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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트 쉴드-53화 (53/285)

53화

그 말에 우주는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머릿속에서 소라의 새침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냥 데려다 달라고 솔직히 말하지, 거참.”

신호가 바뀌었다.

창성에게 잘 가라는 손 인사를 한 후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소라와 만날 때는 회사가 아닌 근처에서 만나기로 사전에 입을 맞추었다. 차종과 색상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름 한적한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차를 정차한 뒤 다시 전화를 거는데, 누군가 차문을 열고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

동시에 바람을 타고 익숙한 향수 냄새가 운전석으로 밀려왔다. 안 봐도 누군지 뻔했다. 소라였다.

그녀는 자기 얼굴보다 크고 둥근 갈색 선글라스와 흰색 챙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게다가 옷도 갈아입은 듯했다. 평소 정숙한 정장차림 대신 하늘색 모던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치마 아래로 맨다리를 드러내며 각선미를 뽐냈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먼저 모자를 벗으며 말을 꺼냈다.

“요즘 누가 이런 똥차를 타고 다녀요?”

“이 차가 뭐가 어때서 그러오. 잘만 간다오.”

“잘못해서 또 사진이라도 찍히면 제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그러죠. 후~ 더워. 밖에서 오래 기다렸더니 덥네요. 왜 이리 늦게 온 거예요?”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놨는데 덥소?”

“더워 죽겠어요.”

“좀 기다리면 시원해질 거요.”

“그건 그거고 일단 손 좀 줘봐요.”

“손? 손은 왜?”

“줘보라면 줘요. 왜 버티고 그래요? 더우니까 그러잖아요.”

소라가 짐짓 짜증을 내면서 우주의 오른손을 홱 잡아챘다. 자신의 품안으로 가져가더니 자신의 손등에 올려놓거나 두 손으로 조몰락조몰락, 마치 손난로를 만지는 것처럼 요리조리 마구 조몰락거렸다.

“아, 시원해~ 차가워서 너무 좋다.”

“시원하오?”

우주는 그녀와 손을 잡으니 속으로 기분이 좋았다. 여성스럽게 가늘고 고운 손이었다.

“차 안에 앉아서 에어컨 바람만 쐬고 있으니까 손이 차갑죠.”

“하긴 그렇소. 근데 집이 어디라고 했소?”

“강남 캐슬펠리스요.”

부우웅.

소라의 집을 향해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이윽고 캐슬펠리스에 도착하자, 소라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면허 딴 지 두 달 지났다면서 운전 잘하시네요.”

“고맙소.”

운전 잘한다는 소리에 우주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운전을 잘해도 문제라니까. 덕분에 빨리 와서 참 기분 좋네요.”

철컥.

소라는 심통 난 표정으로 말을 내뱉고는 차문을 열었다. 챙 모자를 머리에 쓴 뒤 핸드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잘 들어가시오. 나중에 연락하리다.”

우주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후 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그때 소라가 차창을 두드렸다. 우주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소라가 말했다.

“집에 가서 차 마시고 갈래요?"

우주는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그러고 싶지만 많이 늦었소. 빨리 가봐야 한다오.”

“무슨 약속인데요?”

“아까 말했듯이 드라마 PD와 작가를 만나기로 했소이다. 얼른 가봐야 하오.”

“아, 그 약속.”

소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럼 빨리 가 보시든지요.”

소라는 차갑게 말을 뱉고는 주저 없이 뒤로 돌아섰다.

매끈하고 날렵한 몸매를 가진 그녀가 그대로 떠나갔다.

우주는 사실 한소라 집에 가서 집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김철수와 강민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차를 돌렸다.

며칠이 지났다.

8월 초, 무더위가 촬영장을 엄습했다.

“오늘도 무지 덥네.”

철수가 푸념하듯이 말했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 촬영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일제 강점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세트장에서는 배우를 비롯해 여러 명의 스태프가 바쁘게 오가며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한 카메라 담당 스태프가 감독에게 소리쳤다.

“감독님! 세팅 완료입니다!”

“오케이!”

감독은 뭐가 그리 신 나는지 활기차 보였다. 카메라에 한쪽 눈을 살며시 가져다 대며 소리쳤다.

“역시 그림 좋다! 이 정도면 시나리오 개판 쳐도 영상미는 뛰어나다고 칭찬받겠어!”

그 시간 우주는 촬영장 한쪽에서 <경성의 여무사> 작가와 대면 중이었다.

키 168cm에 뚱뚱한 체격을 가진 이설희 작가가 무심하게 말했다.

“미팅 때도 말했지만 전 아이돌 출신 싫어해요. 감독님이 하도 추천하길래 쓰는 겁니다. 제발 부탁이니 중간만이라도 가줘요. 아셨죠? 지금 시청률 28% 가는 드라마인데 우주 씨의 발연기 때문에 드라마 망치고 싶진 않아요.”

우주는 강민에게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설희 작가는 주말 드라마로 최고 시청률을 48%까지 끌어낸 중견 작가였다. 이설희 작가가 썼다고 하면 전국의 시청자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드라마에 기대를 건다.

그만큼 이설희 작가는 방송계에서 독보적이었고 영향력도 컸다. 그런 그녀가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드라마의 제작비.

“원래는 이 역할이 없어도 되는 건데, 우주 씨의 소속사 때문에 억지로 만든 거예요.”

이설희 작가는 무심히 그런 말을 뱉고 떠났다.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철수가 열을 냈다.

“이 방면에서 신인이라지만 너무 대놓고 갈구네.”

한낮의 더위는 숨 막힐 정도로 뜨거웠고, 첫 드라마를 찍는 우주는 입술이 메말랐다.

조현기 감독이 다가왔다. 그는 오딧세이X 광고의 감독이었던 조현상의 동생이었다.

조현기 감독은 마당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을 사이에 두고 멀리 그늘에 앉아있던 김수희를 가리켰다.

“저기 수희 씨를 보며 지금부터라도 사모하는 거야. 그녀를 보자마자 혼이 쏙 빠졌고 정신이 훌러덩 나간 거라구. 그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지만 결코 손댈 수 없는 운명, 경성의 여무사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보디가드. 짝사랑하는 그녀를 대신해서 일본군의 칼에 맞아 죽는 게 우주 씨의 역할이니까 잘 부탁해. 시청자들에게 짧지만 강한 인상이 남도록 말이야.”

우주는 감독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입술만 움직일 뿐 눈은 웃지 않았다. 첫 드라마 촬영에서 긴장되는 건 당연했지만, 자신이 왜 김수희를 사모해야 하는지 나름 불만이 있었다.

어쨌든 조현기 감독은 그렇게만 강조하고 떠나갔다.

철수가 멀리 있는 수희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넋이 나간 것처럼 말했다.

“김수희 정도면 감정 이입 잘 되지…….”

“메이크업 해줘?”

강민이 대꾸했다. 그가 농담으로 한말에 철수가 낄낄거리며 손을 저으며 우주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까 수희 씨가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왜 우리한테만 인사를 안 하고 그냥 지나친 걸까요? 드라마 주연 배우가 그러니 촬영장 안에서 왠지 왕따당하는 기분이네.”

우주는 대본을 보면서 대답했다.

“아마 소생 때문일 거요.”

그는 금강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철수가 물었다.

“왜요? 김수희랑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서로 경쟁 회사 소속이라서?”

강민이 끼어들었다.

“아냐. 우주가 먼저 인사하러 갔어야 해.”

“왜?”

“김수희가 선배.”

“참, 그렇지!”

철수가 손뼉을 마주쳤다.

수희가 우주보다 연기도 나이도 선배다. 따라서 우주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터벅터벅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

코디에, 스타일리스트에, 매니저에, 보디가드에 둘러싸여 있던 수희는 우주를 냉담한 시선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만 간단히 끄덕였다.

신우주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철수가 물었다.

“인사 안 했다고 화내던가요?”

우주가 물병을 쭉 들이켜고 나서 대답했다.

“내가 더 짜증 났소이다.”

“엥?”

촬영은 시작되었다.

만주에서 개성으로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은 우주가 경성의 여무사 수희와 비밀리에 첫 만남을 가지는 자리였다.

우주는 그 자리에서 수희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이설희 작가의 뜻에 따라 우주의 대사는 하나도 없었고 오직 눈빛 연기로만 승부를 보면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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