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73화 (73/285)

73화

저녁 7시.

술자리는 1차에서 끝이났다.

우주는 대리운전을 이용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자신이 사는 아파트동으로 무난하게 걸어가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칫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한소민이 와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여긴 또 왜 왔소?”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이야기? 난 들어줄 이야기 같은게 없소만.”

문득 소민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어제보다 노출이 심한것 같았다. 어제는 정숙한 정장을 입고온 반면에 오늘은 짙은 화장에 상체의 볼륨을 드러내는 타이트한 나시티와 짧은 치마를 입고왔다. 외형이 예쁘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게 사람이다.

우주는 흘끔 위아래를 흝어본 후에 다시 차갑게 쏘아붙였다.

“냉큼 떠나시오. 댁 같은 사람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우, 우주 씨 잠시만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재차 멈춰세웠다. 우주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녀의 애처로운 표정이 눈안에 들어왔다.

“신라그룹으로의 이직은 생각도 안하니 괜히 시간 낭비 하지 마시오.”

“이직 때문에 온게 아니예요.”

“이직 때문에 온게 아니면 뭐하러 왔습니까?”

“......”

소민은 처연한 눈빛으로 작게 침만 삼킬뿐 말이없었다.

우주는 그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쭉 훑어봤다. 나시티의 목부분이 깊게 파인 덕분에 가슴골이 다 비치고 치마길이는 보기 불편할 정도로 짧았다. 일반 사원이면 모를까 그녀의 사회적 직위에 맞는 옷차림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한 기업의 중역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하물며 소민과 같은 위치인 한소라도 저런 옷은 안입는다.

우주는 왠지 그녀의 옷차림을 보니 뭔가 알것만 같았다.

“소생을 유혹할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시오. 아름다운 것에는 독이 있는 법. 예부터 여자는 요물이라 했고, 사내대장부는 되도록 여자를 멀리하라 했소이다. 난 보통 사람과 다르오. 천한 생각일랑 어여 접고 좋은말로 할때 냉큼 떠나시오.”

우주는 무심하게 뒤돌아섰다. 그대로 몇발자국 걷더니 삑삑삑삑삑, 자동문이 열리자 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이번에도 실패군요.”

숨어서 지켜보던 여성경호원이 다가왔다. 그녀는 소민의 어깨에 겉옷을 걸쳐주었다.

“설마 고자는 아니겠지.”

소민이 입술을 곱씹었다. 그녀의 눈빛은 아직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삼고초려라는 말이있어. 중국 후한의 유비가 천하제일 지략가인 제갈량을 얻기 위해서 그의 초옥을 세 번이나 찾아가 간청한 끝에 결국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말이지. 고자만 아니면 돼. 몇 번 하다보면 결국 넘어올거야.”

집으로 돌아온 우주는 목욕과 식사를 마치고 안방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 편하군...”

에어컨 덕분에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져 살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지났다. 료코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책상 위의 휴대폰을 집어 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죠? 사직서라도 낼 생각인가요?]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비꼬기만 했다. 여전히 화가 식지 않아보였다. 그도그럴것이 서로 안좋게 헤어진 뒤로 첫 통화였다.

우주는 침대에 곧게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대뜸 진지하게 물었다.

“왜 소생에게 세이비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소.”

[세이비어요? 갑자기 그게 왜 나와요?]

“고릴라팀이 전멸하던 날 밤. 세이비어가 전에 없이 발광했다고 들었소. 왜 그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거요.”

[그건 일부러 안해준게 아니라 할 필요성을 못느껴서 그랬던겁니다. 말을 똑바로 하세요.]

소라의 목소리는 당당해보였지만 조금 흔들렸다.

우주는 다시 물었다.

“왜 못느낀거요?”

[우주 씨와 세이비어가 무슨 관련이 있는 줄 알고 말을 해주나요? 우주 씨가 회사 임원이라도 돼요?]

너무도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 우주도 조금 뿔이났다.

“소생이 회사 임원이 아니니까 그래서 소민 낭자를 만나고 온거요. 알겠소?”

[아, 그래요? 만나서 어땠나요? 좋았어요? 그래서 이직할려구요?]

“그렇소. 그럴까 생각중이외다. 소민 낭자는 소라 낭자처럼 땍땍 거리지도 않고 상냥하게 말을 잘해줬소이다. 그러니 서로 말도 잘통하는 것 같고 기분이 아~주 좋았소이다. 어험!”

뚝.

그대로 전화가 끊겨져 버렸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갑자기 전화가 끊기자 우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허, 참!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나!”

기가 막혔지만 이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이 지나가고 그녀가 다시 받았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 걸어요?]

“왜 전화를 끊는거요?”

[말 잘통하는 한소민한테 전화하라고 끊었죠.]

“낭자가 먼저 비꼬기에 일부러 그랬을 뿐이외다.”

[내가 언제 비꼬았다고 그래요. 나 하나도 비꼰적 없는데요?]

이렇게 유치하게 싸우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우주는 화난 톤 그대로 말을 돌렸다.

“그 일본인과는 대체 무슨 관계요?”

[일본인? 무슨 일본인이요?]

“날 죽이려 했던자 말이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황한 소라가 눈알을 굴렸다.

[그, 그 놈과 제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래요? 왜 갑자기 생사람 잡아요?]

“내 나름대로 조사해보았소이다. 그 자의 이름은 이시다 신타로. 이시다 신타로를 다코오 가문에서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했소이다. 헌데, 다카오 가문은 제네틱스의 대주주로서 경영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오? 그런데 그들이 왜 대체 이시다 신타로를 보내 소생을 죽이려한것인지 그게 궁금하오. 소라 낭자는 정말 아는게 없는것이오?”

[저, 전...!]

소라는 당황했다. 우주가 너무도 정확하게 핵심을 잘짚고 있었다.

‘어째서 그가 알고 있는 거지? 젠장!’

그녀는 그저 아무말도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 마침내 료코가 떠올랐다.

‘이시다 신타로는 죽기 전 쿠로가네 료코를 만났던 거야! 빌어먹을 새끼...!’

입술을 깨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우주는 재차 물어왔다.

“정말 모르셨소이까?”

[전...]

나직이 묻는 목소리가 짓누르는 압박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건 그냥 넘겨 짚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확신을 갖고 꺼낸 이야기일 터다.

‘한소민을 만난 이유도 설마 날 의심했기에?’

그리고 그녀의 대답여하에 따라 점점 모든 진실이 밝혀지면서 신세기 프로젝트가 물건너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라는 요즘 연애감정에 빠져 신세기 프로젝트를 뒷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올인 해버렸다. 그녀에겐 우주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

우주는 잠시 말이없었다.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낭자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대신, 지금이라도 모든 사실을 말해주면 안되겠소?”

[크흑...!]

소라는 갑자기 목이 메였다. 그가 사라질 것 같았다. 모든 사실을 말하면 그는 떠날 것이다. 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모든 것을 기대게된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유일한 안식처가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아버지에게 매일 쫓기다시피 사는 삶뿐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가슴은 그를 애타게 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떠나지 않소.”

[정말이죠?]

“남아일언중천금. 사내대장부는 두 번 말하지 않소.”

[알겠어요.]

소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다코오 가문은...’

하고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기죽은 듯이 조심스레, 그러나 또렷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허어, 그런일이...!”

우주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점점 굳어져만 갔다. 일본 내 우익은 1차세계대전 시절의 일본을 찬양하면서 제국주의를 부활시키고 전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하시도루는 신세기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우주 씨를 죽이는게 목적입니다.]

이윽고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고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우주는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츠다이라의 봉인을 푸는 것이 그들의 첫번째 목표란 말이오?”

[네...]

“봉인은 평양 시에 있고?”

[평양 교외의 대성산성이라는 유적지에 묻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라는 목소리를 떨었다. 우주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녀는 이젠 정말로 그 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배신하면서까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을 본인도 깨닫고 있었고 마치 패륜을 저지른 것처럼 무서운 기분이 들고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죠? 제네틱스를 떠나실건가요...?]

“떠나긴. 늘 해왔던 대로 지낼 생각이외다.”

[이대로 제네틱스에 남아 있겠다구요?]

“그렇소.”

우주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소라 낭자. 신세기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해주시오.”

[어째서요?]

그녀가 조금 놀란 목소리를 냈다.

[신세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우주 씨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마츠다이라가 깨어나면 우주 씨를 가만히 내버려 둘것 같아요?]

“그거야 뻔히 알지만 소생은 마츠다이라를 만나고 싶소.”

[마츠다이라를 만나겠다니요?]

“내 손으로 직접 마츠다이라를 깨워서 그를 죽일 작정이오. 그가 죽는 모습을 이 두 눈으로 지켜보겠소.”

[......!]

소라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침대에 누워 전화를 받던 우주는 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개만도 못한 천인공노할 자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오. 다시는 일본 우익들이 제국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지 못하도록 그들의 첫번째 목표를 철저히 깨부숴 줄 생각이외다. 소생은 이래봬도 한때 일본군에게 악귀라 불리우던 자요. 쉽게 죽지 않소이다. 그러니까 소라 낭자. 염려말고 신세기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주시오.”

그리고 또 말했다.

“그런데, 그동안 신세기 프로젝트를 왜 진행하지 않은거요?”

소라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는 정색하더니 새침하게 대꾸했다.

[흥. 딱히 우주 씨를 위한건 아니었거든요?]

우주는 피식 웃었다.

“알겠소. 그리고 소라 낭자도 솔직하게 말을 해주었으니 소생도 하나 밝힐게 있소이다.”

[뭐를요?]

“세이비어 있잖소? 그 여성이 어쩌면... 소생이 100여년 전 헤어졌던 여동생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강하오.”

[설마요!]

소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크게 놀랐다.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게해준 레지스트 쉴드를 만들어낸 세이비어가 신우주의 여동생이라니?! 이것은 실로 대단한 사실이었다.

“아직은 그저 감이긴 하오만, 그래서 부탁이 있소.”

우주는 왠지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츠다이라를 죽이고 나면 그때는 세이비어를 향해서 나아갔으면 한다오. 지금처럼 잡다한 임무가 아닌 오로지 세이비어를 위한 임무를 소생에게 주시오.”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비어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애초에 인류의 호기심이었다. 기업의 이익과 부합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될것이 분명했다.

[알겠어요 우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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