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89화 (89/285)

89화

그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그런 말을 왜 하는거야.)”

“(언젠가는 해야될 이야기였습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박필모와 사치코에 관한 이야기를 절대 입밖에 꺼낸적이 없었다. 서로가 잘지내기 위해서 암묵적인 양해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료코는 최근 그에게 마음이 점점 이끌렸고, 그에 비례해서 사치코에 대한 죄책감이 짙어져만 갔다.

‘사치코......’

그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어도 그녀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근심이 쌓여만가고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오죽했으면 우주의 얼굴을 볼때마다 사치코가 떠올랐을까.

그리고 마침내 우주의 아기를 낳고 평온한 삶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던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이제 그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고 싶었다.

“(아기를 갖게 되면 싫으나 좋으나 소녀의 몸은 죽을때까지 주인님의 것. 그리고 소녀는 주인님께 몸을 의탁할 당시 굳게 맹세했던 다짐마저 지금에 이르러서는 창밖의 비처럼 흐릿해졌사옵니다.)”

“(나를 죽이겠다던 다짐말이냐......?)”

료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했던 제 각오는 주인님께 사랑받고 평온한 삶을 누려오는 동안 하나씩 잊혀져만 갔습니다.)”

그녀는 양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지만 저와 주인님이 맺어지게 되면 주인님의 친구분과 제 단짝이었던 사치코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두 사람을 살해한 것은 바로 우리였고, 그랬던 우리가 행복해지겠다는 욕심은 야만적이고 비열하며 가증스러운 두 얼굴처럼 보인다는 자괴감마저 들었사옵니다.)”

료코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봤다.

“(그래서 여쭙고 싶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동료를 살해한 제게 주인님의 아기를 낳게 하여도 저처럼 죄책감을 받지 않으시옵니까? 친구분께 죽도록 미안하단 생각이 안드시옵니까?)”

료코가 강한 어조로 따지듯 물어왔지만, 그래서 더욱 티가 났다. 그녀는 사실 그가 죄책감이 안 든다고 말해줬으면 싶은 것이다.

다 잊고 우리끼리 도망치자고.

그럼 그녀 또한 용기가 생겨 우주를 따라올 것 같았다.

“후우...”

우주의 굳었던 표정이 풀리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그 한숨이 똑똑히 들릴 정도로 주변이 한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장소에 두 사람만이 있는것 같았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있어.)”

나와도 한참 전에 나왔다.

친구에게 미안한 료코와 달리, 애석하게도 우주는 전혀 죄책감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료코와 달리 여전히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는 중이냐 하면, 그에 대한 설명은 예전 한소라와의 대화에서 옅볼 수가 있다.

“집을 하나 얻어주시면 되겠네요. 돈도 많이 벌기 시작했으니까.”

“그건 무리요.”

“왜요?”

“그녀가 행여 나쁜 길로 빠져서 예전처럼 내 적으로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감당하기 어렵소. 곁에 두고 지켜보는 편이 제일 속편하오.”

“혹시 길들이는 중?”

소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인하진 않겠소. 그녀가 같은 일본인을 만나는 것도 사실 염려되오. 일부 일본인들의 속된 야망은 지금도 계속되고 전혀 반성할 줄 모르고 있소이다. 만약 료코처럼 수준 높은 실력을 가진 자가 일본의 우익 단체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것도 큰일이오.”

료코를 붙잡아두는 일이야말로 나라에 애국하는 일이었다.

료코처럼 무시무시한 검 실력을 가진 수라를 일본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료코가 임신하기를 원했고, 그의 집에 계속 남아주길 바랐다.

따라서 우주는 박필모를 배신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심하게 말해서 적을 노예로 삼아 부리고 있는데다, 100여년 전 그가 이끌었던 청년단에는 당시 이런 말이 돌았었다.

‘왜놈들이 조선 여자를 마음대로 겁탈하고 있다! 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복수해야해! 우리도 왜년들을 모조리 잡아다 강간해서 임신시키자고! 여기저기에 조선인의 씨앗을 뿌려주잔말이야!’

일부러 이 말을 의식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주는 이미 실천하고 있는 중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100여년 전 우주의 동료가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아주 잘했다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박필모에게도 죄책감을 갖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정이 무섭다. 일도양단 하던 그도, 날이 갈수록 마음이 약해져만 갔다. 자신에게 헌신하는 료코가 점점 사랑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굳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서로 미운 감정으로 사느니 차라리 사랑을 나눔으로서 첩으로 삼고 아기를 낳으면 오히려 잘된 일이니까 말 다했다.

자신으로 인해 료코가 진정으로 한국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행여나 다코오 가문이 찾아온다해도 남편과 자식을 둔 그녀가 섣불리 그들을 따라갈 수나 있을까? 그녀의 성격으로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좌우지간 우주가 생각할때, 신우주 하나만 믿고 이국땅에서 생활하던 료코가 차츰 솟아나는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스스로 자괴감이 든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 또한 료코가 좋아지고 있었으니 료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죽은 친구에게 든다는 죄책감마저 다 공감할 수 있었다.

“(네가 살해했던 사람은 나와 친형제처럼 지내던 형이었다. 만약 그가 지금 이 앞에 있다면 넌 무슨 말을 하고 싶지?)”

료코가 마른 입술을 뗐다.

“(죽을 죄를 지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물론 나 때문이겠지? 넌 내 형제와 안면조차 없었고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니까. 그저 나 때문에 미안해서 말이야.)”

“(네......)”

료코가 쥐죽은듯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우주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때의 네 친구가 지금 내 앞에 있다면 사죄하고 싶어.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네가 내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러고 싶은 거야. 이해 하겠어?)”

“......”

우주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료코의 앞으로 가서 양손을 맞잡았다.

그녀를 그네에서 일으켜 세웠다.

애틋한 눈빛으로 마주보자 료코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소중했던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죄책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들도 그것을 바랄거야. 하지만 여전히 죄책감이 남는다면 앞으로 해마다 한 번씩 떠난 두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사를 지내주자. 최대한 성대하게 말이야. 박필모 마라톤 대회라든지 사치코 배 일본요리왕 경연대회를 여는 거야. 그럼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이 두 사람을 기억해줄것이고 그렇게 되면 네 마음도 좀 편안해질거라고 생각해. 어때?)”

“(주인님...!)”

료코는 가슴 깊이 감동 받았는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내 눈물 한 방울이 뺨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료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우주는 참지 못하고 료코를 따스하게 끌어 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체취를 한껏 들이마셨다.

“(힘들어 하지마. 같이 이겨 나가는거야.)”

“(물론이옵니다.)”

“(날 위해 아기도 낳아주고.)”

“(당연하지요. 꼬옥 낳겠습니다. 꼬옥......!)”

이로써 두 사람은 꽃봉오리만 맺혔던 꽃이 활짝 펴지는 것처럼 전보다 진한 애정을 꽃피우게 되었다.

더구나 우주는 완전히 료코를 갖게되었다는 기쁨에 한 가지 걱정을 덜 수 있어 더 없이 좋았다.

료코는 이제 자신의 편이었다.

***

“부끄럽지도 않아요? 왜 껴안고 있어요?”

옛스승과의 해후를 마치고 돌아온 소민이,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우주와 료코를 보자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정색하면서 투덜거렸다.

“서로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장소는 가려가면서 하시지.”

우주는 료코와 떨어지면서 신기해하는 눈으로 소민을 바라봤다.

“드디어 괜찮아진거요?”

“뭐가요?”

“장소를 가려가며 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이제 사리분별을 좀 하는것 같소.”

하지만 기대와는 반대로 소민은 폴짝 뛰며 우주의 품에 안겨들었다.

“괜찮아 지긴요! 나만 쏙 빼놓고 둘이서만 포옹하고 그러니까 싫어서 그랬죠!”

소민은 우주의 가슴에 뺨을 비벼대면서 고양이가 행복에 겨워 웃는 표정을 지었다.

“이따가 우리 아방궁에 가면 또 해줘야 돼요. 난 섹스가 제일 좋아. 안심이 돼. 히힛~!”

“......”

우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

[사탄에 관한 자료는 제 클라우드에 저장해놨어요. 친구 공유폴더에 있으니 거기서 다운받으시면 돼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중국과 러시아의 사탄 공략에 관한 정보를 일일이 수집하고 깔끔하게 번역한 뒤, 자신의 클라우드 계정에 올려두었다고 말했다. 우주가 시킨 일도 아닌데 그녀가 알아서 해준 것이었다.

기특했다

가, 아니라.

우주는 조금 걱정되었다.

강미라가 일전에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대장님은 유하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하나 낭자 말이오? 그냥 팀원이오만?”

“하지만 그녀는 그게 아닌가 봐요.”

우주는 하나를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어려웠다.

신중해야만 했다.

하나는 자신이 이끄는 악어팀의 일원인데다, 날 좋아해주지 말란 말 한마디로 팀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일이었다.

“자료 잘보겠소. 고맙소이다. 하나 낭자. 이만 전화 끊겠소.”

[앗, 잠시만요. 잠시만!]

“음? 왜 그러시오?”

[저기...... 엊그제 속은 괜찮으셨어요?]

“아, 괜찮았소. 그때 소생이 너무 마셨지 뭐요. 팀장이 돼서 팀원들을 끝까지 챙겨주지 못할 망정 먼저 가버려서 미안하더이다. 그리고 하나 낭자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소. 소생을 대신해 흑기사인지 뭔지를 해줬다고 매니저가 말해주더이다.”

[들었어요?]

“들었소. 그때 날 살려줘서 고맙소이다.”

[에헷, 뭘 그런걸 갖구요.]

하나의 목소리 톤이 급 밝아졌다.

[저 그때, 우주 씨 대신 술을 마셔주고 저도 토하고 죽을뻔 했어요. 다음날 저녁때까지 못일어났거든요.]

“허허, 지금 몸은 괜찮소?”

[지금은 좀 나았어요.]

“어쩐지, 다음날 팀원들한테 전화를 다 돌렸었는데, 하나 낭자는 어머님께서 전화를 받으시고는 몸이 좀 안좋아 자고 있다고 하셨었소. 그게 소생 때문이었군.”

참고로 우주는 그 당시 강미라에 관한 소식도 소라에게서 전해 들었었다. 하지만 큰 일없이 잘 처리되었기에 굳이 미라를 만날일은 없었다.

하나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부탁? 뭐든 말해보시오.”

의리남 우주는 하나가 자기 때문에 고생했다고 생각하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어서 사양말고 말하시오.”

[그럼 저...... 영화 좀 같이 봐주셨으면 하는데...... 괜찮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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