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제네틱스 본사 긴급 대책 상황실.
거대한 스크린 앞. 어림 잡아도 30여명은 되는 직원들이 제각각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라와 료코가 안으로 들어서자 지휘석 옆에는 작전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본부장님은 퇴근했나요?”
“방금 전까지 계시다가 이제 막 들어가셨습니다.”
소라는 지휘석에 앉으며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날 새고 오후까지 있느라 무척 피곤하셨겠군요. 그래 뭐 좀 알아냈나요?”
작전차장은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이렇다할 정보는 없습니다.”
“경찰측도?”
“경찰 측에 따르면 전국 각지에서 강미라를 목격했다는 신고가 오전에만 1000여건이 넘었다고 합니다만, 확인해본 결과 전부 장난 전화 아니면 오인 신고였다고 합니다.”
“국정원은 뭐라던가요?”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중인듯 한데 아쉽게도 우리와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단독으로 움직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음... 꼴에 정보기관이라고 번거롭게 구는군.”
소라는 귀뒤를 살살 긁으며 이어 말했다.
“뭐, 찾으면 알려주겠죠.”
정면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의 한쪽 구석에는 미라의 얼굴 사진과 함께 그녀의 신상정보와 이력사항이 낱낱이 공개되고 있었다.
소라는 그 쪽에 잠시 시선을 두다가 작전차장을 돌아봤다.
“강미라를 찾게되면 그땐 우리회사가 만든 맹수를 여기 이 분에게 착용시키세요.”
소라는 료코를 가리켰다.
작전차장이 말참견을 했다.
그는 소라와 함께온 료코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한편, 소라가 갑자기 외부 사람에게 맹수를 착용하라는 것을 보고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는 뼛속까지 제네틱스 맨이다. 제네틱스의 자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맹수를 아무나 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계신 여성분께서 곧바로 맹수를 사용하는건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사용법을 익히는데만 최소 이주일은 걸릴 것입니다.”
“아니요 그건 괜찮습니다. 파워드 슈트라는게 무슨 거대한 로봇에 탑승해서 조종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몸에 걸치면 그만이니까요. 무기와 방패 사용법만 알면 간단할겁니다.”
소라는 료코를 바라보며 일본어로 말했다.
“(맹수 아시죠? 어젯밤 강미라가 입었던 거. 입고 싸울 수 있겠어요?)”
료코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할 수 없다.)”
그녀의 간결한 대답에 소라는 못마땅한듯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할 수 없어도 해야죠. 강미라도 맹수를 소유하고 있는 이상 잡으려면 맹수가 필수입니다. 필수.)”
“(무기는 그저 이 몸과 세키가하라 한 자루면 충분하다.)”
“(그래서 강미라한테 당했잖아요.)”
소라는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료코는 금세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계집이 들고 있던 방패의 위력을 간과했을뿐 당한게 아니다. 다음에 마주칠땐...!)”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요?)”
소라가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료코는 잠시 대답을 주저하더니 눈에 힘을 주며 입술을 열었다.
“(없지만,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말뿐이면서.)”
소라는 빤히 료코를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정면의 스크린으로 향했다.
“고집도 정도껏 부려야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머릿속에서 악어팀원을 떠올렸다. 팀원들중 정예 두 사람을 뽑아 맹수를 입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료코를 억지로 설득하기보다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놔둘 생각이었다. 지금이야 서로 한 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연적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알아서 설치다 죽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으니까.
상황실을 나온 뒤에는 헬기를 타고 인천 송도로 향했다.
어젯밤 료코와 미라가 싸운 장소를 찾았다. 현장은 경찰들과 취재진들로 바글바글했다. 구경나온 일반 시민도 꽤 많았다.
“이대로 보죠.”
소라와 료코, 그리고 유창성을 태운 헬기는 공중에서 멤돌았다.
소라는 망원경으로 현장을 살펴보며 료코에게 말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나요?)”
“(그런 말은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요?)”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있겠느냐?)”
“(아아, 그래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참 나.)”
소라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마주보고 앉아있던 창성을 쳐다봤다.
“산속? 아니면 섬? 아니면 또 뭐가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죠?”
창성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방에 있는 모텔이 아닐까요? 일개 범죄자들이 모텔을 은신처로 자주 쓰더군요.”
“형편없군.”
소라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창성은 머쓱하게 웃어보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그런거 알아서 뭐합니까? 돈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경호일만 잘하면 됐지.’
료코가 불쑥 말을 던졌다.
“(강미라 그 계집은 왜 서방님을 납치한 것이지?)”
소라가 다시 망원경에 눈을대며 대답했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단지 그녀의 과거 행적으로 비춰볼때, 정신병이 도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신병?)”
“(미치다 못해 우주 씨를 희생양으로 삼은거겠죠. 그에게 기대고 싶거나 아니면 죽이고 싶거나. 그 왜 묻지마 살인 같은거 있잖아요. 아무 이유없이 길가던 행인을 칼로 찌르듯이 우연찮게 우주 씨가 걸려들었을지도 모르죠.)”
“(뭣이?)”
순간 료코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가슴이 철렁했다.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지며 더욱 불안해졌다.
저녁에는 우주와 료코의 집에 들렸다.
소라 또한 따라왔다. 료코와 한소라,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오직 신우주를 구해야한다는 전제하에 잘도 붙어 다녔다.
료코는 내일 당장 돌아올지도 모를 서방님을 위해서 밥을 새로 안쳐놓고 반찬거리를 사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우주가 못살던 시대에 자주 먹었다던 돼지국밥 재료와 돼지 껍데기도 사다가 놓았다. 그는 항상 100여년 전을 떠올리면서 그것들을 무척이나 즐겨먹었었다.
“흑흑...”
주방에 있던 료코가 갑자기 눈물을 훔쳤다.
소라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무작정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험난한 고생을 하고 계실 서방님 생각에 구슬프게도 울었다.
“(뭘 울고 그래? 참 나... 정말 참 나 소리만 자꾸 나오게 하네.)”
소라는 팔짱을 낀채 못마땅한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데 여자란 동물이 그렇다. 서로 공감이 되는 그 울음은 어느새 전염이 되어 그녀의 눈동자에도 곧 눈물이 주렁주렁 맺혔다.
“흐흐흑...”
소라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소매로 연신 눈물을 닦아댔다.
그 모습을 본 료코가 의아했는지 훌쩍거리며 물었다.
“(넌 왜 울지?)”
“(니가 우니까 나도 울음이 나오잖아!)”
료코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돌연 말했다.
“(서방님은 널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그 분을 위해 울 필요는 없다.)”
그 말에 소라는 울면서 뜻모를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를테면 승자의 미소.
“(넌 몰랐겠지만 우린 벌써 했어.)”
“(뭐를 말이지?)”
“(섹스. 앞으로 결혼도 할거야. 그러니 넌 한낱 가정부에 불과해. 우주 씨는 항상 나만 생각하니깐. 날 좋아한다고도 말해줬어.)”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료코는 가슴이 아파졌다.
이내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아기를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이 자리서 그녀를 죽이고 우주에 대한 생각을 영원히 못하게 하고도 싶었다.
질투다.
하지만 소라는 여전히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하고, 행복에 겨운 듯한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남자와 사랑에 빠진건 처음이야. 그가 없으면 나도 힘들어.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기쁨도 많이 줬거든. 그가 있어서 회사를 출근할 수 있었고, 그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아침 일찍 회사에 간적도 많아. 회사 끝나고 집에 가는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야. 회사에서 보는게 전부여서 아쉬웠지만, 우리 둘다 유명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 당분간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지껏 버티고 있었어.)”
료코는 일부러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그리고 손을 씻으며 말했다.
“(흥, 혼자만의 착각에 빠지며 살았었군.)”
소라가 말한 이야기를 억지로라도 비웃어 주고 싶었다. 자신이 임신을 했다고도 밝히고 싶었지만 우주가 무서워서 그 말은 못하겠다. 답답하기만 했다.
“(사내들은 본래 여자한테 다 그러지. 환심을 사기 위해 어느 여자한테나 호의를 보이는 거니까 착각하지 말거라.)”
“(우리 말야. 섹스도 했다니까?)”
그 순간 료코는 울컥. 소라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싶었다. 행주에 손을 닦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건 나도 했으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거라. 네가 한 번했으면 이 몸은 한 열 댓번은 했느니라.)”
“뭐...?”
소라는 한순간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휘청거리듯 소파로 가서 앉으며 그저 실실 웃어보였다.
“(하하... 한 집에 성인남녀가 같이 살고 있으면 혹시나 그러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역시나 그랬네. 했네, 했어. 하긴 그래. 젊은 여자와 동거하는 남자가 안하는게 더 이상하지.)”
료코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괜스레 자기가 꺼낸 말이 유치한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화가 안난다는게냐?)”
“음...”
소라는 잠시 뜸을 들이다 바닥을 보며 말했다.
“(내가 화내길 바래? 난 보통 여자가 아니야. 누구나 생각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지. 날 데리고 살려면 그 남자는 기가 세야 해. 보통 남자는 날 감당할 수가 없거든. 만약 날 갖고 싶다면 학력이나 재력, 집안 수준 등 모든면에서 나보다 우위에 있어야 할거야. 그렇지 않으면 심한 열등감을 느낄테니까 말이지. 그런 면에서 우주 씨는 최고의 남자야. 날 감당할 수 있는 포부를 갖고 있는데다가, 나 또한 그의 사회적 지위와 능력을 이용할 수가 있거든.
그리고 내 최종 목표는 Gaegle이나 앱플 같은 글로벌 대기업의 회장직이야. 더 나아가서 여성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앞으로 내가 더 크게 되려면 우주 씨의 바람도 눈 감아줄 수 있는 대범함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순전히 서방님을 이용해서 네 야망을 이루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럴지도 모르지.)”
료코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다시 말했다.
“(난 일생을 서방님께 바치기로 작정했다. 넌 할 수 있겠느냐? 정말로 이용만 할 생각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