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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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것은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로 망명한 것과 똑같다고 세상에 비춰졌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구한말 개화 지식인들은 무너진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들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백성들과 힘을 합쳐야 했다. 따라서 현 나라의 사정을 백성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 순수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신문≫을 접한 많은 백성들이 독립협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당시 충청도에 살던 최중진이란 자는 항러?일 무력 운동 단체인 ‘민족군단’을 전 재산을 털어 창설하였다.
우주가 열다섯 살이 된 1898년, 겨울 한성.
차창 밖으로 한성 우편국이 보였다. 얼마 안 가 전차가 서자 사람이 와락 몰려들었다.
우주는 그들을 비집고 나가 전차에서 휙 뛰어내렸다.
추운 날씨에 하얀 입김이 절로 나왔다. 우편국 옥상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우주는 큰 거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우편국 반대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민족군단에 자원하기 위해서 개성을 떠나왔다.
현재 독립협회와 민족군단의 출현으로 한반도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로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한반도 전체가 소리 없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 독립협회 사람들이나 민족군단 사람이 나타나면 대대로 물려받은 금가락지라도 빼줄 각오들이었다.
우주 역시 조국을 위해서 큰일을 하고 싶었다.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고, 그가 선택한 것은 민족군단이었다.
총칼을 빼 들고 나라를 지키고 싶었고,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큰형의 복수도 함께 하고 싶었다.
“너무 어린데.”
“어리지 않아! 이 나이에 장가도 가잖소!”
“한 살만 더 먹고 온나. 열다섯 살 가지고는 택도 없다.”
“나라 지키는 데 나이가 어딨소!”
어느 초가집 대문 앞에서 이마에 흰 머리띠를 동여맨 남자가 변성기도 안 지난 우주와 입씨름 중이었다. 그는 계속 돌아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우주는 듣지 않았다.
“빨리 가입시켜 주시오!”
“허~ 참. 안 된다니까. 그만 고집 피우고 좋은 말할 때 얼른 돌아가!”
남자가 더는 상대해 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쯔쯔, 여긴 대체 어찌 알고 온 건지.”
혀를 차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자꾸 나이 땜시 무시할 거요? 그럼 이건 어떻소!”
우주가 들어가려던 남자를 뒤에서 붙잡고 두 팔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풍차 돌리듯 남자를 머리 위에서 붕붕 돌렸다.
“으아아아 그만! 토할 것 같아! 그만!”
“가입시켜 줄 거요, 안 해줄 거요!”
“해줄게! 해줄게! 해줄 테니 그만 내려줘!”
우주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남자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철퍼덕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더니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나중에 겨우 정신을 찾고서는 우주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어린놈이 어찌 그리 힘이 센 거냐?”
이튿날.
남자는 다섯 시간을 걸어서 우주를 한성 밖, 어느 깊은 산속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민족군단이 진을 치고 주둔하고 있었다.
우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괴력을 인정받아 소년단에 편성되었다. 거기서 자신보다 세 살 많은 형인 박필모를 만나게 되었다. 박필모는 우주보다 키도 크고 서글서글한 웃음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박필모는 워낙 재주가 많았다. 서양 총도 잘 쐈고 말도 잘 탔으며 영리하기까지 했다. 그렇다 보니 다음 해에는 소년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하루는 신우주가 소년단 형들한테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던 중이었다. 눈치가 없는 데다 나서기도 좋아하고 상관한테 말대꾸도 잘해서 건방지다는 게 이유였다.
“더 때려봐 더 때려봐! 하나도 안 아프니까!”
우주는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럴수록 형들은 고깝게 여기며 더 때렸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다들 그만해!”
땅바닥에 엎어진 채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데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때쯤 누군가 먼발치에서 소리쳤다.
박필모였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우주에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가 물었다.
“왜 맞기만 했어?”
“내가 때리면 저 형들 죽어.”
당돌한 우주의 말에 필모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 무렵 우주는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았다. 한마디로 사람이 아니었다.
필모가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터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라고 했다. 천을 받아 피를 닦는 우주를 보고 필모는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우주가 물었다.
“필모 형.”
“응?”
“형도 내가 싫어?”
“싫기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럼 형도 내가 버릇없어 보여?”
“음……. 솔직히 말하면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역시 형도 내가 싫구나…….”
우주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궜다. 시무룩한 그를 보고 필모가 방긋 웃었다.
“하지만 니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왠지 싫지는 않더라. 아무리 버릇없어도 다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니까 여기 있는 거고.”
“왜?”
“넌 말이야, 내 죽은 남동생을 닮았어. 그래서인지……. 아니다. 이런 얘기 해봐야 도움도 안 돼, 인마. 그나저나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만하고 어서 일어나자.”
이 시기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일본은 이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두 나라의 사이에서 자주독립을 외치던 민족군단은 주로 소년단을 외국인들의 심부름꾼이나 선박의 화물을 옮기는 노동자로 위장시켰다.
위장한 이들은 항구에 입항하는 러시아와 일본 선박에 폭약을 설치해서 파괴하기도 하였다.
우주는 이 과정에서 수차례 위태로운 경험을 하였다. 그럴수록 필모를 비롯해 다른 소년단 동료들과의 우정도 더욱 커져만 갔다.
여러 해가 지나고 1902년이 되었다.
민족군단은 일본도 아니고 러시아도 아닌, 조국인 대한 제국의 군대에 쫓기며 존립 자체가 아주 위태로워졌다. 독립협회 역시 강압적으로 해산된 지 오래였고, 정부는 민족군단의 해산을 칙령으로 명하였다.
결국, 민족군단의 수장 최중진이 일본군에게 잡히며 민족군단이 와해되어 버렸다.
하지만 대한 제국에 애국자가 그 하나뿐이랴. 청나라에서 장사를 하며 큰돈을 모았다는 김목겸이라는 사람이 와해된 민족군단 사람들을 다시 결집시키고 비밀 결사 조직 ‘만민의힘’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주가 속해있던 소년단은 자연스레 만민의힘이라는 단체에 흡수되었다.
이러한 통합 과정에서 우주는 휴가 아닌 휴가를 얻게 되었다. 한성에서 개성으로, 오랜만에 여동생을 만나러 갈 참이었다.
여동생 생일이 코앞이었다. 한성에서 뭐라도 사갔으면 좋으련만, 그런 걸 신경 쓰기에 자신의 몰골은 너무 형편없었다. 옷 입은 꼬락서니도 비렁뱅이와 다를 바 없었다.
정부군에게 쫓기는 동안 민족군단에서 돈이 한 푼도 나오지 않았기에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훔칠까 말까, 어쩌지…….”
댕기 가게 앞에서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가판대에 진열된 것 중에 유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여동생에게 가져다주면 오빠로서 기도 펼 것 같았고, 막내도 무척이나 기뻐할 것 같았다.
한성에서 유행하는 댕기라고 말하면 막내가 너무나 좋아할 것이 뻔했다.
“어쩌지…….”
그렇게 고민하며 한 세 시간은 제자리에 서있었던 듯싶었다.
“이 자식 봐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인마. 개성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여적 여기 있는 게야?”
“……!”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놀라 뒤돌아보니, 필모가 작은 보따리를 등에 멘 채 웃으며 서있었다.
“형, 광주 안 갔어?”
“이제 막 가려던 참인데, 넌 여기서 모하는 거야?”
“나, 난 그냥 댕기 구경…….”
필모는 그대로 우주를 지나치더니 가판대로 가서 환한 눈빛으로 댕기를 쭉 훑어보았다.
“여기 뭐 마음에 드는 거라도 있어?”
우주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때 가게 주인이 밖으로 나왔다. 피부가 시커멓게 타고 얼굴에 땟국이 가득 묻은 애들이 가게 앞을 서성거리니 왠지 불안했는가 보다.
“떽! 저리 가. 니들이 쓰는 거 아녀.”
“왜 손님을 쫓아내고 그래요. 우리 댕기 살라고 하는 건데. 아주메, 돈 많이 벌었는 갑네?”
“뭐여?”
“자, 이 돈 보슈.”
필모가 허리에 찬 돈 주머니를 보여주며 능청스럽게 지껄였다. 거기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가게 주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필모는 이내 우주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자, 마음에 드는 거 있음 골라봐.”
우주가 머뭇거리며 오지 않자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여동생 선물 산다고 했잖아? 내가 사줄 테니 빨리 와서 골라봐. 대신 나중에 니 여동생 소개해 주기다?”
필모는 털털하게 웃으며 한성을 빠져나가는 북문까지 우주를 데려다 준 후 자신은 남문으로 향했다.
우주는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손에 쥐어진 것을 내려다봤다.
댕기.
필모가 사준 댕기다. 게다가 그는 고향까지 걸어가는데 힘들 거라며 우주에게 따뜻한 국밥까지 사줬다.
“고맙소, 형님…….”
우주는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 진심으로 감동했다. 분명 그도 돈이 얼마 없을 텐데 혈육도 아닌 동생을 위해서 저리 마음을 써주니 너무나 고마웠다.
다음 해 1903년.
필모에게 말을 타는 법을 배웠다. 그가 말했다.
“말은 도구가 아니라 네 친구야. 따뜻하게 감싸줘야 해.”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그들은 부산까지 내려가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당시 박필모는 적진 속에 고립된 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우주는 그를 찾아 사방팔방 숲을 헤집고 다녔다. 수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두 사람은 이미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필모 형님! 필모 형님, 어딨소!”
간간히 부딪히는 왜놈은 총으로 쏴 죽였다. 총알이 다 떨어졌을 땐 육탄전을 벌였다. 전장에서 우주는 그야말로 사신이었다. 막아설 자가 없었다.
이윽고 다리에 총상을 입은 필모를 찾아냈다. 그는 다리에 피를 흘리며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난 두고 가. 자칫하면 너도 죽는다.”
“시끄럽소!”
“야, 인마…….”
필모는 애써 웃어 보이면서도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눈이 반쯤 감겨있었다. 그런 그를 업고 우주는 냅다 뛰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뚫고 나와 그를 안전한 구역으로 피신시켰다.
필모는 우주의 어깨를 툭 치며 힘겹게 말했다.
“오늘은 니가 살려줬으니 다음에는 내 차례야…….”
그 후로 두 사람은 펄펄 날아다녔다. 온갖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일본군은 우주와 필모를 만나는 전장에서 만큼은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밀 조직 만민의힘을 이끌던 수장 김목겸이 정부군에게 붙잡혀 사형당했다. 조직은 또다시 와해되고 매우 작아졌다. 기껏해야 30명의 소년만이 남았다.
당시 스물한 살이던 필모는 중대 결심을 했다. 그는 대장이 되어 소년만으로 이루어진 조직 ‘조선의태양’을 창설했다.
우주가 속한 이 조직은 전국 곳곳에서 길이길이 날뛰며 시도 때도 없이 일본군을 농락했다.
필모가 두뇌라면 우주는 단연 행동 대장이었다. 우주와 필모가 나서는 길을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었다. 두 사람의 전성기가 바로 이때였다.
1904년. 조선의태양의 등장으로 한반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군은 자국에서 다코오 마츠다이라 중장을 불러 조선 내 주둔하는 일본군 수장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힘이 부치자, 마츠다이라는 마침내 두 번째 신인류인 쿠로가네 료코를 조선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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