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쯤되자 더는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신을 바람맞힌 그녀에게 내심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갑작스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서로 연락처를 모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화만 낼 수만은 없었다. 먼저 왜 못왔는지 사정을 듣는게 순서였다.
“부팅아 빨리 되라. 부팅아 빨리....”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PC를 켰다.
토크클럽에 접속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화신청이 날아왔다.
수락했다.
[선수필승일격필살 : 대갈 낭자 어찌 된거요? 큰일이라도 생겼던게요?]
[대갈공주 : 많이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꼭 만나고 싶었는데...... ㅠㅠ]
[선수필승일격필살 : 사정을 말해보시오.]
[대갈공주 : 갑자기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전화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서로 전화번호도 모르고, 옷도 안갈아입고 계속 PC 앞에서만 기다리고 있었어요......ㅠㅠ]
[선수필승일격필살 : 그렇소이까......]
우주는 그 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꾹 참았다.
반면에 무려 네시간을 밖에서 혼자 뻘쭘하게 서 있다오니 서로의 이름, 직업, 전화번호를 숨겨야 하는 관계가 슬슬 짜증이 났다.
[선수필승일격필살 : 대갈낭자.]
[대갈공주 : 네?]
[선수필승일격필살 : 전번이라도 알려주시오.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생기거든 연락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오.]
[대갈공주 : 그건 그런데......]
[선수필승일격필살 : 부담되오?]
[대갈공주 : 부담되기보다는 전화 받기가 조금 부끄럽네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오해마시오. 정 급한일이 아니라면 함부로 전화 걸일은 없을 거요.]
[대갈공주 : 그래도 좀......]
[선수필승일격필살 : 허허, 참 답답하구려. 그럼 이건 어떻소.]
우주는 채팅창 메뉴에서 ‘사진 올리기’ 를 클릭했다. 하드디스크에 있는 사진을 고르라는 탐색기 창이떴다.
사진폴더를 찾아서 자신의 사진을 아무거나 클릭해서 채팅창에 올렸다.
[경성의여무사 촬영 현장에서1.JPG 파일이 전송되었습니다.]
채팅창에 사진이 작게 떴다.
수희는 작은 사진을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익숙한 복장과 사람들이 보였다.
“뭐지......?”
클릭해서 사진을 확대했다.
“음?”
사진에는 신우주, 김철수, 강민 이렇게 세 사람이 1930년대 경성 세트장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희는 사진을 보낸 의도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갈공주 : 이 사진이 왜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가운데에 있는 신우주가 소생이오.]
[대갈공주 : ?]
모니터 앞에 앉아있던 수희는 놀라서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거짓말! 일격님이 그 얄미운 신우주라고?”
얼른 자판을 두드렸다.
[대갈공주 : 농담하지 마요. ^^ 이 사진 인터넷에서 퍼온거 다 알아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진짜올시다. 소생은 거짓말은 하지 않소.]
[대갈공주 : 일격님이 신우주면 전 김수희 해야겠네^^;]
[선수필승일격필살 : 왜 사람 말을 못믿소. 안되겠군. 목소리 확인시켜줄테니 연락처를 알려주시오. 소생이 신우주가 맞는지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테니.]
[대갈공주 : 그래요 그럼.]
라고 대답했지만 수희는 순간 멈칫했다.
“만약, 정말로 신우주가 아니면 어쩌지?”
인터넷상에서 친하게 지낸다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자신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기가 좀 애매했다. 실제로 볼기회가 앞으로 또 언제 있을지 모르는데다가 대한민국 탑여배우 김수희가 채팅으로 남자를 사겼다는 기사라도 떠봐라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을것이다.
그녀는 손을 주저하다 이내 자판을 두드렸다.
[대갈공주 : 일격님이 신우주면 김수희랑도 친해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그건 글쎄올시다.]
[대갈공주 : 글쎄라니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그 처자는 기가 쎈 편이오.]
[대갈공주 : 그래서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다른 사람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합시다.]
[대갈공주 : 네. 다른거 물어볼게요. 제 친구의 친구가 아는 사람이 현재 신우주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거든요? 본인이 정말 신우주라면 매니저 이름이 뭐예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김대리.]
[선수필승일격필살 : 아니 김철수요. 김철수.]
우주가 재빨리 대답하자 수희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대갈공주 : 신우주의 코디는......?]
[선수필승일격필살 : 강민.]
강민은 워낙 얼굴도 작고 모델체형이라서 그런지 여성 코디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한때 수희의 코디가 그에게 호감을 갖고 강민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매일 입에 달고 사는 통에 수희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대갈공주 : 잘아시네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이래도 못믿소?]
[대갈공주 : 믿어요. 믿는데......]
[선수필승일격필살 : 소생은 오늘 대갈 낭자를 기다리느라 이 무더운 날씨에 홀로 네 시간이나 밖에서 서 있었소. 조그만 기다리면 낭자가 오겠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훌쩍 네시간이나 지나버린 거요. 하지만 낭자에게 화는 나지 않았소. 화가 나기 보다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지 걱정 하는 마음이 더 컸단말이오. 진즉에 연락처를 알아둘걸 하면서 후회를 많이 했었소이다.]
[대갈낭자 : 많이 힘드셨죠...... 미안해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미안하면 연락처를 알려주시오. 이제 안볼 것도 아니고 앞으로 또 만나기로 약속할텐데 지금 아나 그때 아나 차이가 있겠소?]
[대갈낭자 : ......]
수희는 우주의 설득에 못이겨 마음이 약해졌다. 게다가 정말로 신우주가 맞는지 확인도 해보고 싶었다.
[대갈낭자 : 010-75XX-50XX 이거예요......]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마자 곧바로 휴대폰이 울려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휴대폰을 뚫어지라 바라보면서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평소와 목소리를 다르게 하면서 조심스레 받았다.
“여보.. 세요?”
[소생이오. 어떻소? TV에서 보던 신우주와 목소리가 똑같지 않소이까?]
처음의 어색함을 감추려 그러는지 몰라도 활기차 보이는 우주와는 달리 수희는 조금 목소리를 떨며 나직이 답했다.
“조선시대 말투는 인터넷상에서 일부러 그러시는줄 알았더니, 정말로 말투가 그랬었네요......?”
그녀는 속으로 그가 신우주 라는 것을 확신했다.
놀라웠다. 가슴이 쿵쾅 거렸다.
어찌해야 할바를 몰랐다.
그래서 뚝.
무심결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더 이야기했다가는 자신이 김수희라는 사실을 들킬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금세 전화가 걸려왔다.
당황한 그녀는 아예 밧데리를 빼버렸다.
[선수필승일격필살 : 왜 전화를 끊었소?]
[대갈공주 : 번호 확인했으면 됐잖아요. 저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겠어요.]
[선수필승일격필살 : 아아, 그런게요. 하기야 여인은 수줍음을 타야 여인답소. 내 더는 전화 안하리다. 그럼 대갈낭자.]
[대갈공주 : 네......?]
[선수필승일격필살 : 이만 하면 내가 신우주라는걸 믿소?]
수희는 조금 고민을 하다 대답했다.
[대갈공주 : 아직 못믿겠어요. 직접 봐야 알것 같아요. 혹시 신우주 하고 이름만 똑같은건 아니죠?]
[선수필승일격필살 : 허허 참! 뭐 좋소. 이럴바에 그냥 빠른 시일내로 약속을 잡고 만나봅시다. 그땐 꼭 나와주길 바라오. 알겠소?]
[대갈공주 : 네......]
수희는 PC를 껐다.
한동안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채팅으로 만난 사람이 그 밉상 신우주였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앞으로 촬영장에서 신우주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볼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진짜 널 어떻게 보니 이제...”
수희는 우주를 떠올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간 채팅으로 알고지내던 사람이 알고보니 신우주였단다. 환장할 노릇이다. 머릿속에 계속 신경이 쓰여서 오늘 저녁을 챙겨먹었다가는 어쩌면 소화제를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녀는 민망하기 이를데 없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상 참 좁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 작품 후기 ============================
이번화는 연참이라기보다는 공지를 할겸 덩달아 썼습니다. 오늘 00시 연재는 없어요!
다음화는 1화씩 냈다가는 독자분들 속터질것 같아서 2~3회 연참으로 내야할 것 같아요!!
쿠폰주신분 추천주신분 코멘달아주시는분 평점주시는분 선작해주시는분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힘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