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료코의 치명적인 실수는 우주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당황한 그녀가 막무가내식으로 휘두른 칼이 지면에 처박혔다.
우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그녀의 얼굴을 힘껏 발로 걷어찼다.
어이없는 일격을 맞은 료코가 땅에 나동그라진다. 우주가 재빨리 쓰러진 그녀를 깔고 앉았다.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아하하하! 네 이년 꼴 좋구나!”
갈증이 풀리는 듯 속이 다 시원했다.
그는 주저없이 료코의 따귀를 때렸다.
찰싹, 찰싹, 찰싹!
우주의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엉겨붙은 머리카락과 흙 묻은 료코의 얼굴에 너댓번의 따귀를 세게 후려치니 통쾌해도 너무 통쾌했다.
그런데 따귀로만 끝내기에는 참 후련치 않다. 왜놈들에게 억울하게 죽어간 동지와 백성을 위해서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복수할 방법이 어디 없을까?
‘그래 강간!’
그 즉시 투박한 손길로 료코의 가슴팍을 미친듯이 풀어헤쳤다. 짐짓 색에 굶주린 짐승처럼 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 같은 왜놈 계집을 욕 보이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그 젖가슴을 덮고 있던 속옷 마저 허리까지 끌어내리자, 두 개의 꽃봉우리가 막 피어난 분홍 연꽃처럼 수줍은 듯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아, 하아...”
그런데 어째서 일까.
우주는 상기된 눈으로 젖가슴을 망연히 내려다 보기만했다.
한동안 그러다 마침내 흥이 식은 듯 땅에 침을 퉤 뱉으면서 일어섰다.
근처에 떨어진 료코의 칼을 주워 하늘 높이 쳐들었다.
“질겼던 우리의 악연도 이제 끝이다. 다시 태어나거든 그땐 사람답게 살거라.”
그대로 칼을 내려치려할때였다.
뒤에서 소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 잠시만요!”
우주는 여전히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무심코 뒤돌아봤다.
“여긴 어찌 찾아왔소?”
“우, 우선 진정하시고요. 칼을 내려놓고 이야기 합시다.”
소라는 긴장된 얼굴로 양손바닥을 아래로 하며 그에게 진정하라는 시늉을 했다.
“일단 저랑 얘기 좀 해요. 왜 그러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년은 일본군 장교외다! 이년 때문에 조선 백성들이 숱하게 죽어갔소!”
주변이 쩌렁쩌렁. 그 기세가 워낙 살기등등하여 소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해는 합니다만,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대는 100여년 전의 그 시대가 아닙니다. 아무리 죄가 있다한들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며, 죗값을 치르기 전에는 먼저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합니다.”
“법의 심판대라니! 잘못이 명백한데 이딴 것들한테 그런게 뭐가 필요하오? 소명의 기회를 준다는건 사치요! 그리고 시간만 아깝소! 나라를 위해서 이 내가 직접 심판하리다!”
우주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칼을 더 높이 쳐들었다.
소라가 한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다려요! 일본인 한 명 죽는다해서 나라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제 혼자라구요! 당신처럼!”
“혼자...?”
소라의 말이 통했는지 우주의 손이 문득 멈추었다.
“그래요. 저 여자는 이제 혼자입니다. 그 옛날 그녀를 도왔던 일본인들은 다 죽었어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우주 씨도 마찬가지죠. 당신을 기억하던 옛 동료는 이제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주는 문득 고민에 빠졌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이제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세상은 너무도 변했고, 의지할 곳은 하나 없다.
바닥에 쓰러진 료코를 천천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 계집뿐인가...”
“맞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100여년 전 당신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사람을 굳이 찾는다면 한때 적이었던 저 여자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바로 죽이기에는 무언가 아쉽고, 좀 더 생각을 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그녀에게 사정을 자세히 밝히면 의외로 말이 서로 통할 수도 있습니다.”
소라는 료코를 어떻게든 구해서 회사에 영입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년은...”
우주는 칼을 쓰기를 주저했다. 소라의 말에 넘어가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의 살기가 한층 수그러들자 소라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 여자가 꼭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그 대신 목숨만은 살려줍시다.”
소라는 조심조심 두세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칼을 건네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퍼억!
료코가 갑자기 눈을 뜨면서 방심하고 있던 우주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크앗!”
“어머!”
소라는 놀라서 뒤로 자빠졌고, 우주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칼을 놓쳤다.
료코가 몸을 굴리며 땅에 떨어진 칼을 잡고 단숨에 일어났다.
그녀는 칼로 우주를 경계하며 한 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서 그런지 그것을 감추기에 급급해 보였다.
“이 빌어먹을 년이!”
우주가 분한듯 크게 소리를 내질렀지만 허리가 아픈지 곧바로 달려들진 못했다.
그 사이 료코는 땅에 떨어진 칼집까지 주워들고는 젖먹던 힘을 다해서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이년아!”
일시적인 허리 통증을 꾹 참고, 재빨리 추격을 가했지만 결국 료코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100여년 전 닌자들이 가지고 다니던 연막탄을 곳곳에 뿌려 놓은 채 유유히 현장을 빠져 나간 것이다.
이후 소라와 함께 고속도로 갓길에 주차된 승용차로 돌아온 우주는 무언가 기운이 없어보였다.
뒷좌석 문을 열어주며 소라가 물었다.
“혹시 제 탓을 하고 계시나요?”
“그렇진 않소.”
“그녀를 놓쳐서?”
“그것도 아니오.”
“그럼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이세요?”
우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나직하게 대꾸했다.
“아까 당신이 했던 말을 속으로 많이 고민해 봤소. 세상은 많이 변했고, 내가 살던 세상은 이제 여기에 없소. 내 가족과 동료는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새로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날 기억해주는 사람이라고는 그 계집뿐이라니 세상 일이 참 우습소. 그년을 죽이면 난 정말로 혼자 남게되고, 만약 그년을 살리면 100여년 전 목숨 바쳐 해왔던 일들을 전부 부정하게 된다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것이 그년을 살려두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고 있다오. 이러니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소. 세상의 이치를 굳이 따지려 하기 보다 그저 모든걸 손 놓고 살고 싶소이다. 어차피 내가 없었어도 조국은 해방이 되었고, 그렇다 보니 100여년 전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지 그 의미도 모르겠고 말이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만 바보가 되고 피로만 쌓이는 것 같소.”
그가 말을 마친 후에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귀담아 듣던 소라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줄여서 서운하다는 말씀이시죠?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가니까.”
우주가 머쓱해졌는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한다.
“뭐 꼭 그런건 아니고.”
“걱정 마세요. 과거는 다 잊고 지금부터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되죠. 이 새로운 세상에서.”
소라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에 타라고 두 손으로 권했다.
차문이 활짝 열린 뒷좌석은 우주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시발점과도 같았다.
새 출발을 다짐 하는 우주.
부푼 기대를 안고 뒷좌석에 들어가 앉았다. 그에게 있어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라가 차에 타기 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저 구식말투는 어떻게 안되나? 빨리 고쳐주든가 해야지 계속 듣기 좀 거슬리네. 촌스럽기는.”
◆
“이럴수가!”
“망측하도다!”
“어찌 저런 옷을!”
모두 우주가 쏟아낸 말이다.
그가 탑승한 차량이 서울 시내로 진입하자, 초여름 햇살에 배꼽이 드러나는 옷차림과 늘씬한 다리를 뽐내며 인도를 활보하고 있는 여성들을 보고 그는 격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경호원을 붙잡고 숨이 가쁠 정도로 토해냈다.
“하물며 한양의 기생도 저런 옷은 안입는다오! 저 처자들 집안에는 어른도 없는 것인지! 허허, 참. 말세로다 말세야.”
보잉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이 미소를 짓고 대꾸했다.
“시대가 그런걸요. 요즘 여자들 옷차림이 다 저렇습니다.”
차가 신호를 받아 멈춰선 동안 그는 차창 밖을 내다 보며 나름 눈요기 중이다.
“아니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저건 완전히 벗고 다니는거나 마찬가지잖소? 저렇게 알몸으로 다니면서 시집이나 잘 갈지 참 의문이외다.”
“뭐 어때요. 내 여자만 아니면 남자들이야 그저 감사하죠. 어차피 다 끼고 살것도 아닌데.”
“그것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크흠.”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 뒷좌석에서 우주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소라는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그것들이 찔렀겠죠.”
[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 입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줄 알았으니, 이제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그보다 회장님은요?”
[현재 회사에 출근해 계십니다.]
“알겠어요. 저도 곧 도착하니까 그때 다시 뵙기로 하죠. 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소라는 망연히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신라그룹 개자식들...”
“오, 이런!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어찌 사람 많은 길 한가운데서 다 큰 남녀가 저리 보란듯이 팔짱을 끼고 다니는 거요!”
문득 소라의 귀에 난리를 피우는 우주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그제야 그에게 관심을 보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래서 남녀칠세지남철이란 말도 생겼죠.”
우주가 고개를 갸우뚱 한다.
“남녀칠세지남철? 그건 뭐요?”
“우주 씨가 살던 시대보다 남녀사이가 훨씬 가까워졌고, 또 찰싹 달라붙기에 억지로 뗄레야 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석의 N극과 S극을 생각하면 쉬운데 자석이란 말은 아시나요?”
“모르오. 꼭 알아야 하는 단어요?”
“그렇진 않습니다. 하지만 상식으로 알아두면 유용한 단어이기도 하죠. 타인은 다 알고 있는데 자신만 모르면 바보 같잖아요.”
“바보라... 음, 그렇긴 한것 같소. 사실 내 어릴적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오. 아는게 힘이라고. 왜놈과도 싸울때도 왜놈에 대해 알고 싸워야지 모르고 싸우면 죽기 쉽상이오. 참 명언이지 않소?”
소라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미소로 대답했다.
“아무튼 자석이라, 자석이란건 어떻게 생겼소?”
“당장 가르치기에는 뭐하고 앞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천천히 배우십시오. 갑자기 너무 많은 양의 정보를 습득하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것입니다.”
우주가 그 말이 맞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낭자는 어쩜 그리도 교육을 잘 받았소?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오.”
“제가 어떤데요?”
“말하는 것이 조목조목 차분해서 상당히 지적으로 보이거니와 성품도 훌륭하고 아는 것도 참 많아 내심 감탄하고 있다오. 더욱이 여성으로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원체 믿겨지지가 않는다오. 신기할 따름이오.”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보고 시대가 좋아졌다고 하는 거죠.”
“그런것도 같지만, 그게 꼭 좋아졌다고 봐야할지 아닌지는...”
우주는 말끝을 흐렸다. 예부터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있는데, 구시대 사람인 그로서는 똑똑한 여자가 많은 세상이 어쩐지 꺼림칙하기도 하다.
그는 이어서 화제를 바꾸었다.
“개성에도 데려가줄 수 있소?”
“개성을요?”
“거기에 내 누이가 살았었소. 무덤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외다.”
“안타깝지만...”
소라가 잠시 말을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드려야할지 복잡하군요. 우주 씨가 관에 갇혀있는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한국 전쟁이라면 알고 있소.”
“그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일?”
경호원이 불쑥 말을 꺼냈다.
“다왔습니다. 본부장님.”
“예.”
소라가 서둘러 내릴 채비를 했다. 차문을 열고 우주를 바라봤다.
“저는 이만 가봐야해서 시간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어디가시오? 나도 따라 내리겠소.”
우주가 부랴부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에 소라가 그의 허벅지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우주 씨는 여기 계세요. 기다리다 보면 곧 저희 직원이 올 겁니다. 개성에 관한 이야기는 그분께 들어주십시오. 현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줄 사람입니다.”
“그럼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요?”
“네? 풉.”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애같은 눈망울에 소라는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왜 웃는거요?”
“아니요. 아니.”
간신히 정색하고 짐짓 다정하게 말했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이윽고 차문이 닫혔다.
소라는 회사 정문으로 걸어가며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시대불문하고 남자들이란. 그새 빠져서는.”
또각 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는 밝고 경쾌했으며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소라가 제네틱스 본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곳에서 진을 치고 있던 수많은 취재진들이 일제히 플래쉬를 터뜨리며 벌떼 같이 몰려들었다.
“이번 정치권 뇌물수수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계시는데 부인하십니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네틱스 불법 로비에 관해 한마디라도 부탁드립니다!”
“제네틱스 한규만 회장님의 자녀로서 이번 사건이 아버님의 도덕성 문제로까지 비화될 것이란 이야기도 있던데 이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기자들은 소라가 앞으로 못가게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입을 꾹 닫고 담담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개새끼들. 성질 같아서는 신나게 패주면서 욕이라도 한바가지 해주고 싶네.’
자신을 막아선 기자들을 억지로 뚫고 나가기 보다 조금 기다렸다.
건물안에서 여러명의 경호원이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그들은 욕설을 내뱉으면서 기자들을 거칠게 밀쳤다. 그리고 이내 소라를 안전하게 호위하면서 무사히 건물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