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41화 (41/285)

41화

“됐어요.”

싸늘하게 대답한 뒤 차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해준게 얼만데, 이 나쁜 새끼...”

창성이 룸미러를 보며 물었다.

“신우주는 이제 팀장 자리에 앉혀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긴 해야겠죠.”

소라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차창밖에 향해 있다.

창성이 다시 말했다.

“오늘 오전에 다코오 가문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만, 신세기 프로젝트가 최근 들어 진척이 없다며 서둘러 진행해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소라가 미간을 좁혔다.

“요즘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사람 바쁜거 모르나? 하여튼, 쪽바리 새끼들.”

창성이 가볍게 대꾸했다.

“신우주를 하루 빨리 팀장 자리에 앉히는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그가 낸 성과로 봐서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인재라 보여지니까요.”

“굳이 그 말고도 인재야 많죠.”

소라는 요만큼도 진심 없는 대답을 했다.

조금 뜻밖의 말이라 창성이 룸미러를 통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설마, 마츠다이라와 신우주. 어느쪽을 선택할지 고민 중이십니까?”

소라가 무심결에 대답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하니까.”

조금은 쓸쓸한 목소리로, 평소 냉철한 그녀 답지 않은 묘한 대답이 나왔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창성이 재차 말을 꺼냈다.

“자회사 지분 상당량을 일본의 다코오 가문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제네틱스는 일본 자본에 침식 당한 기업이었다.

애당초 순수 한국인이 세운 기업이었지만, 한규만 회장이 신라그룹을 맹공격할때 사용한 자본이 바로 일본 투자자로부터 들여온 해외자본이다.

수십개에 달하는 자회사의 일정 지분을 일본 다코오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압박을 가하면 제네틱스 본사를 일본 도쿄로 옮겨야 할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

이런 다코오 가문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한국침략과 대동아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해왔고, 현시대에 이르러 일본 내 극우화를 주도 하면서 한국 대표 기업 사냥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그러는 한편, 한국 정부는 이를 묵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일본의 압박으로 정권이 위협 받는 시대도 지났다.

다코오 가문이 제네틱스를 침식해가는 것을 우려한 정부는 꼬투리를 잡아 제네틱스 그룹의 임원진을 전원 물러나게 하는 등 전방위적인 기업 대수술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 요정집.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여섯명의 노년 남성들 옆에 각자 한 명씩 달라 붙어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정치인을 비롯해 국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고위 관료들이 머리를 맞대며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그러다 한창 술기운이 오른 와중에 애국심이냐 글로벌이냐를 놓고 3:3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정부가 나서서 일본 투자자들을 탄압 한다면 다른 나라의 해외투자자들에게 불신을 확산시킬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보복성조치로 인해 일본에 투자한 한국 자본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될것입니다. 레지스트 쉴드 덕분에, 우리 한국의 자본력이 국제시장에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판단이란 생각이 드는 군요.”

“제네틱스 같은 일본 원숭이들이 소유한 기업들을 죄다 때려 부수고 해체해서 다시 우리 국민에게 팔아 넘기는게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어렵습니다.”

“국제법도 생각하셔야지 대체 생각이 있나 저분은.”

“국제법은 무슨 국제법! 쪽바리들이 언제 국제법 생각하고 대들었나?”

“진정하시고요. 우리 기업도 일본가서 일본 기업 인수하잖습니까. 경기가 좋아져서 앞으로 그런 일이 더욱 많아질테구요.”

“그럼, 제네틱스가 이대로 일본에 먹혀도 여러분들은 상관 없다는 말씀이신겁니까?”

“자자, 일단 한잔해, 한잔해. 골치아프구만.”

한 장관이 술잔을 쭈욱 들이키고나서 말했다.

“제네틱스 이번에 살려줍시다. 살려주고. 정부가 이번에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든 몽골 개척 사업에도 참여하라고 하고, 제네틱스 푸드, 제네틱스 패션, 제네틱스 건설 등등 식료품하고 의류품 같은거 몽골에 전부 무상으로 지원하라고 합시다.”

“봐주고 뜯어내자는 겁니까? 못하겠다고 버티면요?”

“지금 적당히 건들여놨으니 말은 잘들을거야. 그리고 조질땐 조지더라도 일본놈들만 피해 안보게 하면 되지 뭐. 한규만이랑 그 딸 한소라만 건들면 돼.”

“물론입니다. 그 전에 비자금 관련해서 하나 더 터뜨리고가죠. 확실히 할겸.”

그들의 학창시절 선배인 다른 관료가 끼어들었다.

“그건 검찰 조사 시작하는데 시일이 너무 걸리고, 그것보다 더 간단하고 좋은 약이 있어.”

“뭔데 그러슈?”

“한소라 말일세. 최근 스포츠지 기자가 하나 따라붙었는데 그 왜 신우주 있잖아? 요즘 TV에 자주 나오는 놈. 둘이 연인 사이라는 제보가 들어왔어.”

“진짜?”

“정말이야?”

“새파란 녀석으로 봤는데, 할건 다하고 다니는 군.”

“그걸 터뜨리자는 겁니까?”

“그렇지. 사진값으로 5억 달라더군.”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스캔들 갖고 뭘 얻겠다고. 쯔쯔.”

“야 인마. 얻는게 왜 없어? 잔뜩 있지.”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우선, 한소라 한테 사진 보여주고 같이 호텔이나 가자고 하는거야. 안가면 터뜨린다고.”

“기가 막히는 구만! 아하하하!”

여섯 명이 동시에 시원하게 웃어재꼈다.

“설마, 마츠다이라와 신우주. 어느쪽을 선택할지 고민 중이십니까?”

소라가 무심결에 대답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하니까.”

조금은 쓸쓸한 목소리로, 평소 냉철한 그녀 답지 않은 묘한 대답이 나왔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창성이 재차 말을 꺼냈다.

“자회사 지분 상당량을 일본의 다코오 가문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소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

지끈지끈한 머리를 바람으로 환기 시키고 싶었다.

세찬 바람이 까만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불쑥 우주가 생각났다.

그녀가 푸념하듯 중얼 거렸다.

“이 순간에 신우주는 왜 자꾸 떠오르는 거야...”

신우주는 답답하다. 그리고 꽉 막혔다.

그는 고집쟁이 사내다. 하지만 순수했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셈을 하는 사람.

자신이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라서 동류를 혐오하는 것 같다. 이것저것 셈을 따지는 사람만큼 징글 맞아 보이는 것도 없었다.

신우주는 셈이 없다. 그래서 마주대하기가 편했다.

자신이 힘들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

각박한 도시 생활속에서 휴양림에 다녀오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

그가 바로 신우주 같다.

소라는 고급스러운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부재중 전화 알림 115건.

모두 일이나 친구, 사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전화 뿐.

액정에 엄지 손가락을 대고 목록을 차례차례 위로 넘겼다. 일주일 전까지 표시되는 통화 목록을 끝까지 넘겨봐도 우주에게 걸려온 전화는 단 한통도 없었다.

“진짜 이놈은 나쁜새끼야. 벌 받을 놈.”

그러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내가 그냥 할까.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그와는 철저히 사무적인 관계. 몇차례 사건을 통해 어쩌다 친근하게 느껴졌는지는 몰라도 계약으로 맺어진 갑을 관계다.

그렇게 생각한 소라는 휴대폰을 도로 가방에 집어 넣었다.

문득 그때였다.

귀여운 아기 목소리가 차안에 울렸다.

[전화왔다~ 문자 말고 전화왔다~ 전화왔다~♪]

그녀는 휴대폰을 집었다.

액정에 뜬 이름은 그토록 바라던 신우주!

소라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열었던 창문을 얼른 닫았다. 그리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큼.”

소라는 짐짓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제네틱스 경영운영본부장 한소라입니다.”

곧바로 귀에 익은 익숙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나요. 신우주.]

“아, 우주 씨? 오랜만이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요? 일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죠?”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소. 집도 좋은 곳으로 옮겨줘서 고맙소이다. 그리고.]

우주는 잠시 말을 주저하다가 바로 말했다.

[뉴스 봤소이다. 힘들지 않았소?]

소라가 웃었다.

“힘들긴요.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외다. 음... 그리고 또... 혹시 지금 시간 있소? 내 밥 한끼 사고 싶은데.]

“시간이라, 글쎄요. 제가 요즘 바빠서 저녁 일정을 좀 확인해봐야겠네요. 잠시만요.”

초조한건 그녀였다. 바쁘게 움직이며 잠시 스케쥴을 확인하는 흉내를 냈다.

“일정이 있긴 한데 취소할게요. 특별히 우주 씨를 위해서 시간을 내주도록 하죠. 우리 회사 수라인 우주 씨가 제겐 더 중요하니까요.”

[오, 아니오 아니오. 날 위해서 그럴 필요까진 없소. 다음에 시간 빌때 만나면 된다오.]

얼버무리며 우주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소라가 다급한 기색으로 외쳤다.

“잠시만요! 야, 끊지 마!”

[응? 소라 낭자 방금...]

소라가 급히 톤을 낮추며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괜찮으니까 꼭 만납시다. 알겠어요?”

[하지만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까 안가겠다고 했잖습니까!”

마음을 몰라주자 그녀가 답답한 나머지 또 소리를 쳤다.

[소, 소라 낭자?]

우주가 수화기 너머에서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으며 사근사근하게 말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끝내 서로 약속을 잡았다.

소라가 전화를 마치자마자 그때까지 묵묵히 운전 중이던 창성이 웃으며 물었다.

“신우주의 아파트로 차 돌릴까요?”

“아니요. 그 전에 한복집부터 들립시다.”

“한복집 말입니까?”

“예.”

창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로 종로에 있는 한복집을 찾은 소라는 그곳에서 고가의 한복을 한벌 빌렸다.

소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거울 앞에서 사뿐하게 빙글 돌았다.

고급스러운 노란 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입으니 마치 딴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단정하고 우아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예뻐보이겠지?”

아무래도 신우주가 옛날 사람이다 보니 한복을 입은 자신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녀의 행동은 남녀의 애정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비즈니스에서 해외 바이어가 찾아오면 비싼 술을 대접하고 좋은 곳을 체험 시켜주거나 명절날 상사 집에 선물을 들고 찾아가는 것처럼 눈치껏 상대방 취향에 맞는 선물을 골라 그 사람에게 환심을 사고 싶은 것이다.

소라는 이제 우주와 화해하고 싶었다.

저녁 7시 50분.

안경과 모자로 얼굴을 가린 우주가 자신의 아파트 앞에 멈춰서 있던 에쿠스에 올라탔을때, 그는 크게 놀란나머지 경악했다.

그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아름다운 전통 한복을 차려 입고 다소곳이 뒷좌석에 앉아있는 소라가 어찌나 예쁘던지!

한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그, 그, 나, 낭자. 이, 이런 옷은 어디서...”

얼굴이 벌개진 우주는 말을 더듬었다. 마치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것만 같아서 그녀를 마음 편히 대하기에는 무진장 가슴이 떨려왔다.

하물며 눈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반면에 소라는 그런 그를 보면서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내가 예뻐보이니? 당연할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니 고맙지? 영광인줄 알으렴.’

그녀의 마음속에서 옥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여왕이 깔깔깔 기품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라가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우주를 보며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둘이서만 만나죠."

"둘이서?"

"면허 딴지 꽤 됐죠? 오늘은 우주 씨가 드라이브 시켜줘요. 운전 솜씨도 한번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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