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65화 (65/285)

65화

인천시에 발생한 드롭존이 해제된 시각은 오후 7시가 넘어서였다. 상황 종료 후 열린 기자 회견장에는 각 기업에서 상위권 순위를 차지한 수라가 세 명씩 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우주는 기자 회견장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의아하게 여긴 소라는 인천 작전 지휘소에 파견돼있던 현장 직원과 통화했다.

―인터뷰를 위해서 붙잡아 두려고 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서울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안 했습니까?”

―예. 매니저와 함께 밴을 타고 갔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다시 연락을 취해볼까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소라는 전화를 끊고 나서 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다시 매니저인 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찬가지로 꺼져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일단 그녀는 상황실에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중, 때마침 강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주 씨를 방해했던 건 일본인이었습니다.

“일본인이요?”

소라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난데없이 일본 놈이 왜 튀어나오지?’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순간 다코오 가문이 뇌리에 스쳤다. 이어서 료코도 떠올랐다. 다코오 가문, 료코, 신우주.

퍼즐을 짜 맞추듯 이 셋의 연관 관계를 생각해 보니 대략 답이 나왔다.

미라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국제 전화를 걸었다. 다코오 하시도루에게.

“(이쪽에 사람을 보내셨습니까?)”

다코오 하시도루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보냈소.

“(그렇다면 왜 제게 말을 안 해 주셨습니까? 이런 건 제가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과는 상관없으니 그랬소.

“(상관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시도루 씨가 보낸 자객 때문에 우리 회사는 큰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런데도 상관이 없단 말입니까?)”

―신세기 프로젝트.

하시도루는 묵직하게 딱 잘라 말했다.

소라는 그 말에 뜨끔했는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대번에 말을 잃었다.

―대체 언제 진행할 작정이오?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린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외다. 앞으로는 당신의 아버지인 한규만 회장과 직접 일을 진행하겠소.

“이 씹……!”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들먹이는 것이 그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매번 미국에 있는 친언니와 비교당하며 숨이 막히던 그녀였다.

목구멍까지 넘어왔던 욕을 꾹 삼킨 뒤 애써 진정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세기 프로젝트는 제가 꼭 맡고 싶습니다. 부디 저희 아버님이 이번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신우주도…….)”

그녀는 조용히 침을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신우주는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

하시도루가 말했다.

-신우주와 우리 증조부님과의 관계는 잘 알 것이오만. 또 신세기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제일 위험한 인물을 꼽으라면 그게 바로 신우주라는 것 또한 소라 양도 명백히 잘 알 것이오. 100여 년 전, 그 시절 수많은 일본인을 살해한 조선의 악귀 신우주를 말이오.

소라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를 이용하는 겁니다.)”

―이용한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제네틱스에 입사시킨 것입니다. 애초에 하시도루 님의 증조부이신 마츠다이라 님께서 봉인되신 곳은 레지스트 쉴드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악귀로 불렸다던 신우주처럼 뛰어난 인물이 아니고선 일을 진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꼭 그여야만 합니다. 그가 아니면 대체자가 없습니다. 전화를 마치고 레지스트 쉴드에서 그의 활약상을 담은 동영상을 정리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보시고 생각을 달리해 주십시오.)”

하시도루는 고민에 빠진 듯 잠깐 시간을 끌더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이 정을 통한다는 이야기는 어찌할 거요? 이에 관해서 명명백백하게 설명을 해보시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절 믿어 주십시오.)”

나중에 전화를 끊은 뒤 소라가 중얼거렸다.

“늙은 여우 새끼…….”

답답한 마음에 초고층 빌딩들이 한눈에 보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을이 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소라는 사색에 잠겼다.

“난 대체 신우주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사실 헷갈렸다.

우주를 단순히 이용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를 아끼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막막했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소라는 문득 우주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출할 테니 차 대기시키세요.”

―8시에 언론과의 인터뷰 약속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당히 사정을 말하고 취소하세요.”

인천에서 서둘러 돌아온 우주는 급하게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없다.

매일 같이 현관에 나와 그를 반겨주던 료코가 보이지 않았다.

“(료코! 어딨어, 료코!)”

거실에서 안방, 료코의 방, 손님 방, 샤워실, 베란다, 집 안 곳곳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명검 세키가하라도 칼 장식대에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기모노도 없었다.

“아……!”

우주는 비틀거리며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탈한 기분에 손바닥을 이마에 가져갔다. 눈을 감았다.

사람이란 게 참 그렇다. 조금 알겠다가도 또 모르겠는 게 사람 속이다. 그간 료코에게 정이 들었다면 들었는데 어찌 그녀는 이리 무참히도 쉽게 떠난 것일까.

머릿속에서 료코의 얼굴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늘 옆에 있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그에게 너무나도 큰 상실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 그녀가 말한 대로 아기를 가질 걸 그랬나. 그랬다면 자신을 떠나지 않았을까.

과거 끔찍했던 일들이 또다시 반복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겹다. 아직도 허망한 꿈을 꾸는 일본 우익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순순히 따라간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우주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 놔두지 않겠어!”

어리석은 일본인들에게 화가 솟구쳤다.

“너희가 진정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내 직접 나서서 그 야욕을 철저히 망가뜨려 주마!”

우주는 일본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곧바로 안방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조급한 마음에 옷가지들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일본 우익은 둘째 치고 당장 그녀를 만나서 따지고 싶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찰칵.

얼핏 디지털 키가 잠금 해제된 것 같았다.

우주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어 천천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었던 우주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 료코뿐이다.

그 반가운 소리에 서둘러 거실로 뛰쳐나갔다.

“료코!”

“(주인님?)”

현관에 서있던 사람은 역시나 료코였다. 우주의 부탁으로 평소 자제해 왔던 기모노를 입은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팔에 상처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폭발 사고에 휘말렸던 우주는 경상을 입고 팔뚝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 때문에 현관문도 제대로 못 닫은 료코가 들고 있던 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얼른 달려왔다.

“(제가 상처를 봐 드리겠습니다.)”

우주는 다가온 그녀를 갑자기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긴 료코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주인님?)”

“(미안해…….)”

“(네?)”

한층 더 료코를 꽉 끌어안으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주는 기쁜 나머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날 믿고 남아 주었는데 난 널 믿지 못했어. 미안해.)”

료코는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넌지시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우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말했다.

“(집에 왔는데 칼도 없고 기모노마저 없으니까 떠난 줄 알고 많이 놀랐어.)”

그의 가슴에 머리를 편히 기댄 료코가 입술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소녀, 낮에 수영 씨에게서 김치를 담근 날에는 수육과 함께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사러 시장을 가는 길에 그자가 또다시 나타날까 봐 혹시 몰라서 챙겨 갔습니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으로요.)”

칼과 기모노를 입고 시장에 간다는 것은 확실히 기괴하고 섬뜩한 발상이었지만, 그래야 료코다웠다.

우주는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을 살갗을 비비고 지낸 연인처럼 한동안 서로 껴안은 채 묵묵히 둘만의 교감을 나누었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우면서 따뜻했고, 그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난 키스를 했다.

달콤한 키스 후에 우주는 양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

료코는 애틋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맑은 호수처럼 투명한 그녀의 눈동자가 신우주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 쌍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것 같았다.

우주가 말했다.

“(우리 아기 갖자.)”

“(소녀, 그 말을 간절히 기다렸사옵니다.)”

료코는 생긋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와 동시에 우주가 번쩍 그녀를 들어 안았다.

료코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주, 주인님. 설마, 벌써 침상에 드실 생각이시옵니까?)”

“(물론 그래야지. 지금 당장 하고 싶어. 그리고 앞으로 하루 다섯 번씩 아기가 생길 때까지 매일매일!)”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우주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료코는 이제 막 집에 돌아온지라 몸에서 땀 냄새가 날까 봐 너무 염려스러웠다.

료코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에둘러 말했다.

“(아직 시간도 많고, 그러니 저녁은 드시고 하셔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러나 키스를 하고 나서 고추가 불끈불끈 강직하게 서버린 우주에게 그녀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추로 하늘을 찌를 듯이 기운이 펄펄 넘쳤다.

“(그때까지 못 참겠어! 우우아아아아아!)”

“(어, 어맛! 천천히 가주세요! 무섭습니다, 주인님!)”

우주는 료코를 공주님 안기로 들고서는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단숨에 안방까지 뛰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 신우주가 사는 아파트 정문.

에쿠스에 타고 있던 창성이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경비실 직원에게 물었다.

“신우주 씨, 귀가했습니까?”

경비원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누구시오?”

“직장 상사입니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소라가 검고 진하게 코팅된 차창을 내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 아파트는 제네틱스 건설이 지은 아파트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경비원은 크게 놀랐다.

“허, 허걱! 죄, 죄송합니다!”

경비원은 당황하는 몸짓을 하며 황급히 통과시켰다.

에쿠스는 그대로 아파트 주차장에 진입했다.

이윽고 소라가 차에서 내렸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창성에게 그리 지시를 내린 뒤에 소라는 우주가 사는 집으로 또각또각 발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