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99화 (99/285)

99화

***

저녁에는 부산시장의 주최로 파티가 있었다.

부산역 근처의 플렉스호텔에서 열린 파티였다. 피아노 삼중주가 있고, 제법 맛있는 요리와 술이 나왔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악어팀원들은 서로 어울려 잡담을 즐기거나 부산 기업쪽에서 나온 임원들과 안면을 트기도 했다.

범룡스님은 이런 파티가 싫다며 시장님 연설이 끝나자마자 호텔방으로 올라간지 오래였다.

그리고 팀원들 더러는, 언제 서울에서 내려온 것인지 부산지역 출신 남녀 연예인도 얼굴을 비추었는데 그들과 함께 짝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했다.

“한서방, 벌써 들어가는거요?”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야. 이만 가봐야 겠네. 죽겠어. 딸꾹!”

턱시도를 차려 입은 성일이 잔뜩 취해있었다.

옆에는 사극 드라마에 출연 중인 한 중견 여배우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그와 팔짱을 끼며 부축해주고 있었다.

우주의 눈에 그녀의 얼굴이 낯이 익다. 40이 넘었음에도 한 미모했기에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애 딸린 이혼녀였다.

“즐겁게 마시다 가세요 우주 씨.”

“고맙소. 한서방을 방까지 잘 부탁드리오."

“어머, 걱정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호호호.”

우주는 비틀거리는 성일을 돌아봤다.

“오늘 고생하셨소. 푹 쉬고 내일 함께 서울로 올라갑시다.”

“그러자구. 많이 즐기고 올라가게나.”

성일은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우주는 적당히 구석 쪽을 찾아 한가롭게 술이나 마시면서 음악을 들었다. 파티 내내 단짝처럼 붙어다니던 시장이 조금 전 집으로 돌아가준 덕택에 간신히 여유가 찾아왔다.

평범한 이야기라면 몰라도 부산시 사업이라든지 중소기업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바람에 그만큼 지루한 설교도 없었다. 그건 어느 도시를 가든 마찬가지였다.

“방에 가서 쉬고 싶은데, 팀원들이 남아 있으니 더 기다려야 할것 같군. 챙겨줘야 하니 말이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티는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사람 수가 줄은 것도 확연히 눈에 띠었다. 그리고 저쪽에 멀리 예쁘장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하나에게는 키도 훤칠한 젊은 남자 배우가 붙어있었다. 요즘 한창 몸짱으로 소문난 그는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이름을 알리는 신인이었다.

그가 무슨 재미난 이야기라도 해주는 것인지, 하나는 입을 가리며 쉴새없이 터지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주는 그 광경을 보며 왠지 안심이 되고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이 남자 저 남자 많이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가 해준 말이 맞다면 하나는 자신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솔직한 심정으로 하나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괜한 상처를 주기가 싫었다.

“승자의 여유입니까?”

홀로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찬우가 술잔을 들고 그의 자리를 찾아왔다.

그는 눈길을 끌 만큼의 미남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인상이 좋은 남자였다. 착실하고 성실해보인달까. 오늘밤 그가 입은 턱시도는 제법 잘어울렸다.

“많이 마셨소?”

찬우는 양볼이 빨갰으며 그 눈매가 심상치 않았다. 우주는 눈빛만 마주쳤을 뿐인데 그 이유를 알것 같았다.

우주는 농담처럼 말했다.

“하나 낭자는 저쪽에 있소이다. 누가 뺏기 전에 얼른 가보는게 좋겠소.”

“틀렸습니다.”

“틀리다니?”

“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대장님입니다.”

“......”

우주는 말을 멈췄다.

“하나한테 저 딴놈이 찝적대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계실겁니까?”

성이 난 듯 해보이는 찬우의 말에 우주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찬우 도령. 소생은 하나 낭자에게 관심이 없소이다. 그러니 소생을 연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단 말이오.”

순간 찬우의 표정이 허를 찔린 것처럼 잠시 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원래의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알고 계셨습니까?”

“뭐를 말이오. 찬우 도령이 하나 낭자를 좋아하는 거?”

“예.”

우주는 타인의 애정사에 얽히는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팀을 위해서 한번쯤 풀어야할 문제였다. 적절한 시기에 그가 찾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지금 보니까 알겠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성난 얼굴로 소생 앞에 서 있을수 있겠소?”

“......”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찬우는 이 침묵의 시간동안 생각을 곰곰이 정리하는 것 같았다. 어떤 생각을 정리하느냐면, 우주에게 그간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함께 고민을 해달라고 요청하느냐, 아니면 그를 경계하며 계속 연적으로 두느냐다.

“대장님, 크흑......!”

찬우는 마침내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우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술에 취해 그런지 감정이 많이 복받친 것 같았다.

“제가 그동안 하나를 많이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쟤는 왜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까요? 매일 대장님만 좋다면서 따라다니고...... 정말 짜증나 죽겠어요.”

우주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울지마시오. 소생이야 짝사랑을 해본적이 없지만,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여자 없다고 하잖소.”

“그런 말은 옛날에만 통했지 요즘에는 법이 바껴서 그랬다가는 경찰에 스토커로 붙잡혀가요. 흑, 젠장......!”

최근 경찰청이 알린 스토킹 처벌 기준에 따르면, 상대방이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는데도 1~2차례 면회·교제를 요구하는 구애 행위는 처벌하지 않으나, 3차례 같은 행위가 반복되거나 2차례라도 상대방에게 공포 / 불안감을 준 경우에는 경범죄 처벌법이 적용되어 스토킹으로 취급받는다.

“고백은 해봤소?”

“아직 한 번도...”

“음.”

우주는 함께 고민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 낭자 마음이야 소생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힘내보라는 말 밖에 못하겠소.”

“뭐 저도 대장님께 도움은 안바랍니다. 그냥 하나에 관해서 이렇게 말이라도 나눌 수 있어 족할 뿐이고. 크흑.”

무력감에 고개를 푹 숙였던 찬우가 이내 고개를 처들었다.

“근데. 전에 하나가 그러던데 대장님께서 하나를 구해준적이 있다구 하던데 맞습니까?”

“맞긴 하오.”

“그때 무슨일이 있었죠?”

“그거 말이오? 그거라면.”

우주는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놓았다. 당시 하나가 성폭행을 당할뻔 했다는 부분만 쏙 제외하고,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 사실만을 그에게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찬우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허탈감만 커졌다.

“그랬군요. 젠장...... 어쩐지.”

찬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하나가 당연히 대장님을 좋아할만도 하겠네요.”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얼음이 아주 녹아버려 위스키 맛은 거의없었다.

“제가 그때 거기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보오. 그녀는 아직 혼자이니 힘내보시오. 듣기로는 하나 낭자는 연예인 콘서트장에 가는 걸 좋아한다더이다.”

“그런거야 저도 알죠. 하나가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취미, 싫어하는 수라, 싫어하는 남자머리, 싫어하는 옷차림 그런거야 이미 다 아는데.”

찬우가 끄응 하고 작은 신음을 뱉었다.

“뭐든 저랑 함께 할 생각은 없더군요......”

그는 허탈해 보이는 얼굴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리고 코앞의 술잔을 지그시 응시하며 눈을 깜빡 거렸다.

“대장님은 쟤랑 자봤어요......?”

“허허,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런 일은 절대 없었소이다.”

우주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문득 뒤통수가 따가워 뒤를 돌아보니, 하나가 저멀리서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앞의 남자 배우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시선은 우주에게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우주에게 찬우가 붙어있는 것이 신경쓰인 것 같다.

하나가 알게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짓자, 우주도 그에 화답하면서 이내 시선을 돌렸다.

옆에는 절망에 빠진 남자가 있다. 찬우를 바라보니 그의 머리 위에 마치 먹구름이 하나 떠있고 비가 억수로 퍼붓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는 우주도 왠지 덩달아 우울해지는 심정이다.

분위기를 환기시킬겸 화제를 돌렸다.

“찬우 도령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 없소?”

찬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상체를 세우며 술잔을 들었다.

“없긴요. 있죠.”

“누구요?”

“박현아.”

“오, 박현아.”

“왜요. 알아요? 아, 대장님이랑 같이 CF찍었지.”

“통화 한번 해보겠소?”

우주는 아주 잘됐다 싶었다. 박현아와 통화시켜주면 그가 기운 좀 차릴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찬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통화요?”

우주가 끄덕.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장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해봅시다. 바쁘지 않으면 받을거요.”

“진짜 전화하는 거에요? 번호 알아요?”

“물론이오. 한때 자주 어울리다 보니 결코 친분이 적지 않소.”

우주는 자신있는 미소를 지었다.

찬우는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박현아라면 걸그룹 중에서 가장 잘나가는 러브걸스의 리더이자 뭇남성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미색에 글래머러스한 몸매까지 소유한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 아이돌이었다.

“만약 하나 낭자와 현아 중에 고르라면 누굴 고르겠소?”

우주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짓궂게 물었다.

상당히 긴장한 듯한 찬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야 현아 씨를......”

쿡쿡.

우주가 웃었다.

“하나 낭자보다 좋단 말이오?”

“그야 당연히 키도 크고 몸매도 더 좋으니... 사실 하나는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섹시미가 없어요.”

“이 말 그대로 하나 낭자에게 전해드리리다.”

“아앗, 안됩니다!”

찬우가 조금 언성을 높이자 그때 우주가 정색하며 갑자기 쉿!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여보세요?]

“소생 신우주요.”

[아, 우주! 야아 축하해!]

“고맙소.”

[근데 너 사탄 어떻게 잡은거야? 정말 대단하더라!]

“팀원들이 잘해줬을 뿐이오. 그런데 지금 바쁘오?”

수화기 너머에서는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발랄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클럽에 있는지 바글바글한 소리와 함께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지금? 하나도 안바쁜데, 혹시 무슨일 있어? 조현상 감독한테 CF찍자고 연락왔니?]

우주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박찬우를 힐끔 보았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우며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깊게 엿듣고 있었다. 행여나 한대 툭 치기라도 하면 어우! 하면서 깜짝 놀랄 것 같았다.

“아쉽게도 아직 연락이 안왔소이다. 그나저나 소생이 아는 분과 잠깐 통화가능하오?”

[통화? 누구랑?]

“우리 팀원인데 낭자의 팬이라길래, 소생이 박현아를 아주 잘안다고 자랑 좀 했소이다.”

[피, 바보. 어쩐지 니가 왠일이냐 했다. 그간 전화 한통 없었으면서 참 염치도 좋아. 근데 이거 혹시 몰카나 장난 같은거 아니야? 나 놀래켜 줄려고? 설마 이 근처에 와있니?]

“하하. 소생은 부산에 있소. 몰카는 뭔지 모르겠고, 이름 석자걸고 장난치는건 아니외다.”

[그래? 그렇담 한번 바꿔봐.]

우주가 급히 휴대폰을 찬우에게 건넸다.

찬우는 긴장한 것처럼 여러 차례 훅훅, 숨을 강하게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주가 힘내라며 양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여,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러브걸스의 박현아 입니다. 이렇게 통화하게 되서 정말로 반가워요.]

현아는 여우였다. 팬과 전화를 한다고 하니 그새 목소리가 귀엽고 예쁘게 바뀌었다. 하지만 그런 가식적인 말투에도 찬우의 심장은 벌렁벌렁 날뛰었다.

“패, 팬입니다! 앨범 다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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