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40화 (40/285)

40화

우주의 시선이 복도 바닥을 향했다. 무언가 떠올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일준이 죽을때 어찌할 바를 몰라서 두 손 두 발 다 놓고 지켜만 보고 있었던게 나요.”

나지막이 말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라 양이 진실을 깨닫는걸 생각하자니 왠지 두려웠소. 어느날 날 원망하며 ‘오빠가 죽을때 우주 오빠는 무얼하고 계셨죠?’ 라고 물어볼까 그게 무섭소이다.”

“아...”

철수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이해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키다리 아저씨하는 거죠 뭐.”

“키다리 아저씨가 뭐요?”

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철수가 아는 척을 하는 듯 손가락을 하나 치켜올리며 떠벌렸다.

“외국 고전 소설인데, 한 소녀가 그녀의 후견인이 되어준 키다리 아저씨와 사랑을 쌓는 두근두근 로맨스 소설이죠.”

우주가 그런 일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다는 표정을 하며 싱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 말라며 그는 한 손을 급히 저었다.

“난 절대 그런 뜻을 품고 이러는게 아니외다.”

“당연히 그 마음 알죠. 어쩌다 소설과 비슷한 사연 같아서 꺼내본 겁니다. 하지만 은근, 우주 씨 위치가 멋져 보여서 샘난단 말이야. 요즘 돈도 잘버는데.”

철수가 장난으로 우주의 배를 콕콕 찔렀다.

우주가 활짝 웃는 표정으로 그만 해달라고 손짓을 했다.

그럼에도 철수는 멈추지 않고 몸 구석구석 간지워운 곳만 골라서 연신 콕콕 찔러댔다.

그에 우주가 못 참겠다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철수가 어깨를 감싸 안고 놔주질 않았다.

“요렇게, 응? 요렇게 돈을 잘버는데 하는 짓도 멋져서는.”

“아하하하하!”

복도에서 개구쟁이처럼 시끄럽게 굴던 두 사람은 나중에 간호사에게 걸려서 혼이 났다.

이후,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이 끝나고 두 사람이 함께 병원 1층 로비를 걸어나올 때였다.

유난히 옷차림새가 멋진 나머지 병원을 출입하는 많은 사람 중에서 키 크고 눈에 확 띄는 친구가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보고 우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긴 어쩐일이오? 오늘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강민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 티가 날 정도로 어영부영 둘러댔다.

“가, 감기.”

“재채기도 안하는데 고뿔이요?”

“코, 콜록!”

강민이 갑자기 감기를 시작했다. 곁에 있던 여자친구 이수영이 눈을 가늘게 뜰 정도로 연기가 형편없었다.

우주는 로비에서 붙잡은 두 사람을 데리고 병원 휴게실을 찾았다. 강민은 철수에게 맡기고 수영만을 따로 불러냈다.

“여긴 어쩐 일이오?”

수영은 잠시 입술을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어제 민이한테 1750만원을 주셨다면서요?”

“오토바이 사라고 그러긴 했소.”

“덕분에 어머님 치료비가 생겨서 오늘 병원을 옮길까 하던 중이었어요.”

“그랬군...”

우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민은 바이크 살 돈을 어머니 병원 비용으로 쓰려고 했던 것일까? 개의치 않아하며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무슨 병에 걸리신 거요?”

“전신냉증 중에서도 희귀병이요.”

우주가 놀라며 되물었다.

“전신냉증 중에 희귀병?”

전신냉증이라면 아라가 걸린 병과 똑같다.

“손발이 차고 숨을 뱉을때는 주변 사람이 한기를 느낄 정도로 심합니까?”

“네, 맞아요. 그렇잖아도 이 병원에 같은 증상이 있는 환자가 입원해 있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찾아온거예요.”

“민형의 어머님도 수라십니까?”

“네. 연세가 50세이신데, 중소기업에서 팀장으로 활약하시다 의문 모를 병에 걸리셔서 그만... 크흑!”

수영이 갑자기 고개를 떨구며 눈물 터뜨렸다.

우주는 매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을 훌쩍이던 그녀가 푸념 하듯이 중얼거렸다.

“초신성 곰의 웅담만 있었어도...”

우주의 귀가 솔깃했다. 그녀를 보며 물었다.

“초신성 곰? 그게 뭔데 그러오?”

수영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레지스트 쉴드 내에 사는 방사능 곰인데, 초신성 곰의 웅담을 먹으면 전신냉증을 낮게 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확실한 말이오?”

우주가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보챘다.

“어디서 들은 말이오?”

수영이 조금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민이가 연예계 카더라 통신으로 어쩌다 들었대요. 미국 유명 여배우 아만다 샤이프리드가 수라로 각성하면서 전신냉증에 걸린 적이 있었대요. 그런데 중국에서 구한 초신성 곰 웅담으로 병이 싹 나았다 하더라구요. 하지만 워낙 멀리 사는 사람이니만큼 그저 해외토픽감으로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전해진 이야기 같아요. 의사들도 그런 뜬소문은 믿어봤자라며 신빙성 없다는 식으로 말했구요.”

우주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호오...”

수영이 계속 말했다.

“민이는 코디로 일한 돈을 모아서 수라를 사다 쓸 생각이었지만, 중소기업 수라 10명 고용하는데도 10억 넘게 드는데다, 확신이라도 갖고 싶어서 아만다 샤이프리드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한국 연예인도 아닌 서양 유명 배우를 일반인이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거의 포기 상태였어요.”

“그래도 그런 실마리라도 찾은게 어디요!”

우주는 기쁜 마음에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우, 우주 씨?”

“고맙소!”

그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김아라도, 강민의 어머니도, 모두 나을지 모른다.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이야기!

우주는 강민, 수영과 헤어지고 나서 벤에 올라탔다.

귀가하는 길에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소라에게 빨리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녀를 찾는 것은 거의 한달여만의 일. 료코와 헤어지라던 그녀에게 서운했던 감정도 잊어버렸다.

그저 국내 일류 재벌의 딸인 한소라를 통해서 할리우드 배우인 아만다 샤이프리드와 당장 통화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녀가 진실을 확인 해준다면 당장에라도 냉큼 달려가서 초신성 곰을 때려잡고 싶었으니까!

오후 7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늦은밤 취재진으로 붐비고 있었다. 각 방송국 기자들은 저마다 카메라 앞에 서서 현장을 생중계로 내보내느라 바빴다.

“한소라 제네틱스 경영운영본부장은 예정 됐던 시간보다 이른 시각인 오늘 오전 9시쯤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였습니다. 이는 제네틱스 그룹 정치인 뇌물수수 의혹에 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지 한달여 만의 첫소환입니다. 아침 일찍 모습을 드러낸 한 본부장은 굳은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짧게 답한 뒤 조사실로 향했습니다.”

같은시각. 벤을 타고 집으로 귀가하던 우주는 손에 휴대폰을 쥔 채 차량용TV를 시청중이었다.

TV에서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소라의 인터뷰 화면이 나왔다.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면서 마이크를 들고 있는 기자가 보였다.

[10시간에 달하는 조사를 받은 한 본부장은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던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곧 조사는 끝날 것으로 보이며. 아, 저기 한 본부장이 걸어나오고 있습니다. 다가가 인터뷰를 시도해보겠습니다.]

조사를 마치고 검찰청을 나오는 소라를 본 취재진들은 우르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항간에 이번 검찰 수사가 정부의 제네틱스 길들이기라는 소문이 있던데 동의하십니까?]

[여당 국회의원인 오대세 씨에게 시가 100억원 상당의 금품을 건네준 의혹을 받고 계시는데, 이에 관한 혐의도 전면 부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예, 아니오라도 대답해 주십시오!]

[본부장님! 한마디라도 해주십시오!]

[본부장님!]

소라는 다소 수척해진 모습으로 취재진의 쏟아지는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은 채 짧게만 말했다.

[성실히 조사에 임했습니다.]

그런 뒤 그 앞에 정차되어 있던 에쿠스 차량에 서둘러 올라탔다.

그녀는 긴 시간 진행된 조사에 피로한 모습이 역력했다.

TV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운전을 하던 철수가 말했다.

“이거 오늘 전화했다간 완전 싸다구 맞겠는데요. 본부장 님이 소환되는지도 몰랐네. 허허.”

뒤에 타고 있던 우주는 휴대폰을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 거리며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한편, 검찰청을 나온 소라는 청담동 자택으로 귀가 중이었다. 뒷좌석에 앉아 편히 등을 기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려왔다.

“네, 아버님.”

[고생했다.]

“아닙니다.”

[걱정할 것 없을게야. 앞으로는 여당에 주던 후원금을 빼서 야당으로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정부에서 벌이던 동남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개척 사업에 관한 투자 자금도 끊기로 했다. 지들이 이리 나온다면 우리도 별 수 없지. 조만 간 소식이 있을테니 그때까지만 참아내거라.]

“알겠습니다.”

한규만 회장이 여기서 전화를 끊었다면 정말로 위로가 되었겠지만, 소라는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안다.

그녀가 실수할때면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

[진즉에 네 언니라면 더 현명하게 처신했겠지만, 어쩌겠느냐. 네 그릇이 그뿐인 것을. 아직도 이 아비의 보호가 필요하다면 그리 해줘야지.]

“죄송합니다...”

한규만 회장과의 통화를 마친 후 소라는 차창 밖을 멍하니 내다봤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물들 속에서 그녀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문득 머릿속에서 우주의 말이 떠올랐다.

‘비록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바로 내치기보다는 두 번의 기회는 없는 것이오? 포용으로 감싸주면 안되는 것이오? 하물며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며 오가는 정이 있잖소! 그런데 이게 뭐요!’

‘포용? 정? 무슨 드라마 찍어요? 명심하세요. 이 시대는 포용으로 감싸다가는 회사 망하기 딱 좋고, 정에 배신당하는 세상입니다. 우주 씨처럼 살다가는 남들한테 맨날 뜯기기만하고 결국 돌아오는건 호구 소리밖에 없어요. 알겠어요?’

냉철한 그녀는 지금 힘들었다. 똑같이 냉철한 사람 보다 차라리 호구 같은 사람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소라는 운전 중인 창성을 쳐다봤다.

“혹시 신우주 한테 연락 왔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전화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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