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 순간. 문득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 무언가 내던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열렸다.
집안으로 기어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셔서,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는 눈을 찡그렸다.
“넌 누구냐? 미국놈이냐?”
안으로 들어온 자는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눈이 적응되자 눈 앞에는 놀랍게도 익숙한 여성이 서 있었다.
우주는 그녀를 보자마자 무척이나 밝은 미소를 지었다.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벌써 구해주러 온것이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반갑게 외쳤다.
“미라 낭자!”
미라는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그렇소! 얼른 이것 좀 풀어주시오!”
우주는 답답한 손목을 내밀었다.
미라는 말했다.
“그건 안돼요.”
“안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미안해요. 수갑은 풀어줄 수가 없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우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느긋한 얼굴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풀어줄 수가 없다는 거요?”
미라는 씨익 웃었다.
“여기가 우리의 집이니까요.”
“......?”
우주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며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군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집이라니...”
다시금 시선을 들어 미라를 쳐다봤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보니 그녀의 복장부터가 남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무장은 물론이거니와 임무라면 당연히 슈트를 입고있을 터인데 뜻밖에도 평상복차림이었다.
회색 긴팔 블라우스에 주름달린 긴 녹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수수해보였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을 구하러 왔다면 이런 복장을 입을 리가 없을텐데 왜?
‘여긴 분명 적진 일텐데 저 여유로운 태도와 집에서나 입을 법한 간편한 복장은 도대체...?’
저래서는 마치 어디 마실 나가는 처자같지 않은가!
지금은 필시 긴박한 상황일텐데!
“낭자?”
“네?”
“그 옷차림은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여긴 양놈들의 아지트가 아니오?”
그 말에 미라가 킥킥 웃는다.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문을 닫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고, 그것이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코앞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웠다.
“아까 말했듯이 여긴 우리 둘이 사는 집이에요.”
우주의 두 눈이 커졌다.
“둘이 살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미라의 짐승같은 눈빛은 미소를 지어도 남아있다.
몸이 구속된 우주는 덜컥 겁부터 났다. 상황파악이 안되지만 느낌상 왠지 위험한 기분이다.
“여긴, 우상님과 제가 죽을때까지 살집이에요. 앞으로 하나씩 예쁘게 꾸며봐요. 분명 즐거울거에요.”
그녀의 무엇이 달라졌을까.
왠지 모를 이질감.
미라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자신을 위협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에는 그의 생명을 위협할만한 그 어떠한 무기도 쥐어져 있지 않다. 복장 역시 치마를 하늘거리는 꽃처녀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그는 눈앞의 미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저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이 보였다. 뱀처럼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신화속의 메두사 같다. 수백마리의 뱀들은 일제히 우주를 노려보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주 맛난 먹이감을 기대하듯이 말이다.
‘기분탓이다. 진정해...’
우주는 목전의 위협을 두고 될수 있는 한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그녀에게 차분히 물었다.
“양놈들은 어찌 됐소?”
“그놈들은...”
미라의 손이 긴장해있는 우주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빛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 끝난일이라 고하고 있었다.
“이제 없으니 안심하세요. 여긴 우리 둘 뿐인 에덴동산이니까요.”
“에덴 동산?”
미라는 그의 입술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누르고 미소지었다.
“우리의 지상낙원을 그렇게 부르는거에요.”
“지상낙원이라니... 낭자가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소. 쉽게 좀 말해보시오.”
우주는 무척이나 답답한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 그를 혼란스럽게했지만, 자신의 입술을 짓궂게 건드는 그녀의 손가락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그는 짐짓 애원하는 눈빛으로 미라를 바라봤다.
“우선 수갑이나 먼저 풀어주고 속시원하게 이야기 합시다. 갑갑하오.”
“수갑만은 안돼요.”
“?”
그녀의 대답에 우주는 순간 할말을 잃은 눈치였다.
“......왜 안된다는 거요?”
“분명 제게서 도망칠테니까요. 그것만은 절대로 안돼요.”
그녀의 머릿속에서 순간 뭐가 떠올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눈동자에서 불안이 깃들었다 금세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주는 그 모습을 보며 그야말로 난해했다.
머릿속의 혼란만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이 낭자는 대체 무슨 속셈이지? 가만. 혹시 날 붙잡은게...?“
머릿속에 담긴 의문은 그의 몸짓에 녹아들었다.
몸에서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얀 셔츠와 정장바지를 입은 그는, 집안의 텁텁한 공기속에 마치 한여름처럼 무더운 기분을 느꼈다.
몸 전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안도망칠테니 어서 풀어주시오.”
“안믿어요.”
즉답으로 돌아왔다.
그 대답으로 인해 자신을 구속한 것이 미라가 한짓이라 대충 감을 잡았고, 한순간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애써 참아가며 뇌에 산소를 공급했다.
한 박자 쉬고나서 물었다.
그런데 눈빛과 목소리는 뜻대로 되질 않았다. 날카롭고 싸늘했다.
“왜 날 구속한거요?”
“우상님을 독차지 하고 싶었어요.”
“미쳤소?”
“미쳤다면 미쳤죠.”
“여긴 대체 어디오? 송도요?”
“송도가 아니고 섬이에요.”
“섬이라고?”
미라는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 우주와 눈빛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와 손길은 오로지 그의 셔츠에만 닿아있었다. 목부터 배꼽아래까지,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말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꽤나 익숙한 목소리라서 그런지 더욱 섬짓했다.
“제가 천천히 다 말해줄테니 화내지 말아요.”
“시끄럽고 당장 풀어주시오!”
“......!”
우주가 버럭 소리지르자 미라는 그제야 눈빛을 마주쳤다.
다소 놀란 눈치였다.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 전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이게 다 우상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구요.”
우주의 흔들림 없는 눈빛은 그녀의 눈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불쑥 한가지 기억이 스쳤다. 그간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라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나무랐던 일. 아마 팀내에서 가장 꾸지람을 했던 팀원을 고르라면 당연 그녀였다.
‘혹시, 직장생활 중에 꾸짖었다고 나한테 복수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사뭇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간 화냈던건 미안하오 낭자. 팀을 잘꾸려나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소생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고, 언젠가 둘이서 회포를 푸는 술자리도 갖고 싶었소이다. 그런데 그게 좀 늦었던 것 같소. 하지만 이왕 늦은 김에 이 자리를 빌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봅시다. 알고보면 소생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외다.
낭자는 우리팀에서 가장 소중한 재원이오. 아무리 실수가 많다해도 가능한 함께하고 싶고, 지금 수갑만 풀어주면 그 어떤 잘못된 행동을 했더라도 다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겠소. 행여 누가 낭자의 행동을 비난한다면 이 몸을 던져 다 막아주겠소. 그러니 부디 이 수갑을 풀어주고 우선 대화를 해봅시다. 손해 보는 일은 없을거요.”
진심이 담긴 목소리.
우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 앞의 여자, 강미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자존심을 내던진 그다. 비위를 맞추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상황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 그녀니까.
좌우지간 진심이 통했을까?
“우상님!”
미라의 눈에 감동이 서려 있었다. 눈빛이 아주 반짝거렸다. 그녀는 우주를 냅다 끌어안았다.
“저를 생각해 주는 건 역시 우상님 뿐이에요!”
미라가 환희에 가득찬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절 지켜준다고 말해주니 너무 기뻐요! 이럴줄 알았어요! 우상님도 사실 절 사랑했던거죠? 그렇죠? 그렇다고 말해줘요. 빨리! 이미 알아 버렸으니까 창피해 할 필요는 없어요!”
“내 말을 대체 어찌 알아들은 것인지......”
우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게 대체 무슨 반응인가 싶어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미, 미라 낭자. 이게 아니고, 그 잠깐만, 잠깐만 소생의 말을 다시 들어주시오!”
그러나 틀렸다.
그녀는 전혀 들어주질 않았고, 우주의 뺨에 수차례 뽀뽀만 계속했다.
============================ 작품 후기 ============================
최근 제게 기쁜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믄 출판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전부터 출판 제의는 두 차례 있었습니다만, 그때마다 소설 완결짓기 전까지 출판할 생각이 없다는 말씀을 매번 드리며 한사코 거절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출판 제의는 설레일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름 아니라 조아라에서 제의가 들어 왔거든요.
전 조아라를 좋아합니다. 제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셔서 조아라 관계자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려요.
그리고 조아라에서 출판 제의가 들어오면 노블 연재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제게 힘을 실어 주시고 쿠폰을 주셨던 독자 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되니까 무척이나 기뻤어요.