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35화 (35/285)

35화

료코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가슴을 덮었던 이불을 스르륵 내렸다.

곧바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젖가슴. 그녀의 분홍빛 유두와 함께 희고 탐스러운 유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소녀의 몸이 이렇게 달아올라있습니다. 빨리 와서 주인님이 안아주시옵소서.)”

그러나 우주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비록 인터넷이지만 잠시나마 다른 여성이 눈에 들어온 우주였다. 더욱이 철수의 집에 다녀오면서 머리도 차가워졌다.

욕실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국시대 시절, 그때는 외간 여자의 음부에 맹독이 발라져 있는 경우가 상당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멋모르고 성교를 하다가 중독되어 죽기도 하였지요.’

우주는 등골이 오싹거렸다.

“(됐다. 넌 거기서 자라. 난 여기서 잘란다.)”

우주는 그대로 맨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바로 쿨쿨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 모습을 어처구니 없게 바라보던 료코는 인상을 썼다. 그에게 속살까지 내보였는데 자존심이 무척 상한 눈치다. 심지어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건 아닐까 하며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잠든 우주를 매섭게 노려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나쁜 놈!)”

그래도 이불은 갖다 덮어주었다.

저녁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현주와 하나를 만난 곳은 왕십리 어느 조개구이집에서 였다. 화요일 저녁이었는데도 가게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이고 연기가 그윽했다.

잘 달구어진 숯불 위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다양한 종류의 조개를 한상 푸짐하게 올려놓았다. 바다내음 물씬 풍겨가며 지글지글 익어가는 조개들이 먹음직스러운 속살을 내비치자 현주가 소주잔을 들었다.

“오늘은 실컷 마셔도 좋다. 내가 쏜다.”

환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건배를 권했다.

전원이 소주 잔을 들었다. 예정에 없던 철수까지 합석하면서 네 사람은 ‘맛있는 조개를 위하여!’ 를 외치며 잔을 짠 하고 부딪혔다.

“근데 매니저가 술 먹어도 돼?”

“물론 안되죠. 그런데 무늬만 매니저지 아직 이렇다할 일은 해본적도 없고.”

현주의 말을 받아치며 철수가 쭈욱 들이켰다. 그는 빈 잔을 탁 내려놓으며.

“이따가는 대리 운전 불러서 가야죠.”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우주를 포함해 일동은 빨개진 얼굴로 술잔을 쭉쭉 기울였다. 안주가 맛있으니 술도 안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소주병을 연달아 비우면서 어느덧 8병째. 가게 안은 여전히 북적이는 사람들로 시끄럽고 현주와 우주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웃으며 이야기 중이었다.

두 사람의 시시껄렁한 잡담 같은 대화를 반쯤 풀린 눈으로 유심히 듣던 하나가 옆에서 조개를 집어먹던 철수에게 은근히 물었다.

“우주 씨는 사귀는 여자 있대요?”

철수는 혼자 소주 잔을 쭈욱 들이키고 조개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혀 꼬인 말투로 대답했다.

“없셔요. 없셔.”

손을 저어가며 대답하더니 이내 젖가락을 들어 다시 조개를 집어먹는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동작을 멈춘다.

“아, 같이 사는 여자는 이따.”

“같이 사는 여자요?”

“예. 원룸에 같이 사는 일본 여자 이쎠요.”

“동거해요?”

“말은 동건데 글쎼여, 하는 거 보면 그냥, 서울 상경한 친여동생 집 없어서 같이 사는 거랑 비슷해여.”

“어떻게 만났다는데요?”

“그게 좀 웃겨.”

철수가 킥킥 웃었다.

“나중에 나랑 더 친해지면 말해쭈~지! 자, 하나 씨. 우리 한잔!”

철수가 소주병을 들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하나는 설렁설렁 받아놓고 그대로 잔을 내려놓았다.

입술을 뾰루퉁 내민 채 테이블에 두 팔을 기대고 조금 상심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우주 씨 동거하는구나...”

시무룩한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쌀쌀맞게 대해서 처음에 많이 당황스러웠지?”

“솔직히 그랬소.”

우주가 선선히 대답했다.

현주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때는 미안했다. 편견을 가지면 안되는데, 아무래도 좀 그런게 있는것 같아. 잘난 사람은 싸가지도 없다. 이런거 말야.”

“오늘 술을 마시는건 이제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로 이해해도 좋소?”

“그럼. 우주 니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앞으로 잘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우주와 눈을 마주쳤다.

“그때 스님한테서 구해준거 고맙다.”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자정이 넘어서 끝이 났다.

현주는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와 함께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하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두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서 철수가 통화를 마치며 우주를 쳐다봤다.

“대리운전 불렀으니 금방 올거예요. 기다리면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빨아줍시다. 술 깨는데 최고.”

그렇게 말을 던지고 근처 편의점으로 쫄래쫄래 뛰어갔다.

우주는 회사에서 지급해준 벤 옆에서 기다렸다. 남들이 못 알아보게끔 모자를 쓴 채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수줍어 하는 달이라...”

비가 그친지는 오래.

먹구름이 지나가고 서서히 고개를 내미는 달을 아무 의미없이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한소민이었다.

그녀는 멀찍이 주차된 승용차 안에서 홀로 서 있는 우주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좌석 운전대에 앉아있는 여성이 나지막이 물었다.

“지금 만나볼까요?”

“아니. 기다려.”

소민은 멀리 있는 우주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이 손에 쥔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오늘은 미루자.”

“여기까지 오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역시 갑자기 다가가는 건 오히려 반감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 그가 만약에 제네틱스에 애사심이라도 있으면 나름 골치 아픈 일이 될테고.”

자신이 우주에게 접촉하려 했단 사실이 소라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생각을 떠볼만한 더 자연스러운 방법이 없을까...”

“낮에 신우주의 스케쥴에 관해서 따로 조사해보았습니다. 모레 초코걸스하고 CF를 찍는다고 하는데 그때 만나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초코걸스하고?”

“네.”

네 명의 초코걸스 멤버 중에는 신라그룹 소속 수라인 아이돌 박현아가 있다.

소민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차 돌려. 모레 만나는게 좋겠어.”

이틀 후.

-150억 사나이 신우주, 아이돌 퀸 초코걸스와 CF 동반출연 화제!

-신우주 드디어 연예계 진출! CF 섭외 리스트 1순위.

-신우주, CF계 블루칩으로 등극할 것인가. 신선한 얼굴로 대활약 예고.

소라는 집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밝은 햇살이 창을 통해 내리쬐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점잖게 문이 열리며 창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물었다.

“왜?”

창성이 말했다.

“오늘 신우주 첫 CF라는데 안가보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소라가 힐끔 그를 올려다보고는 커피잔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내가? 내가 거길 가서 뭐한답니까.”

“신라그룹 경영운영본부장 한소민이 촬영장에 잠시 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라가 바로 코웃음 쳤다.

“미친년. 그런데나 가고 참 할일도 없나봅니다.”

“낌새가 조금 수상하지 않습니까?”

“낌새는 무슨, 박현아 만나러 가는 거겠죠. 재계약 할때라도 됐나?”

소라는 무관심한 척 시치미를 떼고는 다시 신문을 들여다 본다.

평소 같으면 당장 가겠다며 난리를 쳤겠지만 그녀는 아직 우주한테 화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사실 소민이 촬영장에 나타나는 것보다 우주의 얼굴을 본다는게 꺼림칙한게다.

지난번 우주의 집앞에서 싸우고 난 뒤로 그녀는 우주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그가 자신을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면 몰라도 자신이 그를 찾아간다니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회사 사람 몇명 더 보내서 신우주 잘 감시하세요.”

소라는 신문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속을 모를 리 없는 창성이 넌지시 물었다.

“언론이 알면 큰일일텐데, 신우주의 동거녀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는 대답이 없다.

그러다 갑자기 화가 치미는지 신문을 책상 위에 내팽개쳐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가며 뚱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파트 하나 큰걸로 얻어주고 거기서 둘이 잘살라고 하세요.”

“예?”

창성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알아듣지 못하자, 소라는 순간 화를 내려다가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는 보통으로 말했다.

“원룸에 가정부가 있다면 어울리지 않겠죠? 그러니 아파트를 하나 얻어주고 그 료코 라는 여자를 가정부 라고 하는 겁니다. 신우주는 바쁜 일정 때문에 가정부를 고용해서 집안 일을 돌보게 하고 있다는 식으로 언론에 얼버무리자는 거죠.”

“어? 나보다 동생이네. 우주 씨 보다는 형이고.”

“잘부탁한다오.”

“나도.”

우주와 철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부랴부랴 미용실에 들렸다.

미용사가 바쁘게 우주의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철수는 그 옆에서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머지 않아 그곳으로 함께 일할 코디가 찾아왔다.

이름은 강민. 나이 25세. 키가 188로 파리에서 1년 정도 모델 일을 했었다고 한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쌍꺼풀 없는 눈, 키크고 깡마른 체구에 옷빨이 정말로 잘받는 친구였다. 그가 등장하자 미용사들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지면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달라들 정도니 말 다했다.

“코디는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의외야.”

철수가 잡지책을 보면서 장난반 푸념반으로 말했다.

댄디한 정장 차림으로 온 강민이 대답했다.

“재밌어 코디.”

“남 옷 입혀주는 거 좋아해요?”

“응.”

차가운 인상답다고 해야할지, 그는 웃음도 적고 말수도 적었다.

머리를 다 자른 다음에는 벤을 타고 CF촬영 장소로 향했다.

차안에서 강민은 우주를 위해서 가져온 옷을 그에게 대충 대보면서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있었다.

철수가 룸미러를 보면서 말했다.

“진작에 만나서 사이즈도 직접 재보고 이것저것 했어야 했는데 너무 일정에 쫓겨부렸어.”

워낙 스케쥴이 바빠 엊그제 전화로 우주의 사이즈만 미리 알려준 상태다.

강민이 대답했다.

“괜찮아. 다 맞아.”

“다 맞아요?”

“응. 기자회견 보고 대충 가늠했어.”

“이야, 눈썰미 좋으신가 보네. TV만 보고도 정확히 쟀나봐.”

“그런데 이거... 옷이 좀 너무 튀지 않소?”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우주가 약간은 부담되는 눈빛으로 머뭇거리며 물었다. 강민이 권해준대로 분홍 셔츠에 붉은색 보타이를 하고 네이비 팬츠를 입었다. 강민이 그에게 지적인 안경을 씌워주며 대답했다.

“촬영장소. 클럽이라서.”

“클럽? 클럽이 뭐요?”

“클럽이 클럽이죠~ 옷 아주 잘어울려요~ 완전 킹카네 킹카~! 오늘은 우주 씨가 주인공입니다아~!”

부우웅-!

철수는 신이 나는 듯 악셀을 더욱 밟았다.

CF 찰영장소는 홍대에 위치한 어느 클럽이었다.

촬영 내용은 이렇다. 클럽에서 흥겨운 음악이 울리고 남녀가 어우러져 정신없이 춤을 추는 와중에 그곳에 갑자기 킹카(신우주)가 등장한다. 멋진 헤어스타일과 남다른 패션으로 중무장한 그를 남녀 모두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고, 마치 바닷길이 열리듯 사람들이 갈라지면서 킹카는 멋지게 클럽 중앙으로 걸어나간다. 중앙 무대에는 오늘밤 퀸카(박현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둘은 잠시 뜨거운 눈빛을 교환한 후 섹시한 매력을 뽐내며 함께 춤을 춘다.

즐거웠던 시간이 지나간 후 집에 돌아가려던 퀸카와 친구들. 아쉬움이 남은 킹카가 그녀를 불러세웠고,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멋지게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클럽 음악이 시끄럽게 울리는 가운데 퀸카는 킹카에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말해주면서 광고 영상에 문구가 뜬다.

시끄러운 곳에서도 그녀의 번호를 정확히 알아듣고 받아적는 슈퍼초음파 휴대폰, 오딧세이X. 이렇게 하며 광고는 끝이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