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76화 (76/285)

76화

그동안 우주는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씩 토크클럽에서 채팅을 해왔다. 일전에 만났던 ‘대갈공주’란 아이디를 쓰는 여성과 몇달에 걸쳐 친분을 쌓아왔고, 이제는 서로 편하게 대화할 정도로 상당히 친밀해져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는 두 사람이 아직 서로에 관해서 모르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서로의 이름과 직업, 전화번호였다.

우주는 유명인이었기에 함부로 타인에게 신상을 고백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그의 로드매니저인 철수도 신신당부 했다. 연봉 200억을 받는 신우주가 채팅을 해서 여성을 만난다는 사실이 세간에 소문났다가는 아주 우스갯거리가 될테니까 말이다.

이름을 숨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우주가 의아해할 정도로 그녀 역시 이름을 묻거나 밝히지 않았다. 그저 ‘일격님’이라고만 불렀다.

[대갈공주 : 저 어제부터 여름 휴가예요. ^^!]

[선수필승일격필살 : 정말이오? 소생도 휴가를 받았다오.]

[대갈공주 : 와, 축하해요. 이런 우연이!! ^^!]

[선수필승일격필살 : 그러게 말이오. 역시 대갈 낭자와 소생과는 뭔가 통하는게 있는것 같소이다. 휴가기간에 뭘할지 계획이라도 세워둔 것이 있소이까?]

[대갈공주 : 또 일이죠 뭐... 저 투잡 뛰잖아요. ㅜㅠ 일격님은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소생도 투잡이라면 투잡이외다. 그렇다보니 휴가가 휴가가 아닌것 같소.]

[대갈공주 : 그래도 전보다 시간은 좀 남죠?]

[선수필승일격필살 : 남긴 하외다. 하나 그 다른 일 하나가 시간이 불규칙해서 정해놓고 뭘하기가 힘들긴 하오.]

우주는 내심 그녀의 직업을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을 숨겨야 하니 이야기를 어찌 꺼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직업을 밝히면 자신도 밝혀야 하니까.

[대갈공주 : 음...]

[대갈공주 : 음......]

[대갈공주 : 음..........!]

[선수필승일격필살 : 대갈 낭자?]

[대갈공주 : 아니예요^^; 뭔가 목까지 넘어올라 그랬는데 쉽지가 않네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무슨 말인데 그러오? 심각한 거요? 아니면 도움이라도 필요한게요?]

[대갈공주 : 그런건 아니구요. 간단하다면 간단한거고 어렵다면 어려운거예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거 뜸들이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오. 보는 소생이 답답하구려.]

[대갈공주 : 이 참에 한번 만날까... 요?]

‘허!’

뜻밖에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왔다. 우주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채팅상에서만 이루어지던 만남이 실제로 이어지는것인가!’

대갈공주는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번쩍 드는 생각이 ‘과연 만나도 될까?’ 였다.

[선수필승일격필살 : 소생도 만나고 싶긴 한데...]

[대갈공주 : 싫어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싫은게 아니라...]

자신이 그 유명한 ‘신우주’ 라는 사실을 알면 그녀가 당황하지나 않을까? 자신의 정체를 알고나서 앞으로 그녀가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선수필승일격필살 : 소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자신있소?]

[대갈공주 : 사진 보내줄래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

[대갈공주 : 사진 안돼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갑자기 사진 말이오?]

[대갈공주 : 미리 못생긴 얼굴을 눈에 익혀둬야 실제로 만났을때 충격이 덜할것 같아서요 ^ㅁ^!]

[선수필승일격필살 : 하하하! 크게 웃엇소. 역시 대갈 낭자가 던지는 농은 사람을 유쾌하게 한다오. 소생이 냉큼 보여주리다!]

우주는 무심코 윈도우 탐색기를 켰다. 자신의 사진이 담긴 폴더를 클릭했다.

촤르륵.

수천장의 사진이 보인다. 그런데 모두 화보용으로 멋진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들 뿐이었다.

평범하게 찍은 사진이 없었다.

수수하게 찍은 사진이라도 있으면 보내주기가 쉬울텐데, 화려한 사진을 본 그녀가 기죽지나 않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우주가 사진 폴더를 보면서 수분간 고심하는 사이 윈도우 작업표시줄에서 채팅창에 글이 올라왔다고 깜빡거렸다.

그는 Alt키를 누르면서 Tap키를 눌러 화면을 채팅창으로 전환했다.

[대갈공주 : 낯선이에게 사진 보내기는 역시 어렵죠? 사진은 안보내줘도 돼요. 직접 만나서 보죠 뭐.^^!]

[선수필승일격필살 : 만나기는 좀...]

[대갈공주 : 인터넷에서 만난것도 인연인데, 그렇다고 매일 채팅에서만 볼순 없잖아요. 현실에서도 가끔 소주 한잔하며 서로 연락하고 지내요. 네? 나오실꺼죠? ^^m]

‘오오 과감하도다!’

여자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한때 그가 살던 시대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남자인 자신이 계속 빼서야 되겠는가. 여자도 이렇게 하는데 남자인 자신이 두려워 해서야 되겠는가!

우주 역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선수필승일격필살 : 만납시다.]

[대갈공주 : 헉!! 진짜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그렇소. 언제 시간 되오? 소생은 내일도 가능하오.]

[대갈공주 : 저도 내일 일 없어요. 잘됐다. 말 나온 김에 내일 당장 만나기로 해요. +_+/]

두 사람은 내일 저녁 6시 홍대역 9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대갈공주가 홍대 근처에 친구가 하는 음식점이 있으니 그곳으로 데려가서 밥을 사준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우주의 소속사 아테나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우주는 탁자에 A4용지 200장을 쌓아놓고 소파에 앉아서 열심히 사인을 하던 중이었다.

“흐음...”

50여장 넘어가니 손목이 아파왔다. 잠깐 손목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니 실장은 책상에 앉아서 앱플패드로 오디션 동영상을 감상 중이었고, 두 여직원은 제각각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거나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네에.”

상냥하게 통화를 마친 한 여직원이 사무실 가운데에 앉아있던 우주를 보며 말했다.

“홈데리아 불고기 버거 세트 점심까지 200개 가능하답니다.”

“다행이구려. 주문해줘서 고맙소.”

우주가 미소지었다. 그리고 눈앞에 훈남을 두고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캔콜라는 무료래요.”

“좋은 소식이오.”

우주는 지난번 드롭존에서 만났던 인상공전 여대생들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원이 190명이나 되는 항공운항과 학생들을 한번에 만나서 일일이 사인을 해주고 밥까지 사주기는 어려웠고, 이왕이면 쉬운 방법을 택했다. A4용지에 사인을 한장씩 해준 뒤 오늘 점심에 홈데리아 불고기 버거 세트 하나씩 돌리기로 했다.

배달은 소속사 직원들이 할것이다. 본인이 직접 찾아가기에는 일만 시끄러워질테니까.

“다들 배불리 먹고 공부 열심해서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들이 되어주면 좋겠군.”

묵묵히 동영상을 감상중이던 실장이 입을 열었다.

“기사로 내보낼까요? ‘신우주, 인상공전 항공운항과 학생들에게 점심을 쏘다!’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던 여직원이 대신 대꾸했다.

“실장님. 요즘 그런 기사 냈다간 생색낸다고 오히려 욕먹어요.”

“하하, 그건 다 수가 있지~ 기사 맨끝줄에 ‘신우주는 이번 일이 알려지길 원치 않아했다’ 는 식으로 갖다 붙이면 그만이야. 안그래요 우주 씨?”

“내 박실장의 마음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건 아니라고 보오.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게 좋을 것 같소이다.”

“우주 씨가 그렇다면야, 할 수 없죠.”

그때 사무실 밖에서 여러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짙은 화장에 화려한 복장을 한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9명의 소녀가 소파에 앉아있던 우주를 보자마자 꾸벅 인사를 했다. 이들은 최근 아테나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시킨 신인 여자 아이돌 그룹 ‘글로리아’ 였다.

생기넘치는 소녀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조용하던 실내가 활기찼다.

“좋은 아침이오.”

우주는 밝게 한번 웃어주고나서 다시 사인을 시작했다.

글로리아 소녀들은 박춘삼 실장 책상 앞으로 가서 일렬로 섰다. 모두 뒷짐지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공중파 첫데뷔니까 실수하지 말고 잘들해. 만약 실수하면 당황하거나 티 내지 말고 모른척 하란 말이야.”

또다시 사무실 문이 열렸다. 소녀들을 태우고온 철수가 뒤늦게 들어왔다.

그는 신우주를 보자마자 찰싹 달라붙어 앉았다.

“사인중이셨어요? 아라한테서 편지 가져왔는데.”

“편지를 보내왔소이까? 얼른 줘보시오.”

철수가 건네는 편지를 받았다.

노란색 바탕에 귀여운 갈색 곰이 여러 마리 그려진 편지 봉투였다.

우주는 흐뭇한 마음으로 당장 편지를 뜯어서 읽어보았다.

집도 구해주시고 학원도 보내주신 친절한 아저씨에게.

얼굴도 모르는 분에게 편지를 쓰려니까 먼저 어떤 말을 써야할지 고민이 됩니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우선은 절 뒷바라지 해주시는 아저씨께서 혹시나 제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실까 하여 제 하루 일과를 적어볼까 합니다.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납니다. 그때 씻고 밥먹고 나서 7시부터 공부를 합니다. 공부는 12시까지 해요. 그동안 아파만 있다가 오랜만에 공부를 해서 그런지 지루하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그리고 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 갑니다. 학원에서 집에오면 저녁 7시가 돼요. 그렇게 집에서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10시쯤 잠이 듭니다.

이게 제 하루 일과에요. 너무 간단해서 적을것도 별로 없네요.

솔직히 저는 너무 궁금합니다. 아저씨께서 어떤 연유로 절 보살펴 주시는 걸까요? 이것이 실례되는 질문이라면 너그러이 봐주세요. 하나 뿐인 오빠를 잃고 나서 망연자실했던 저에게, 절 생각해주시는 아저씨의 존재는 너무도 커다란 힘이 됩니다. 마치 오빠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어 아저씨와 제가 어쩐지 가족같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래서 더욱 알고 싶습니다. 제가 예전에 아저씨와 만난적이 있었을까요?

2010년 8월 12일 저녁 김아라 올림.

우주는 편지를 다 보고나서 고이 접어 봉투에 다시 넣었다.

철수가 그를 쳐다봤다.

“답장 보내실거죠?”

우주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아니오 뭐... 굳이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안보내시게요? 아라가 무척 서운해할텐데.”

“그건 알지만...”

우주는 김아라가 홀로 독립할 수 있을때까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뒤에서만 있고 싶었다. 그녀가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편지를 써준건 고마운 일이었으나 이게 습관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이런식으로 쭉 이어지다보면 나중에는 만나자고 할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답장을 써주지 않다보면 자연스레 편지도 뜸해질 것이라고 우주는 생각했다.

오전에 소속사 사무실에서 사인만 하며 시간을 보내던 우주는 오후에는 철수와 함께 연기학원에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5시 30분.

대갈공주와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 미리 나와 있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변장은 꼼꼼히 했다. MLB모자에 뿔테 안경을 쓰고 일부러 더벅머리 가발까지 쓰고 나왔다. 더해서 감기 예방용 흰 마스크까지 썼다.

어쩌면 행인이 볼때 수상한 범죄자처럼 보일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홍대역 9번 출구 앞에서 혼자 두리번 거리고 서 있다보면 지나다니는 젊은 여성들이 자신을 피해서 멀리 돌아가는 기분도 들었다.

“후후, 변장은 완벽해.”

우주는 안도의 미소를 띄웠다. 그렇잖아도 어제 저녁에 흰 마스크를 쓰고 기다릴 것이라고 대갈공주에게 미리 말해두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붉은 스카프로 입을 가리고 오겠다고 알려줬다.

“이 더운 날씨에 스카프라...”

우주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이 시대 패션이겠지하며 대충 넘어갔다.

“후우...”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설렘과 두근거림이 높아져만 갔다.

시계를 봤다. 어느새 5시 50분. 20분이 순식간에 지나간 기분이다.

처음 만나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속 고민을 했다.

“아, 아, 아, 안녕하시오?”

입으로 소리내서 말해봤다. 그런데 너무 긴장했는지 더듬거렸다.

“휴, 큰일이군. 긴장을 좀 늦춰야겠어. 진정해라 신우주.”

5시 55분.

만남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이젠 아무 생각도 못했다.

초조하다보니 머릿속이 복잡하고 심란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근처를 지나가던 어떤 젊은 남성이 갑자기 길을 멈춰섰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아뿔사! 들켜버렸는가!’

우주는 당혹스러웠다.

곧바로 그 남성의 외침.

“기, 김수희다!”

알고보니 그 남성은 자신을 가리켰던 것이 아니고 자신의 뒤를 가리킨것이었다.

“김수희? 그 처자가 왜 여기에...?”

우주는 멍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남성이 가리켰던 여성은 환호를 지르는 인파속에 순식간에 파묻혀 버렸다.

“수희 누나 사인해주세요!”

“언니 예뻐요!”

“비켜보라구 안보이잖아!”

“손이라도 잡아주세요! 손!”

“야, 너! 대가리 치우라고! 머리는 조또 큰게 왜 여기와서 난리야!”

행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리면서 9번 출구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우주는 몰려드는 인파에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반강제적이었다.

‘하필 김수희 저 처자 때문에 이게 뭐람! 일할때도 그렇고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케 하는군! 이곳에는 왜 온것인지!’

우주는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되도록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변장을 점검했다.

시계를 봤다. 6시 5분. 벌써 6시가 지났는데도 대갈공주가 올 기미는 전혀 안보였다. 아무래도 김수희 때문에 이 근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길을 뚫기가 쉽지 않은것 같았다.

“빨리 가라 좀...”

우주는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조금 짜증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와줄까도 싶었지만 약속이 먼저였다. 또 그녀도 수라니까 알아서 잘 처신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니! 같이 사진 찍어주세요!”

“수희 씨! 나랑 우리집으로 갑시다!”

“언니 성형했죠! 한거죠? 한거죠?!”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던 김수희는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홀로 인파를 헤쳐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저멀리 사라져 버렸다.

“다행이군. 이제 어서 와줬으면......”

그녀가 떠나고 난뒤 거리는 다시 한산해졌다. 오고가는 행인 속, 길가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던 우주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6시 51분...”

주변을 둘러봤지만 대갈공주가 하고 온다던 스카프를 걸친 여성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해가 가라앉고 달이뜨고 저녁 7시가 넘어 밤 9시가 되도록 그녀는 결국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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