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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트 쉴드-47화 (47/285)

47화

그것들을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무시하고 뛰어가면서도 뒤쪽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찰칵, 찰칵.

결국엔 탄환도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 하나 남은 수류탄을 던졌다.

콰앙!

사탄과 만났던 절벽에 도착해서는 로프건을 재빨리 근처 소나무 기둥에 감고 그대로 30m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한 가지 운이 좋았던 점이라면 사탄을 본 돌연변이 멧돼지가 겁에 질려서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허벅지에 쥐가 났다.

근육이 심하게 당기더니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 순간, 그는 뛰다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누운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다리를 일자로 쭉 폈다. 손으로 발끝을 잡아서 근육을 풀어주었다.

숲은 조용하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뿐이었다. 아니, 지치고 급한 마음에 시야가 좁아졌다는 말이 정확했다.

탄환도 다 떨어져서 이제 무기라고는 칼밖에 없었다. GPS는 배터리가 동이 났으며, 야간투시경 선글라스는 초신성 곰과 싸우면서 부서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주는 다시 일어섰다. 왔던 기억을 되살려 무작정 열심히 뛰었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머릿속에는 김아라가 웃는 모습, 강민이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의 심장에서는 무한한 힘이 솟구쳤다.

새벽 3시 30분.

우주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현주와 하나, 성일은 아직 떠나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간이 최대 한계.

세 사람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현주 씨, 개틀링포 해체하러 갑니다.”

성일이 지휘실로 내려와서 안에 있던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현주는 초조하게 실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이윽고 해체를 지시했다.

고개 숙인 채로 앉아있던 하나가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훌쩍거리며 탐지 레이더를 봤다.

삐빅.

순간 컴퓨터가 소리를 내며 모니터에는 녹색 점이 표시됐다. 하나의 눈이 단숨에 휘둥그레졌다. 몇 시간째 잡히지 않던 우주의 신호가 드디어 잡힌 것이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채로 두 사람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살았어요! 살았어! 우주 씨가 살았다구요!”

현주가 급하게 무전기를 잡았다.

“신우주! 신우주! 들려? 신우주!”

―어라? 누님 아직 안 갔소?

누군 목숨 걸고 기다려줬더니, 참 천진난만하게도 대답한다.

현주는 우주가 얄미웠다.

“너 이 자식! 돌아오기만 해봐라!”

그러나 현주는 쌓아놨던 감정이 순간 북받쳐 올랐는지 울컥 목이 메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건 하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을 크게 터뜨렸다.

성일이 흐뭇하게 웃으며 무전기를 들었다.

“빨리 와. 모두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해맑은 아침.

소라는 출근하던 길이었다. 그녀는 전방주둔지로 파견을 나가있는 제네틱스 직원과 차 안에서 통화 중이었다.

―신우주와 그 팀원들이 전방주둔지로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초신성 곰의 웅담은 구했던가요?”

―네. 웅담도 확인했습니다.

“잘됐네요.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런 셈도 없는 순진무구한 미소여서, 운전석에서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하던 유창성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허락하신 겁니까?”

“허락하면 안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고액 연봉자의 요구를 회사가 묵살할 수도 없겠지만, 레쉴에 혼자 들어가겠다는 신우주의 생각은 마치 장난감 사달라고 우는 아이처럼 제멋대로인 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허락을 하셨다니,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그랬죠.”

“자칫 회사 내 우수한 수라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너무나 위험한 결정이었고, 평소의 본부장님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긴.”

소라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차창 밖 풍경을 내다봤다.

차가 도로변에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러자 그늘진 나뭇가지와 밝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이 서로 번갈아가며 그녀의 어깨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녀는 며칠 전 우주와 식사하던 때를 떠올렸다.

“료코 씨를 집에서 내보내세요.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이 임무를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적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한식으로 잘 차려진 기다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우주는 대답이 없었다.

소라는 그를 노려보며 잠시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있던 우주를 그대로 지나쳐서 창호지문에 손을 대려는 찰나, 그가 나직하게 운을 뗐다.

“최근.”

소라가 동작을 멈추었다. 고개만 뒤로 돌려서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봤다.

“최근, 정말 아무 걱정 없이 편하고 한없이 행복했던 날이 있었소?”

“그건 왜 묻죠?”

“오늘 소라 씨를 처음 봤을 때, 전과 다르게 많이 지치고 외로워 보이는 얼굴이었소.”

소라는 잠자코 귀를 열었다. 별다른 대꾸 없이 우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소. 소라 씨가 마음껏 웃어본 적이 있을까. 일상의 모든 일을 다 잊고 행복한 휴식을 보낸 적이 있을까. 오늘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라 씨가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 내느라 심신이 지쳐있다는 확신이 들었소.”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예요?”

우주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라의 눈동자를 포근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당신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오. 저번보다 오늘은 특히 더 예뻐 보였소. 그런 당신을 보면서 나도 즐거웠소이다.”

소라는 짐짓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꼈다.

“지금 꼬시는 거예요?”

우주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오해 마시오. 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소. 오랜 친구처럼 만나면 편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거나 진심으로 당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외다. 당신이 료코를 내보내려는 이유야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난 일보다 사람이 먼저요. 내가 료코와 살고 있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져도 난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요. 왜냐하면 료코는 미운 정으로 맺어진 내 친구요. 그런 친구가 외로이 홀로 길바닥에 나앉는다면 난 걱정이 되어서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할 거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요. 료코를 생각하는 마음을 당신에게도 주고 싶소. 내가 당신이 힘들 때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겠단 말이오.”

“내 아군…요?”

간지러운 곳을 제대로 긁어 주었는지 말이 통한 것 같았다.

소라는 잠시 동안 우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주가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는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이 신우주가 영원히 당신 편이 되어주겠소이다. 무엇도 바라지 않는, 믿음직한 아군으로 남아주겠소.”

“내가 힘들 때도?”

“항상 곁에 있어주겠소.”

“내가 세상에 비난을 받아도?”

“함께 돌을 맞겠소.”

“내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땐?”

“내 모든 것을 주겠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그래야 진정한 친구요.”

우주의 말을 듣고 나서 소라가 뺨을 붉히고 사뭇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소라는 나름 로맨틱한 기분도 들었다.

우주는 활기찬 눈으로 말했다.

“진정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왠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오. 당신이 만일 남자였다면 우정으로 껴안았을 거외다.”

친구 사이를 수락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을까. 소라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려 깔며 작게 대답했다.

“친구 사이인데 뭐 어때요…….”

그러자 우주가 서슴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서 소라의 냄새가 났다. 기분 좋은 향기를 맡으며 한복을 입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앞으로 날 믿어주시오. 힘겨운 세상에서 꼭 당신의 든든한 벗이 되어주겠소.”

다시 현재.

소라는 차를 타고 가면서 창성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친구라는 단어 어떻게 생각해?”

“친구 말입니까?”

창성이 부드럽게 핸들을 꺾으면서 피식 웃었다.

“사람 부리기 딱 좋은 단어죠. 친구라는 명목으로 오랜만에 연락해서 결혼식 축의금 내라거나 빚보증 서달라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요즘 세상에 진정한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소리죠.”

“그렇지?”

“네.”

소라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너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

이게 신우주와 유창성의 차이였다.

세상에 찌들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대답.

하지만 신우주는 다르다. 그의 말에는 신념이 깃들어 있었고 제 한 몸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챙기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에 더욱 신뢰가 갔다. 여태 남들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도 꼭 지켜줄 것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축하합뉘다, Mr. 신.

“감사하오. 이게 다 아만다 낭자가 도와준 덕분이라고 생각하외다.”

―나 많은 도움 됐숩니카?

“물론이오. 소생이 초신성 곰을 찾는 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소. 만약 아만다 낭자가 없었다면 미심쩍은 마음에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오.”

―쿡쿡. 기뿝뉘다. 쿠리고 한국 수라 미쿡서 유명합뉘다. 그중에서도 요즘 신이 제일 인기 많숩뉘다. 나, 신 팬입뉘다. 그때 Mr. 신의 전화를 받꼬 매우 기뻤숩뉘다.

“허허허. 그렇게 생각해주니 실로 영광이오. 소생도 아만다 낭자의 팬이라오.”

―제 팬입니카?

“그렇소.”

―쿠럼 다음 영화 홍보차 한쿡 가묜 Mr. 신에게 싸인해 줄 테니 신도 나 싸인해 쥬세요.

우주가 미소를 지었다. 아만다 로즈도 수화기 너머에서 키득거렸다. 그러고는 서로 꼭 만나자는 작별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야~ 할리우드 여배우 번호를 갖고 있다니 대단한데!”

곁에서 쥐 죽은 듯 듣고 있던 성일이 부러운 듯이 탄성을 자아냈다. 그 말고도 이 자리에는 현주와 하나도 있었다.

네 사람은 임무를 마치고 나서 귀가하지 않은 채 전방주둔지 안에 있는 천막 술집에서 뒤풀이를 하던 중이었다.

술집은 제네틱스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안에는 자리가 모자라 야외 테이블에서 돌연변이 멧돼지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그릴 망 위에 올려진 삼겹살이 취이이익 소리를 내며 익어가면서 주변에 먹음직스러운 향기를 풍겼다.

“자, 원샷!”

한 번 쭉 들이켜고는 다시 전원에게 소주를 따라주었다. 몇 번이나 소주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 후 성일이 고기를 싸 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만다 로즈가 한국말을 알아들어?”

“소생도 깜짝 놀랐소. 그래서 물어봤더니 전문 한국어 강사를 고용해서 한국말을 1년 동안 배웠다고 하더이다.”

“이야~ 그 처자 참 대견하네.”

“요즘 일부러 한국말 배우는 외국 배우 많아요.”

하나가 소주잔을 들어서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반 이상 남은 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비가 최대 5천억까지 투자될 정도로 세계에서 제일 시장이 컸었는데, 최근 들어 우리나라 충무로에 역전당했어요.”

“충무로는 얼만데?”

“이번에 개봉한 <괴물2>가 제작비 8천억이나 들었대요.”

“헐, 8천억씩이나?”

성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우리나라 경제가 레쉴 때문에 대박을 치니까 충무로도 덩달아 호황을 누리는 거죠. 게다가 할리우드에는 지금 한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대작 영화가 상당수 개봉 준비 중에 있어요. 대신 그런 영화들은 거의 다 한국 배우 한 명은 꼭 주연에 들어가야 하고, 심지어 서부극에도 한국 사람이 나온다니까요.”

하나가 성일에게 영화 제작비라는 주제로 열띤 강의를 펼치는 동안, 현주는 한껏 취해서 두 뺨이 새빨개졌다.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큭큭 대며 우주의 잔이 빌 때마다 계속 술을 따랐다.

“자, 마셔. 오늘 화끈하게 마시다 죽는 거야. 알았어?”

“누님, 혹시 내가 출발 전에 말한 거 기억나오?”

“글쎄, 뭐라고 했지?”

“무사히 살아 돌아와 놓고 누님과 술 먹다 죽을 거라고 했소.”

“하하하! 그랬던가?”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우주의 등짝을 때렸다. 그러고 나서 잔을 들자 우주도 따라서 들었고, 이내 서로 잔을 부딪쳤다.

“캬아~ 맛좋다. 이 누님은 말이다, 니가 살아 돌아와서 무척 기쁘다. 그리고 네가 무척 자랑스러워.”

“다 누님 덕분이오. 그간 이것저것 많이 알려준 덕분에 가서 큰 도움이 됐소.”

현주가 과일을 하나를 손으로 집어 먹으면서 살짝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해준 키스도 도움이 됐나?”

“누님도 참. 기억도 안 나외다.”

우주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이내 쑥스러운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현주가 자신의 의자를 당겨서 어깨가 닿도록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우주는 갑작스레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새빨갛고 두툼한 입술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입꼬리를 움직이며 농염한 미소를 흘렸다.

“난 말이야, 독신을 추구하지만 성욕이 많아. 특히 너처럼 강하고 멋진 사내를 아주 좋아하지.”

취기가 오른 임현주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분위기를 발산했다. 혀로 윗입술을 핥으며 고혹적인 눈빛으로 우주를 응시했다. 밤갈색 눈동자가 우주와의 달콤한 하룻밤을 기대하고 있었다.

우주는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자,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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