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87화 (87/285)

87화

<5권>

“수희 씨라면 아직 병원에...”

우주는 말끝을 흐렸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혼수상태인 그녀와 주연을 맡으라니, 조현기가 취해서 허언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걱정 마! 곧 깨어날테니까!”

조현기가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면서 신우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봤자 혀가 꼬여서 그렇게 무거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가 봤을때 우주 씨랑 수희 씨는 증말 잘 어울려. 두 사람이 한 화면에 잡히면 시청자들이 콩닥콩닥 한다니까.”

“그럴리 있겠소.”

우주는 그저 웃어버렸다.

“어어? 웃어 넘길게 아니야.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냐믄, 시청자들이 두 사람을 보고 감정이입 200% 되면서 여자들은 자기랑(신우주) 연애하는 기분이 들고, 남자들은 수희 씨랑 사귀는 기분이 들고 막 그런다니까. 시나리오가 필요없어, 시나리오가. 화면 안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그런다니까.”

“설마 그렇겠소. 무슨 마법도 아니고.”

우주는 피식 웃으며 젖가락을 들었다. 김치를 밥 위에 얹고 집어 먹었다.

씹으면서 말했다.

“수희 낭자가 깨어나거든 이야기합시다.”

조현기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럼 할거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렸다.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깨어나기란 쉽지 않다. 듣기로는 뇌에 손상까지 입었다고 알고 있었다.

“하겠소.”

취한 사람 기분 맞춰줘야지, 괜히 안한다했다 큰일 나겠다.

조현기가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활짝 웃어보였다.

“음, 좋았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드라마는, 자네가 대기업 회장 아들이야. 그런데 매일 직원들한테 ‘이게 최선입니까? 세상 살기 편해요?’ 하면서 싸가지 없게 구는 놈이지. 그리고 수희 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우주가 밥을 먹는 동안 조현기는 침을 튀기면서까지 드라마에 대한 포부를 주구장창 떠벌렸다.

이윽고 낄낄거리며 듣고만 있던 조현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휘슬 조. 가자.”

“어? 벌써 가게? 나 이야기 안끝났어.”

“시간 없어 인마. 너 이설희 작가 만나러 간다며.”

“아, 그렇지 그렇지. 근데 술 먹어서 괜찮으려나.”

“언제는 술 안먹었다고 그래. 이 작가가 너때문에 하소연을 하더라. 이빨이라도 닦고오게 해달라고.”

조현상의 말에 조현기는 큭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소생도 이만 가봐야겠소.”

우주도 밥먹다 말고 덩달아 일어났다. 다른 연기자들도 모두 일어났다.

“우주 씨, 우리 약속한거 잊지마? 어기면 꼬추 때야 해?”

우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현상도 떠나기 전 우주를 보며 말했다. 그는 어째서인지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난 수희 씨보다 현아 씨랑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

우주가 조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우주를 가리켰다.

“CF 잊지마요. 약속한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떠났다.

조현상과 조현기 두 사람에게 있어서 우주는 보배였다.

신우주로 인해 각각 CF와 드라마에서 더 나은 명성과 돈을 얻을 수 있었다. 조현상은 오딧세이X CF를 찍은 이후로 광고 업계에서 마이더스라 불리며 다양한 회사에서 의뢰가 자주 들어오기 시작했고, 조현기는 최근 시청률 30%를 돌파하면서 연봉에 인센티브가 붙었는데다 경성의여무사 중국 수출까지 노리게 되면서 추가적인 부수입도 짭잘하게 챙길뻔 했다.

김수희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저... 안녕하세요.”

우주 홀로 밥을 먹는데, 장례식장으로 들어 오기 전 입구에서 자신을 도와주던 덩치 큰 사내가 주뼛주뼛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우주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반갑소. 아까는 도움 많이 받았소이다.”

“그거야, 뭐. 헤헤. 그리고 그... 전 연진이 형 매니저 김승필이라구 해요.”

김승필은 덩치에 안 맞게 어색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혼자 장례식장을 찾은 신우주가 고마워서 말상대를 해주러 온것이었고, 그가 밥을 다 먹을때까지 자리를 지켜줄 생각에 온 것이었다.

우주가 정중히 자리에 앉으라며 권하자, 김승필이 길다란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았다.

우주가 물었다.

“식사는 하셨소?”

“아까 먹었습니다. 저, 차린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우주는 한 번 생긋 웃더니 밥을 입에 넣고 씹었다.

삼키고나서 말했다.

“고생이 많으오.”

“고생은요 무슨. 친형처럼 잘해주던 연진이 형이라서 당연히 해야죠. 아, 술은 드세요?”

“마시긴 하는데 차를 가지고 와서 먹을 수가 없소.”

“그럼 콜라라도 따라드릴게요.”

김승필이 빈 종이컵에 콜라를 따랐다. 그걸 우주 앞에 조심스레 두고 말했다.

“오늘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연진이 형도 기뻐할거에요.”

우주는 그저 살며시 웃어보였다.

이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주는 주로 우연진에 관해 묻고 들어주는 편이었고, 김승필은 옛날 일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다 문득 우주가 꺼냈다.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니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연진 도령은 혹시 조직재생공학연구소에 투자 안했소이까?”

“아, 그거요.”

김승필은 말하는 저의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했죠. 연진이 형이 얼마나 괴짜였는데요. 우연진 5명으로 이루어진 파워레인저를 만들어서 지구를 지키겠다라든지, 우연진 11명으로만 구성한 축구단으로 메시랑 호날두 발라버리겠다고 하면서 얼마나 시끄러웠다구요. 그래서 신청했는데.”

“했는데.”

김승필은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더니 이내 밥상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연진이형 어머님하고 누님은 복제시키자고 하는데, 한 번 떠난 혼은 다시 불러올 수 없다면서 아버님께서 완강히 반대하고 계세요. 복제한 형은 자식이 아니라면서...”

“그렇소이까.”

“원래 장례식하려면 지난주에 했어야하는데 늦어진 이유도 그거예요. 어머님하고 누님이 장례식 하지말고 복제 기술을 받자고 울고불고 난리치느라 못하고 있던거죠.”

낮 12시.

우주는 밖으로 나왔다.

취재진들을 피해 돌아갈때는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김승필의 차가 근처에 있어서 그 차를 타고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곳까지 올 수 있었다.

“다음에 밥 한끼 합시다. 고맙소.”

“꼭 전화주세요. 우주 씨를 만나서 가문의 영광이었어요.”

김승필의 차가 언덕으로 사라지고 나서 우주는 그제야 발걸음을 뗐다. 자신의 아반떼로 가서 차유리를 통해 먼저 안을 살펴봤다.

다행히도 있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봐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오래 기다렸소?”

느긋하게 운전석 문을 열면서 신우주가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가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귀청이 따가웠다.

“빠, 빨리! 빨리 화장실로 가요!”

오랫동안 차에만 갖혀있다보니 오줌이 마려운가 보다. 차안에 올라탄 우주는 근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이라면 저쪽에 있잖소.”

“저기 말구요!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소민은 울먹이며 죽을상을 지었다. 소피를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우주를 보며 짜증을 내고 원망하며 심지어 그를 때리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급해보였다.

그녀를 위해서 최대한 액셀을 밟았다. 신라병원을 빠져나와 근처 초등학교에 차를 세웠다. 다행히도 그곳에는 야외화장실이 구비되어있었다.

소민이 급하게 자리를 비운동안 우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한소민과 엮인 것이 골치 아팠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고추를 함부로 놀린 것을.

이윽고 소민이 볼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녀가 차에 탔다.

우주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소?”

그러자 소민이 울상을 지으면서 구두를 벗고 무릎을 감싸안았다.

“시, 싫어요. 안가요.”

우주는 그저 답답한 한숨만 푹 내쉬었다.

오후 1시.

우주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 PC를 켰다.

소민이 걸린 대인기피증의 해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볼 요령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토크클럽에 접속했다. 대갈공주가 며칠째 접속을 안해서 그는 상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접속일은 9월 15일 저녁 10시 20분.

그날 저녁도 이야기를 잘만했는데, 어느새 지금은 9월 24일.

‘신우주라고 밝혀서 그런가?’

대갈공주는 채팅 상대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일까?

우주는 본명을 밝힌 것을 깊이 후회했다.

아쉬운 마음에 쩝, 거리며 토크클럽을 껐다.

내심 언제든 좋으니 꼭 다시 와주길 바랐다. 너무나 달라진 세상에 적응 못해서 끙끙 앓고 있을때, 매일 밤마다 그녀와 이야기 할 수 있었던게 큰 도움이 되었고, 따뜻한 위로가 되었었다.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꼭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서 보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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