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72화 (72/285)

72화

“자, 촬영재개 합시다!”

조현기 감독은 휘슬을 불며 어수선한 촬영장 분위기를 다잡았다. 항상 목에 휘슬을 걸고다닌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별명이 휘슬 조였다.

“액숀~!”

감독이 외치며 촬영이 시작되었다.

지난화, 나경(김수희)과 선준(신우주)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국장 겐노스케의 집을 야밤에 습격했지만, 한 동료의 밀고로 인해 미리 잠복 중이던 일본경찰의 방해로 실패하고 만다. 훗날을 기약하며 도망치던 와중에 일본경찰 하나가 나경을 향해 총을 쐈다.

그러나 그 총탄을 대신 맞아준 선준. 다리를 절뚝거렸다. 나경은 울먹이며 그를 구하고자 노력했지만 선준은 끝끝내 도움을 거부하고 동료들에게 그녀를 맡겼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선준은 고문실로 끌려가는데...

#170. 서대문형무소 고문실.

선준은 양팔을 쇠사슬에 묶인 채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겐노스케가 피투성이된 그의 몸을 채찍으로 계속 후려치던 중이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었으며 갖은 고문으로 인해 기력이 많이 소진된 나머지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겐노스케: (험악하게 윽박지른다.) 어서 말해라! 그 탈을 쓴 계집의 정체가 무엇이냐!

선준: (실눈을 뜬 채 그를 그저 비웃기만 할뿐이다.)겐노스케: 이 지독한 조센징놈!(활활타오르는 화로에서 불에 달군 쇳덩이를 꺼내서 선준의 가슴에 지졌다.)선준: 크으아아아악!

겐노스케: (쇳덩이를 지지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어서 실토해라. 지금이라도 말한다면 여기서 끝내주지.

선준: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참아내가며 겐노스케를 향해 악을 내지른다.) 어어리임없다아아아!

그 순간이었다.

숨죽이며 촬영을 하고 있던 스태프 중에서 우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던 카메라 감독이 문득 카메라에서 눈을 뗐다.

그는 혼이 나갔다 돌아온듯 여러번 눈을 껌뻑거렸다.

“뭐야. 뭐이리 찌릿해?”

“왜요?”

옆에 있던 조연출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장소에서 작업을 하다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그였다.

“갑자기 소름이 쫙 돋길래.”

“무슨 일인데요?”

“저기 봐. 저기.”

카메라 감독이 턱으로 가리키는 곳을 조연출이 돌아봤다.

그곳에는 신우주가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그는 빨려들어갔다.

“내가 죽더라도 전국방방곡곡 여기저기에서 애국계몽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깜부기불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만백성들은 우리 조선의 마지막 역사가 결코 치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며, 작렬하는 태양과도 같은 기세로 네놈들의 총칼에 절대 굴복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맞서 싸워 나가 이길 것이다! 내 비록 네놈의 목을 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지만 그래도 내 나라를 위해서 그동안 값진 길을 걸어왔으니 그것만으로도 한점 부끄럼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나마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날 죽였다고 좋아하지 말거라 이 쪽바리놈들아!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에!”

우주는 악을 질러가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격동의 구한말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우러나온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 눈물은 현장에 있던 모든 스태프들에게 퍼져갔다.

우주의 연기가 그들의 가슴을 뒤흔들어놨다. 스태프들은 실제 역사 속 그 현장에 와있는 것처럼 모두가 목이 메였다. 여성 스태프 몇몇은 구석에 숨어서 소매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가슴이 울컥한 기분으로 대사를 마친 우주는 문득 이상했다. 겐노스케 역을 맡은 상대배우가 대사를 읊을 차례인데도 불구하고 멍하니 채찍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러지...?’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그는 곧바로 애드립을 쳤다.

“어서 날 때리거라! 때려서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언정 나라를 생각하는 이 혼만큼은 네놈들도 어찌하지 못할것이니라! 뭐하느냐! 어서 때려라! 때리지 않고 뭣하는 것이냐!”

“감히 이놈이!”

찰싹!

드디어 상대배우가 정신을 퍼뜩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채찍을 때리면서도 인상을 마구 구기면서 울것만 같았다. 우주를 직접 때리는게 아니라 때리는 척만 하면서 바닥을 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조오았어!”

촬영이 끝난뒤에 조현기 감독은 쾌재를 불렀다. 장면이 예술이란다. 여성 스태프가 가져다준 휴지로 눈물을 닦던 우주를 덥썩 어깨동무하더니 귓가에 대고 슬쩍 말했다.

“우주 씨, 우리 한 화만 더 같이 하자. 이번화에 사망씬 삭제하고 살려줄게. 응?”

우주는 한때 복받쳤던 감정을 추스리느라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래도 작가 양반이 날 싫어하지 않소이까.”

“아아, 이 작가는 신경쓰지마. 내가 말하면 단번에 오케이할거야. 작가가 뭐 대수라고. 에헴.”

조현기 감독의 콧수염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매니저한테 이야기 해봐야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가서 말해볼까? 철수 씨! 김철수 씨 어딨어! 야야 빨리가서 찾아봐!"

조현기 감독은 대답도 안기다리고 서둘러 그의 매니저를 찾았다.

그 시각 김철수는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일부러 세수하러 화장실에 가있었다.

우주는 야외 한구석에 마련된 간이의자로 가서 다음 촬영 전까지 대본을 훑어볼 생각이었다. 이번 씬은 우주가 맡은 배역인 선준의 사망씬이자 이 드라마에서 자신의 마지막 촬영분이었다.

그때 사복으로 갈아입은 수희가 나타나 그룰 막아섰다.

우주는 대본을 보며 걷다가 뜬금없이 나타난 그녀를 보고 순간 멈칫하며 눈을 크게떴다.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연청색 티에 핫팬츠를 입은 그녀였다.

“아직 안갔소? 이후 촬영분엔 소생 분량밖에 없을텐데.”

그녀는 잠시 대답없이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보더니.

“나랑 연기 할땐 발연기만 주구장창 보여주더니 내가 없으니까 속편했나보죠?”

“뭐, 그랬을지도 모르오.”

우주는 말뜻도 파악않고 그저 웃어보였다.

조금 화가난 수희가 주먹으로 우주의 어깨를 한대 툭 때렸다.

“왜이리 밉상인지.”

수희는 그런 말만 뱉고는 그대로 휑하니 뒤돌아서 가버렸다.

우주가 문득 생각해보면 조금 전 그녀의 오른손에는 왠지 모를 손수건이 쥐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울다온건가?”

촬영이 예상보다 일찍 끝이났다. 조현기 감독의 말대로 예정돼 있던 선준의 사망씬이 나중으로 밀리면서 우주는 1회 분량을 더 촬영하게 되었다.

조현기 감독은 일단 선준을 살려두고 작가를 비롯해 우주의 소속사와 제작사측이 서로 합의하는대로 그를 재출연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주가 맡은 배역인 선준은 드라마상에서 한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로 그려놓기로 했다.

우주와 김철수, 강민 세사람은 종로쪽 실내포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 전에 소라에게 전화를 해봤더니 종일 수신거부가 걸려있었다.

“오늘은 포기해야겠군.”

“어딘데요?”

“그냥 아는 사람이 있소.”

“그래요? 어쨌든 자자, 마셔요 마셔들.”

철수가 술잔을 권했다.

원칙상 철수는 우주가 귀가할때까지 매니저 일을 해야했지만 우주에게 있어서 철수는 일로 만난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한사코 마다하는 것을 억지로 먹였다.

술자리가 깊어지고 우주는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물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제네틱스를 소유하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냐는 식으로 둘러서 말을 꺼냈다.

“그럼 딱 하나 방법이 있어요. 딸꾹!”

철수는 벌개진 코를 킁킁 비볐다.

“진짜 제네틱스를 먹고 싶거들랑 투자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라면, 뭐요?”

“사실 그렇죠. 우주 씨가 그 다코오 가문이 가진 지분을 돈으로 집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림없지. 에이 어림없어. 걔들이 갖고 있는 재산이 얼마인데 50년을 벌어도 못할걸요. 그러니까.”

철수는 갑자기 낄낄 거렸다.

“우주 씨가 신라그룹으로 가는거예요.”

우주가 뜬금없이 조금 놀란표정을 지었다.

“신라그룹으로 가란말이오? 소생은 가능한한 제네틱스에 남고 싶소만.”

“아니 아니, 제 얘기를 잘 들어보세요. 딸꾹. 죽어가던 제네틱스 살려준게 누군줄 알아요? 뇌물수수 의혹에 국내에서 친일기업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주가가 하루가 멀다하고 곤두박질 치던 기업을 살려준게 바로 우주 씹니다. 만약 우주 씨가 아니었다면 제네틱스는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요. 한때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죽이려 한다는 증권가 찌라시도 돌았으니까요.”

“소생은 그저 제 할일만 했을뿐인데.”

“최고로 열심히 하셨죠. 딸꾹.”

철수는 물을 한컵 들이켰다.

“어쨌든, 우주 씨가 제네틱스를 떠나면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할거예요. 거기에 라이벌인 신라그룹으로 가서 제대로된 활약만 해주면 제네틱스의 주가가 곤두박칠 치는건 당연할테고 주가가 떨어지면 투자자들도 같이 망하게 되는 겁니다. 특히나 외국 자본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아서 회사가 망하기 전에 죄다 투자금 싹 걷어가죠. 그럼 자연스레 다코오 가문 돈도 사라지지 않겠어요? 지들도 피보기 전에 떠나야지 별수 있나요.”

“신라그룹으로 가서 제네틱스가 망하길 기다리라는건 시일이 꽤 걸리는건 아닐까 하오만.”

철수가 손바닥을 폈다.

“딱 5년 예상해봅니다. 여지껏 신라그룹의 주가가 올라갈때마다 제네틱스의 주가는 항상 내려갔거든요. 늘 그래왔어요. 그러니 우주 씨는 제네틱스 주가가 바닥을 칠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똥값에 매입해버리면 그만이예요. 싹 다.”

우주는 고민을 하면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신라그룹으로 갔다간 세간의 소생에 대한 평판도 그리 좋진 못할것 같소. 게다가...”

“게다가?”

그는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소, 소라 낭자와는 헤어지고 싶지 않소.”

“하...”

놀란 표정을 짓던 철수가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럴줄 알았어요.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구나 우와 우주 씨 대단해. 어떻게 본부장님과 섬씽이 났을까. 아하하하.”

우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변명하려 애를썼다.

“사, 사귀는 사이가 아니고 그저 친구로서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거요. 크흠.”

“그렇다면 이건?”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강민이 입을 열었다.

“우주가 회사 차리고 한소라가 경영.”

“그거 좋겠다!”

철수가 눈을 크게 뜨며 손뼉을 쳤다.

“초기투자금 5:5로 해서 수익도 5:5로 나눠갖고 둘이서 회사를 경영해 나가는 겁니다. 우주 씨야 기업 경영 같은건 약할테니까 아싸리 본부장님한테 경영을 맡기고 우주 씨는 레지스트 쉴드에서 돌연변이 생물만 잡아다 주면 딱이겠네.”

하지만 우주는 혀를 끌끌찼다.

“민형이 말한 방법이 기가막히긴 한데, 과연 소라 낭자가 공감해줄지 고민이 되는구려. 아무래도 제네틱스는 소라 낭자의 부친 회사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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