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1장 타리크와 엔시아 (24/32)

루벨파스트의 노예 외전 2

1장 타리크와 엔시아

슬라르한이 후계자로 선언되자 연회장의 모두가 환호했지만, 실제로 그 안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낙마한 후보들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은 사색이 되거나 한숨을 흘렸지만, 그동안의 투자가 빛을 본 이들은 갑자기 인사를 나누려고 밀려드는 인파로 압사할 지경이었다.

제일 처음 슬라르한의 손을 잡은 롤랑 백작 부부는 물론, 슬라르한과 연합하기 위해 자신의 후보 지위를 포기한 엘란츠, 막판까지 중도파 귀족들을 잘 이끌어온 컬리넌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주목받았지만 젊은 남녀에게 특히나 관심을 받은 것은 타리크와 엔시아였다.

여태 한미한 자작이라고나 여겨졌던 타리크는 이제 그가 얼마나 많은 보상을 얻게 될지가 도박에 걸릴 정도로 미래가 기대되는 남자였다.

엔시아는 황후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지만, 많은 대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잡기만 하면 대박일 그들을 향해 아직 미혼인 남녀가 끊임없이 춤을 신청해 왔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좀 어렵, 죄송합니다, 영애. 자, 잠시만 좀 지나가겠습니다.”

타리크는 어리고 가냘픈 영애들이 생각보다 힘이 좋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창을 들고 휘두르던 그도 영애들이 들이대는 힘에는 뒤로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누군가의 춤 신청을 받아주면 오늘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다리는 혹사당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냥 멀거니 서서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향해 나아갔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좀 정신이 없어서…… 춤 신청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좀…… 죄송해요.”

정신이 없기는 엔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름도 다 외울 수 없을 만큼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춤을 신청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에 엔시아는 현기증마저 일었다.

‘끔찍해…… 도망치고 싶어…….’

자신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를 끌고 가려는 사내들 틈에서, 엔시아는 공포를 느끼며 당황했다.

“아, 아버지! 오라버니!”

엔시아는 자신을 지켜줘야 할 컬리넌 후작이나 오라비들을 찾았지만 그들 역시 밀려드는 인파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고, 다른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 하자 엔시아는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주변의 소음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새어 나가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자신을 흔들어대던 손길들이 싹 물러가는 것 같더니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쌌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타리크……!”

창백하게 질린 엔시아의 낯을 보며 타리크는 그녀가 정말로 위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엔시아 주변을 둘러쌌던 사내들에게 살기를 담아 곱지 않은 시선을 흩뿌렸다.

그러나 다른 남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 가늠도 할 수 없는 컬리넌 가문의 고명딸이니, 그녀를 차지하기만 하면 자신의 앞날도 창창할 터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높은 작위로 밀어붙여 보려 했다.

“무례하군요. 제가 먼저 영애에게 춤을 신청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러게요. 힘으로 밀어내면 답니까?”

“디넬 자작! 이게 아주 무도한 방식이라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여태 연약한 여자를 한가운데 놓고 네 것이네, 내 것이네 싸우던 자들이 뻔뻔하게 목청을 돋우자 타리크의 기세가 더 흉흉해졌다.

“무슨 말씀들인지 모르겠군요. 저와 엔시아는 오늘 파트너가 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예?”

“뭐라고요?”

남자들의 시선이 다시 엔시아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사이 혼미해지려던 정신을 붙잡은 엔시아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타리크의 말이 맞아요. 그리고 애초에 여성에게 춤을 신청할 때는 파트너가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무례한 분들은 난생처음이에요.”

엔시아는 불쾌하다는 투로 그들을 쏘아보다가 앙큼하게 고개를 돌렸다.

“늦으셨네요, 타리크.”

“죄송합니다, 엔시아. 다 제 탓입니다.”

“기다리다 지칠 뻔했다고요. 우선 춤부터 추지 않을래요?”

“기꺼이.”

타리크는 엔시아의 손을 붙들고 사내들의 틈을 빠져나와 플로어 위에 섰다.

가볍고 경쾌한 왈츠곡이 흐르고 있었고, 타리크와 엔시아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안기며 속삭였다.

“괜찮으십니까?”

“조금만 늦으셨다면 아마 기절했을 거예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저 역시 영애께 도망 온 참이거든요.”

그 소리에 엔시아가 고개를 들었고, 사람에 지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럼…… 편안한 연회를 위해 오늘만 저랑 전략적으로 연합하는 게 어때요?”

“무릎 꿇어 빌고 싶을 지경입니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두 사람은 그날 연회 내내 붙어 있기로 합의했다.

생각보다 꽤 만족스러운 연회였음을, 두 사람 다 부정할 길이 없었다.

* * *

연회의 여운이 다 가시지도 않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황궁이 엘로르 황녀에게 점거되고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컬리넌 후작가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타리크가 컬리넌 기사단의 차출을 요청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갓 잠에서 깨어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던 컬리넌 후작은 침의도 벗지 못한 채 타리크를 맞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황궁이 다른 이도 아닌 엘로르에게 점거되었다는 소리도 놀라운데 괴물까지 날뛴다는 소리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정확한 내막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황궁 주변을 괴물들이 막고 있고 황궁 내 모든 이들이 엘로르 전하의 명령에 따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가 벌인 일 같습니다.”

“후보자 평가 위원회와 황제 폐하의 결정에 불복하겠다, 이건가……?”

“글쎄요. 어쨌든 지금은 괴물들이 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아직 괴물들을 황궁 주변에 결집해 놓고만 있는 것을 보면 뭔가 요구사항이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한시가 급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티렐! 기사단장을 불러! 지금 당장!”

컬리넌 후작이 집사에게 곧바로 기사단장을 불러오라고 일렀다.

이르는 것을 본 타리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가문에도 들러 기사단을 요청해야 했다.

그가 컬리넌 후작에게 되도록 빨리 황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기사단을 출동시켜 달라고 부탁한 뒤 컬리넌 후작가의 현관을 나설 때였다.

“잠시만요, 타리크!”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던 타리크는 바쁘다는 것도 잊고 잠깐 넋을 잃었다.

늘 완벽한 화장과 치장을 하고서야 타인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과는 달리, 화장기가 조금도 없이 침의 위에 가운만 입은 채 달려 나온 엔시아였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붉은 머리칼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에서 더 강렬하게 느껴졌지만, 깨끗한 민낯의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더 청초해 보였다.

엔시아 컬리넌이 청초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지만, 타리크는 이 역시 엔시아의 일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엔시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괴물이 나왔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신 게 맞아요?”

아침부터 타리크가 급하게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한 엔시아는 치장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의 서재 쪽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중에 난입할 수 없어서 그저 문 사이로 귀만 기울였지만, 아무리 다르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좋은 소식 같지는 않았다.

“네, 맞습니다. 지난번 랄렘니쉬 광장에 나왔던 그 괴물들입니다.”

“흑마법사들이 만든 거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영애께 자세히 설명해 드리기에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놈들이죠. 저번보다 좀 더 강해진 데다 그 수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지금 각 가문의 기사단을 요청하러 다니는 중입니다.”

엔시아의 커다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타리크는 자세히 설명하려 하지 않았지만 지난번 광장에 출몰한 괴물의 이야기는 정보원을 통해 이미 세세하게 전해 들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엔시아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들이 전보다 더 진화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지금 타리크가 향할 전장이 얼마나 위험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타, 타리크도, 거기서 싸우신다는 건가요?”

“각하께서 진두지휘하시는데 제가 따라가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꼭…… 그럴 필요가 있어요?”

“예?”

타리크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되물었다. 너무 당연한 질문에, 엔시아가 아직 잠이 덜 깼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엔시아는 지금 잠에 취한 헛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꼭 타리크가 앞에 나서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오히려 타리크는 후방을 지키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각하께서 놈들과 싸우시는데 제가 뒤로 빠질 수는 없습니다.”

“왜요! 왜 매번 타리크가 제일 궂은 일을 맡아야 하는 건데요?”

“엔시아!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만약에 싸우다가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해요? 그건 누가 보상해 주는데요? 어떻게 보상할 건데요?”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한 고집을 피우는 엔시아를 보며 타리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했다.

“혹시 무서워서 그러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들이 여기까지 내려오게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초조하게 가운의 소매 끝만 꽉 쥐고 있던 엔시아가 바락 소리쳤다.

“네! 무서워요! 검에 베여도 죽지 않는다는 괴물들한테 당신이 죽을까 봐 무서워 죽겠어요!”

“엔시아……?”

“나도 내가 왜 당신 같은 남자를 걱정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 묻지 말아요! 그냥 싫어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커다란 녹안이 눈물을 가득 머금고 타리크를 올려 보았다.

“……죽으면 어떡해.”

그 말과 함께 커다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엔시아!”

타리크는 엔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여린 어깨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다치는 것도 싫어요.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타리크는 엔시아의 등을 달래듯 쓸며 말했다.

“당신이 컬리넌 후작가의 붉은 장미이듯, 나는 벤티악 공작가의 파수꾼입니다. 그게 내 명예이자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하…… 나 따위는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군요.”

“천만에요. 저는 반드시 멀쩡히 당신에게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왜 벤티악 기사단의 기사단장인지, 확인시켜 드리죠.”

“허풍이기만 해봐요. 진짜 가만 안 둘 거예요.”

타리크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애정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엔시아에게 입 맞추었다. 앵두 같은 입술은 촉촉하고 따뜻했으며, 생각 외로 쉽게 그의 침범을 허락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황홀함을 오래 즐길 여유가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내리누르며 입술을 뗀 타리크가 속삭였다. 그는 엔시아를 한 번 더 꽉 껴안아 주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말 위로 올라탔다.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엔시아 역시 눈물을 닦고는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아버지! 컬리넌 기사단은 아직 다 안 모였나요? 한시가 급하다고요!”

* * *

제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공성전은 천만다행히도 슬라르한의 승리로 끝나고, 실정을 펼치던 제17대 황제 노아크 레니에 솔렌의 시대는 갑작스럽게 끝나 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황제의 서거를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드디어’ 죽었다며 속 시원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을 정도였다.

젊고 유능한 새 황제를 맞은 파르디나스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활기를 띠었다.

물론 그게 가능했던 것은 슬라르한뿐만이 아닌 많은 유능한 인재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백작이 된 타리크 역시 슬라르한의 최측근으로서 여러 일에 불려 다니고 있었다.

황실 기사단의 재정비는 물론이거니와 노예 문제 해결에도 힘쓰고 있었으며 슬라르한의 보좌 역시 겸하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여태 ‘벤티악 가의 기사단장’ 또는 ‘벤티악 공작의 보좌관’ 정도로나 알고 있던 타리크 디넬의 진면목을 깨닫고 있었다.

거칠게만 보이던 그는 의외로 똑똑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여태 그를 무시했던 사람들도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를 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했다.

그리고 그건 혼기가 찬 영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넬 경, 너무 멋있지 않아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야성미 넘치면서도 지적이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 취향은 황제 폐하보다는 디넬 경 쪽이에요.”

“나이가 꽤 있으신데 아직 약혼 상대도 없다면서요?”

“말도 말아요. 그래서 다들 호시탐탐 노린다는 소문이니까.”

그건 헛소문이 아니었다.

사고로 부모를 다 잃은 타리크이기에 그는 자신의 혼담을 직접 받고 있었다.

물론 너무 바빠서 그 편지들을 다 뜯어보지도 못했지만, 그의 서재에 혼담 요청서가 점점 쌓여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암암리에 퍼졌다.

타리크와의 결혼을 노리는 영애들의 뒷말에 속을 끓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올해 서른이나 된 타리크에게 고작 열여덟 살인 아가씨가 혼담을 넣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열두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것은 너무하죠. 암요.”

“조카를 보는 기분일걸? 아니, 열여덟 살짜리 꼬마가 그 타리크 디넬에게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 앞에서 벌벌 떨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럼요. 너무 어린 아가씨들은 디넬 백작님을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해요.”

엔시아는 오랜만에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내내, 밖에서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불만을 구시렁댔다.

하녀 페기는 언제나 그렇듯 제 주인의 기분을 금세 눈치채고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솔직히 엔시아가 왜 타리크의 일에 화를 내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엔시아는 조만간 황후감으로 거론될 사람이었고, 타리크의 혼사야 그가 알아서 할 일이었으니까.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오늘 연회에서는 황제 폐하께서 분명 아가씨께 춤 신청을 하실 거예요.”

“그러든가 말든가…….”

“예……?”

“아무것도 아냐. 다녀올게.”

엔시아는 자신의 측근 하녀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에 한숨만 쉬며 마차에 올랐다.

같이 가려고 기다리던 컬리넌 후작 역시 엔시아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슬라르한의 얘기를 꺼냈지만, 엔시아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집중하지 않았다.

그녀가 오늘 춤 상대로 바라는 사람은 슬라르한이 아니었다.

‘오늘도 타리크가 날 찾아 와줄까?’

언젠가부터 연회가 열릴 때면 타리크는 그녀를 찾아와 춤 신청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저를 조롱하거나 동정하는 줄 알았고, 그다음에는 슬라르한 대신 두 가문의 결속을 보여주려 애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엔시아!”

그가 자신을 부르며 와락 끌어안고 입 맞추었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그랬던 주제에 다른 여자한테 춤 신청하기만 해봐라. 다신 안 볼 테니까.’

타리크가 다른 여자와 춤추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다른 여자라면 그와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반해 버릴 게 분명했다.

그가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눕혔다가 강하게 끌어당길 때면 사향과 나무껍질 향이 섞인 것 같은 그의 체취가 훅 끼쳤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감각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게다가 춤추는 사이사이에 마주치던 눈빛은 얼마나 강렬한지 모른다. 스피어 마스터의 기운이랄지, 확실히 온실 속에서 자란 남자들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 시선에 붙들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게 될까 봐 언제나 정신을 바싹 차려야 했다.

그렇게 사람을 흔들어놓고는 저 혼자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얼마나 얄밉던지…….

그래서 일부러 그에게 더 밀착하기도 하고,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남자들을 유혹할 때 언제나 먹히는 방법이었지만, 글쎄, 타리크에게도 먹혔을지는 의문이었다.

‘적어도 나한테 호감은 있는 거겠지?’

다른 남자들의 속내는 금방 알겠던데, 타리크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괴물들과 싸우러 나가던 그와 헤어진 후 석 달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보지 못했던 그사이에 그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저에게 입 맞출 때는 그 열정이 저만을 향해 뜨겁게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지위가 달라지면 사람은 쉽게 변하는 법이니까.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다 연회장에 도착한 엔시아는 저도 모르게 타리크부터 찾았다.

언젠가부터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도 한 번에 타리크를 찾을 수 있었는데, 오늘 타리크는 제 딸을 소개하는 부인들에게 붙잡혀 쩔쩔매고 있었다.

분명 그가 원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게 너무 보기 싫었다.

오늘따라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왜 또 그리 멋있는지, 조금 짜증이 났다.

엔시아는 타리크에게서 홱 고개를 돌리고 저에게 다가오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머릿속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생각들로 꽉 차 있었다.

‘저런 건 적당히 뿌리치라니까, 바보같이…… 아니면 혹시, 저런 어린 아가씨들이 좋은 건가?’

엔시아는 올해 스물다섯이었다.

귀족 영애들 기준으로는 결혼이 늦은 편이었지만, 그녀를 황후로 만들 꿈에 부푼 컬리넌 후작은 딸의 늦어지는 혼사에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타리크에게 혼담을 넣고 있는 영애들 중에 엔시아보다 나이 많은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여태 자신의 나이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던 엔시아는, 처음으로 제 나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날 나이 때문에 거절한다고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여태…….’

엔시아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컬리넌 후작은 그녀가 황후 자리를 노리고 혼담을 거절하는 줄 알겠지만, 그녀가 바라는 혼처는 따로 있었다. 차마 말을 할 수 없었을 뿐.

엔시아가 속으로 한숨 나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새 황제에 대한 하례와 귀족들끼리의 인사가 지나갔다.

경쾌하고 가벼운 분위기의 곡을 연주하던 악단이 밝으면서도 품위 있고 조금 느린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연회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갔다.

그때쯤, 엔시아는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착각할 여지도 없이 타리크였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정중하고도 어딘지 은근하게 그녀를 불렀다.

엔시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언제 우울했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은 채 뒤돌았다.

“어머, 타리크! 와 계셨군요.”

“예. 인사가 늦었습니다만,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감사해요. 경께서도 오늘…… 아주 멋져요.”

누구에게나 듣는 아름답다는 인사말이, 타리크가 하니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엔시아는 기쁜 티를 내지 않고 그저 생긋 웃으며 인사를 돌려줄 뿐이었다.

하지만 타리크는 그녀의 가벼운 칭찬에도 기쁜 빛을 띠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춤추기 전이신 것 같은데, 첫 춤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디넬 백작님과의 첫 춤이라니,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그냥 타리크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놈의 백작 소리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그는 씩 웃으며 엔시아를 제 품으로 끌어들였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타리크였지만, 엔시아만큼 합이 잘 맞는 파트너는 없었다.

그는 도망가는 듯한 엔시아의 시선을 쫓으며 그녀와 춤추기 시작했다.

석 달이나 기다려 온 날이었다. 엔시아가 보고 싶어서 그동안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울던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워서…….

“석 달 만이군요.”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저는 오늘이 너무 더디게 오는 것 같아 애가 탔는데요.”

타리크와 의미심장한 미소와 눈빛을 주고받던 엔시아가 그와 등을 맞대고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는 다시 그의 품에 돌아왔다.

“다친 곳은…… 없는 거죠?”

“말씀드렸잖습니까.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허풍 아니었어요?”

그 말에 타리크가 하하, 웃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허풍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놈들과 싸우는 동안 당신 생각밖에 나질 않았거든요.”

한 손을 잡고 멀어지던 엔시아를 다시 잡아당긴 타리크는 흩어졌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를…… 왜요?”

엔시아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그마저도 타리크를 매혹시켰다.

“당신이…… 황후 자리에 어울린다고는 생각합니다. 당신이라면 황후로서 완벽할 테죠.”

“타리크……?”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춤곡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타리크는 제 품 안에 들어온 엔시아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그 순간, 엔시아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그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감히 당신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그동안 수없이…… 수없이 이 마음을 끊어내려 노력했습니다.”

“타리크…….”

“보시다시피 실패했지만요.”

엔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황후의 자리를 드릴 수는 없지만, 평생 당신을 숭배하면서 살 자신은 있습니다. 부디…… 당신이 고려하는 선택지에 저도 끼워 넣어 주십시오, 엔시아.”

늘 조금의 장난기를 묻히고 있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한없이 진지했다. 조금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엔시아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자신처럼 타리크도 내내 마음을 졸여 왔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도대체 언제쯤 고백하시나 했네요.”

“엔시아…….”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에요? 제 대답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아니면, 제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입술을 허락할 것 같던가요?”

타리크의 얼굴에 서서히 기쁜 미소가 번져갔다.

그 모습조차 왠지 감동스러워서, 엔시아는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정말…… 그렇게 제 생각을 했다면서 편지 한 통 보내지 않고…….”

그러나 그 투정에 타리크가 멈칫했다.

“……편지는, 꽤 여러 통 보냈습니다만.”

“네?”

“너무 바빠서 자주 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열 통은 넘게 보냈습니다. 전혀 못 받아 보셨습니까?”

엔시아의 눈이 또 커다래졌다.

* * *

타리크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챈 사람은 금세 밝혀졌다.

“그가 감히 황후가 될 너를 욕심내더구나. 네가 보면 괜히 심란할까 봐 내가 알아서 처리했다.”

당연히 자신이 딸을 위해 ‘더러운 것’을 치웠다고 믿는 컬리넌 후작이었다.

“아버지! 어떻게 제게 온 편지를 말씀도 없이 태워 버릴 수가 있으세요!”

“네가 태울 걸 대신 태워준 것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 엔시아.”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말로 몰랐다.

엔시아 앞으로 온 수많은 연서를 그가 1차로 감별하고 그 감별 과정에서 ‘가치 없는 것’으로 분류된 편지를 태우는 일이야 흔했다.

여태 거기에 대해 엔시아가 뭐라고 한 적도 없으니 그로서는 떳떳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엔시아의 야망을 곁에서 지켜봐 온 컬리넌 후작으로서는 그녀가 타리크에게 빠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다 내가 초래한 일이구나.’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을 비웃던 오만에 대한 벌인가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타리크를 놓치는 건 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엔시아는 화를 낼 게 분명한 아버지 앞에서 치맛자락을 꽉 쥐며 말했다.

“아버지. 저…… 황후 자리는 포기할래요.”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 곧 황후 후보를 추천하라 할 텐데!”

“그런 거, 이젠 관심 없어요.”

“그, 그런 거……?”

제국에서 제일 높은 여인이 되겠다고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오던 딸이 하루아침에 제 꿈을 ‘그런 거’라 칭하며 포기하겠다는데 놀라지 않을 아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엔시아의 이어진 말이 더 놀라웠다.

“저는…… 타리크 디넬을 사랑해요. 그와 함께하고 싶어요.”

컬리넌 후작은 쩍 벌어지는 입을 닫을 생각도 못 한 채 엔시아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이건 꿈이어야 했다. 아니면 엔시아가 장난을 치는 거라거나…….

그러나 엔시아가 끝내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자 컬리넌 후작의 얼굴이 분노와 함께 일그러졌다.

“너…… 미쳤느냐?”

“아버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도대체 뭐가 문젠데요?”

“뭐가 문제냐고? 너, 나에게 황후의 아비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이제 곧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 텐데, 어디 곰 같은 놈의 꼬드김에 빠져서 일을 망치려 해!”

막상 컬리넌 후작이 안색을 싹 바꾸자 엔시아도 충격을 받았다.

과거의 타리크 디넬이었다면 그의 낮은 작위와 초라한 재산, 하찮은 명예와 권력 때문에 반대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타리크 디넬은 수도의 모든 가문에서 노리는 신랑감이었다.

후작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만에 하나 황후가 된다 해도 그 목석같은 황제는 저를 조금도 돌아봐 주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게 무슨 대수라고! 어차피 아이 낳고 살면 다들 마찬가지다. 그리고 황후가 되면 어디 황제의 사랑을 바랄 시간이나 있을 것 같으냐?”

“저는…… 사랑받으면서 살고 싶어요.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요. 제가 황후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가문의 위세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엔시아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컬리넌 후작은 열 오른 목덜미만 꾹 누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엔시아의 손을 덥석 잡고 타일렀다.

“얘야, 엔시아,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내가 너무 놀라서…… 너도 그냥 해본 소리지? 그렇지? 내가 내일이라도 아는 이들을 시켜서 황후 후보 추천 일시를 앞당겨 보마. 그러니 사랑 타령은 그만해라. 응?”

컬리넌 후작은 최대한 큰 소리를 안 내고 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지만 엔시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전 타리크 아니면 결혼 안 할래요.”

“엔시아 컬리넌!!”

결국 컬리넌 후작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엔시아를 방에 가두고 마음을 바꿔먹지 않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교계의 꽃이라는 엔시아가 연회에서 자취를 감추자 그녀가 황후 자리를 노리고 몸을 사리며 미용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휴, 안 그래도 조만간 황후 후보를 올릴 거라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컬리넌 영애가 어떤 분인데 이 기회를 놓치겠어요?”

“나이가 있는 편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시나 보죠? 칩거까지 하면서 관리하시는 걸 보면.”

“하지만 지금도 컬리넌 영애보다 예쁜 영애는 없잖아요. 얼마나 더 예뻐져서 나타나려고 그러나 몰라.”

속 편한 사람들의 추측을 엿들으며 타리크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는 엔시아의 하녀를 통해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컬리넌 후작을 만나 설득해 보려고도 했지만, 컬리넌 후작은 그의 면전에다 대고 주군의 여자를 탐했다며 욕을 퍼부은 뒤 내쫓아 버렸다.

그 얘기를 들은 엔시아는 울다가 쓰러졌다는데 그런 그녀가 걱정되어 타리크는 미칠 지경이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식사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오랜 벗이자 형제인 슬라르한이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안색이 너무 안 좋군, 타리크. 요즘 일이 너무 많긴 하지?”

“아, 아닙니다, 폐하.”

“아니긴. 자네, 얼굴이 정말 많이 상했어. 루벨파스트 노예 시장 철거 문제는 거의 다 해결됐으니 아랫사람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좀 쉬게.”

“정말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일 때문이 아니라면 뭔가 다른 고민이 있다는 소리겠군……?”

다른 때 같았으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둘러댔겠지만, 이번만큼은 슬라르한도 순순히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결국 타리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털어놓았다.

“사실은 제가…… 엔시아에게 청혼했습니다.”

“뭐라고? 아하하! 아니라고 그렇게 잡아떼더니, 청혼은 또 잽싸게 했군. 그런데 청혼했다는 사람이 이렇게 죽상인 걸 보면 혹시…… 거절당한 건가?”

타리크는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놀랍게도 엔시아는 제 청혼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신나서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에, 왜 그리 얼굴이 어두워?”

“컬리넌 후작이 결사반대하고 있거든요. 저하고는 만나주지도 않는 데다 엔시아를 방에 가뒀답니다.”

기사답게 늘 위풍당당하던 타리크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엔시아의 하녀 말로는 엔시아가 매일 울기만 한다는데…… 안 그래도 연약한 몸이 크게 상하지나 않을지 걱정돼서…….”

한때 엔시아를 오만하고 재수 없다고나 여겼던 그가, 지금은 손대기 두려울 정도로 소중한 것 대하듯 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신기해서 슬라르한은 잠깐 넋을 놓을 뻔하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컬리넌 후작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선 이유야 빤했다. 그는 전부터 엔시아를 앞세워 황제의 장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생각이 엔시아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컬리넌 후작 본인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내가 내 태도를 확실히 하지 않은 탓에 자네와 컬리넌 영애가 고생을 하는군. 너무 걱정하지 말게. 조만간 다 괜찮아질 테니까.”

“예?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컬리넌 후작을 만나 얘기를 좀 나누지.”

“하지만 컬리넌 후작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저한테는 주군의 여자를 탐했다며 온갖 욕설을 늘어놓던데요.”

컬리넌 후작이 타리크의 면전에다 대고 욕을 했다는 소리에 슬라르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컬리넌 후작도 아직 앞뒤 파악이 안 되나 보군. 감히 자네를 함부로 대하다니.”

“남들이 보기에도 제가 주제도 모르고 과욕을 부리는 것 같을 겁니다. 엔시아는 완벽한 황후감이니까요. 솔직히……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기운 빠진 타리크의 목소리에 슬라르한이 코웃음 쳤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양보라도 할 텐가?”

“만약 폐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제가 어찌 욕심을 내겠습니까.”

“안일하군. 엔시아 컬리넌이 나한테 안겨 있는 상상을 하면서도 멀쩡할 자신이 있나?”

슬라르한이 되묻자 타리크의 입이 딱 다물렸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머리통에 열이 올랐다.

그리고 그때, 떠나던 날의 일리에가 한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어쩌겠어요? 사랑은 누구랑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사랑은 제아무리 절친한 사이라고 해도 나눠 가지거나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조그만 녀석까지 제 사랑을 남과 나눌 수 없다며 떠났다.

타리크도 마찬가지였다. 엔시아가 슬라르한과 결혼한다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느니 차라리 떠나길 택할 것이다.

그는 어금니를 꽉 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네요. 엔시아만큼은…… 아무에게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착잡한 얼굴의 타리크를 보며 슬라르한이 피식 웃었다.

그의 심정을 왜 모르랴. 저 역시 다시 일리에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힘든 나날을 버티고 있는데.

“안 뺏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아내로 맞이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니까.”

“……진짜로 일리에를 찾아 떠나실 겁니까?”

타리크는 얼마 전 슬라르한이 했던 고백을 떠올렸다.

5년 내로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엘란츠에게 황위를 양위한 뒤 일리에를 찾아 떠날 거라던, 도무지 믿기 힘든 그 고백 말이다.

“내가 그런 일로 농담할 것 같은가?”

“하지만…….”

“내 일생의 소원이네, 타리크. 다른 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타리크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슬라르한의 눈빛을 보고 곧바로 이해했다. 이건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엘란츠와 차근차근 준비 중이니 양위에 따른 혼란은 크지 않을 걸세. 그리고 내가 떠나기 전에 자네 결혼식까지는 치러주고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슬라르한은 웃는 얼굴로 타리크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컬리넌 후작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며칠 뒤, 슬라르한의 부름을 받아 황궁에 달려온 컬리넌 후작은 황제의 작은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컬리넌 후작.”

“그러게나 말입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기분 좋게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 시기에 나를 부른 것을 보면 분명 황후 문제겠지.’

그가 그동안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며 황후 문제를 거론했으니 슬라르한에게도 은근히 압박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황후감으로 유력한 게 바로 엔시아였다.

엔시아의 뜬금없는 반항에 시름이 깊었던 그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이 폭탄처럼 내던진 말은 그가 기대하던 바와 너무나 달랐다.

“컬리넌 후작. 난 결혼하지 않을 걸세.”

“예……?”

컬리넌 후작의 눈이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결혼하지 않고 황위를 양위하게 될 거요.”

* * *

충격적인 선언에 컬리넌 후작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더듬었다.

“예에? 그,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때가 되면 발표할 일이지만, 어쨌든 내가 황제로서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컬리넌 후작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최근 후작이 황후 문제를 거론한다는 얘길 언뜻 들었는데, 괜한 일 말라고 부른 것이오.”

“아…….”

그는 마치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황후만을 목표로 삼아 커온 엔시아가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질 않나, 제대로 된 줄을 잡았다고 기뻐했더니 슬라르한은 황제를 그만둘 거라지 않나…….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네. 제3대 황제 루거 다네시아 솔렌이 2년 만에 자신의 동생 르바인 캠릿 솔렌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지. 제국법이나 황실법 상 아무런 문제도 없소.”

슬라르한은 이미 귀족들의 반발에 대비해 모든 준비를 해둔 터였다. 타리크 덕분에 생각보다 조금 이른 고지가 되었지만,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그 후로도 슬라르한이 예의상 이런저런 말을 건넸지만, 컬리넌 후작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엔시아의 혼처에 대한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슬라르한이 결혼 자체를 안 할 줄 알았다면 엔시아를 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타리크를 그렇게 욕하고 내쫓지 않았을 것이다.

‘디넬 백작에게 막말만 안 했어도 좋았을 것을……!’

그날 이후 시름이 깊어진 컬리넌 후작의 귀에는 신경 거슬리는 소문이 또 들려왔다.

“디넬 백작 저에 중매를 서겠다는 편지가 쇄도한답니다. 지금도 황실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데 거기다 알류크 영지를 하사받게 되었다니 다들 침 흘릴 만도 하죠.”

“뭐라고요? 알류크 영지를 하사받아……?”

컬리넌 후작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슬라르한은 황제가 되자마자 타리크를 백작에 봉해 자신의 보좌관 역할을 하게 했는데, 워낙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와중에 봉작된 거라 영지의 하사는 조금 미뤄지고 있었다.

그가 어느 영지를 받게 될지가 모두의 관심사였는데, 생각보다 더 좋은 영지를 하사받게 된 것이다.

“알류크 영지라면 우리 컬리넌 가의 영지와 비슷한 규모일 텐데, 진짜로 그가 알류크를 받는답니까?”

“소문이긴 합니다만, 거의 확정적이라던데요? 그러고 보면 벌써 재산이 얼마야…… 타리크 디넬을 차지할 가문이 도대체 어디가 될까요?”

자신이 욕까지 하고 내쫓아 버린 타리크가 남들 눈에는 무주공산이었다.

컬리넌 후작은 초조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어딜 눈독 들인답니까! 디넬 경이 지금 누구한테 목매고 있는 줄 알고!”

더는 자신의 자존심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미적거리는 사이에 누군가가 타리크를 채어가 버릴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타리크를 놓치는 건 둘째치고 엔시아의 혼사가 더욱 암울해질 터였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엔시아를 찾았다.

‘엔시아한테 디넬 경을 다시 잘 꼬드겨 보라고 해야지, 안 되겠어.’

나이가 꽤 찼다지만 그래도 아직 엔시아의 미모는 사교계의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었다. 컬리넌 후작은 엔시아가 작정하고 유혹하면 타리크도 다시 넘어올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는 타리크가 아니라 엔시아였다.

“싫어요.”

“뭐……?”

“그 사람한테 주군의 여자를 탐하는 더러운 돼지라고 욕하셨다면서요! 아버지께 그런 말을 들었는데 이제 와 태도를 바꾸면 그가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제 명예는 물론이고 우리 가문까지 우습게 보일 거라고요!”

“아, 아니, 그건 괜찮…….”

“됐어요! 그와 저의 인연은 여기까진가 보죠. 하지만 그가 아니면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겠다던 말은 진심이에요. 전 이대로…… 혼자 살겠어요.”

엔시아는 눈물을 후드득 떨어트리며 제 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더니, 그때부터 곡기를 끊어버렸다.

안 그래도 그동안 울며 지내느라 야윈 엔시아가 곡기까지 끊었다고 하니 컬리넌 후작은 안절부절못했다.

그와 아내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화까지 내 보아도 엔시아는 돌아누운 채 그저 울기만 했다.

딸을 키운 25년 동안 컬리넌 후작도 엔시아가 이렇게 많이 울고 힘들어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이러다 우리 엔시아 어떻게 되겠어요!”

“아버지도 참…… 디넬 경한테 화내기 전에 잘 좀 알아보셨어야죠. 엔시아 쟤 독한 건 아버지께서 제일 잘 아시잖습니까. 쟤 저러다 진짜 죽어요!”

“난 엔시아가 사랑 때문에 앓아누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버지? 디넬 백작가 앞에 중매쟁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던데요.”

아내와 아들들의 성화에 결국 컬리넌 후작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타리크를 초대했다.

타리크가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는 선물까지 들고 방문해서는 컬리넌 후작에게 모욕적인 소릴 들은 적 없다는 듯 행동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우리 사이에 무슨.”

컬리넌 후작 역시 타리크에게 소리 지른 적 없는 것처럼 사람 좋게 웃었지만, 사실은 속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엔시아가 곡기를 끊은 지 벌써 나흘째였고, 이젠 어떻게 봐도 농담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확인한 엔시아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제 가족들의 성화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대꾸할 힘도 없는 것인지 몰랐다.

“크흠. 저기, 오늘 초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저번에 디넬 경께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 사과를 드리려고…….”

“아닙니다. 컬리넌 후작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아…… 고맙습니다, 디넬 경. 내가 그때 일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타리크는 그저 웃었다. 그 자존심 센 컬리넌 후작이 사과까지 한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후작은 타리크의 눈치를 보다가 머뭇대며 말을 이었다.

“저기…… 날 용서해 준다니까 드리는 부탁입니다만…….”

“부탁이요?”

“우리 엔시아 좀 설득해 주십시오.”

“예? 엔시아를, 아니, 컬리넌 영애를요? 무슨 설득 말씀이십니까?”

안 그래도 엔시아가 걱정되어 초조해하던 타리크는 엔시아의 이름이 나오자 몸을 앞쪽으로 바싹 당겨 앉았다.

그러자 컬리넌 후작이 크게 한숨을 쉬며 자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아니, 그게…… 엔시아가 나한테 단단히 화가 나서는 제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식사도 거의 안 합니다. 아마…… 디넬 경의 마음이 이미 떠났다고 여겨서 크게 낙담한 모양입니다.”

“예에?”

“그 애한테 마음이 떠났더라도, 조금만 그 애를 달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염치없다는 건 압니다만 저러다 애가 잘못될까 봐…… 두 사람을 반대해서 내가 정말 미안했습니다.”

타리크의 눈이 커다래졌다.

슬라르한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때도 정말로 컬리넌 후작이 마음을 바꿀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후작까지 허락했다면 더 이상 그가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엔시아를 좀 만나 뵙고 싶습니다.”

“부, 부탁드립니다! 내 지금 그 아이의 하녀를 부를 테니까.”

하녀가 엔시아에게 타리크의 방문을 알린 잠시 후, 그는 매일 꿈에 그리던 엔시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침의 위에 가운을 걸친 모습은 공성전을 하러 나갈 때도 봤었지만, 지금의 엔시아는 그때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고 안색도 안 좋았다.

그럼에도 엔시아는 엔시아였다. 그녀는 곧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우면서도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타리크를 맞이했다.

“손님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죄송해요, 타리크.”

“엔시아! 도대체 얼마나 굶은 겁니까! 이렇게나 야위어서는…….”

“왜요? 보기 싫어졌어요?”

“지금 내 심장을 난도질하려고 작정하셨습니까?”

타리크는 창백한 모습으로도 도도한 엔시아의 뺨을 살며시 쓸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차마 부서질까 봐 마음대로 안을 수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쏘아붙일 것 같았던 엔시아가 그 손길에 가볍게 기대어오자 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숨을 참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죽도록.”

“알아요. 나더러 야위었다고 성질부리시지만, 타리크 얼굴도 만만치 않거든요.”

“제가 너무 멀쩡했어도 기분 상하셨을 텐데요.”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타리크는 제 손에 뺨을 비비면서도 뾰족하게 답하는 엔시아를 보며 서서히 미소 지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컬리넌 후작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 같더군요. 당신의 단식 투쟁 덕분인 것 같습니다.”

“천만에요. 황제 폐하께서 결혼을 안 한다고 선언하시니 정신을 차리신 거죠. 지금 파르디나스에서 제일 인기 있는 신랑감이 누군지, 그때야 확인하신 거라고요.”

엔시아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입술을 뾰족하니 내밀고 미간을 찌푸렸다.

타리크는 그 모습마저 너무 사랑스러워서 슬그머니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며시 문질러 폈다.

“결혼식은 되도록 빨리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당신과 떨어져 지내는 하루조차 힘겨워질 것 같으니까.”

“흥! 사교계 최고의 여성을 아내로 맞으려면 인내할 줄도 아셔야 한다고요.”

“이미 너무 많이 참았습니다, 엔시아. 너무 많이 참았어요.”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그녀의 손에 입 맞추며 처연히 고백하자 엔시아의 새초롬한 눈매가 슬그머니 풀렸다.

아버지에게 모진 소리를 듣고 내쫓겼다는 타리크가 자신까지 미워하게 됐으면 어쩌나 마음 졸이며 울던 나날이 이제는 꿈처럼 희미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알았어요. 아버지를 좀 닦달해 볼게요.”

“저도 황제 폐하께 미리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전에 분명 남 부럽지 않게 결혼식을 치러주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원하는 건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엔시아.”

“황제 폐하만 믿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뭐 어떻습니까? 당신만 기뻐한다면 뭐가 됐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전장에서는 호랑이처럼 적과 아군을 호령할 타리크가 제 앞에서는 바보처럼 허물어지자 엔시아도 덩달아 누그러진 미소를 흘렸다.

그들은 서로 비밀스러운 미소를 주고받다가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위험한 전투를 앞둔 때도 입맞춤만큼은 넋을 빼앗길 듯 황홀했는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하는 자리에서의 입맞춤은 눈물이 날 만큼 가슴 벅차고 행복했다.

“사랑해요, 타리크.”

엔시아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타리크가 눈을 크게 떴다.

“엔시아…….”

“정말로 사랑해요.”

타리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엔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 영혼을 가져가십시오, 엔시아. 사랑합니다. 당신이 내 전부입니다.”

조금씩 서로에게 물들어가던 시간을 모른 척하고 애써 부정하던 그들은, 결국 먼 길을 돌아 한 점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