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첫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대답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앞에 서있는 그녀를 무시한 채 건네받은 수류탄을 다시 멜빵에 매달며 떠날 채비를 했다.
우주의 쌀쌀 맞은 행동에 그녀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저기, 팀원들이 무례하게 군 점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사과는 필요 없소. 난 이만 떠날 테니 그쪽도 그만 가보시오.”
우주는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자, 잠깐만요!”
“또 뭐요?”
우주는 짜증 내는 기색이 분명하다 못해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수희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아니 그게, 그…….”
이윽고 수희는 마치 자포자기라도 한 것처럼 두 팔을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신우주 씨를 개성 근처에서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서요.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또 조금 있으면 드라마도 같이 해야 하니까 미리 안면도 좀 익히고 싶었구요.”
“경성의 여무사?”
“네, 맞아요.”
“거기에 당신도 출연하오?”
“모르셨어요?”
수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우주는 입을 다물었다.
몰랐다.
드라마를 전혀 안 보고 살았고, 아직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이었다. 김철수가 일제 강점기를 다룬 드라마라고 하길래 관심이 생겨서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경성의 여무사> 담당 PD와의 첫 미팅 약속이 내일이었다.
한편, 우주가 진짜 모르는 것 같은 티를 내자 수희는 속으로 서운해하며 크게 실망했다.
‘이 사람, 진짜 나쁜 사람이다. 내가 아까 나서서 도와주고 지난번에도 도와주고 그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그녀는 자신에게 차갑게 대한 우주의 행동보다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모른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반감을 가졌다.
수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신인인 니가 드라마에 캐스팅될 수 있었던 것도 주연 배우인 내가 허락해 줬으니까 된 건데!’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밉다…….”
수희가 문득 밉다고 말하자, 우주는 얼결에 ‘네?’ 하며 되물었다.
“제가 밉다고요?”
“그래요. 댁이 밉네요.”
수희가 찬바람이 쌩 도는 말투로 대답했다.
“왜 밉소? 소생이 그쪽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소?”
“잘못한 건 없지만 은혜도 모르는 나쁜 놈 같아서요.”
그녀가 또박또박 대꾸했다. 그 험한 말과 뚱한 표정에서 이번에는 우주가 당황했다.
그때 무전기가 울렸다.
―언제까지 신라 계집하고 시시콜콜하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거야? 빨리 출발해야 될 거 아냐.
현주가 보챘다.
우주는 수희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은혜도 모른다는 게 뭔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지만 지금은 바쁘니 이만 헤어집시다. 잘 가시오.”
우주가 등을 돌렸다.
“도망가는 거예요?”
도망가느냐는 말에 우주가 조금 발끈했다.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도망가는 건 아니외다. 바빠서 그런 거요.”
대충 얼버무리며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수희가 그의 배낭을 붙잡았다.
우주는 또다시 그녀를 돌아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 이러면 화낼 거요.”
“화내든지 말든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이거 가져가서 씹으세요.”
“뭐 말이오?”
“사탕이요.”
그녀는 자신의 배낭을 옆으로 비스듬히 메고서 안을 뒤지더니 이내 사탕을 한 움큼 집어서 건넸다.
우주가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왜 먹소?”
“힘든 일할 때 당분 섭취가 중요한 것도 모르세요? 체내에 탄수화물이 소비되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바닥나거든요. 고된 임무에 일찍 지치기 싫으면 당분 섭취는 꼭 해줘야 해요. 지난번처럼 또 길바닥에서 쓰러지지나 말고 주면 얌전히 받아가서 씹기나 하세요.”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어져서인지 수희의 말은 논리적으로 들렸다.
우주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이윽고 말했다.
“고맙소.”
그러고는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모아 펼쳤다.
“나쁜 사람.”
그의 손바닥에 사탕을 한 움큼 떨구고 나서 수희는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우주를 스윽 쳐다보더니 먼저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등산로를 따라 내려갔다.
―김수희 성질 더럽다고 팬들한테도 유명해요. 우주 씨가 참으세요.
우주가 다시 등산을 시작한 가운데, 무전기에서는 하나의 잡담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별명이 ‘성깔 마녀’겠어요. 신라그룹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요.
―대부분 여자겠지?
현주가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뭐……. 그렇기도 하구요.
우주는 비탈진 등산길을 계속 걸어 올라갔다.
때때로 가지들이 툭툭 꺾인 소리를 내거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기도 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면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날리며 돌아다니는 희미한 짐승의 형체가 언뜻언뜻 비쳤다.
그러나 제대로 포착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야간투시경 선글라스를 썼음에도 주변에 널린 나무와 덤불 사이에 감쪽같이 섞여 들어가있는 짐승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현주와 하나의 수다를 라디오처럼 들으며, 우주는 수희가 준 사탕을 씹으며 느닷없이 물었다.
“필드가 뭐요?”
―아까 우연진이 말한 거?
밖에서 모기와 한창 시름 중인 성일이 불쑥 대답했다. 그는 에프킬라를 치익 뿌리며 말을 시작했다.
―필드는 말이지, 가끔 돌연변이 생물들이 바다와 인접한 지역을 공격해 올 때가 있다네. 대표적으로 인천이나 태안, 부안, 대천, 삼척, 속초 울산 등이 있는데, 심지어 부산까지 내려오기도 해. 평소에는 해상에 파견된 부대가 그것들을 막고 있지만 어쩌다 뚫릴 때가 있어. 아니지, 세 달에 두세 번 정도니까 자주인가? 아무튼 그때 내륙 도시가 습격당하면 정부 명령으로 각 기업에서는 무조건 수라를 파견해야 된다네.
성일은 계속 사방으로 에프킬라를 뿌려대면서 말을 이었다.
―한 도시에 다양한 기업의 수라가 모이면 사람 생명 구하고 자시고 그때부턴 실적 전쟁이 되지. 누가 더 많이 사냥했으며 또 얼마나 강한 놈을 잡았느냐가 중요해지고, 어떤 기업이 시민의 안정을 위해 더 많이 애를 썼는지 언론을 통해서 실시간 통계 수치로 보도가 되니까 전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걸세. 또 일시적으로 언론에 알려지면 그뿐일 텐데, 이게 나중에 정부가 수라 개인이나 기업한테 혜택도 주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돌연변이 한 놈을 두고 서로 잡겠다며 수라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거든. 이런 걸 보고 필드라고 하는 걸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우주는 히죽 웃던 연진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그가 떠나면서 나중에 필드에서 보자고 했던 말은, 즉…….
‘필드에서 누가 더 많이 잡는지 나와 한판 붙자는 의미로군.’
새벽 1시.
사막여우 팀은 우주와 헤어진 뒤 진입로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넓은 공터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제로머신 23대와 그것을 지키고 있던 세 명의 팀원이 그들의 무사 귀환을 반겼다.
‘제로머신’은 신라그룹과 독점 계약을 맺은 독일 바이크 제조 회사가 만든 미래형 바이크로서, 일본 바이크 제조 회사가 만들어 제네틱스에 공급하고 있는 ‘슈퍼바이크’의 경쟁 모델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간다는 기쁨보다는 대부분 분한 얼굴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각자 자기 소유의 제로머신 옆에서 이것저것 장비를 정리하고 실으면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태연한 것은 연진과 수희뿐이었다.
연진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탄 조사를 위해 가져온 장비들의 수량을 마지막으로 파악했다. 수희는 제로머신을 타기 위해서 머리끈을 입에 물고 긴 머리를 말총머리로 묶으려 했다.
“대장은 열 받지도 않습니까? 제네틱스 녀석한테 그런 심한 욕을 듣고도 왜 참고만 있었던 겁니까?”
자신의 제로머신으로 담담히 걸어가는 연진에게 팀원 중 한 사람이 질기게도 따라붙었다.
그 얼굴에는 화가 가득 차있었다. 연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도 뿌득 갈아댔다.
끝난 일이기에 대충 넘어가려던 연진이 그를 돌아봤다. 픽 웃으며 그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더니, 주변의 팀원들에게 순서대로 질문을 던졌다.
“강삼수, 너도 내가 가만있어서 화가 났냐? 분해?”
“이차원, 과연 내가 쫄아서 그랬을까?”
“박미래, 네가 팀장이었다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섰을 거냐?”
“이지은, 나와 신우주 중에 누가 더 센 것 같냐? 이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묻는 것보다 더 유치한가?”
팀원 각자의 얼굴을 일일이 똑바로 바라보며 모두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뒤 연진은 전원에게 크게 외쳤다.
“지금 너희가 이 자리에서 숨을 쉴 수 있었던 건, 모두 수희 덕분이었다. 날 탓하기 전에 우선 수희한테 감사하다고 말해.”
누군가 물었다.
“싸움을 말려서요?”
그 물음에 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누군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전에 대장이 나서서 신우주를 혼냈어야죠.”
연진은 팀원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무척 피곤해졌다.
“내가 거기서 움직였으면 난 살았겠지만, 너희들은 살았을 것 같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어서 말했다.
“거기서 수류탄 두 발 다 터졌어도 녀석은 결코 죽지 않았어. 신우주의 실력은 진짜야, 이 멍청한 것들아. 난 오히려 니들 목숨을 구해준 거라고. 새겨들어. 알았냐?”
◆
투투투, 투투투투!
대담무쌍하다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신우주는 몸을 사리지 않고 당당하게 선 채로 총을 갈겨댔다.
잔뜩 흥분한 거대 황소가 그에게 돌진했다. 경쾌하게 울리던 기관단총의 소음이 끊겼다. 동시에 우주는 민첩하게 몸을 날렸다.
옆으로 한 바퀴 돌았다. 재빨리 일어나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다시 총격을 가했다.
투투투투!
그러나 채 몇 발을 쏘지도 못했다. 방향을 바꾼 황소가 곧바로 우주를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5m 길이의 몸집을 가진 황소의 콧등과 머리에는 2m 길이의 두껍고 날카로운 뿔이 솟아있다. 저것에 한 번이라도 찔리면 그대로 신체가 두 동강 나는 것은 기본. 뿔의 두께는 무려 1m에 달했다.
찰칵, 찰칵.
탄환이 없었다. 그런데 돌연변이 황소는 여전히 세차게 달려들고 있었다.
우주는 재빨리 총을 버리고 로프건을 발사해서 높은 나무에 매달렸다.
쿠웅!
황소는 화풀이를 하듯 나무 기둥을 그대로 세게 들이 받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눈앞이 흔들렸다.
쩌억, 쩌어억.
나무 기둥이 점점 쪼개지더니, 나무가 슬슬 기울기 시작했다.
위태위태한 가운데, 우주는 단검을 빼들고 입에 물었다. 그러더니 허공에 힘껏 몸을 날렸다.
휘익!
우주는 거대한 황소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황소가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날뛰어댔다. 황소의 몸부림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황소는 나무가 보이면 일부러 달려가 등을 부딪치며 우주를 떼어내려고 했다.
쿵―
“쿨럭!”
역류한 피가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나마 얇은 두께의 소나무 기둥에 부딪혀서 다행이었다.
이번만큼은 살았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천지가 요동치는 것처럼 발광하는 황소의 털을 붙잡은 채 우주는 아슬아슬 기어서 머리 부분으로 이동했다. 머리에 자란 거대한 뿔에 몸을 기대고 곧바로 황소의 왼쪽 눈알에 있는 힘껏 단검을 박아 넣었다.
푹!
“움머어어어!”
황소가 허공을 보며 울부짖었다. 이것은 우주에게는 잘되어 간다는 신호.
그다음 오른쪽 눈알도 찔렀다.
푹!
“움머어어어어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