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황금 갈퀴
파르디나스 제국민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정보원을 부업으로 삼고 있었다.
정보원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정보 길드에서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만 해주면 되는, 살림살이 팍팍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유용한 부업이었다.
제국에는 꽤 많은 정보 길드가 있었고, 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더 쳐주는 길드에 정보를 팔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드들이 하나의 커다란 정보 길드의 산하 지부라는 것은 몰랐다.
그들이 정보의 가격을 한 푼, 두 푼 따지는 것조차 길드장의 계산하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이름 한번 잘 지었다니까? 돈을 갈퀴로 긁어가는 곳이니 <황금 갈퀴>라는 이름이 딱이지, 뭐.”
오랜만의 정보 길드장 연합 모임에서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맞은편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이죽거렸다.
“왜 또 시비야?”
“시비라니? 부럽다는 거지.”
“그럼 그냥 부러워만 해. 왜 자꾸 우리 일에 훼방을 놔?”
“우리가? 우리가 왜 너희 일에 훼방을 놔?”
“루텔. 너희 애들이 우리 정보원들 매수하고 다니는 걸 내가 모를까 봐? 너도 잘 알다시피, 나, <황금 갈퀴> 길드장이야.”
앉아 있던 남자, 베델의 갈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루텔이라 불린 남자는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베델의 모습에 움찔했지만 이내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황금 갈퀴를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베델을 조롱하며 정신 승리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흐응…… 너야말로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냐? 정보원들이야 한 푼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가는 게 당연한걸. 아니면, 애타게 찾는 소식이 중간에 끊겼나? 도망친 마누라라도 찾아?”
아니나 다를까, 베델의 시선이 차가운 걸 넘어서 흉흉해졌다.
베델의 반응을 끌어냈다는 게 신나서 루텔은 실실 웃었다.
“어? 정말인가 보네? 우리가 찾아줘? 베델의 의뢰라면 내가 싸게 해줄게. 그런데 어느 마을 여편네가 베델의 마누라일까? 다르초? 라비에나? 메이요른? 바렌카?”
얄밉게 말끝을 배배 꼬며 놀리는데 방금까지 미간을 찌푸릴지언정 그만의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던 베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내가, 이제까지는 왕 놀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조용히 지냈거든? 같이 먹고 살자고 작은 길드들에 도움도 주고, 정보원들 보호 체계도 세우고, 나름 노력했어.”
“어……?”
“우리 정보원 슬쩍해 가도 눈감아 주고, 가격 후려쳐서 우리 의뢰 뺏어가도 그러려니 했지. 내가 몰라서 반응 안 한 게 아니야.”
루텔을 비롯한 몇몇 길드장들이 움찔했다.
“여태 좋게 좋게 넘어가 주니까 이젠 내가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지?”
“그, 그게…….”
“같잖게 도발까지 하면서 발악하는 거 보면 요새 <밤 그림자> 길드는 장사가 영 안 되는 모양인데, 아예 장사 접게 해줄게. 그럼 나한테 와서 귀찮게 구는 일도 사라지겠지. 안 그래?”
농담이나 허풍이라고 여겼던 루텔의 안색이 새파래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 그림자 길드에 들어가는 의뢰, 무조건 반값에 받아.”
정보 길드장의 모임이라지만 그 자리의 대부분은 황금 갈퀴의 산하 지부였다.
베델이 각 길드장을 수평적으로 대해주기에 여태 의식하지 못했지만, 황금 갈퀴 산하 길드가 제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결국 그 길드의 진짜 주인은 베델이었다.
모임에 모인 스무 명의 길드장 중 열 명이 베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머지 길드장들이 루텔을 보며 혀를 차자 루텔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미, 미안해, 베델! 농담이었어!”
“그래서?”
“다시는 이런 재미없는 농담 하지 않을게. 화 풀어, 응?”
“말로만 하는 사과는 안 받아.”
여전히 베델의 목소리는 싸늘했지만 루텔은 거기서 협상 가능성을 찾아냈다.
“우리가 산 북쪽 정보, 그냥 넘길게.”
두 달 치의 정보를 빼앗긴 탓에 초조했지만 베델은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채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내가 날강도냐? 정보 장사하는데 정보 공짜로 가로챌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미 누군가 확인한 정보는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
루텔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 들릴 정도였다.
“우리가 평소 사던 가격의 반. 그 정도면 합리적인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루텔?”
“무, 물론이지! 하하하! 어우, 가격 잘 쳐줘서 고마워.”
“지금 애들 시켜서 우리 쪽으로 정보 가져가라고 해.”
“어? 어어, 알았어.”
결국 질투 때문에 벌인 도발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루텔은 비싼 값에 산 정보를 한참이나 낮은 가격에 도로 팔아야 했다.
* * *
길드장 모임에서 돌아온 베델은 그 사이 황금 갈퀴 사무실에 고이 바쳐진 두 달 치의 북쪽 정보부터 살폈다.
북쪽의 여러 마을과 관련한 정보였지만 그가 확인하는 것은 딱 한 군데, 북쪽의 산촌 메이요른뿐이었다.
지난 두 달간 메이요른에서 빠져나간 20대 여성은 없었다.
뭔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싸움이 벌어지지도 않았으며, 자연재해도 없었고,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의원이 급하게 들른 적도 없고, 환자가 내려온 적도 없었으며,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없었다.
“하아…….”
그제야 베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정보였지만, 베델에게는 꼭 확인해 봐야 마음이 놓이는 중요한 정보였다.
‘일리에는 여전한가 보구나.’
제 목숨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황제로 만들고도 그의 정부가 되느니 떠나기를 택했던 맹랑한 녀석이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웠다.
함께 지낼 때는 일리에가 주는 밝은 기운의 가치를 몰랐다.
약속대로 전 황제보다 더 큰 대가를 치러준 슬라르한 덕분에 뒷골목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지만, 일리에가 없으니 모든 일이 재미없었고 태양이 조금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도 가끔, 일리에가 갑자기 나타나 손을 붕붕 흔들어대며 웃을 것만 같았다.
양치며 사는 게 정말 지루하더라고, 그사이 재미있는 일 좀 없었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종알대면서…….
“베델. 괜찮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부길드장인 리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지 않을 게 있나?”
“으음…… 하지만 지금 네 표정은 영 괜찮지 못한데?”
베델은 리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오늘 루텔한테 날카롭게 반응한 것도 그렇고…….”
“루텔 녀석은 한 번쯤 손 봐주려고 벼르고 있었던 거야.”
“글쎄. 솔직히 말하면 오늘 일이 아니더라도 너, 언젠가부터 계속 사는 게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여.”
“내가……?”
리키는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기대하는 게 없는 표정이랄까?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
앞의 두 가지는 맞는 말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할 수 없어서 그렇지…….
“요새 무리를 했는지 영 입맛도 없고 기운이 빠지네. 그래서 그런가 봐. 걱정하게 했다면 미안.”
“지금 누굴 속이려고……!”
“달튼 백작 부인이 의뢰한 건은 잘 진행되고 있어?”
베델은 일 얘기로 리키의 입을 막았다.
그 수작을 모를 리키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베델의 속내도 읽을 만큼 눈치가 빨랐기에 그저 한숨만 쉬고 말았다.
그렇게 가장 친한 친구에게마저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를 마음속에 꾹꾹 묻은 베델은 한동안 리키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그가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황위를 양위한 전 황제가 사라졌어. 북쪽으로 향한 것 같기는 한데, 뒤쫓던 애들을 전부 따돌렸어.”
슬라르한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베델은 그가 일리에를 찾아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슬라르한이 엘란츠에게 황위를 양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놀라웠는데 설마 그게 일리에를 찾으러 가기 위한 것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귀족이었으니까. 귀족은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
베델이 알던 귀족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노예 출신 여자를 제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았다. 잘해줘 봤자 정부였다.
그러나 황제까지 했던 슬라르한은 달랐다.
그는 일리에가 그에게 선물한 황제의 자리에서 그의 의무를 다한 다음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 모든 것에 욕심이 없었다는 것처럼, 후련함마저 느껴지는 행보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쌍방향이었다는 뜻이구만?’
짝사랑에 제 모든 것을 건 일리에를 보며 안타까워했더니, 두 사람은 이미 상대방 외에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슬라르한은 어떻게 3년이나 황궁에 매여 있으며 일리에를 찾아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북쪽으로 향했다는 것을 보면 일리에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그 그리움을 참을 수 있었을까.
“슬라르한 벤티악이 황위를 양위하면서 얻은 게 있었을 거 아냐?”
“내밀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건 일단 ‘완전한 면책 특권’이야. 파르디나스 내에서는 황제라 하더라도 슬라르한 벤티악에게 그 어떤 의무도 강제할 수 없어.”
“거기다 마르지 않는 금고도 하나 받은 것 같아. 파스완 중앙은행에 슬라르한 벤티악 이름의 금고가 하나 있다네.”
역시나 싶었다.
일리에를 얻기 위해 그에게 짐 지워진 귀족으로서의 의무나 책임은 벗어 던지고, 그녀에게 모든 걸 안겨줄 수 있는 재력은 확보했다.
심지어 그는 의무와 책임을 면제받았을 뿐이지, 그 높은 지위 자체를 박탈당한 게 아니었다.
제국의 어딜 가나, 아니, 외국으로 간다 하더라도 벤티악 공작가와 황실의 인장이 찍힌 그의 신분증이면 어디서건 귀빈 대접을 받을 터였다.
“벤티악 공작가는 어떻게 된 거지?”
“일단 세이렌 벤티악 공작 부인이 가주 자리에 앉았어. 아들이 돌아오면 언제든 그 자리를 넘겨줄 거라고 했다는데,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벤티악이라는 성은 오로지 슬라르한 벤티악에게만 허락되고, 벤티악 영지는 다른 이름으로 황실에 흡수될 거라나 봐.”
베델은 슬라르한이 자신의 짐을 벗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저도 모르게 실실 웃었다.
이런 사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로지 일리에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간 사내를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애들을 더 풀어볼까? 북쪽으로 간 건 확실하니까 일단 통행세를 받는 관문들부터 확인해 보면 범위를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뒤져봤어. 그런데 관문을 지난 흔적도 없어. 땅속으로 꺼진 건지, 하늘로 날아간 건지, 원.”
리키를 비롯한 간부급 길드원들이 끙끙대며 고민했다.
“우리가 못 찾으면 아무도 못 찾는다는 거겠지. 때가 되면 알아서 나타날 테고. 그러니 자유인이 되어 떠난 사람 일은 신경 끄고 다른 일이나 조사해 보자.”
베델은 슬라르한이 향한 곳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일리에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 것. 그게 그가 일리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