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78화 (78/285)

78화

소민이 우주에게서 받은 상처는 이루말할 수 없이 컸다. 며칠간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딘가 넋이 나가보이던 그녀는 결국 다 된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그룹 내 임원들은 큰 계약을 놓친 소민의 행동을 이해못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그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남자가 생겨 임신을 했다거나 마약을 한다는등 괴상한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신라그룹 회장 이선주의 삼성동 자택.

매일 아침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아침 식사 자리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소민은 그녀의 어머니를 앞에 두고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단 두 사람 뿐인 자리에서 이선주는 불쑥 소민에게 비행기 티켓을 내밀었다.

“일주일간 유럽에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렴.”

소민은 식탁 위에 올려진 비행기 티켓을 힐끗 보더니 이선주를 바라봤다.

“올해는 휴가갈 생각이 없어요, 어머니.”

“무리해서 일하다간 몸 상한단다. 푹 쉬어줄 때도 있어야 해.”

이선주가 휴가를 다녀오라는 의도야 뻔했다. 일에 대한 과욕이 넘쳐 딸에게 실수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임원들의 불신이 들끓는 시점에서 딸이 회사에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비난 여론이 잠잠해질때까지만 해외로 나가 머리를 식히고 오라는 뜻이기도 했다.

“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소민은 내심 분했다.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면서도 모든게 신우주 탓이라며 그를 원망했다.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진 비행기 티켓을 무슨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에게 당했던 그때가 떠오르며 단숨에 이가 갈렸다.

“개자식!”

이선주는 깜짝 놀라 수저를 멈췄다.

“소민아?”

“네?”

“너 방금 그게 무슨 소리니?”

소민은 퍼뜩 정신이 들며 순간 당황했다. 눈앞에 어머니가 있었다는걸 깜빡 잊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하고가 아니라.”

이선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여태껏 자라오면서 속 한번 썩이지않고 무난하게 커준 딸이 부모 앞에서 욕설을 내뱉다니?

어딘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차갑게 말을 뱉었다.

“오전에 당장 유럽으로 떠나거라.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앞으로 회사 일에 절대 손도 못대게 할테니 알아서 하거라.”

“어머니!”

당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한 소민은 분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출국장으로 향하는 동안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 상태가 갈수록 위태로워 보였다.

“너만 아니었으면, 신우주 너만 아니었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현란한 도심의 밤거리. 홀로 마트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료코에게 누군가 따라 붙었다. 그녀는 모른척 앞을 보고 계속 걸었다.

뒤따라오던 사내는 그녀의 귀에 들릴 정도로만 조용히 말했다.

“(쿠로가네 님을 일본으로 모셔오라는 하시도루 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

료코는 인적이 드믄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잠자코 뒤따라왔다.

그리고 그가 깜깜한 골목안으로 들어선 순간, 한줄기 섬광 같은 칼날이 번뜩였다.

료코는 서슬퍼런 칼날을 그의 목에 겨눈 채 살벌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이번 한번뿐이다. 하시도루에게 가서 다시는 날 찾지말라 이르거라.)”

사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대꾸했다.

“(쿠로가네 님은 변하셨습니다. 제가 하시도루님께 들어온 쿠로가네 님은 이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직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서 앞장 섰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분이 조센징의 첩이라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옵니다. 100여년 전 함께 싸우다 죽어간 동료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네이놈, 그 입 다물라!)”

료코의 호통에도 그는 기죽지 않고 말했다.

“(거리로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왜 남의 땅에서 혼자 유카타를 입고 계신겁니까? 다들 쿠로가네 님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곳이 일본이었다면 달랐을 겁니다.)”

료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내는 목에 들어온 칼을 경계하며 아주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당신을 낳아준 나라는 일본입니다. 부디 조국을 배반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런 말을 남긴 채 사내는 이내 사라졌다.

료코는 어둠속에서 칼을 늘어뜨린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주와 함께 사는 이유에 대한 변명을 찾지 못하겠다.

또 그러면서도 등 따습고 배부르자 이제와 변해가는 자신이 싫었다. 처음에는 그저 살기위해서 세상과 타협했건만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자 점점 생각이 달라져 가는 것 같았다.

료코의 고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면서 자신을 혐오했다. 잠시나마 흐트러졌던 자신을 채찍질 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느덧 9월 중순에 접어 들었다.

그동안 우주는 2주간 팀장 교육에 다녀왔다. 앞으로 그가 맡게될 팀을 위해서 꼭 이수해야만 했던 교육이었다.

또 그와 마찬가지로 윤혜진 역시 자진해서 교육을 받게되었는데, 그것은 맹수의 정비 교육이었다. 몇주전 소라에게서 신우주 팀의 창단 소식을 듣고 은밀하게 영입 제의를 받은 그녀는 혼쾌하게 수락을 했고 우주의 팀에서 맹수를 수리하는 정비공 보직을 맡기로 되어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취재진과 일반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오늘은 신우주가 이끌 ‘악어팀’ 런칭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몰라몰라몰라♪ 오빠 너무너무 좋아♪ 미치겠어 정말♪]

야외무대에서 걸그룹 글로리아의 축하 무대가 끝난 후 이내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회견장에는 소라를 중심으로 좌우에 신우주, 강미라가 앉아 있었다.

“(전략)세이비어를 목표로, 신우주 씨의 악어팀은 사탄 공략을 주된 임무로 맡게 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소라의 말이 끝난 후에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사회자가 발언권을 줬다.

“뉴스몬스에서 나온 강철호 기자입니다. 그간 신우주 씨나 강미라 씨처럼 우수한 수라를 데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우리나라 역시 사탄 공략을 시도 했던 기업은 많았습니다만 그 어느하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있어 하는 것은 악어팀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다는 것입니까?”

“예. 물론 있습니다.”

소라가 자신있게 대답하며 좌측에 설치된 작은 무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자주빛 장막이 쳐져있었다.

소라가 손가락을 딱 튀기자 곧바로 무대 장막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웅장한 스케일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오오!”

장막이 완전히 걷히자 객석이 술렁이며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소라는 그 어느때보다 더욱 도도하고 자랑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저희 제네틱스의 미래형 파워드 슈트, 맹수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한동안 맹수에 관한 사양(Spec) 설명이 쭉 이어졌다.

기자들은 대한민국 최초로 개발된 파워드 슈트를 신기해하면서 카메라에 담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두분. 맹수를 착용해주십시오.”

소라의 말에 우주와 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측의 작은 무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옷걸이에 걸린 옷처럼 주인을 기다리는 맹수 앞에 서더니 그대로 등을 내맡겼다.

지이잉, 척!

척척 자동으로 휘감기는 기계 소리가 들려오면서 두 사람의 전신을 맹수가 감쌌다.

이윽고 육중한 기계를 완전히 몸에 두른 두 사람은 SF 영화에서나 봄직한 미래의 로봇 병사 같았다.

“최곱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객석에 있던 어떤 남자는 로봇에 관한 남자의 로망이 비로소 실현됐다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친구와 손을 꼬옥 맞잡은 채 지금부터 제네틱스 입사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그 와중에도 소라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맹수는 생각해서 조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워드 슈트 내부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압력감지 장치가 부착되어 있으며 이 장치가 착용자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 힘을 수십배로 증폭시켜서 하려는 일을 그대로 해줍니다. 덕분에 착용자는 맹수를 제어하려고 애쓸 필요없이 오직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소라는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시선을 좌측 무대로 향했다.

“우주 씨, 미라 씨, 시작해주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주와 미라가 제각각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다음 손등의 덮개가 열리며 개틀링포가 나왔다.

총신이 기자와 관객석 쪽으로 향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개중에 지레 겁먹은 사람들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달아나려고까지 했다.

제일 앞자리에 있던 기자가 당황한 눈초리로 소라에게 물었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걱정마세요. 보시면 아실겁니다.”

소라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퍼버버버벙! 무대 뒤쪽에서 쏴 올려진 폭죽이 상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우아아아아!”

여의도 불꽃 축제를 방불케하는 광경에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동시에 우주와 미라의 개틀링건이 허공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투다다다다다다다!

“......!?”

허공에 주먹보다 작은 고무공이 흩뿌려졌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순간 주춤거렸으나 이내 바닥에 떨어진 고무공을 주워든 누군가가 그 안을 열어봤다.

그는 대단히 기쁜 표정으로 소리쳤다.

“와! 주말 영화 무료 관람권이다!”

이어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고무공을 주워대기 시작했다.

“패밀리 레스토랑 50%할인권도 있어!”

“아싸! 백제호텔 커플 숙박권이야!”

“난 제주도 2박 3일 여행권이라구!”

소라는 그 모습을 보며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후, 하여튼 서민들이란 귀엽다니깐.”

그녀는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제네틱스에서 신우주의 악어팀과 맹수가 태어난 날입니다! 다 같이 기뻐해주십시오!”

같은 시각 신라그룹 소민의 집무실.

소민은 인터넷 생중계로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속이 쓰렸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들의 파워드 슈트가 세상에 먼저 나왔어야 했다.

‘개발을 조금만 더 빨리했었더라면...!’

거기에 더해서 환하게 웃고있는 우주를 보자니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저 위선자!”

죽이고 싶었다.

“난 이토록 괴로워 죽겠는데 어째서 저녀석은 처웃는 거지?!”

와장창!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을 한쪽으로 쓸어버리면서 컴퓨터며 서류철들이 그대로 바닥에 내팽게쳐졌다.

소민은 씩씩거리며 어질러진 방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했다.

“본부장님!”

밖에 있던 그녀의 여성수행원이 황급히 뛰쳐들어왔다.

소민은 여성수행원을 보자 다가오지 말라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오지마, 난 괜찮으니까.”

여성수행원은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소민이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다.

그날, 신우주에게 성추행을 당한 이후부터 소민은 정서적으로 불안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 겁탈 당했어...’

당시 소민은 돌아가는 차안에서 문득 그런 말을 내뱉었다.

여성수행원은 처음에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룸미러를 통해 그녀의 넋나간 표정을 보고 금세 깨달았다.

자신의 주인은 겁탈당한 것이 분명하다고.

경찰에 신고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대기업 회장의 딸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 이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없었다.

남들의 시선을 어떻게 감당하랴?

소민은 아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현 자리에서 물러나려 할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이선주 회장에게 보고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랬다가는 차기 회장직을 노리는 소민의 자리가 위험했다. 최근 신라그룹 이선주 회장은 모기업 60대 회장과의 염문설이 은근히 퍼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회장에게는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만약 이선주 회장이 재혼을 하게되면 앞으로 후계자 구도가 어떻게 변할련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현재.

여성 경호원은 정신 사나워보이는 소민을 향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신우주를 한번 만나볼까요?”

소민이 소리질렀다.

“만나서 어쩌게!”

“본부장님께 꼭 사죄토록 만들겠습니다.”

“필요없어! 난 그 놈을 죽일거야! 그래야만 속이 후련해질것 같으니까!”

그로부터 일주일 후.

쾌청한 날이었다.

한소민, 김수희, 우연진이 참석한 가운데 내외신 취재진 앞에서 신라그룹의 중대발표가 이루어졌다.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사탄에 대항하는 최종 병기. 신라그룹의 파워드 슈트 샥스핀입니다!”

샥스핀. 이제 막 완성단계에 이르려던 파워드 슈트였다. 하지만 소민의 강행으로 인해 신라그룹은 벌써부터 꺼내들었다.

이렇다할 테스트 하나 없이 미완성 단계인 슈트를 당당히 대중 앞에 선보이며 소민은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이 자리를 빌어 제네틱스 경영운영본부장 한소라 씨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신라그룹과 제네틱스 중에 누가 더 빨리 사탄을 잡아내는지 내기를 하는건 어떻겠습니까? 샥스핀과 맹수, 어느 파워드 슈트가 훨씬 성능이 뛰어난지 전세계인에게 확실히 보여주자는 이야기입니다. 아셨지요?”

그녀의 도발적인 발언에 현장에 있던 모든 관객을 비롯해 TV를 시청하던 사람들이 흥분으로 들썩였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집무실에서 TV를 보던 소라만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미친년이 돌았나.”

사람 목숨이 오가는 현장에서 무슨 게임도 아니고 내기를 하겠다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발언 배경이 궁금도했다.

“저게 갑자기 왜 저럴까. 약을 잘못먹었나?”

다시 샥스핀 런칭 현장.

소민은 우연진과 김수희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이들이 사탄을 잡아주면 한소라와 신우주 둘다 몰락하는건 순식간이었다. 일을 더욱 크게 만들어서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지금 뵈는게 없었다.

런칭행사가 끝나고 나서 이선주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딸이 한 발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최근 계속 너 답지 않구나.]

“신중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제네틱스를 꼭 쓰러뜨리고 싶습니다. 객기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대신 이번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영영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이길테니 부디 이 딸을 꼭 믿어주세요.”

============================ 작품 후기 ============================

맹수와 샥스핀에 관한 그림이 작품 설정란에 올려져있습니다.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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