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79화 (79/285)

79화

이선주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서 소민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 싫어! 하지마!”

그녀는 악몽을 떨쳐 내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다시 눈을 떴다.

맨처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그를 먼저 유혹했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까지 주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길거리를 나가봐라. 배꼽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이 죄다 몸을 주고 싶어서 그럴까?

그녀들은 단지 잘 가꾼 몸매를 당당히 드러내며 타인의 시선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원하고 탐하고 갈구하는 타인의 눈빛.

소민은 그러한 타인의 심리를 일에 적용하려 했다.

신우주가 자신을 원하게 만든 뒤 계약서를 작성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을 싸구려 여자 취급까지 했다. 그의 본심은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평소 작은 가슴이 컴플렉스였던 그녀다. 그런데 그것을 신우주에게 들켜버린것도 모자라 유두까지 빨렸다. 그의 혀가 움직이던 감촉이 몇날며칠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치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 험악한 세상을 모르고 지내온 성격이니 충격이 더 했다.

오죽했으면 여지껏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그녀였는데 이번 일로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고 매사에 기가 죽어버렸다.

신우주 덕분에 남자 유혹하는 일은 절대 할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것이었다.

또한 신우주가 유명인이 아니었더라면 그나마 분노가 덜했을텐데 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어딜가나 신우주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 끔찍한 기억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

그에게 범해진 피해자라 생각하는 소민에게는 더할나위없이 미치고 답답한 세상이었다. 어디가서 호소하고 싶어도 그럴 처지도 못 돼고 혼자 속만 타며 미치도록 환장할 것 같았다.

끙끙 앓고만 있던 생각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자 슬픔은 증오가 되었다.

신우주를 보지 않으려면 그가 죽는 수밖에 없었다.

소민은 빨리 신우주가 죽어주길 바랐다.

[이름 신우주. 팀명 악어. 당신은 팀장입니다. 오늘 주어진 임무는, 없습니다. 팀장 임의로 수행하십시오. 다음으로 악어팀에게 지급된 파워드 슈트를 착용할 두 명의 인원을 선발하여주십시오.]

우주는 1번과 2번 버튼을 눌렀다.

[1번 신우주, 2번 강미라 맞습니까?]

‘확인’ 버튼을 눌렀다.

우주는 임무를 위한 준비를 끝마친뒤 전방주둔지 광장으로 나왔다.

언제나 형형색색의 슈트를 입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장소다.

사람들을 가로질러 악어팀의 집결장소로 향하던 도중 사복을 입고 있던 임현주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검은색 라이더 자켓에 청바지, 거기에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슈트가 아닌 사복차림이라니 의외였다.

“누님 어찌된 일이오? 왠 사복?”

“뉴스 못봤나?”

“뉴스에 무슨일 있었소?”

“하하. 이 자식 실망인데 이거.”

임현주는 장난스레 헤드락을 걸었다.

“니는 이 누님 소식이 궁금하지도 않다는 거냐 응?”

“으윽! 요즘에 바쁜 나머지 통 TV를 보지 못해서 말이오. 대체 무슨일이있었소?”

“음. 하긴 네놈이라면 TV 보기도 쉽지 않을만큼 바쁘긴 할꺼야.”

현주는 순순히 헤드락을 풀었다. 무릎에 양손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는 우주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 이직한다. 오늘 이직 관련 공식 기자회견이 있지.”

“뭣이오? 누님 이직하오?”

우주는 크게 놀랐다.

반면에 현주는 정말로 후회 없다는 듯이 후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그러기로 했다.”

“어째서 이직을 한단 말이오? 회사와 트러블이라도 있었소?”

“우후후. 그런건 없다. 단지 보수와 근무 환경이 마음에 들어 가는것 뿐이지.”

“어디로 가는거요?”

“오성그룹.”

“오성그룹이라면 미라 낭자가 있던곳 아니오?”

“잘아는구나. 맞다.”

사실 제네틱스는 오성그룹 강미라를 영입하기 위해서 임현주를 끼워팔았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현주 본인은 불만이 없었다. 기라성 같은 수라가 많은 제네틱스에서 만년 후보로 남기보다는 오성그룹처럼 한단계 아래 수준의 기업으로 가서 잘나가는 주전이 되고 싶었다. 더욱이 오성그룹은 그녀에게 기존보다 30억 상승한 연봉 100억원을 제시했다. 올해 32세의 나이에 해가 갈수록 기량이 줄어드는 것을 감안하면 더없이 좋은 대우였다.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것저것 하나둘 정리하다보니 정신이 없더군. 이해하지?”

“물론 이해하오. 누님이 본래 연락 자주하고 알뜰히 챙기는 그런 인물은 아니잖소.”

“하하하.”

“모쪼록 거기가서도 잘되길 바라오.”

“암, 그래야지.”

“어차피 이직해도 광장에서 자주 보긴 할텐데 그래도 다른 회사로 간다니 많이 아쉽긴 하구려.”

“여기도 그러냐?”

현주는 우주의 고추 부분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우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누님도 참.”

“언제 또 한번 해야지. 안그래? 씩씩하게 말이야. 씩씩하게.”

그녀는 툭툭 치던 주먹을 펴더니 그의 고추를 능글맞게 어루만졌다.

슥슥.

“어이, 누, 누님.”

우주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람들 오가는 곳에서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엉덩이를 슬쩍 뒤로뺐다.

“사람들 본다오.”

“보라구 해. 뭣하면 지금 화장실에 가서 해줄까? 어때?”

그녀가 장난스레 하는 말에 우주도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황송할 따름이오. 그럼 누님 기자회견은 째는거요?”

“기자회견이 대수야? 간만에 그곳에 쌓인 거미줄 좀 걷어내겠다는데.”

그 말에 우주는 웃음폭탄을 터뜨렸다. 정말로 못말리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몸짓을 지어보였다.

“역시 누님은 못말리겠소.”

“음담패설로 날 따라오려면 넌 아직 멀었어.”

현주는 남은 웃음을 다 토해내고 우주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사탄 공략이 쉽지 않을텐데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말아라. 내가 항상 응원하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

“누님도 오성그룹 가서 최고가 되길 바라오. 그리고 만약 이 동생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시오. 바로 달려가리다.”

“응. 고맙다.”

전방주둔지에서 멤버 전원의 소개를 겸해 브리핑과 장비점검을 철저히 끝마친 악어팀은 곧바로 레지스트 쉴드로 떠났다.

우주는 악어팀을 이끌고 예전 북한의 철원군으로 향했다.

철원군은 레지스트 쉴드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돌연변이 생물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본격적인 사탄 공략에 앞서 당분간은 훈련을 해야만 했다. 팀원 간의 호흡을 맞추는 것과 자신과 강미라가 맹수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은 탱커 모드(Tanker Mode) 시험을 하겠다.]

맹수를 착용한 우주는 등에 매달린 방패를 집어들었다. 은빛깔을 띠는 방패의 전체적인 모양은 카이트 쉴드와 흡사했다.

[병정놀이 하는 기분인데요.]

우주 옆에 서있던 미라가 손에 쥔 방패를 보며 큭큭 웃었다.

[악어 5로부터 1과 2에게. 포인트 06-33에 돌연변이 생물 한 마리 발견.]

[종(種)은?]

[타이탄 고릴라 같다.]

[타이탄 고릴라?]

우주는 얼결에 되물으면서 잠시 고민했다. 타이탄 고릴라라면 호랑이급이다. 맹수 초보자 딱지도 못뗀 마당에 토끼급도 아닌 호랑이급을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타이탄 고릴라는 돌연변이 생물 중에서 사탄을 제외하고 가장 힘이 쎈 녀석이었다.

그는 즉시 미라를 돌아봤다.

“낭자 조용히 후퇴합시다.”

“어라? 안 잡으실 거에요?”

그녀는 잡고싶어 하는 눈치다.

“타이탄 고릴라는 좀 더 경험을 쌓은 뒤에 잡도록 합시다.”

“으음...... 대장님께서 그러라면 따르죠. 근데 왠지 아까워라~”

미라는 순순히 수긍하면서 방패를 도로 등에 매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쿵!

조작이 익숙치 못했는지 0.5톤짜리 방패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이런.”

미라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주우려고 했다.

그때 다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악어 5로부터 1, 2에게! 타이탄 고릴라가 그쪽을 향하고 있다!]

미라가 떨어뜨린 방패의 진동이 타이탄 고릴라의 주의를 끈것이 틀림없었다.

“이크, 실수 했네.”

미라는 살며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어두운 숲속을 헤치며 타닥타닥 거리는 네 발 달린 짐승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앞발과 뒷발이 땅을 차는 소리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이동할 때 두 발만 사용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악어 1로부터 모두에게. 정비사만 남기고 전원 무장을 한 채 서둘러 06-30으로 이동하라!”

우주는 어쩔 수 없이 타이탄 고릴라를 잡기로 했다. 호랑이급인만큼 인명 피해의 우려가 있었지만 여기서 도망쳐봐야 더 큰 피해만 야기시킬 뿐이다. 그도 그럴것이 후방에 있는 작전지휘차량과의 거리가 겨우 100m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미라가 능청스레 물었다.

“잡으시기로 한거에요?”

“잡겠소.”

우주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멋져라.”

미라는 이어 와아우 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두근 거리는 표정으로 좌우 손가락을 풀기 시작했다.

[악어 7로부터 1, 2에게. 만약을 대비해서 가능한한 한 분씩 교대로 탱킹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맹수가 파손됐을 시 교대로 수리 받을 수 있도록요.]

정비사로 보직을 변경한 하나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지난 한달 간 회사에서 교육을 받고 맹수 정비 자격증을 땄다. 아직은 기초적인 과정에 불과했지만 맹수를 만든 과학자인 전지연의 밑에서 나날이 일취월장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미라 낭자. 소생이 먼저 탱킹을 맡겠소. 낭자는 팀원들이 도착하면 그들을 경호하다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교대해주길 바라오.”

“네, 알겠습니다.”

우주와 미라는 곧 맞닥뜨리게 될 타이탄 고릴라를 잠자코 기다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방패와 총을 든 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제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타닥, 타닥.

마침내 발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타이탄 고릴라는 상당히 열심히 뛰어왔고 그 때문에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오!”

우주와 미라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3미터 크기의 타이탄 고릴라는 아주 잽싸고 날렵하게 그들을 덮쳐버렸다.

두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피하자 타이탄 고릴라는 미라를 쳐다보았다. 머리통만한 거대한 주먹을 들어올려서 그대로 그녀를 후려쳤다.

“크윽!”

방패로 겨우 막았다지만, 발이 지면에 끌리며 뒤로 밀릴정도로 그 힘이 매우 강력했다.

“후오후오후오후오오오오오!”

타이탄 고릴라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한번 주먹을 강하게 내리쳤다.

콰앙!

이번에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미라의 방패가 크게 찌그러질 정도로 압도적인 괴력이었다. 이어 다른 주먹으로 미라가 입은 맹수의 오른쪽 어깨 장갑을 후려쳤다.

쿠웅!

“꺄악!”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공중으로 솟구쳐 50여 미터를 날아갔다.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지며 모래먼지를 꽃피웠다.

[악어 2! 악어2 들리는 가!? 악어2!]

타이탄 고릴라는 육중한 덩치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다. 이 모든게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당했다는 말이 맞았다.

먼저 기세를 잡은 타이탄 고릴라는 뒷발로 서더니 이빨을 드러내고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후오우후오우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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