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52화 (52/285)

52화

우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금세 침착함을 유지했다.

“선배 뜻이 그랬다니 놀랍소. 하지만 지금 저 상태에서는 못 해도 20년은 지나야 마흔다섯 살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생전의 모습으로 가족들을 만나기란 불가능한 것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일 당장 마흔다섯으로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습니다. 저 아이도 태어난 지 이주일밖에 안 지났지요.”

“이주일 만에 저리 성장했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빅 허니비 여왕벌의 로열제리는 노화를 방지하고 사람을 젊어지게 해주는 불로불사의 명약이지요. 그와 반대로 레지스트 쉴드에서 자라는 감자의 잎사귀에는 사람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노화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추출해서 자기 전 사람 몸에 1mL 정도만 투약하면,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마치 1년이 지난 것처럼 사람의 몸이 성장해 버리죠.”

“믿기지 않는군…….”

우주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혹시 태평 형님도 있소?”

“저희 연구소의 고객 정보를 더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영웅 씨에 관한 개인 정보를 누설한 것만으로도 징계감이지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게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뭣이란 말이오?”

“영업입니다. 고객 유치를 위해서 그에 맞게 일한 것뿐이죠.”

“일전에 소생이 고릴라 팀원이었기 때문에?”

“예.”

박준은 자신의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재생 기술과 추후에 완성될 인간 복제 기술은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 기술입니다. 과학 기술 분야의 선두 주자인 미국과 일본도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죠. 우리나라가 신의 영역에 가까운 기술을 선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레지스트 쉴드 덕분입니다.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갖가지 연구 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무엇보다도 국내 경제가 호황을 맞으면서 천문학적인 연구 자금을 확보할 수 있던 것이 우리나라 인간 복제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목이 마른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유자차를 마신 뒤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저희는 대기업 간부라든지 연봉 100억 원대 이상의 수라나 고위 관료 등 대한민국 3% 안에 드는 고수입자에 한해서만 고객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정부 지원만으로 막대한 연구비를 감당해 낼 수 없기에 매년 50억 원의 투자 자금을 지원받고 투자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는 거죠. 어떻습니까? 꼭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이 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널리 보급된다면 언젠가는 사별해야만 하는 우주 씨의 가족, 친구, 지인, 하다못해 애완견까지, 그때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모두가 기술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저희 연구소에 투자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우주는 잠시 고민했다. 탁자 위에 놓인 서류의 제목을 읽어보았다.

'투자계획서'

그는 다시 박준을 쳐다봤다.

“복제가 되고 나서, 사망 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거요?”

“만 하루 분량의 기억은 복구가 어려우나 사망 하루 전까지의 모든 기억은 살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 하루에 한 번, 저녁이나 아침에 꼭 혈액 한 방울도 좋으니 저희가 제공해 드리는 특수 용기에 자신의 피를 담아 냉동 보관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날까지의 기억이 저장되지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저희 연구팀이 자택을 방문할 것입니다. 일주일 치의 분량을 그때 건네주시면 됩니다.”

우주는 또다시 물었다.

“수연 누님도 평생회원이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알려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드리자면 그분은 회사 차원의 투자 상품에도 가입되어 있습니다. 제네틱스가 자사 수라를 위해 가입해 둔 일종의 산업재해 보험의 재생 기술 혜택만 받고 계십니다. 참고로 같은 제네틱스 소속인 우주 씨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신라그룹도 산업재해 보험에 가입되어 있소?”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우주는 시계를 쳐다봤다.

이후 그는 혼자서 연구소를 걸어 나왔다.

오후 3시가 지나있었다. 저녁 6시에는 <경성의 여무사> 담당 PD와 작가를 만나서 저녁을 함께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삐빅.

차문을 열고 자신의 아반떼에 몸을 실었다.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곧바로 카오디오에서 러브걸스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주는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쓸모없는 메시지가 잔뜩 와있었다.

최근 초신성 곰을 잡은 이후로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계속 오는 중이었다. 일부러 전화를 피하니 대신에 메시지 수신함이 가득 찼다.

수신함을 정리할 겸 메시지를 하나씩 삭제하기 시작했다.

왕호그룹 회장 이건성입니다. 신우주 씨께 레지스트 쉴드 관련하여 긴급히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연락 부탁합니다. 의뢰비는 아파트 한 채와 콘도 회원권을 비롯해 원하시는 대로 챙겨 드리겠습니다.(10년 7월 25일. 13시 20분) ― 삭제태산산업 비서실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신우주 씨와 식사 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하십니다. 시간 되시면 연락 바랍니다.(10년 7월 25일. 14시 00분) ― 삭제결혼 정보 회사 해피메리입니다. 신우주 씨는 1등급 신랑감에 선정되셨습니다. 1등급에 선정되신 분은 여성분의 부모님이 정관계, 법조계, 기업가이신 분들과 만나실 수 있으십니다. 24시간 언제든 상담 가능하오니 연락 주십시오.(10년 7월 25일. 17시 00분) ― 삭제이일표 국회의원님의 수석보좌관 강이수입니다. 혹시 정치에 관심 있으십니까? 저희 의원님께서 이 나라 새 정치에 관해서 우주 씨와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싶어 하십니다. 귀하의 생각을 듣고 저희 당 청년위원장으로 적극 추천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10년 7월 25일. 20시 30분) ― 삭제우주 씨 안녕? 나 아파트 반장 아줌마인디, 바쁜겨? 전화가 안 되넹. 글찮아두 중매가 들어와서 말여. 판사 집안이라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을텨? 내가 사진 보낼 테니께. 아가씨 참하고 좋아. 이뻐. 사진 보내줄 텡게 함 보고 전화 줘.(10년 7월 26일. 10시 10분) ― 삭제.

야, 신우주. 너 초신성 곰 잡았다며?!(10년 7월 25일. 9시 30분)씹냐?(10년 7월 25일. 10시 20분)이것 봐라. 이제 오빠라고 안 부른다고 씹는 거야?(10년 7월 25일. 11시 00분)짜증 나(10년 7월 25일. 11시 30분)제네틱스 한소라랑 사귄다는 게 정말이야?!?!?!?!?!? (10년 7월 25일. 14시 00분)미쳤어!!!!!!!!!!!!!!(11년 7월 25일. 14시 01분)빨리 대답해 봐!!!!!!! 궁금해 죽겠어!!!!!!! 야, 야야야야! 오빠! 오빠~~(10년 7월 25일. 14시 02분)현아한테서 온 메시지였다. 이건 지우지 않기로 했다.

우주는 대답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후 차를 출발시켰다.

부우웅―

운전 중에 연구소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좀 더 생각해 보겠소.”

거절의 의미였다. 자신을 복제해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자연의 이치에 맞게 각자 정해진 수명이 있으니 무리하면서까지 하늘의 이치에 역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무병장수하면서 딱 100살까지만 살고 싶었다. 혹시나 일하다 다쳐도 회사에서 가입해 둔 상품이 있으니까 상관없었다.

운전 중에 불쑥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액정을 쳐다본 뒤 갓길에 차를 세웠다.

“소라 씨?”

―뭐 해요?

“저녁에 드라마 PD와 미팅 약속이 있어서 매니저와 코디 만나러 가는 길이오.”

우주는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소라 씨는 일하는 중이오?”

―알았어요. 끊어요.

뚝.

소라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우주는 어이가 없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어제 전화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났나?”

소라한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들렸다. 두 번 신호가 흐르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왜요?

“어제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드리겠소.”

소라가 코웃음을 쳤다.

―저 화 안 났는데요? 뒤끝 있고 막 쪼잔한 그런 사람 아닙니다.

“내 소라 씨를 아주 잘 아오. 지금 목소리는 분명히 화난 게 맞소.”

그녀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날 잘 알다니요? 말조심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둘이 사귄다고 열애설까지 났는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오해하라고 하시오. 친구끼리 서로 잘 아는 게 죄요? 난 상관없소. 세간 눈치 신경 안 쓰고 소라 씨와 잘 지내고 싶소이다.”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웬일인지 소라는 말이 없었다.

우주가 눈을 깜빡이며 불렀다.

“여보시오? 소라 씨? 여보시오?”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 운전기사한테 급한 사정이 생겨서 회사에서 집까지 운전해 줄 사람이 없어요. 오고 싶으면 오시든가요. 안 와도 되지만.

뚝.

또 자기 할 말만 내뱉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우주는 당연히 기분이 상했다. 정말 이 여자 까다롭구나, 싶었다. 뭐 이리 옹고집이냐고.

하지만 투덜대면서도 이내 회사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여자들이란 도통 알 수가 없군.’

그렇게 도심으로 들어가 회사가 있는 강남 방향으로 차를 달렸다. 사거리 진입 전 신호를 받고 차를 세웠다.

신호가 바뀔 동안 잠시 기다리는데 문득 왼쪽을 보니 왠지 익숙한 차가 나란히 서있었다.

에쿠스.

그 차의 조수석 문이 열렸다.

“어이~ 우주 씨!”

선글라스를 낀 유창성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옆 좌석에는 웬 젊은 아가씨가 타고 있었다.

어디 놀러가는 것 같은 분위기에 우주가 목소리를 크게 내며 물었다.

“바쁜 거 아니었소?”

“바쁘긴요. 오늘 본부장님이 일찍 퇴근하래서 애인하고 드라이브하러 가는 길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