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라리에트와 베르트
파르디나스에 새 황제가 즉위하던 즈음, 피델로에서는 막내왕자 베르톨트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망나니에 황실에서 내놓은 자식이라는 소문이 돌던 베르톨트가 외국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국에 유리한 정보를 공급해 왔고 심지어 베스트셀러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새 황제 슬라르한과 친분까지 쌓아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여태 웬만한 대귀족 자제들보다 인기가 없던 베르톨트에게 혼담이 빗발치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라리에트와 약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모든 혼담 요청을 물리쳤다. 물론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갈 귀족들이 아니었다.
“두 분이 아직 약혼을 하신 건 아니지요. 그저 구두상의 약속일 뿐이잖습니까. 라리에트 전하가 제국의 막내 황녀라지만 아무런 권력도 없는데 전하께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이 백부의 말을 들으십시오. 제국의 막내 황녀보다는 예링거 후작 영애 쪽이 낫습니다.”
평소 그를 왕족 취급도 하지 않던 그의 백부 파벨 공작은 베르톨트의 위치가 달라졌음에도 무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에게 베르톨트는 여전히 어리고 철없는, 그래서 몇 마디 말로 구슬릴 수 있는 어린아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철없는 이미지조차 베르톨트가 일부러 만들어왔던 것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베르톨트는 그동안 이런 무례를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과거에는 훗날을 기약하며 그저 웃고 장난으로 넘겼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지금의 베르톨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링거 후작 영애가 제게 무슨 이득을 줄 수 있는데 그러십니까?”
“전하께서는 외국 생활이 길어 잘 모르시겠지만, 예링거 후작가의 재산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들의 사업은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거기에 관련된 왕실 방계도 상당합니다.”
“그게 저한테 무슨 이득입니까? 저는 앞으로도 여행하고 글을 쓰며 살아갈 텐데.”
파벨 공작은 한량 같아 보이는 베르톨트의 태도에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이젠 정신을 차릴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세력가의 딸을 왕자비로 맞이하고 왕실 일에 도움이 되어 드려야지요!”
그는 짐짓 저에게 훈계하는 파벨 공작의 태도가 우스웠다.
‘그러니까…… 파벨 공작께서 예링거 후작가의 사업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다는 말씀이군.’
빤했다. 귀족들의 계산법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베르톨트는 파벨 공작의 무례에 삐딱하게 웃었다.
“당연히 왕실 일에 도움이 되어 드려야죠. 하지만 그게 고작 후작가의 사업에 매달리는 정도여서야 쓰겠습니까?”
“고작 후작가의 사업이라니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예링거 가문의 재산과 사업 규모는……!”
“피델로 내의 채석 사업과 광산업에서 각각 40%와 32%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죠. 거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금융업에 진출한 지 5년이 좀 지났고요.”
베르톨트가 예링거 후작가의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자 파벨 공작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그 오만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잘 아시는군요. 잘 아신다면…….”
“고작 그뿐이잖습니까. 제가 이제까지 피델로 왕실에 전한 정보의 가치가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정보라고 해봤자…….”
“그 정보 덕에 피할 수 있었던 전쟁만 세 번입니다, 공작. 그 가치에 대해 공작께서 모르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그거야…….”
그가 모르고 있었을 게 분명했지만 베르톨트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지적하기에는 너무나 흉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 가장 큰 흉은 바로 그가 자신의 앞에서 라리에트를 ‘쓸모없는 사람’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작께서 라리에트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녀는 현재 파르디나스 황제의 강력한 비호를 받고 있습니다. 파르디나스 황실에서 저와 그녀의 결혼식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했을 정도라면 좀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파벨 공작은 베르톨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라리에트의 신변 보호를 위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숨겨온 탓에 피델로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외국의 황족’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필명이 ‘릴리’라는 걸 아는 사람도 극소수였다.
하지만 그래도 공작씩이나 됐으면 자기가 알아서 국제 정세나 외국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정보는 파악해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베르톨트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고작 돈 몇 푼 더 벌자고 아무나 들이밀지 마시고, 앞으로 라리에트에게나 잘 보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베르톨트는 거북해진 속을 달래기 위해 라리에트를 찾아갔다.
“베르트!”
라리에트는 전보다 훨씬 더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그녀가 한때 친모와 오라비로부터 정서적인 학대를 받던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지도 못할 것이다.
“글을 쓰고 계셨나요?”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에요. 이때가 제일 재미있지 않아요?”
라리에트의 해맑은 미소에 파벨 공작으로 인한 불쾌감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세상 그 어느 곳에서보다 라리에트 곁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그녀의 미소와 재잘대는 목소리를 들으면 피로가 다 풀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제 고작 열여덟 살인 그녀를, 이제 겨우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그녀를 왕실에 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향기가 짙어지는 것 같은 라리에트를 볼 때마다 초조해지긴 했지만…….
“베르트. 무슨 일 있었어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늘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라리에트는 이번에도 베르톨트의 미소에 속지 않았다.
라리에트의 눈치가 빠른 건지, 자신이 라리에트 앞에서만 표정이 허물어지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베르톨트는 낮게 한숨 쉬었다.
“파벨 공작이 쓸데없이 입을 놀려서 기분이 좀 상했지만, 별일 아닙니다. 귀족들이 그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요.”
“으음…… 그것 말고도 또 뭐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맑은 날의 바닷물처럼 깨끗하게 빛나는 라리에트의 눈동자가 그의 불안한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오늘 온종일 기분이 저조한 건 고작 파벨 공작의 헛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에, 너무 슬픈 꿈을 꿨습니다.”
“슬픈 꿈이요?”
“예. 우습죠? 다 큰 사내가 간밤에 꾼 꿈 생각을 떨치지 못하다니.”
베르톨트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깨어난 후에도 가슴이 아파 한참 웅크리고 있어야 했을 만큼 슬픈 꿈이었다.
* * *
꿈에서 그와 라리에트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지금보다 열 살 정도는 더 많아 보이는 라리에트는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했으며…… 슬퍼 보였다.
게다가 현실과는 달리, 그는 라리에트에게 사랑한다 말할 수 없었고, 입 맞출 수도 없었다.
그녀 역시 저와 가끔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마음을 전할 뿐, 실제로 입을 열어 다정한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저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너무나 사랑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곁에서 함께 숨 쉬는 것. 그것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접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슬프고 아픈 사랑인데, 파리한 낯의 라리에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부탁을 해왔다.
“날이 잘 든 단도를 구해다 주세요. 부탁이에요.”
마치 눈앞에 시퍼런 날이 들이닥친 것처럼 속이 서늘해졌다.
“전하. 무엇을……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베르톨트의 질문에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라리에트가 천천히 입을 뗐다.
“클리드가 저더러…… 자신의 황후가 되라네요.”
“예?”
“내 언니의 남편이던 사람이 내 언니를 죽여놓고는, 나더러…… 자신의 황후가 되어…… 옆에 있으라네요.”
숨이 턱 막혔다.
그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도 무서웠지만, 그 상대가 심지어 그녀의 형부였던 사람이라니.
“그, 그래서, 자진하기 위해 저더러 칼을 준비해 달라는 겁니까? 제게 어찌 그런 부탁을 하실 수 있습니까?”
“칼은, 그 남자를 죽이기 위한 거예요. 어쩌면 자살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대로 언니의 원수를 두고 볼 수가 없어요.”
“전하……!”
“당신께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제가 부탁드릴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요. 제발…… 부탁을 들어주세요.”
“차라리 저더러 그를 죽여달라고 하십시오.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했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라리에트의 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베르트. 당신도 아시잖아요.”
속을 도려내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녀의 청을 거절한다면 그녀는 그때야말로 자살할지도 몰랐다.
결국 베르트는 그녀에게 날카로운 단도를 구해다 줬다.
그걸 건네는 순간, 베르트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부디 당신만은…… 행복해지실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
그녀 역시 자신이 그녀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리에트를 차가운 궁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은 끝도 없이 이어진 지옥의 미로 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서, 베르톨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 혼자 비참하게 죽도록 놔둘 수는 없어!’
그녀가 없으면 어차피 제 목숨도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더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는 라리에트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그녀가 황제를 죽이려고 계획한 날은 바로 그들의 첫날밤이었다.
베르톨트는 발 빠른 말과 가짜 신분증, 비상식량, 구급약, 간단한 옷가지 같은 것을 미리 준비하고 자신을 도와줄 이들을 매수했다.
그리고 라리에트와 황제의 첫날밤, 그들의 침실 근처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
이상하게 침실 근처를 지키는 사람이 없었지만 거기에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그는 문에 바싹 붙어 귀를 기울였다. 여차하면 자신이 직접 해치우기 위해 한 손으로는 단도를 쥔 채였다.
“이 천벌 받을 악마야! 지옥으로나 떨어져!”
라리에트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뭔가가 둔탁하게 바닥을 치는 소리가 나자 그는 곧바로 침실로 뛰어들었다.
라리에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제발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그는 미리 가져간 후드 망토를 라리에트에게 입히고 그녀를 부축해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도 그녀가 제대로 걷지 못하자 그녀를 업고는 무조건 달렸다. 심장과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온몸이 땀으로 다 젖었을 즈음, 그는 다행히 준비한 말 위에 라리에트를 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시체를 발견한 황실 기사단이 곧 뒤쫓을 터였다.
그는 말 위에 올라 라리에트를 꽉 껴안으며 속삭였다.
“라리에트, 죽기 전에 이 말은 해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나 혼자 살아남느니 당신과 함께 죽겠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어둠 한가운데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고, 그때쯤 꿈에서 깼다.
* * *
꿈 얘기를 듣고 난 라리에트는 푸스스 웃으며 베르톨트의 뺨을 어루만졌다.
“저는 여기 있잖아요. 당신 곁에, 앞으로도 계속.”
“라리에트.”
“꿈은 잊어버려요. 우리는 행복을 즐기기에도 바쁘니까요.”
그제야 베르톨트는 꿈의 잔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 곁에는 라리에트가 있었다. 꿈에서는 그토록 닿지 못해 애달팠던 사람이…….
“사랑합니다.”
“저도요, 베르트. 사랑해요.”
라리에트의 온기가 주는 견고한 행복 속에서, 베르톨트는 불안감을 떨치고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