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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트 쉴드-57화 (57/285)

57화

일본 고베 항구.

마츠다이라가 도쿄를 떠나 고베에 도착한 것은 4월 22일 저녁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바다는 맑고 싸늘했다. 조선으로 떠날 배가 정박하자 항구는 더욱 분주해졌다.

마츠다이라는 아침 해를 등지고 부둣가에 서서 가만히 그 풍경을 관망했다. 바로 뒤에는 쿠로가네 료코가 밧줄로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죄인처럼 무릎 꿇고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옆모습은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밤새 울었는지 료코의 눈은 부어있었다. 선박을 바라보던 마츠다이라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도 가기 싫은 게냐?)”

“…….”

료코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츠다이라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꿋꿋하게 가기 싫다는 의지만 내비쳤다.

도쿄에서 고베까지 오는 동안 그녀가 몇 번이나 도망쳤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마츠다이라는 부하를 시켜 그녀를 잡아오게 했고, 요 며칠은 아예 짐승 다루듯이 밧줄에 묶어놓고 쇠창살에 가둬놓았다.

그러면서 밥은 하루 한 끼, 죽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적은 양만 먹였다. 기운이 있어봐야 제까짓 게 도망치기밖에 더 하겠는가.

“(네년은 팔린 몸이다. 현실을 직시하거라.)”

료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감정에 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탓이었다.

처음 자신이 팔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며칠 밤을 원망하고 증오했다.

료코가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시키든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 그만 풀어주세요. 돌아가고 싶습니다.)”

마츠다이라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칼을 든 부하 하나에게 말했다.

“(데리고 와라.)”

이윽고 부하가 한 여자를 데려왔다. 체구는 료코보다 작았지만 나이는 많았다. 그 눈가에는 눈물이 주렁주렁 맺혀있었다.

“(료코!)”

료코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봤다.

“(사치코!)”

사치코는 서커스단에서 지낼 적에 돈독하게 어울려 지내던 친한 언니였다. 말끔한 기모노 차림의 사치코가 밧줄에 묶인 료코를 부둥켜안았다. 그대로 두 사람은 펑펑 울었다.

마츠다이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사치코는 나와 함께 조선에 가기로 했다.)”

료코가 깜짝 놀란 듯 사치코를 쳐다보았다. 사치코는 포근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료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 단짝이잖아?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갈 생각이야.)”

1904년 5월 1일.

료코가 조선 땅을 밟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조선은 너무도 미개한 나라였다. 서양식 건물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100년 전 일본에나 있었을 법한 구시대 건물들이 여전히 수두룩했다.

거기에 차도 없고 증기 기관차까지 없어서 한성까지 가는데 부산에서 조랑말을 타고 가야만 했다.

“(이래서 사카모토 료마가 위대하다는 거야.)”

나란히 조랑말을 타고 가던 사치코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다.

5월 9일. 료코가 한성에 도착했다. 며칠간은 사치코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한성을 돌며 여러 가지를 먹고 구경했다.

특히 조선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는 크고 체격도 다부진 것이 갸름한 체형의 일본인들과는 다른 생김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츠다이라가 자신의 방으로 그녀를 불렀다. 일본풍으로 지어진 방 안에는 한기가 돌았다.

마츠다이라는 그녀에게 암살 명단을 건네줬다. 그 명단에는 신우주를 비롯해 박필모, 일본을 적대시하는 대한 제국의 고위 관료, 조선 땅에 발을 붙인 러시아, 청나라, 미국 등지에서 보낸 핵심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자들을 찾아내 모조리 처단해라.)”

“(싫습니다. 제 검은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검입니다.)”

료코의 말에 마츠다이라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내 말을 거절하겠다는 건가? 이거 재미있군. 한낱 계집 주제에 고집을 피우다니.)”

마츠다이라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떠올렸다.

그날부로 료코는 깜깜한 독방에 갇혔다. 명단에 적힌 인물들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보일 때까지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난 강요하진 않겠지만.)”

촛불만이 밝은 빛을 내는 어두운 독방 앞에는 사치코가 일본 군복을 입은 채 벽에 기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힘들지 않아?)”

“(조금…….)”

사치코는 안쓰러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다음 날에도 사치코가 찾아왔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신이 난 듯 말했다.

“(일 끝나고 먹거리가 잔뜩 놓인 시장에 갔는데, 정신 팔려서 걷다가 어떤 사람이랑 부딪혀서 넘어졌지 뭐야.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건네는 거야. 난 넘어진 게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시장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조심하라며 따뜻하게 웃어주는 거 있지? 그때 심장이 두근거려서 아무 말도 못 했던 날 봤으면 정말 웃겼을 텐데.)”

사치코가 까르르 웃었다.

료코도 덩달아 미소 지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본 사람이라고 싫어하진 않았어?)”

“(글쎄? 그런 건 못 느꼈어. 맞다. 그러고 보면 조선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하고 순수한 것 같아. 내가 만약 조선 사람이었다면 일본 사람이 넘어진 거 보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말이야.)”

나중에 사치코가 독방을 떠날 때는 료코에게 힘내라며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흘렸다.

그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사치코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조선이란 나라에 감탄을 쏟아냈다.

“(있지, 이 나라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 평등한 것 같아. 길거리에서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아낙네도 봤어. 남편과 항상 따로 밥을 먹어야 하고 집 안에서는 남편 얼굴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우리나라하고는 너무 다른 거 있지? 비록 조선이 현재는 후진국이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의외로 진보적인 것 같아. 조선인들은 아내와 밥상도 겸상하는 데다, 우리나라는 남편하고 길을 걸을 때도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가야 하잖아? 근데 조선에는 그런 게 없더라. 심지어 아내가 회초리를 들고 남편을 때리며 돈 벌어오라고 구박하는 광경도 본 적 있어.)”

“(정말?)”

“(응, 정말이야. 조선 남자는 왠지 유순한 것 같아. 나도 조선 남자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어.)”

사치코는 매일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리 한껏 풀죽은 모습이었다.

“(도망가려던 조선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갔어. 끌고 가서 마차 뒤편 감옥에 집어넣고 말을 안 듣는 조선인들은 총으로 때리기도 했어. 안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맞아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녀는 넋이 나간 눈빛으로 때때로 울먹였으며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말했다.

료코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야.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후회는 안 해. 다만 네가 빨리 나와 줬으면 좋겠어. 너 때문에 이곳에 왔으니까, 네가 곁에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어.)”

러일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일본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대한 제국과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했다.

한일 의정서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대한 제국의 내정 개선이라는 구실 아래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 군사, 재정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들에 직접 간섭하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대한 제국은 사실상 이때부터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왔다.

한반도를 통해 일본이 만주로 북진하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러일전쟁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우주와 박필모는 국제 정치와 동맹이란 이름으로 결속된 전 세계의 세력 구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일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무능한 조선 지배층을 원망하며 개탄했다.

“이 땅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다 쇄국 정책 탓이야.”

필모는 전국을 돌아다니다 곳곳에 세워진 척화비를 볼 때마다 큰 망치로 가차 없이 때려 부수기도 했다.

우주와 필모는 한성의 백성들이 만주로 끌려가기 전에 그들을 구출해 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한 숲을 통과할 때 급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 사치코의 부대가 한성을 빠져나와 이동하고 있었다. 한성 바로 윗마을까지 조선인들을 인솔하는 것이 오늘 그녀의 임무였다.

이번 일에 동원된 일본 병력은 총 30명. 습격에 대비해 전원 총칼로 무장한 채 밧줄에 묶인 100여 명의 조선인들을 인솔해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무, 물 좀…….”

옆에서 끌려가던 조선인 한 사람이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얼굴에는 잔뜩 땟국이 묻어있고 머리는 산발이라 지저분하기 그지없었으며 입술까지 부르텄다. 쳐다보기 가여울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 사치코는 물통을 그에게 건네주며 미소를 지었다.

“(남기지 않고 다 마셔도 돼요.)”

“가, 감사합니다! 콜록, 콜록!”

조선인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성급히 마시다가 사래가 들렸다.

그때였다.

말을 타고 앞서 걷던 간부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습격이다! 조센징 놈들의 습격이다! 서둘러 사격 진형을 갖춰라!)”

그 시각.

마츠다이라가 독방에 감금된 료코를 찾아왔다. 료코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으나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마츠다이라는 감옥 안에 있는 명검 세키가하라를 흘끗 보더니 핼쑥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로서 그 고집을 꺾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료코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은 저항할 의지가 담긴 모습이었다.

마츠다이라의 입꼬리가 음침하게 올라갔다.

“(일전에 신진루이라는 존재에 관해 네게 말해 준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신진루이가 오늘 사치코가 속한 부대를 공격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지.)”

마츠다이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료코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동자는 잠시라도 한곳에 멈춰 있질 못했다.

마츠다이라는 내심 흡족해하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독방의 문을 끼이익 열었다.

문을 활짝 열고서 그가 말했다.

“(이대로 독방에 계속 머물러있든 친구를 구하러 달려가든 선택은 네 몫이다.)”

한편, 신우주와 박필모가 이끄는 조선의태양의 기세에 밀려 일본군은 추풍낙엽으로 당했다. 사망자가 21명이나 되었고, 살아남은 일본군 아홉 명은 모두 밧줄에 포박당한 채 숲 바닥에 일렬로 무릎을 꿇었다.

“끝나면 바로 뒤따라와라.”

필모가 웃으며 우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길을 나서려던 찰나, 뭘까? 그의 총기 멜빵이 풀어지며 총이 바닥에 탁 하고 떨어졌다.

우주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에휴, 형님. 신병도 아니고.”

“그러게 말이다.”

필모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총기를 줍고는 다시 어깨에 멨다.

“후딱 와.”

손을 흔들며 그는 떠났다. 필모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백성 100여 명을 안전하게 한성까지 호위해 줄 생각이었다.

우주를 포함해 남게 된 동료는 단 세 명. 이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럼 시작하자.”

우주가 넓적한 칼을 뽑았다. 모양이 사형을 집행하던 망나니 칼과 매우 흡사했다.

그는 제일 왼쪽에 앉아있던 일본병사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뼈와 살이 얼어붙을 정도로 냉정한 눈빛을 한 우주가 칼을 허공에 높이 치켜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린 일본 병사가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히익! 사, 살려주십……!)”

우주는 주저 없이 내리쳤다.

털썩.

떨어진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저승사자에게 일말의 자비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다음도 간단히 목이 날아갔다. 또 그다음도. 넷, 다섯, 여섯……. 이내 아홉 번째 일본 병사 차례가 되었다.

“(부탁합니다. 살려주세요. 부탁합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제발…….)”

사치코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죽음을 앞두고 크게 흐느끼며 울었다.

하지만 우주는 무심했다.

“(죽는 게 두려웠으면 왜 했느냐? 저승에 가거든 너보다 심한 고통 속에 죽어간 우리 백성들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거라.)”

휘익―

우주의 칼 놀림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눈물로 범벅된 사치코의 머리가 땅바닥을 굴렀다.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꽃을 활짝 피우려던 꽃봉오리는 그렇게 맥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아아아아! 신진루이이이이이이!)”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우주가 고개를 돌리자 기모노를 입은 한 여성이 집어 삼킬 듯이 부릅뜬 눈으로 칼을 내려쳤다.

우주는 얼결에 망나니 칼로 그 공격을 받아냈다. 보통 사람보다 빠른 이 움직임, 먼 거리를 단숨에 좁혀온 이 속도.

‘칫! 이 계집은 사람이 아닌가?!’

아차 하는 순간에 우주의 칼이 부러졌다. 게다가 오른쪽 허벅지 위로 칼끝이 스쳤는지 검붉은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보통 칼로는 명검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죽여 주마아아아!)”

료코는 칼을 마구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우주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칼을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잘 쓰는 적수를 처음 만났거니와, 그 초인 같은 신체 능력마저 자신과 비등비등했다. 이처럼 동등한 조건에서 검술의 고수를 상대할 땐 어찌 대응해야 할지를 몰라 우주는 크게 당황했다.

“우주 형님, 떨어지십시오! 쏘겠습니다!”

현장에 있던 두 사람이 활을 겨누며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 순간, 두 사람은 료코의 칼에 곧바로 목숨을 잃었다.

“(네가 사치코를! 네가! 사치코를 죽였어!)”

료코의 칼이 마침내 우주의 가슴을 관통했다.

“크억!”

역류한 피가 목구멍을 통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료코는 그대로 검을 비틀었다.

“쿠어억!”

우주가 더욱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팔꿈치로 그녀의 가슴을 치면서 겨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이내 료코가 다시 잽싸게 파고들며 자신의 칼로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

“우윽!”

우주가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그녀가 다시 칼을 비틀었다.

“아악!”

“(아주 괴롭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게 만들어 주겠어!)”

료코가 칼을 뽑더니 이번엔 그의 오른쪽 어깨를 푸욱 찔렀다. 또다시 칼을 비틀었다.

“으아악!”

“(살려내! 살려내!)”

료코는 울분을 토해내며 그의 몸에 박힌 칼을 뽑았다. 그러더니 다른 부위를 찌르려고 했다.

그때 우주가 발을 사용해서 그녀를 힘껏 밀쳤다. 료코가 그 힘을 못 이기고 뒷걸음질 쳤다.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멀리서 총성이 들려왔다.

료코가 재빨리 총알을 피하면서 뒤로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

“우주야!”

우주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황급히 쳐다봤다. 순간 망연자실했다.

먼저 떠났던 형님이 왜 돌아온 건지!

“형님! 오면 안 됩니다! 빨리 도망가십시오! 빨리!”

필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다시 총을 겨누었다.

탕!

필모가 료코를 향해 쐈다.

료코는 박필모가 쏜 총알을 피하더니 그대로 나무 기둥에 몸을 숨기고 오른쪽 치마를 들췄다. 허벅지에 부착된 예리한 수리검을 집었다. 살짝 고개를 내민 뒤 손 안에서 수리검을 한 바퀴 돌리더니 가차 없이 필모를 향해 내던졌다.

“크욱!”

수리검은 필모의 목 한가운데 정확히 꽂혔다.

그 광경을 본 우주는 크게 낙심했다.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일백 번 무너지는 것 같았다.

“혀, 형님……!”

우주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꿈이었으면…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필모는 단말마의 비명만 지른 채 힘겹게 살아온 짧은 그의 인생과 달리 너무나 허무하게 그 생을 초라하게 마감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우주는 몸을 찢는 아픔도 다 잊은 채 료코에게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료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기댈 곳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끝없는 증오를 발산하며 상대를 향해 멈출 수 없는 광기를 내뿜었다.

“네년을, 내 필히 오늘 네년을 이 자리에서 조지겠다고 맹세하마!”

“(죽여 버리겠어! 널 산산조각 내서 그 육신을 모조리 씹어 먹어주겠다!)”

…………………………

……………………

………………

…………

……

?

“(주인님, 주인님? 주인니임~)”

“으응?”

누군가 몸을 막 흔들기에 우주는 문득 눈을 떴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벼가며 애써 눈을 크게 떴다.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료코가 얼굴을 코앞에 들이밀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우주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주인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신우주 대원님 안녕하십니까? 제네틱스 3D 홍보 모델 아이나입니다. 대원님께서는 금일 오전 04시 50분에 발생된 ‘드롭존’으로 인해 다섯 번째 비상소집 멤버로 선정되셨습니다. 이 연락을 받으신 즉시 전방주둔지로 출근해 주시기를 바라며, 결근해야 될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제네틱스 종합 대책 상황실 전화 1988-0000-03으로 전화 주셔서 비상소집 담당자와 상의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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