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카시르 후작가의 후계자 (27/32)

4장 카시르 후작가의 후계자

클리드 카시르는 여전히 미남이자 천재로 칭송받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를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는 ‘후회하는 자’ 내지는 ‘어리석은 자’여야 했다.

‘내가 만약 헛된 욕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엘로르 전하는 살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던 엘로르의 죽음은 시간이 갈수록 그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당신은 날 배신할 거잖아! 당신은 날 믿지도 않고, 날 좋아하지도 않고…… 날 이용하려는 건 당신이잖아!”

저를 원망하던 엘로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이 그녀를 배신하는 미래를 이미 겪고 왔다고, 그럼에도 저를 가져야겠다고 발악하던 엘로르…….

그녀가 품었던 감정은 애정이었을까, 증오였을까.

자신이 그녀를 구할 방법은 정말로 없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클리드는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하릴없는 의문을 곱씹으며 짙은 후회 속에 침잠하곤 했다.

일리에가 슬라르한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리에 곁에 있으면 왠지 삶이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 그녀를 찾아간다 해도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와 결혼할 수 없어서 떠나길 선택한 녀석인데, 나라고 별다른 미래를 약속할 수 있나…….’

일리에는 이제 자유민이었지만 루벨파스트 노예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계속 그녀를 따라다닐 터였다.

그녀를 얻고자 한다면 자신의 모든 걸 버릴 각오를 해야 하는데 클리드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날 때부터 귀족이었고 모두의 찬사를 받는 풍족한 삶을 살아왔다. 그랬던 자신이 고작 노예 출신 여자를 아내로 맞자고 여태 누려왔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혼란의 소용돌이를 거쳐온 뒤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황위는커녕 자신이 참모로 일했던 후보는 흑마법사에게 영혼을 빼앗겨 죽었고, 난생처음 미묘한 감정을 느꼈던 여자는 멀리 떠나 버렸다.

그나마 마지막 선택을 잘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거나 다름없었다.

3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카시르 후작가의 차남일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 생각에 한동안 무기력하던 클리드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 원인은 다름 아닌 그의 형 막시밀리언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막시밀리언은 폭탄 같은 발언을 했다.

“저는 클리드가 우리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뭐, 뭐라고?”

“맥스!”

잘못 들었나 싶어 형과 부모를 살피는 클리드와는 달리, 그의 부모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막시밀리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은 의외로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부모를 설득했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저보다는 클리드가 우리 가문을 이끌 재목입니다. 클리드처럼 똑똑하고 사교계 내에서 영향력도 큰 사람이 가문의 대표가 되어야지, 저처럼 눈에 띄는 것도 없는 사람이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후계자가 되는 건 가문에 여러모로 누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리드는 제 형이 이렇게 길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심지어 후계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겠단다.

“형님……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러니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여태 아무 말 없다가 왜 이제야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서…….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언제나처럼 허허 웃다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황위 경쟁의 참모로 일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쳤었거든. 이젠 네가 그 일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또 참모로 일하며 네가 보여준 활약 덕분에 마음을 더 굳히기도 했다.”

클리드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여태 비굴하게 제 눈치나 보며 노력하지도 않고 장자로서의 이득만 챙긴다고 여겼던 형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막시밀리언의 의견이 간단히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다.

“맥스. 동생을 아끼는 네 마음은 잘 알겠다만, 가문의 전통을 이렇게 간단히 바꿀 수는 없다.”

카시르 후작은 완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늘 허허실실하던 막시밀리언이 이번만큼은 그렇게 쉽게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과거만 답습하고 있다가는 카시르 후작가가 몰락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제가 기꺼이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겠다는데, 이제까지의 관습이라는 것 외에 이것이 불가할 이유가 또 있습니까?”

“이번 대에서야 평화롭게 지나갔다 쳐도, 다음 세대부터는 후계 문제가 형제간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

“후계자 자리를 노린다면 기꺼이 싸워야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 가문의 부흥을 이끌어야죠. 그게 진정으로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방계 쪽으로도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다들 클리드가 후계자가 된다는 데에 반대가 없더군요. 클리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그만두십시오, 아버지.”

여태 말 잘 듣던 아들이 갑자기 제 의견을 피력하고 나서자 카시르 후작 내외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당황했기로서니 클리드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제 형을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창피함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막시밀리언은 말이 없어진 클리드를 보고 그가 부모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차분히 달랬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클리드.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그저 관습을 지키시려는 것뿐이지, 널 인정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야. 알고 있겠지?”

“아…… 네…….”

“네가 후계자가 될 거다. 내 책임을 네게 떠맡기는 것 같아 미안하기는 하다만, 너라면 가문을 훌륭히 이끌어 나가리라고 믿는다.”

클리드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천재라 여겼던 지난날이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날 이후 후계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의외로 활발하게 진행되어, 결국 카시르 후작도 고집을 꺾고 클리드를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원했던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난 도대체 뭘 원했던 걸까.’

저보다 더 기뻐 보이는 형을 보며 클리드는 착잡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이토록 저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후계자 자리를 바랐으면서도 자신은 한 번이라도 아버지를 설득해 보려 한 적 있던가.

겉으로나 착한 척하며 속으로는 형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면서, 보기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무너트릴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역겨워. 내가 이렇게나 역겨운 인간이었다니…….’

클리드는 후계자가 된 이래 자기혐오를 멈출 수 없었다.

그걸 보고 카시르 후작 부부와 막시밀리언은 ‘클리드가 너무 착해서 제 형의 자리를 빼앗은 죄책감에 시달리나 보다.’며 안쓰러워했지만, 그건 오히려 그의 자기혐오를 더욱 부추겼을 뿐이다.

황제에게 후계 지위를 고하러 가던 날도 클리드의 안색은 영 좋지 못했다.

슬라르한도 그걸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후작 부부가 있는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클리드에게 차 한 잔을 권했다.

두 사람만 자리한 응접실에서, 슬라르한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본론을 꺼냈다.

“혹시 재상직을 맡아볼 생각 없나?”

“……예?”

“자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태연히 말하는 슬라르한과는 달리 클리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제가……요?”

“뭘 그리 놀라나. 몇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하다는 천재를 재상에 기용하겠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전 같았으면 환호할 일이었겠지만 지금의 클리드에게는 자괴감과 자기혐오가 깊어질 일이었다.

“아마 여태 저를 겪어서 아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괜찮은 인간이 못 됩니다.”

“자네 말대로, 여태 자네를 겪었기에 하는 제안이네만.”

“제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인간에게 재상직을 맡겼다가는 후회하실 겁니다.”

확실히 전과는 달라진 클리드의 태도에 슬라르한은 의외라 여기면서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들 하지.”

“그렇죠.”

“인간의 본성은 잘 변하지 않아.”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못 박은 대로만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클리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네. 그리고 장점도 있지. 나는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기회를 자네에게 주는 것이고, 자네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단점을 억제할 것이라고도 믿는 걸세.”

“정말로 저를 믿으십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생에서도 제게 배신당하신 것 같던데요.”

클리드는 제 멱살을 잡은 채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고 윽박지르던 슬라르한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했다.

슬라르한이 황제가 된 뒤, 그가 일리에와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되었다는 것까지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의 약속 운운하던 것은 분명 그의 전생일 터였다.

그걸 깨달았다면 자신을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슬라르한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는 전생의 자네와 지금의 자네가 다르다는 걸 알아. 만약 똑같은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제안도 하지 않았겠지.”

“제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보십니까?”

“물론. 그리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이미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 않은가.”

그 말에 클리드는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조금씩이라도 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탐욕스러운 본성을 늘 경계할 테고, 오만하지 않으려 애쓸 것이다.

낙인찍힌 대로 사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하는 신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네.”

이제야 한없이 무겁기만 했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클리드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궁했을 때, 슬라르한은 그가 떠난 자리를 말없이 바라보며 저 역시도 참으로 모자라고 부족했던 전생을 떠올렸다.

‘난 자네가 릴리에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모를 수가 없다.

부정확한 꿈, 그리고 어머니와 일리에의 불완전한 설명만으로도 그는 클리드가 릴리에트를 사랑했음을 느꼈다.

클리드조차 자신이 릴리에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몰랐지만, 연적이나 다름없는 자신은 알았을 것이다.

‘자네의 사랑을 눈치챘으면서도 일깨워 주지 않은 것이 아마 나의 이기심이었을 테지.’

복수심과 시기심이 깃든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릴리에트를 죽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 모두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과오를 깨닫고 더 나아지려 노력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 아니던가.

모두, 이렇게 살아가는 법이다.

쌓아둔 일이 많았기에 슬라르한은 식은 찻잔을 남겨두고 일어났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는 옅은 한숨만 남아 후회라는 먼지로 내려앉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