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92화 (92/285)

92화

***

우주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맹수의 장갑은 모조리 다 부서지고 산산이 조각나 허공에 흩날렸다. 코앞의 위기를 간발의 차로 벗어난 미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아... 아아, 아아...!”

그녀는 말이 안나왔다.

이내 털썩 하고 바닥에 떨어진 우주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바닥을 적셔갔다.

“대장 정신차려! 대장!”

팀원들이 달려가서 흔들어보지만 죽은 사람처럼 반응이 없었다.

미라에게 있어 유일한 낙이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좌우로 뒤흔들었다.

“싫어, 싫어, 싫어!”

목 안쪽이 바짝바짝 말라 붙는다.

구역질이 날것 같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지원조의 무전 알림은 끊이지 않았다.

[남은 시간 1분 입니다!]

미라가 문득 깨닫자, 눈앞에는 사탄이 버티고 서있었다.

“니놈이...! 니노옴이!”

그녀는 이를 앙다물었다.

난폭하게 숨을 내쉬면서 저 사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탄이 발을 차올렸다.

퍼억!

차여서 날아간 미라는 단숨에 소나무 몇 그루를 부러뜨린 뒤 풀숲에 처박혔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몸빵은 내가 선다!”

미라가 맥없이 당한 상황을 목격한 성일이 다급하게 사탄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쓰러진 우주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부랴부랴 퍼지기 시작하였다.

풀숲에 처박힌 미라는 몇초간 침묵해있더니,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맹수의 손상은 경미.

하나 강한 충격 때문인지 그녀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구. 네까짓게 감히.”

그녀는 실성한듯이 킥킥 웃더니 곧바로 사탄을 향해 내달렸다.

“우아아아아!"

팍 하고 땅을 차 공중에 뛰어 오르더니 그대로 쿵 하고 사탄의 뒷발 부근에 착지했다.

사탄은 성일을 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 있던 미라가 두 팔을 뻗어 사탄의 발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당황한 성일이 소리쳤다.

“뭐해 미라 양! 이리오게나!”

미라는 듣질 않았다. 그녀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신장 30m의 거대한 사탄을 들어올리기라도 할것인지 미라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넘어가랏, 넘어가랏! 넘어가라아아앗!”

[200% POWER]

[300% POWER]

[400% POWER]

[500% FULL POWER!]

[경고!]

[경고!]

[경고!]

맹수의 완력 수치가 한계에 도달하자 웨어러블 글래스에서 경고 박스가 대문짝만하게 뜨며 급하게 깜빡거렸다.

[미라 양! 그만! 그만 피하게나!]

맹수 2호기의 상태를 눈여겨본 성일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다. 성질이 난 미라는 어떻게 해서든 사탄을 쓰러뜨릴 작정이었다. 그녀는 이제 매일 밤마다 우주의 동영상을 보고 잘 수 없다는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 모든게 다 이 놈 때문이다.

“다시 살려내. 다시 살려내라구!”

미라는 즉시 맹수의 가슴팍 뚜껑을 열어 파워제어플러그를 해제해버렸다. 그녀가 뽑아낸 두 개의 호스가 흰연기를 내뿜으면서 이리저리 춤을 췄다.

[경고!]

[경고!]

[500% POWER]

[600% OVER POWER]

[700% OVER POWER]

[800% OVER POWER]

[900% OVER POWER]

파워제어플러그를 뽑아내자 오바 수치가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맹수가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라 그녀 자신이 위험했다. 장갑의 급격한 온도 상승으로 전신의 살갗이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심하게 뜨거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널 죽여버릴테다아아아아아!”

놀라운 광경이었다.

미라는 기어코 사탄의 한쪽 발목을 들었다.

녀석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그대로 방망이를 휘두르듯 뒤쪽으로 내던졌다.

휘익-

쿠웅~!

던지는 힘이 부족했던 까닭에 그리 멀리 가서 떨어지진 않았지만 지반이 심하게 흔들리며 엄청난 먼지가 작렬했다.

“세상에!”

“저럴 수가! 말도 안돼!”

“미치겠군!”

지켜보던 팀원들이 모두 기막히다는 눈빛으로 탄성을 자아냈다.

사이즈에 비해 몇배나 신장이 큰 사탄을 내던지다니, 명백히 반칙이었다. 비록 맹수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강미라야말로 엄청난 능력자였다.

“아하하, 아하, 아하하하하!”

미라는 통쾌한 기분에 젖어 미친듯이 웃어댔다.

온몸에 입은 화상도 잊은 채 파안대소 했다.

“자, 자자자! 어디부터 잘라내줄까!”

미라가 엎어진 사탄을 향해 통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뻗었다.

철컹!

길이 1.6m의 칼이 뻗어나왔다. 곧바로 고주파가 칼날에 덧씌여 흐르면서 광선검처럼 하얗게 빛이났다.

그것을 들고 사탄의 골반쪽으로 냅다 뛰어올랐다.

꼬리뼈 부근에 푸욱 찔러넣고, 그대로 등을 지나 목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미라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바싹 그 뒤를 따랐다.

“히히히, 하하하!”

칼이 사탄의 피부를 가르며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등에서 흘러내린 대량의 피가 흙바닥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의 꼬리부분에서부터 목까지 일직선으로 피부가 찢겨졌다.

미라는 사탄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자신이 해놓은 역작을 감상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하아, 하아... 어떠냐... 어떠냐... 어떠냐고!”

온몸이 땀에 젖어 슈트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본래 슈트는 땀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만 미라의 슈트는 맹수의 고열에 의해 제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전투 종료. 완전히 해가 졌습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은 채 서 있는 가운데, 무전기에서는 지원조 누군가의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탄은 밤이 되면 움직임을 멈추고 숙면을 취한다. 이대로라면 사실상 악어팀의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끝... 났어?”

“설마?”

“벌써?”

사람들은 그 악명 높던 사탄이 허무하게 쓰러졌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사탄은 쓰러져 꼼짝도 안했다.

“휴, 다행이구만.”

성일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사탄이 죽든 안죽든 어쨌든 달은 떴으니까 다행이야.”

세상은 어둠이 짙게 깔리고 보름달이 떠올랐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밤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시원스레 식혀주었다.

그러다 문득 우주가 떠올랐다.

쓰러진 사탄한테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아차차! 대장!”

그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도로 집어 넣고 냅다 일어났다.

우주를 향해 뒤뚱뒤뚱 뛰어갔다.

그리고 그때, 사탄의 후두부를 고주파블레이드로 찍어내리려던 강미라가 불쑥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 새끼.”

사탄의 후두부에 발을 딛고 서있는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직 살아있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사탄의 등부분이 흐물흐물 거리며 찢어진 피부가 쭈욱 늘어지고 서로 맞붙더니, 상처가 단숨에 봉합되었다.

사탄은 이어 두 팔을 뻗어 거대한 상체를 지탱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크윽!”

미라는 빙판에 서있는 것처럼 중심을 못 잡고 미끄러지며 결국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참나, 이럴수가...”

성일은 고개만 뒤돌아 보며 말이 안나왔다.

눈앞에서 보름달을 등진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사탄의 모습에 눈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6시 10분이잖아! 밤이라구! 밤이란 말이야! 대체 어찌된거냐구! 젠장할!”

누군가 절망과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을 내질렀다.

최후의 순간에 숨조차 쉴 수 있을지, 일말의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다. 현장에 있던 팀원들은 일제히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에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나큰 좌절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깨우는 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려왔다.

[가만히 넋놓고 있지만 말고 공격조는 모두 퇴각하십시오! 애초에 팀장님이 지시한대로 방어조만 남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란 말입니다!]

지원조원이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무전기에 대고 호통을 쳤다. 이렇다할 대응 방법이 없었으니 그저 우주가 정한 메뉴얼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에 덩달아 성일도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내 보기에 아무래도 해가진지 얼마 안되서 아직 여력이 남아있는 것 같네! 내 꽉 붙들고 있을테니 안심하고 얼른 퇴각해주게나!”

하지만 퇴각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사탄은 이윽고 침이 뚝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 주둥이를 쩌억 하며 크게 벌렸다.

“저, 저게 뭐지?”

사탄의 온몸이 물렁물렁 뒤죽박죽 크게 요동쳤고, 두 팔과 두 다리, 가슴, 머리부분이, 안에 큰알이라도 박힌 것처럼 올록볼록하게 튀어 나왔다.

그 다음 목구멍을 통해 차례차례 주둥이로 밖으로 하나씩 튀어나왔다.

“쿠웨엑, 쿠엑!”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2m 크기의 거대한 알을 모두 토해낸 사탄은 빈 껍데기만 남았다. 사지의 근육과 오장육부가 전부 사라졌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것처럼 가죽만 남은 녀석은, 축축하게 젖은 피부가 팔랑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녀석은 새 생명을 낳고 그대로 사라진거나 다름 없었다.

“아...... 아...... 뭐야 이게...... 뭐야......”

악어팀이 끔찍하고도 기괴한 향연에서 퍼뜩 깨어났을 때는, 여섯 개의 알이 모두 부화했을때였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들에게 새로운 공포를 실어왔다.

후방에 떨어져 있는데다가 카메라에 노이즈가 심하게 잡히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는지, 지원조가 급한 무전을 날리고 있었다.

[악어3으로 부터! 코끼리급의 개체수가 급격히 늘었다! 어찌된 일인지 상황을 설명해달라!]

성일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형 사탄이, 무려 여섯 마리나 있다.”

소형 사탄은 맹수보다 조금 더 큰 크기를 자랑했으며 여섯 마리는 일제히 제일 선두에 서있던 성일을 둘러싸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제 누가 죽는다해도 당연한 결과였다.

여섯 마리나 되는 사탄을 어찌 감히 막을 수 있으랴. 방어조가 있으나마나 소용이 없었다.

성일은 공포에 포위되고 말았다. 그는 완전히 무력하기만 했기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니, 이성이 끊어졌다는 말이 맞다. 도망가야한다는 생각은 어림없었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돼버려 아예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한 녀석이 성일을 향해 길다랗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팔을 들어올렸다. 보름달을 뒤로한 다섯개의 손톱 그림자가 성일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때였다.

지잉, 지잉!

사탄의 손이 순식간에 붉은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터져버렸다.

“이 쓰레기 자식들아! 나랑 노는게 더 재밌다구!”

뒤쪽에서 미라가 쏜 빔이 사탄의 팔을 날려버린 것이다.

“아하하! 아하하하하!”

그녀는 달밤에 크게 웃었다. 체형이 작아지니 그만큼 이점도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와중에 그녀의 웨어러블 글래스에는 ‘정상작동율 30%’ 라는 문구와 함께 조속히 퇴각을 바란다는 경고 메세지가 수차례 띄워지고 있었다.

“안가. 큭큭......”

우주도 죽은 마당에 집에 가봤자 특별히 할일도 없었다. 그가 세상에 없는데 그의 레지스트 쉴드 활약상을 담은 동영상의 그 다음편이 나올 리가 없지.

보나마나 17편이 중도완결일 것이다. 1편부터 17편까지야 수도 없이 돌려봤고 지겹도록 보고 또 봤다.

그러니 이제 여기서 싸우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리 오라구! 이 쓰레기놈들!”

사탄 여섯 마리는 성일을 놔두고 그녀를 향해 동시에 움직였다.

“큭큭큭, 크크크큭......”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그 시각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연구원들은 비상이 걸렸다.

올해 6월에 이어 두번째로 세이비어가 유난히 강력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에 상황실 직원들은 여기저기 바쁘게 전화를 걸었다.

“예, 여기 한국항공우주연구소입니다. 제네틱스 경영운영본부장 한소라 씨 되십니까? 네, 네. 일전에 업무협약을 맺은대로 긴급히 말씀드릴게있어 직통으로 전화드렸습니다.”

오늘 당직 책임자는 다른쪽에서 신라그룹 이선희 회장과 통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선희 회장님. 한국항공우주연구소 김일만 수석연구원입니다. 네. 세이비어와 관련된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나중에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직원들과의 통화가 끝난 후, 소라와 선주는 각자의 집무실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우주 씨에게 무슨일이 생긴 것일까......?”

“제네틱스의 악어팀이 사탄을 잡아냈을지도......!”

두 사람은 생각이 제각각 달랐다.

소라는 근심을 감추지 못하였고, 이선주는 분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

“여긴 도대체 어디지...?”

우주는 온통 하얀 세상속을 걷고 있었다.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몽롱한 세상속은 왠지 편안해서 혹시 모를 기대감을 안겨다 주는 것 같았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무얼 하다 왔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평온한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무심코 이유를 발견했다.

얼마 안가 만난 유채꽃밭에는 왠 소녀가 꽃들을 돌보고 있었다.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

그녀가 뒤돌아 보았다.

앳되보이는 소녀는 소리없이 방긋 웃어보였다.

요즘 시대 복장을 차려입어서 그런지 왠지 낯설지만 그래도 익숙한 얼굴.

“너 막내니?”

“응, 오라버니.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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