 요청해 보고, 또 반려된다면 그때는 그냥 밀고 들어가지.”
“정말 그러실 겁니까?”
타리크가 반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어떤가. 벌금이나 감점이 고작일 텐데.”
슬라르한은 그래도 최대한 노력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치안청에서 요구한 ‘증인 세 명의 증언서’를 받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아마 웬만한 귀족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을 것이기에 그가 향한 곳은 귀족들의 유희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모인 술집이었다.
슬라르한은 무력으로 폴라드 백작의 사유지에 밀고 들어가는 것이 고작 벌금이나 감점의 페널티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황후와 렌셔가 계획하고 있는 바는 더 컸다.
“이번에 네 번째로 수사 명령서 발부를 거부당했으니 슬슬 인내심이 떨어지고 있겠지.”
황후가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그녀 곁에서 차를 마시던 렌셔는 미간을 찌푸렸다.
“질기네요. 세 번쯤 거절하면 밀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조심성이 많을 수밖에 없는 애잖니. 어쨌든 과제를 해결해야 할 테니 언제까지고 참지는 못하겠지.”
황후는 폴라드 백작이 노예 격투 도박장을 운영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서 매달 상당한 액수의 뇌물을 받았다.
그녀는 그런 돈줄을 잃을 생각도 없었고 동시에 이것이 슬라르한을 칠 기회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과제가 발표된 뒤 곧바로 황실 치안청이 슬라르한에게 수사 명령서를 발부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인내심이 닳은 슬라르한이 무력으로 폴라드 백작의 사유지를 침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겠지. ‘클럽’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으니까.”
황후가 차의 수색(水色)을 즐기는 듯 찻잔을 빙글 돌리며 미소 지었다.
만에 하나 그가 도박장을 찾아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수사 명령서도 없이 다른 귀족의 사유지에 무단 침입한 죄로 벤티악 저택을 수사당할 것이다. 도박장은 그사이에 재건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벤티악 저택을 조사하며 어떤 꼬투리든 잡아서 슬라한에게 반역을 모의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울 계획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벤티악 기사단을 해체하고 슬라르한의 황위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것쯤이야 황제가 알아서 해줄 일이다.
그랬기에 황후와 렌셔는 슬라르한이 더 참지 못하고 폴라드 백작의 사유지로 밀고 들어가길 바라는 중이었다.
그때, 급하게 다가온 시녀가 귓가에 반가운 소식을 속삭였다.
“폐하! 폴라드 백작으로부터 신호가 왔습니다.”
황후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잠깐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렌셔에게 짐짓 큰일이라는 듯 말했다.
“렌셔. 슬라르한이 아주 무도한 짓을 저지른 듯하구나. 그가 지금 폴라드 백작의 사유지에 침입한 모양이야.”
“이런, 이런.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 하더라도 다른 귀족의 사유지를 그토록 쉽게 침범하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군요! 어서 폴라드 백작을 지키기 위한 병력을 파견해야겠습니다.”
“미래의 황태자다운 현명한 판단이구나.”
렌셔는 황후와 연극 투의 대화를 주고받고는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 *
저녁노을이 내려앉을 무렵, 릴리에트는 몰래 숨어들어 온 폴라드 백작의 사유지 ‘헤이번 목장’에서 헤매고 있었다.
갈색의 짧은 머리 가발을 쓰고 평민 사내아이처럼 옷을 입은 채였다. 혹시나 얼굴을 들킬까 봐 분장도 하고 모자도 썼다.
그러고는 지키는 사람 없는 울타리를 넘어 목장 안으로 들어왔다.
관리 안 된 곳이라는 것을 드러내듯 허리 높이까지 자란 잡풀이 무성하게 목장을 뒤덮고 있었다.
풀숲에 가려진 바닥도 푹 꺼지거나 돌부리가 박힌 곳이 많아서, 가장 가까이 있는 마구간까지 다가가는 데도 도대체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마구간에 다가가자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마구간을 지키는 사람이 두 명 있었지만 그들이 목장 관리인 같지는 않았다.
‘말은 있는데…… 목장은 이 모양이라고?’
말 목장이었는지 양 목장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성한 풀숲을 보면 오랫동안 방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구간에는 말들이 꽤 들어차 있다. 심지어 마구간은 여기 말고도 몇 군데 더 있었다. 입구와 제일 먼 마구간이 이 정도라면 저 앞쪽의 마구간은 다 차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 말들은 이 목장의 말들이 아니라는 소린데…… 말 주인들은 어디 있는 거지?’
릴리에트는 숨죽여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마구간 바깥쪽부터 말들을 채우기 시작했는지, 릴리에트가 들어선 마구간 뒷문 쪽으로는 말이 없었다.
경비는 목장 관리인 숙소로 쓰였던 건물을 바라보는 쪽의 입구만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목장 관리인 숙소가 의심스러운데?’
하지만 목장 관리인 숙소로 쓰였던 건물은 격투장 겸 도박장으로 쓰이기엔 터무니없이 작았다. 고작 두어 사람이 숙식을 해결하는 건물이니까.
릴리에트는 조용한 가운데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한참 머리를 굴리는데 왠지 아까부터 바닥이 좀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건 또 뭐야?’
처음에는 마구간의 말들이 제자리걸음을 하나 싶었는데, 계속 이어지던 진동이 잠깐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부터 말 무리가 달려오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라 슬라르한이 벌써 왔나 싶었지만, 진동이 가까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릴리에트는 바닥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아주 먼 어디선가 ‘와아!’ 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어렴풋이 들렸다.
‘뭐, 뭐야! 설마……!’
믿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땅속인 것 같았다. 왠지 위르스 산 문제가 떠올랐다.
하지만 무엇이 땅속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위르스 산과는 달리, 이곳의 땅속에는 분명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많은 인원이.
‘저 목장 관리인 숙소의 지하인가?’
그렇다면 저 숙소 오두막의 규모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곳은 그저 노예 격투장의 입구일 뿐이니까. 그 아래로 얼마나 큰 환락의 도가니가 펼쳐졌을지 알 게 뭔가.
릴리에트는 살금살금 기어 밖으로 나갔다.
목장 관리인 숙소는 마구간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까 마구간으로 다가올 때까지는 거기도 방치된 오두막처럼 보였지만, 어스름이 짙어진 그사이에 오두막 바깥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장소는 제대로 찾은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타이밍의 문제였다.
‘내가 위험에 처하고, 슬라르한이 거기에 딱 맞춰 등장해 주면 될 일이니까, 저 멀리서 벤티악 기사단이 보일 때 움직이면 되겠지.’
그다지 위험할 것은 없었다. 마구간의 지대가 조금 높아서 목장 입구가 보였기 때문이다.
릴리에트는 수풀 속에 숨어 슬라르한을 기다렸다.
그사이에도 이 황량한 목장을 찾는 이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말을 타고 왔는지, 걸어왔는지로 구분해 짐작해 보면 귀족과 평민의 비율이 7:3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곧 슬라르한에게 잡힐 그들을 보며 속으로 낄낄대던 릴리에트가 멈칫한 것은 그중 어떤 남자가 어린 여자 노예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이거 놔! 난 노예가 아니야!”
끌려가면서도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 여자아이는 살집이 하나도 없어서, 몇 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았다.
‘어린 여자애까지 격투장에 밀어 넣는다고? 저런 미친놈들!’
릴리에트는 이를 바득 갈았다. 저 아이가 맞아 죽기 전에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슬라르한이 올 거야. 그래. 금방 올 거야. 꼭 올 거야.’
그렇게 대책 없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무장한 릴리에트는 크게 심호흡한 뒤 무성한 풀숲을 크게 돌아서 목장 관리인 오두막 뒤편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남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인지 외부의 경비 인력은 최소화한 것 같았다. 오두막 뒤편으로는 경비가 없다는 뜻이었다.
릴리에트는 오두막 뒤쪽 벽에 달린 창문을 열고 조심스레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불법 오락장의 화려한 입구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오두막 안은 목장 관리인들이 썼던 가구가 어지러이 널브러진 모습 그대로였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데다, 지하실로 연결된 것 같은 문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그저 벽일 뿐이었고, 바닥에 문이 달린 것도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또 밖에 도착한 것 같았다. 릴리에트는 쓰러진 테이블 뒤에 숨어 숨을 죽였다.
“오늘은 평민들도 꽤 끼었다고 하던데?”
“뭐 어때? 돈만 넉넉히 들고 오면 환영이지.”
“하지만 기분 나쁘다고. 냄새 나는 녀석들이 어디 감히 윗분들의 유희에 끼어드느냔 말이야.”
“대신 그만한 관람료를 내잖나. 과욕을 부리면 패가망신한다는 교훈도 얻고 돌아가고. 큭큭.”
중년 사내 둘이 오만한 대화를 나누며 걸어 들어오더니 오두막의 한쪽 벽면 앞에 섰다. 그러더니 품 안의 마석을 꺼내 벽 위로 고대 문자 하나를 그렸다.
‘즐거움’이라는 뜻을 가진 P 모양의 문자였다.
그러자 판판하던 벽 위로 다른 이미지가 겹쳐지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벽 안쪽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서로 잡담하며 그 계단을 밟고 지하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자 뚫렸던 벽은 다시 단단하고 판판하고 아무런 특징 없는 벽으로 바뀌었다.
그 모든 걸 보고 있던 릴리에트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뒤에서 나와 아까 그 남자들이 사라졌던 벽 앞에 섰다.
‘잘도 숨겨뒀구만. 그나저나…… 마석이면 아무거나 되는 건가?’
릴리에트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품에서 치명상 보호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아티팩트 역시 마석이었으니까.
실패하면 다시 테이블 뒤에 숨었다가 어리숙한 놈이 들어갈 때 후다닥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다.
릴리에트는 아티팩트를 들어 벽 위에 아까 본 고대 문자를 그렸다.
‘된다……!’
눈앞의 벽이 일렁이더니, 언제 벽이었냐는 듯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펼쳐졌다. 그 안으로 들어서서 다시 벽이 생기길 기다렸다가 마석으로 문자를 쓰려고 갖다 대자 벽이 다시 없어졌다.
‘나올 때는 암호가 필요 없구나.’
그렇게 나갈 때의 일까지 생각하던 순간, 저 아래에서 ‘싫어!’ 하는 소녀의 비명이 들린 것 같았다.
릴리에트는 주먹을 꽉 쥐고 모자를 좀 더 눌러 쓴 뒤 계단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은 점점 넓어지고 밝아지더니 어느덧 화려한 파티장의 입구처럼 변했다.
몸을 숨겨야 하나, 잠시 머뭇대던 릴리에트는 평민인 게 분명한 한 사내가 저 멀리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뻔뻔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심문을 당해도 도박하러 왔다고 둘러대면 된다. 금전으로 쓸 만한 건 충분히 지니고 있으니까.
릴리에트는 조금 건들건들한 모습으로 노예 격투장에 들어섰다.
‘아주 가관이구만, 이 역겨운 놈들.’
노예 격투장은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화려했다. 새빨간 융단이 바닥에 깔렸고 벽에는 금박을 입힌 램프가 네 걸음마다 하나씩 달려 있었다.
진한 향내를 풍기는 접대부들이 경박하게 깔깔댔고 귀족 사내들은 한껏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간 곳은 그곳 시점에서 보자면 제일 위층이었다.
난간 쪽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층 한가운데에 사방이 철망으로 둘러쳐진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경기장을 가장 멀리서 보게 되는 제일 위층은 평민들 전용이었고, 경기장과 가까워질수록 돈 많은 귀족들이 자리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지금 비쩍 마른 사내 노예 둘이 서로 살겠다고 이를 악물고 싸우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 몽둥이였고 두 사람 모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죽여! 죽여!”
“한 방만 제대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지면 내 손에 죽는다!”
사방에서 고함치는 인간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 사이로 이 도박장의 하수인들이 지나다니며 마지막 도박권을 팔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도 역겨워 릴리에트는 순간 치미는 욕지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어디선가 또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저기다!’
정신을 차린 릴리에트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떴다.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 곳은 관람석이 있는 쪽 계단이 아닌 다른 쪽 계단이었다.
노예 소녀를 데리고 온 것을 보면 분명 격투장에 투입될 노예들을 대기시키는 곳일 게 분명했다.
내려가도 릴리에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릴리에트는 애초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말지를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지!’
마음이 내달리는 방향으로 따라갈 뿐이었다.
고객들이 다니는 계단과는 달리, 이쪽 계단은 군데군데 때가 묻어 있었고 간간이 짙은 갈색의 액체가 말라붙은 자국도 보였다.
릴리에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단 아래로 달려갔다.
“이거 놓으라니까!”
곧 털 세운 새끼 고양이처럼 목소리만은 앙칼진 소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뒤이어 그녀의 뒤통수며 등짝을 때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휴, 한 성깔 하는 계집앤가 보네?”
“어때? 돈 좀 많이 몰릴 것 같아?”
“글쎄. 여자애인데다 성질머리 사나우니 그건 괜찮은데, 너무 말라서 얼마 못 버틸 것 같은데?”
“투견 한 마리랑 붙이면 좀 오래 가지 않을까?”
“투견이 동네 똥개인 줄 알아? 이런 꼬맹이는 금방 모가지를 물어뜯긴다고.”
“그럼 몽둥이 하나 쥐여서 내보내면 되지.”
사내 둘이 소녀를 개 먹이로나 던져줄 계산을 하는 동안 릴리에트는 벽에 바싹 붙어 주변을 살폈다.
노예 격리실도 아니고 준비시키는 곳도 아니라 사람은 없었다.
사내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근처 벽에 세워진 몽둥이에 릴리에트의 시선이 닿았다.
아마 격투장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들고 나왔다가 세워둔 모양이었다.
그 몽둥이를 쳐다보다가 다시 사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릴리에트는 노예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까만 머리칼과 보기 드문 회색 눈동자를 지닌, 이국적인 분위기의 소녀였다.
그녀는 진작에 릴리에트를 발견한 모양인지 놀란 티도 내지 않고 그저 눈이 동그래진 상태였다.
릴리에트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를 눌렀다. 소녀가 여기서 소리라도 지르면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소녀는 릴리에트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듯 몽둥이 쪽으로 살짝 턱짓하고는 손가락 세 개를 폈다가 하나씩 접었다.
‘셋…… 둘…… 하나! 지금이야!’
소녀는 손가락을 다 접은 순간 저를 붙잡은 남자의 손을 잡고 물어뜯으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힘이 다 빠진 것처럼 늘어졌던 아이가 발광하니 사내들의 신경은 그쪽으로 쏠렸다.
“이게 미쳤나, 진짜!”
“시합장에 올라가기 전에 맞아 죽고 싶냐!”
그들이 윽박지르며 소녀에게 손찌검하는 사이 릴리에트는 곧바로 튀어 나가 벽에 세워진 몽둥이를 낚아채고는 격투장 관리인의 뒤통수부터 후려쳤다.
“컥!”
“이, 이건 또 뭐야!”
관리인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나동그라졌고 소녀의 주인인 듯한 사내가 놀라 릴리에트를 밀어트리려 했지만 이번엔 노예 소녀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가 휘청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릴리에트는 몽둥이로 그의 뒤통수 역시 후려쳤다.
여전히 도박꾼들이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그들이 있던 복도는 삽시간에 고요해진 것 같았다.
“……가자!”
릴리에트는 곧바로 소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소녀 역시 이를 악물고 바닥을 디뎠다.
두 소녀는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한 층 올라온 계단참 구석에서 릴리에트는 재빨리 제가 걸고 있던 치명상 무효화 아티팩트 목걸이를 벗어 소녀에게 걸어주었다.
“이, 이게 뭐야?”
“죽을 목숨 한 번은 살려주는 물건이야. 네가 걸고 있어.”
소녀는 아까 릴리에트를 발견했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았지만 릴리에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우선은 이 녀석 먼저 바깥 풀숲에 숨겨놓고, 다시 들어와서 슬라르한을 기다려야 해. 시간이 없어!’
자신이 위험에 처해야만 슬라르한의 수사가 적법해진다. 릴리에트는 급한 마음에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랄프가 당했다! 침입자야!”
“애들 풀어! 빨리!”
그 소리에 릴리에트와 소녀가 동시에 긴장했다.
“뛰어!”
릴리에트는 소녀의 손목을 잡고 달렸다. 출구 계단이 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릴리에트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노예들을 준비시키는 쪽 계단을 올라와 보니 출구 계단 쪽에는 이미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저놈이다!”
누군가 릴리에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손에 쥐고 있는 몽둥이며 다른 손에 잡은 소녀의 행색 하며, 어느 모로 보나 도박 빚 때문에 남의 노예를 강탈해 도망치는 평민 애송이였다.
릴리에트는 예고도 없이 공격해 오는 경비병의 몽둥이를 가볍게 피하고는 쥐고 있던 몽둥이 끝으로 그의 명치를 가격해 그를 쓰러트렸다.
호리호리한 체격 때문에 만만하게 봤던 경비병들은 릴리에트의 움직임을 보고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구석에 몰린 릴리에트는 소녀를 제 뒤에 두고 몽둥이를 단단히 쥐었다.
그때, 지나가던 귀족 몇몇이 이 상황을 보더니 최저층으로 내려가는 대신 근처에 자리 잡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이! 도박권 안 팔아?”
“몇 명까지 버티는지 보자고! 난 앞으로 세 명까지 버티는 데 건다!”
“세 명까진 무리일 거 같은데. 난 두 명.”
릴리에트를 잡으러 뛰쳐나왔던 말단 관리인이 그들을 점잖게 타이르려고 했지만 뒤따라온 고위급 관리인은 오히려 말단 관리인을 말렸다.
“훌륭한 신사분들이 우리 클럽에서 유희를 찾으시겠다는데 뭐가 문젠가? 도박권을 팔게.”
“하, 하지만…… 저 소년의 주인이 없지 않습니까?”
“뭐 어때? 애송이가 겁 없이 난동을 피웠으면 대가라는 걸 치러야지.”
그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경비병들을 일단 저지했다. 도박권을 팔아 치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덕분에 릴리에트는 시간을 벌었지만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 가발을 벗고 신분을 드러내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겠지만, 대신 슬라르한을 도우려던 오늘의 계획이 어그러질 것이다.
게다가 이 비열한 놈들이 호위 기사 하나 데려오지 않은 자신을 순순히 황녀 대접해 줄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백기를 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나, 나 때문에 죽으면 어떡해?”
사내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바락바락 대들던 소녀가 등 뒤에서 울먹거렸다. 릴리에트는 소녀에게 속삭였다.
“상황 보다가 앞이 비면 저 계단 위로 무조건 뛰어가. 내가 아까 준 아티팩트가 있으니 바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오두막 출입구 반대쪽의 창문이 열려 있을 테니, 거길 통해서 밖으로 나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알았지?”
“나만……?”
혼자 나가라는 소리에 소녀가 파드득 떨었다. 릴리에트는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난 뒤에서 이놈들을 최대한 막고 있을게. 대신 나가서 숨어 있다가, 웬 기사단이 오면 여길 알려줘. 들어오는 방법은, 그 아티팩트로 벽에 깃발 모양 문자를 그리는 거야.”
“그건 아까 올 때 봤어. 그런데…… 기사단? 무슨 기사단?”
“백금발에 굉장히 잘생긴 남자가 기사들을 끌고 들어올 거야. 널 막거든, 릴리에트가 보냈다고 해.”
“그, 그런데, 그때까지 네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잖아.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괜찮아. 난 살 방법이 다 있어. 걱정 마.”
릴리에트가 씩 웃자 소녀는 못 믿는 것 같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저쪽에서도 준비가 다 된 모양이었다. 자리 잡고 있던 귀족들이 자신들의 지인까지 불러 모은 탓에, 최상층의 복도가 순식간에 작은 격투장이 되어버렸다.
관리인들은 모여든 귀족들에게 싸움 내용을 설명하고 도박권을 팔았다.
“자, 그럼 이제, 맹랑한 평민 소년과 우리 클럽 경비병들과의 싸움이 시작됩……!”
“잠깐!”
때를 기다리고 있던 릴리에트가 소리쳤다.
“나한테도 이득이 있어야 하잖아! 내가 한 놈을 이길 때마다 이 애가 저 계단으로 한 발짝씩 다가가게 해줘. 그리고 계단은 아무도 지키지 말고.”
그 소리에 주변에서는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이런, 이런! 노예를 훔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도피였던 모양인데?”
“주제 모르고 로맨스에 빠지기 딱 좋은 나이지. 큭큭큭.”
관리인 역시 릴리에트의 제안이 우스웠는지 한참 킬킬대다가 그러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릴리에트는 불법 도박장이나 운영하는 놈의 장담은 믿지 않았다.
“구경하는 귀족 나으리들께서 가문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만약 이 약속을 어긴다면, 저나 이 아이는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서로를 기억하시겠죠.”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노예와 사랑에 빠진 평민 애송이가 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는 게 괘씸하기도 하고 신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극적인 경기와 도박에 빠진 그들은 건방진 평민을 벌하는 대신 이 호기로운 소년의 승패에 돈을 거는 쪽을 택했다.
“좋아. 그러지.”
누군가가 답했다. 그러자 그 주변의 귀족들도 그러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릴리에트와 경비병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 나온 녀석은 경비병들 중에서도 제일 체격이 작고 마른 녀석이었다. 그는 자신이 최약체로 뽑혔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있는 대로 씩씩대며 릴리에트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놈이 제일 쉽지.’
릴리에트는 몽둥이도 내려놓은 채 상대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가볍게 피하고는 상대의 뒷덜미와 허리춤을 잡고 바닥에 메치기 한 뒤 그대로 그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쳤다. 경비병은 그대로 기절했다.
“우와하하! 노예들 격투보다 이쪽이 훨씬 재미있는데?”
“도박권 추가 판매해!”
“판돈 올려!”
고작 몇 초 만에 경비병 하나를 기절시킨 릴리에트를 보며 귀족들은 흥분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노예 소녀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계단 쪽을 향해 크게 한 발짝 디뎠다.
‘저 정도 폭이면 앞으로 세 놈만 더 처치하면 되겠어.’
릴리에트는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소녀와 눈을 마주치며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사이에 슬라르한이 들이닥쳐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슬라르한이 오지 않을 수도 있어.’
여기 올 때까지는 슬라르한이 꼭 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누군가의 장난질이거나 함정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 해도 저 아이만큼은 살리고 싶으니까…….’
릴리에트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바닥에 내려두었던 몽둥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 나오는 경비병은 아까 그 녀석보다는 체격도 더 좋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노예 소녀를 구하려는 소년의 애절한 사랑은 과연 빛을 볼 것인가! 이제 그 두 번째 대결을 시작합니다!”
격투장 관리인의 극적인 설명과 함께 대결이 시작되었다.
* * *
-황족의 안위를 위협하는 인물 및 장소에 관해 광범위한 수사를 허락한다.
황실 치안청장 리트너 헤이든
슬라르한은 손에 쥔 황실 발행 수사 명령서를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도 발행받기 어려웠던 수사 명령서가, 황실 누군가의 심부름꾼을 통해 오늘 그에게 전달되었다.
수사 명령서가 든 봉투에는 ‘오늘 밤 9시, <헤이번 목장>으로 와요! 꼭! 꼭!’이라는 간단한 메모 한 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메모 내용만 봐서는 아무래도 릴리에트 같은데…… 하지만, 도대체 왜……?’
자신이 수사해야 하는 대상지와 수사 명령서였다.
반갑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웠다.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저와 함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유일한 황손이 마침 저에게 필요한 미끼를 흔드는 꼴이었으니까.
‘함정일까?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명령서가 진짜란 말이지…….’
수사 명령서를 앞뒤로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위조된 것 같지는 않았다. ‘황족의 안위를 위협하는’이라는 단서가 좀 껄끄러웠지만 말이다.
옆에서 함께 고민하던 타리크도 한참을 침묵하고 있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게 뭡니까? 이것만 믿고 밀고 들어갔다가 놈들이 깔아놓은 덫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밀고 들어가려던 참이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수사 명령서와 메모를 받았을 때부터 기사단은 준비시켜 두었다. 다들 슬라르한의 결정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넘었다. 이 메모에 적힌 대로 9시까지 헤이번 목장에 도착하려면 슬슬 출발 준비를 해야 했다.
타리크는 다시 또 턱을 만지며 고민하다가 피식 웃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의심스럽습니다. ‘황족의 안위를 위협하는’ 조건에 해당되어야만 이 명령서가 효력을 갖는 것 아닙니까. 설마 이걸 보낸 황족이 거기서 누구한테 맞고 있겠답니까? 말도 안 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타리크의 모습에 슬라르한도 같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그러면서도 슬라르한은 명령서를 내려놓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다. 그냥 놓치기에는 참 아쉬운 기회였다.
‘이런 걸 노린 걸까?’
그렇다면 참 악랄했다.
릴리에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을 보냈을까 생각하던 슬라르한은 시원스레 웃던 릴리에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달콤한 분홍색 머리칼과 머리칼만큼 혈색이 돌던 뺨과 부드러운 옥빛 눈동자와 반짝거리던 그 생기를…….
그토록 반짝거리던 사람이 음험한 계획을 세웠다는 게 참 믿기지 않았다.
* * *
따악!
“오오!”
나무 몽둥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다시 한번 크게 울리자 구경꾼들은 대단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릴리에트는 두 번째 경비병은 가볍게, 세 번째 경비병은 가까스로 이긴 뒤 네 번째 경비병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두 번째 경비병과 싸울 때 맞은 어깨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어깨를 내주고 놈을 기절시킬 수 있었으니 아깝지 않은 대가였다.
세 번째 경비병과 싸울 때 맞은 복부는 타격이 컸다. 지금도 배가 너무 아팠다.
노예 소녀는 출구 계단과 훨씬 가까워진 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번 싸움은 앞의 두 싸움보다 더 길어지고 있었는데, 그 사이 릴리에트는 이마와 턱이 찢어지고 등과 허벅지를 더 얻어맞았다.
통증이 심했지만 릴리에트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다가 그의 빈틈을 찾아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 역시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는 릴리에트의 몽둥이를 막아내면서 몸을 휙 뒤틀어 다리로 돌려찼고, 릴리에트는 거기에 맞아 넘어지면서도 그대로 바닥을 한 바퀴 굴러 비어 있는 상대의 옆구리 쪽으로 또 몽둥이를 내질렀다.
“으억!”
거기에 맞은 상대 역시 옆구리를 붙잡고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와아아! 저 꼬마, 보통이 아니잖아?”
“쉽게 끝나질 않네. 다섯 번째까지 가겠어!”
구경꾼들은 릴리에트에게 돈을 더 거는 것 같았지만 릴리에트에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피로가 쌓여가며 몸도 점점 둔해지고 있었지만, 이번 상대를 이긴다고 해도 다음에 나오는 상대는 피로가 전혀 쌓이지 않은, 좀 더 강한 상대일 테니까 말이다.
헤이번 목장 근처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던 게 8시쯤이었으니, 슬라르한에게 말해두었던 ‘9시’는 이미 지났을 터였다.
‘슬라르한은 오지 않는구나…….’
처음에는 좀 섭섭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 같았다.
수사 명령서를 받고 슬라르한에게 보낼 때는 시간이 촉박해서 9시까지 여기로 오라는 메모만 달랑 넣었는데 앞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슬라르한이 보기에는 마치 덫으로 향하는 미끼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의 문제는 언제 자신이 황녀임을 밝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단 저 아이가 밖으로 도망치면 그때 계단을 막고 밝히자. 그게 그나마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일 거야.’
여기 모인 인간들이 저를 황녀 대우해 줄 거라는 기대는 이미 접었다.
격투와 도박에 미친 인간들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저를 죽이려 할지도 몰랐다.
문득, 왜 거기에 가 있었냐고 원망할 클리드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미안해요, 클리드.’
자신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애써주는 사람인데 그의 말을 안 듣고 오지랖 넓게 슬라르한을 도우려다 죽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릴리에트는 싸움 중인데도 갑자기 이 모든 게 너무 웃겨서 혼자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허어! 저, 저것 좀 봐. 웃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구먼! 이봐! 여기, 도박권 더 줘!”
주변에서 릴리에트의 웃음을 착각하고는 그녀를 마치 대단한 싸움꾼처럼 취급했다. 릴리에트는 그 기세를 몰아 몽둥이를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상대는 갑자기 쇄도하는 공격에 당황해서 주춤거렸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개싸움처럼 서로 때리고 맞는 난투가 시작되자 구경꾼들은 좋다고 환호를 질러댔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까만 머리의 노예 소녀는 조금씩 탈출 계단을 향해 물러서다가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조용히 발을 놀려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릴리에트만은 보았다.
‘눈치 빠른 아이네. 잘했어!’
릴리에트는 사람들이 노예 소녀에게 관심 갖지 않도록 “으아아아!” 하는 소리까지 질러대며 경비병과 싸웠다.
아이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인 피로와 통증이 팔다리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릴리에트보다는 체력에 여유가 있던 상대가 그 틈을 노려 치고 들어왔다.
“으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옆구리를 맞았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얻어맞은 쪽을 손으로 잡고 거리를 벌렸지만 기회를 잡은 경비병은 매섭게 몰아쳤다.
릴리에트도 최선을 다해 그가 내지르는 몽둥이를 막아냈지만 점점 내어주는 부분이 많아졌다.
“와아아!”
“끝내 버려!”
“꼬맹이! 좀 더 버텨! 버티라고!”
구경꾼들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방금 머리를 맞은 릴리에트에게는 그마저도 웅웅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여기서 죽는 건가……?’
머리를 한 번만 더 잘못 맞았다간 여기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와 열기, 관자놀이 위를 흘러내리는 땀, 역겨운 인간들의 환호, 새빨간 융단과 오렌지빛 등불 같은 것들은 생생히 와 닿는데, 황위 경쟁과 황궁, 클리드, 위르스 산 같은 것들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슬라르한이 내가 보낸 편지를 태워 버려야 할 텐데…… 그쯤이야 알아서 잘하겠지?’
그런 생각을 했을 때쯤, 경비병이 몽둥이를 크게 휘두르는 게 보였다. 팔을 들어 막아야 하는데, 팔을 들 수 없었다. 아까 공격을 막다가 어디가 또 부러진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아프다는 생각조차 안 들었다. 그냥 모든 게 멍했다.
그리고 그 몽둥이가 릴리에트에게 닿기 전, 뭔가가 와지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는 게 들렸다. 그러나 의식이 흐려지고 있던 릴리에트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 *
릴리에트의 말대로 바깥으로 빠져나온 노예 소녀는 숨죽여 주변을 탐색하다가 목장 입구 쪽에 웬 기사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들의 앞을 막아선 몇몇 경비병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소녀는 다짜고짜 그쪽을 향해 뛰며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여기에요! 도와주세요!”
절박한 소녀의 목소리에 플래티넘 블론드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릴리에트! 릴리에트가 보내서 왔어요! 도와주세요!”
소녀는 자신이 머뭇거리는 동안 자신을 살려준 소년이 죽을까 봐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런데 그 외침에 남자는 물론 그가 이끌고 온 기사단 전체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남자는 말에서 내려 소녀에게 급하게 다가왔다.
“어디냐!”
“저, 저 오두막, 지하예요! 죽을지도 몰라요. 많이 다쳤어요!”
그 순간 남자의 기운이 무섭게 일렁이며 주변을 짓눌렀다.
“타리크!”
“옛!”
“지금부터 설득은 없다! 막아서면 베어내. 황녀 전하가 안에 계시다.”
황녀라는 소리에 노예 소녀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자신들을 막아서던 경비병들의 목에 검을 겨누고 목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소녀의 안내를 받아 환락의 도박장 안으로 밀고 내려갔다.
“모두 꼼짝 마!”
타리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하 도박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타리크의 뒤를 따라 들어서던 슬라르한은 한 소년이 나무 몽둥이를 손에서 놓치며 천천히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보고 급하게 달려 나갔다.
“전하!”
주변에서 환호를 지르던 귀족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벤티악 기사단에 놀랐다가 슬라르한이 ‘전하’라고 부르며 소년을 안아 드는 것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릴리에트 솔렌 4황녀 전하 시해 미수 사건이다! 가담한 자들을 전원 체포하라!”
슬라르한이 소리치자 벤티악 기사단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우왕좌왕하던 귀족들은 물론, 노예 격투장과 도박장을 운영하던 황후 쪽 귀족들 역시 비밀 통로를 향해 도망쳤다.
그러나 벤티악 기사단의 속도는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돈을 두고 갈 수 없어 금고를 챙기던 이들은 비밀 통로 쪽으로 향하지도 못한 채 잡혔고, 비밀 통로로 도망치던 이들도 얼마 못 가 뒤를 잡혔다.
그리고 그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슬라르한은 정신을 잃은 릴리에트를 안고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전하! 릴리에트 전하!”
가발과 변장으로 잘도 숨겼지만, 슬라르한은 한눈에 그 ‘소년’이 릴리에트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의 편지를 의심하느라 늦게 출발한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슬라르한은 검대에서 작은 칼을 뽑아냈다.
그는 릴리에트의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작은 칼로 자신의 혀를 베었다.
그러고는 릴리에트의 고개를 받친 뒤 그녀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그의 혀에서 울컥 흘러나온 피가 뒤로 젖혀진 릴리에트의 목구멍을 향해 넘어갔다.
그의 혀가 빠르게 아무는 사이 릴리에트의 목구멍으로는 꽤 많은 양의 피가 넘어갔고, 그녀의 외상 역시 빠르게 사라졌다. 아마 내상도 나았을 터였다.
릴리에트의 호흡이 아까보다 안정된 것을 확인한 슬라르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자신이 릴리에트의 편지를 의심한 채 무시해 버렸다면, 오늘 여기서 릴리에트는 죽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불쑥 화가 났다.
‘자기 목숨까지 걸다니, 미친 건가?’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릴리에트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벌인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슬라르한은 한숨을 쉬며 릴리에트를 내려다보다가 엉성한 갈색 가발과 머리망을 벗겨냈다.
풍성한 분홍색 머리칼이 흩어지는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뒤에서 얼쩡대는 낌새는 느꼈지만 누군지 알고 있었기에 그냥 놔둔 터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봐라.”
슬라르한은 놀란 얼굴의 노예 소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소녀는 릴리에트의 얼굴만 바라보며 입을 뻐끔댔다.
“화, 황녀님……이신 거예요?”
“그렇다. 4황녀 전하시다.”
소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 모습이 가련했지만 사방이 난리통인 이 자리에서 슬라르한은 노예 소녀의 감정적인 면까지 신경 써줄 정신이 없었다.
“이름이 뭐지?”
“이름은…… 없어요. 그냥, 까만 머리라거나, 막내년이라고 불려요.”
“노예인가?”
“노예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그, 새엄마가 주는 밥을 먹은 다음에 좀 오래 자고 일어났는데, 이상한 곳이었어요.”
슬라르한은 소녀의 사정을 대충 짐작했다. 생활고에 자식을 팔아넘기는 것은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 중 하나였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의 사정 따위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이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갑자기 머리채를 잡혀 여기에 끌려온 것, 저를 데려온 남자와 이 도박장의 남자가 자신에게 어떤 방식의 싸움을 시킬지 고민하는 사이 릴리에트가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눕힌 것, 도망치려 했는데 출구 계단 앞에서 가로막혀 작은 격투판이 벌어진 것, 릴리에트가 저에게 이른 것까지 모두…….
“기사단이…… 올 거라고 했다고……?”
“네. 백금발에 굉장히 잘생긴 남자가 기사들을 끌고 올 거라고 했어요. 만약 저를 막으려거든, 릴리에트가 보냈다고 하라고…….”
슬라르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결국 릴리에트가 보낸 수사 명령서는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되었다. 황족 릴리에트는 이 음험한 소굴에서 위험에 처했고, 거기에 딱 맞춰 슬라르한이 들이닥친 것이다.
이 수사에 대해 그 누구도 꼬투리를 잡을 수 없다.
‘처음부터…… 정말로 나를 도우려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도대체 왜……?
슬라르한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릴리에트를 보며 앞뒤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다 반짝,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아……! 르한……!”
피의 효과가 돌며 그녀는 점점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끙차, 하며 일어나 앉는 릴리에트의 미소는 여전히 밝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아니, 제가 오지 않았다면 어쩌시려고……!”
“와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슬라르한은 말문이 막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슬라르한 벤티악 공작이니까, 만에 하나라는 가정을 무시하지는 못할 거라고…….”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왜 저를 도우시는 겁니까?”
“돕는다기보다는, 황실에서 당신에게만 가하는 차별을 중화한 것뿐이에요. 당신을 위한 거라기보다는, 그냥 황실에 엿 먹이는 내 방식일 뿐이고.”
씩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사방에서는 지금도 고함과 비명 소리, 철기가 부딪치는 소리 같은 게 가득한데, 릴리에트의 얼굴만 보고 있자면 재미있는 곳에 놀러라도 온 것 같았다.
그러나 릴리에트는 슬라르한의 당황은 본 척도 않고 노예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나를 살렸구나.”
“화, 황녀 전하…… 제가 무례를…….”
“아냐, 아냐! 내가 변장을 완벽하게 한 거지, 뭐. 다친 곳은 없어?”
소녀는 눈물을 어룽거리다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릴리에트가 걸어주었던 아티팩트 목걸이를 빼려 했다.
그리고 그 손 위로 릴리에트의 손이 올라갔다.
“놔둬. 이건 네가 걸고 있어.”
“하지만…… 이거…… 귀한 것 같은데…….”
“나보다는 너한테 필요한 물건 같으니까. 혹시, 너를 산 사람이 누군지 아니?”
“코제스 남작이라고 했어요. 저를 여기 데려온 사람이요.”
“으음…… 우리나라에는 노예 관련 법이 없지만 노예를 사유 재산으로는 인정하지. 내가 아무리 황녀라도 내 멋대로 다른 귀족에게 노예를 풀어주라, 마라 명령할 수 없어.”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에트는 그런 소녀의 품에 작은 돈주머니를 찔러주며 속삭였다.
“하지만 이런 난리통에 도망가면 황녀라고 해도 그 행방을 어떻게 알겠니? 안 그래?”
소녀의 물기 어린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졌지만 릴리에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제 가발 위에 고정돼 있던 모자를 뜯어내 소녀에게 씌워줬다.
“……가.”
소녀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슬라르한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릴리에트는 슬라르한의 양 뺨을 붙잡고 자신만을 바라보게 한 뒤 소녀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벤티악 공작께서는 다친 황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실 거야.”
소녀는 슬라르한이 정말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용기를 얻었는지 슬그머니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언젠가는 이 은혜를 꼭 갚을게요.”
“하하하!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게 은혜를 갚는 법이야. 얼른 가.”
소녀는 릴리에트와 슬라르한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몸을 돌려 난장판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소녀의 모습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릴리에트에게 얼굴을 붙잡힌 슬라르한은 장난꾸러기 같은 릴리에트의 눈을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
“도망 노예의 인생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얼마 안 가 잡힐 겁니다.”
“글쎄요. 그건 모를 일이죠.”
“이런 식의 자비는 무책임합니다.”
“확정적인 개죽음과 비확정적인 삶. 그중에 후자를 준 거예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지 아닌가요?”
“그것도 모를 일 아닙니까. 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지.”
“슬라르한이 여기에 올지 말지, 그것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슬라르한은 여기 왔잖아요.”
슬라르한은 뭐라고 더 반박하려고 입만 벙긋거리다 말았다. 그러고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제가 전하의 경쟁자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네. 그것도 가장 강력한 경쟁자일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그렇다면 아까 일을 제가 고해바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계시겠군요.”
“하지만 당신은 안 그럴 테니까.”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하하하! 제가 잘못 짚었다면 어쩔 수 없죠, 뭐. 그건 그때 가서 수습하면 될 문제고요.”
“…….”
“하지만 당신은 안 그럴 거예요. 억울하게 억압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당신이 무시할 수 있을까?”
슬라르한은 릴리에트를 말로 이길 마음을 접었다.
그때, 타리크가 나타났다.
“아래쪽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렌셔 전하께서 황실 기사단을 끌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 말에 릴리에트가 ‘풉!’하고 웃었다.
“르한이 밀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네요?”
“그렇군요. 아마…… 이 일로 제게 올가미를 씌우려 했나 봅니다.”
슬라르한은 자신이 너무 안일했음을, 그리고 릴리에트가 생각보다 상당히 날카롭고 똑똑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곤란해질 게 뭐가 있어요? 그 유명하다는 도박장 좀 구경하러 나왔는데, 황녀도 못 알아본 인간들이 저를 상대로 몽둥이를 휘둘러 댔다고요. 내가 여기 온 게 불법인가요?”
“아니죠.”
“그럼 내 안위가 위협당할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 미리 수사 명령서를 받아놓은 게 불법인가요?”
“아닙니다.”
“내 안위를 지켜줄 상대를 내가 골랐다는데, 그게 잘못한 일인가요?”
“황녀 전하의 특권이십니다.”
“그럼 제가 렌셔한테 쫄 필요는 없겠네요. 그렇잖아요?”
슬라르한은 왠지 릴리에트의 기세에 제가 말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이 모든 상황이 가볍고 우습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혀 그럴 필요 없으시죠.”
“그럼 잘생긴 얼굴에 주름 만들지 말고, 나랑 같이 렌셔나 엿 먹이러 가요. 저 잘난 맛에 사는 놈 얼굴이 와그작 구겨질 텐데,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릴리에트는 말 그대로 ‘낄낄’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는 제 몸을 여기저기 둘러봤다.
“어? 나 왜 멀쩡하지?”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회복 아티팩트를 가져왔습니다.”
“아하! 역시 슬라르한!”
릴리에트는 엄지를 올려 보이며 밝게 웃었다. 그러고는 딱딱하게 굳은 타리크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툭 치고는 슬라르한의 뒤를 따라나섰다.
모든 게 정리된 도박장 안으로 렌셔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무도한 짓입니까, 벤티악 공작! 수사 명령서도 없이 귀족의 사유지를 침범하다니요! 선대 공작께서 그리 가르치셨습니까?”
슬라르한의 자존심을 긁으려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에게 일단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 뒤 품에서 수사 명령서를 꺼냈다.
“그리 배우지 않았기에 이렇게 수사 명령서를 들고 왔습니다만.”
“뭐? 수사 명령서를…… 갖고 있다고?”
“왜 그리 놀라십니까? 마치, 당연히 없을 줄 아셨다는 듯이 말입니다.”
“누, 누, 누가! 잠깐, 그것 좀 이리 내보십시오.”
렌셔는 슬라르한의 수사 명령서를 낚아채듯 받은 뒤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미심쩍은 눈을 들어 물었다.
“여기에는 분명 ‘황족의 안위를 위협하는’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군요.”
“네. 그리고 이곳에서는…….”
“내가 죽을 뻔했거든, 렌셔 오라버니.”
릴리에트가 빙긋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릴리에트를 발견한 렌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네가 왜……!”
“내가 요새 위르스 산, 아니면 황실 도서관에 처박혀 산 거 알지? 그런데 이제 조금 짬이 났거든. 그래서 뭘 할까 알아보는데, 여기가 그렇게 재미있다더라고. 그래서 왔지.”
“하지만……!”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할 게 뻔하잖아. 그래서 어떻게 하면 몰래 오면서도 내 안전을 확보할까 하다가…… 황실의 영원한 검이라는 벤티악 공작가가 떠올랐지 뭐야?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고.”
릴리에트는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현재 슬라르한을 가장 경계해야 할 황제 후보 릴리에트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렌셔도 말문이 막혔다.
“자, 그럼 서로 오해는 풀린 거지? 일 다 끝났으면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황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벤티악 공작.”
슬라르한은 포박한 현행범들을 줄줄이 엮고 한밤중에 황실 치안청으로 향했다.
릴리에트는 얌전히 제 방으로 돌아가 푹 쉬었고, 슬라르한은 세 번째로 과제를 해결한 황제 후보가 되었으며, 렌셔는 헛물만 켠 꼴이 되고 말았다.
* * *
슬라르한이 불법 노예 격투장 문제를 해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에트 역시 위르스 산의 온천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네 명의 후보 중에서는 가장 늦은 해결이었지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게다가 온천을 발견하고 돌아왔다는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올해 후보들의 점수를 놓고 도박이 걸렸을 만큼 귀족들의 모든 관심사는 황위 경쟁에 쏠려 있었고, 그 사이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 겨울맞이 연회가 다가왔다.
슬라르한은 여성 파트너 없이 타리크와 둘이서만 연회에 참석해서 구석에 머물렀다.
물론 타리크는 그게 불만이었다.
“이왕 참석한 연회니까 다른 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춤도 좀 추시고요.”
“나와 처음으로 춤을 춘 사람에게 관심이 쏠릴 텐데,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런 화제는 만들고 싶지 않군.”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니만큼 의도치 않은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타리크는 슬라르한이 너무 조심성 많다고 여겼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여태 핍박받아 왔지만, 이제는 좀 과감해져도 될 텐데 말이다.
슬라르한은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냉랭한 장막을 쳤고, 흘끔대는 눈길을 모르는 척했다.
점수 발표 자체는 걱정하던 것보다 잘 나왔다. 네 명의 후보 중에 3위였지만 1, 2위와의 격차가 크지는 않았으니까.
“적당히 분위기 보다가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쩝.”
“자네는 좀 더 있다가 와도 돼.”
“아, 아닙니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기까지 하는 타리크는 조금 아쉽기야 했지만, 그렇다고 슬라르한을 혼자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뭔가 환한 기운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 같더니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슬라르한을 불렀다.
“즐거운 겨울맞이 연회인데 여기만 어두침침하네요. 둘이서 뭐 하세요?”
생글생글 웃는 릴리에트였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아이참, 그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요. ‘안녕, 릴리.’라고만 하면 그만인데. 그렇죠, 디넬 경?”
릴리에트는 불법 노예 격투장 사건 이후로 부쩍 슬라르한을 친밀하게 대했다. 어디서 마주칠 때마다 ‘르한!’ 하고 그의 애칭을 부르며 손을 붕붕 흔들어 슬라르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또 이 꼬맹이가……!’
타리크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아직 어린 황녀를 쏘아봤지만, 슬라르한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예의를 다했다.
릴리에트는 슬라르한에게 몇 마디 농담을 더 던지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렇게 구석에 숨어 있으니까 아무도 르한한테 춤추자고 하지 않는 거잖아요. 자, 내 손 잡아요. 나랑 한 번 추고 나면 다들 용기를 내서 다가올 거예요. 모처럼 참석한 파티인데 디넬 경하고 둘이 이러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잖아요. 안 그래요?”
타리크는 릴리에트가 하는 말이 우스웠다. 슬라르한이 원하기만 하면 누구와도 춤출 수 있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제 주군의 노력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황녀는 마치 슬라르한에게 사교성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처럼 매도하고 있었다.
릴리에트 덕분에 노예 격투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건 분명 고마운 일이었지만, 타리크는 이 황녀를 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슬라르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안 그래도 노예 격투장 문제 이후 그는 릴리에트 생각을 끊어낼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밝게 웃던, 늘 희망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이던 릴리에트.
그녀가 마치 눈부신 햇살같이 느껴졌다. 그 햇살이 비추는 곳에 늘 함께하고 싶어질 만큼.
‘정말 저 손을 잡아도 불쾌해하지 않을까? 혹시 내가 눈치 없이 구는 건가?’
슬라르한이 릴리에트의 손을 바라보며 고민하자 릴리에트는 손을 팔랑거리며 재촉했다.
“팔 아프니까 얼른 잡아요. 잡을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그 말이 슬라르한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나와 춤을 춰주려는 거…… 맞겠지?’
슬라르한은 크게 심호흡하고는 릴리에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런데 릴리에트는 그의 노력을 비웃듯 그의 손을 덥석 잡아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멀리 서서 춤추려는 건 아니죠?”
릴리에트에게서 옅은 분 냄새가 났고, 때마침 베르섬의 ‘달빛 왈츠’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슬라르한은 릴리에트의 허리를 가볍게 잡고 왈츠의 첫발을 내디뎠다.
“의외로 춤을 잘 추시네요? 저는 의외로 춤을 못 춰요. 춤 연습을 빠지고 검술 훈련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대련하는 쪽이 좀 더 실력이 나을걸요?”
종알대는 입술이 귀여웠다. 그녀의 평소 행실을 떠올리자면 그녀가 춤을 못 추는 것은 예상되는 사실이었지만.
‘같이 대련해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몇 가지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와 대련하려 한다면 클리드 카시르가 절대 가만둘 리 없었다.
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릴리에트는 계속 종알대며 그를 약 올리려 했다.
정작 그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는데도 그녀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그를 놀리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농담했지만, 그녀의 잡담에는 황위 경쟁 후보들끼리 나눌 법한 신경전이나 숨겨진 뜻이 없었다.
오히려 릴리에트가 자신을 다독여 준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춤추는 게 이렇게 즐겁기만 하다면 오늘 밤새도록 춤춰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곡이 끝나자 릴리에트는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슬라르한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더 붙들지 못했다.
“춤춰주셔서 감사했어요. 주제넘게 충고 한마디 하자면, 이대로 저 구석으로 돌아가지 말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한테 말도 걸고 아가씨들한테 춤 신청도 하고 그러세요. 이대로 낙마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저를 위해 춤 신청을 해주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고고한 슬라르한 벤티악 공작께서 처음으로 춤을 춘 여자가 되었으니, 저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지 않았겠어요?”
릴리에트가 턱을 치켜들며 얄밉게 말했지만 슬라르한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춤추는 게 그렇게나 이익되는 일이라면 아이리스 황녀가 가만있을 리 없다.
릴리에트는 지금도 귀족들의 시선이 슬라르한 그 자신에게로 쏠리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저 멀리에 선 클리드의 표정이 영 안 좋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제가 릴리에트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면 오히려 제 영광이죠. 저와 춤춰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역시 르한은 성격이 참 좋네요. 나 같았으면 얄미워서 때리고 싶을 텐데.”
한쪽 눈을 살짝 찡긋대며 릴리에트가 이죽거리고는 그를 떠났다. 그 뒤를 시선으로 쫓자니, 아니나 다를까 클리드가 그녀를 타박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릴리에트는 전혀 위축되는 것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뭐라고 말대답할 뿐이었다.
슬라르한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클리드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는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연회나 사교계 같은 건 질색이었지만 릴리에트를 만나러 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할 만할 것 같았다.
여섯 살이나 어린 상대에게 이토록 반해 버릴 줄은, 여태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타리크는 릴리에트와 춤을 추고 돌아온 슬라르한에게 툴툴댔다.
“춤을 추시려거든 차라리 컬리넌 후작 영애와 추시지 그랬습니까? 왜 하필이면 저 황녀입니까?”
“자네라면 황녀 전하의 청을 거절할 수 있겠나?”
“아, 뭐……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릴리에트 황녀는 그다지 불쾌하지가 않아.”
“황족들은 다 한통속이라는 거, 잊지 마십시오.”
슬라르한은 타리크에게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지만 그의 곁을 오래 보좌해 온 타리크는 슬라르한이 릴리에트에게 유난히 무른 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차라리 렌셔나 아이리스 쪽이 속 편했다. 그들은 명백히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릴리에트는, 분명 경쟁자이면서도 묘하게 슬라르한을 돕곤 했다.
그렇다고 슬라르한에게 포섭될 낌새도 전혀 없었다. 그녀야말로 모든 황위 후보 중 가장 야심만만했으니까.
“돕는다기보다는, 황실에서 당신에게만 가하는 차별을 중화한 것뿐이에요.”
죽을 뻔했으면서도 장난기 넘치던 얼굴이 기억에 생생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타리크는 저도 모르게 슬라르한의 표정을 살폈다.
슬라르한은 여태 핍박만 받고 살던 사람이라 알게 모르게 이런 식의 호의에 약했다.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슬라르한은 뭐라고 대답도 하지 못하고 릴리에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타리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작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니, 슬라르한이 금방 추스를 터였다.
그런데 오늘 연회에서 릴리에트는 또 슬라르한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릴리에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되돌아오는 슬라르한을 보고 타리크는 직감했다.
‘망했다.’
타리크는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슬라르한을 흔드는 릴리에트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슬라르한에게 릴리에트가 클리드의 꼭두각시인 한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이며, 그녀가 베푸는 호의가 언제 예리한 비수로 되돌아올지 모른다고 신신당부했다.
“자네가 뭘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네.”
슬라르한은 씁쓸하게 웃다가 다시 벤티악 공작으로서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릴리에트의 충고대로 연회장을 다니며 그동안 안면을 텄던 귀족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의 딸과 춤도 한 번씩 추었다.
‘괜찮은 건가……?’
타리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이 연회장에 온 뒤로 내내 음울한 기운을 뿜어냈던 슬라르한이 마치 릴리에트와의 춤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은 일이기는 했지만 타리크는 떨떠름한 기색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벤티악 공작 저의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서는 슬라르한의 짙은 한숨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난 도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야…….’
그의 주변으로는 그의 검에 난자된 연습용 허수아비들이 흩어져 있었다.
생각을 끊어내려고 아무리 검을 휘둘러 봐도 저에게 장난처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격려해 주던 릴리에트의 잔상을 눈앞에서 치워낼 수 없었다.
아울러 클리드와 연인처럼 춤추던 릴리에트의 모습 역시…….
저와 출 때와는 다르게 뺨이 발갰고, 클리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짝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릴리에트는 밝게 웃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댔고, 그 순간 클리드는 시선을 들어 슬라르한과 눈을 마주쳤다.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클리드 카시르가 눈치챘어.’
그 남자가 눈치챘다면 타리크의 말대로 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걸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데도 제 마음은 앞으로 내달리고만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캄캄한 밤 한가운데 그의 서러운 입김이 하얗게 피어났다.
* * *
“그 망할 것이!”
분에 찬 렌셔가 의자를 걷어차자 손잡이며 다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던 의자가 넘어져 부서지며 큰 소리를 냈다.
반년이나 지난 지금도 릴리에트 때문에 슬라르한을 놓친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속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 그녀가 슬라르한을 도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한 수작인 것 같았다.
슬라르한이 그 문제를 해결한 덕분에 겨울맞이 연회에서는 자신이 최하 점수를 받았고, 올해 봄맞이 연회에서도 저보다 슬라르한이 더 주목받은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 오늘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놀리기까지 했다.
“렌셔 오라버니야말로 좀 분발해야겠던걸? 황후 소생 1황자라는 건 아무 점수도 못 받는다고. 심지어 요새는 이제야 사교계에 발 들인 거나 마찬가지인 슬라르한에게도 밀린다며?”
실실대는 그 면상에 따귀라도 날릴 수 있었다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니, 따귀 정도로는 이 분노가 풀릴 수 없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릴리에트!’
그는 자신이 먼저 릴리에트에게 저런 것도 황녀냐느니, 천박하다느니 하며 시비를 걸었던 것은 깡그리 잊었다.
그저 황실의 적장자인 자신이 황위 경쟁에서 최하위라는 이 ‘잘못된’ 현실에 대한 분노를 전부 릴리에트에게 쏟아부어 복수하고 싶을 뿐이었다.
노예 도박장 사건 때 슬라르한을 낙마시킬 수만 있었다면 경쟁자 한 명을 치우는 것뿐만 아니라 황제의 치하를 받을 수도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보너스 점수라도 크게 주었을 테니 경쟁에서도 자신은 꼴등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전부 릴리에트 탓이었다.
한참 집기를 부수며 분풀이를 하던 렌셔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엘로르를 찾아갔다.
봄을 만끽하며 야외 티타임을 갖고 있던 엘로르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제 오라비를 보면서도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것 외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에요?”
“릴리에트 그 계집애를 없애 버려야겠어!”
이복동생을 죽이겠다는 소릴 하는데도 엘로르는 놀라기는커녕 코웃음을 쳤다.
“제가 전부터 말씀드렸잖아요. 걔는 없애 버려야 속 편할 거라고. 그때는 내가 클리드한테 눈이 멀어 헛소리를 한다더니, 꼴 좋네요.”
“그래, 그때 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제기랄! 이 계집애가 나를 능멸하는 게 도를 지나쳤다고.”
엘로르는 찻잔을 들며 작게 웃었다.
“더 고민하지 말고, 사람을 사서 없애 버리세요.”
“굳이 사람을 살 필요가 있나? 황궁에 널린 게 호위 기사들인데.”
황족을 호위하는 게 임무인 귀족 기사에게 황녀 암살을 사주하겠다는 렌셔의 발언에 엘로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진짜 오라버니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귀족인 그들이 감히 황녀를 죽이려 들겠어요? 그리고 말이 새어 나가는 것도 문제고요.”
“그, 그럼…….”
“평민 살수에게 죽일 대상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지 않고 그저 그 방에 있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돼요. 평민이 귀족과 말 섞을 일도 없을 테고, 자기가 누굴 죽였는지도 모르니 말이 새어 나갈 염려도 없죠.”
“아, 그렇구나!”
엘로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게 제 오라비이자 황위 후보라니 속이 다 터졌다.
“실력 좋은 살수를 사세요. 그리고 한밤중에 몰래 릴리에트의 방에 들여보내는 거죠.”
“그쪽 호위 기사들은 어쩌지?”
“수면향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피워서 호위 기사들과 시녀들을 재워 버리면 돼요. 그건 제가 구해다 드릴 테니, 오라버니는 살수들이나 구하세요.”
“그, 그래! 고맙다, 엘로르!”
렌셔는 기쁜 낯빛으로 돌아갔고 엘로르는 그 뒷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렌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따라와 보길 잘했군.’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가던 슬라르한은 렌셔가 어딘가로 급히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몰래 뒤를 밟았다. 붉으락푸르락한 렌셔의 낌새가 수상했기 때문이다.
고작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제 이복동생을 죽이려 드는 모습을 보며 슬라르한은 처음으로 황제에게 조금이나마 감사를 느꼈다.
과거의 방식대로라면 렌셔는 태어나자마자 황태자가 되었을 테니, 하마터면 2대에 걸쳐 제국을 말아먹을 황제가 나올 뻔하지 않았나.
하지만 황위 경쟁에서 렌셔가 이길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적어도 현 황제는 다음 대의 제국을 구한 거나 다름없었다.
슬라르한은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릴리에트를 찾아 나섰다.
자신의 피를 마신 그녀를 찾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사실 이럴 생각으로 피를 먹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마음이 생기고 보니 그때 제 피를 먹여두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에트가 알면 소름 끼쳐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릴리에트는 인적이 드문 후원의 외진 곳에 있었다.
‘또 수업을 빠지셨나 보군.’
슬라르한은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참아가며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릴리에트는 벌렁 드러누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순진한 아가씨가 밝게 미소를 지었죠. 사랑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었답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빙글빙글 춤을 추었죠. 나의 마음도 빙글빙글 춤추었답니다.”
슬라르한은 조금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모르는 노래였지만 곡조나 가사가 절대 귀족들이 듣거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다. 아마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노래 같았다.
아마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부른 노래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릴리에트에 대한 사랑을 자각한 슬라르한으로서는 그게 마치 자신의 사랑을 빗대어 노래한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래에 소질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릴리에트가 너무 놀라지 않길 바라며 슬라르한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도 어딘지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맞았다.
“어? 르한!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황제 폐하를 뵈러 왔다가 잠시 산책 중이었습니다.”
“여기를요……?”
릴리에트가 볼 것 없는 후원을 두리번대다가 피식 웃었다.
“제 목소리가 마음에 드신다면 르한을 위해 특별히 한 곡 더 불러 드릴 수 있어요.”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는 콧잔등이 귀여웠다. 슬라르한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근처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릴리에트는 꽤 놀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지는 않았다. 이내 목청을 흠흠 가다듬더니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한 곡조 뽑아 올렸다.
“차가운 한 줄기 바람 아래, 순결한 흰 꽃이 피었네. 꺾여라, 꺾여라, 눈보라가 몰아쳐도, 작고 하얀 꽃잎은 지지 않았네…….”
아까 불렀던 노래처럼 평민들 사이에서나 유행할 노래였지만 가사가 왠지 슬라르한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아,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이다지도 춥고 시린 동토의 하얀 꽃잎. 하지만 그대여, 잊지 말아요. 아무리 춥고 아프다 하여도, 나의 사랑은 지지 않음을.”
노래가 끝났는데도 슬라르한은 곧바로 이야기하거나 움직일 수 없었다. 릴리에트가 부른 노래를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놓듯, 그는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다가 겨우 입을 뗐다.
“좋은 노래군요.”
릴리에트는 노래를 잘 부른다는 칭찬에 기분 좋게 웃다가 살짝 뾰족한 기세를 담아 말했다.
“그럼 저는 노래도 잘 부르는 황제가 되겠네요.”
슬라르한은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눈앞에 닥친 위험부터 피해야 했다.
“노랫값으로 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호위를 철저히 하시고 렌셔 전하를 조심하십시오. 지금처럼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예?”
“당분간 다른 곳에서 주무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슬라르한은 어리둥절한 릴리에트의 팔뚝을 붙들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 팔뚝에서 단단한 근육이 만져졌다.
릴리에트는 이런 사람이었다. 장난기 많고 순진하고 해맑으면서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야망이 있으면서도 정의감을 잃지 않는다.
이렇게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이 황제여야 했다.
슬라르한은 릴리에트를 경비병들이 보이는 곳까지 끌고 간 뒤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그리고 이틀 뒤, 릴리에트는 슬라르한이 무엇을 경고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침대 안에 베개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놓고 분홍빛 가발까지 얹어둔 채 다른 곳에서 잤더니 누군가가 그녀의 침대를 난자해 놓았기 때문이다.
속에 들어 있던 게 베개라는 것을 알고 더 화가 났는지, 침대 주변이 깃털로 뒤덮일 정도로 침대 위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렌셔를 조심하랬지? 그럼 이건 렌셔 짓이라는 소리네?’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저에게 또 괜히 시비를 걸길래 속을 박박 긁어주었더니 그 인간은 곧바로 ‘죽인다.’라는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따위 정신으로 어떻게 황제가 되겠다고…… 쯧.’
소식을 듣고 달려온 클리드의 표정도 굳어졌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으니, 따지기도 어렵겠군요.”
“따질 생각 없어요. 나도 그냥, 경고만 해줘야지.”
릴리에트는 전혀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클리드에게 부탁해 받은 상자에 난도질당한 베개를 넣었다. 주변에 흩어진 깃털도 넣어두고 그 위로는 적포도주를 조금 흩뿌렸다.
“전하, 지금 뭐 하시는…….”
“저도 렌셔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고요.”
빙긋 웃던 릴리에트는 상자를 꼼꼼히 포장하고 리본까지 두른 채 사람을 시켜 렌셔의 방에 몰래 갖다 두게 했다.
그러고는 하녀들에게 방을 깨끗이 치우게 한 다음 마법 스크롤을 써서 하녀들을 함구시켰다. 릴리에트의 방이 그 모양이라는 것은 그 짓을 벌인 이들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릴리에트는 짓궂게 킥킥거리며 클리드와 우아하게 티타임을 가졌다.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요? 누가 보낸 건지 ‘아무도’ 모를 텐데. 큭큭.”
그리고 그 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렌셔의 방에서는 또 엄청난 고함 소리와 뭔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렌셔는 릴리에트를 노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릴리에트에게 따졌다가는 그 베개가 릴리에트의 방에서 나왔다는 걸 어떻게 아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이 이야기는 암암리에 슬라르한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궁에 심어둔 자로부터 밀서를 받은 슬라르한은 저도 모르게 터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각하……?”
곁에 있던 타리크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지만 슬라르한은 입을 꽉 막은 채 어깨만 계속 들썩거렸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어. 역시 릴리에트랄까.’
자신 같았으면 금세 우울한 기분에 빠졌을 일에도 릴리에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를 향해 통쾌한 복수를 하고 낄낄대며 웃어넘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리크. 미안하네.”
“예? 아니, 뭐, 재미있는 소식을 들으신 것 같은데 좀 웃은 게 대순가요.”
허허 웃는 타리크에게 슬라르한은 속으로 한 번 더 미안하다고 전했다. 타리크의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릴리에트의 숭배자가 되어버렸으니까.
후보들의 첫 시험대였던 사냥 대회 이후 클리드는 슬라르한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슬라르한이 릴리에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릴리에트가 벤티악 공작을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 반대였어.’
릴리에트가 슬라르한에게 이유 모를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는 얼마나 경계심이 들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릴리에트의 애정을 꽉 붙들어둘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슬라르한은 굉장히 강력한 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속해서 관찰해본 결과, 릴리에트의 애정은 여전히 저를 향해 있었다.
결국, 릴리에트가 슬라르한에게 친절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슬라르한이 릴리에트에게 호감을 넘어선 감정을 품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아주 좋은 신호지.’
시키지 않아도 릴리에트가 슬라르한을 유혹해 왔으니 정말 몇 번이라도 입 맞춰주고 싶었다.
긴가민가하던 의심이 확신으로 돌아선 것은 겨울맞이 연회에서였다.
자신과 춤추는 릴리에트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같은 남자로서 그 안에 어린 연정을 모른 척하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그 뒤로 슬라르한은 은근히 릴리에트를 도왔다.
물론 그의 평소 성품을 생각한다면 여태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상대를 돕는 것을 당연히 여길 만도 했지만, 황위 경쟁은 그런 선의로만 따지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린 게임이었다.
수많은 정보를 끌어모아 입체적으로 생각해 보던 클리드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슬라르한 벤티악은 릴리에트를 사랑해. 그리고 그녀를 황제로 만들 생각일 확률이 높아.’
슬라르한은 아이리스와 렌셔에게는 가차 없었지만 릴리에트에게는 언제나 한발 물러서 주었고, 아이리스와 렌셔가 릴리에트에게 가하는 위협을 끊어내 주기도 했다.
그가 황위를 목표로 했다면 차라리 공식적으로 사례를 했지, 이런 식으로 양보하는 양상을 보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느 정도 슬라르한의 마음을 확신한 클리드는 릴리에트가 테르소에서 아말 족을 소탕하고 그녀에게 주로 배정되는 황실 기사단을 확실히 휘어잡게 되었을 때쯤, 비밀스럽게 벤티악 공작 저를 방문했다.
그를 30분쯤 기다리게 한 슬라르한은 딱히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자리를 권했다.
클리드 역시 이런 것 가지고 실랑이를 벌일 생각은 없었다.
하인이 들고 온 차를 마시던 그는 사람을 물리길 청한 뒤 잠시 뜸을 들이며 슬라르한을 관찰했다.
명백히 적개심을 띤 눈빛이었다. 슬라르한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포커페이스를 만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게 조금 흥미로웠다. 아마 자신과 릴리에트의 관계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말문을 먼저 연 것은 슬라르한이었다.
“보내주신 편지만 봐서는 오늘 방문하신 목적을 잘 모르겠던데, 극비로까지 하면서 오신 이유가 뭡니까?”
클리드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뭐, 간단합니다. 릴리에트 전하께서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벤티악 공작의 부와 명예, 권력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가신들의 처우까지 적극적으로 개선해 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슬라르한은 그저 딱딱하게 굳은 채 클리드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예. 어차피 벤티악 가는 황위에 그다지 관심도 없잖습니까. 그런 분께서 본인이 맡은 가신들의 안위 때문에 억지로 진흙탕 같은 권력 싸움에 내몰리신 것뿐일 테지요. 안 그렇습니까?”
슬라르한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릴리에트 전하는 그 진흙탕에 내던져져도 괜찮다는 소립니까?”
릴리에트의 이름이 나오자 클리드가 씩 웃었다.
“릴리에트 전하도 결국 권력의 진흙탕 한가운데서 태어난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직접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도 되게 제가 존재하는 거고요.”
클리드는 향기로운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짐짓 곤란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여러모로 어려움은 있죠. 아이리스 전하나 렌셔 전하께 그동안 너무 밉보였어요. 그들은 벤티악 공작보다는 여태 만만하게만 봐왔던 릴리에트 전하가 자신들을 제쳤다는 사실에 더 분개하더군요.”
“확실히…… 릴리에트 전하께서 여태 두각을 보이시지는 않았으니까요.”
“특히 렌셔 전하나 엘로르 전하께서는 릴리에트 전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죠. 황녀가 검을 들고 설치는 게 천박하다나요?”
“여성도 충분히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릴리에트 전하께서는 훈련도 열심히 하시는 것 같던데, 그걸 천박하다고 표현하는 그분들이 이해가 안 되는군요.”
클리드의 예상대로 슬라르한은 아이리스와 렌셔에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뭐, 릴리에트 전하가 그런 얘기에 위축되는 분은 아닙니다. 반드시 황제가 되어 썩어빠진 이 나라를 고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얼핏 보기에도 황제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신 것 같더군요.”
“네. 제가 그분께 요구하는 일들이 결코 쉬운 것들이 아닌데도 그분은 어떻게든 해내십니다. 사실 저보다 한참 어린 분이지만 때때로 감동할 정도죠. 이번에 테르소에 가서도…… 아, 죄송합니다. 테르소 얘기는 공작께서 불편하실 텐데…….”
“아닙니다. 이미 지난 일이기도 하고요.”
테르소의 아말 족 소탕은 슬라르한이 적극 지원한 일이었다. 릴리에트도 슬라르한이 가게 놔둬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지만 클리드는 점수 확보를 위해 무조건 테르소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황제는 릴리에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이르델이 죽었다는 랑깃 숲을 지나면서도 릴리에트는 슬라르한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정작 슬라르한은 대단치 않다는 투였다.
‘역시, 이 자는 릴리에트를 사랑해. 쯧쯧. 불쌍한 남자군.’
클리드는 무해한 것처럼 방긋 웃고는 다시 테르소 얘기를 이어갔다.
“테르소에서, 릴리에트 전하가 직접 아말 족 수장의 머리를 쳤습니다. 덕분에 기사단 전체의 충성을 맹세받을 수 있었죠. 솔직히, 웬만한 기사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잖습니까. 렌셔 전하라 해도 못 할 일일 겁니다.”
맞는 말이다. 아직 소문이 많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다들 놀랄 것이다.
하지만 슬라르한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테르소 출정을 명받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죽은 의혹을 묻어두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몰래 릴리에트 일행의 뒤를 밟았더랬다.
그리고 릴리에트가 아말 족의 본진을 찾아 헤맬 때, 슬라르한은 랑깃 숲을 뒤지며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실마리를 찾았다.
그리고 슬라르한이 어머니의 기운이 가득한 동굴을 찾아냈을 때쯤, 릴리에트도 아말 족의 본진을 찾아내고 그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만 돌아가자는 타리크의 제안을 뿌리치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릴리에트와 아말 족 수장 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닥치면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릴리에트는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상대의 목을 내리치고는 자신의 기사단을 향해 공격을 명령했다.
“충성스러운 나의 기사단이여, 적을 섬멸하라!”
그 카랑카랑한 외침에는 구경하고 있던 슬라르한마저 뱃속에 호승심이 들끓었을 정도였다.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해서 클리드의 얘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거기 갔던 것은 어디까지나 비밀이었기에 슬라르한은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요. 그 정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만인의 태양이 될 만한 분이십니다. 카리스마도, 야망도, 의지도 대단하죠. 거기에 벤티악 공작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슬라르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은 이 경쟁에서 승리할 생각이 없었다. 릴리에트가 황제가 되면 제 사람들의 안위만 챙기고 사라질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클리드에게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는…….”
“벤티악 공작. 제가 이런 제안을 드리는 이유는, 공작께서 이미 그러실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슬라르한도 놀란 기색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게 무슨…….”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사랑이 있지요. 그리고 저는…… 공작께서 숭고한 형태의 사랑을 택하셨다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두 사람이 앉은 집무실이 적막에 감싸였다. 슬라르한은 그대로 조각상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미동이 없었고, 클리드는 여유롭게 차를 마실 뿐이었다.
“카시르 영식. 지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굳이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까? 다른 이도 아닌 제 설명은 그다지 원치 않으실 것 같은데요.”
슬라르한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고, 여태 클리드를 빤히 쳐다보던 눈동자가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
클리드는 슬라르한을 너무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릴리에트 전하도 알고 계십니까?”
슬라르한의 낮은 질문에 클리드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그쪽으로는 영 눈치가 없으셔서요.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타인이 자신을 사랑할 거란 생각을 잘 못 하십니다.”
그 말에 슬라르한의 가슴이 아프게 찡 울렸다.
“카시르 영식은 어떠십니까?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클리드는 자신의 연기력을 다 끌어모았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공작께는 죄송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분만큼은 저도 양보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황제가 되신다면 어쩌실 겁니까?”
“제게는 황공하게도 그분께서는 저와 결혼하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그때가 되어봐야 아는 일일 테죠. 그때가 되어 전하의 마음이 달라지더라도, 저는 전하의 곁에서, 일평생 그분의 참모로 지내고 싶습니다.”
슬라르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가신들과 저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 주십시오.”
클리드는 속으로나마 주먹을 꽉 쥐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이던 슬라르한을 포섭했으니 앞으로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 그분들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단순히 말뿐인 맹세는 믿지 않습니다. 마법 스크롤을 쓰겠습니다.”
슬라르한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비싸디 비싼 서약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클리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제 주변 사람을 챙기는 것만큼은 철저한 슬라르한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슬라르한만 후보에서 치울 수 있다면 나머지 귀족들이야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없었다.
그날 밤, 슬라르한의 집무실에서는 슬라르한과 클리드 두 사람만 아는 은밀한 계약이 이루어졌다.
슬라르한 벤티악은 릴리에트 솔렌의 황위 등극을 돕고, 릴리에트가 이 경쟁에서 이기면 클리드 카시르는 벤티악 가를 지지한 가문들의 안위를 책임지기로.
마법 스크롤이 신비한 빛을 내며 발동하던 순간, 클리드가 나직이 물었다.
“정말로…… 그녀를 갖지 못한다고 해도 희생하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슬라르한은 스크롤이 내뿜는 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건…… 그녀가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 그뿐입니다.”
클리드는 그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로서는 손해 보는 것 없는 계약이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슬라르한은 진심이었다.
릴리에트와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라 해도 황제가 황손들을 황적에서 파내지 않는 한 저와 릴리에트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런 릴리에트에게 자신은 고백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그 반짝이는 눈망울과 초여름 햇살 같은 미소가 언제까지고 지켜지기를 바랐다.
자신은 그저 먼 곳에서 그녀의 미소를 훔쳐보는 것으로 이 음습한 마음을 채울 수 있기를, 고작 그것만을 바랐을 뿐이다. 어차피 자신 같은 이에게 대단한 사랑이 허락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고작 그것을 바랐다 하더라도 이것이 이기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슬라르한은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만 믿고 제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하는 타리크에게는 더욱 미안했다.
하지만 살면서 딱 한 번만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그는 이 나라의 황제 따위는 조금도 되고픈 마음이 없었고, 릴리에트 같은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해 그녀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슬라르한도 타리크가 릴리에트의 검에 찔려 돌아왔을 때는 온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는 타리크를 막사로 데리고 들어간 뒤 사람들을 물리고는 자신의 손날을 칼로 그었다.
“마셔. 어깨가 더 망가지기 전에!”
슬라르한이 피가 흐르는 제 손날을 타리크의 입 앞에 갖다 댔지만 타리크는 피를 마시는 대신 슬라르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그 맹랑한 황녀 전하가, 의외로 실력이 좋던데요.”
“지금 그런 소릴 할 때인가! 어서 피를 마시라니까!”
하지만 심각한 슬라르한과는 달리 타리크는 클클대며 웃었다.
“처음에는 곱게 자란 황녀가 기사를 우습게 보고 검을 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싫어했습니다. 각하께 농지거리하는 것도 각하를 무시해서 그러는 것 같아 화가 났고요.”
갑자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타리크가 답답해서 슬라르한은 다시 손날을 긋고는 다짜고짜 그의 입에 물렸다.
간신히 그의 목으로 피가 넘어갔고 어깨의 상처도 점점 아물어 갔지만 어딘지 멍해 보이는 타리크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카스틸로 잔당놈들을 쓸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에 릴리에트 황녀밖에 없더군요.”
“설마…….”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저 여자만 죽여 버리면 각하께서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슬라르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데 클리드 카시르의 꼭두각시라고나 생각했던 그 여자가, 제 검을 다 막아내는 겁니다. 제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봤자 저를 이길 수는 없었을 텐데…….”
타리크는 도망치지도 않고 이를 악문 채 저에게 맞서던 릴리에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눈물을 보이는 겁니다. 그 순간에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때 그는 당황해서 멈칫했다. 고작 여자의 눈물 때문에 멈칫한 게 아니었다. 그때 릴리에트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르한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그리고 거기에 타리크가 멈칫한 사이, 릴리에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어깨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제 어깨를 아예 잘라내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날카롭게 찔렀던 검을 곧장 뽑아내고는 다시 거리를 벌렸다.
어깨를 붙잡은 채 말에서 떨어진 타리크는 그녀가 제 목을 치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간단히 죽어주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떨어진 창을 붙들었지만 오른쪽 어깨를 못 쓰는 상태로는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망할…….”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한순간 생각했다. 자신이 릴리에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것을 릴리에트도 알고 있을 테니 저를 죽일 기회를 놓칠 리 없다고.
하지만 릴리에트는 멀리서 그를 보며 제 뺨을 훔치다가 멀어져갔다. 분명 이긴 것은 그녀인데, 그녀는 마치 패잔병처럼 어깨를 늘어트린 채였다. 그리고 덕분에, 타리크는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으로 돌아왔다.
“분명 찔린 건 전데, 왜 그 사람이 슬퍼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겠더군요.”
멍하니 릴리에트를 떠올리던 타리크가 그제야 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슬라르한과 눈을 마주쳤다.
“각하께서 그 사람을 마음에 두신 이유는 알 것 같았습니다.”
슬라르한의 가슴이 지끈대며 울렸다. 타리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타리크는 어쩌면 저에게 경고하던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하께서 이 경쟁에 뜻이 없으신 건 알고 있습니다. 릴리에트 전하를 도와주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미안하네, 타리크. 내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각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꼭두각시가 될 게 뻔한 이 놀음에 끼기를 싫어하셨잖습니까. 그런 각하의 마음을 무시한 채 억지로 밀어 넣은 건 저와 다른 가신들이라는 거, 압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타리크 역시 벤티악 공작가를 해하려는 황제의 음모 때문에 모든 가족을 사고로 잃은 남자였다. 그런데도 한 번도 벤티악 가를 원망한 적 없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충성했다.
그런 타리크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슬라르한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이자 친우이자 신하인 타리크는 그런 슬라르한을 오히려 감싸주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각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겠습니다.”
릴리에트의 검에 찔리고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타리크는 차분하게 슬라르한의 의중을 물었다.
가장 가까운 이의 진심에 슬라르한도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이 클리드와 맺은 계약과 모든 일이 끝나면 떠나려 한다는 계획을 말해주었다.
“미안하네, 타리크. 자네와 날 믿고 따라주는 이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 이런 나를 이기적이라 욕하고 떠나도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나는…… 나는 황제가 사는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각하께서 덜 힘드셨을 텐데…….”
“글쎄…… 황제 폐하가 그렇게 놔두셨겠는가. 어떻게든 나를 이 판에 내던지려고 작정하신 분인데…….”
슬라르한이라고 왜 ‘후보 자리를 포기한다.’라는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았겠는가. 그게 제일 쉬운 선택지인데 말이다.
하지만 제 아내들에게 복수심을 품은 황제는 슬라르한을 후보로 삼아 그 복수를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러고도 슬라르한이 불리한 상황을 만든 게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슬라르한은 자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덫에 걸려 이기면 황제의 꼭두각시, 지면 죽음인 게임을 억지로 끌어와야 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릴리에트, 그리고 클리드와의 협상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타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군요. 그동안 혼자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나는 괜찮아. 오히려 자네가 걱정이지.”
“제가 뭘요. 저야 각하께서 어떻게 되시든 그 뒤를 따를 뿐입니다. 어쨌든 그럼…… 차라리 잘됐습니다.”
“잘되다니……?”
“릴리에트 전하는 제가 창을 못 쓰게 됐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 진짜 못 쓰게 된 것처럼 구는 겁니다. 어차피 어깨가 갑자기 나으면 그게 더 의심을 살 일이죠. 어쨌든 앞에서는 창을 더 못 들게 된 것처럼 행세하고, 뒤에서는 미지의 인물이 되어 각하와 그분을 돕는 겁니다.”
슬라르한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타리크는 그저 웃었다.
“아마 뒤에서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실력자를 찾기가 쉽지 않겠죠. 그러니 제가 그 그림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스피어 마스터가 창을 못 쓰게 됐다고 하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조롱이 쏟아질지 모른다. 타리크는 그걸 감내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자네의 명예를 진흙탕에 처박을 수는 없어!”
“제 명예는 제가 알아서 챙깁니다. 잔챙이들 눈을 완벽하게 속인다면 그게 오히려 제게는 명예로울 일이지요. 그러니 각하께서 그렇게 괴로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타리크는 다시 큭큭대며 몸을 일으켰다. 슬라르한의 피를 마신 덕분에 어깨는 완벽히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슬라르한의 도움을 받아 붕대를 감고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곧, 타리크 디넬이 더 이상 창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 *
카스틸로 잔당 퇴치가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끝나고 다시 두 번째 해의 점수가 발표될 대축연이 시작되었다.
연회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슬라르한은 저도 모르게 릴리에트를 눈으로 좇았지만 릴리에트는 슬라르한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셰바란 지역에서 릴리에트는 슬라르한과 더불어 직접 군사를 지휘하며 카스틸로 잔당을 섬멸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덕분에 이번 점수 발표에서도 릴리에트는 1위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에 3위였던 슬라르한은 아이리스를 제치고 2위로 뛰어올랐다. 아이리스와 근소한 점수 차였지만 슬라르한이 금세 뒤처질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귀족들은 이 경쟁에 큰 흥미를 느꼈고, 귀족들이 모이는 클럽에서는 암암리에 도박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서 슬라르한이 작년보다 크게 주목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대축연 중에도 공공연히 흘러나왔다.
만약 타리크 디넬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카스틸로 잔당 퇴치에서 최고점을 받은 이는 슬라르한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슬라르한은 사람들의 지레짐작 따위는 무시한 채 조용히 샴페인을 들이켰다.
그때,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깐 긴장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공격할 것 같지 않기에 그냥 놔뒀더니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미안해요.”
목소리의 주인은 그 말만을 남겨두고 다시 멀어졌다.
슬라르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점수 발표에서 1위를 했음에도 떨떠름하게만 웃고 말았던, 그리고 내내 자신의 눈치를 살폈던 릴리에트, 그녀였다.
타리크가 더 이상 창을 들지 못하게 됐다는 소식에 어지간히 마음이 쓰였던 모양인지, 타리크 쪽으로는 아예 시선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더랬다.
‘이러니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있나…….’
슬라르한은 혼자 조용히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형제 같은 이를 찔렀다고 해도 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피어오를지언정 릴리에트에 대한 미움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타리크가 멀쩡하다는 걸 알아서 그런가 싶기는 했지만, 글쎄…… 만에 하나 타리크가 죽었어도 자신은 릴리에트를 증오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기적이고 배은망덕한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람 마음이 배운 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닌 것을.
슬라르한은 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릴리에트는 슬라르한이 저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말이다.
* * *
“황제 후보 평가 위원회의 공정한 심사 결과를 나 역시 받아들이는 바, 릴리에트 시야르드 솔렌을 후계자로 선언한다.”
“와아아-!!”
모두의 환호성 속에서 릴리에트는 황위 경쟁의 최종 승자로 발표되었다.
슬라르한은 클리드와 포옹하며 기뻐하는 릴리에트의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보며 조용히 기뻐했다.
슬라르한의 곁에 섰던 타리크는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었는데도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슬라르한은 정말로 마음이 편했다.
이제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챙겨 드리지 못했던 어머니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세는 평화롭게 돌아가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이비 종교가 수도에 창궐하더니 살인과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악의 기운이 온 수도에 만연했다.
그리고 그때 슬라르한은 자신의 힘에 대해 깨달았다.
사비 족과 공허의 문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힘을 각성시켜 준 그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지만 자신이 공허의 문 그 자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끊임없이 어둠의 힘을 자극했고, 슬라르한은 그때마다 홀로 숨어 폭주할 것 같은 자신의 힘을 억눌렀다.
그가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각성하고 이 세상에 어둠의 힘이 흘러넘치게 되는 순간 릴리에트 역시 죽는다는 사실을 늘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그 햇살 같은 미소가 피로 얼룩지는 것을 상상하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두지는 않겠다고 그는 매일 다짐했다.
릴리에트가 황제가 되어 태양처럼 군림할 그 날을 상상하며, 슬라르한은 고통을 묵묵히 버텼다.
다행히 흑마법사들의 음험한 시도는 예상보다 일찍 그쳤다.
흑마법사를 이용해 자신의 수명을 늘리려던 황제가 흑마법술 도중 목숨을 잃자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흑마법의 위험성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릴리에트는 흑마법사들을 축출하고 루트 교를 몰아낸 뒤 제18대 황제의 자리에 등극했다.
대관식의 릴리에트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사파이어가 박힌 황금의 관을 머리에 쓰고 모두를 돌아보던 릴리에트는 파르디나스의 새로운 태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눈부시도록 찬란했다.
‘그래, 이거면 돼. 나한테는 이것으로 충분해.’
슬라르한은 빛의 한가운데 선 것 같은 릴리에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대관식 절차가 끝나자마자 그녀와 클리드의 결혼이 발표되었을 때는 각오하고 있던 일이면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폭주하려는 어둠의 힘을 억누르는 쪽이 편할 정도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제야 슬라르한은 자신이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탐했구나…….’
문득, 그녀를 가지지 못해도 희생할 수 있겠냐던 클리드의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하게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행복뿐.’이라고 답했던 것이 이제 와 부끄러웠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릴리에트를 향한 질척한 욕망이 자라고 있었다.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내심 바랐던 모양인지, 클리드의 곁에 선 릴리에트의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팠고, 그녀의 사랑을 얻은 클리드에게 맹렬한 질투를 느꼈다.
단 한 번도 릴리에트가 자신의 사람인 적이 없었는데 왜 제 것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떠났다.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지만 여유롭게 주변을 더 정리하려던 마음을 접고, 도망치듯이 떠났다.
언젠가 참지 못하고 릴리에트에게 욕망을 드러내게 될까 봐, 리카온의 피를 지닌 자신의 추한 꼴을 릴리에트가 알아챌까 봐.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클리드 카시르는 추격대를 보냈다.
클리드와의 계약에 내걸었던 조건은 벤티악 가의 가신들과 자신을 도운 귀족들의 안위를 보장하는 것이었지, 자신의 안위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만약 자신의 안위까지 계약 조항에 넣었다면 클리드는 어떤 식으로든 그 계약 자체를 무효화하고 자신을 죽이려 들 것임을 알기에 일부러 자신의 안위는 계약에서 뺀 것이었다.
추격대쯤이야 따돌릴 자신이 있었고, 이렇게 되면 클리드도 굳이 큰 위험을 무릅써 가며 계약 마법을 깨트리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 이걸로 다 된 거야.”
슬라르한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어머니가 있는 사비 족 마을로 향했다.
사비 족 마을에서의 나날은 평화로웠다.
나무를 하고 장작을 패고 다른 사람들의 집수리를 도와주거나 사람들의 힘에 부치는 일을 대신 해주면서 지냈다.
품삯이라고 푼돈을 받기는 했지만 사실 딱히 돈이 많이 필요한 일도 없었기에 얼마를 받든 상관없었다.
수도의 타리크로부터 간간이 릴리에트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그리움을 삭였고, 시간이 얼른 흘러서 조용히 땅 밑에 묻히기만을 바랐다.
단지 그것만을 바랐는데…….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뒤 의식이 없으십니다. 황실에서는 원인불명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꺼림칙한 것은, 클리드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 황제 대리로 나선 것과 그동안 숨죽여 살던 황녀 엘로르가 갑자기 황제의 측근처럼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벌어진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계속 뒷조사를 해보겠습니다.
클리드가 릴리에트를 배신했다는 편지를 읽자마자 슬라르한은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분만큼은 저도 양보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던 클리드의 모습이 떠올라 속이 뒤집혔다. 그 모든 게 연극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릴리에트를 마귀의 손에 넘겨주고 왔다는 것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눈앞이 새빨갛게 변하던 와중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르한! 진정해라, 르한! 이 어미가 보이니? 르한, 제발!”
하지만 제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숨 막히는 열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녀가…….”
어떻게 그녀가 1년도 안 되어 황제의 자리를 빼앗길 수 있는가. 이건 뭔가 잘못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한 충격을 받은 슬라르한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뒤로 슬라르한은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던 마법에 미친 듯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식물인간이 됐다는 그녀를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었으니까.
놀라운 것은, 그 독은 원래 사람을 한 달 정도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릴리에트가 평소에 자주 먹던 각성제의 부작용으로 독에 내성이 생겨 버렸고, 덕분에 릴리에트는 죽지 않고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노는 다행이라고 했지만 슬라르한의 생각은 달랐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죠? 르한! 르한, 제발…… 제발 나 좀 죽여줘요! 제발!”
슬라르한의 귀에는 매일 밤 릴리에트의 절규가 들렸다. 그녀에게 먹인 피 때문에 의식의 공명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그 호소에 슬라르한은 심장을 저미는 듯한 슬픔을 느꼈지만, 그 역시도 릴리에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으니까.
대신 매일 그녀를 살릴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결국 릴리에트가 쓰러진 지 10년이 되었을 때, 슬라르한은 다시 한번 각성의 위기를 맞았다.
-귀족회의와 원로원의 만장일치로 릴리에트 시야르드 솔렌 폐위, 클리드 카시르 솔렌 즉위.
폐위 직후 릴리에트 전 황제 폐하 승하 및 라리에트 전하와의 재혼 발표. 다음 주부터 한 달간 국장.
급하게 날아온 편지를 읽은 슬라르한은 폭발해 버렸다.
릴리에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슬라르한은 알고 있었기에 더욱 분노했다.
그녀를 더는 황제라고도 부르기 싫어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 발표하고 황위를 빼앗다니, 심지어 국장을 치르기도 전에 재혼을 발표하다니, 인간들이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이 리카온으로 완전히 각성하기 직전, 마노는 다시 한번 그를 붙들었다.
“방법이 있다, 르한! 시간을 되돌리면 돼! 시간을 되돌려서 그녀를 구하면 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에 슬라르한의 한 조각 남은 이성이 빠르게 공허의 문을 닫았다.
“정말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어, 르한. 마법의 제물이 될 생명과 영혼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구할 수 있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마노는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금단의 마법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는 생명과 영혼 외에도 엄청난 마력이 대가로 필요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비밀로 했다. 어차피 시간이 되돌려지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일이었으니까.
마노는 영혼을 대가로 바칠 인간으로 엘로르를 택했다.
예상대로 엘로르는 쉽게 제 영혼을 내걸었지만 예상치 못한 조건을 내걸었다.
“릴리에트가 존재하는 한 이런 일은 반복될 수 있으니, 그년이 없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
그 소리에 슬라르한은 다시 분노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했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건 릴리에트가 아닌 엘로르 본인이었는데도, 엘로르는 자신의 모든 불행의 탓을 릴리에트에게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노와는 별개로, 슬라르한은 릴리에트가 황족이 아닌 다른 이의 몸에서 눈뜨게 된다는 조건에 동의했다.
‘릴리에트는 그 더러운 진흙탕 권력 싸움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녀가 더러운 정치판에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슬라르한은 알고 있었다.
황위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릴리에트는 엄청난 양의 각성제와 연초, 그리고 술을 소비했다.
그러고도 공식석상에서는 늘 찬란하게만 보이던 그녀였지만, 슬라르한은 리벤 호수의 표면과 같이 아름답게 빛나던 그녀의 눈이 점점 지쳐가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자리였으니 행복하리라 생각했는데…….
슬라르한은 릴리에트의 생명을 바칠 경우 그녀 역시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릴리에트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는 고요하고 어둑어둑한 솔레일 궁의 별실, 그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진 위에 놓인 침대에, 창백하고 바싹 마른 릴리에트가 누워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의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안녕, 릴리…….”
바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슬라르한이 인사를 건넸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건네던 인사. 하지만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었던 인사…….
그걸 이제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죽여달라는 네 부탁, 이제껏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어떻게든 널 살리고 싶어서…… 미안해. 내 욕심 때문에 널 너무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했어.”
슬라르한이 손등으로 릴리에트의 야윈 뺨을 쓸었다.
그것만으로도 릴리에트가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이제야 겨우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게 됐어. 아마 이것도 내 욕심이겠지만, 난 네가 이대로 사라지는 걸 참고 견딜 수가 없어. 미안해.”
릴리에트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죽여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다시 살려내려 해서 미안했다. 이 모든 게 릴리에트는 원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릴리에트를 사랑하게 된 뒤로는 지독히 이기적이기만 했던 나날이었기에, 슬라르한은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
“다시 돌아가게 되면…… 부디, 너답게, 행복하게 살아. 그렇게 살아줘.”
슬라르한은 릴리에트의 귓가에 속삭이다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 * *
10년이나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폐황제의 국장은 초라했다.
황실에서는 릴리에트가 너무 심하게 야윈 채 죽었고 한때 황제였던 사람의 추레한 모습을 공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완전히 뚜껑 덮은 관을 이용해 국장을 치렀다.
하지만 관 안은 비어 있었다.
클리드는 그 관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며 솔레일 궁 지하의 별실에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릴리에트를 떠올렸다.
지난 10년간 릴리에트를 살릴 방도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독을 제조한 흑마법사가 자취를 감춘 탓에 해독할 방법은 결국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반년 정도만 지나면 깨어날 수 있다던 엘로르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의식이 없을 뿐 건강 상태는 나쁘지 않던 릴리에트가 급속도로 안 좋아진 건 한 달 전쯤부터였다.
그녀의 상태를 본 의원이나 마법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언제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지금도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죽은 거나 다름없다던가.
하지만 클리드는 릴리에트가 정말로 죽은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제 인생의 유일했던 태양이 완전히 지는 모습을, 도대체 어떻게 맨정신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지난 10년간 매일, 릴리에트에게 독을 먹인 것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어…….’
모든 것은 릴리에트가 쓰러진 그 날부터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토록 원했던 황제 자리였지만 제 곁에서 함께 환호하고 축배를 나눌 릴리에트가 없으니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릴리에트……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네가 쓰러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바칠 텐데…….’
매일 하는 간절한 기도였지만, 엘룬은 배은망덕한 배신자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 클리드는 자신의 마지막을 손수 준비했다.
저만큼이나 릴리에트를 보고 싶어 하는 라리에트를 재혼 상대로 맞이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황실의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뒤 릴리에트의 국장 중에 라리에트와의 혼인을 올렸다.
그리고 부부의 첫날 밤, 클리드는 독한 술을 진탕 마시고 황후의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연 방안에는 싸늘한 얼굴의 라리에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셨네요.”
“아아…… 다들 한 잔씩 권해서 말이오.”
“선황제 폐하의 국장 중인데도 다들 술을 권하던가요?”
“그게 뭐 어때서?”
클리드는 혼자 쿡쿡대며 웃었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도 라리에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게 다 보였다.
“라리에트.”
“네, 폐하…….”
“내가 네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면, 믿겠어?”
그 순간, 라리에트의 눈에 불꽃이 튄 것 같았다. 클리드는 자신의 마지막을 짐작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술을 더 가지러 가는 척하며 뒤로 돌았다. 그게 라리에트의 마음이 더 편할 것이다.
그리고 짐작대로, 그가 뒤로 돌자마자 라리에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등 한가운데 날카로운 통증이 깊이 박혔다.
“크흑…….”
“끝까지, 언니를 모욕해? 이 천벌 받을 악마야! 지옥으로나 떨어져!”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라리에트가 악을 썼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릴리에트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쌓아뒀을지, 클리드는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라리에트…… 미안…….”
눈물을 쏟아내는 라리에트의 모습 위로 언뜻 릴리에트가 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침실의 문이 열리더니 베르트가 뛰쳐 들어와 라리에트를 부축했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제발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그는 클리드의 상태를 살필 생각도 하지 않고 피범벅이 된 라리에트를 둘러업은 채 밖으로 도망쳤다.
‘아…… 자네도,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클리드는 흐려져 가는 눈으로 그들의 잔상을 그리며 옅게 웃었다.
주변에 호위를 다 물리라 했으니, 운이 좋다면 베르트는 라리에트와 멀리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라리에트의 힘이 약했는지, 절명의 시간은 천천히 다가왔다. 그로서는 기쁜 순간이었다.
‘릴리에트…… 이제 곧, 너의 곁으로…….’
그러나 엘룬은 그에게 죽음의 자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 시간이 멈추었다.
* * *
릴리에트를 데리고 사비 족 마을로 돌아온 슬라르한은 곧바로 자신의 피를 내어 시간 회귀의 마법진을 그려냈다.
리카온의 피라서 그런지, 아니면 공허의 힘이 깃들어서 그런지, 마법진은 형형한 빛을 발하며 시전자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릴리에트의 생명과 엘로르의 영혼과 마노의 마력을 빨아들인 마법진이 발동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멈추었다.
마력을 빨린 뒤 쓰러지던 마노도, 광기 어린 눈으로 마법진을 바라보던 엘로르도, 어금니를 꽉 문 슬라르한도 모두 굳힌 밀랍 같았다.
공허의 힘을 따라 루엘미나 산기슭까지 다가간 흑마법사 카제야도, 라리에트에게 등을 찔려 쓰러진 채 미소 띠며 죽어가던 클리드도, 정신을 놓은 라리에트를 끌어안고 국경을 향해 말 달리던 베르트도…… 모두 찰나에 갇혀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간의 톱니바퀴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눈부신 빛이 사방에서 터지며 미래가 지워지기 시작했고, 모두의 영혼은 18년 전으로 돌아갔다.
다만, 자신의 몸을 찾지 못한 영혼 하나만이 허공을 떠돌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다가갔다.
까만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언젠가는 이 은혜를 꼭 갚을게요.”
언젠가 릴리에트가 살려주었던 노예 소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녀가, 돌아갈 곳 없던 릴리에트의 영혼에게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내주었다.
릴리에트는 영영 모를 일이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다.
릴리에트가 눈뜨면 매일 자신의 얼굴을 바라봐 줄 테니까. 그것으로 그녀는 만족했다.
그렇게, 슬픈 인생을 살았던 소녀의 몸에 황제의 영혼이 깃들고, 제각각의 염원이 일으킨 마법은 현실이 되었다.
* * *
건조하고 고운 모래를 밟는 데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피해 쉬다가 다시 모래 위를 걷기 시작한 낙타 다섯 마리가 사구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다시 사막을 건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방 숨이 막혔다. 해가 지고 있다지만 아직은 뜨거웠다.
그때, 맨 앞에서 걷던 일행이 소리쳤다.
“어? 오, 오아시스다!”
“뭐? 신기루 보는 거 아니냐?”
“신기루가 저렇게 또렷할 리가요!”
루벨파스트의 노예상 자칼은 제일 앞으로 나가 사구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오아시스가 있었다. 이렇게 가깝고 이렇게 또렷한데 신기루일 리는 없었다.
크지 않은 오아시스라 사람이 많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얼기설기 지어진 오두막이 서너 개 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근처 도시에서 오가는 이들이 지내는 곳일 뿐, 늘 머무르는 주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곳이 있었나?”
자칼은 다시 한번 지도를 펼쳐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막길을 지나다닌 세월이 10년을 한참 넘었건만, 이 오아시스 마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뭐, 이쪽으로 온 건 오랜만이니까 그사이 생겼는지도…….”
그는 지도에 점을 찍어 마을을 표시하고는 웅덩이로 다가가 낙타에게 물을 먹였고, 그의 일행들은 쇠로 된 삼발이와 작은 냄비를 꺼내 오아시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평소 다니던 길에 모래 폭풍이 일어난 것을 보고 조금 돌아가기로 한 것이었는데 오아시스가 있다니 행운이었다.
“여기서 물을 담으면 루벨파스트까지는 충분하겠지.”
“그럼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추야자도 좀 따가죠.”
그의 수하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자칼도 주변의 대추야자 나무를 올려다보며 주렁주렁 열린 대추야자를 확인했다.
그가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노파와 노파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소녀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엥? 여기도 사람이 살긴 사네?”
자칼은 바닥에 모래 먼지 가득한 침을 한 번 뱉고는 노파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오아시스의 대추야자는 소유자가 있을 수도 있어서 만약 저 할멈이 주인이라면 값을 치르고 가져가야 했다.
“어이, 할멈! 여기 대추야자, 파는 거요?”
그의 걸걸한 목소리에, 노파는 오아시스의 물처럼 파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자칼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묘한 분위기의 노파였다.
하얗게 센 머리와 자글자글한 주름, 곱은 손을 보면 분명 나이 꽤나 먹은 노인인데 이상하게 나이가 가늠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꼿꼿한 허리 때문인지, 조금도 두려움 없이 여유로운 표정 때문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 노파는 자칼을 보며 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자칼은 가는 귀가 먹은 노파인가 보다, 하며 그 근처로 다가갔다.
“할멈! 대추야자를 좀 따가고 싶…….”
“이 아이를 사 가게.”
“엥? 뭐라고?”
자칼의 시선은 노파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소녀에게 향했다.
까만 머리칼을 짧게 자르고 조금 마른 듯했지만 건강해 보이는, 대충 열대여섯 살쯤 된 소녀였다.
“내가 노예상인 건 어찌 알았우?”
자칼의 떨떠름한 질문에 노파는 그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상황이 좀 이상했다.
손자를 노예상에게 파는 조부모는 거의 없을뿐더러 노파의 겉모습만 보자면 손자를 팔아야 할 정도로 쪼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에 파실 건데?”
“값이야 그쪽이 알아서 쳐주시오.”
“내 맘대로?”
이번에도 노파는 고개만 끄덕였다.
자칼은 코웃음 치다가 그 소녀를 위아래로 살폈다.
꽤 예쁘장한 아이였으니 잘만 다듬으면 상당히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의 소녀라면 아무리 못해도 1천만 페르소는 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는 농담 삼아 값을 후려쳐 보았다.
“한 10만 페르소? 헤헤헤!”
줘야 할 가격의 100분의 1로 후려치는 건 너무 심했나 싶어서 괜히 민망한 웃음을 흘리는데 노파의 대답이 의외였다.
“그럽시다.”
“엥? 진짜? 진짜 10만 페르소에 팔겠다는 거요?”
노파는 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웬 횡재야 싶다가 자칼이 미심쩍은 눈으로 캐물었다.
“설마, 어느 한 군데가 병신이라거나 곧 죽을 계집인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괜찮은 상태의 계집아이를 고작 10만 페르소에 팔 리가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는 루벨파스트에 도착하면 깨어날 거요.”
그것도 참 기묘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루벨파스트의 노예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으며 아이가 루벨파스트에 도착하면 깨어날 줄은 어떻게 아는가.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살 만한 가치는 있었다. 고작 10만 페르소니까, 내내 잠들어 있기만 한대도 그 몸값을 뽑아먹을 방법이야 많았다.
“좋소. 사 가지.”
뜻하지 않게 노예를 사게 된 자칼은 품에서 10만 페르소를 꺼내 노파에게 건네준 뒤 일행을 불러 소녀를 둘러업게 했다.
그들은 오아시스에서 식수와 대추야자, 그리고 노예까지 얻은 뒤 다시 루벨파스트로 길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노파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수많은 고난을 만날 것이다. 의심스럽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종내에는 네가 잃은 모든 것을 되찾고 이 땅을 파멸로부터 지켜낼 테니…… 견디고 이겨내거라, 인간의 황제야.”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결을 따라, 오아시스의 찬란하던 빛이 모래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금빛 열기의 사구 위에는 노파의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