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68화 (68/285)

68화

어제 저녁 소라와 나누었던 대화가 오버랩되었다.

‘혹시 짐작가는 바 있소?’

‘글쎄요. 회사 차원에서 조사를 진행해봐야 알듯 싶습니다.’

그녀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단서라고는 다코오 가문이 이시다 신타로를 보냈다는 것과 다코오 하시도루가 제네틱스의 대주주라는 것이다.

우주는 인터넷을 더 검색해봤다.

하면 할수록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만 갔다. 다코오 하시도루와 한소라가 기자회견장 같은 곳에서 서로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하는 사진도 보였다. 60대는 족히 넘어보이는 하시도루의 얼굴이 불쑥 마츠다이라를 생각나게끔 하는 것이 역시나 그 핏줄 그대로라며 한숨 섞인 탄식을 토해내기도 했다.

바닥에 앉아있던 료코를 돌아봤다.

“(내가 봉인이 되고 나서 마츠다이라는 그후 어떻게 됐지?)”

“(소녀. 그것까진 잘모르겠사옵니다. 주인님께서 봉인이 되시고 난뒤 3일 후에 저도 같은 자리에 봉인이 되었기에...)”

“(그랬군...)”

우주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이번 키워드는 ‘다코오 마츠다이라’

1860년 3월 2일생, 사망일은 물음표 표시뿐.

이제는 일본의 역사책에서나 볼법한 그와 관련된 정보를 하나씩 읽어가면서 그는 점점 화가 끓어올랐다. 생사람을 대상으로 지독하고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를 창설한 것도 마츠다이라였다.

“이런 죽일 놈들...!”

가슴이 먹먹해져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인터넷창을 껐다.

우주는 눈을 감았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하여 박필모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헤치며 그토록 애를 썼건만, 자신이 봉인되고 나서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님 드시옵소서.)”

눈을 떠서 료코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포크에 복숭아 조각을 찍어 건넨다.

입으로 받아먹었다.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우주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모든 일본인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코오 가문이 지분을 소유한 제네틱스 만큼은 계속 머물러 있기가 힘들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했다.

문제는, 자신이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 것일까?

계약 파기? 그것이 가능할까?

이 시대의 법은 잘알지 못한다. 하나, 마음대로 계약을 파기하는 순간 그에 따른 상당한 대가를 치뤄야 할것이라고 예상은 된다. 심하면 기업연합회가 나서서 다시는 레지스트 쉴드 내에서 활동을 할 수 없도록 영구 제명 조치까지 취할지도 모른다. 영구제명이란 한마디로 국내 기업들끼리 단합해서 괘씸죄를 저지른 수라를 다시는 고용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이럴 경우 중국이나 러시아 기업으로의 진출을 고려해봐야 하겠지만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니 계약 파기는 일단 배제.

그럼 계약 기간이 끝날때까지 친일 기업에서 마냥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계약이고 뭐고 한소라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한때 그녀의 친구며 아군이 되어준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자신이 과연 할 수 있을까?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시다 신타로의 존재를 한소라가 진즉에 알고 있었다면?

그땐 말이 달라진다.

우주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복잡한 생각을 10분만해도 머리가 터지는 그런 사내다.

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식히고 싶었지만 우주는 오늘 내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답을 못찾아도 그에 근접한 어떠한 이야기라도 필요했다.

그는 서랍을 열어서 한참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메모지를 하나 찾았다. 해법을 찾고 싶은 이 상황에서 어쩌면 조언자가 될 수도 있는 단 한 사람.

‘신라그룹 한소민!’

그녀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고 싶어졌다.

태양은 뜨겁고 하늘은 청명했다.

우주의 아반떼는 교외의 한 까페로 향했다. 항시 따라 붙던 제네틱스의 감시원들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의 추측으로는 소라와 친구로 지내기 시작한 그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비게이션 덕분에 목적지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했다. 입구에 나와있던 한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슬림한 정장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은 것이 날렵해보였고 딱 봐도 유창성과로 보였다. 무술에 능한 수행경호원 말이다.

차를 주차한 뒤 그녀를 뒤따라서 조용한 까페에 들어섰다.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까페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미소로 반겨주는 한소민만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마주보고 앉았다.

“연락을 받고 좀 놀랐습니다. 두 달이나 지나도록 연락이 안오길래 포기한 상태였거든요.”

“둘이 만났던 그날 이후로 한층 더 감시가 심해졌었다오. 좋은 때를 고르다 보니 연락이 늦어져서 미안하외다.”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소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똘망똘망하면서 약간 쳐진 쌍꺼풀이 그녀의 인상을 부드럽게 했다. 도도해보이는 소라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온화한 분위기가 있었다. 또 전에는 밝은 갈색이었던 머리도 이번에는 진한 검정색으로 염색되어 있었으며 하얀 면으로 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희고 가녀린 목에 걸린 다이아 목걸이가 유난히 눈부셨다.

“지금이라도 만났으니 다행입니다.”

소민은 활짝 웃어 보인 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렸다. 그녀는 노트북을 킨 다음 사진을 한장 보여줬다.

우주는 묵묵히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시죠? 인류의 구원자라고 불리는 세이비어입니다.”

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세이비어를 한번 본적이 있었는데, 이 사진에는 빛 밖에 안보이오만.”

사진 속의 세이비어는 너무도 환한 빛에 파묻혀서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소민이 말했다.

“세이비어가 유례없이 빛 에너지를 강력하게 발광시켜서 그렇습니다. 레지스트 쉴드가 생긴 이후 여태껏 이런 적이 단 한번도 없었죠. 혹시 소라가 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까?”

“없소이다.”

“그럴 겁니다.”

소민이 웃으며 단정지었다. 그녀는 마치 소라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는 투다.

우주는 잠시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소민을 마주보았다.

“한데, 이 사진을 소생에게 보여주는 이유를 알고 싶소. 우리 고릴라 팀이 전멸하던 당시 상황과 관련이 있는 거요?”

소민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 이 노트북을 보시면 아실겁니다.”

노트북의 부팅이 완료되자 소민이 마우스를 움직여서 다른 사진을 보여주었다.

소형 사탄의 신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도로 위에 내장이 나뒹구는 처참한 사진이었다. 멀리 한쪽에서는 사탄에게 허벅지까지 파먹힌 오수연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경이 보였다.

우주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왜...”

“우주 씨도 잘아실 겁니다. 본인이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렇긴 하오만 또 보고 싶진 않았소.”

우주는 귀 뒷부분을 살살 긁었다. 필연적으로 당시 악몽과도 같았던 상황이 고스란히 스쳐지나갔다.

조금 짜증나는 투로 물었다.

“발광하는 세이비어와 이 사진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요?”

“동시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그럽니다.”

“동시간? 같은 시간에?”

“네. 당시 목격자는 우리 신라그룹의 사막여우팀이었습니다. 슈트에 부착된 카메라가 현장을 녹화하던 시간과 세이비어가 발광하던 시간대를 비교해보니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소민은 다시금 확인하듯 덧붙였다.

“소라가 이런건 말해주지 않았죠?”

“말해주지 않았소.”

기억하기 싫은 그때를 떠올리다보니 머리가 혼란스럽고 가슴 한곳이 답답했다.

그런 우주에게 소민은 생긋 웃어보였다.

“제네틱스는 왜이리, 우주 씨에게 ‘숨기는 것이’ 많을까요?”

무언가 의미심장해보이는 그 말에 우주는 또다시 기억을 되새겼다.

‘혹시 짐작가는 바 있소?’

‘글쎄요. 회사 차원에서 조사를 진행해봐야 알듯 싶습니다.’

이쯤되면 소라가 수상해 보이고 소민의 말에 신뢰가 깃드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주는 그런 생각을 일절 거부했다. 소라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고 싶었다. 그랬기에 소민을 적대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소라를 두둔했다.

“숨긴건 아니라고 보오. 그리고 내가 일부러 알려하지 않은 점도 있었소.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오.”

그때였다.

한순간 번쩍하고 떠오르는게 있었으니 처음 레지스트 쉴드에서 일을 시작할때 환청으로 들렸던 막내의 목소리였다.

‘오라버니!’

이어서 사탄을 찢어발기기 전 눈앞에서 아른거렸던 막내. 그 아이는 포근하게 다가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주 오라버니. 아직, 아직이야.’

환청 같으면서도 전혀 환청 같지 않았던 목소리.

막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그 즉시 엄청난 힘이 몸안에 깃들며 사탄을 응징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영롱하고 신비로웠던 그 힘이 자신을 지배했던 기억 만큼은 아주 또렸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힘. 하지만 막내와 연관을 지으면 그것이 비록 가정이라고 해도 나름 신빙성이 있어보였다. 100여년 전 막내는 자신과 비교를 못할 정도로 월등한 능력을 가진 여자 아이였다.

그 아이의 능력 앞에서는 자신의 힘은 그저 보잘 것 없는 보통사람에 불과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막내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물건까지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신통한 아이였다.

세이비어와 막내.

육안으로 볼때 밝은 빛에 둘러싸인 세이비어는 그 실루엣이 사람이면서 여성 체형과 많이 닮아있었다.

“평상시 세이비어의 사진을 볼 수 있소?”

“예,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긴 합니다.”

“얼른 한번 보여봐주시오.”

우주가 뜬금없이 보챘다.

소민은 순순히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여기 이 사진입니다.”

“역시!”

우주는 다각도에서 찍힌 여러장의 사진을 보고나서 그제야 알겠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그 실루엣이 무척 막내와 닮아 있었다. 왜냐하면 세이비어의 체형은 막내의 체형과 너무도 쏙 빼닮아보였다. 씻기를 매우 귀찮아 하던 막내를 그녀가 열다섯살때까지 손수 씻겨주던 그였다. 막내의 체형이 어떤지 구석구석 너무도 잘알았다. 특히나 그 머리와 젖가슴, 골반의 크기를 고려해보면 무척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사진속에서 뭔가를 찾으셨나요?”

소민이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하지만 우주는 소민 앞에서 들뜬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 우리쪽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소민을 바라보았다.

“별일 아니외다. 세이비어가 당신 말대로 평상시와 크게 다르길래 좀 놀랐을 뿐이오.”

“그렇죠?”

소민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 신라그룹은 우주 씨를 영입하고 싶습니다.”

우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보고 이직을 하란 소리요?”

소민이 태연한 얼굴로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럼 감추기만 하는 제네틱스에 계속 있으시게요?”

“그게 아니오. 감췄다기 보다는 사정이 있어서 그런걸수도 있소이다.”

“회사를 두둔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회사에 뒤통수를 맞을수도 있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하란 소린 아니예요. 제네틱스와의 계약이 끝나는 내년 7월, 우리 신라그룹이 연봉 500억을 주고 당신을 사고 싶습니다. 어떠세요?”

“500억? 그렇게나 많이 준단 말이오?”

“우주 씨는 마땅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드롭존에서 1위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드롭존에서 1위를 하려면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수라를 뒤에서 떠받치는 기업의 능력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이번 드롭존에서 제네틱스가 어떤 수준인지 톡톡히 겪어보지 않으셨나요?”

우주는 순간 폭발사고에 휘말렸던 자신을 떠올렸다.

소민이 계속 말했다.

“우주 씨가 옥토퍼스를 선점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순간에 제네틱스는 그저, 갑자기 나타난 테러범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지 않았던가요? 솔직히 3자 입장에서 소라라든지 제네틱스가 일처리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너무나 무능합니다. 만약 우리 신라그룹이었다면 그런 테러 행위쯤 진즉에 간파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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