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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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수연은 거사를 치룬 뒤 팀원들과 술마시던 천막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천막 입구에서 태평과 마주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미심쩍은 표정으로 우주와 수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에 우주는 딴청을 부리며 헛기침만 했고, 수연은 당당히 그를 마주봤다.
태평이 수연을 보며 물었다.
“기어코 잡아먹었냐?”
“웃겨, 잡아먹기는.”
“이번엔 또 무슨 레퍼토리 써먹었냐?”
“레퍼토리가 뭐요?”
우주가 끼어들며 묻자 태평이 물었다.
“집안에 빚이 있다는 둥 막 불쌍한표정 짓진 않든?”
“빚이 있었다고 말하긴 했소만.”
태평이 코웃음을 쳤다.
“그럴줄 알았다. 그건 말이지 그러니까, 웁!”
수연이 재빨리 태평의 입을 틀어 막았다. 태평은 발버둥치면서 계속 무언가를 우주에게 말하려고 했다.
“갑자기 왜 그러오 누님?”
우주가 갸웃한다. 그녀가 얼버무리듯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에헤헤. 신경쓰지 말고 얼른 먼저 들어가. 난 이 녀석하고 이야기 좀 하다갈게. 알았지?”
“음... 알겠소.”
우주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수연에게 입막음을 당한 태평은 계속 악을 쓰며 부르짖었다.
“웁! 읍! 으웁!(넌 속은거야 이 멍청아!)”
정오가 되기 전에 술자리는 끝이 났다.
우주는 슈트를 포함해 모든 장비를 반납한 뒤 공동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샤워 후 철수와 함께 퇴근을 할생각이었지만 그는 이미 퇴근을 했단다.
알고보니 우주와 철수의 출퇴근 시간이 달랐다. 우주는 일주일에 두 번 출근을 하지만 철수는 매일 오후 5시에 전방주둔지로 출근을 하고 다음날 새벽 1시에 퇴근을 했다.
“음, 하는 일이 다르다보니 어쩔 수 없군.”
우주는 아쉬운 얼굴을 짓고 혼자서 전방주둔지를 나왔다.
“이제야 나오는구만. 자네를 기다렸다네.”
정문앞 도로가에 영웅이 차를 정차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음주로 인해 운전 기사를 부른 상태였다. 그리고 우주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점심을 함께 먹자고 권했다.
우주는 흔쾌히 승낙했다.
영웅은 서울시 외각에 살았다. 집이 으리으리 했고 고용인 두 사람이 그들을 맞이했다. 개인 주차장에는 외제차가 다섯 대나 비치되어 있었다.
영웅은 호화스러운 거실로 우주를 안내한 후 TV를 켜주며 말했다.
“오는 길이 멀다보니 점심이 늦어져서 미안하네.”
“아니오 괜찮소.”
“잠시 TV라도 보면서 기다리게나. 해장에는 감자탕이 최고지. 내 금방 만들어줌세.”
영웅은 고용인들을 전부 내보낸 후 직접 요리하겠다며 식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안쪽에서는 국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났고, 맛있는 향기가 거실까지 희미하게 풍겨왔다.
이윽고 영웅이 주방 밖으로 나왔다. 그의 배에 걸린 곰돌이 앞치마가 유독 눈에 띄었다.
요리가 잘된건지 그는 활짝 웃었다.
“다 됐네. 이리와서 먹자구.”
우주가 그를 따라 들어갔다.
얌전히 식탁에 앉자 영웅이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신입이 들어오면 항상 집으로 초대해서 밥을 같이 먹지.”
감자탕을 한그릇 떠서 우주에게 건네주었다.
“먹기좋게 뼈는 다 발라놨네. 입맛에 맞으면 좋겠구만.”
“염려마시오. 아주 맛좋은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요리가 아주 잘된듯 싶소.”
기대가 한가득 담긴 눈으로 국물을 한숟갈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호 불면서 우주는 그것을 입안에 넣었다.
국물이 아주 매콤하면서도 된장을 풀어서인지 구수한 맛도 났다.
“음... 국물이 아주 시원하오!”
영웅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요리란게 이 맛에 한다네. 많이 했으니 먹고 또 먹어.”
두 사람은 아주 기쁜 표정으로 한술한술 밥을 뜨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며 영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주부터 7월 장마가 시작돼서 일이 걱정이라는 이야기부터, 자녀 학교를 위해서 외국에 나가있는 아내와 딸이 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다음 출근날은 삼일 뒤인 이번주 금요일이라는 것은 들었나?”
“들었소. 그런데 임무는 매주 두 번 있는 거요?”
“보통 그렇지. 일주일에 두 번씩만 출근하면 된다네. 그러나 이건 우리가 최소한 이행해야하는 계약서상의 출근 횟수이고, 만약 돈을 더 벌고 싶다면 자기가 쉬는 날에도 출근할 수 있다네. 회사가 한달마다 통계를 내서 그 달 출근 횟수가 많은 수라는 활약이 없어도 연봉을 올려주지. 하나, 한달 꽉 채워도 아무 활약이 없다면 연봉 상승이 고작 1~2백 선에 그치겠지만 말이야.”
“쉬는 날에 간다면, 그때 팀은 어찌되는 거요? 대장도 함께 나와야 하는 거요?”
영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때는 원정멤버라 해서 다른 팀에 소속된다네. 다른 팀장의 지시를 받아야 할거야.”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난 뒤 그가 이어서 물었다.
“그래, 오전에 수연 씨 하고는 좋은 시간 보냈나?”
“푸웁!”
예상치 못한 질문에 우주는 먹던 걸 쏟을 뻔했다.
영웅이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냅킨을 건네준다.
“팀 개개인의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싶진 않네만, 자네를 위해서 일부러 이야기를 꺼내봤네. 자네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진심으로 생각해선 안돼.”
우주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다행이로군.”
영웅이 방긋 웃었다.
“예전에 수연 씨 마음을 진심으로 생각한 수라 한 명이 팀에서 난동을 부린적이 있어서 말일세. 그때 팀장으로서 애 좀 먹었지. 우리는 항상 실탄을 휴대하고 다니니 서로가 조심하지 않으면 팀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즐길땐 즐기더라도 사랑과 엔조이는 명확히 구분해야지 바보같이 사고를 치면 안되네.”
“심각한 사고였소?”
“무척 심각했지. 자칫하면 내가 잘릴뻔했으니까.”
“그 자는 어떻게 되었소?”
“내가 죽였다네.”
우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웅이 말했다.
“놀랬나? 하긴 놀랄만도 하지. 하지만 레지스트 쉴드에서는 팀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팀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녀석은 수연 씨를 납치해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날이 뜨기 직전까지 우린 수연 씨를 찾아 헤맸지. 마침내 어느 한 동굴 안에서 밧줄에 묶여있는 그녀와 녀석을 찾아냈어.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던거야. 해가 뜨면 바로 사탄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차분히 그를 달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네. 그래서 결국 쏴버렸지.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으니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거실 쪽에서 고용인이 오가는 발걸음 소리만이 들려왔다.
우주는 조금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팀장이 팀원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들렸으니까 왠지 꺼림칙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할 처지는 아니오만, 수연 누님은 그런 일까지 당했으면서 왜 아직도 자신의 몸을 가벼이 다루는 것이오?”
영웅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런 것일세.”
이어 물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앳된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거지. 사람은 보통 처음 관계를 가진 이성을 평생 못잊질 않나?”
우주의 머릿속에 불쑥 어떤 여성이 떠올랐다.
무심코 대답했다.
“아마도...”
“수연 씨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죽게되면 오랫동안 기억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일세.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사랑을 못해봤거나 동정인 남자들이지. 한편으로는 무서운 여자야. 어디 자네는?”
“뭐가 말이오?”
“수연 씨가 처음이었나?”
우주가 잠시 입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다섯 번째요.”
“하하하. 수연 씨에게는 무척 아쉬운 일이군.”
영웅이 웃음을 짓다가 이내 지우고 말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연 씨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뒷담화를 하고 싶은게 아니네. 오히려 난 그녀의 행동을 바람직하다고 보지.”
“어째서 그러오? 여자의 몸으로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게 좋소?”
“물론 좋지 않지. 하지만 그건 오직 내 여자일테만 그렇고, 내가 이끄는 팀에 속한 구성원일때는 또 다르네. 그런 행동을 함으로서 팀원의 스트레스가 풀어진다면 팀장으로서 더할나위 없이 좋지. 이해되나?”
“팀 안에서 사고를 안치니까 말이오?”
“그렇지.”
우주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기분을 좀 알것 같소.”
“그런가? 자네도 집단을 이끌어본 경험이 있나?”
“뭐 한때는 그랬긴 하오.”
“이거 다행이군.”
영웅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경험했다는 그 집단이라는게 생명을 담보로 하는 레지스트 쉴드의 집단과는 좀 다를거라 생각하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우리 고릴라 팀원들은 더 극단적이랄까? 자네가 경험한것과 좀 틀릴게야.”
우주도 나름 반박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굳이 말 안하고 듣기만했다.
“좌우간 자네도 수연 씨처럼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일세. 우리 일은 맨정신으로 버티기에는 힘든 일이 잔뜩이니까. 난 이왕이면 건전한 취미를 추천하네. 예를 들어 우리 팀원인 태평이는 연봉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하는 취미를 갖고 있지. 자신은 원룸에 살면서 말이야.”
해가 질 무렵이 되서야 영웅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배려로 우주는 자신이 사는 원룸 앞까지 차를 타고 올 수 있었다.
고용인을 떠나보내고 나서 그는 원룸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이제야 떠났나 보군.”
단념하고 원룸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불쑥 등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죽어라 신진루이!)”
휘익 하고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휘둘러진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우주는 재빨리 제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역시, 밤을 새고 다음날 저녁까지 움직이다보니 피곤에 감각이 무뎌진 탓일까. 팔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지며 피가 주룩 하고 흘러내렸다.
료코가 무섭게 내려친 칼날이 우주의 팔을 얕게 베어 버렸다.
게다가 그녀 또한 며칠을 굶주리고 피곤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좋은 솜씨를 부리는 것만은 내심 감탄했다.
우주가 뒤로 물러서자 료코는 연속으로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여태 어딜 다녀왔느냐!)”
어딜 다녀왔냐니. 분명 혐오하고 경멸해야할 대상이건만 그녀가 그렇게 말해주니 싫지만 고마울지경이다.
그리고 더욱 동정심을 불러왔던 것은 그녀의 몰골이다.
제대로 씻지 못해 얼굴과 목에 땟자국이 묻고 이렇다할 끼니를 먹지못해 살이 무척이나 빠져 팔다리가 앙상했다.
그저 우주를 죽이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꼬박 2주를 버티던 그녀였다. 정말이지 독하고 처량한 여자다.
우주는 내심 ‘드디어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일준이의 죽음을 봐서 그런가?’ 하고 자문하면서, 말조차 섞기 싫었던 그녀에게 진지하게 말을 걸었다.
“(날 죽여서 얻는게 뭐가 있지?)”
“(대일본제국의 부활이다!)”
“(내 보기엔 넌 아직도 망상에 사로잡힌 미친년에 불과하다. 너도 알다시피 일본은 이제 끝났다. 시대는 변했고, 이 시대 일본은 전쟁에서 패한 패전국이며 전세계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죄인의 나라다. 전처럼 제멋대로 굴었다간 전세계가 가만 있지 않아. 나 하나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끄럽다!)”
또다시 칼을 휘두르는가 싶었으나 갑자기 비틀 하고 료코의 몸이 흔들렸다. 가느다란 몸이 쓰러질 듯이 발을 헛딛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쓰러지기 전, 처연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며 구슬프게 물었다.
“(널 죽이는 일이라도 안하면... 난 이제 뭘해야하지?)”
한순간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그녀는 픽 쓰러졌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창밖으로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오전에는 철수의 차를 타고 마트에 다녀왔다. 철수가 병원으로 데려가자고 했지만 우주는 한사코 반대했다. 신원이 없는 료코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료코가 깨어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우주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일어났냐? 밥 줄테니 얌전히 기다려라.)”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는 무슨.)”
우주는 무뚝뚝한 얼굴을 숨기지도 않고 책상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마트에 가서 사온 죽을 냄비에 넣고 가스 불을 켰다.
그때 침대에 앉아 있던 료코는 휑하니 썰렁한 기분을 느꼈다. 이불을 들춰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이럴수가.
알몸이다.
황급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창가에 걸린 빨랫줄에는 그녀가 입던 붉은색 연꽃무늬 기모노와 그 안에 받쳐 입던 속옷까지 활짝 펴진채로 널려 있었다.
료코가 부엌쪽을 쳐다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신진루이! 니놈이 내 옷을 벗긴 것이냐!)”
부엌에서 전복과 파를 썰던 우주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옷에서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길래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
“(세탁기?)”
“(사람 대신 빨래 해주는 기계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한마디 걸고 넘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파렴치한놈! 옷 벗기고 난 다음 나한테 무슨 짓을 했지?)”
그 와중에 우주는 부글부글 끓는 냄비 뚜껑을 열고 잘게 다진 파와 전복을 집어 넣었다.
“(안심해라. 왜년의 몸 따위 아무런 흥미도 없다. 몸이 더럽길래 수건에 물 묻혀서 닦았을 뿐이야.)”
한순간, 료코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며 그녀는 경악했다.
“(니놈이 내 몸을 닦아줬다고?)”
“(그렇다니까.)”
우주는 그녀가 난리법석을 떠는게 짜증난다는 듯이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수건을 그녀에게 내던졌다.
수건은 료코의 가슴에 툭 맞고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이어서 우주가 부엌쪽에 있는 욕실문을 가리켰다.
“(여기 들어가서 제대로 샤워 좀 하고와라. 계속 더러운 몸으로 누워 있다간 침대에 냄새 배긴다.)”
“(죽여버릴거야!)”
팔팔 끓던 냄비가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고 뚜껑이 저절로 열리듯이 수치심에 후끈 달아오른 료코가 증오를 담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폭언과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녀는 결코 이불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흑, 흐윽, 흑...)”
우주가 방 한가운데에 작은 책상을 펴놓고 밥상을 차리는 동안, 그녀는 이불로 꽁꽁 알몸을 숨긴 채 두 팔로 다리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기만 했다.
밥상 앞에 앉은 우주가 말했다.
“(밥상 앞에서 우는거 아니다. 내려와서 밥 먹어라.)”
“(여태 소중히 잘 간직해온 몸이었는데, 결국 조센징 따위에게 더럽혀지다니. 흑흑...)”
“(알았으니까 밥 좀 처먹어라.)”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던 그녀가 고개를 처들고 소리질렀다.
“(죽어버려 이 자식아!)”
“(나 죽으면 너 밥줄 사람도 없다.)”
우주는 그녀의 울먹이며 성내는 목소리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옷장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주섬주섬 뒤적거리더니 이내 흰 티셔츠와 츄리링 바지를 꺼냈다.
그것을 료코에게 집어 던졌다.
“(이거 입고 밥먹어라.)”
그러나 이불로 알몸을 가린 채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료코를 쳐다 봤다.
“(이런 수치는 각오하고 왜놈 군인이 된 것이겠지? 포로가 되었다고 생각해. 근데 왜놈들은 포로가 되면 질질짜라고 가르치더냐? 고문 안한 것만도 감사히 생각해라.)”
그 말이 통했나 보다. 료코가 울음을 뚝 그치더니 입을 꾹 닫고 빨개진 눈으로 우주를 노려보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네 몸을 닦아준 것은 널 사람으로 봐서가 아니라 침대에 때가 묻을까봐 그리 한 것이다. 전리품을 챙겨두긴 해야겠는데 지저분해서 놔둘 곳이 없어서 말이야.)”
우주는 다시 밥상 앞으로 가서 양반다리를 하며 앉았다.
“(처먹고나서 도망 가든지 아니면 포로가 된 채로 계속 남아있든지 마음대로해라. 나도 요즘 산다고 바쁘다. 왜놈들 때려잡던 신우주는 이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