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NG!”
스태프와 보조 출연자 그리고 이설희 작가를 포함해서 조연 배우들의 매니저나 코디까지 모든 시선이 한곳에 쏠린 가운데, 조현기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주에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더니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어깨를 다독거리며 작게 말했다.
“짝사랑 해본 적 없어?”
“없소이다.”
“여자도 안 사겨봤어?”
“그렇소.”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랬어.”
조현기 감독이 우주를 쭉 훑어봤다. 그러더니 속 모를 웃음을 지었다.
“연기 경험 없는 거 어차피 알고 뽑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근데 조금 전 눈빛은 정말 무관심 그 자체였어.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좀만 더 애정을 끌어내면 어떨까? 응? 할 수 있지? 참 신기해.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를 눈앞에 두고 설레지 않을 수가 있지? 다시 한 번 잘해보자고.”
툭툭 어깨를 치며 조현기 감독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설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초리로 감독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죠? 이래서 아이돌은 안 된다고.”
“이 작가, 아이돌을 누가 연기 보고 뽑아? 일단 방송 내보내고 시청률 보고 말하자구.”
조현기 감독이 소탈하게 웃으며 곧바로 소리쳤다.
“자, 다시 갑시다! 레디~ 액숀!”
#150. 산속 오두막.
지푸라기 깔린 오두막 안.
채나경과 김선준이 허름한 목재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
나경은 조선총독부 국장 겐노스케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선준에게 차분히 설명 중이다.
나경 : (비장한 눈빛으로) 겐노스케를 죽이는 건 제 역할 입니다. 선준 씨는 다른 곳에서 놈들의 시선만 끌어주세요.
선준 :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천천히 고개만 끄덕인다.)나경 : 이틀 뒤, 각자 습격에 필요한 물품을 구비한 뒤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선준 : (천천히 고개만 끄덕인다.)나경 :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미소를 띠며) 그리고 목련관에서 묵고 계신다고 했죠?
선준 : (천천히 고개만 끄덕인다.)나경 :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에서 보자기를 꺼내 선준에게 건네준다.) 그곳엔 일본인들이 많아 한국 음식을 드시기 힘드실 것 같아 김치와 젓갈을 좀 담아 왔습니다. 사내 혼자 산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큰일을 앞두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셔야죠.
선준 :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한 듯 조금 눈을 크게 뜬다.)나경 :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조국이 독립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 나갑시다.
선준 : (그녀가 오두막을 나가는 뒷모습을 아쉬운 듯 바라보다 탁자 위에 놓인 보따리로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컷! 됐어! 밥 먹고 다음 신 갑시다!”
조현기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태프들은 촬영장비 챙기랴 매니저와 코디들은 배우 챙기랴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연기 수업도 안 받고 왔나 보죠? 감격에 겨운 눈빛이라기보다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눈빛이던데.”
오두막을 나갔던 수희가 다시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1930년대의 세련된 양장 차림이었다.
마찬가지로 복고풍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우주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연기 수업은 받았는데 기분이 나야지 말이오.”
“하하, 누군 기분이 나서 연기하나요?”
수희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줄래요?”
“뭐요?”
“저한테 왜 그리 악감정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녀가 던진 질문은 확실히 되짚어 볼만한 의미가 있었다. 어쩌다 그녀와 이렇게 됐을까?
우선 수희의 첫인상이 나빴고, 제네틱스 동료들이 욕하는 신라그룹에 소속되어 있다. 그런 상태로 금강산에서 김수희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먼저 뻣뻣하게 굴었다.
사이가 틀어진 이유도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미움을 받아야 했으니 억울해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 더욱이 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악감정 따윈 없소이다. 그나저나 그때 사탕 잘 먹었소, 선배.”
“차라리 독이든 사탕을 줄걸.”
수희는 째려보면서 이어 말했다.
“그리고 직업이 연예인도 아닌데 굳이 선배라고 부를 필요도 없거든요?”
“정말이오?”
갑자기 화색이 돌 정도로 우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수희가 토라진 얼굴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외다. 사실 선배란 말 붙이기 되게 힘들었소.”
“저야말로 듣기 괴로웠네요. 이, 사, 람, 아.”
오후 날씨도 화창했다.
다음 촬영 장소는 산속이었다. 말을 타고 산길을 달리며 똑같이 말을 타고 뒤쫓아 오는 일본 경찰 무리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신이었다.
촬영 장비가 설치되는 동안 우주와 수희는 일본 경찰 역을 맡은 액션 배우들과 동선을 짜고 리허설 겸 천천히 움직이던 중이었다.
“액션 학원 몇 개월 다니셨습니까?”
“그런 곳은 다녀본 적 없소.”
“정말이에요? 최소 3년 이상 다닌 것 같은데, 혹시 중국 가서 무술 배우고 오셨어요?”
“배운 적 없소.”
“제아무리 수라라고 해도 총은 쏠 줄 알아도 무술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 분은 처음입니다.”
무술 연기는 누구 하나 다치지 않도록 치밀한 동선을 짜놓고 가능한 한 NG가 나지 않도록 배우들 간의 호흡이 중요했다.
수라 신분의 연기자들은 과감한 액션 장면에서 따로 대역이 필요 없었다. 수라는 보통 사람보다 몸이 튼튼했다. 그래서 어떤 감독들은 실감나는 액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실제로 맞아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몸이 강철 같다고 해서 무술 연기까지 잘하는 것은 아니다. 액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수라라고 해도 몇 개월씩 액션 학원에 다니면서 작품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액션 학원을 전혀 다녀본 적도 없는 우주는 무술 연기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정말 잘했다.
우주의 무술 실력을 알아본 액션 배우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다. 최근 잘나가는 아이돌 우주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몰려든 스태프들과 보조 출연자들, 구경꾼들이 다 같이 멋지다며 박수를 쳐댔다.
“우쭐대지 마세요. 연봉 200억이나 받고 일하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요?”
수희가 슬쩍 다가와 시샘하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미운털 박힌 오리가 너무 잘해서 질투 난 것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우주는 그저 코웃음으로만 되받아쳤다.
참고로 연봉을 따지면 수희가 더 높다. 그녀는 최근 연봉이 상승해 280억 원을 받는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 촬영장 한쪽이 웃음소리로 시종일관 화기애애하자, 털보 조현기 감독이 씨익 웃으며 신난 듯이 그쪽으로 뒤뚱뒤뚱 뛰어갔다.
뒷짐 지고 우주를 지켜보던 무술 감독에게 다가갔다.
“어때?”
“경성의 여무사 첫 방송 이래 가장 스펙터클한 명장면 하나 뜰 거요.”
“그 정도로 잘해?”
“우리 액션 스쿨 강사로 데려다 쓰고 싶을 정도야.”
조현기 감독이 껄껄 웃으며 우주를 크게 부르며 손짓했다. 사람들에게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던 우주가 얼른 뛰어왔다.
“미팅 때 우주 씨 말 잘 탄다고 했지?”
“그렇소만.”
“지금 한번 타볼래?”
“알겠소이다.”
조현기 감독이 스태프를 시켜서 말 한 마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너비 2m 안팎의 평탄한 숲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저쪽까지 한 100m만 쭉 달려봐.”
사람들의 시선이 우주에게 쏟아졌다. 개중에는 말을 타다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 섞인 시선도 있었다.
“오토바이라면 몰라도 말 타고 다니는 수라는 없잖아.”
“어디서 배우고 왔겠지.”
“제가 보장하는데 우리 우주 씨는 결코 말을 타본 적이 없어요.”
“그래요?”
한쪽에서는 철수가 언제 친분을 쌓았는지 매니저들 사이에 껴서 이야기 중이었다.
“네, 타본 적 없습니다.”
“그럼 매니저가 얼른 가서 말려야지 어쩌려고 가만있어요? 저리 당당하게 떠들어놓고 제대로 못 타면 엄청나게 쪽팔릴 텐데. 연기자가 기죽거나 감독한테 꾸사리 먹으면 매니저만 피곤해져요. 그 투정 다 받아줘야 해서.”
“그건 걱정 마세요. 우주 씨는 객기나 허세 부릴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요. 분명 잘 타니까 잘 탄다고 했을 겁니다.”
철수는 확고한 눈빛으로 우주를 신뢰했다.
그의 말은 근처에 서있던 김수희에게도 들렸다.
다소 의문 어린 시선으로 우주를 지켜보던 그녀였다. 수희는 철수를 힐끔 쳐다봤다.
‘새침데기 신우주가 매니저한테는 잘하나?’
우주는 쏟아지는 시선을 개의치 않고 스태프에게서 고삐를 건네받았다. 그는 바로 올라타지 않고 갈기를 쓰다듬었다.
“잘생겼구나, 그놈.”
말이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푸드득거렸다.
말은 도구가 아니고 존중해야 할 친구라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형님에게 배웠다.
우주는 계속 말과 말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작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다.
“쟤 뭐 하는 거야?”
이설희 작가는 우주의 행동이 기이하게 여겨졌는지 미간을 좁히며 조현기 감독에게 물었다.
조현기 감독은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잠깐의 시간 동안 말과의 발걸음뿐만 아니라 점점 마음까지 맞추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쯤, 우주는 주저 없이 등자에 발을 끼워 넣고 안장에 올라탔다.
말은 얌전히 꼬리만 흔들 뿐,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우주와 함께 달릴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말과 교감이라도 주고받는 듯 우주가 확신에 찬 미소를 짓더니 이내 조현기 감독을 쳐다봤다.
“감독님, 칼도 휘둘러야 한다고 하셨소?”
우주가 능숙하게 말 위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 조현기는 감탄한 나머지 넋이 빠져 있었다.
“어? 어! 그래그래 맞아, 그랬지!”
“칼 좀 갖다 주시오.”
우주가 칼을 갖다 달라고 하자 스태프 하나가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에게 모형 칼을 건네주었다.
“으랴!”
말이 힘차게 딸가닥딸가닥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찰칵찰칵, 미리 앞쪽에 자리 잡고 대기하던 구경꾼들이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햇볕에,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한 손에 칼을 든 채 멀쑥한 정장 차림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우주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저거 CG 아냐?”
누군가 탄성을 자아내며 말했지만 누구의 귀에도 들려오지 않았다. 현장은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이 고요했다.
우주가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달리는 말 위에서 칼을 휘두른다는 것이 이 시대 배우에게 있어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술 감독이라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 TV 다큐에 나오는 무술인이나 가능할까.
하지만 우주는 달랐다. 그는 기가 막힌 승마술을 보이며 현란하게 칼을 휘둘렀다.
“감독님, 감독님?”
조현기 감독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우주가 그 앞에 서있었다.
“어떠하셨소? 만족하셨소이까?”
“대,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