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함께라면
“일리에!”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리에트 전하.”
활짝 웃으며 맞이해 주는 라리에트를 보며 일리에는 또 감격스러워졌다.
전생에도 성인이 된 라리에트를 보지 못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라리에트는 전생의 그 어느 날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예쁘게 빛날 수 있는 아이를, 내가 망가트렸었구나.’
전생에 대한 후회는 그만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자꾸 전생에 두고 온 이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리에트 얘기가 나올 때마다 회한에 빠지는 일리에를 보며 슬라르한이 전생 이야기를 라리에트에게도 해주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일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이야기를 현실에 덧씌우는 건 덧없는 짓이었다. 이제 와 라리에트에게 언니라는 소리를 듣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언니라고 불릴 수 있던 그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걸.’
그랬다면…… 그랬다면…….
“일리에.”
후회에 빠져 있던 일리에를 일깨운 건 슬라르한의 목소리였다.
멍하니 딴생각에 빠진 사이 손님방에까지 안내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슬라르한을 보는 순간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전생은 아무리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고, 그 고통스러운 시간 덕분에 지금 이렇게나 큰 행복을 얻었으니, 지금은 지금의 행복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
“방이 엄청 좋네요. 오랜만에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자겠다.”
“하녀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까 금방 씻을 수도 있을 거야. 혹시 불편한 거 있어?”
“아뇨. 하지만 피곤하긴 하네요. 얼른 씻고 좀 눕고 싶어요.”
일리에는 하녀들이 다 빠져나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슬라르한의 품에 폭 안겨 뺨을 문질렀다.
딱딱할 정도로 탄탄한 그의 가슴에 이렇게 응석 부리는 건 일리에의 새로운 취미였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제 마음을 표현해도 되는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리에에게보다는 슬라르한에게 더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처음 일리에가 제 가슴팍 사이에 얼굴을 문지르며 웅얼댔을 때는 이미 결혼한 사이면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은 그때처럼 자극적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안온한 애정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슬라르한은 제게 안겨 응석 부리는 일리에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피곤하겠지만 내일은 오전부터 의상실에 가봐야 할 거야. 기성복을 산다고는 해도 여러 벌을 입어봐야 하고 수선도 해야 하니까 일찌감치 움직여야 하거든. 그러니 오늘 저녁은 잘 먹어놔.”
“당신은 여전히 저를 살찌워 잡아먹으려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매일 밤 잘 잡아먹고 있잖아.”
“르한!”
일리에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의 팔뚝을 안 아프게 때리며 괜히 눈을 흘겼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음흉한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다니까.”
“이게 음흉한 거면 난 앞으로도 계속 음흉할 생각이야.”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쿡쿡댔다.
별것 아닌 농담만 나눠도 행복했다.
* * *
베르톨트와 라리에트가 추천해 준 의상실은 겉보기에도 비범한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의상실의 주인인 로베리오 투치입니다.”
예민한 성격일 것 같은 그 남자는 왕자가 소개한 손님인데도 그다지 비굴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슬라르한과 일리에를 앞뒤로 돌려보더니 휘하 직원들을 동원해 몇 가지 드레스와 남성용 예복을 가져왔다.
“남성복이 더 빨리 끝나니까 신사분 먼저 입어 보기로 하죠.”
일리에는 그가 가져온 예복들이 사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려한 디자인의 예복이 가게 여기저기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가 가져온 것은 꽤 수수한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설마 우리 르한을 무시하는 거야?’
일리에는 매섭게 따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슬라르한의 시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예복을 입고 나온 슬라르한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멋져요!”
“그렇죠?”
“세상에! 르한한테 이렇게 잘 어울리는 예복은 여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안목이 높으시군요. 어떤 분들은 장식이 많고 화려해야 고급 의상인 줄 아는데 말입니다. 후후.”
로베리오의 칭찬에 일리에는 속이 조금 뜨끔했지만, 그의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화려한 플래티넘 블론드와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인 슬라르한에게는 오히려 장식은 심플하되 소재가 고급스러운 예복이 잘 어울렸다.
광택 없는 빳빳한 검은 직물이 섬세한 패턴으로 조합되어 슬라르한의 몸을 감쌌다.
금 단추도 디자인이 과하지 않았고, 금사가 아닌 검은색 실크로 테두리를 두른 라펠은 슬라르한의 품위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보석 장식이나 금술이 늘어진 견장이 더해졌다면 너무 과해 보였을 것이다. 남의 결혼식장에 가면서 민폐를 끼칠 게 아니라면 이 정도가 딱 좋았다.
“로베리오! 당신은 천재예요!”
“과찬이십니다. 이것도 좋지만 다른 것도 한번 입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나서 손뼉을 치는 일리에와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풀린 로베리오를 향해 슬라르한이 자신의 의견을 표했다.
“나는 그냥 이걸로…….”
“얼른 입혀봐요, 로베리오!”
“자자, 이번에는 이걸로 입어 보시죠.”
물론 묵살당했지만 말이다.
당황한 슬라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리에와 로베리오는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슬라르한에게 이것도 입혀보고, 저것도 입혀보면서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하아…… 내 남편은 너무 잘생겨서 뭘 입혀도 빛이 나지만…….”
“재수 없는 소리지만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군요.”
“아무래도 맨 처음 것이 제일 낫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정말 안목이 높으시군요!”
“호호호, 저렇게 잘생긴 남자랑 같이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물에 대한 안목이 높아진답니다.”
일리에는 콧대 높은 귀부인인 척 웃으며 실컷 슬라르한의 드레스 업을 즐겼지만, 내내 시달린 슬라르한은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 차례지.’
수선을 위한 가봉까지 다 마친 슬라르한은 옷을 갈아입은 뒤 은밀하게 씩 웃었다.
“일리에. 이젠 당신이 입어 볼 시간이야.”
“하아, 나한테 어울리는 드레스가 있으려나.”
방금까지 신나 하던 일리에는 단번에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슬라르한이야 워낙 미남자에 체격도 좋아서 뭘 입혀도 눈이 황홀했지만, 자신은 뭘 입어도 어정쩡할 것 같았다.
하지만 라리에트의 결혼식에 이런 꼴로 갈 수는 없으니 어떤 드레스든 사기는 사야 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부인. 부인을 보자마자 어울릴 만한 드레스가 생각났으니까요.”
“네, 뭐. 아무거나 주세요.”
일리에는 곧 로베리오와 다른 직원들의 손에 이끌려 탈의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며 의상실을 천천히 둘러보던 슬라르한은 제작 중인 드레스들을 보며 제 아내의 첫 드레스를 기성복으로 사주는 게 못내 미안해졌다.
일리에는 드레스에 관심이 없으니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할 테지만, 아내에게 무엇이든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남자의 마음은 그랬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던 슬라르한의 시선이 창밖의 보석상에 박혔다가 다시 돌아왔다.
때마침 탈의실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의상실 직원들이 일리에를 데리고 나왔다.
“어, 어때요, 르한? 이상하지 않아요?”
아내의 드레스 업을 기대하던 슬라르한의 입매가 굳었다.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뭔가 크게 충격받은 사람 같았다.
슬라르한의 표정을 본 일리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 봐요. 이상하대도.”
“그럴 리가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나한테 이런 옷이 어울릴 리가…….”
그녀가 입은 것은 회색 모슬린 드레스였다.
모슬린 프릴이 가득 잡힌 오프숄더 라인 위로는 일리에의 하얗고 동그란 어깨가 예쁘게 드러났고, 회색 모슬린 사이사이로 옅은 분홍색 모슬린이 비쳐서 신비롭고도 달콤해 보였다.
허리를 조인 연분홍색 리본은 로맨틱한 드레스의 포인트가 되었다.
“여기에 분홍 리본 머리 장식을 얹으면 더욱 아름다우실 겁니다.”
“저한테는 이런 요정 같은 옷이 안 어울린다니까요…….”
사실 탈의실의 거울을 보고서는 꽤나 마음에 들었지만 굳어진 슬라르한의 얼굴을 보자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얼른 갈아입고 싶었다.
그러나 슬라르한은 제 아내에게 또 반할 것 같아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굳은 거였다.
“아름……다워.”
“그렇게 억지로 대답을 짜내지 않아도 돼요, 르한. 다른 걸 입어 보면 되니까…….”
“아니. 그걸로…… 그걸로 해.”
“응?”
“하아…… 너무 예뻐서 숨이 잘 안 쉬어져.”
“그, 그게 뭐예요, 르한!”
일리에가 목까지 빨개진 채로도 실실 웃음을 흘리는 사이, 로베리오는 ‘부부가 쌍으로 팔불출이로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라리에트의 결혼식은 완벽했다.
완벽하게 청명하고 따뜻한 날씨, 실수 하나 없이 이어진 예식, 맛있는 음식과 사람들의 찬사, 모두가 웃고 즐겁게 떠드는 행복한 자리였다.
파르디나스의 전 황제라는 슬라르한의 참석이 모두의 이목을 끌었고, 그의 아내라는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다들 고개를 갸웃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누구인들 어떠하랴.
양쪽 귀에 그 비싼 핑크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만으로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될 사람이라는 게 확실한데.
일리에도 제 귓불이 무거운 것 같다는 감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드레스를 사고 오는 길에 다짜고짜 보석상에 들어가더니 창가에 전시된 핑크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사버린 슬라르한의 행동은 아직도 황당했다.
설마하니 양쪽 귀에 저택 하나씩을 매달고 있게 될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어쨌든 덕분에 슬라르한의 명예도 지키고, 슬라르한에게 무슨 얘길 들었는지 자신을 ‘언니’라 불러주기 시작한 라리에트의 명예도 지키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벤티악 공자님. 그리고 일리에 언니.”
“오히려 초대해 주셔서 제가 감사했죠, 뭘.”
“좀 더 머무르시다가 가면 좋을 텐데…….”
“여행하다가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를게요.”
“정말이죠? 꼭 그래야 해요? 꼭, 꼭!”
일리에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라리에트를 다시 한번 꽉 껴안아 주었다.
스산한 얼굴로 날카로운 단도를 만지작거리던 라리에트의 잔상이 점점 옅어져 갔다.
“꼭 그럴게요. 전하께서도 꼭 행복하게 지내고 계셔야 해요.”
“응…… 이제는 걱정 말아요, 언니…….”
일리에는 또 울기 시작한 라리에트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참이나 나누다가 겨우 말 위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육로로 슬라르한과 여행을 다닐 계획이었다.
라리에트와 베르톨트가 사는 저택이 안 보일 즈음이 되자 일리에의 마음에는 아쉬움과 애틋함 대신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다음 어디로 간다고요?”
“피델로의 변경을 지나 필로코스로 갈 거야. 필로코스의 왕세녀께서도 한번 들러달라고 성화라…….”
“아, 캐롤린 올리비에 백작 부인 말이죠?”
“이젠 완전히 귀국해서 캐롤린 아스무이라 전하라고만 불리지.”
“남편인 올리비에 백작은 생각지도 않게 대공이 되게 생겼군요.”
“아내 덕을 본 남편들의 모임이라도 만들까 봐.”
일리에는 슬라르한의 농담에 키득거리며 풀 내음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눈 앞에 펼쳐진 외길은 벤티악 저택을 나오던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여행이 흥미진진할 것 같아요.”
“당연하지. 우리 둘이 함께인데 뭔들 재미없겠어?”
두 사람은 즐거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몰았다.
그들의 뒤로 나비 한 쌍이 팔랑거리며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